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구원과 성숙을 위한 기다림
오늘 설교는 상당히 꺼림칙한 상태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4시간 전에 오늘 설교 제목인 “오래 참음”에 있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실패한 내용을 가지고 설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허나 이미 앞서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저도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서 계속 역사(work)하셔서 결국은 이 열매도 맺히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라고 합니다. 오늘은 “오래 참음”에 대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아마 오늘 말씀은 듣고 놀라실 분이 많으실 겁니다. 솔직히 저도 매우 놀랐으니까요. 사실 오늘 이 메시지를 전할 때까지도 저는 이 내용을 인식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오래 참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성경구절들과 그 앞뒤 문맥을 다 찾아 읽어 가다보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반역을 한 이 세상의 죄인들에 대해 취하시고 계신 태도가 다름 아닌 오래 참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성경의 어떤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알지 못하다가 성경구절들을 비교하며 문맥을 살피다 그 정확한 의미가 드러나는 경우 말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에 대해 생각해 보니,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과 저의 그 어떤 죄악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철회하시도록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축복과 용서를 취소하시도록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 “오래 참음”이 부족합니다. 물론, 저는 최선을 다해 주님의 증인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어떻게든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정말이지 “더 이상은 못 하겠다.”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제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죄인들이 있더란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오후 제가 전화를 한 통화 받았는데 누군가가 저한테 전화하면 성경에 관해 답변해 줄 수 있다고 해서 전화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아는 대로 도와드릴 수 있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성경에서 삼위일체를 믿을 만한 근거 구절이 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럼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우선 당신께서 킹제임스성경을 갖고 계신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좀 힘들지요. 상당한 구절들이 다르거든요.” 그랬더니 “좋습니다.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한일서 5장 7절을 보세요.”라고 했더니 “그 구절은 시내사본과 바티칸사본에는 없는 구절인데요.”라고 즉각적인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 사람은 진리를 알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논쟁하고자 하는 사람인 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말씀을 했더니 ‘하나의 무엇’이란 말입니까?”라고 대꾸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말씀을 인용했더니,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invisible)이신데 어떻게 보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으니 보일 수 있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즉시 엉터리 성경을 인용하면서 육신을 입고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그분일 뿐이라고 하더군요. 결국 20분이 넘게 인내심을 갖고 공손하게, 그리고 친절한 어조로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그는 킹제임스의 오류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돌아섰습니다.
알고 보니 여호와의 증인 중에서 좀 “날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처음부터 “저는 여호와의 증인인데 당신과 성경에 대해 논쟁을 좀 하려 합니다.” 이렇게 말했더라면 저도 기꺼이 그 논쟁에 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저를 속이고서는 마치 성경에 대해 문의를 하는 것처럼 했지요. 결국 저는 성질을 못 참고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메시지를 실패 가운데 전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우선은 그 사람이 진리를 알고자 하지 않고 제가 인용하는 성경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 그랬고, 또한 제가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으니 마음이 상했지요. 그러나 정말 제 마음이 상한 것은 제가 그 사람에게 끌려가 결국은 육신적으로 행동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자였고 저는 구원받은 사람이었는데도 누군가가 그 사건을 주시하고 결말을 지켜보았다면 제가 오히려 더 나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이 더욱 속상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사람보다 더 나아야 하거늘 결과는 그렇지 못했으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세상 사람 하나를 그저 30분 정도 대하면서도 못 참고 말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수백만이 넘는 자들을 매순간마다 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래 참음”이라는 주제를 대하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전혀 근접하고 있지 못한 저를 바라보게 됩니다. 저는 거리설교를 좋아합니다. 한 30분 정도 “열”을 내서 외쳐대고 나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제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왜 저들을 땅을 갈라 산채로 집어던지지 않으시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제가 76년에 구원받았으니 만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75년에 끝나버렸다면 저는 지금 지옥에 가 있겠지요. 이중에는 “91년에 하나님의 인내가 끝났다면 나는 지옥행이었을 텐데.” 