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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죄와 죄들의 차이조회수 : 19509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년 7월 24일 17시 28분 25초
  • 죄와 죄들의 차이
     
    참고로 이 글의 앞부분은 워치만 니의 글입니다. 니의 글은 많은 경우 분명한데 어떤 경우에는 나누지 않아도 될 것까지 심하게 나누므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 글은 괜찮아서 올립니다. 워치만 니 말고 지방 교회의 위트니스 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영해의 대가로서 매우 이상한 해석을 취하므로 그의 글은 아예 처음부터 읽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두 사람의 책들이 다 지방 교회가 운영하는 복음 서원에서 나오므로 조심하고 경계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죄와 죄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죄는 단수이고 죄들은 복수이다. 우리는 죄와 죄들의 차이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죄와 죄들을 구분할 줄 모른다면, 당신은 구원에 대하여도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죄와 죄들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자기의 구원 여부에 대해 분명하지 못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무엇이고 또 죄들이란 무엇인가? 간단한 정의를 내리겠다. 죄는 당신 안에서 당신에게 죄들을 범하게 하는 능력이고, 죄들은 밖으로 범한 낱낱의 죄들을 가리킨다.
     
    죄란 무엇인가? 나는 여기서 죄의 뿌리, 죄의 근원 혹은 본죄, 원죄 등의 명사는 쓰지 않겠다. 이 명사들은 다 신학자들이 지어낸 것이므로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겠다. 단순한 것이 좋다. 여기서 우리는 체험에서 이것을 보기로 하자. 우리 속에서 우리를 사욕과 정욕의 길로 향하게 하고 그런 자연스런 경향을 갖도록 우리를 지배하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우리를 강요하고 재촉하는 죄뿐 아니라 밖으로 행한 낱낱의 죄들도 있다. 성경에서 죄들은 행위에 속하고 죄는 생명에 속한다. 죄들은 우리의 손과 발과 마음 곧 우리 온 몸으로 행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몸으로 행한 일들이다. 그러나 죄는 어떠한가? 죄는 우리의 육체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일종의 율이다. 항상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고 악을 행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죄이다.
     
    우리가 죄와 죄들을 잘 구분하기 위해서는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완전히 보여 준다. 이 여덟 장의 성경 말씀에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1장부터 5장 11절까지는 죄(sin)보다는 주로 죄들(sins)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2절부터 8장까지는 주로 죄들이 아닌 죄를 보여 준다.
     
    즉 로마서 1장부터 5장 11절까지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로마서 5장 12절 이후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어떠함 곧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죄는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이 어떠한가를 말해 준다.
     
    로마서 5장 11절 이전의 말씀은 죽은 것을 살아나게 하는 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서의 문제는 살아나게 하는 필요보다는 범한 낱낱의 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5장 12절 이후의 말씀, 둘째 단락에서 우리는 몸의 지체들 안에 있는 법, 즉 우리 속에 있는 강하고 힘센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임을 알게 된다. 이 죄가 우리를 끌어당겨 죄를 짓게 강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죄들은 우리의 행위이기 때문에 성경은 죄들이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죄는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로 하여금 죄들을 범하도록 억압하고 강요하는 것이므로, 이 죄에 대해서는 해방될 필요가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한번은 어느 선교사를 만났는데, 그가 대화 중에 ‘죄 용서(the forgiveness of sin)’라는 말을 사용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서 성경의 어느 곳에 ‘죄 용서(the forgiveness of sin)’라는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많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한 군데만 보여 달라고 말했다. 그는 “당신은 없다는 말씀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 전체에서 ‘죄 용서(the forgiveness of sin)’라고 말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죄들의 용서(the forgiveness of sins)’라고 말합니다. 용서받는 것은 죄들이지 죄가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내 말을 신뢰하지 않고 성경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내게 “니 선생님, 정말 그렇군요. 성경에서 죄들이 용서받는 것을 말할 때마다 복수를 표시하는 ‘s’를 붙였군요.”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용서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죄들임을 볼 수 있다.
     
    죄들은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신 안에 있는 어떤 것, 강하고 힘세며 당신에게 죄를 범하도록 재촉하는 그것은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고 그것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당신이 그것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그것과 관계를 갖지 않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죄들은 용서받을 때 해결된다. 그러나 죄는 그 권세 아래 있지 않고 그것과 관계를 맺지 않을 때 해결된다. 죄들은 우리의 행위이고 낱낱이 행한 것이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죄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한 번도 죄를 용서받는다고 말한 적이 없고 항상 죄들을 용서받는다고 말한다. 동시에 죄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 나는 성경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음을 장담할 수 있다. 성경에는 죄에서 해방된다는 말은 있어도 죄들에서 해방된다는 말은 없다. 왜 그런가? 당신 속에서 당신을 억압하고 죄들을 범하게 하는 그것에 대하여 당신은 다만 거기에서 벗어나고 해방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성경에서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여기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비교하여 제시해 보겠다.
    성경에서 죄는 육체 안에 있고, 죄들은 행위에 속한다고 말한다.
     
