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편 7절)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번역 시 수동태 문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번역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기존의 개역 성경(소수 사본)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교정한 킹제임스 성경(다수 사본)을 출간하는 것(본문 문제, 번역자 사상 문제, 번역 기법 문제, 맞춤법 문제, 4복음서 대조 등)
2. 딤후3:17이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경을 내는 것
16 모든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30년의 번역과 교정을 통해 이 두 가지 목표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우리말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영어(그리스, 히브리어)를 그대로 보통 사람들의 말(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의 구조상 차이로 인해 어떤 곳은 영어와 비교했을 때 차이를 보이는 것들이 더러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것들은 딤후3:16-17을 이루는 데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중 하나는 수동태를 능동태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수동태 번역
우리말은 수동태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글에서는 빈번히 수동태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역을 할 때 수동태로 해도 문장이 어색하지 않은 경우는 수동태를 유지하고 수동태로 하면 말이 꼬여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때는 능동태로 하되 첨가된 주어는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마6:7, But when ye pray, use not vain repetitions, as the heathen do: for they think that they shall be heard for their much speaking.
여기에는 뒤에 they shall be heard라는 수동태 구문이 있습니다. 표킹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표킹: 오히려 너희가 기도할 때면, 이교도들이 하듯이 헛된 반복들을 사용하지 말라. 이는 자신들이 많이 고하여야 그것들이 들릴 것이라고 그들이 생각하기 때문이라.
자신들이 많이 고하여야 ‘그것들이 들릴 것이라고’는 오역입니다.
they shall be heard의 they는 기도하는 사람들이지 그들이 하는 말들이 아닙니다.
이상하지만 영어 수동태를 살린다고 억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해야 [아버지에 의해] 들어질 줄로 생각하느니라.
‘아버지에 의해’는 바로 위의 6절을 통해 아버지가 기도를 듣는 분이므로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러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공개적으로 보답해 주시리라(마6:6).
자, 영어 수동태를 살린다고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해야 [아버지에 의해] 들어질 줄로 생각하느니라.”가 되면 이것을 이해할 사람이 대한민국에 있을까요? 수동태에 익숙한 미국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개역, 카톨릭 성경은 모두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로 번역하였는데 이런 식이 되면 비문(非文)이 됩니다. 기도를 들어 주는 주체(주어)가 문장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 번역은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고 하면서 ‘하느님께서’를 넣어 비문이 되는 것을 피하였습니다.
이처럼 어떤 때는 수동태 문장이 우리말 번역에서는 큰 문제가 됩니다.
흠정역은 다음과 같이 능동태로 번역하였습니다.
더욱이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해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이렇게 능동태로 번역하면서 비문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를 이탤릭체로 넣어 이것이 첨가되었음을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영어 그대로 하라고 하는 말이나 영어 그대로 했다는 말이 듣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그런 식으로 번역을 하면 우리말 독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번역하기 어려운 수동태 문장을 능동태로 바꾼다 해도 딤후3:16-17을 이루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히브리서 5장 7절에도 나옵니다.
히5:7, Who in the days of his flesh, when he had offered up prayers and supplications with strong crying and tears unto him that was able to save him from death, and was heard in that he feared;
여기 끝부분에는 and was heard in that he feared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여기서 He was heard라는 수동태 문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어 그대로 번역한다고 하면 “그분께서 들어지셨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말에 이런 표현은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개역은 하는 수 없이 ‘그가 들으심을 얻었느니라’로 번역하였는데 이것 역시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말입니다.
카톨릭과 공동 번역은 ‘하느님께서는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라고 제대로 번역하였지만 자기들이 첨가한 ‘하나님께서는’을 이탤릭체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직역을 자랑하는 표킹을 보겠습니다.
표킹: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
잘 보기 바랍니다. 표킹도 분명히 수동태를 능동태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하나님께서를 넣고 이탤릭체로 표기하습니다. 이유는 심히 간단합니다. 수동태로 번역하면 우리말이 안 되는 것을 그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흠정역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시던 때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분께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들으셨느니라.