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직도 다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저희에게 아버지께서 어떠하신 분이신지, 아버지의 성품은 어떠하신지 보여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시며 이를 통해 우리가 아버지를 어떻게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베드로후서 3장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오래 참음(longsuffering)이란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 즉 악한 자들에 대해 취하시는 자세, 혹은 태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배우고자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4절부터 15절까지 보십시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나니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화평 중에 그분께 발견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자기가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여기서 주목할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는 말씀 말입니다. 어떤 분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구원인데 어찌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요, 그러나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더라면 우리에겐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인데요.”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더라면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엄격함을 감안한다면(‘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 생각나시지요!) 아마 13세 이전에 우리 중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시 13세 이전에 구원받으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예외적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13세가 넘어 20세, 30세가 되어서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들의 소행을 참아 오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로써 우리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시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더라면 일찌감치 처벌 받아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태도, 나의 언어, 나의 교만, 나의 불순종뿐만 아니라 온갖 소행 등을 다 참아내시고 결국 제가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받을 때까지 기다려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선 창세기 6장 5절에서 7절까지 보겠습니다.
5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 또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멸하되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날짐승까지 다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으로 인해 슬퍼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3장 20절입니다.
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방주 안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가 몇 안 되니 곧 여덟 혼이라.
창세기 5장을 보면 에녹이 휴거된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2장을 보면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또 하나의 휴거가 나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창세기 6장 5절에서 7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소행을 오랫동안 참고 계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노아가 방주를 다 완성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그 사악한 자들에게 의인 노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오랜 기간을 오래 참고 계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그토록 오래 참으심... 이것이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여러분과 저의 인격이나 수양이나 본성이나 기질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 오래 참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실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어떻게든 죄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동성연애자들이 퍼레이드를 벌이는 곳에 가서 전도지를 나누어줄 때,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성질내지 않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하시나요?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것들이 노아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이르기를 사람의 사악함이 커지고 모든 생각과 상상이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근심하셨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들 악한 자들 모두에게 언제든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오래 동안 참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마음만 돌이켰더라면 언제든지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요즘 낙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이란 사람들이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들에게 총을 쏘는 일이 있었는데 이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오래 참음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절부터 보겠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라, 곧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걸으며
여기 보니 비웃는 자들이 등장하는군요. 저는 사실 이런 자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들은 일부러 알려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정말 저는 참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들려주는데 왜, 왜, 왜 거부 하는거냐? 이 못된 자들아! 속히 회개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거라!”며 목이 터지도록 외쳐대고 싶은 심정입니다. 물론 이런 태도가 옳지 않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찌되었든 지옥에는 가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 같으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분은 그 어떤 식으로든 누구에게도 아무 말을 안 할 겁니다. “이봐요,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거의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속히 영적으로 성숙해서 올바른 태도로 전도하는 것이 최상입니다만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은 아닙니다. 지금은 좀 육신적인 모습이지만 그 언젠가 성령께서 온전히 통제하실 때 올바른 자세로 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7절부터 보십시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해 예비해 두셨느니라.
