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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성령의 열매: 믿음/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삶 조회수 : 10321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14분 37초
  • 성령의 열매: 믿음/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삶
     
    우리는 지금 성령의 열매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열매는 하나님께 속한 속성과 특성들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족 구성원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즉 우리를 맏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선 오늘 메시지의 기초가 되는 구절부터 읽고나서 나머지 12구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25절입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성령 안에서 걷는 것이야말로 거듭난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바는 성령 안에서 살고 있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실제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영의 통제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말씀 속에 우리 모두의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우리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자신의 아내가 죽은 사람이 내일 아침에도 예전처럼 자기 아내가 아침도 차려주고 와이셔츠도 다려줄 것을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보고 싶기도 하고 빨리 하늘나라에 가서 다시 만나고 싶기도 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아내에게 그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아내와 무언가를 함께하고 아내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에 죽었다고(dead) 되어 있는 그 무엇과 계속해서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언급했듯이 이는 미친 짓이며 실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24절 말씀을 잘 읽어 보십시오. 어떤 것이 죽어 있습니다. 어째서 여러분과 저는 육신적 삶으로부터 아무런 만족을 얻지 못합니까? 어째서 육신을 따라 사는 생활로부터 참다운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죽은 것 하고는 그 누구도 아무런 교제(관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미친 짓이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애착들과 정욕들도 못 박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에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우리는 이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자. 나를 만족시켜다오. 자! 어서 일어나 나에게 무언가 말 해다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만약 그 누군가가 죽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이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쳐다보며 그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어머니에게 아침을 차려드린다면, 그 누가 봐도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은 육신을 위해 살고, 육신을 섬기고, 육신과 교제하며 사는 것입니까? 이것은 미친 짓입니다. 무엇이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옛사람 때 지녔던 애착들(affections), 정욕들(lusts)과 교제를 나누고자 한다면 실로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과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우리는 옛 생활로부터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은 그 동안 살펴온 성령의 열매의 특성들 아홉 가지 중 믿음(faith)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1장을 먼저 보십시오. 로마서 1장에는 혼란스런 구절 하나가 들어 있는데 오늘 우리는 그 구절을 읽고 기도하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더 이상 이 구절이 혼란스러운 구절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럼 로마서 1장 16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것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
     
     
     
    16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권능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권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교회들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나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에 지옥을 갑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믿고, 위대한 스승이요 위인이신 그리스도도 믿으며, 선한 행위들도 믿지만 복음은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들로 인해 죽으시고 묻히셨고 셋째 날 다시 살아나신 사실, 즉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누구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16절에 말씀하기를 복음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권능이라고 한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제부터 제가 좀 이상한 것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간에 칭의(의롭게 됨)를 얻기 전에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그런데 로마서 1장 17절에는 의인(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 또 “믿음”으로 살다니요? 그러니까 내가 구원받은 그 믿음과 살아야 할 믿음, 그 두 가지가 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을 때 갖고 있던 믿음에서 생활을 위한 믿음으로(from faith to faith)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이 진리를 깨닫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시여, 오늘 이 진리를 저희에게 알려주소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깨닫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구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지르는 흔들다리가 처음에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기술자들이 케이블로 묶는 방식의 다리를 설치하려고 설계를 했으나 어떻게 그 일을 진행시켜야 할지를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잘 부는 어느 날 줄 하나를 연에 매달아 강 건너편으로 띄웠고 건너편에 있던 사람이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조금 더 무거운 줄을 매달아 다시 이쪽으로 보냈고 여기서 다시 더 무거운 줄을 매달아 보내는 방식을 썼습니다. 결국에는 큰 케이블로 된 다리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연줄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믿음을 대표합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처음에는 클 필요도 없고 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건너편으로 건너갈 정도면 됩니다. 그러면 건너편에서 이 작은 믿음을 누군가가 받아서 그 위에 좀 더 강한 것을 매달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자그마한 믿음이 이쪽저쪽을 오가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 내게 됩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라.
    고가도로를 지나가면서 그 도로가 우리가 타고 있는 자동차를 지탱해 주리라는 믿음은 누구라도 갖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고는 아무도 고가도로 위로 차를 몰고 가진 않을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이런저런 형태로 믿음을 행사합니다. 가게 가서 복숭아 통조림을 사면서 그 안에 과연 복숭아가 들어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문을 읽으면서도 그 기사 내용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도 우리는 잘 믿습니다. 어디 가면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는 말을 친구가 해 주면, 그 친구 말을 믿고 그곳으로 갑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매일 매일 믿음을 행사하면서 살아갑니다. 마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갖고 있고 매일 사용하는 그 믿음을 다름 아닌 “하나님께 두라(have faith in God)”고 하십니다. 신문을 읽을 때, 물건을 살 때, 버스를 탈 때, 고가도로를 올라갈 때 행사했던 그 믿음만큼이라도 하나님께 믿음을 얹어놓으라는 말입니다.
