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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하나님과 진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독재에 항거하며조회수 : 11003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년 5월 27일 17시 30분 47초
  • 다음의 글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중세 카톨릭 교회의 독재를 벗어나고자 했던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이라는, 천주교 교황보다 더 완고하고 무서운 사람의 독재 아래서 신음하고 죽어가야 했습니다. 칼빈은 이 모든 흉악한 일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행하였으며 이런 신정국가 독재주의의 근본 원리를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아 놓았습니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의 일부입니다.
     
    “교회의 설교자들이 가져야 할 권한을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관리하고 알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감행할 권한이 있고, 이 세계의 위인이나 모든 권력자를 강요하여 하나님의 권위 앞에 머리 숙여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들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법령을 세울 수 있고, 사탄의 왕국을 쳐부술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양들을 보살피고 늑대를 절멸시켜야 하며, 복종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고, 반항하는 자들을 고소하고 절멸시킬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결합할 수도 해체할 수도 있으며, 번개와 천둥을 내리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에 제네바에서 일어난 일들이 지금 이 시간 한국의 교회들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사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심지어 국내외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에서도 칼빈과 같은 독재자가 종종 생깁니다. 이런 목사들은 모두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영혼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라면 교회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킹제임스 성경이 옳고 우리의 교리가 옳아도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을 욕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런 일을 미워하셨습니다.
     
    목사들이 베드로의 권면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혹시라도 성도들을 압제하는 일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3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받으리라(벧전5:1-4).
     
    다음은 칼빈에 대한 그 당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의 평입니다. 아무도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토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교도 신앙이니 개혁주의니 하는 것을 잘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칼빈이라는 무서운 독재자의 사상을 그대로 지키려는 자들이 그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보다 더 무서웠던 칼빈의 제네바 철권통치의 실상이 국내 성도들에게 자세히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다시는 이런 만행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독재는 실로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역사는 잘 보여 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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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은 타고난 질서의 인간이었다. 불규칙한 것, 체계 없는 것은 수학적으로 정확한 그의 천성에 모두 어긋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새로운 신앙에 알맞도록 훈련시키려고 한다면, 우선 그들에게 무엇을 믿고 고백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무엇이 허용된 것이고 무엇이 금지된 것인지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상의 왕국처럼 모든 정신의 왕국도 눈에 보이는 경계선과 법칙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칼빈은 석 달이 지나자 벌써 <교리문답서>를 시의회에 제출했다. 그것은 개신교의 기본 원칙들을 21개 조항으로 정확하게 요약한 것이었다. 이 <교리문답서>―어느 정도는 개신교의 십계명으로서―는 시의회로부터 원칙적인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단순한 동의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점도 벗어남이 없는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다. 교리를 형식화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따를 것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나 따를 것인지 하는 자유가 여전히 개인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교리문제와 생활에서 한 치의 자유도 허락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종교적인 문제에서 개인의 내적인 확신을 위해 단 한 줌의 여지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교회는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를 가지며, 단순히 열의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을 내려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달리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직무가 설교를 마친 뒤에는 자기 의무를 다한 것처럼 편안하게 무릎 위에 손을 놓고 있어도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교리문답서>는 단순히 신앙의 노선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국가법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 시민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공개적으로 이 교리문답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따르기로 맹세하는 일을 직권으로 강요해달라고 시의회에 요구했다. 시민들은 초등학생처럼 열 명씩 ‘장로’(長老)의 안내를 받아 교회에 가서는 오른손을 들고 장관이 낭독하는 맹세를 같이 해야만 했다.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은 곧바로 도시를 떠나라는 강제명령을 받았다. 이 요구는 매우 단호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종교문제에 관한 한 칼빈의 요구와 견해에서 머리카락만큼만 벗어나도 제네바 성벽 안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루터가 요구한 “기독교인의 자유”는 제네바에서 끝이 났으며, 종교가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는 생각도 종말을 고했다. 논리가 윤리를 지배하게 되었고, 문자가 종교개혁의 정신 위에 놓이게 되었다. 칼빈이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제네바에서는 어떤 형태의 자유도 끝나고 말았다. 이제 단 하나의 의지 [칼빈의 의지]가 모든 사람의 의지 위에 놓이게 되었다.
     
    모든 독재는 폭력 없이는 생각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권력의 수단을 쥘 필요가 있다. 명령하는 사람은 형벌을 줄 권리도 함께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칼빈의 임용조건에 따르면, 그에게는 교회의 위반사례에 대해서 추방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시의원들은 신자들에게 성서를 해석해주는 ‘성서 강사’를 초빙했을 뿐이었다. 즉 설교를 함으로써 신자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 설교자를 초빙한 것이었다.
     
