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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성령의 열매: 온유/상처에 대한 빠른 회복 능력 조회수 : 11306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15분 46초
  • 성령의 열매: 온유/상처에 대한 빠른 회복 능력     
    근래에 제임스 낙스의 '성령의 열매'를 올리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교리가 가장 좋았지만 지금은 크리스천 삶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특히 주의 종에게는 온유함과 부드러움이 있어야 한다는 낙스의 설교가 가슴을 찌릅니다. 사이트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치면 낙스의 글이 모두 올라올 것입니다. 하나 하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게 적용하면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글을 저희 사이트에 올리도록 허락해 주신 김영균 목사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찬송가 507장 가사를 깊이 음미하고 설교를 읽기 바랍니다.
     
    1.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후렴 주님의 마음 본 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2.  주 모습 내눈에 안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3.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주님의 마음 본 받음이라
    4.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날엔 뭇성도 변화하여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성령의 열매: 온유/상처에 대한 빠른 회복 능력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너희는 서로 남의 짐들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를 속이나니(갈 5:22-6:3)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이 시간 온유함에 대해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저희를 도우사 저희 안에서 주님의 온유함이 표현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발견하도록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선 지난번 메시지에서 인용했던 내용을 조금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성경 말씀들(words, 단어들)을 나중에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부드러움(gentleness)을 예로 들자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드러움(gentleness)과 온유함(meekness)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성경구절들을 찾아 읽으면서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온유함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메시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온유(meek)란 단어는 스위스어로 MIUK, 덴마크어로 MYG, 스페인어로 MEGO, 그리고 포르투갈어로 MEIGO라고 하는데, 이 모든 단어들은 한결같이 동일한 의미 즉, 흐르는 액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강가로 야유회라도 가면 소년들은 신나서 강물로 뛰어들거나, 아니면 돌을 강물에 던져 봅니다. 돌을 강물에 던질 때 발생하는 현상,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온유를 공부하는 이 상황에서 너무도 유익한 그 무엇을 시사해 줍니다.
    돌을 들어 벽에다 집어 던지면 벽은 딱딱하기(hard) 때문에 돌자국이 남습니다. 돌을 들어 유리창에 던져도 깨지거나 자국이 남습니다. 그러나 돌을 들어 강물에 던져 보십시오. 고개를 돌리고 다시 강물을 쳐다보는 순간, 그 강물 어느 곳으로 돌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강물이 그 돌을 집어삼켜서 그 돌이 준 타격의 흔적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마음이란 바로 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성경 말씀에 등장하는 온유의 개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내리치실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 저를 치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으며, 때론 마귀도 사람들을 선동하여 저를 칠 수 있습니다만, 만약 제가 온유한 사람이라면 그 어떤 자국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당신이 내 안에 어떤 상처 자국이 남아 있는지 찾아보려고 해도 상처의 흔적도, 고통의 여파도 전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는 이유는 그들에게 온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또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슬픔을 평생 동안 가슴에 지닌 채 살다가 그 누군가가 복음전도지라도 하나 건네면, “싫소, 나는 그 까짓것 필요 없다구요!” 하고 대꾸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에 자국이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징계를 받았든지 상처를 입었든지 간에 마음에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거나 성경에 관련된 자료를 주면 “필요 없어요. 그따윈 필요 없다니까!” 하면서 화를 냅니다. 왜 그럴까요? 과거에 누구로부터 상처를 입었거나 마음이 상했거나 교회일로 불만이 쌓였는데 그 모든 흔적을 성령의 도움으로 지워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흔적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과 말씀의 설교를 통해 은혜 안에서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상처나 모욕이나 불만을 붙들어 두지 않고 성령님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다 덮어버리시도록 합니다. 마치 강물이 자기에게 던져진 그 돌을 포용함으로써 아무런 흔적이 없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징계를 받되 그 징계로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란 성정이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온유함이 없으면 결코 양들을 돌볼 수 없고 집사나 영적 지도자로서 교회에서 봉사할 수 없습니다. 이 온유함이 없다면 좋은 가장이 될 수도 없고 자녀를 키우기도 어렵습니다. 자녀들은 온유한 부모님에 대해서 “나는 정말 훌륭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갖고 있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온유함은 상처를 받을 때만 발휘됩니다. 상처를 입었으나 그 상처에 굴복하지 않고 참아냅니다. 상처 받는 일이 없다면 온유함은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온유함이 표출되려면 그곳에는 반드시 “상처 입힘”이 있어야 합니다. 