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성령의 열매: 화평 /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열매 11번을 공부하기 전에 로마서 5장과 이사야 57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성령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아직도 마음속에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거나, 누군가에게 쓴뿌리가 남아 있거나, 아직도 근심 걱정에 눌려 있거나, 혹은 그 어떤 죄가 여러분을 억누르고 있다면 우리가 배웠던 지난 열 번의 성령의 열매를 반복해서 여러 번 읽으시기(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패배감에 젖어서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생활이 승리로 점철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생활이 삼손처럼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삼손은 승리와 패배, 승리와 패배를 계속 반복하는 오르락내리락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37절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정복자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원수들을 공개적으로 패퇴시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승리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승리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수고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승리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승리는 우리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통제하에 순복시킬 때 가능합니다. 이때 우리가 성령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령의 열매가 우리를 통해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지난번 “사랑”에 대해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이미 우리 안에 넓게 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로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에 나와 있는 대로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라고 합니다. 이번 공부에서는 화평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마도 화평(평안)을 얻고자 애쓰는 인간의 육신적 노력이 너무도 나약하고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 모두는 실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평안이든 국가적인 평화이든 간에 평화처럼 얻기 힘든 것도 없습니다. 화평(평안, 평강, 평화)에 대해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합니다. 60~70년대를 거쳐 오신 분들은 온 세상이 평화, 평화, 평화를 외쳐대는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반전운동, 세계평화대회, 평화행진, 데모, 각종 시위나 평화회담 등 아무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이 땅에서 평화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더 많은 폭력, 살인, 충돌, 전쟁, 다툼 이런 소식이 신문과 방송에 넘쳐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진 에덴 동산에서부터 인간은 그 화평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 왔지만 여전히 “평화”는 갈망의 대상일 뿐 현실은 되지 못했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창설된 유엔이 활동을 개시한 이래로 100여 개의 전쟁이 이 세상에서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으니 평화의 성취야말로 전도요원(前途遙遠)한 것 같습니다. 이유야 간단합니다. 평화의 통치자(Prince of peace)가 없다면 이 땅에 평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 카톨릭 등 온갖 종교들이 평화를 수호한다며 외쳐대고 떠들어 봐야 평화의 통치자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줄 온갖 수단들(신경안정제, 뉴에이지 음악, 온갖 마약, 요가, 마인트 콘트롤 등)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절대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주님께 나아와 구원받고 그 결과로 평강을 누리게 될 때까지 아마 애들 많이 쓰셨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가라앉히고, 죄책감을 없애고, 죄짐을 내려놓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참된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심을 저와 여러분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5장 1절로 가 보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도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시고 이사야서 57장 19절부터 보겠습니다.
19 내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노라. 평강(平康)이 있을지어다. 멀리 있는 자와 가까이 있는 자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가 말하노라. 내가 그를 고쳐 주리라. 20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안식하지 못할 때의 요동하는 바다 같아서 그들의 물은 진흙과 오물을 내느니라. 21 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시느니라.
말씀을 보니 사악한 자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수단을 동원한다 해도 결코 평강이 없다고 합니다. 반면 로마서 5장 1절에는 여러분과 저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화평(peace)을 누린다고(have) 되어 있습니다. 이 화평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peace with God) 누리는 마음의 평안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에베소서 2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13절부터 14절 상반절까지입니다.
13 이제는 한 때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
앞서 우리는 이사야서 57장에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평화를(화평, 평강, 평안)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장이나 가정이 반드시 평화로운 장소일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평안을 발견합니다. 장소와 환경과 여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악인으로 둘러싸여진 세상에서도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평강은 전쟁의 종식도 아니고 우리의 원수들이 도말되는 것도 아니며 우리를 괴롭혔던 것들이 다 사라진 상태도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는 우리의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없다면 화평도 없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아무리 좋은 처방을 내려주더라도 그것이 화평을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럴싸한 종교집회에 자주 참석하든, 아무리 좋은 건강식품을 먹든지 간에 그 어떤 것들도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결코 당신에게 화평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이제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이 시간 저희를 도우셔서 이 진리의 말씀을 분명히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저는 종종 사람들이 “예수님이 없으면 평화도 없다”(No Jesus, No peace)라는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스티커는 어떨까요? “예수님을 알게 되면 평강을 알게 된다.”(Know Jesus, Know peace) 실로 맞는 말씀입니다.
