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신명기 4장 2절)
마가복음 16장 9-20절 이 12구절은 보통 ‘마가복음의 긴 결말’이라고 불린다. 많은 본문 비평가들은 마가복음의 ‘긴 결말’의 확실성을 의심하며 마가복음의 그 부분이 2세기에 첨가되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역본에서 마가의 ‘긴 결말’은 확실성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보통 각주와 더불어 괄호로 표시된다. 많은 본문 학자들은 마가의 본문이 갑자기 8절 이후에 끝난다고 믿는다. 이 ‘긴 결말’ 말고 ‘짧은 결말’이라는 것도 있는데 그들은 이 ‘짧은 결말’도 2세기에 도입되었다고 생각한다. ‘짧은 결말’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정말로 담대했다고 짤막하게 보고했다. 이 후에 예수님은 친히 그들을 통해 동쪽부터 서쪽까지 신성하고 영원한 구원을 보내셨다. 아멘.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원래 결말이 손실되었다고 믿는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성경 기록의 말씀들(단어들)이 영원토록 보존된다는 개념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주님의 말씀들은 동시에 보존되고 손실될 수 없다. 그렇지만 본문 학자들의 대다수는 비록 자기들의 ‘긴 결말’에 대해 의심하지만 그래도 그 부분을 마가복음의 끝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한다. 메츠거는 ‘더 짧은 본문을 선호한다’(Brevior lectio potior)는 현대 본문 비평가들의 격언을 버리고 비록 자기가 확실히 그 12구절이 진짜라고 간주하지는 않더라도 ‘긴 결말’을 지지한다. 메츠거는 그 부분이 기독교계 전체에게 전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그것이 합법적으로 마가복음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 구절은 알렉산드리아 본문, 소문자 사본 2386, 시내 시리아 역본 및 몇몇 다른 역본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본들에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 12구절은 5세기와 9세기 사이의 것으로 인정되는 그리스어 엉셜 사본들의 대부분(A, C, D05, K, Ξ, Δ, Θ 및 Π)에 있다. 그 12구절은 또한 더 나중의 것인 그리스어 소문자 사본들(137, 138, 1110, 1210, 1215, 1216, 1217, 1221, 그리고 1582와 같은)에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그 12구절은 콥트 역본과 다른 초기 역본들뿐만 아니라 구 라틴 본문의 대다수에서 발견되는 본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12구절은 저스틴(주후 165년), 터툴리안(주후 220년), 히폴리투스(주후 235년), 암브로스(주후 397년) 그리고 어거스틴(주후 430년)과 같은 많은 초기 교부들에 의해 (적어도 부분적으로) 인용되었다. 주후 177년에 이레네우스는 이단에 대항하는 글을 썼다. 그 글에서 그는 마가복음 16장 19절을 인용했는데 이것은 마가의 긴 결말이 그 당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적어도 이레네우스가 그것을 정경으로 생각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마가복음서의 결론에서 마가는 말한다. “이렇게 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뒤에 하늘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시니라.” 이것은 대언자들이 대언한 것을 확증한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따라서 하나님과 아버지는 진실로 한 분이시며 동일하시다. 대언자들이 선포한 그분은 진실한 복음에 의해 전해졌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배하고 전심으로 사랑하는 그분은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그 안의 모든 만물을 만드신 분이시다(3:10:5). 여기서 차이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이 12구절이 확실하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면 우리는 마가복음의 원래 결론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 복음서가 이곳에서 그렇게 갑자기 끝난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어떤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복음서가 결코 끝이 나지 않았다는 것도 성경의 영감에 의문을 불러일으키므로 결코 논리적이지 않다. 자유주의 학자든 보수주의 학자든 간에 대부분의 본문 학자들이 내린 결론 즉 원래의 결말이 손실되었다는 것은 성경 보존 교리를 확실히 부인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영감 받은 성경 기록의 한 구절이 성경의 이 부분으로부터 손실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다른 구절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금할 수 있겠는가? 본문의 어떤 차이나 모든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분명히 학문적 연구의 영역 안에 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이 구절이나 저 구절이 소실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다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성경적인 약속들보다 사람들의 이해를 더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의 증거를 받아들이고 성경 보존의 약속을 붙잡는 것이 확실히 더 낫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