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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 16절)

  •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드라마틱한 크리스천 커플조회수 : 11642
    • 작성자 : 김용묵
    • 작성일 : 2010년 5월 27일 21시 53분 35초
  • ※ 이승만 - 프란체스카 도나
     
    --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으로서의 행적은 비록 실책과 과오도 있고 한 가치관을 사수하기 위해 다른 가치관을 희생시키고 부작용을 남긴 것 등 비판의 여지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는 40여 년간 미국에서 미국 시민권 없이 지내면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확고하게 믿었으며, 미국을 일본이 아닌 한국의 친구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바친 독립 운동가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 주세요.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골수 외교파이더니만 여자하고의 외교(사교?)도 귀재였던 모양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미국으로 건너가 혈혈단신으로 고학으로 공부하고 독립 운동 하느라 연애를 할 시간이 없었다. 대학원 시절엔 교수 인맥으로 예쁜 백인 처녀와 사귈 수도 있었으나 그럴 여건이 안 됐다.

    그러다 그는 무려 환갑이 얼마 안 남은 나이가 돼서야, 자기보다 20살도 더 어린 거의 딸 같은 오스트리아 여자와 연애를 하고 미국에서 결혼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이 박사도 워낙 천재여서 ‘능력’(?)이 있었고, 프란체스카 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부잣집 엄친딸에서 웬 듣보잡 나라의 가난한 독립 운동가의 반려자로 자기의 일생을 과감히 바쳤고, 결국은 남편이 초대 대통령이 되는 덕분에 영부인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 정도면 정말 인생 역전??
     
    운명 같은 만남이 시작된 것은 1933년, 제네바에서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했을 때였다. 이승만은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고 일제의 학정과 침략 음모를 알리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다른 강대국들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하던 시절. 의기소침한 채로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아 있던 4인용 식탁의 빈자리로 합석을 하게 된다.
     
    어느 동양인 노신사가 떡 합석을 했는데, 이때 프란체스카가 “오~ 아저씨 혹시 조선인이세요? 거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리는 곳 맞죠? 신문에서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어떤 사람 인터뷰와 논평을 본 적이 있는데 그분이시군요!” 이런 식으로 아는체를 했던 모양이다. 이게 이승만에게 나로 치면 “오빠~ 나도 철도 덕후예요. 한국은 새마을호라는 엄청 멋진 열차가 다니는 나라 맞죠?” 처럼 들렸던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
     
    프란체스카는 처음에는 이 박사의 팬(?)으로 만났는데 그게 차츰 발전하여 연인 사이가 됐다. 집도 잘 살고 수학의 달인에다 영어 통역사 자격증까지 있던 서양 여자를 이승만이 정말 잘 낚았다. 여자 쪽은 가족의 반대, 남자 쪽은 교포 동지들의 반대가 극심하였으나 둘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뉴욕에서 한 목사의 주례를 받으며 1934년에 곧장 결혼해 버렸다. (그래도 애는 입양해서 키웠고, 혼혈아를 만들지는 않았다) 폐백이던가 결혼 비용은 프란체스카가 부모 몰래 자기가 거의 다 댔다는 후문. 둘 다 영어는 겁나게 잘 했기 때문에 언어 문제는 없었다.
     
    참고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따지고 보면 둘 다 이혼 경력이 있다. 이승만은 당시 조선의 풍습이 그랬듯이 부모의 강요로 한국 여자와 한번 결혼했었지만, 그의 유학 시절에 그가 낳았던 아들도 병으로 죽고 여차여차 떨어져 살다 보니 첫 결혼 생활은 흑역사가 됐다. 여자도 옛날에 카레이서와 결혼한 적이 있었으나 자식 없이 3년만에 이혼. 그렇잖아도 카레이서와 산 적이 있었는데, 이승만 역시 미국에서 직접 운전할 때는 살인적인 난폭 운전으로 돌변해서 아내를 겁나게 만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마치 모세가 이방인 여자와 결혼한 것 때문에 동족으로부터 비방거리가 되었듯이(민 12:1), 이승만의 이런 행보는 당시 교포 사회에서 곧장 트집거리가 되었다. “당신, 명색이 독립 운동가라면서 동족 중에 여자가 없어서 그 나이에 웬 외국 여자와 결혼을 하다니.. 미친 거 아냐?” 식. 비아냥거리는 의미에서 사람들은 프란체스카를 호주댁이라고 불렀는데... 그건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_-도 구분 못 한 교포들의 무지의 소치였다. 뭐야 이건...-_-;;
     
    그녀는 이 박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데 두려운 게 무엇이냐?’란 말을 입버릇처럼 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어지간한 한국인보다 대한민국을 더 사랑한 분이었으며, 성질 급한 이 박사의 돕는 배필 역할을 정말 신실하게 해냈다.
     
    남편이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 운동하느라 피곤해 있을 때 운전도 도맡아 하고, 그가 훗날 <Japan Inside Out>이라는 책을 쓸 때에도 타이핑도 전부 해 줬다. 1945년 우리나라가 독립을 되찾은 날, 이 박사는 미국 신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아내의 지혜와 용기, 인내와 슬픔, 노력이 나로 하여금 오늘 이 날을 맞게 했다”고 아내의 공을 높게 치하했다.
     