온유란 겸손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오만하지 아니하고 자족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칭찬받고, 존경받고, 인정받고, 높임받기 원하는데 그것이 제가 원하는 바라면 여러분은 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저에게 인사하지 않거나,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 저는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헛된 영광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제 안에 있는데 여러분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당연히 제 마음 안에는 상처가 생기고, 쓴 뿌리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반면 제가 여러분의 종이 되어 도와주고자 하고 축복이 되고자 하며, 즉 높은 마음을 내려놓고 낮은 마음으로 다가선다면 그 어떤 식으로 여러분이 저를 대하든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가 마음이 상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12장 16절 참조). 우리가 스스로 무언가 된 듯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마음만 버린다면, 모욕을 당해도 불쾌한 일을 당해도 순간 흔적을 없앨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6절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여기 보니 헛된 영광이 없으면 서로 화를 내게 만들 일도 없습니다. 자신을 이 세상에서 제일 작은 자라고 여긴다면 상처받을 일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잘 대해 주고 자신은 낮추게 될 것입니다. 교만할수록, 자아 중심적일수록 상처는 심해지고 자국은 오래 갑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만약 어떤 형제가 죄를 지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의 첫 반응이 경멸과 오만과 비판이라면 이 모든 것은 다 육신의 표출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 죄 지은 자보다 더 낫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 나오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형제 자매와 함께 있는 것조차 꺼리게 된다면, 그런 사람은 그 형제 자매를 그 잘못으로부터 벗어나도록 결코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르고 잘못된 간증을 보인 그런 형제 자매를 보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형제님, 사실 저도 그런 짓을 한 적이 있고 언제든지 그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형제님이 제게 잘못한 것 때문에 저는 상처받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기도하십시다. 어쩌면 제가 그것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혹시 사역을 하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사역하는 그 형제 자매들이 죄를 짓거나 잘못을 했을 때, 그들 때문에 당신과 교회가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지 말고 오히려 그들 스스로 상처받은 것을 온유함으로 치유해 주십시오.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여러분이 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회복”(restore)시켜 주라고 했습니다. 비록 잘못된 행동과 간증 때문에 문제를 일으켰으나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씻겨주고, 바로잡아 주고, 싸매 주고, 지탱해 주고, 그럼으로써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 이것이 바로 “회복”이며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온유가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서로 남의 짐들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서로의 짐을 지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당신이, 물에 던져진 그 돌들을 당신 위에 고의로(일부러) 짊어지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인생의 짐도 버거운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다른 사람들 즉 상처를 입었거나, 마음이 상했거나, 울고 있거나,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짐을 우리로 짊어지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권능을 주십니다. 우리는 인생살이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우리같이 영적인 사람은 찾아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 도와줘서 회복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니 사람이 자기가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할 때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nothing) 깨달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당신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거나, 당신의 가족이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당신 교회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즉 제로(zero)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영(zero) 더하기 영(zero)은 영(zero)입니다. 아무리 더해봐야 결국은 영, 즉 제로(zero)일 뿐입니다.
    여러분, 언제 제가 마음이 상하는 줄 아십니까? 저는 제가 뭔가(Something) 된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을 때입니다. 당신 역시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평가해 주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게 되지요. “아니 도대체 나를 뭘로 아는 거야?”, “아니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야?”, “어쩜 그럴 수가,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등등. 이 모든 반응은 상처 입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목사가 아무 것도 아닌 형제 자매에게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도우려는 사람은 우리보다 뛰어나거나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과 저의 마음이 낮아져서 다른 사람들을 더 낫게 여겨야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같은 사람을 도우시려고 모든 높은 것들을 다 버리시고 낮아지셨습니다. 그분은 왕 중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셨으며 왕좌에 계실 때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라는 찬송을 들으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을 낮추사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셨고 온갖 죄인들 즉 창녀들, 도둑들, 살인자들, 사기꾼들, 거짓말쟁이들 아래로 자신을 굽히사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죄인들을 섬길 수 있으려면 네 자신에 대해 더 낮은 마음을 갖고 더 낮은 자세를 취하라. 그래야 더 많은 죄인을, 더 많은 형제 자매를 도울 수 있고 교회에 덕이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되리라.”