    커다란 기관차에는 엄청난 마력의 엔진이 달려 있고 엄청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연결되어 있는 객차들은 단지 이 기관차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레일 위를 달릴 수 있습니다. 객차들이 스스로 레일 위를 달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기관차의 힘에 의해 레일 위를 힘차게 달리는 것입니다. 이 시간 현재 저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들은 다 처리되어서 지금 죽더라도 지옥에 가지 않고 하늘나라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 스스로의 힘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내가 예수님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으로 영생을 얻었고, 그분의 권능으로 죄사함을 받았으며, 그분의 권능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현재 나는 주님과 연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가시는 그곳에 언제든지 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4절에서 16절을 보십시오.
    14 너희가 거룩하신 분 곧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너희에게 달라고 구하여 15 생명의 통치자를 죽였도다. 그분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니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라. 16 그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분의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강건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그분으로 말미암은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그를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우리 신앙의 첫 단계는 물론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포함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saving faith)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다시 일어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을 보시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이 성립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4절, 25절입니다.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25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에 관한 자신의 의를 밝게 드러내려 하심이요.
    하나님께 나의 믿음을 얹어놓고 나면 자연히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분께서 우리를 그분의 피를 믿도록 하시므로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하게 됩니다. 잘 보십시오. 그분의 피에 대한 믿음(faith in His blood)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지 산상설교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위대한 가르침, 기적들,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행위들이 구원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자, 잘 들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채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생명도 없고 죄와 범법으로 죽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의 죄값을 치루시고자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통해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즉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거듭나는 순간 영생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흘리신 피를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말씀을 보니 믿음에서 믿음까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무슨 뜻일까요? 즉 “믿음에서”(from faith)가 말하는 믿음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 믿음을 말합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 믿음 말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에서 멈추고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까지”(unto faith)가 또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이 믿음은 바로 17절 하반 절에 나와 있듯이 “믿음”으로 살기 위한 믿음입니다.
    제 간증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구원받기 위해 저를 위해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나 그 후 주님께서 저의 생활을 통제하시도록 허락할 만큼의 “믿음”은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의 특성 중 하나인 믿음에 대해 공부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은 갖고 있었으나 그 후 믿음으로 사는(live) 믿음은 갖고 있지 못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나의 행실, 나의 감정을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통제하지 못한 채 살아왔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로마서 1장 17절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구원의 믿음뿐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믿음까지 얻도록 하셨습니다. 이제껏 여러 시간에 걸쳐 살펴본 대로 성령의 열매는 사랑(하나님의 사랑(롬 5:5)), 기쁨(주의 기쁨(느 8:10)), 평안(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요 14:27)) 등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열매란 하나님의 성품이었고 그 성품이 믿는 자들에게 공급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 3장 22절을 보십시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가 주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the faith of Jesus Chris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즉 아드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갖고 계셨던 그 큰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의 알량한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크신 믿음을 가지고 산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얇은 줄에 연을 매달아 나이아가라 폭포 건너편으로 보낸 것으로 과연 그 폭포를 건너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작은 믿음(줄) 위에 더 굵은 줄(큰 믿음)이 더하여져서 튼튼한 다리가 완성될 때 그 다리 위로 건너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큰 믿음 즉 성령의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이 구절을 잘 보십시오. 