    시의원들은 시민들의 법적․도덕적인 태도에 대해 형벌을 내릴 권한은 자신들의 재판권에 속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루터도 츠빙글리도 다른 어떤 개혁지도자들도 그때까지 시 당국에 이러한 권한이나 권력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권위적인 칼빈은 시 당국을 자신의 명령과 지시를 실천하는 기관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쏟아 부었다. 법적으로 그런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제명이라는 수단을 도입해서 그런 권한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만찬이라는 종교적 신비를 천재적으로 이용해서 그것을 개인적인 권력과 압제의 수단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칼빈파 설교자는 평소 도덕적인 태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만을 ‘주님의 만찬’에 와도 좋다고 허용했다. 그러나 설교자의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바로 여기에 이 무기의 힘이 실려 있다―은 시민으로서도 끝장이 나버린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거나 물건을 팔거나 사서는 안 되었다. 그럼으로써 종교적 관청이 이용하는 순전히 종교적인 조치가 곧바로 사회적인 조치로 바뀌고 사업상의 보이콧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추방된 사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설교자가 요구하는 공적인 참회를 거부하면 칼빈은 그에게 추방을 명령했다. 칼빈의 적대자는 비록 가장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네바에서는 계속 살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은, 그때부터 시민으로서의 생존에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번개를 손에 든 칼빈은 자기에게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단 한 번 대담하게 움켜쥐는 행동으로 그는 번개와 천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전에는 도시의 주교도 감히 가져보지 못한 무기였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끝없는 심급 과정을 거쳐야만 교인 한 명의 추방을 결정할 수 있었다. 카톨릭 교회의 파문은 초개인적인 행동으로, 어떤 개인의 독단적 판단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권력의지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대단히 합목적적이고 냉혹했던 칼빈은, 그러나 이러한 추방권을 일상적인 일처럼 설교자들과 종교국에 넘겨주었다. 이 무시무시한 위협을 거의 규칙적인 형벌로 만들고, 테러의 효과를 잘 계산하는 심리전문가로서 이 형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권한을 무한정 높였다.
     
    제네바 시 당국은 아주 애를 써서 간신히 칼빈이 요구한 대로 만찬을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일 년에 네 번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 강력한 무기를 다시는 자기 손에서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가진 뒤에 그는 비로소 진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총체적인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대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한 국민은 독재체제의 일시적인 이점들, 그 엄격한 규율과 강화된 집단적 작용력이 언제나 개인의 권리들을 희생시키며, 모든 새로운 법칙은 예외 없이 과거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제네바에서도 이제 서서히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민들은 정직한 마음으로 종교개혁에 동의를 표시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중앙 광장에 모여들어서 독자적인 인간으로서 손을 높이 쳐들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형리의 감독 아래 있는 포로들처럼 열 명씩 짝을 지어 도시를 가로질러가서 교회에서 칼빈의 21개 조항에 대해 맹세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화주의적인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단지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면서 즐겁게 노래했거나, 아니면 칼빈이나 파렐의 눈에 너무 울긋불긋해 보이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 온 설교자로부터 추방의 위협을 받으려고 엄격한 관습개혁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도대체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시민들은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네바 시민인가? 이전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이 도시의 위대함과 부를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인가? 입증된 애국자인가? 수백 년 전부터 최고 가문의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방금 흘러들어온 망명자들에 불과했다. 그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여서 방과 거처를 제공해주고 좋은 일자리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이웃나라에서 온 관세징수인의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형제와 친척들을 이 따뜻한 보금자리로 불러들이더니, 이제는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시민들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책망을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고용한 이 망명자가 이제 와서 누구는 제네바에서 살아도 되고 누구는 안 되는지를 경정하고 있다니!
     
    독재 초기에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직 완전히 억압되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모두 쫓겨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저항이 어느 정도 뿌리를 가지는 법이다. 제네바에서 공화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거리의 도둑처럼’ 야단맞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몇몇 거리, 특히 알레망 거리에서는 맹세를 거부하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은 맹세도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떠돌이 프랑스 가난뱅이들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지도 않겠노라고 투덜거렸다.
     
    칼빈은 자기에게 헌신적인 ‘작은 시의회’를 이용해서 실제로 맹세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추방령을 내릴 수는 있었지만, 이 인기 없는 조치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의 결과가 드러나자 시 당국이 칼빈의 독선을 거부하리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무조건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은 1538년 시의회에서 열세가 되었다. 제네바에서 민주주의 칼빈의 권위적인 요구에 맞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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