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5 장 십자가와 세상
나는 한때 이 세상 깊은 곳에 빠져 정죄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위로부터 구세주를 보내셔서 나를 이끌어 많은 물들로부터 나를 끄집어 내셨다.” 구세주께서는 이 세상 속으로 깊이 가라 앉으사 -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내위에 넘쳤나이다.”(욘2:3) - 우리를 악한 현 세상(갈1:4)에서 “구출(구원, 구조)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이처럼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원에 덧붙여 더 큰 승리를 얻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그 바다를 떨어 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승리는 구조된 자들이 다른 멸망해가고 있는 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다. 즉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승리를 쟁취한 후, 그리고 이 어두운 세상의 불결한 요소들을 떨쳐버리는 승리를 쟁취한 후에는 이 세상의 구렁에서 멸망해 가고 있는 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그 세상으로 다시 보내심을 받는 놀라운 승리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번 승리야말로 상급을 얻을 수 있는 승리이다.
그러나 이 악한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는 데 있어서는 세상과 우리와의 관계가 수정처럼 맑아야함이 전제된다. 위로부터 태어난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을 하늘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이 세상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간단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또한 우리에게 못 박혔다. 십자가에 못 박힌 제자와 십자가에 못 박힌 세상 사이에는 얼마나 도덕적으로 거리가 먼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늘 보좌가 지옥의 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듯이 늑대들의 무리 속에 있는 양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우리는 이 비뚤어지고 사악한 세대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담대하게 굳게 서서 이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자들이 반드시 되어야만 한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진”(6절) 것으로 말씀하셨고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며(14절),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지만”(15절) 그러나 이 세상에 남겨져 있으며(11절), “이 세상에 말씀을 전파하도록 보내졌고”(18,20절), 그 결과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으며”(14절) 살고 있는 자들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이 십자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이 마지막 사항 즉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는”이란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오 그리스도인들이여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라.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세상은 “너희”(당신과 나를)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진리를 향한 증오심을 축소시키지 말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은 당신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당신을 심하게 다룰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치가 사방에서 당신에게 떨어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참된 제자의 도의 표시이다.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딤후3:12). 우리를 “박해에 대해 병적인 욕망”을 지닌 자들이라든가 “스스로 만들어 낸” 순교를 지지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는 결코 그런 위선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몇몇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의 넘어지게 하는 것이 중단된 것은 분명히 그들의 삶이 너무도 세상과 쉽게 타협적이 되었기에 그들의 생활이나 증거에 대해 이 세상이 더 이상 책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와 세상은 삼손과 들릴라처럼 부정하고 더러운 관계에 있을 뿐이다.
교회에 속한 자들, 그리고 세상에 속한 자들
서로 손에 손잡고 가까이서 살아가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외에 그 누구도 이 둘을 구별할 수 없다네. 구세주의 입술에서 나온 말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징책하는 표현중의 하나는 그의 믿지 않는 형제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그것은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수 없으나”(요7:7)이다. 만약 내가 이 세상과 너무도 가까이 하나가 되고, 이 세상의 영과 분위기를 너무도 쉽게 포용하여 더 이상 세상을 책망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세상의 증오와 그리스도에 대한 적의를 불러일으킬 수 없게 된다면 다시 말해 이 세상이 내 안에서 나를 미워하여 그들의 무리에서 나를 쫒아버릴 구실을 찾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이요. 그분의 친구들의 집에서 그분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분을 나무에 못 박은 세상에 그처럼 밀접하게 다가섰다는 말이다. 이런 일은 생각조차 말아야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이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외에는 달리 쓸모가 없다고 여겨야한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저주받아 못 박혀서 죽어가는 범죄자로부터 미소를 기대하고 찾아내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세상의 호의를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친구들의 비밀결사에 입회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우리가 이 세상의 재판정 앞에 그분과 함께 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그분과 함께 조롱을 당하고, 세상의 권력, 종교, 문화로부터 오해를 받게 된다. 