이 구절에도 나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의롭게 되어 죽을 때 지옥이 아닌 하늘나라로 갈 것이 분명하지만, 이 땅에서의 생활 가운데서 “너는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믿고 있으면서도 때론 이런 짓을 한다는 데 나의 신앙생활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 탐심을 갖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아서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탐을 내는 것이요, 하나님을 신뢰치 않기 때문에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만족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분께서 하늘 아버지를 철저히,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저의 작은 믿음대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계셨던 그런 믿음을 갖고 있다면 저 역시 지금보다 훨씬 나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와 계신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면 성령께서는 그 “믿음”을 우리 안에서 생산해 내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믿음대신 예수님께서 갖고 계셨던 믿음으로 산다면 우리의 영적 생활이 훨씬 좋아질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을 보십시오.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이 구절을 통해 바울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왜 사람들이 구원을 의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구원받은 이후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히 구원받을 수 있었는데, 어쩌면 올바르게 기도를 안 했을지도 몰라. 해와 달과 날은 기억하는데 시간과 분과 초는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혹시...” 이런 생각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 모두는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너무 보잘것없어 “실패”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도록 그분을 신뢰하게 되면 그분의 믿음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되고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영원히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이런 확신 가운데서 살아간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르락내리락 하거나, 좌로 갔다 우로 갔다 하거나,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가 하는 신앙들은 우리의 “실패 잘 하는” 알량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1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진리를 인정함에 따라
    말씀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분의 믿음이 나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믿음입니다.A) 이 예수님의 믿음 때문에 우리는 단지 구원받은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에 이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예수님의 믿음에 따라 종이 되고 사도가 되었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번 솔직해 보십시다.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은 이래로 죄를 지어 본 적이 없으신지요? 구원받은 후 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되는데 실패한 적이 한번도 없으신지요? 여러분과 제가 여러 번 믿음 생활에서 실패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여러분과 제가 자유롭게 주님을 지금 이 순간 섬길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로 전능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계속해서 있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에 의해 의롭다고 선언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에 의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대신 예수님의 믿음을 붙들고 산다면 “내 믿음”의 실패로 인해 패배감이나 좌절감에 빠져 있는 시간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내 믿음”은 보잘것없지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늘 저녁 “제 믿음”이 실패하더라도 내일 아침 저는 다시 믿음 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주님의 지체요, 살의 일부요, 뼈의 일부이며,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그분의 눈동자요, 기뻐하시는 자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택하신 분의 믿음 때문입니다. 나의 믿음은 쉽게 실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믿음에서(from faith) 믿음으로(unto faith) 이끄십니다.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것은 나의 믿음이고, 나를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우리의 믿음이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그후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남아 있도록 지켜주는 것은 우리가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 “주여, 주께서 원하시는 그 뜻을 행하고자 합니다. 내 나머지 인생을 주님을 섬기는 데 드립니다. 오 주여, 구원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후 우리가 이 약속을 지켰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주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찬양할 수 있고 어찌하여 주님은 우리로 주님을 증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순간, 갖고 있던 우리의 작은 믿음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큰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우리의 믿음이 항상 강력하고 실패가 없으며 일관성 있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끄시고자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실패하고, 좌절하고, 무너지는 그곳에서 일어나 예수님과 완전한 교제 가운데 이르도록 이끄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때 뜨거웠다 금방 식었다 합니다. 때로는 의롭게 살다가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주님과 완전한 교제에 머물게 되면 주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되고 내 믿음이 주님의 믿음이 되어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만 신뢰하고, 의지하고, 확신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앤드류 머레이, 토저, 윗치만 니 등과 같은 분들의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 분들이 말씀하는 “머문다”, “거한다”는 말들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짐작컨대 바로 지금 말씀드린 그런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루는 믿음 따라 살다가 하루는 환경에 따라 살고, 하루는 충만하게 살다 하루는 육신대로 살고, 하루는 뜨거웠다 하루는 축 쳐졌다 하는 이런 방식의 삶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믿음과 완전히 하나로 엮어져서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그분들이 말하고 있는 “거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상태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와 있는 성령의 열매가 맺힌 상태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을 보겠습니다. 11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11 그것은 신실한 말이로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리라. 12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라.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시리라. 13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할 수 없느니라.
