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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족들과 성경을 읽을때 박사성경을 보면서 빠지고 삭제된 부분들을 다시한번 살펴보고 있습니다. 정확하고 바른 번역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위의 예에서 보듯 기쁨과 자랑의 차이를 킹제임스 성경은 정확히 번역하여 논리적 모순이 생기지 않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2016-04-22 21:43:13 | 김수영
단어 대 단어 의 일대일 번역이 무엇인지, 형식적 일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문맹인 같아서 답답했지만, 하나님께서 온전히 보전해 주셔서 그 차이를 자세히 알게 해주시고, 잘못된 번역 기법에 따라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닫고난 지금 이 귀중한 자료들을 많은 이들에게 공유케 하여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생깁니다.
2016-04-22 17:19:13 | 신연종
개역성경으로 성경 말씀을 묵상하거나 공부를 할때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단어들이나 문맥들이 성경 말씀을 이해 하는데 많은 혼란이 있었지만 흠정역을 알고 난후 혼란스러운 원인을 알게되었고, 올바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정확히 번역하여 성경적 교리를 확실히 정립 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올바른 진리의 말씀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2016-04-22 17:13:27 | 신연종
저는 유튜브를 통해 성경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설교말씀을 듣곤 하는데 간혹 지나친 원어 설명으로 성경의 본 뜻을 저버리는 분의 설교를 들을때는 몸에 힘이 쭉 빠지곤 합니다. 영어도 잘 모르는데 원어까지 공부해야 하나? 어디까지 배워야하나? 참 힘들다. 위 글을 보며 흠정역 성경 을 선택하길 정말 잘 한 것 같습니다.
2016-04-22 15:35:11 | 권오현
성경을 읽으며 문체가 부드럽고 명쾌하게 번역되어 번역자의 수고에 감사 하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위 글을 보며 디테일한 단어 선택과 형식적 일치기법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었으며 번역에 수고한 손길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6-04-22 15:11:46 | 권오현
안녕하세요?   최근에 ‘단어 대 단어’, 즉 ‘word for word’라는 말이 경우에 따라 형식적 일치(formal equivalence)를 의미할 때도 있고 기계적 일치를 의미할 때도 있음을 보여 드렸습니다. 또한 성경 원어를 번역할 때 그것을 모두 기계적으로 일치시키면 졸역이나 오역이 된다는 것도 아랫글을 통해 보여 드렸습니다.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 즉 일대일 번역의 의미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manus&write_id=52   1. 단어 대 반어 번역의 의미 재확인   이와 관련해서 어떤 분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God forbid’라는 말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해서 잠시 글을 씁니다.        ‘God forbid’는 킹제임스 성경에 구약에 9번, 신약에 16번 나옵니다. 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구약은 스트롱 번호 2486, 신약은 3361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구약의 예를 보겠습니다.   백성이 사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안에서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어야 하리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이다. 그가 이 날 [하나님]과 함께 일하였나이다, 하여 백성이 이렇게 요나단을 구출하였으므로 그가 죽지 아니하니라(삼상14:45).   And the people said unto Saul, Shall Jonathan die, who hath wrought this great salvation in Israel? God forbid: [as] the LORD liveth, there shall not one hair of his head fall to the ground; for he hath wrought with God this day. So the people rescued Jonathan, that he died not.   여기서 ‘God forbi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2486  hl;ylij;   chaliylah  {khaw-lee'-law}  or chalilah  {khaw-lee'-law}또는   chalilah,   하리라;    2490에서 유래한 지시형; 문자적으로‘신성을 더럽히는’것에 관하여 ;(감탄사)‘결단코 아니다!’로 사용 :- 멀리하다, 결코 아니다   일단 이것은 히브리어로 한 단어인데 영어에서는 두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흠정역은 세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이것은 개역 등도 마찬가지임).   이를 통해 보듯이 형식적 일치란 히브리어/그리스어가 한 단어이면 수용 언어가 꼭 한 단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원어 한 단어를 반드시 수용 언어 한 단어로 번역하는 것을 일대일 대응 번역, 즉 단어 대 단어 번역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번역의 기초조차 모르는 사람일 겁니다.   물론 대명사, 수동/능동태, 시제 등은 동일하게 번역되어야지요.   신약으로 가서 로마서 6장 15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지으리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What then? shall we sin, because we are not under the law, but under grace? God forbid.   여기서 ‘God forbid’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1. 3361  mhv   me {may}제한된 부정을 나타내는 기본  불변사(반면에 3756은 절대적인 부정을 나타낸다);(부사)‘아니’,(접속사)~않도록, 또한(부정적 대답【반면에 3756은 확실한 것을 기피한다】을 함축하는 의문사로서)‘~인지 아닌지’, 어느, 그러나, 참다,  하나님이 금하다, 결핍하다, ~입다, ~도 아니다, ~없이, 종종 본질적으로 같은 관계에서 복합적으로 사용된다, 3362, 3363, 3364, 3372, 3373, 3375, 3378을 보라. <마1:19;막4:5;눅18:1;요15:2>불. no, not; 2. 1096  givnomai   ginomai  {ghin'-om-ahee}기본동사의 연장형과 중간태;(‘발생하게’)‘되는 원인이 되다’, 즉 (재귀형)‘되다’(‘되기 시작하다’), (문자적으로, 상징적으로, 강조의미로) 아래와 같이 폭넓게 사용됨;일어나다, 모이다, 되다, ~에 일어나다, 스스로 행하다, (지나가기 위해)가져오다, (지나가기 위해)오게 되다, 계속하다, 나뉘다, 되었다, 끌어내다, 끝맺게 되다, 떨어지다, 끝내다, 따르다, 발견되다, 이루어지다, 하나님이 금하시다, 자라다, 일어나다, 가지다, 지키다, 만들다, 결혼하다, 되도록 정해지다, 착수하다, 지나다, 수행되다, 출판되다, 요구하다, 보이다, 취해지다, 변화하다, 사용하다, ~이 되다,~일 것이다, ~할 작정이다, 쓰여졌다 <마5:45;눅1:8;롬3:19>동. to cause to come  being into;   이 두 단어를 영어는 두 단어로, 흠정역과 개역 등은 네 단어와 세 단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말이 바뀌면 형식적인 요소는 유지되어도 단어의 수까지 같게 할 수는 없음을 보게 됩니다.