이전에 살펴본 로마서 5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로마서 5장에 보니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겠지요. 그러나 의롭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우리 신앙생활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고 휴거를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드리지 아니하면 비록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확실하겠지만 이 땅에선 어쩌면 구원받기 전과 별반 차이 없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1절에 이어 2절을 읽겠습니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말씀을 보니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with) 화평을 누리게 된 것이 끝이 아니고, 이에 더하여 무엇이 더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가서 주님과 함께 있을 것만 붙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후 하늘나라에 가게 될 그때까지의 중간 기간에는 주님께서 어디서 무엇을 하시는지 도무지 모르거나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세의 삶은 엉망진창이거나 삶이 비참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확신과 기쁨과 축복을 누렸고 죽을 때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 중간의 삶은 왜 확신과 기쁨과 평강대신 “그저 그런” 삶을 그저 그렇게 보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의 시작과 끝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그 중간 동안에도 당연히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련과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여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데도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지 못한 것인지 저는 실로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부활시켜 하늘로 데려 가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째서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까? 바로 로마서 5장 2절이 그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다(have access)고 말씀하십니다. 은혜가 우리의 소유는 아니지만 접근(access)이 늘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는 어떤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까? 2절을 보니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이 기쁨이 다름 아닌 성령의 열매입니다. 3절에 환란도 기뻐한다고 합니다. 누가 그럴 수 있습니까? 앞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즉 1절에 나온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모두 다 환란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접근)을 얻은 자들이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환란을 겪으면서 기뻐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6절부터 9절까지는 우리 과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10절 끝부분은 미래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러나 11절을 보십시오.
그러할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now) 속죄를 받았으며 그분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또한 기뻐하느니라.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이제(now)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아닌 지금 현재에 대한 언급입니다. 우리는 속죄하면 늘 과거 생각을 하고 미래에 하늘나라 갈 생각만 하지만 이 속죄는 현재 내가 받아 가지고 있는 것이요, 따라서 현재(이 땅에 사는 동안)의 삶에 “역사”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간다는 사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환란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참 평안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로 인해 내가 지니게 된 평강은 환란이 닥쳐오면 한계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환란을 겪는 동안(즉 현재적 삶)에 우리는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평강으로는 인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부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항해 가운데 파도가 치고 폭풍이 몰려올 때 우리 모두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저는 요즘 자주 비행기를 타고 설교하러 다니는 편입니다. 이륙에서 착륙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비행기가 정상적으로 날아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늘 평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의 평강 가지고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평강을 유지하기 위해 평강에 관한 성경구절을 암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인생의 시련들이 닥쳐올 때면 나의 평강은 여지없이 한계를 드러내고 맙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는 평강이 부족하고 평강을 생산할 능력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4장을 보십시오. 36절부터입니다.
36 그들이 무리를 보내고 그분을 배 안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작은 배들도 그분과 함께하더니 37 큰 폭풍이 일어나고 파도가 배 안에 들이쳐서 이제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그분께서는 배 뒤쪽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그들이 그분을 깨우며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A) 아니하시나이까? 하매 39 그분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신즉 바람이 그치고 매우 고요하게 되거늘 40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서로 이르되,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심지어 바람과 바다도 그분께 순종하는가? 하더라.
36절, 37절에 보니 큰 폭풍에 배가 침몰될 지경이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주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분의 평강이 폭풍과 파도가 일으키는 불안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폭풍과 파도가 일으킨 두려움과 불안보다 주님께서는 훨씬 더 큰 평강을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주님의 평강을 “돌아보지 아니하심”으로 착각했습니다.(38절) 여기서 잠깐 빌립보서 4장으로 가 보십시다.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입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은 우리 보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Be careful for nothing)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셨고(6절) 오히려 하나님의 평강으로 가득 하셨습니다(7절). 폭풍 속에서 제자들은 외쳐댑니다. “주여, 염려가 되지 않으십니까? 주여, 염려가 안 되시냐구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나는 나의 염려를 내 아버지께 모두 맡겼느니라. 아버지께서는 내 염려를 다 받으셨고 내게는 아버지의 평안을 주셨느니라. 나는 이 폭풍이 두렵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내가 바다 건너편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평안을 지니고 계셨기에 폭풍우 가운데서도 편안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는 가지셔야 할 염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염려는 다 아버지에게 맡긴 후였으니까요. 예수님께서는 폭풍우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평강으로 평안을 유지하고 계셨으나 제자들은 동일한 폭풍우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환경도 여건도 상황도 동일합니다. 다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갖고 계셨고 제자들은 그 마음이 없었다는 점이 차이일 뿐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놀랍게도 바람도 바다도 다 그분께 순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평안(peace)을 받아서 바람과 파도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peace, be still.) 여기 보니 영어로 “peace”라는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평강을 공급하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이 평강을 바람과 바다는 받아들여 바람이 그치고 매우 고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동일한 평강을 우리에게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바람과 파도와는 달리 도무지 받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피조세계(creation)는 주님께 순종하는데 우리는 주님께서 평안(peace)이 너희에게 있으라, 하면 즉시로 “주님, 그렇지만 제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은 어떡하고요?”, “주님, 제 처지를 이해 못하시는 것 아닙니까?”, “주님, 이 상황에서 어떻게 평강을 가지라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대꾸하면서 불순종을 일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7장 20절에 보니 사악한 자들은 안식하지 못할 때의 요동하는 바다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흙과 오물을 낸다고 했지요. 정확히 우리의 모습입니다. 결국 21절에서처럼 “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십니다.