이것들은 이 세상이 실재(Reality)를 정죄하기위해 그 기준으로 세운 인위적인 고안물들이다. 우리가 세상은 우리에게 그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왕국을 줄 수 없다고 선언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환심을 내던지고 세상의 상식을 저버리게 된다. 세상은 우리 가운데 있는 반역자는 지혜롭게 다루고 바보들은 용납해 준다. 그렇게 되면 무지, 게으름, 비겁함이 우리를 ‘느긋하게’ 정죄하게 된다.”(S.M. Zwemer가 The Glory of the Cross에서 James Cordilier로부터 인용한 것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지니고 있었던 지난 세대의 영적 스승들 중 한 분인 Dr. A.J. Gordon씨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로마제국을 그리스도 앞에 승리의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세계로부터 온 침입자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귀화하기를 절대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이웃들을 당혹감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이세상의 삶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반면 양심에는 신경을 곤두세웠으며 그들 자신의 피에 대해 괘념치 않았고 어린양의 피가 갖고 있는 능력을 철저히 신뢰하였으며 그들이 기거하고 있는 나라의 풍속에 동화되지 않았고 그들이 귀화한 그 하늘나라의 생활방식을 고수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의 도움, 통치자들의 성원, 세상으로부터의 빚, 세상적인 방법의 사용 등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이는 그런 것들을 용납하게 되면 그들의 왕 되신 그리스도를 배반할까 함이었다. 이 “침입자들”은 보이지 않는 기지로부터 병참 지원을 받았고, 로마제국이 제공하는 도움보다는 보이지 않는 대장의 지도력을 훨씬 더 신뢰하였다. 이 사실은 이방인(이교도)들을 너무나 화나고 불쾌하게 만들었다(사실 이들은 그들의 잡신들을 버리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들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였던 자들이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대야말로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구가했던 시대라고 하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H.B. Norkman교수는 로마제국하의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기독교 초기시대 약 200년 동안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많은 것의 포기를 뜻하였고 멸시받고 박해받는 이단 종파에의 가입을 의미했으며 인기 있는 세상물결을 거슬러 수영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로마제국의 금기사항이었고, 어느 순간이든지 투옥과 죽음이 가혹한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을 의미하였다.”
초기 200년 동안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것도 자신의 자유와 생명으로 치러야만 했다. 처음 200년 동안은 기독교신앙을 고백하는 것 자체가 범죄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은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향해 선포되는 말이었고 그 선언 하나면 정죄받기에 족했다. 그 선언이 내려진 사람은 변명의 기회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대중의 증오는 단 한가지만을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범죄에 대한 책임여부의 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이었다.
이처럼 사나운 이리들의 증오심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숨을 헐떡이며 몸을 움츠린 양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졌도다. 로마인, 헬라인, 혹은 이방인들은 다같이 “첫 번째 종족”이라고 불린 반면 유대인들은 이와는 달리 “두 번째 종족”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특별나게도 “이 세상으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이 세상의 영과 분위기에 철저히 무관심하고, 이 세상과는 너무도 대조적이고 비세속적인 모습으로 살았기에 “제삼의 종족”이라고 낙인이 찍혔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칭호를 기꺼이 수용하였다. 죄보다 더 나쁜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교도들이여, 마음껏 떠들라!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도다. 그들은 “온 세상에 대해 죽었고” 이 모든 세상과는 끊어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더 이 제삼의 종족을 내버려두어야 하겠는가?” 라고 외쳐댔던 것이다.(카르타고의 한 서커스의 대사를 인용하였음)
이러한 승리의 간증(비타협에 의해 쟁취한 것임)이 가져올 결과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는 저 순교자들의 화형 때 타오르는 불길을 견딜 수가 없다. “그 빛나고 불타는 불빛”은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 준다. 오, 인기에 영합하는 크리스천이여! 오, 세상적으로 똑똑한 설교자들이여! 이 세상을 얻기 위해 얼마나 이 세상과 함께 멀리까지 나아갔는지 잘 확인해보라. 교회는 이 세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어찌해서 그처럼 이 세상에 영향을 주려고 애쓰는가?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채 다시 그 가라앉은 로마제국 안으로 뛰어들어 그 제국을 뿌리째 뽑아내서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꿔 놓았다. 당시의 표현대로 하자면 터툴리안의 기록 그대로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 생명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람들로서 이러한 투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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