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의 사례들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러면 이것은 옮긴 단어의 개수가 다르니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 방식의 번역이 아닐까요? 아니지요. 당연히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의 번역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원어의 뜻 그대로 형식적 일치를 이루었으니까요. 그러나 기계적으로 단어 수를 맞춘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탁월한 번역, 훌륭한 번역을 지향하는 사람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졸역을 지향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희한한 번역(?)으로 잠시 우리에게 실소(失笑)를 선사하는 구글 번역기 정도나 할 일이지 지혜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를 설명하니 또 다른 분이 이렇게 묻습니다.   “영어에는 ‘God’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원어에는 없지 않습니까? ‘God’은 어디에서 왔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맞습니다. God은 성경 원어에는 원래 없습니다. 그러면 왜 들어갔을까요?   일단 ‘God forbid’를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금하시느니라” 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 이를 적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지으리요? “하나님께서 금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금하시면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즉 영어에서는 ‘God forbid’라는 표현이 가장 강하게 금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해야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결단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의미가 최고의 강도로 표현됩니다.   흠정역 역시 이를 잘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역(개정)처럼 단순히 “그럴 수 없느니라”로 하면 ‘결코’가 빠지므로(스트롱 3361) 번역한 문장의 힘이 쭉 빠져 본래의 뜻을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합니다.   롬6:16를 다른 영어 성경들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KJB: God forbidNKJV: Certainly notNASB: May it never beNIV: By no meansAMP Bible: Certainly notASV: God forbid   다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강력한 표현은 KJV와 ASV의 God forbid입니다. 다른 것은 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우리말 흠정역은 우리말로 가장 강력하게 원어와 영어를 표현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에 대해 “왜 하나님께서 금하시느니라”로 번역하지 않았느냐고 말합니다. 그것은 영어에서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지만 우리말에는 그런 용례가 없습니다. 번역 시 번역자는 자기 말을 잘 알고 자국민들의 정서에 가장 부합되게 번역해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그렇게 했고, 우리말 흠정역도 그렇게 했습니다.   2. 현대 사본학자(서기관들)들을 조심하라.   킹제임스 성경이 기계적 일치 번역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현대 사본학자가 바로 메츠거(메쯔거)입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였고 마르티니, 알란드 등과 함께 로마 교황청을 위해 일한 사람입니다.   예수회 출신 카톨릭 추기경과 UBS(연합성서공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4614   메츠거가 사용하는 유명한 예가 있는데 그것은 rejoicing과 boasting입니다. 그는 이 두 단어가 동일한 그리스어에서 나왔으므로 기계적으로 동일하게 boasting 혹은 pride로 번역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 곳에 있지만 현상이 동일하므로 일단 고전15:31, 고후2:12를 보겠습니다.   개역(개정), NIV 등 현대 역본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boasting)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흠정역: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로 인한 기쁨(rejoicing)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개역(개정), NIV 등 현대 역본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boasting or pride)이라(고후2:12)   흠정역: 우리가 세상에서 생활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 속한 진실함으로 하였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또 너희를 향하여는 더욱더 그리하였노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rejoicing)이요 또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는 바라.   자, 원어를 보지 않아도 양식 있는 독자라면 바울이 이런 데서 자신을 자랑하고자 했는지, 그들로 인해 기뻐하고자 했는지 금세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어에는 두 뜻이 다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 가운데 앞뒤 문맥상 이런 부분은 자랑이 아니라 기쁨이 되어야 하기에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기쁨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연이어 나오는 고후1:14를 보시면 명확해질 것입니다.   개역(개정), NIV 등 현대 역본들: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흠정역: [주] 예수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기쁨이 되는 것 같이 우리도 너희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야지 자랑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까?   히3:6을 보기 바랍니다.   개역(개정), NIV 등 현대 역본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흠정역: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집을 다스리는 아들로서 신실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기쁨을 끝까지 굳게 붙들면 우리가 그분의 집이니라.   과연 우리가 끝까지 붙잡을 것이 ‘자랑’일까요? 