엄마가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 때 아이가 ‘나 엄마 말 듣고 있어요’를 영어로 표현하면 ‘Mom, I hear you’가 됩니다. 이것을 ‘나는 너를 듣고 있다’로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당신(엄마)의 말을 듣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장에서도 그냥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다'로 하면 비문이 됩니다. 그래서 흠정역처럼 하나님께서 그 말(간구하는 말)을 들으셨다고 해야 적합한 번역이 됩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런 문장에서 불가피하게 수동태 문장을 능동태로 바꾼다 해도 딤후3:16-17을 이루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이렇게 해야만 우리말 구조에서는 합당한 번역이 됩니다. 이런 것은 결코 오역이 아닙니다.
하사관이 신병들에게 적지에 들어가기 전에 생존 지침을 열심히 설명한 뒤 “내 말 알아들었어?”라고 하는 것을 영어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요?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능동태로 “Do you understand me(or what I said)?”로 번역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사관은 큰 소리로 “Am I understood?”라고 말합니다.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오면 반드시 “너희들 알아들었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 의해 이해되어졌어?"라고 하면 치졸한 번역이요, 알아든지 못하는 번역이 됩니다.
유명한 구절 하나를 더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마6:33, But seek ye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unto you.
여기의 후반부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역시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개역 등 대다수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역시 뒷부분에 주어가 빠져서 비문이 됩니다.
카톨릭이나 공동은 이를 피하기 위해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로 하여 하나님이 더해 주시는 것을 우리가 곁들여 받는다고 조금 의역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주어 ‘너희’를 살릴 수 있어 비문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그분께서’를 이탤릭으로 첨가하여 비문을 피하면서 원래 뜻을 정하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렇게 어떤 부분에서 불가피하게 수동태 부분을 능동태로 바꾼다 해도 딤후3:16-17을 이루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 흠정역에는 수동태를 그대로 살린 데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고전3:10, According to the grace of God which is given unto me, as a wise masterbuilder, I have laid the foundation, and another buildeth thereon. But let every man take heed how he buildeth thereupon.
앞부분에는 which is given unto me라는 수동태가 있습니다.
기존 개역 성경 등은 이것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번역하였는데 이것 역시 ‘주신’이라는 동사의 주어가 없어서 비문입니다. 개역성경은 이런 데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100년 전에는 수동태를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흠정역 성경은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내게 주어진’으로 수동태를 살려서 비문을 피하였습니다.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내가 지혜로운 주 건축자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그 위에 세우되 저마다 어떻게 그 위에 세울지 주의할지니라.
이처럼 수동태 문장의 번역은 우리말의 번역 가능 여부에 따라 번역자가 정한 규칙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만 이때에도 딤후3:16-17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번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마6:7, 히5:7처럼 수동태로 번역하면 전혀 말이 안 되는데도 무조건 영어식으로 수동태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며칠 전에는 어떤 분이 이런 수동태 구절 하나를 이메일로 보내고는 왜 오역을 했느냐고 따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극심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말입니다.
영어 그대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직역만을 고집하는 표킹도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수동태를 능동태로 처리한 데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다만 우리는 이러면서 절대로 표킹처럼 오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킹제임스 성경도 원어에 없는 부분들을 첨가하고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이런 데가 수천 군데 있는 것으로 압니다.
Looking unto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that was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despising the shame, and is se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여기서 ‘우리의’에 해당하는 our는 첨가된 것입니다. 번역자들이 볼 때 그냥 믿음으로 두면 안 될 것 같아 our를 넣어 예수님이 특별히 신약 시대 성도들(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임을 구체화하였습니다.
왜 영어 성경의 이탤릭체는 문제가 없고 우리말 번역에서 필요시 능동태로 바꾸면서 주어를 이탤릭으로 한 것은 문제가 됩니까?
번역이란 무엇인가?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의 서문에서
번역이란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작업이다. 번역은 껍질을 까서 우리가 열매를 먹도록 해주며 휘장을 젖혀서 우리가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해 준다. 참으로 보통 사람들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지 않는다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두레박이나 물길을 그릇이 없이 야곱의 그 (깊은) 우물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 같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말 사용 면에서 성장하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말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나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난센스 중의 난센스입니다.
그래서 영어 그대로 해야 한다는 말은 때로 위험한 말입니다. 우리말 용례에 어긋나는 번역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샬롬
패스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