    “그분과 함께 죽으면”이라고 했는데 여러분과 저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살 것은 100% 확실합니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을 보십시오. 12절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고난은 선교지에서 당하는 고난이나 거리설교 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다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suffer). 주의 일을 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겪는(suffer) 고난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그분과 함께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니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생활 가운데 자주 그분을 부인합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런 우리를 부인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믿음에 있어 실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그런 법이 없습니다. 항상 믿음으로(faith) 가득 차(full) 계십니다. 이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비록 작은 믿음이긴 하지만 당신의 믿음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피에 대해 행사하였고 이에 그분께서는 “내가 네게 영생을 주리니 결코 멸망치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당신은 10년 전 주님에 대해 지녔던 그 믿음을 잃고 말았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때 내 믿음은 떨어졌지만 내가 믿을 때 내 안에 제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결코 실패하거나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저버리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인 동시에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부인할 수 없으십니다. 따라서 저는 여전히 구원받은 상태로 여전히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그 하늘나라에 도착하는 동안 나의 “믿음”은 여러 번 실패하겠지만 그분의 믿음은 결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여건에서는 내 믿음도 한 몫할지 모르지만 어렵고 힘든 여건, 즉 고문을 당하는 상황이라도 온다면 아마 쉽게 믿음을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육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잘 아시지요? 그러나 이 믿음의 실패마저도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가 그분을 믿을 때 저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주님은 그 약속을 지키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저를 아시면서도 “나는 너를 결코 안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실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성령의 열매 곧 믿음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라졌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우리의 육신은 너무도 지쳐 있고 축 늘어져 있어 성경을 믿고 있는지 아닌지조차도 모를 지경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지 안 계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심신이 다 고갈된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합니까? 성경을 꺼내들고 읽고나서 기도합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고갈되고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무도 구원받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거리설교도 하고 전도지도 나누어줍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우리의 믿음은 사라져 버리고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를 그렇게 이끌고 계신 분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이성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이상 믿고 있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을지라도 여전히 그 약속들에 근거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의심이나 불안이나 불신보다도 훨씬 큰 그 무엇, 즉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4장으로 보충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장 35절을 보십시오.
    바로 그 날 저녁이 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라.
    때론 이 말씀들을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실은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하셨고 이에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여 함께 배를 탔습니다. 3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무리를 보내고 그분을 배 안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작은 배들도 그분과 함께 하더니
    37절을 보니 곧 큰 폭풍이 일어났고 파도가 배 안에 들이쳐 배에 물이 가득 차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마 주님과 함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 같이 간 제자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건은 터졌습니다. 폭풍이 일어났지만 주님은 배 안에서 주무셨습니다.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쳐 물이 차도 주님은 그대로 계셨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면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는 것(perish)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께서 “건너 가자”(Let us pass over)라고 하셨는데 죽는다니 이것이 무슨 망발입니까? 주께서 함께 계신데도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답은 한 가지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39절과 40절을 보십시오. 끝부분에 보니 “믿음이 없느냐”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전혀 믿음이 없었음을 보게 됩니다. “어째서 그렇게 믿음이 적으냐?”고 하신 것이 아니고 “어째서 믿음이 그렇게 약하냐?”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단언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no faith) 처음 주님께서 건너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믿음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믿음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즉 믿음이 바닥이 나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5장 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바다 저편으로 가서 가다라 사람들의 지방으로 들어가니라.
    말씀에 그들이 바다 저편으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건너가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동이나 버렸지만 그래도 그들은 바다 건너편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건너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는 제자들과 달리 주님의 믿음은 여전히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그들을 배에 타도록 만들었으나 그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만든 것은 주님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하지만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하늘로 가는 도중 우리의 그 알량한 믿음은 흔들거리기도 하고, 부서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비틀대기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고,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신이 시작하신 그 선하신 일을 달성하기 위해 성령님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우리에게 공급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갈 2:20)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일을 여러분과 제가 노력하거나 계획을 짜서 이루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프로그램을 짜서 단계별로 성취해 가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을 그분의 통제하에 놓아 우리가 거의 본능적으로 그분께서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는 그 수준까지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도록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 수준에 도달하기까지는 험난하고 먼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surrender) 또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또 내려놓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능히 그리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믿음이 없을지라도 우리의 깊은 속에서 “주여, 아무런 소망도, 아무런 도움도, 빠져나갈 구멍도, 아무런 해결책도 없지만, 그래도 주님을 신뢰합니다.” 이렇게 외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아니고 여러분과 제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일찌감치 고갈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그 작은 믿음을 받으셔서 그때부터 나를 믿음에서(from faith) 믿음으로(unto faith) 이끄시는 역사를 하고 계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너무도 기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믿음으로부터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도받고 있는 삶,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삶,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저는 이제 확신과 담대함과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가 이런저런 실수나 잘못이나 불신을 저지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아무리 그 과정을 방해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일단 시작하신 그 일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은 결국은 나를 저 건너편 즉 하늘나라로 데려갑니다. 이상한 교리 같지만 사실입니다. 이제껏 살펴본 성경구절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분명 우리의 믿음이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믿음이 아닌 그분의 믿음을 의지하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난 못해요.”, “할 수 없어요.”, “안 돼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어째서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믿음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까? “그분께서 하실 수 있어!”, “그분은 하실 수 있다고.”, “그분은 하실 수 있는 분이고 말고!”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죄에 대해, 악한 습관에 대해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내 안에서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펴본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열매가 아니고 성령의 열매이며 우리의 믿음이 아닌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믿음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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