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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 16절)

  • 왜 안 하는가?(사도신경) 01조회수 : 15261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년 5월 8일 10시 11분 55초
  • 왜 안 하는가?(사도신경)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혹은 공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사도신경은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 주일마다 암송하는 신앙고백문으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암송하는 것으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습니다.
     
    (1) 주일 낮 예배를 드릴 때
    (2) 교회 학교에서 주일 예배를 드릴 때
    (3) 새벽 기도회를 시작할 때(반드시 그런 것은 아님)
    (4) 특별한 성격의 예배를 드릴 때(예: 총회나 노회 등의 개회 예배)
    (5) 기타 예배 시 그 필요성이 인정될 때
    (6) 또한 예배 인도자의 재량이나 예배의 성격에 따라서는 그 외의 예배 순서에 포함되는 경우도 많다. 예배를 마칠 때 주로 암송하는 주기도문과는 달리 사도신경은 예배 순서의 앞부분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현재 국내의 근본주의 침례교회 같은 자유교회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 주로 천주교 산물이라는 이유로 -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습니다. 물론 미국의 주류 교회인 침례교회들도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전혀 암송하지 않습니다. 다만 국내에서는 사도신경을 예배에서 암송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이상한 전통이 있으므로 이것은 조금 신중히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사도신경은 주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시고, 성령님에 의해 처녀 마리아에게서 수태되어 탄생하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수난, 부활, 심판 교리가 담겨 있으므로 이것 자체가 무슨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암송하는 사람도 주를 위해서 하고 암송하지 않는 사람도 주를 위해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것 자체가 사실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우선 사도신경의 적합성에 대해 알아보기 위하여 사도신경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려 합니다.
     
    사도신경의 정체
     
    ● 사도신경은 천주교회의 작품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설에 의하면, 주후 55년에 12 사도가 기독교의 요점을 요약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이때에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베드로가 사도신경의 처음 한 구절을 기록하자 나머지 사도들이 차례차례 한 구절씩 더하여 오늘의 사도신경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사도신경이 사도들에 의해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사도들의 신앙이 요약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사도신경이라고 부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사실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사도신경은 주후 300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신약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약 교회가 생긴 이래로 주후 100년경까지는 사도들이 살아 있었으므로 사도신경 같은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과 주님을 눈으로 목격한 이들이 다 떠나고 사도들의 제자인 속사도 또는 교부들의 시대가 이르자 침례 문답 때 간단한 문답서 같은 안내서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주후 100-125년경에 간단한 교리 문답서로 <신앙의 규율>(Rules of Faith)이란 것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록 어떤 이들은 주후 170-180년경에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사도신경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며 증명된 적이 없습니다.
     
    주후 325년의 니케아 신조,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결의, 431년의 에베소 결의, 451년의 칼케돈 신조 등은 역사적으로 교회 회의에서 사도신경을 제정했다거나 합의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음을 보여 줍니다.
     
    정직한 역사가의 증언에 의하면, 주후 400년경에 활약한 암브로스 등이 사도신경은 사도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뒤 주후 650년경에 사도신경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란 말이 삽입되었고 또 650년 이후에 ‘성도가 교통하는 것’이란 말이 다시 삽입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의 사도신경이 주후 750년경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완성된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어떤 이들이 주후 381년경에 사도신경이 완성됐다고 주장하지만 그 당시 교회의 회의 자료는 사도신경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결코 사도들의 작품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많은 세월 동안 조금씩 발전시키고 보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사도신경의 교리적 문제
     
    자유교회에서는 이런 신조를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예배 시간에 암송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도신경에는 몇 가지 중대한 문제가 숨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것들을 설명하려 합니다. 다음 페이지의 표는 카톨릭 사도신경과 개신교회의 사도신경을 비교한 것입니다.
     