    죄는 우리 몸에서 원칙(생명의 원칙)이고, 죄들은 우리 몸에서 사실(생명의 사실)이다.
    죄는 지체 안에 있는 법이고, 죄들은 사실적인 범죄요, 실제로 행한 것이다.
    죄는 우리의 어떠함과 관계있고, 죄들은 우리의 행함과 관계있다.
    죄는 우리의 어떠함에 속하고, 죄들은 우리의 행함에 속한다.
    죄의 범위는 생명의 범위이고, 죄들의 범위는 양심의 범위이다. (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능력이고 죄들은 양심의 능력이다. 사람은 생명 안에서 죄의 지배를 받고, 밖으로 사람이 많은 죄들을 범할 때 양심 안에 참소와 불안이 있게 된다.)
    죄는 총체적인 것이고, 죄들은 낱낱의 것이다.
    죄는 해방 받을 필요가 있고, 죄들은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
    죄는 성화와 관련되고(롬5:12-8장), 죄들은 칭의와 관련된다(롬1장-5:11).
    죄는 사람의 본성 안에 있고, 죄들은 사람의 길에 있다.
     
    비유로 말하자면, 죄는 나무와 같고, 죄들은 나무의 열매와 같다.
     
    많은 경우,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죄인을 빚진 사람에 비유한다. 우리는 빚을 지는 것이 아주 좋지 않은 일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빚을 진 사람에게 있어서 빚을 진 것도 문제이지만 그의 속에 빚을 지는 성향이 있는 것이 더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빚을 지다 보면 남의 돈을 빌려 쓰고서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남에게 빚진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남에게 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누구에게서 이삼백 원 또는 이삼천 원을 빌렸는데 나중에 갚을 능력이 없어서 친척이나 형제 또는 친구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 그 빚을 갚아 주었다 하자. 그런데도 삼사 일 후에 당신이 또 남에게 빌리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당신은 돈을 빌리는 것과 빌리고자 하는 마음은 별개임을 볼 수 있다. 밖에서 빌린 빚은 성경에서 말한 죄들과 같다. 걸핏하면 돈을 빌리려고 하는 습관과 성향은 죄와 같다. 그러한 사람은 누가 빚을 갚아 주었다고 해서 돈을 빌리는 일을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빚을 갚아 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더욱 돈을 빌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범한 죄들을 처리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죄로 향하는 우리의 속마음도 처리하신다. 우리가 죄들을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죄를 처리하는 것도 중요함을 보아야 한다. 반드시 우리가 이 두 방면을 보아야지만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복음(워치만 니) 제1권 제1장에서 발췌함
     
    박옥수 구원파의 문제
     
    죄와 죄들의 단복수 구분이 안 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박옥수 구원파에서는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광고를 버스에 붙이고 대형 체육관에서 집회를 갖습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죄와 죄들을 전혀 구분하지 않으므로 이들은 ‘죄 사함’이 죄들뿐만 아니라 죄(죄성)의 용서(사함)을 뜻한다고 믿고는 한번 구원받으면 그 사람은 완전히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죄들이 매일 반복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교주 목사는 “죄 없다!”만 외치므로 오래 거기 다니다 보면 양심이 마비되기 시작합니다. 거기서는 성화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성화 이야기를 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그래서 전혀 성화를 모르는 신도를 만들어 놓습니다. 요일1:8-9에는 죄와 죄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8절 만일 우리에게 죄(단수)가 없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9절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복수)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8-9).
     
    물론 개역성경은 9절 역시 죄들 대신 죄라고 단수로 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개역성경으로 이 구절을 읽으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 되고 맙니다. 8절은 우리(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죄 즉 죄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믿음에도 불구하고 죄들이 있으므로 고백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9절은 말합니다.
     
    또한 구원파 교주는 사람에게 두 개의 본성이 있음을 가르쳐주지 않고 죄(죄성)이 전혀 없는 새 본성만 있다고 가르치므로 추종자들은 심각하게 양심의 찔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면 “죄 없다”는 소리에 취해서 양심이 무뎌지므로 악한 일을 하고도 찔림이 생기지 않는 나병 현상이 발생합니다.
     