어떤 분은 “우리가 사악하다”고 하니까 즉시 “아닙니다. 저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저는 구원 받았는데요.”라고 대답하시더군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강을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지 않은 만큼 사악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사야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악한 자들”이란 결혼해서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와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악한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우리의 평안이 한계에 다다를 때 왜 우리는 더 이상은 평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평강을 받아들일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염려를 가져온 이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서 충분히 담당하시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보배로운 피로 깨끗이 씻기실 수 있고 우리를 지옥의 형벌에서 건져내어 하늘나라로 데려 가실 수도 있다고 믿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이 “근심” 혹은 “염려” 같은 문제를 하나님께서 담당치 못하실 거라고 생각하다니 이런 불신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 문제만은 하나님께 못 맡기겠어.”, “이 문제만은 아버지께 의탁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제 감정은 절대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의 모습들이 하나님을 제한하는 “사악함”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처럼 작은 분이시기에 당신의 그 큰 문제와 그 큰 염려는 도저히 어찌하실 수 없다는 것인가요?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삶에서 종종 부딪히는 현상입니다. 힘든 문제에 부딪치면 스스로 무진 애를 쓰다가 정작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한 순간에는 “불신”의 모습을 보이는 그런 것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안을 생산해 낼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평안은 성령께서만이 맺으실 수 있는 열매라는 사실 말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을 보겠습니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으며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26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27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기 보니 주님께서는 우리의 평안을 늘려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나의 평안(my peace)” 즉 주님의 평안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평안이 항상 가능하다는 것 아시지요?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어떤 것을 염려하고 계신다는 것이 성립될까요? 주님께서 해결치 못한 문제가 지난 24시간 동안 있었을까요? 주께서 두려워하실 일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27절 말씀대로 주님은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14장 1절에도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모든 두려움, 불안, 의심, 불확실, 좌절, 초조감 등은 인간에게 신뢰를 둘 때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과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되었건 남이 되었건 간에 인간은 “그것”을 해낼 수 있을지 확실치 않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평안이란 인간의 행동능력에 근거하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사라져 버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안은 인간이 아닌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을 신뢰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므로 제한이 없습니다. 이 평안은 우리 안에 항상 머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신의 책임하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우리 안에서 살아내시는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를 신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중 내일 GM 자동차 회사가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 회사가 어떻게 되는가는 내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될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염려할 일이 아니지요. 우리가 늘 근심과 염려 속에 살면서 평강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 중에는 얼마나 힘든 일들이 생기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머릿속엔 우리 인생의 일들로 가득 차 있으니 근심 걱정이 떠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분은 신뢰할 만한 분이시니 그분께 우리의 모든 염려를 내맡길 수 있고 그렇게 될 때에만 평안한 마음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7절에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사야서 26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4장도 함께 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평안했다가 갑자기 닥친 위기 상황 때문에 내 마음이 불안해졌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대신 그 위기에 마음과 생각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로부터 “암 선고”를 받거나, 가족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거나, 회사의 부도 소식을 듣게 되면 자연히 두렵고 불안해지며 긴장이 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 위기 상황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어디에다 고정시키느냐입니다. 만약 내게 닥친 그 위기만을 생각하게 되면 결국 마음의 평강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나의 생각이 하나님께 머무르게 된다면 그분의 평강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도중 계속해서 어려움들이 닥치는 것은 우리로 그 어려움대신 주님께 생각을 고정시키도록 훈련시키셔서 우리를 영적으로 강건하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26장 3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께서는 생각을 주께 고정시킨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
생각이 주께 고정된 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갈 때도 그러기가 힘든데 모든 일이 엉망으로 되어버렸다면 그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누가복음 24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다락방에 숨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36절입니다.
그들이 이같이 말할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의 한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앞서 우리는 파도와 폭풍우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졌다는 사실(peace를 받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37절 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까?
