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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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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제 6 장 십자가와 헌신조회수 : 8608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7시 54분 12초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6 장 십자가와 헌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을 보여 주신 주시니 끈으로 희생 제물을 제단 뿔들에 맬지니라”(시 118:27).
    본서의 저자는 한 젊은 사역자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려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진지하게 헌신을 하고자 했으나 계속해서 실패하였고 비참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그런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드디어 그는 자신에게 헌신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구약의 제사장들을 하나님께서 “성결하게” 하시는 방법을 통해 조명을 받게 되었다. 제사장들의 귀,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에 발려진 피를 보았을 때 그리고 제사장이 온통 피 뿌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았을 때 그는 “죄가 되신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연합을 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온통 죽음으로 뒤덮여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갈보리 사건이 그에게 가져다 준 엄청난 운명과 죽음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과 하나된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죽음과 삶을 통한 연합을 이루게 된 사실을 깨달은 그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되었고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헌신의 삶을 위한 기초를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체험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속뜻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상당히 훌륭한 교회들에서 로마서 5장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칭의를 가르친 후 곧바로 로마서 12장 1,2절에 제시된 헌신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잘못되었다거나 이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로마서 6-8장 사이에 제시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을 간과한다는 것은 헌신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식은 아니다. 이 중요한 진리들을 간과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젊은 사역자들은 많은 세월을 비참하게 보내게 되었다. 그는 죄성으로 가득한 자아에 대한 승리의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제단위에 자기의 모든 것을 올려놓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그가 이미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 즉 그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났으며 “죄에 대해서는 죽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는 살아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확고한 근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그는 성공의 비결을 찾아내었고 실로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좀 더 부연 설명을 해보도록 하자.
    아브라함 링컨은 1863년 11월 19일 게티스버그에서 전사자 묘지를 봉헌하며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바친 분들의 영원한 안식처로서 이 들판의 일부를 바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우리는 이 땅을 봉헌할 수도 없고, 성별할 수도 없고 거룩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싸웠던 용감한 분들, 이분들 중에서 살아 계신 분도 있고 이미 고인이 된 분도 있을 터 인데, 바로 이분들이 이 땅을 이미 성결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 이제는 오히려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이 남겨진 과업을 온 힘을 다해 완성해야할 것이며 그분들이 다 이루지 못한 그 일에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의 헌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더 깊은 의미로 보자면 우리는 이미 구속된 생명이므로 “이 땅을 봉헌하거나, 성별하거나 거룩케 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 자신이 내놓으신 그 생명 안에서 이미 우리를 봉헌하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더하거나 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로 고정시키십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을 믿도록 합시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축복된 진리들은 로마서 6장부터 8장에 제시되어 있으며 성공적인 헌신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이 근거위에서 우리는 로마서 12장 1,2절에 제시된 헌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완전히 구속되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무한하고 풍성하신 자비로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합당한 산 제물로 바치라고 권고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신성한 번제물 되신 그분 위에 우리의 손을 얹을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 달콤한 향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완전한 순종, 완전한 헌신, 그리고 완전한 희생제사의 달콤한 향기이며 “우리로서는 이에 무엇을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며 얼마나 놀라운 확신이며, 이 얼마나 놀라운 평화인가! 그분은 불에 의해 드려지는, 달콤한 향기가 나는 제물로서 하나님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번제물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 불태워지는 달콤한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이런 분을 우리가 신뢰할 수 없단 말인가? 그분께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우리를 이끄시도록 내맡겨야 되지 않겠는가? 오 주저하는 성도들이여, 어서 와서 우리의 권리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나머지 여생동안 그분께 내맡겨 드리자. 어서 와 그분께 모든 걸 드리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도다”. 주님께서는 기꺼이 바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고난의 시기에 난관을 헤쳐 가는 자들은 위대한 왕이신 그분께 자신을 내어맡겨야 한다. “주여, 당신의 명령대로 당신을 섬기오니 받아 주소서” 죠지 휫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위해 십자가위에 매달린 그분을 위해 순교자가 되기 위해 나는 내 자신을 포기하노라. 나는 무조건적으로 내 자신을 드려서 그분의 전능하신 손에 나를 완전히 위탁하노라.”