말씀을 보니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결국은 불로 심판받게 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주목하십시오. 저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복음을 거부하는 자가 나타나면 “그래, 나는 내 할 일을 했으니 주님을 거부한 자여! 그대 갈 길로 영원한 지옥불로 가거라!”는 식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모양이야 어떻든 제가 해야 할 의무 중 증언(witnessing)은 한 셈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와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에스겔서를 보니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위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우리의 조급함을 비교해 보세요.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발로 먼지를 털며, “오, 그래? 우리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거야.” 하고 끝내 버리기가 일쑤 아닙니까? 이 순간 저와 여러분은 성령님의 통제하에 놓여 있지 않고 육신 안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다르십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신다고 합니다. 어째서 지난주에 하늘과 땅이 불타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번 주에도 몇 사람이 구원받도록 주님께서 오래 참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 왜 지구가 불살라지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오늘 오후에 그 누군가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사악함을 말끔히 정결케 하시고자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전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34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당연히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타락사건 때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으나 실은 아담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담대신 어린양이 죽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아담에 대해 오래 참으셨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기록해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가인이 첫 번째로 살인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보존하셨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인의 생명을 빼앗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노아 시대에도 앞서 본 바대로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이번에는 출애굽기 34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10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옵니다. 두 개의 돌판 위에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10계명입니다. 32장에 모세가 내려오는데 멀리서 보니 아론이 이상한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보니 사람들이 금송아지에게 경배하며 벌거벗고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 흉측한 모습을 본 모세는 크게 분노하여 두 돌판을 내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금송아지를 빻아 가루로 만들어 강물에 풀어 모두가 마시도록 했습니다. 3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다시 산으로 부르십니다. 34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으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들에 있던 말들을 내가 이 판들 위에 쓰리니
여기 보니 금송아지 만들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 아니라 모세가 10계명이 들어있는 돌판을 깨뜨렸다고 합니다. “주님, 금송아지 만든 자들이 계명을 깨뜨린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항변했을지도 모르지요. “모세야, 네가 깨뜨린 처음 판들에 있던 말들을 다시 쓰겠으니 꼭 같은 판을 두 개 만들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시고 계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2 아침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거기서 산꼭대기에서 네 자신을 내게 보이되 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게 하며 온 산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게 하고 양 떼나 소 떼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4 모세가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돌 판 두 개를 손에 들고 시내 산에 올라가니 5 주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사 그와 함께 거기서서 주의 이름을 선포하시니라. 6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7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되 그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 8 모세가 급히 땅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경배하며
6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그중에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보호하시고 먹이시고 돌보셔서 시내산까지 인도하셨으나 이들은 그 모든 은혜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만들어 경배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모세는 참을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참으셨을 뿐 아니라 이들에게 다시 십계명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들이 그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집트에서 보이신 열 번의 재앙, 유월절 사건, 홍해를 건넌 기적, 이와 같은 엄청난 역사를 보고도 금송아지를 만들었을까 싶지만 사실입니다. 표적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참아내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수용할 때까지 하나님은 오래 참고 계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런 짓을 하고 있는 모습을 여러분과 제가 보았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와 심판, 정의, 지옥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쭉 열거하면서 정죄를 선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거부하겠단 말이지. 그렇다면 좋소. 당신은 영원한 불못에서 영원히 불타오르며 고통을 당할 것이지요. 꼴좋게 됐군요.” 혹시 이것이 여러분과 제 입에서 나올 법한 말들은 아닌가요? 그러나 이런 행동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 서너 번이 지나고 계속해서 고집불통으로 복음을 거부하고 조롱하는 경우, 어쩌면 여러분과 저는 그런 식으로 분노를 터뜨릴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옥과 심판에 대해서는 정확히 선포하고 설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죄인들이 지옥가기를 바란다는 식의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민수기 14장 17절입니다.
17 이제 간청 하옵나니 이미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주의 권능을 크게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18 주는 오래 참고 긍휼이 많아 불법과 범죄를 용서하나 결코 죄 있는 자들의 죄를 깨끗이 치우지 아니하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느니라, 하셨나이다.
여기 보니 모세가 앞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하신 말씀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모세는 주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18절)을 제일 먼저 기억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을 기억해 볼 때 모세의 마음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자주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이 유익한 이유는 우리가 아차하면 과거에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일들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고, 또 참고 기다리셨는지를 상기하는 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오, 놀랍도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여! 과연 그렇습니다. 주님이 오래 참아 주셨기에 드디어 여러분과 저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구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래 참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벌써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주님의 이 오래 참으심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주변의 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주려고 하지 않고 조급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우리로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로마서 2장으로 가기 전에 로마서 1장 28절부터 보겠습니다.
