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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은사와 표적만을 강조하는 복술(卜術)의 목회자들 조회수 : 12864
    • 작성자 : 허광무
    • 작성일 : 2010년 6월 1일 13시 36분 7초
  • 요즘 많은 교회들이 은사주의 금가루 쓰러트림 방언 병고침...
    거기다 영서까지 또 영서를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성경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또 성경적이지도 않게 생각되는 현상을 너무나 중요하게 여기고 이것들을 경험해야 뭔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성도들을 이끌어 가는 것 같아 많은 회의를 느끼고 거기에 따라갈 수 없는 내 자신을 보고 많이 괴로웠습니다.
    우연히 아래와 같은 글을 보았는데 바른성경을 보았다면 확실한 것을 <신령한 은사>라고 번역한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좀 어렵게 설명한 감이 있어 추가로 흠정역성경을 추가시켜 보았습니다.
    여기 저기서 바른 성경관으로 주장을 펴고있는 많은 목회자를 볼 수 있는데 이런 분들의 주장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 은사주의로 흐른 교회는 거기서 빠져나오기 힘든것 같습니다.
    어제도 어떤 형제들을 만나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은사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이야기 하였더니 그걸 사모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간절히 사모해야 된다고... 그러면서 방언과 영서 이야기를 하는데... 도데체 영서는 뭔지... 뭐 이상한 것을 만드는 천제적인 소질은 어디서 오는건지...
    그래서 영서에 관해 인터넷을 뒤져보았더니 무슨 어린아이 낙서?  아니면 뭔지 모르는 꼬부랑 낙서를 쓰고 해석한다고 하는데...
    참 답답한 마음뿐입니다.
     
     
     
    은사와 표적만을 강조하는 복술(卜術)의 목회자들
    만능의 열쇠인 무적의 축복권(6)
     
    사도 바울이 일생동안 복음사역을 통해 경험하였던 가장 놀라운 사건은 ‘오랜지 베일의 패밀리 크리스천 센터 목사 리치 올리버(Orangeval!!e, Family Christian Center, Pastor Rich Oliver)’를 선두로 한국의 일부 목사들도 이를 답습해 흉내를 내면서 교인들을 대상으로 속임수로 행하고 있는 변화된 금이빨을 보거나 금가루가 날리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罪人)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의인(義人)들이 되는 놀라운 사건들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롬 1:11)

    (롬 1:11, 개정)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롬 1:11, 킹흠정) 내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은 내가 너희에게 어떤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너희를 굳게 세우고자 함이니
     
    하지만 비단 다른 나라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의 일부 은사주의 목사(기존 정통교회 목사들도 일부 포함)들까지도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했던 성경적인 신령한 은사와 표적을 비성경적으로 왜곡, 변질시켜 성경적으로 무지한 교인들 앞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하며,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신비한 기적적 현상으로 각인시키면서 현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금이빨 만들기’나 ‘금가루 날리기’도 그 옛날 사도 바울도 로마 교인들에게 주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신령한 은사 중, 한 가지였다고 거짓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직접 가서 하나님의 능력인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려고 하였지만, 자기의 소원대로 로마를 목적으로 한 전도 여행이 빨리 성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9~15)
     