    골로새서 3장을 보십시오. 이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술집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주변을 돌아보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도 좋고 교회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온통 자기 사랑, 자기 높임, 자아실현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당신이 최고다, 당신은 위대하다, 긍지를 가져라.” 등 이 같은 철학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철학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자신에게만 몰두하면 할수록, 자기 생각에 빠지면 빠질수록 다른 사람들 특히 잘못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기에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이 말씀에 의하면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감당해야 할 상황이나 서로를 대적하는 다툼이 생길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의견 차이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끝부분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며”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던 그 순간을 한번 기억해 보십시다. 여러분과 제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가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십시오.”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죄를 열거해 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고 냉대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그저 던져진 돌을 삼켜버리는 강물처럼 여러분과 저의 모든 죄를 받아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씻어버리시고는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수치와 모욕, 모든 죄악, 모든 불법을 다 자신의 몸 위에 얹으시고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망각”의 바다에 던져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기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군가와 다투고 계십니까? 누군가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 모든 상황에서 그저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해 주신 그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은 따지지도 않았고, 책망할 기회를 엿보지도 않았고, 혼쭐을 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더 비참해져 납작 엎드리기까지 기다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셨을 뿐입니다. 14절에 보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charity)을 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해답입니다. 이번에는 베드로전서 3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행복한 자니 그들이 두렵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불안해 하지도 말며
    여기 보니 당신은 올바르게 행했는데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불공평한 상황입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므로 여러분은 얼른 익숙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성경 그 어디에도 인생이 공평(fair)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도둑질은커녕 속임수도 안 쓰고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주당 200달러 받는데 어떤 자는 마약을 팔아서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오, 하나님. 이건 너무도 불공평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장 무슨 조치라도 취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기도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계시록에 가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어떤 조치를 취하십니다. 그런데도 기다릴 줄 모르는 우리는 이 땅에서 당장 이 불의가 시정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중에 행동을 취하실 그때까지는 우리의 인생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때까지는 베드로전서 3장에 나와 있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14 그러나 너희가 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행복한 자니 그들이 두렵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불안해 하지도 말며 15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라고 하는 말씀은 쉽게 다가오질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내가 구원 받는 순간 거룩히 구별하셨고, 또한 내가 매일의 삶 가운데서 말씀으로 거룩히 구별되어지는 법인데 여기는 내가 하나님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별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내가 내 마음속에 있는 거룩치 못한 부패한 것들을 다 몰아내고 내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만 내어드린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저런 사람들 때문에 제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저런 사람들은 한쪽으로 치우고 오직 나와만 접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자가 저에게 몹쓸 짓을 했습니다.” 이렇게 푸념하면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몹쓸 짓은 한 쪽으로 치워 버리고 오직 네 마음속에 나만을 간직하라.”
    15절 끝부분에 온유함을 지니라 했는데 어떤 자들에게 그리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을 비방하고, 비난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사항은 이런 것입니다. 즉, 나를 괴롭게 하고, 나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돌을 삼킨 물처럼 이 모든 것들을 삼켜 버리고 평소의 차분하고 온유하고 친절한 마음과 자세로 대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모든 “나쁜” 것들이 내게로 다가올 때 그것을 내가 아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받아가지고 던져버리면 나는 그런 자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선하게” 대해 줄 수 있는 동시에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16절 끝부분을 보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한 행실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아주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껏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스스로를 옹호할 수 없다는 진리를 배웠단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에 대해 이런저런 거짓말과 비난을 늘어놓고 다니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찾아내서 항변하거나 변명할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없다는 말입니다. 오해를 일일이 다 해명하고 다닐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 모든 일들이 닥치거든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꾸준히 유지하여 마음에 상처나 쓴뿌리가 생기지 않도록 하고 그 누군가가 여러분을 쥐새끼 같다고 욕하거나 비방하더라도, 그런 말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을 만나 보니 실은 젠틀맨이라는 사실을 보고 당황하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당신은 내가 들은 바와는 전혀 딴 판이군요.” 이런 말을 들을 때 정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께서 얼마나 큰 축복을 주셨는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거짓말이나 비난이나 욕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나, 우리가 이 모든 경우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 온유함을 유지하여 상한 마음과 쓴뿌리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면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그런 자들로 결국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2절, 13절입니다.