28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생각에 내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 29 그들은 곧 모든 불의와 음행과 사악함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하며 시기와 살인과 논쟁과 속임수와 적개심으로 가득하고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뒤에서 헐뜯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업신여기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한 일들을 꾸미는 자요,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요, 31 지각이 없는 자요, 언약을 어기는 자요, 본성의 애정이 없는 자요, 화해하기 어려운 자요, 긍휼이 없는 자라. 32 그들이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같은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들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느니라.
그리고 로마서 2장 1절에서 3절입니다.
1 그러므로 오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누구이든 변명할 수 없나니 이는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들을 행하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서 네 자신을 정죄하기 때문이라. 2 그러나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확신하노라. 3 오 그런 일들 행하는 자들을 판단하고도 같은 일들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 보니 온갖 죄를 지은 자들의 목록이 나오고 결국 32절에서 이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2장 1절에서 3절에서는 그런 짓을 행하는 자들을 판단해 놓고도 같은 일을 하는 자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4절을 보십시오.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로마서 1장 29절에 불의한 자가 나오는데 32절에 따르면 죽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마서 2장 4절을 보니 그런 사람들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계십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이해하시겠습니까? 29절에 음행하는 자가 나오고 32절에 죽어 마땅함이 나오는데 2장 4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도 오래 참으십니다. 여기 나와 있는 죄의 목록 중 여러분과 제가 저질렀던 죄들도 있습니다. 이 죄로 인해 우리는 죽어 마땅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이 점은 여러분도 스스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부터 31절까지 나오는 모든 죄들 하나하나가 다 죽어 마땅하다는 판결이 났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죄들을 지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로마서 2장 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선하심, 관대하심, 그리고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이 없었더라면 여러분과 저는 회개할 기회를 결코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았습니다.” 물론 당연히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대답한다고 해서 여러분은 처음부터 복음을 믿으셨나요? 아니면 그전에 여러 번 거절하거나 무시하고 조롱하지 아니하셨나요? 아마 우리 대다수는 회개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주시지 않았더라면 벌써 지옥불에 던져졌을 겁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이처럼 소중한 것인 줄 알고 계셨습니까? 로마서 9장으로 가 보십시다. 22절입니다.
22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보이고 자신의 권능을 알리기 위해 파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에게 심히 오래 참으심으로 인내하시고 23 이로써 영광에 이르도록 미리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들에게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려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긍휼의 그릇들은 우리니 곧 그분께서 유대인들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신 자들이니라.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을 심히 학대했던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자를 하나님께서는 살려두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통해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런 자에게까지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합은 사악한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가 열다섯 살 때에 죽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를 매일 아침, 그 어느 때고 죽이실 생각만 있으셨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악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상숭배, 이세벨 사건, 나발 사건, 선지자들을 학대함 등등 셀 수 없는 죄악들에도 불구하고 이 자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엘리야를 보내셔서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런 자에게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성경은 실로 놀라운 책입니다.
느브갓네살은 이방제국의 독재자입니다.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강요한 자요, 거부하는 자들을 풀무 불에 내던진 자입니다.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거룩한 성전의 기물들을 가져다가 파티용 그릇으로 사용했던 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중 일부를 내시로 삼고 노예로 삼는 등 실로 엄청난 짓을 저지른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어느 때고 죽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살려두셨다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통해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제게 만일 전능한 권능이 있었다면 저는 아마도 파라오, 아합, 느부갓네살도 결코 오래 살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 모두를 오래 참으심으로 대하셔서 이들이 참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느브갓네살이 다니엘서 4장에서 다니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장면말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는 저런 못된 사람을, 못된 우상숭배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오래 참으심으로 이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연장시켜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하고 나쁜 자들마저도 지옥에 내던져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런 자들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제 서재에는 엄청난 양의 선교사의 전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책들을 읽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고문당하는 이야기를 읽어 보시기 권합니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코 들으려하지 않는 고위 관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오히려 고문을 당하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악하고 못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즉시 죽이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구원받도록 기회를 주시려고 오래 참으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립니다만 저에게는 이러한 오래 참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구원받은 자녀이고 성령께서 제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처럼 오래 참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래 참을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교사들에게 주셨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같은 선교사들 말입니다. 어떻게 이들 선교사들은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능할까요? 그렇습니다! 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우리는 히틀러 같은 자가 죽기를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모택동 같은 자가 죽기를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카스트로도 호치민도 지옥에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좀더 살펴보십시다. 예레미야 15장과 디모데후서 3장을 통해 이 주제와 관련해 조금만 더 보십시다. 예레미야 15장 15절을 보십시오.