그러나 그들이 무서워하고 놀라며 자기들이 영을 본 줄로 생각하매
만물이 주님께 순복하고 평안을 되찾는 반면 제자들은 무서워하고 놀랐다니, 어째서 그랬을까요? 그들의 마음이 사악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7절에 보시면 “자기들이 영을 본 줄로 생각하매”(supposed)라고 씌여 있습니다. 제자들 모두 하나같이 추측을 잘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디모데전서에서는 악한 추측(evil surmising : 딤전 6:4)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진리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상상이나 잘못된 추측으로 인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평강대신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추측대로 영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오히려 제자들이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했더라면 주님의 말씀대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이 성취되었을 텐데 자신들의 생각에 매달리다 보니 엉뚱한 결과를 가져온 셈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왜 우리가 때로 그처럼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지 아십니까? “뭐가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것 같아.”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우리도 쉽게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어떤 일이 생기기만 하면 그 일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추측하거나 상상하면서 근심 걱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평강은 즉시 사라져 버립니다.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대신 자신들의 추측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우리를 포함해서)이 동일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38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불안해하며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염려하느냐?
여기 보니 “마음속으로 염려한다”A)고 되어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이사야서 26장 3절대로 우리의 생각(mind)이 예수님께 고정되지 않고(stayed), 마음 안에서 일어나 엉뚱한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면 악한 추측이 일어 두려움과 불안을 야기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처한 상황(situation)이 너무도 엄청나서 우리가 평강을 잃고 불안해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 고정되어 있지 못해 떠다니며 그 상황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 어려움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가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갈 것같이 추측과 상상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 머물러 있고 우리가 주님을 신뢰한다면 주님의 평강이 우리 안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살이 가운데 얼마나 자주 우리가 평강을 잃어버리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 불안, 의심, 초조, 쓴 뿌리, 미움, 절망, 고뇌 이런 것들이 떠오르게 되면 우리는 즉시 마음의 평정이 무너집니다. 이럴 때 이런 생각들을 즉시 처리하고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키지 않으면 평강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들, 추측들, 상상들이 마음 속에 떠오를 때마다 매순간마다 즉시 이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들과 교제할 생각이 없노라.”
“나는 예수님과 교제할 시간밖에 없노라.”
“나는 너희들과 시간 낭비할 수 없노라. 예수님과 교제하느라 너무도 바쁘도다.”
얼마 전 한 목사가 젊은 목사 하나를 데리고 와서 제게 상담을 좀 해줄 수 있느냐고 해서 만났습니다. 전도가 양양한 젊은 목사는 크게 낙망한 상태였습니다. 처음으로 사역하던 교회가 쪼개졌고 그는 내쫓겨난 상태였으니까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교회 안에서 다툼이 벌어져서 결국 일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저더러 나가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간에 있었던 온갖 희한한 일들을 다 이야기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런 것은 다 아는 얘기니,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소. 그랬더니 고개를 숙이면서, “실은 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교인들 간의 분쟁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목사로서 그 정도는 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개입했는데 결국은 엉망이 되어 버려 이 꼴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과거 경험을 다 들려주면서 저도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책도 쓰고, 테이프 사역도 크게 하고, 여기저기서 설교 초청도 받는 저 같은 목사가 자기와 똑같은 일을 했고 똑같은 일을 당했다니 믿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제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는지 다른 교회에서 새롭게 사역을 해 보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지금 형제님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역이 아닙니다. 형제님이 이번 사건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로 새로 사역을 시작한다면 똑같은 문제가 생길 겁니다. 형제님이 말한 대로 그 교만이 남아 있다면 주변 목사들이 쫓겨난 목사라고 수군댈 때 당신은 또 평정을 잃고 또 망가지고 맙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겪은 일이라니까요. 한때 저는 4년 동안 주일학교 교사도 못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시간 동안 계속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역해서 믿음을 세워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의 문제는 간단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 계속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고 동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들로 가득 찬 그는 주님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했고, 헌신되어 있었으며, 뜨겁게 주님을 섬기고자 했던 그러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형제 자매들을 최선을 다해 도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제 해결에 있어 무기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헌신되고, 열정으로 가득 차고, 아무리 거룩하게 살고 모범적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시련과 고난들을 자신의 힘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시련이 닥치면 우리는 그 시련을 다루기는커녕 우리의 생각(mind)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일마저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육신은 신뢰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아무리 우리의 영이 원한다 할지라도 육신은 너무도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어려움을 다룰까? 어떻게 이 위기를 넘길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다만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속에서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그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
우리는 구원받을 때 주님의 몸의 일부가 됩니다. 휴거가 일어나면 이 몸은 주님을 만나러 올라갑니다. 그렇다면 구원과 휴거 사이 즉 이 땅에 우리가 사는 동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화평(평강, 평화, 평안, 안녕)이 자신의 몸의 모든 지체들에게 늘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15절에 보면 “~하라”(Let)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우리가 허락(let)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화평이 항상 우리를 다스리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근심하지 않도록 하고(let), 하나님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다스리도록 허락(let)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평안을 우리 안에 지속시키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하거나 방도를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께서 그리하시도록 하면 됩니다(Let it happen).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시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속에서 다스리게 (허락)하라.”(Let the peace of God rule in your hearts.)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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