    12 또 수고하여 우리 손으로 일하며 욕을 먹으나 축복하고 핍박을 받으나 그것을 참으며 13 비방을 당하나 간절히 권면하니 우리가 이 날까지 세상의 오물(汚物)같이 되고 모든 것의 찌꺼기가 되었노라.
    여기 나오는 찌꺼기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음식을 만들다가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찌꺼기”, 그래서 그냥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려야 하는 음식 찌꺼기를 말합니다. 음식 찌꺼기만 따로 모아 버리는 통이 있는지 아시지요? 글쎄요, 포로수용소에서 굶어죽기 싫어 먹을까 말까한 바로 그런 것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깨끗한 생활을 하며, 건전한 생각을 지니고, 정직하고 품위 있게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을 이 세상 사람들은 찌꺼기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해 볼 필요없이 제 말을 그대로 믿으셔도 됩니다. 미국 텔레비전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멍청이나 도둑이나 못된 자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세상이 소위 “예수쟁이”들에 대해 내리는 평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오물이요 모든 것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자기 권리가 있어 아무리 소수 그룹(minority)일지라도 나름대로의 특권이 부여되며 그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은 예외라고 합니다. 이것이 지금 미국의 상황입니다. 포르노 중독자이건, 동성연애자이건, 성도착자이건, 아동학대자이건 이 모든 자들이 이 사회에서 다 용납되어집니다. 이들을 경계인, 또는 주변인이라 부르면서 나름대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들고 죄와 지옥에 대해 경고하는 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이 세상의 오물이며, 만물의 찌꺼기라고 합니다. 미국 공립학교에선 피임약 소지가 가능하나 성경은 학교에 가져갈 수 없습니다. 복음전도지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12절과 13절에서 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취급을 당해도 당황하거나, 상처 입거나, 신경 쓰인다거나 그런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바울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황당해 할 것입니다. 자신이 인간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를 낮추는 자에게 인간대접을 해 주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스스로를 그렇게 낮게 평가하고 있는 자에게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스스로를 세상의 오물이요 만물의 찌꺼기로 간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욕을 해봐야 전혀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없고 기분 나쁘게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나에게 말씀하는 그대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만물의 찌꺼기에 불과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들에게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전혀 모욕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 되시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진리를 확고히 붙들고 있는 자에게 무슨 말을 하든, 무슨 비방을 하든, 무슨 소문을 퍼뜨리든지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이미 자신이 그런 비방에 딱 해당되는 자라고 인정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데 발끈하거나, 좌절하거나, 스트레스 받을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나쁜 놈”, “더러운 놈”,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말들을 해 보아야 이미 자신을 그러하다고 간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상처를 더 입힐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4장 2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아니면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나아가랴?
    여기 보니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주어져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죄들이 드러났으므로 이에 바울은 매를 들고 가서 징계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그들에게 가서 겸손히 그들의 짐을 함께 지고 그들로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가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4절에서 26절입니다.
    24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아니하며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 25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 26 이것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부터 자신을 되찾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보면 교리가 잘못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젊은 그리스도인을 훈련시키거나 빗나간 그리스도인들을 바로잡아 줄 때 온유함이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이들은 때로 너무도 어리석고, 거칠고, 빗나간 상태이나(때론 말대꾸도 할 것입니다) 당신이 육신적 상태에 있다면 “저런 자들에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어디 있어?” 하면서 상대도 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실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시간을 투자를 해야 합니다. 26절에 보니 이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여러분이 충고하거나 권면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가지 말라는 곳엔 가고, 성경구절을 암송하라는 권면도 무시하며 필요한 도움도 거절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우는 일, 즉 그들의 모든 잘못을 그대로 받아주고 계속 권면하고 계속 도와주며 지속적으로 사역해 나가는 일, 이것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마저 손을 놓으면 그들은 무너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육신적으로 행동해 버리면 주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그런 자들은 상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시간 낭비 같아 보이는 그것이 그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이 아니고는 누가 그들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온유”한 자로 평가받은 사람을 세 사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민수기 12장을 보십시오. 한 번은 회중들이 회합을 갖고 모세를 대적하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회중들 중 한 그룹이 교회를 장악했습니다. 그 전에 아론은 이미 이들에게 굴복해서 우상을 숭배토록 했었던 금송아지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모세는 2백만 명이나 되는 회중들을 인도하는 중에 수십만 명이 불평불만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했는지는 성경에서 광야생활에 대해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온갖 비난, 불만, 비방... 이런 것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12장 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결혼한 그 이디오피아 여인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니라.