오 주여, 주께서 아시오니 나를 기억하고 돌아 보사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복수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시는 중에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주를 위하여 내가 책망 당하는 줄 아시옵소서.
내용인즉 예레미야는 주를 섬기는 자기를 너무도 고통스럽게 하는 자들을 당장 “박살”내 달라고 하는군요. 하나님께서 그 누구에게든 오래 참으셔도 상관없으나(예를 들면 아담, 가인 등) 자기를 괴롭히는 자들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으니 당장 복수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오래 참으시는 중에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을 위해 당하는 박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원수를 하나님께서 당장 갚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으로 가 보십시다. 10절에서 14절입니다.
10 그러나 너는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안디옥과 이고니움과 루스드라에서 내게 닥친 핍박과 고난을 잘 알았으며 내가 어떠한 핍박을 견디어 냈는지 잘 알았느니라. 그러나 주께서 그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져내셨느니라. 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터이나 13 악한 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의 영적 자녀 디모데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명합니다. 내용인즉 그가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성품대로(godly) 살다가 얼마나 박해와 핍박과 고난을 당했는지를 잘 기억하고, 혹시 그런 일들을 당할지라도 본 그대로 참아내고 이겨내라고 합니다. “디모데, 너는 나와 함께 다니며 우리가 받은 핍박과 그 핍박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잘 알고 있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자에게는 늘 그런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네가 배운 대로 계속해서 그리하라.” 이것이 바울이 그의 유언 같은 디모데후서에서 남긴 말입니다. “배운 대로 계속하라(continue)!”, “배운 대로 계속하라(continue)!”
바울은 그가 잘못된 대우를 받았을 때도, 비방과 핍박을 받았을 때도, 능욕을 당했을 때도,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 어느 때든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오래 참음으로 세상의 악한 행실을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들에게로 돌아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경험을 통해 그가 얻은 교훈을 자신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네가 보고 배운 그대로 계속하라. 왜냐하면 그럴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의 결론입니다. 저라면 어떠했을까요? 제가 복음 전하다가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힌다면 복음 증거를 중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제게 없다면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오래 참음 때문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누어 주셔서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으로 가 봅시다. 4장 1절도 같은 문맥입니다.
1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곧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2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여기 보니 2절에 말씀을 선포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3장 17절에 그 말씀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다시 4장 2절에 보니 때가 맞든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만 있다면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 말씀대로 교리를 가르칠 수 있고, 책망할 수도 있고, 바로잡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17절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throughly) 갖추어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철저히”란 단어를 보십시오. 모든 과정을 다 통과하여 철저히 준비된다는 뜻입니다. 3장 17절이 없다면 4장 2절의 나의 책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침에 저는 전화 걸어온 사람에게 교리, 책망, 바로잡음, 의로 교육하는 일에는 능숙했는지 모르지만 제 자신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오래 참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멋지게 수행하여 내가 옳고 그가 틀리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지만, 3장 17절을 지키지 못해 결국 제게 잘못된 행동을 하는 그 사람에게 올바르게 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선포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교리를 말하고 책망도 하고 권면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없이 혼자서 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다면 그분의 오래 참음이 함께 했을 테지요. 즉 주님의 일을 하더라도 주님께서 자신의 모든 오래 참음으로 저를 통제하고 돕지 아니하신다면 주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으로 교리도 전하고, 책망도 전하고, 바로잡아 주고 의로 교육하고 권면도 해야 합니다. 당연히 성도로서 해야 할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때 주님이 우리를 통제하지 아니하시면 결국 우리는 성령님대신 우리 육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그 결과는 몹시 추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일 뿐임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두 구절을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디모데전서 1장을 보십시다. 12절부터입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그분께서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 내게 사역을 맡기셨기 때문이라. 13 내가 전에는 신성모독하는 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얻게 됨은 내가 믿지 아니하는 중에 알지 못하고 그렇게 행하였기 때문이라.