    한국의 안이숙 여사는 일본 국회에 가서 일본의 신도교 우상들에게 절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그 나라에 경고를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두고 무려 7년간을 하나님과 논쟁하였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복종하기로 마음을 먹고 모든 것을 팔아 일본행 편도 배표를 하나 사고 죽을 각오로 일본을 향해 떠났었다. 우리는 헌신은 “봉사 혹은 희생”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이 안 여사에게는 두 가지 모두 해당된 셈이다. 그녀의 일본행은 죽음으로의 여행이었다. 그녀는 돌아올 생각을 안했기에 편도로 배표를 산 것이다. 그녀는 주님의 사랑에 의해 순종하기로 마음먹었고 가서 그분의 뜻을 행하고 필요하다면 죽음을 각오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의 강력한 힘에 이끌려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의 손길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희생 제물에 대한 식욕으로 가득 찬 죽음으로 이끌린 것이다. 아! 바로 이것이야말로 참된 인생이며, 풍성한 인생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그 생명인 것이다.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헌신에 관한 너무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더 언급하고자 한다. 프란세스 리들리 하버갈(Frances Ridley Havergal)은 이렇게 말했다. “완전한 헌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순간의 행위일지 모르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평생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헌신이 실제적이 되려면 완전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적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항상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순간의 결정이지만 지속적인 진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헌신이 단번에 끝났다고 생각하면 속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주 시편기자처럼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을 보여 주시니(회심), 끈으로 희생제물을 제단 뿔에다 맬지라(헌신).’ 이 헌신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하며 우리는 이와 같은 헌신된 생각으로 온전히 모든 것을 드려야한다. 우리가 번제드릴 불과 제물을 잡을 칼을 보고 무서워할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만 할 것이다. ‘오 복되신 구주시여 저를 제물로서 묶으소서. 제가 제 인생여정을 수치스럽게 마치지 않도록 당신의 강력한 사랑의 줄에 저를 묶으소서. 제가 육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기회도 제공치 말도록 하시며 계속 타오르는 온전한 번제물로 남게 하소서. 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도록 하소서. 저를 당신 자신의 끈으로 갈보리에다 묶으소서, 저를 꽉 묶어서 계속해서 타오르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한 선교사가 선교지로 돌아가면서 배안에서 신선한 기름부음을 받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는 내가 그분보다 다른 어떤 것에 더 마음이 끌리는지를 보시기 위해 내 마음과 내 소유를 살피셨습니다. 그분이 ‘네가 나를 이것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분은 내 아내와 자식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나는 주저했습니다. 나는 그분께서 사형 집행서를 내 앞에 내밀고서 내 서명을 기다리고 계신 것처럼 느꼈습니다. 내 마음에는 심한 갈등이 생겼습니다.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습니다. 오랜 갈등 끝에 나는 그분의 은혜로 그분께 항복했고 나는 이때 내 결정은 곧 내 아내와 아이의 지상생명의 종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있는 작은 집으로 혼자서 돌아가고 있을 때 몇 주 후 나에게는 ‘아이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내가 집을 떠나올 때 괜찮았었습니다. 그는 건강히 잘 있었습니다. 내가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마중을 하고서는 ‘고든이 아파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알고 있었소, 드디어 그 일이 닥쳤구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가 네 아이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고통스러운 갈등이 드디어 코앞에 닥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승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아이에게로 가서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의 작고 하얀 얼굴은 심하게 병든 모습으로 베게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참된 순종은 죽음에까지 순종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실로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이 가장 좋습니다. 저를 이제부터 이 지상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붙들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을 때 그에게 일어났던 동일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이 그리고 나의 아이인 내 자식을 되돌려 주신 것입니다.”
    “끈으로 희생제물을 제단 뿔들에 맬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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