    그러고 보니 왕년에 태평양을 배와 비행기로 모두 건너 본 사람도 참 흔치 않은 것 같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92년에 세상을 떠났고 서울 현충원에 이 승만과 나란히 묻혀 있다. 그녀의 유언은 남편이 생전에 독립 운동 하면서 사용하던 태극기를 관에다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 김학준 - 최용신
     
    소설 <상록수>의 실제 인물이다. 이 승만 커플이 international이라면 이 커플은 철저하게 domestic.
    이들은 원래 함경남도 원산에서 집도 이웃 사이이고, 동네 교회에서 청년부의 남학생 대표와 여학생 대표를 각각 맡던 사이였다. 둘 다 브레인이었고 훗날 존경스러운 애국자로 성장했다.

    이러던 차에 남자가 여자의 가치를 알아봤다. 최용신은 자기보다 연상이고 사진을 보면 별로 미녀형도 아닌 데다, 어렸을 때 마마를 한번 앓아서 곰보이기까지 해서 외모의 매력은 정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은 최에게 무려 10대 중반의 나이로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다. ㅎㄷㄷㄷ...
    그녀의 다부지고 야무진 인품, 육신의 나이를 훨씬 웃도는 정신 연령, 애국심과 기독교 신앙에서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최용신은 외모에 자신이 없을 뿐더러 자기는 앞으로 독신으로 살면서 농촌 계몽에만 헌신하려고 결단하고 있었던지라, 청혼 요청을 매번 거절했다. 하지만 김도 그냥 차 버리기에는 아까운 훌륭한 남자인 걸 알았기 때문에.. 고민 끝에 그녀는 일단 약혼만 하고 결혼은, 각자 공부도 더 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뭔가 업적도 남기고 나서 무려 10년쯤 뒤에 하자고 합의를 봤다.
     
    그녀는 이념을 초월하여 농촌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 분이었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 생활만 동경하며 일신의 영달만 도모한다면 저 버림 받은 농촌 아이들의 까막눈은 누가 뜨게 해 줄 것인가?”
    “교육을 받은 신여성을 필요로 하는 일에는 저 말고도 더 뛰어난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농촌을 위해 일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1년 먹을 수확을 얻지만, 사람을 가르치면 백 년치 수확을 얻습니다. 아는 게 힘입니다. 배워야 삽니다”
     
    그 결혼 유예 기간 동안 남자친구는 도쿄로 유학을 떠나고, 그녀는 자기 신념대로 발 벗고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거기가 지금의 안산 상록수 전철역 일대인 샘골이다. 그때 그녀가 지주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느라 겪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행동으로 실천한 초인적이고 헌신적인 사랑과 헌신에 대해서 이 글에서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나중엔 사람들이 집안 부부싸움의 중재까지 최용신에게 맡길 정도로 그녀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좋은 간증을 듬뿍 얻었다.
     
    그렇게 몇 년을 있다가, 그녀는 자기도 중도에 그만뒀던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본에 있는 신학교로 유학길에 나섰다. 아직 유학 중이던 남자친구도 그때 일본에서 만났다(이게 마지막 만남이 됨). 그러나 3개월도 안 돼 지병 때문에 유학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샘골 사람들은 “최 선생님, 선생님은 우리의 정신적 지주이니.. 그냥 자리에 누워 있기만 하더라도 제발 우리 곁에 있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결국 샘골로 돌아왔는데... 최용신이 거기서 가만히 요양만 했겠는가? 또 옛날 버릇이 살아나서 몸 버려 가며 일했다. 결국 극심한 영양실조 때문에 창자가 꼬여서 음식물 대신 소화되고 썩어 들어가는 병에 걸렸다. 1935년 1월,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학교 운영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어린 제자들을 하나씩 부르면서 감을 수 없는 눈을 감고 말았다. 서른도 채 못 된 나이에, 결혼 유예 기간을 1년도 채 안 남기고 말이다.
     
    마을은 울음바다가 됐다. 평소에 샘골 학원을 감시하고 인원 수 줄이라고 최용신에게 딴지만 걸던 일제 형사도 고인의 장례식에서는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약혼남이던 김학준 역시 허겁지겁 달려왔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을 장면이었다.
    애인의 죽음 때문에 그 후 그는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정말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같이 죽을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지만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여친이 못 이룬 꿈을 내가 이뤄야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함흥 영생여고에서 교사가 되었다. 훗날 정태진 등과 더불어 조선어 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은 김학준이 저 김학준이다! 그는 교회 인맥을 통해 알게 된 다른 여자와 결혼(재혼이 아님)하여 가정을 꾸렸다. 최용신에 대한 첫사랑 기억은 그렇게 가슴 속에만 묻어놓고 새 삶을 개척한 것이다.

    그러다 1961년에 신상옥 감독의 영화 <상록수>가 개봉하던 당시 “내가 심훈의 소설에 나오는 박동혁의 실제 인물이오!”라고 대담한 커밍아웃을 하여 당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자기 아내조차도 그때까지는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해방 후엔 조선대 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의 격변의 역사를 체험하다가 1975년에 세상을 떠났다. 죽으면서 “나는 꼭 최용신의 무덤 곁에 묻어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미망인인 부인은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 최용신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거기 일대에는 수인선 협궤 철도가 건설되었습니다(1937). 사실, 제가 소설 <상록수>를 다시 찾아보고 최용신의 삶에 대해서 공부하게 된 것은, 지하철 역들을 막 암기하다가 안산선에 상록수라는 역이 있는 걸 발견하고부터였지요. 철도가 저의 정서에 얼마나 선한 간증과 긍정적인 영향을 남겼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 더 중요한 것: 올여름 추진 계획 중인 청년부 연합 MT(가칭) 위해서, 그리고 21세기 한국의 킹 제임스 교회 내부에도 저런 커플들 많이 나오도록(?) 기도 부탁합니다. ㅎㅎㅎ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00:23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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