    여기에 모세의 누이와 형이 등장합니다.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의 지도력을 문제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2절과 3절을 보니 심지어 모세의 아내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2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참으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니라. 3 (이제 이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
    말씀에 모세는 지구상의 그 누구보다도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모세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비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4절부터 13절까지입니다.
    4 주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 주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 내려오사 성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므로 그 두 사람이 나아가니라. 6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내 말들을 들으라. 너희 가운데 대언자가 있으면 나 주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려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리하지 아니하나니 그는 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자니라. 8 그와는 내가 입에서 입으로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또 그는 주의 모습을 보려니와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9 주의 분노가 그들을 향해 타오르며 그분께서 떠나시매 10 구름이 성막에서 떠나갔고, 보라,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같이 희게 되었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보라, 그녀가 나병에 걸렸더라. 11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나이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게 행하여 죄를 지었으나 간청하건대 그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12 부디 그녀가 자기 모태에서 나올 때에 살이 반이나 썩어 죽은 자같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 13 모세가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이제 그녀를 고쳐 주옵소서, 하니라.
    놀라운 것은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해 모세가 나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서셨습니다. 주님께서는 8절 끝에 그들이 행한 짓은 비방이라고 말씀하시고 분노하셔서 미리암에게 나병이라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는가 짐작이 되십니까?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모세가 나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중보기도 말입니다. 자기를 비방해서 벌 받고 있는 자를 위해 기도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녀를 고쳐 주옵소서. 간청 드립니다.” 모세의 온유함은 실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로써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입증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있어 이런 일들이 가능하겠는지요? 제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아주 특별히 영적으로 상태가 좋은 날 하루 정도는 어쩌면 가능하겠지만 나머지 364일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이런 일을 우리 안에서 해 내심으로 우리로 그분이 원하는 그 모습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로  가겠습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 가운데 있으면 비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를 향해 담대하지만
    “비천하고”(base)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와 연관이 있는 단어가 다름 아닌 “지하실”(basement)입니다. 지하실이란 건물의 맨 밑바닥을 말합니다. 지하실보다 낮은 곳은 없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온유함을 주셨기에 그는 그처럼 부패한 고린도교회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분열, 다툼, 이단들, 음행, 법정 다툼, 이혼, 우상숭배, 영적 은사를 남용함, 남녀노소의 무질서 등 이런 “엄청난” 교회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바울은 주님의 온유함을 지닌 채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 모두보다 나은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를 도우려 왔을 뿐이라.” 만약 여러분이 그런 교회에 들어갈 때 눈에 띄는 것이 죄뿐이라면 여러분은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런 교회에 들어가 여러분을 통해 그들을 도우시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들을 눈여겨 본다면 여러분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1장과 2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주님께서는 자신이 온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이제껏 내게 행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모든 죄들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모든 범법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할 일은 내게로 오는 것이다. 내가 너희의 모든 짐을 짊어지리니 이는 내가 온유함이라.” 이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핵심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21장 8절, 9절을 보겠습니다.
    8 매우 큰 무리가 자기들의 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무에서 가지를 베어 길에 흩어 깔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던 무리들이 외쳐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놀랍습니다. 왕께서 왕의 도시에 들어오시는 장면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온유하사 나귀 위에 앉으시나니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 하라, 하였느니라.
    나귀 위에 앉으신 주님에 대해 “온유하사”(meek)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교만한 분이셨다면 호산나 소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군중들 속에 파묻혀버렸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십자가는 제쳐놓고 바로 왕좌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하신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도 이 환영은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는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들로 인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온유하다면 여러분은 비방을 받고도 계속 섬길 수 있고 또한 칭찬을 받아도 우쭐대지 않고 계속 섬기는 자리에 머물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비방에 대해 쓴 뿌리를 내지 않으며 칭찬해도 우쭐대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항상 종의 마음과 섬기는 자세를 유지합니다.
    우리 한번 솔직해 보십시다. 지난 메시지에서 말씀드린 부드러움도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일입니다. 오늘 다룬 온유함도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가능하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지는지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willing) 그저 주님께 고백드리십시다. 주여, 도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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