    (롬 1:9, 킹흠정) 내가 그분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 되시거니와 내가 기도할 때에 언제나 너희에 관하여 끊임없이 말하며 10 어찌하든지 이제라도 마침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탄한 여정을 얻어 너희에게 나아가게 되기를 간구하노라. 11 내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은 내가 너희에게 어떤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너희를 굳게 세우고자 함이니 12 이것은 곧 너희와 나 사이의 공통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와 함께 위로를 받고자 함이라. 13 형제들아, 이제 나는 너희가 이것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도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처럼 어떤 열매를 얻기 위해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이제껏 막혔도다.) 14 나는 그리스인이나 바바리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에게 다 빚진 자니라. 15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분량대로 나는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을 선포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인 로마서에는 그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했던 신령한 은사 즉, 신기한 선물이 반드시 언급이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로마서를 읽어 보면, 로마서 그 어디에도 오늘날의 신비한 기적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금이빨 만들기나, 금가루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사건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언급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했던 신기한 선물이란 바로 오늘날 복술적(卜術的)인 은사주의자의 목사들이 주장하는 신기한 기적적 현상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일평생 동안 경험하였던 가장 놀라운 사건은 변화된 금이빨을 보거나 금가루가 날리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그동안 죄인들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전했던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의인들이 되는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했던 사도 바울까지도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죄악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절망하며 탄식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러한 죄악으로 물들어 있는 자신의 몸에서 어떻게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철저하게 고민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일평생동안 배워왔던 율법도 자기 자신에게 그 어떠한 해답도 주지를 못했으며, 그 어떠한 해결책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밤잠을 설치며 외웠던 율법과 그토록 헌신했던 율법에의 삶은 자신이 죽을 죄인임을 스스로 자책하며 고발하여 왔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그는 이생의 절망 한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뒤늦게나마 십자가의 의(義)를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의 의를 통하여 생명의 하나님과 연합된 자기 자신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기 위해서는 연약한 자기 자신의 죄성을 극복하고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해 대해서는 다시 사는 것임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러한 문제로 고민을 하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통한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육신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의(義)의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1~2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롬 8:3, 킹흠정)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4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죄악 가운데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값없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새 생명 가운데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롬 8:4) 삶의 비밀을 새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로서 그도 자기 자신이 연약하여 율법으로 할 수 없었던 위대한 ‘영화(榮華)로의 변화가 새 생명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육신의 땅에 살고 있는 자신을 죄의 유혹으로부터 건져내어지며, 종국에는 자기 자신의 죽을 몸조차 살려 주실 것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당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로마 교인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주님의 말씀인 새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먹여 그들을 견고케 하고자 했던 신령한 은사, 즉 신기한 선물은 먹어도 다시 배고픔을 느끼는 돌로 만든 떡의 기적이 아니라, 영생의 복음이었으며, 바로 이러한 영생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새 생명의 성령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의 금은보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이라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선물을 받아서 이미 죽어야 할 죄인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이라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선물을 받아서 죽을 죄인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값없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새 생명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러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이 성도들이 사도 바울과 같은 모습을 닮아야 하는 미래의 모습이란, 세상적인 모습과 같은 삶을 꿈꾸어야 하는 미래의 자화상인 카네기나 록펠러, 그리고 에디슨이 아니라, 온전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카네기와 록펠러를 닮기 위해서는 십일조만 철저히 해도 되고, 에디슨을 닮기 위해서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서 창의적인 사고와 마인드를 갖추면 되겠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는 카네기나 록펠러의 십일조 정도가 아니라, 에디슨의 근면한 노력과 집중력 정도가 아니라, 부모와 처자 그리고 소유에 대한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육신적인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7)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그러므로 카네기와 록펠러를 닮기 위한 신앙의 길과 온전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한 신앙의 길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이 육신의 삶 속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대부분 그런 길을 가기를 원하는 카네기와 록펠러를 닮은 신앙의 길과, 온전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한 신앙의 길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카네기와 록펠러를 닮기 위한 신앙의 길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평탄하고 넓은 길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한 온전한 신앙의 길은 누구나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좁고 협착한 길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복술적인 은사주의 목사들은 자기부인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필생의 신앙의 경주(競走)를 소홀히 여기고 회피한 채, 하나님의 신기한 금이빨을 만드는 기적이나, 금가루를 흩날리는 눈속임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오도하여 수많은 성도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며, 심지어는 자신의 체험이라는 명분의 거짓된 간증을 통하여 잘못된 신앙을 옹호케 하여 헛된 기적적 체험을 성도들에게 주입시킴으로서 자신들의 능력과 열정을 쏟아 붇는데 혈안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이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4:27)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 하였도다.”(딤전 6:11~12)
     
    - 윤요셉 / 벧엘교회 목사                               (뉴스앤조이에서 베스트 글에 뽑힌 내용입니다.)
    추가하였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1:57:3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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