여기 보니 바울은 전에 신성모독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였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복음 전하러 가면 이런 자들을 종종 만납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런 자들 중에서 바울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핍박과 고문을 받으며 때론 화형에 처해지면서까지 그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분들은 이런 자들 중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바울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14절부터 이어 읽겠습니다.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 16 그러나 먼저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이후에 자신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으니 이런 까닭으로 내가 긍휼을 얻었느니라.
16절을 주목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모든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바울 같은 신성모독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가 긍휼을 얻어 구원받아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주님께서 바울의 모든 소행을 견디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님은 이렇게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나는 너의 온갖 소행을 오랫동안 참아왔다. 그러나 나는 너를 구원할 것이다. 알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를 용서하리라. 나는 너를 구원하리라. 이제 됐으니 돌아서서 내게 오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16절 끝부분을 보니 바울이 본(pattern)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떠한 본을 말합니까? 비록 우리가 바울처럼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지 못했어도, 주님을 만나지 못했어도, 쓰러져 장님이 되진 않았어도, 우리 모두는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소행을 모든 오래 참으심으로 견디어 내신 후” 그분의 긍휼을 힘 입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바울은 우리 모두의 본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모든 오래 참으심이 여러분과 제 안에서 발휘되기를 주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더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받아들여 점점 더 인내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그 순간 주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역사하여 우리로 인해 죄인들이 정죄대신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1절부터입니다.
1 그런즉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너희에게도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 하였도다,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3 이 사역이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어떤 일에서도 실족거리를 주지 아니하며 4 오직 모든 일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하되 많은 인내와 고난과 궁핍과 곤경과 5 매 맞음과 옥에 갖힘과 소동과 수고와 깨어 있음과 금식 가운데서 그리하고 6 순수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성령님과 거짓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능과 오른손과 왼손에 든 의의 병기로 그리하며
4절을 보니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되는 것이 나옵니다. 아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모두가 그리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입증되려면 인내, 고난, 궁핍, 곤경(5절), 이러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 중간에 “오래 참음”이 나옵니다. 이 오래 참음으로 고난, 궁핍, 곤경, 매 맞음, 옥에 갖힘, 소동, 수고, 깨어 있음, 금식 등을 다 견뎌내야 합니다.
우리 한번 솔직해 보십시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ungodly)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 우리 경건한 자들(godly)이 그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우리에게 못되게 굴거나 잘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오래 참지 못하고 성질을 내거나 다투어 죄를 짓고, 간증을 잃어버리는 수가 얼마나 많은지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되어서는 안 되겠죠. 오히려 그들이 우리의 오래 참음으로 인해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자주 곤경에 처하거나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때 우리에게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으면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오히려 우리로 죄를 짓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때야말로 철저히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노아의 방주를 지을 때에도 당시의 경건치 않은 자들이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인류 역사 내내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혹시 회개할까 오래오래 참아오셨습니다. 그 동일하신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서도 오래 참기 원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인해 감사합니다. 저희 안에서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역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저희 안에 주께서 살아 계심을 보게 하사 저희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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