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창조과학 홈에서 퍼온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데 왜 지진과 쓰나미가 있는가?
김홍석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지진과 쓰나미로 고통 받는 분들에게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하오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통 중에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하시고, 도와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는 왜 지진과 쓰나미가 있는가? 이러한 끊임없는 현상들이 오늘 나에게 무슨 의미를 주고 있는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데(마 10:29), 많은 참새보다 귀한 우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0:30-31)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대량의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이 과정을 통하여 나는 어떤 의미를 발견해 내야하는 걸까?
2000년대에 들어서서만 해도 나의 기억 속에는 2004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쓰나미가 23만여 명의 희생자를 냈고, 2005년 파키스탄의 지진, 2008년 중국의 스촨성 지진에서도 각각 수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리고 2011.3.11, 일본의 쓰나미 참사를 실시간(real time)방송으로 보고 있다. 불가항력적인 파괴적 현상들은 지진과 이로 인한 쓰나미만이 아니었으며, 아주 근래에만 있었던 일도 아니었으며, 지진만이 대재앙도 아니었다. 주후 79년경에도 폼페이의 화산폭발로 수천 명이 사망했으며, 1340년대 몰아친 흑사병으로 인해 1억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유럽인구의 반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1918년에 시작된 스페인독감으로 수천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2003년에는 사스(SARS)가, 그리고 조금 전까지 조류독감과 신종플루가 우리를 위협했고, 지금도 구제역이 우리의 가축들을 통하여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여기서 크게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의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첫째, 세상에는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망가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망가진 원인은 우리에게 있다. 노아홍수라는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면서 남긴 해령과 지판의 격변적 이동의 여력이 아직도 증거로 남아 지진과 쓰나미를 일으키면서 그 사건을 기억하게 해준다. 무지개와 함께, 지층과 화석들과 함께 그 날을 기억하게 해준다. 우리가 누리는 평안이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나게 해준다. 지구의 평안이 그저 있는 것이 아니며, 만유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통치 아래 있음을 생각나게 하며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며, 우리 자신의 약함을 자각하게 한다. 우리의 분수를 각성하게 된다. 일순간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생각나게 한다. 더욱 근원적으로, 만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나게 한다. 우주 공간에 지구가 떠 있고 지구를 감싸고 있는 우주의 온도는 영하 270도씨 정도, 수 없이 많은 혜성들이나 거대한 운석들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어디로부터 언제 지구를 향해 날아올지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다. 지각 아래에는 바위가 녹아서 끓고 있다. 우리는 그 위에 떠있는 지각 판에 살고 있다. 지각판들은 움직이고 있다. 그 움직임에 인류는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이 그저 할 수 있는 한 예측하고 피할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인류의 현실은 불안하기가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에는 자기장이 장치되어 있어서 태양풍을 비롯한 우주의 유해한 영향들을 막아주고 차가운 우주의 온도와 뜨거운 지각 아래의 온도와 태양으로부터의 적당한 거리와 빛으로 오늘도 우리는 적절한 온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들의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 우리의 누구이신가? 우리는 만유와 그 현상들을 바라보며 조금씩 더 알아갈수록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제공되는 장치들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인류의 문제와 답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것에나 또는 스스로를 의지하며 추구하고 높아지려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사건(”눈이 밝아져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노아홍수의 심판(”하나님의 아들들과의 결혼”), 바벨탑사건(”하늘에 닿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 모두 사람이 분수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릇된 욕망으로부터 초래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늘 기억하면서 사람과 만유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임을 끊임없이 명심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 되도록 세상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하여 욥기를 통해 들려주시는 위로와 지혜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욥은 왜 의인에게 혹독한 고통이 있게 되었는지를 하나님께 호소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하나님께 항변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이상하시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신다(욥 38:4). 때가 되면 아침이 오는 것도(욥 38:12), 흙덩이에 점성이 있어서 서로 붙는 것도(욥 38:38), 산 염소가 새끼 낳는 때를 아는 것도(욥 39:1)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욥은 더 이상하다. 대답 같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욥은 답을 얻고 크게 깨달았으며 앞으로 다시는 하나님께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욥이 무엇을 깨닫고 답을 얻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완전하신 분이심을 각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그분의 피조세계 가운데 피조물로 살아가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경륜(economy)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때때로 불만스럽게 느낄 뿐, 사실은 모든 것은 완전하고 공의롭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욥 40:8)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이러한 현상들은 마지막 날의 징조인가? 우리에게 이런 일들은 어떻게 의미 있는가? 마태복음 24장, 25장은 마지막 날에 이르는 재난의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셨다(마 24:33).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하늘의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셨다(마 24:36).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7). 그리고 거듭 진실로(반드시, surely) 속히 오시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20). 그리고 또 사도바울을 통하여 아울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롬 2:40)과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심(롬 9:22)을 말씀하신다.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할 것이며(마 24:37),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므로 깨어 있으라(마 24:42),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므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한다(마 25:13). 그렇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해야 하는 바는 주님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일이다.
성경의 연대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1,656년이 지난 후에 노아홍수 심판이 있었고 그로부터 약 200년 후에 바벨탑사건이 있었으며(바벨탑사건이 일어났을 때 벨렉이 50세였다면 노아홍수 후 겨우 152년이 지난 후였다), 그로부터 2,300여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약 33년 후에 십자가에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반드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제 2,000여년이 흘렀다.
마지막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우려할 바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하신 창조주로 믿으며, 예수님을 유일하신 그리스도로 믿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 한 분 하나님이심을 믿는 우리에게 그날은 소망의 날이다. 세상이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게 되었으며(벧후 2:5), 지금의 하늘과 땅은 불사르기로 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벧후 2:7).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아이를 낳는 고통을 보게 되면 선악과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지개를 보게 되면 노아홍수의 심판을 기억하는 것이다. 아울러 지판이 아직도 움직이면서 섭입(subduction)이 일어나고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노아의 때에 모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온 세상이 물에 잠겼다가 지각판이 밀리고 충돌하면서 밀려올라와 다시 뭍이 드러나고 거대한 산맥들이 형성되고 물이 물러가면서 만들어낸 계곡들과 산줄기를 바라볼 때 노아의 때를 기억하는 것이다. 퇴적지층과 그 속에 땅과 함께 멸하여진 화석생물들을 바라볼 때도 우리는 노아의 때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어 공부가 힘들다고 느낄 때면 바벨탑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는 ”상속받을 너희”에 속한 것인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긴장하며, 깨어 기다리자. 내일 당장 종말이 오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깨어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마 24:33, 36 ; 계 22:7, 2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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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요 3:16-17, 흠)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요 3:18, 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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