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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 16절)

  • 왜 안 하는가? (축도) 03 조회수 : 1477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년 5월 8일 10시 25분 36초
  • 왜 안 하는가? (축도) 03 
     
    축 도
     
    한국 교회에서는 예배의 맨 끝에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목사가 두 손을 들고 성도들을 향해 복을 기원하는 축도를 합니다. 보통 축도는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을 기초로 해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형언키 어려운 영원무궁하고도 오묘한 구원의 섭리 및 주관하심과 우리 가운데 늘 역사하시어 슬프고 힘들 때 위로하시고 약하여 쓰러질 때 도와 일으키시며 우리의 구원과 행복과 축복의 성취를 위하여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고 세계만방에 복음을 펼치기 위하여 마음을 모아 계획하고 기도하며 나아가 충성하고자 하는 주님의 모든 종들에게, 진리 안에서 참된 복으로 영원히 있을지어다! 아멘, 아멘!
     
    개신교회에서 축도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다 보니 심지어 설교는 듣지 못해도 축도는 꼭 받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축도 역시 천주교회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회만의 특징이며 자유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이런 형태의 기도를 목사가 예배 때에 한 적이 없습니다.
    축도의 유래
    장로교회의 신학자인 정장복 교수는 축도는 복을 비는 게 아니라 선포하는 행위이며 목회자의 고유 권한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축도의 유래와 행위자 그리고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개신교 예배 순서의 끝 부분에는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복 내려 주심을 선언하는 강복 선언(降福 宣言-축도)이라는 순서가 있다.
     
    축도의 유래를 보면, 구약시대에 축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예전에 대한 제반 법규를 준 후 제사장 아론과 그 계열에게만 허락하신 사역이다(민6:24-26). 이 축도는 루터나 칼빈과 같은 개혁가들이 가장 활발히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유럽의 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창조물에게 주는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를 사용해서 단순한 개인의 바람이나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본다. 실제 예수님은 어린이에게 손을 올려 복을 주시고(막10:16) 승천하시기 전에 손을 들어 제자들에게 축복하셨다(눅24:50).
    사도들에게 이르러서는 축도의 내용을 일반 기도와 달리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으로 구체화하여 사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는 고후13:14; 롬15:5-6; 엡6:23-24; 살전5:23; 살후3:16, 18; 히13:20-21 등이다.
    교회의 역사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축도는 사도적 전승을 받은 교회의 감독과 교부들이 사용하였으며 이는 사도적 전통으로 예배의 결론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주후 363년의 라오디게아 회의에서는 이단들의 축도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면서 예배 순서로서의 축도를 존엄한 사건으로 규정하였으며, 후기의 신학자들은 축도를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은사로 이해하였다.
     
    축도의 자세는 역사적으로 두 형태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두 손을 드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십자가를 긋는 것이었다.
    중세의 교회를 비롯하여 현재의 구교(천주교)에서는 축도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사제의 고유한 사역으로 이해하고 강복 선언이라 칭하면서 예배에서 실천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예전의 상징적인 행위보다 말씀 중심의 교회를 강조하였기에 축도를 더욱 소중한 부분으로 간주하였고, 그 정신은 현대의 세계 개혁교회에서 계승되어 목사의 고유한 사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장 교수가 잘 정리해 주었듯이 개신교회의 축도는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축복한 것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주교 사제의 강복 선언으로 이어졌고 개신교회를 세운 루터, 칼빈 등이 개신교회 안에 이것을 들여왔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와 상관없는 자유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축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천주교 사제들과 개신교 목회자들만 축도를 합니다.
     
    개신교 축도의 용어 문제
    이렇게 구약시대 제사장의 전통을 물려받아 축도를 하다 보니 요즘에는 목사들의 축도 용어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이 많습니다. 특히 축도 끝의 ‘있을지어다’에 대해서는 개신교회 안에서도 많은 반발이 있습니다.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축도는 고후13:14의 말씀을 근거로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후속사이며 문안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바울 사도가 보낸 서신마다 기록되었으며 다른 사도들의 편지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 자신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인 목사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실수이므로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의 ‘있을지어다’로 축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근대적이요, 내면에서는 권위 의식이 가득 찬 발상이다. 현 사회에서는 대통령에게도 ‘각하’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계층 간의 간격을 해소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교회가 이 간격을 더 조성하여 목사와 신도들 간의 위화감을 조장하는 발상을 하는 것은 신도들에게 ‘있을지어다’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게 할 뿐이다.
     