    또한 모 단체에서는 아담의 죄(원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은 육신적으로 죽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지옥 불 속에 들어가는 둘째 사망은 죄인 각 사람의 죄들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 때문에 사람이 다 지옥에 간다면 하나님은 불의의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죄들’에 대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용서입니다(요일1:7). 아무리 많이 울어도 참회해도 선행을 해도 죄들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죄들을 용서합니다(마.
    ‘죄’에 대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출입니다. 로마서 5장은, 죄인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인이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롬5:19를 보기 바랍니다. 즉 사과 나무가 죄이고 사과들은 그 나무에서 나오는 죄들입니다.
     
    죄 문제의 해결책은 부모를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생에 의해 아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담에게서 나오려면 죽어야 하며 롬6:3-4는 어떻게 우리가 아담에 대해 죽었는지 보여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으로,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 안에서 우리는 아담 안에서 또 죄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위치라는 측면에서는 사실이지만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상태는 그렇지 못합니다. 현실은 우리에게 아직 옛 본성 즉 육신(죄)이 있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의 성화 과정을 통해 죄를 십자가에서 죽여 처리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해 한 번 죽으셨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매일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역시 2000년 전에 죄에 대해 한 번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롬6:11). 롬6:14의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의 단수 죄는 성화와 연관이 있는 죄성을 뜻합니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롬6:1-2)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여기에서 의미한 바는 우리가 판결을 받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우리가 새 본성을 받아 죄의 법에 대해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사도는 우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6:11).
     
    이 말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고 또 옛 생활 습성에 대해서도 죽은 자로 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곧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라고 말하며 또한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라”(롬6:12)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될 때 다음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롬6:14).
    위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믿는 자의 위치는 하나님 앞에서 확고히 정착되어 안전하나 그의 상태는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 본성이 그를 지배하느냐 새 본성이 그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그는 죄로 가득하기도 하며 죄가 없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둔 채 로마서 강해 노트를 보면 강해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참고로 영어를 하시는 분들은 다음의 자료를 보기 바랍니다.
     
    http://www3.telus.net/trbrooks/SinSins.htm
    (*) 역시 워치만 니 자료이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음입니다.
     
    구약은 죄와 죄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죄와 죄들이 놀랍도록 명확히 구분됩니다.
     
    죄(단수): “Sin” in singular number: Matt.12.31; John 1.29; 8.34 (twice), 46; 9.41 (twice); 15.22 (twice), 24; 16.8,9; 19.11; Acts 7.60; Rom. 3.9,20; 4.8; 5.12 (twice), 13 (twice), 20,21; 6.1,2,6 (twice), 7,10,11,12,13,14,16,17,18,20,22,23; 7.7 (twice), 8 (twice), 9,11,13 (thrice), 14,17,20,23,25; 8.2,3 (mg., thrice), 10; 14.23; 1 Cor. 15.56 (twice); 2 Cor. 5.21 (twice); 11.7; Gal. 2.17; 3.22; 2 Thess. 2.3; Heb. 3.13; 4.15; 9.26,28 (the second “sin”); 10.6,8,18; 11.25; 12.1,4; 13.11; James 1.15 (twice); 2.9; 4.17; 1 Peter 2.22; 4.1; 2 Peter 2.14; 1 John 1.7,8; 3.4 (twice), 5 (the second “sin”), 8,9; 5.16 (twice), 17 (twice).
     
    죄(복수)“Sins” in plural number: Matt. 1.21; 3.6; 9.2,5,6; 26.28; Mark 1.4,5; 2.5,7,9,10; Luke 1.77; 3.3; 5.20,21,23,24; 7.47,48,49; 11.4; 24.47; John 8.21, 24 (twice); 9.34; 20.23; Acts 2.38; 3.19; 5.31; 10.43; 13.38; 22.16; 26.18; Rom. 4.7; 7.5; 11.27; 1 Cor. 15.3,17; Gal. 1.4; Eph. 2.1; Col. 1.14; 1 Thess. 2.16; 1 Tim. 5.22,24; 2 Tim. 3.6; Heb. 1.3; 2.17; 5.1,3; 7.27; 8.12; 9.28 (the first “sins”); 10.2,3,4,11,12,17,26; James 5.15,20; 1 Peter 2.24 (twice); 3.18; 4.8; 2 Peter 1.9; 1 John 1.9 (twice); 2.2,12; 3.5 (the first “sins”); 4.10; Rev. 1.5; 18.4,5.
     
    이것을 정리하면 내용은 위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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