    <천주교 사도신경과 개신교 사도신경 비교>

     

    카톨릭교회의 사도신경

    개신교회의 사도신경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저승(고성소)에 가시어(내리시어) 사흘 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을 믿나이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으며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거룩한 공회(혹은 공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의 사함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아멘.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1. 동정녀에 대하여
     
    영어 사도신경을 보면 동정녀가 ‘Virgin’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신성을 나타내는 명사 즉 ‘하나님’(God), ‘그리스도’(Christ), ‘성령님’(Holy Ghost) 등은 단어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마리아는 ‘한 처녀’(a virgin)이지 결코 ‘그 동정녀’(The Virgin)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치켜세워 신성화시킨 카톨릭 교회에서 나온 심각한 오류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천주교회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뒤에 평생을 동정녀로 살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남녀 동생들은 그분의 사촌들이라고 주장합니다(마13:55-56; 막6:3; 요7:3; 갈1:19). 그리해야만 마리아가 하늘의 여왕 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친절한 중보자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의 동정녀 또한 천주교회의 이런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처럼 ‘a virgin’을 ‘동정녀’가 아니라 ‘처녀’로 바르게 번역해서 읽고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명백하게 천주교회의 잘못된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암송하더라도 뜻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2. ‘그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삭제됨
     
    영어와 원어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사도신경에는 ‘He descended into hell’이 있지만 개신교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이 삭제되어 없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분께서 저승에 갔다고 버젓이 신성모독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지옥에 다녀오셨다.”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카톨릭주의에서 주장하는 연옥 - 카톨릭 교리에서 연옥은 천국으로 가기에는 자격이 부족하지만 지옥으로 갈 정도의 큰 죄를 짓지 않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머무르는 곳이다. 영혼들은 연옥에서 보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이승에서의 죄를 씻고 정화한다. 연옥이 정죄계(淨罪界, 깨끗함과 죄 사이의 경계)나 정화소(淨化所, 깨끗해지는 장소)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화의 방법으로는 ‘정화하는 불(purgatorius ignis)’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심판의 날에 내려질 불’에 근거하고 있다(두산백과사전). - 과 림보 -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지옥의 변방: 지옥과 천국 사이에 있으며 그리스도교를 믿을 기회를 얻지 못했던 착한 사람 또는 세례를 받지 못한 어린이·백치 등의 영혼이 머무는 곳을 가리킨다(네이버 영어 사전). - 등의 개념과 연관되기 때문에 아마도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해석하려고 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보면 예수님은 요나와 같이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중심부)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며 “주께서 내 혼을 [예수님의 혼을] 지옥에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시리라.”고 말하면서 우리 주님 - 엄밀하게는 그분의 혼 - 이 지옥에 갔다가 부활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은 이런 부분의 지옥을 모두 불교 용어인 ‘음부’라고 번역해서 바른 뜻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약속하신 대로 낙원에 즉 지하세계의 지옥 부분에 내려갔다가 올라오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서 4장 8-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잡힌 자들을 포로로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 9(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천주교회에서 굳이 밝히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개신교회에서는 이것을 막으려고 할까요? 천주교회에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관례가 있고 실제로 천주교인들은 땅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천주교회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실과 벧전3:18-20을 묶고는 그분께서 죽은 자들에게 다시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주장합니다.
     
    18…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려 하심이라. 19그분께서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는데 20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이 구절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먼저 과연 사람이 죽은 뒤에 또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는지 여부를 살펴봅시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성경은 명백하게 사람이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고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벧전3:19는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감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이 영들은 분명히 노아 시대에 불순종하던 자들입니다. 창세기 6장에는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 불순종한 세 부류의 존재가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된 천사들입니다. 벧후2:4와 유6은 이 천사들이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버리고 죄를 지어 지옥에서 영존하는 사슬에 묶여 어둠 속에 거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둘째는 노아 당시에 죄를 지어 대홍수로 멸망 받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천사들과 사람들 사이에 태어난 하이브리드 거인 종족입니다(창6:4). 물론 이들도 대홍수에 휩쓸려 다 멸절되었습니다. 이 세 부류가 벧전3:19에 있는 ‘감옥에 있는 영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영은 가지고 있지만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영이라 불린 적이 없으므로 여기의 영들은 천사들과 그들이 낳은 하이브리드 거인 종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다시 복음을 선포해서 구원의 기회를 주셨을까요? 여기에서 ‘선포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복음을 선포하다는 의미의 ‘유앙겔리조’가 아니라 선언하셨다는 의미의 ‘케륏소’입니다. 그러므로 벧전3:19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힘입어 그들에게 가셔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승리’와 ‘그들의 정죄’를 선언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는 죽음 이후에 심판 외에 다른 것이 없으며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는 결코 다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을 가지고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또 다시 선포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교도들의 비성경적인 믿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들어 개신교회 안에서도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도신경의 이 부분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무의미한 논쟁을 보면서 뿌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3. 거룩한 공회
     
