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구원받은 성도에게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기도 하고 아버지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어떤 면모가 가장 부각되어 보이는가?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한다. “넌 이제부터 내 것이니, 닥치고 찌그러져서 내 말만 듣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안 그랬다간 뒈지는 줄 알아라”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그저 이런 분인 줄로 알고 하나님에 대해서 쓴 뿌리를 품었던 사람이 바로 창세기의 이브, 그리고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다. “주인이여, 당신은 엄한 사람이라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내가 알았으므로” (마 25:24)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두렵고 엄격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자신과 대등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사랑하신다.
우리를 자상하게 대하신다. 시스템 구조적으로 안 할 수가 없어서, 의무적으로, 안 하면 벌 받을까봐 무서워서 행하는 게 아니라,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자발적으로 성경대로 살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심히 담대하여 네게 합당한 일을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 인해 네게 간청하노라. (몬 8-9a)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으며 또한 내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네가 행할 줄을 아노라. (몬 21) 빌레몬서를 읽어보면 바울의 필체에서 하나님의 저런 성품을 한결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성품을 잘 이용하여 ‘효율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뻘짓을 안 하고 높은 기도 응답률을 달성하면, 정말 하나님도 기쁘고 나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석이조이다. “아브람의 잃어버린 13년”(창 16:16-17:1) 같은 일이 우리에겐 없어야 된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에 눈이 멀어서 살아야 한다. 그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겨냥해야 하는 대상이며, 욕심이나 교만이 절대 아니다. “저 형제는 어떻게 해서 저런 상황에서 감사가 나올 수 있을까? 어째서 기도 응답률이 높을까? 저 사람은 평소에 성경 읽기와 기도 생활을 어떻게 진행할까?” 이런 것을 벤치마킹하고 경쟁하는 것은 아무리 지나쳐도 나쁘지 않으며, 모두에게 유익이 될 뿐이다. 이런 것에 제법 능숙해지고 나면 기도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동족을 멸망시켜 버리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게 됩니다.” (모세. 출 32:11-13)
“내가 한없이 불쌍하고 가련해지면 하나님께서 그 성품상 내게 긍휼을 안 베푸실 수가 없을 것이다” (다윗. 삼하 16:12) “내가 연보를 받아서 기쁜 게 아니라, 너희가 내게 연보를 함으로써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보상이 쌓일 걸 생각하니 기쁘다” (바울. 빌 4:17) 이런 게 바로 수준 높은 기도이다.
특히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놀고(play) 재롱을 부릴 줄 알았고(삼하 6:21), 징계를 받을 때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직접 떨어지길 원했다(삼하 24:14). 흔히 하나님과 친밀했던 인물로 아브라함이나 모세 같은 인물만 거론되지만 사실 다윗도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했는지, 하나님과 마음과 일치하는 자라는 평(행 13:22)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의 외교 테크닉이 능수능란해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담대한 믿음이 동반된 집요한 간구는 물론이고 심지어 엉뚱한 돌발행동으로 인해 하나님을 놀래거나 감격스럽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50명의 의인 조건을 10명으로 줄인 아브라함, 백부장의 믿음의 답변,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모세, 누가복음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천장을 뜯어서 마비병 환자를 예수님 곁으로 내려다놓은 친구들처럼, 성경에서도 그 좋은 예들을 찾을 수 있다.
당연히... 돌발 행동도 평소에 늘 하나님의 교제가 친밀하고 그분의 뜻과 사고방식이 일치가 돼 있는 사람이 해야 먹히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던 부류가 육신적인 기도 제목을 놓고 ‘뗑깡’을 부려 봤자 그런 식으로는 기도 응답은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외교 수완을 생각해 본다. 그의 국내 통치 행적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여러 엇갈린 평가가 존재하며, 공과 과가 공존한다. 하지만 그는 외교 하나는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한 정치가였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6 25 당시, 남북이 분단된 채로 그냥 휴전해 버리고 적당히 전쟁을 끝내려던 강대국에 대항하여 감행한 반공 포로 석방은, 영국의 처칠조차 “저 영감쟁이가 노망이 들었다”고 빈정댔을 정도였다.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한미 연합 수색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미국 대사관이 국군을 믿을 수 없다며 요청을 거부하자, 그는 차를 돌진시켜 주한 미국 대사 사무실에다 꼬라박겠다고 을러댄 끝에 요구사항을 관철시켰다. ( http://www.carlife.net/bbs/board.php?bo_table=information&wr_id=3651 ) 그 외에도 이 사람은 워낙 머리 좋고 고집불통이었던지라, 전해지는 무용담(?)이 수도 없이 많다. 이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마저 이승만 앞에서는 쩔쩔맸으며, 미국 내부에서는 골칫거리인 그를 몰래 축출할 음모마저 나돌았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지금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국력이 약하고 위태롭던 그 시절에도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정말 많은 국익과 외교성과를 얻어 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미국 대통령, 나중엔 맥아더 장군이 아니면 콧방귀도 안 뀌었던 놀라운 콧대의 한국인이다. 40년을 미국에서 독립 운동 하면서도, “우리나라는 독립할 것이고 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사람이다. 미국 시민권 따윈 없어도 된다”고 불편하게 살며 버텼던 사람이다. 갈 5:1을 영적으로 적용하여, 우리 민족이 앞으로 다시는 어느 방면에서는 다른 민족으로부터 속박의 멍에를 메어서는 안 됨을 염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저런 식으로 지낼 수 있을까? 물론 미국이 하나님과 같을 수야 없으며, 무모한 배째라 행동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계산적인 거래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훗날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 사람이다. 천년왕국 때 최하 10개 도시를 다스릴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세상적인 타협 따위는 할 필요 없다”처럼...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전한 영적 귀족 의식(교만이 아닌)도 좋고,
우리가 하나님과 너무나 친밀한 나머지 그분을 믿고서, 세상에서 받은 시험에 대해 가끔은 저렇게 과감한 배짱을 행사하는 것도 신앙생활에서 좋은 추억으로 남을 거라 생각한다. 단, 육신에서 나온 욱하는 행동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이다.
또한 성경은 실제로 신앙생활을 그런 상거래에다 비유하기도 한다. 어떤 일을 벌이기 전에 비용을 따지고 수지가 맞을지 생각을 해야 한다. 사복음서 중에 이런 분위기를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책이 단연 누가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과 머리 중에서 특히 머리를 나의 영적 유익을 위해 최대한 지혜롭게 동원해 보자.
(발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역이용하여 잔머리를 굴렸고, 그 대가로 신약 성경에서까지 두고두고 악인의 대명사로 불리게 됐음도 기억하라)
하나님의 성품과 신앙생활의 본질을 가끔은 이런 방면에서 묵상하는 것도 나의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하고, 능동적이며 다이나믹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거라 생각한다. ^^ * * * *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09:0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keepbible 가족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