    고후13:14 본문대로 목사가 주문 외우듯 한다면 축복 기도의 참 의미가 없어진다. 여기서 분별하여야 할 것은 고후13:14는 어디까지나 축복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축도문을 목사만 전용한다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것 같이 그 본문도 목사의 ‘축도 전용문’이므로 성도들은 성경에서 그것을 빼놓고 읽어야 한다는 이론이나 또는 그 본문을 이용하여 신도 누구나 축도를 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가장 심각한 것은 일부 목사들(특히 젊은층)의 권위 의식의 문제이다. 목사의 권위는 제도적인 것에 치중하기보다는 진정 하나님의 소명을 가진 자로서, 진정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희생과 봉사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를 소유할 때 해결이 된다. 축도를 ‘축원하옵나이다’ 또는 ‘빕니다’로 한다고 해서 목사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100년의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에 이미 토착된 목사의 축도의 말미어는 국문학적으로 손색이 없고 이미 공동번역이나 새 번역에도 사용된 ‘빕니다’로 하여야 한다. ‘빕니다’는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뜻이라고 국문학적으로 해석된 단어이다. 또한 청소년과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서 ‘빕니다’로 함이 가하다고 할 것이다.
     
    축도의 실제 문제
     
    개신교 목사들이 축도를 자신들만의 고유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이라는 개념이 은밀히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신학교 교육과 목회 사역을 통해 구약시대 제사장들이 일반 백성을 축복하거나 저주한 기록들을 근거로 자기들도 성도들에게 복을 빌 수 있고 또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내릴 수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시대 목사의 직무를 구약시대 제사장의 직무로 혼동함으로써 생기는 오류입니다. 신약시대의 목사에게는 결코 하나님께 명령해서 성도들에게 복을 주게 하는 능력도 권위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저주할 수 있는 특권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우리는 너희의 믿음을 지배하는 자가 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하나니 너희는 믿음으로 서느니라(고후1:24).
    1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3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주인처럼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라. 4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받으리라(벧전5:1-4).
    기독교의 목사(Pastor)는 천주교의 사제(Priest)나 구약시대 유대교의 제사장(Priest)이 아닙니다. 목사는 성도들과 동등한 형제로서 다만 양 떼를 이끄는 목양자의 직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가 설립된 지 채 60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교회 안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려는 니골라당이 생겨났고 계시록은 이에 대해 우리 주 예수님의 엄중한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곧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6).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거니와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15).
     
    그리스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니골라당은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로서 구약시대의 제사장처럼 성도들을 통치하려는 자들입니다. 신약 교회가 생기자마자 이런 무리가 생겼으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이런 자들의 교리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직도 구약시대의 종교로 남아 자기들의 성직자를 제사장(Priest)이라 부르고 있고 성직자 계급주의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제는 제사장이 아니라 목사(Pastor)가 감독이나 장로로 교회를 치리함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목사가 제사장 노릇을 하려는 경향은 개신교회 안에 늘 있어 왔고 그래서 이들은 목사(Pastor)라는 호칭을 지존자(Reverend)라는 호칭으로 바꾸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목사들이 사용하는 ‘레버런드’(Reverend)라는 호칭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호칭입니다. 이 호칭은 성경에 단 한 번 나타납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구속함을 보내시며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명령하셨으니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111:9).
    지존자’ 즉 ‘레버런드’란 단어는 라틴어 ‘레베르’(revere)에서 온 것으로 15세기에 처음으로 존경의 호칭으로 영국의 성직자들에게 적용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 호칭에서 변형된 호칭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The Reverend’, ‘The Very Reverend’, ‘The Most Reverend’, 그리고 ‘The Right Reverend’ 등.
     
    이 호칭들은 다 ‘가장 지존하신 분’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이러한 호칭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런던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C. H. Spurgeon)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종으로 알려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모든 언행이 정말로 내가 그분이 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길 원한다. 만일 하나님의 종인 내가 나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존경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내 이름 앞에 하나님의 지존하신 호칭 즉 ‘Reverend’를 도둑질해서 붙이거나 천주교 사제의 로만 칼라를 하거나 성직자처럼 보이는 가운을 입는 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일로 인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아첨의 호칭들을 반대하시면서 제자들끼리 겸손하게 평등하게 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주인처럼 군림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고위 성직자들의 가식적인 권위를 마땅히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스스로 영광을 받는 대신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게 모르게 종교 통합을 주도하며 사람들을 마귀의 제물로 만드는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악한 제도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하는 자들을 향해 설교의 왕자요 은혜의 복음을 전파했던 스펄전 목사는 “일어나 이 도시 여리고를 건축하는 자는 주 앞에서 저주를 받으리라.”(수6:26)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 카톨릭 교회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 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그리고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처럼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죄악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사려 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 때에 로마 교회가 저지른 죄악의 진상을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우리는 좀 더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만 한다.
     