    영어 사도신경에는 분명히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되어 있으나 천주교나 개신교 신경에서는 ‘거룩하고 공번된 - 혹은 보편된 - 교회’나 ‘거룩한 공회’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공회는 ‘공적인 일을 위한 모임’이나 종교 회의를 뜻하므로 ‘교회’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교포 2세 아이들 즉 영어만 할 줄 아는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더 치명적입니다. 부모를 따라 장로교회에 가는데 주일마다 예배 때에 “나는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니 이 아이들의 영적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그래서 똑똑한 아이들은 부모나 교회에게 왜 우리가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5세기의 <로마 교회 구 신조>에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를 믿사오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8세기의 <개정 신조>에는 거기에 ‘카톨릭’이라는 단어를 첨가하여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사오며’로 되어 있습니다. ‘카톨릭’이라는 말이 ‘소문자’(catholic)로 쓰인 경우 원래의 사전적 의미는 ‘보편적인’ 혹은 ‘전 우주적인’(Universal)이므로 ‘카톨릭 교회’라는 말 자체가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가리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영어 사도신경에서처럼 ‘카톨릭’이라는 말이 ‘대문자’(Catholic)로 쓰이면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가리키므로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이라는 말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삽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회’를 예수님의 몸인 ‘거룩한 교회’로 고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교회가 거룩할까요? 지상의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고 말 그대로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과연 거룩할까요? 물론 재림 이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는 거룩하겠지만 신조를 암송하는 당사자는 현재 자신이 속한 교회가 거룩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므로 이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새로 나온 사도신경에는 ‘카톨릭’을 반영하여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사실 천주교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불과합니다.
     
    4.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성인들의 통공)
     
    개신교의 사도신경의 표현인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원자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성도’(聖徒) 즉 ‘세인트’(saints)라고 합니다(고전1:2 등).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saints)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빌립보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saints)과 또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1:1)
    성경의 정의와는 달리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미 죽은 카톨릭 교회의 특정 인물을 신앙적 영웅인 ‘성인’(saint)으로 만들었고 이로써 성경적 의미의 참 세인트 즉 ‘성도’(saint)를 배격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떤 신자들을 시성함으로써 즉 그 신자들이 영웅적으로 덕행의 길을 닦고 하느님의 은총에 충실히 살았음을 장엄하게 선언함으로써 교회 안에 강력히 작용하는 성령의 힘을 인정하고 그 신자들을 다른 신자들에게 모범과 전구자로 세워 줌으로써 그들의 희망을 북돋아 준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교회헌장 40;48-51항, 제1편 p.322 #828]
     
    사탄이 로마 종교를 이용하여 성취한 가장 악독한 일 중 하나는 기독교의 성도 말살입니다. 종교는 금욕주의, 고행 등을 통해 도를 닦음으로써 자기 구속을 시도합니다. 로마 종교의 성자들의 전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성자 개념이란 결국 모두가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중심 주의와 남이 엄두도 못 낼 일들을 해 낸 인간 자랑입니다. 사탄은 로마 종교를 통해 수많은 인간 성자(?)들을 양산해 놓고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흐리게 해 왔습니다. 
     
    사탄은 모조품 로마 종교의 당위성을 주장해 왔고 인류를 속이기 위해 벨기에의 ‘제수이트들’ ― 예수회 사제들 ― 인 볼란디스트 파를 동원하여 17-20세기에 이르는 약 3백 년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 성자들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악타 쌍토룸>(Acta Sanctourum)을 편찬하였습니다. 전 유럽에서 일어난 제수이트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은 벨기에의 앤트워프, 브뤼셀 등지에서 계속되었고 오늘날 이 책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순교사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사실 현 시대 기독교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인용하는 로마 카톨릭 종교 성자들 - 어거스틴, 프란시스 등 - 의 전기란 거의 모두가 이 책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한편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교통’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성인 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과의 일치.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의 이 같은 교류를 명백히 인식한 지상 여정의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초기부터 대단한 신심으로 ‘죽은 이들을 기억하였다’, ‘죽은 이들이 죄의 사함을 받도록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은 장하고도 경건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교회헌장 50항). 그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그들을 도울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들의 전구(intercession, 중보)를 효과 있게 할 수도 있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제1편 p.364 #958]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인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에야 특별 심의를 거쳐서 서품 되는 비성경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탄의 속임수로서 성경은 이것을 엄격히 금합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런 성인들이 공덕을 넘치도록 쌓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믿는 ‘성인들의 통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과 위의 ‘거룩한 카톨릭 교회’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이 동상이몽으로 생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5. 저리로서
     
