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어느 분이 옥성호 형제님의 글을 또 보내 주셨습니다. 목사들에게 해당되는 글이지만 내용은 인간의 내면에 들어 있는 탐욕에 대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솔직함이 결여되면 위선자가 됩니다. 특히 목사나 교회의 리더들이 이 점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옥성호 형제의 글 ****************************
제가 요즘 저의 상황을 보면서 한 가지 배우는 점이 있습니다. 책이 출판되고 또 이런 지면을 통해서 글을 올리다 보니까 제 의도와 전혀 관계없이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느낌과 함께 행여나 저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시시각각으로 저를 위협합니다.
저의 이런 우려에 대해서 모범답안으로 대답한다면, “집사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세상이 그렇게 모범답안과 같이 간단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사람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반드시 심각할 실망으로 이어집니다. 그 확율은 100%라고 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행여나 사람들이 저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행여나 나부터 나 자신에 대해서 착각하지 않고 항상 ‘내 주제 파악’을 바로 할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한다라는 경각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점을 생각하다가 다른 한 가지 사실에 문득 생각이 미쳤습니다.
바로 목회자의 고독과 관련된 점입니다. 더불어 목회자의 불륜과 관련한 힌트입니다.
어떻게 보면 결국 목회자는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매주 강단에서 ‘바른 소리’를 외쳐야 하는 처지이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목회자가 외치는 강단에서의 ‘바른 소리’가 그 사람의 실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치’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기 마련입니다. 오죽하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가 아닙니까? 그만큼 사람은 사람들의 기대치에 맞추어 행동하려고 애를 쓰기 마련입니다.
나 자신의 실체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자신에 대한 모습 사이에 너무도 큰 차이가 있는 경우에 그 차이는 당사자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는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목회자를 공격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대상들이 별로 없는 목회자들이 겪는 값비싼 댓가입니다. 더 유명해지고 더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알려지면 질수록 이 고독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고독이 깊어지고 자신을 허상 속에 고립시키는 실수가 잣아지는 목회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그 누군가를 만날 때 자기도 모르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목사’가 아닌 ‘한 남자’로 대하는 여자에게 자신을 내 던지게 됩니다. 또한 그 여자는 그 여자대로 강단에서는 힘 있는 외치는 저 목사의 얼굴 뒤에 숨은 고독을 바라보며 ‘연민의 정 또는 모성애’를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목사와 불륜에 빠지는 여자의 경우 그 ‘헌신도 내지 충성도’가 일반 불륜보다 더 깊지 않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할 말 못할 말을 못 가리는 ‘주책 바가지’ 목회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도무지 ‘고독’을 느낄 틈이 없는 바쁜 사람들이지요. 함께 어울려 놀기에도 정신이 없으니까요. 그런 분들은 상대적으로 이성과 관련한 유혹에서 좀 더 안전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위험이 있더라도 고독한 목회자가 안전한 ‘주책 바가지’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고독이 초래할 수 있는 불륜과 관련해 제가 생각하는 대안은 두 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목회자의 아내가 자신의 역할을 바로 찾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는 자기 남편을 ‘여보’라고 부르지 않고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여인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호칭은 이 부부간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점은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매들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도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김 집사님, 어제 우리 목사님이 식사를 하시면서 그러던데….”
제대로 된 문장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김 집사님, 어제 우리 남편이 식사를 하면서 그러던데….”
회사에서 부장의 부인이 과장의 부인에게 이렇게 얘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철수 엄마, 글쎄 어제 우리 부장님이 나한테 이번 달 월급이 올랐다고 그러면서….”
말이 안 되지요….아내가 회사의 직원입니까? 왜 자기 남편을 부장이라고 부릅니까? 왜 이런 말도 안되는 호칭이 교회에서는 가능할까요?
남편을 남편이 아니라 목사로 바라보는 아내는 남편을 고립시킵니다. 남편을 남자가 아닌 목사로 인식하는 아내는 남편을 어떤 의미에서 ‘거세’하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남편은 목사가 아니라 ‘남자’여야 합니다.
두번째는 목회자에게도 친구가 필요합니다.
서로간에 ‘무슨 무슨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이 친구를 만드는 데에는 어떻게 보면 좀 더 신중함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뒷통수 치지 않을 사람을 잘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TV 뉴스 진행자 중에 오라일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 중에 ‘오라일리 팩터스’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의 조건 1위는 단연 ‘뒷통수 치지 않는 친구’입니다.
뒷통수 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다. 둘 사이에 한 얘기를 딴 데 가서 나불거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들은 정말로 사생활과 관련한 힘든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가서 ‘기도 제목’으로 발설하는 사람말입니다.
“집사님, 정말로 어려운 얘기인데요. 그래도 꼭 기도해 주셨으면 하고요. 저기 최 집사님 있잖아요? 그 분에게 이렇고 저런 일이 있데요. 참 안타까워요. 사실 말하면 안 되는데…그래도 집사님이 기도해 주셨으면 하고 얘기를 하는 거니까 딴 사람한테는 가서 말하지 마시고 그냥 최 집사를 위해 조용히 기도만 해 주세요.”
이런 사람은 둘 중의 하나지요.
대단한 바보이거나 상상을 초월하는 위선자이거나….
뒷통수치지 않는 친구를 만난다면….그건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다윗에게 요나단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목사의 은밀한 얘기를 당회에 가서 ‘기도제목’으로 내어 놓거나 주보에 기도 제목으로 싣는 친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
완전한 인간 ‘아담’에게서도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점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에게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에게는 하와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같은 인간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웃고 함께 울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가장 흔히 듣는 말들 중에 하나가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알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알게 되면 실망하니까 아예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서 설교만 들으라는 충고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귀로 들리는 목사의 잘못에 대해서도 아예 눈을 감곤 합니다. 그런 경우 그가 막은 눈과 귀는 목사에 대한 애정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 반응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비겁한 자기 보호의 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깊이 알아도 여전히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허상을 조금씩 걷어내고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도 좀 더 솔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런 목회자들을 아주 많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목회자의 가정과 친구 관계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