    로마 교회에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 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마귀는 거위 깃털 펜을 싫어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성령님의 복으로 기록된 책들이 마귀의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 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
     
    어느 목사님의 진솔한 고백
     
    다음의 글은 어느 목사님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분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용기 있게 이런 글을 쓰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멸시하고 손가락질 하는데 그 이유의 대부분은 목사들로 인한 반발 심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뒤집어 본다면 목사들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직무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 천사도 흠모할 만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직무에는 그것에 합당한 더 엄격하고 분명한 윤리와 도덕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의 직무가 존귀하다고 하여 목사가 도덕과 윤리를 초월해서 살아도 되거나 그럴 만한 권한을 부여받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개신교 내에 이상한 바람이 불면서 목사들이 스스로 높아지려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가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 또 그런 의식에 근거한 행동을 하면서 약한 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려 하는 것 등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을 막으면 모든 것이 막힌다고 여깁니다. 노회나 목사들의 조직에서 다른 목사들을 심판하고 책벌할 때에도 진리보다는 힘의 논리에 의해 이런 일이 생김을 종종 봅니다.
     
    내가 아는 한, 목사는 상대가 죄인이든지 자기를 반대하는 자든지, 힘이 있든지 없든지, 내게 유익을 주든지 불이익을 주든지 상관없이 사람을 살려내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직무는 교회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약하고 병들고 상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지 저주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저주는 특히 같이 믿음 생활을 하던 성도가 교회를 떠날 때 자주 발생합니다. 한 성도가 은혜로운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하고 고심하다가 교회를 떠난다면 이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여겨야 합니까? 물론 성도가 잘못을 하거나 오해를 하거나 문제를 일으켜서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목사는 항상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 떠나는 성도를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붓는 것은 바람직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마음은 편치 아니할지라도 목사로서 편안하게 대해 준다면 떠난 성도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설령 돌아오지 않아도 다른 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를 떠난다고 성도를 저주한다면 근본적으로 목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를 자신의 소유로 보는 데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의 소유도 아니고 교회의 소유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양들이 자신의 소유임을 분명히 강조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소유인 양들을 잠시 맡아서 양육하고 꼴을 먹이고 돌보는 직무를 수행할 뿐이지 결코 그 양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 문제가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으면 교회관에 문제가 발생하며 목사의 윤리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목사가 축복권도 있고 저주권도 있다는 의식을 보이기 시작하면 약한 성도들은 심지어 공포감을 느끼고 마음이 아프고 상하여 고통당하기도 합니다.
     
    목사는 양들이 살아나서 기뻐하고 춤을 추며 젖을 짜고 생육하고 번성함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 하지 아니하고 목사가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면 양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수밖에 없습니다. 이 죽음은 육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메말라서 상한 채 죽는 것을 말합니다.
    제대로 된 말씀의 양식과 지식과 사랑과 영적 능력을 통하여 양들을 먹이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자신에게 예속된 소유물로 본다면 이것은 무서운 착각입니다. 바로 이런 목사들로 인하여 기독교가 욕을 먹고 많은 성도들이 영적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죽어 가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그가 목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직무와 사명을 저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을 갖추고, 신앙의 담력을 얻은 목사라야 이 시대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교인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축도에 대한 결론
     
    축도 역시 교회관의 차이에서 발생한 부산물입니다. 신약시대 목사를 구약시대 제사장의 연장으로 보는 교회에서는 목사가 축복권과 저주권을 휘두를 수 있지만 자유 독립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회에서 축도를 하는 목사나 목사의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최소한 이 의식의 기원과 의미를 깨닫고 바르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20이것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 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22:17, 20-21).
     
    이 책자 전체를 PDF 파일로 보려면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s://keepbible.com/Pds1-8/View/3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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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종류의 교회
     
    사도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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