    사도신경을 매주 외우면서도 ‘저리로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곳’을 가리키는 ‘저리’에다 ‘으로부터’를 뜻하는 조사 ‘로서’가 붙어서 이루어진 옛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올라가신 그 하늘 바로 거기로부터 다시 땅에 오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6. 사도신경은 충분하지 못하다
    사도신경은 위에 있는 것처럼 교리적인 문제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중요 교리들을 누락하기도 합니다. 사도신경에는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교회론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또 성령님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성장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신경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엄이 강조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요약되어 있으나 성령님의 능력과 사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사실 사도신경은 성도들로 하여금 구약시대 율법에 틀에 갇혀 있는 전통적 카톨릭 교회 유산에 얌전히 순복할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함께 암송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와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가 마치 다 동일한 성도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사도신경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수없이 많이 암송한다 할지라도 정확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성령님에 의해 다시 태어나 삶 속에 성령님의 열매가 드러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이런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걸레와 같습니다. 외적인 신조의 암송은 결코 한 사람을 하나님의 성도의 반열에 넣을 수 없습니다.
    7. 종교연합의 매개체
    최근 들어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WCC 등을 통해 교회 연합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추세에 맞추어 우리나라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쓰기 위한 공동 번역 성경이 나왔고 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공동으로 만들기 위한 일도 추구하고 있습니다. 천주교회의 차동엽 신부는 사도신경이 천주교와 개신교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인하여 가히 수천만이 피를 흘렸고 그 덕에 오늘의 우리가 살고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유이며, 내가 살도록 해 주는 힘이며, 내게 설렘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희망이다. 나는 그것을 외울 줄 알았지만 몰랐다. 명색이 공인된 신학도인 내가 그랬으니 신자들은 오죽하랴. 그래서 글을 쓰는 내내 깨달음이며 회개였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 문화의 보물이다. 여기에는 교파도 없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구별도 없다. 그리스도교에 속한 모든 이들은 적어도 세 가지 보물을 공유한다. 그 첫째가 ‘성경’, 둘째가 ‘주기도문’, 셋째가 바로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 속에 금맥이 있다. 어떤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기가 막힌 좋은 것들을 주님께서 사도신경에 감춰놓으셨다.
    또한 인천교구장인 최기산 주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젖줄이다. 이것으로 많은 이들의 신앙이 잉태되고 성장되고 유지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은 하늘 밥이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사도신경이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연합을 위한 매개체임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지 않는 천주교회와 인위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믿지 않으며 사도신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천주교회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문을 외우듯이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에 대한 결론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의 일부를 짧게 표현한 신앙고백문이지만 몇몇 부분에서 치명적인 로마 카톨릭주의의 비성경적 교리가 많이 가미되었으므로 주 예수님의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는 암송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말세를 맞아 천주교를 중심으로 종교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고 사도신경이 이를 위한 매개체로 쓰이고 있음을 감안하면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이 여기에 어떤 가치를 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신교회들이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함으로써 신앙의 동질성을 확인하려 한다면 이 같은 행위 자체가 전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아무리 많이 암송한다 해도 성령님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일이 생기고 인격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그것은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 덕분에 믿음이 자랐다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이 성령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도신경을 외우는 사람들을 무조건 수준 낮은 사람으로 평가절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의미를 바로 알려주고 각자가 주님 앞에서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든 기관이든 뿌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국의 대부분 개신교회는 뿌리가 천주교회이므로 언젠가는 종교 통합의 미명 하에 다시 천주교회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들에게 천주교회의 실체를 바로 알려줌으로써 이들이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교회, 사도 바울과 여러 성도들이 직접 순교하면서 몸으로 세운 교회, 바로 이 기독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 진리를 알려야겠습니다.
     
    이 책자 전체를 PDF 파일로 보려면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s://keepbible.com/Pds1-8/View/3oU
     
    사이트에서 관련 기사를 보려면 다음의 링크를 누르기 바랍니다.
     
    두 종류의 교회
     
    사도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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