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어느 날 인간관계에서 회의감을 느끼면서, 문득 ‘인간이나 동물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인간에게서 지능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과연, 동물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측면에서 동물이 인간보다 더 나은 점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나름 비교해보니, 첫째, 동물은 그들의 본능을 꾸밈없이 자신들의 삶속에 투영시키면서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최소한 인간보다 ‘정직’합니다. 둘째, 인간은 지능을 탐욕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동물은 자신이 가진 탁월한 능력을 생존을 위한 유일한 도구로 여길 뿐 자랑삼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인간보다 ‘겸손’합니다. 셋째, 인간의 본성은 교만하고 이기적이어서 화려하게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지만, 동물은 자연의 법칙을 거슬리지 않고 소박하게 자신들의 삶에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인간보다 ‘순리적인 존재’입니다. 넷째, 인간은 탐욕에 눈이 멀어 합리적이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우치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지만, 동물은 생존을 위한 기초욕구 이외에는 욕심이 없어 인간보다 균형감이 있다는 측면에서 ‘중용(中庸)의 미학’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많은 동물들에 대해 관심으로 가지고 다큐나 자료들을 즐겨 보는 가운데, 인간과 가장 흡사하게 사회구조를 이루며 살아가는 동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물은 다름 아닌 ‘늑대’라는 맹수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늑대라는 동물은 친숙한 동물이 아닙니다. 매우 사납고, 잔인하며, 음흉한 맹수로 각인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음흉하고 기회주의적인 사람을 가르켜 늑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오해는 동화나 영화, 음악 속에서도 그대로 묘사되어져 있으며, 심지어는 성경에서도 사납거나 약탈하는 사람을 늑대(이리)로 비유하기도 합니다(합1:8, 렘5:6, 마7:15. 요10:12, 욥 30:29).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늑대의 습성에서 기인된 비유일 뿐이지 늑대 자체가 부정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비유는 늑대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칭찬인 셈입니다.
늑대를 11년간 직접 추적하며 연구한 생물학자 ‘팔리 모왓’은 자신의 저서「울지않는 늑대」라는 책의 서문을 통하여 늑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 했습니다. 「오히려 늑대는 먹이가 되는 생물종(種)의 장기적인 안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인류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며, 가축에게 입히는 손해는 아주 적은 정도이며, 대개의 경우 인간의 거주지나 농업 시설 가까이에는 살려고 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문제의 ‘진실’이다. 우리는 특대의 유죄를 선고할 때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의도적인 잘못된 인식에 근거를 두면서, 포악하며 무자비한 킬러라는 신화화된 이미지는 사실상 우리가 던진 우리 스스로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희생 늑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팔리 모앗의 글이 사실일까? 하며 실제로 늑대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니, 늑대는 실제로 ‘잔인한 킬러’ 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동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안전한 동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 여러 문헌들과 자료들을 통해서 알게 된 늑대의 특징을 살펴보니, 늑대는 한 배우자와 평생을 함께 하는 몇 안 되는 동물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암컷과 새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유일한 포유류입니다. 거기다 언제나 자신의 새끼에게 먹이를 양보하며, 독립하고 나면 자신들의 영역에 접근하는 새끼를 적으로 간주하는 다른 맹수들과는 달리, 새끼들은 종종 부모늑대에게 찾아와 인사를 합니다. 게다가 늑대는 매우 조직적으로 사냥을 하고, 용맹하며, 절대로 비굴하게 물러서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동물 중에서 가장 탁월한 지능을 가지고 있어서 효율적인 소통능력으로 조직을 보존하며, 자신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즉시해가면서 앞날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동물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늑대’라는 맹수는 매우 매력적이고 호기심을 갖게 할 만큼 충분한 동물입니다. 최소한 저에게는 말이지요.
최근 이와 같은 늑대에 대한 오해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늑대와 관련된 서적들이 출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는 달리 조금 엉뚱한 것 같지만, 인간의 본성과 배치되는 늑대의 습성을 가지고 신앙과 접목을 시켜 보면 나름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전술한 바와 같이 동물이 인간보다 분명이 나은 면도 있다는 전제 하에서 늑대는 인간과 가장 유사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무런 죄가 없는 늑대는 인간이 만든 오해와 편견이라는 올가미로 인해서 무참히 학살을 당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는 아직도 잔인한 킬러로 묘사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진실의 왜곡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통해 우리 기독교 역사에 위로와 교훈을 리뷰해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셋째, 늑대의 습성들 가운데서 인간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그들만의 특유의 행태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매우 규칙적이고 철저해서 우리 신앙과 비교해보면 그들에게서 얻어 낼만한 몇몇의 반성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판단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늑대(동물)를 통해서 신앙에 접목시켜보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동물을 재물로 삼은 것은 동물이 인간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죄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랬듯이..,) 하나님께서는 어떤 동물보다 인간을 가장 사랑하시지만 인간은 동물처럼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인 이른바, ‘죄 덩어리’라는 부분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동물보다 낫다고 단언하는 교만과 만용을 결코 즐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 동안 인간을 대신해서 죽은 동물에게서 우리가 배워야할 신앙적인 교훈은 어쩌면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리라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독교는 속죄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도덕과 윤리라는 잣대를 절대 선(善)인 것처럼 들먹이며 자신들의 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 병이라는 죄의 열매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동물과 비교만 해봐도 인간은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는 단지 그 대상이 늑대라는 맹수가 가장 적절하다고 발견했을 뿐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생물학자도 아닌 반쪽짜리 지식의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늑대라는 동물의 특성만을 가지고 감히 신앙에 접근해보겠다는 것이 다소 억지적이고, 모순적인 한계가 드러날 수도 있지만 나름의 생각의 깊이를 정리하고 나누어 보고자 이렇게 용기를 내어 <신앙에 대한 늑대와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몇 차례에 걸쳐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글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물론, 사실에 기초해서 말입니다. 다소 글이 부족하더라도 늑대라는 동물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해본다는 사실에 흥미로 여겨주시고 기대 없이 읽어봐 주시기를 부탁드리면서 ‘왜, 늑대인가?’에 대한 글을 줄이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