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그러면, 각 전치사가 사용된 문맥을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36절) 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주}를 향해 입을 여셨을진대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주}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원수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신 아버지 입다를 만나자마자, 딸은 참담한 마음으로 탄식하시는 아버지를 봅니다. - 35절과 36절 사이에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즉, 탄식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딸은 영문을 몰라 그 이유를 묻습니다. 입다는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해 줍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서원하고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왔는데 그만 네가 나왔구나. 아버지는 너를 ‘{주}를 위하여 드린 자’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 비로소 영문을 알게 된 딸은 먼저 ‘내 아버지여’라고 아버지를 부르고는 말을 잇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서원을 들으시고 암몬 족속들에게 원수를 갚아 주셨으니까 서원을 제게 행하셔요라고 동의하고 권해 드립니다. 이때 딸이 아버지에게 즉답으로 한 말은 단순히 내게(to me)입니다. - (37절)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 입다는 이제 자기에게 생긴 커다란 운명의 변화를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위해 ‘{주}를 위하여 드린 자’가 되는구나. 내가 원해서 택하는 삶은 아니지만 ‘{주}를 위하여 드린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나도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지. 다만, 처녀로 평생을 살면서 여자로 태어나 메시야를 수태할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너무 애통한 일이구나.” - -그래서, 딸은 아버지에게 그 애통함을 풀기 위해 아버지에게 두 달간의 말미를 구합니다. “내게(for me) 이 일을 행하시되”라고.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쓰심으로써 우리는 입다의 딸의 마음이 어떠함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for me)’라는 것이 딸의 마음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 이때까지는 입다의 마음이 자기 실수로 인한 비참함과 괴로움에서 벗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39절)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 두 달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습니다. 딸은 친구들과 함께 산에서 실컷 애곡하고 마음의 정리와 준비를 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헌신의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 왔습니다. - 입다도 처음에는 예기치 못하게 딸을 하나님께 드려 헌신하게 될 줄 몰라서 참담한 심정이었으나, 두 달의 기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겠습니다. -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전쟁을 이기게 해 주신 하나님께서 내 딸을 거룩히 구별해서 받으시겠다고 딸이 그때 집 문에서 나를 맞이하게 하셨겠지.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딸에게 선하게 해 주심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자. 딸에게도 이것이 더 나은 일임이 틀림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 그래서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with her)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쓰심으로써, 우리는 입다가 딸과 함께(with her) 마음을 합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제사장 앞에서 아버지는 딸을, 딸은 자신을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주}를 위하여 드린 자’로 드리는 의식을 행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 다른 전치사가 동일한 문맥에서 사용된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중의법을 사용하여 입다의 딸의 마음과 입다의 마음을 각각 37절과 39절에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중의법이라는 수사법이 황진이도 알고 춘향전 작가도 알고 또 저까지도 알고 있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수천 년동안 말씀해오신 하나님께서 그런 걸 모르고 그냥 아니면 어휘 자랑하시려고 그렇게 다른 전치사들을 동원하셨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기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짐짓 그렇게 다른 단어로 우리에게 성경 기록을 주신 뜻이 무엇일까 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여 보았고,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뒷풀이)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입다를 포함한 믿음의 본이 되는 장로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하려면 자기에게 시간이 부족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야기할 내용이 많다는 것입니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또 다윗과 사무엘과 대언자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 그런데, 과연 우리는 입다에 대해 믿음의 본이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개역(개정) 성경을 쓰는 한국 교계에서는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죽었다고 버젓이 죽은 사실을 추가해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게 믿고, 따라서 ‘입다’와 ‘믿음의 본이 되는 장로’를 연결시켜 생각하기에 심히 곤란을 느낍니다. 단지 서원해서 전쟁 승리하고 돌아온 것 하나죠. 거기다 잘못된 서원으로 딸을 번제 헌물로 바친 비운의 사나이 정도. 인터넷에서 입다란 검색어로 찾아보면, 내용 소개는 나와 있어도 어느 한 사람 제대로 입다를 본받을 믿음의 사람으로 실질적인 내용을 소상하게 거론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목회자 분은 솔직히 입다가 믿음의 본으로 히브리서에 올라 있지만 자기는 별로 찾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작고하신 박윤선 목사의 주석에는 입다의 딸이 죽지 않고 처녀로 살아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나실인처럼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입다가 동생들에 의해 집을 쫒겨나서 돕 지방에 거하는 동안 허영심 많은 자들이 찾아와서 나다녔다는 기록을 통해 입다의 마음 속에 이복 동생들에 대한 미움의 골이 깊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쫒겨나기 전까지는 길르앗 지방의 머리인 아버지 길르앗의 슬하에서 교육도 잘 받고,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장남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지만, 아마도 아버지 별세 후에 집을 쫒겨나서 바깥으로 나다니면서 자신의 믿음과는 반하는 방황하는 세월을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입다가 장남이라고 쓴 것은 단지 저의 추정이며, 몇째 아들인지는 성경 기록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딸을 사랑하였고 집안에서는 바깥에서처럼 행동하지 않았나 봅니다. 입다의 딸이 한 말을 볼 때, 1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그 나이에 딸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잘 교육된 순종하는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을 고려하여 자신의 운명을 주저하지 않고 바꾸겠다고 작정하었습니다. 39절을 읽으면서 저는 산에서 애곡하고 돌아온 딸과 함께 서원 의식을 행하는 입다의 모습을 그려 보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애달프고 또 한편으로는 어쩌면 저렇게 딸을 훌륭하게 믿음으로 키웠을까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입다가 믿음의 본이 되는 장로 중에 한 사람으로 등재된 것은,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전쟁에서 승리하게 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미움의 골이 패인 동생들에 대해서 자기가 길르앗의 머리가 된 후에도 아무런 복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처럼 자신만 믿음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외동딸까지 믿음의 선한 교육을 시켰다는 점에서 좋은 평판을 후세에서까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입다가 승리하고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입다의 딸이 나오게 하심으로써, 이전에 이방신들을 섬기다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간구하는 이스라엘을 돌아보셔서, 입다가 비천한 삶을 살다가 전쟁 승리로 일약 길르앗의 머리가 됨으로써 교만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사사로서 올바로 행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두시고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이런 일들이 생기도록 하셨을 것으로도 저는 생각합니다. (또 뒷풀이 예고) 이 글을 읽으시고 전혀 감흥이 없으시거나, 아직도 딸이 번제 헌물로 불태워졌다고 믿으시기 때문에 마음이 열리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해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에 대한 문법적 설명을 추가로 올리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선하신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생활을 해 나가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