이 둘은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여기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스트롱 번호가 2745나 2746입니다.       스트롱 번호 2745를 가진 고전5:6; 9:15-16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흠정역: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5:6) 흠정역: 그러나 내가 이런 것들을 하나도 사용하지 아니하였고 또 내게 이같이 해 달라고 이것들을 쓰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죽는 것이 누가 나의 자랑하는 것을 헛되게 만드는 것보다 나으리라.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는 필연적으로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전9:15-16)   이런 데는 당연히 자랑하는 것을 표현하므로 흠정역도 자랑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물론 개역, NIV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흠정역은 앞뒤 문맥을 신실하게 살피고 같은 단어를 기쁨 혹은 자랑으로 바르게 나누어 번역하였고 다른 역본들은 기계적으로 다 자랑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른 역본들은 바울과 성도들을 자기 자랑만 일삼는 교만한 자들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역본을 쓰는 성도들은 자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마땅할까요? 성경의 어느 곳에서는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는데, 또 다른 구절에서는 자랑하라고 되어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데 모든 단어를 기계적으로 일치시키는 것은 번역을 망치고 심지어 성도의 생활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3. 영광인가,칭찬인가?   하나만 더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예수님 당시 지도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인정하고 다르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흠정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두머리 치리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되 바리새인들로 인해 회당에서 쫓겨날까 염려하여 그분을 시인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사람들의 칭찬(praise)을 [하나님]의 칭찬(praise)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더라(요12:42-43).   이들은 사람들에게서 칭찬받는 것을 하나님에게서 칭찬받는 것보다 더 중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현대 역본들은 이를 달리 표현하였습니다.   개역(개정), NIV 등 현대 역본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glory)을 하나님의 영광(glory)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여기서도 동일한 현상이 생깁니다. 칭찬과 영광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스트롱 번호 1391입니다. 1391  dovxa   doxa {dox'-ah}1380의 어간에서 유래;(매우 ‘분명한’)폭넓은 적용으로(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목적어 혹은 주어)‘거룩’, 위엄, 거룩(한) 영예, 찬양, 경배 <롬1:23;고후6:8>여명. radiance, glory;   번역자들은 ‘칭찬’과 ‘영광’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앞뒤 문맥상 어느 것이 적합할까요? 당연히 ‘칭찬’입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 수천 군데나 나옵니다.   2-3개의 뜻 가운데서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교리가 변하고 마음가짐과 태도가 변합니다.   해 아래서 하는 일은 바람을 잡는 일인가?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04 십일조를 3일 만에 드릴까요, 3년 만에 드릴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84>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37   4. 결론   1. 부디 여러분과 가족의 영적 안위를 위하여 번역을 해 보지 않은 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원어 사전으로 세뇌된 채 망상 속에서 본인들도 알지 못하는 말을 쏟아냅니다.   2. 특히 누가 메츠거, 알란드 등을 언급하거나 혹은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주는 글’ 등을 인용하면서 이런 종류의 험담을 옮기거든 이 글을 보여 주고 속히 그들 쳐놓은 영적 올무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내가 이것을 아노니 곧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 그러므로 깨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 유업을 주리라(행20:29-32).   3.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완전한 성경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계시록 22장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100% 정확하고 순수하게 들어 있습니다. 읽고 비교하고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4.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성실하게 번역한 성경입니다. 원어와 영어를 몰라도 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원어를 과도하게 의지하면 안 되는 이유(원어 소프트웨어)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9 영어를 못하면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다고요?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17   존귀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의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위로자 성령님의 큰 평안이 임할 줄로 확신합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Heaven and earth shall pass away, but my words shall not pass away.   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6 The words of the LORD [are] pure words: [as] silver tried in a furnace of earth, purified seven times. 7 Thou shalt keep them, O LORD, thou shalt preserve them from this generation for ever. 
2016-04-21 13:26:17 | 관리자
오늘 위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문맥에 맞는 번역의 중요성과 번역의 어려움을 다시한번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킹제임스 흠정역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6-04-21 10:53:29 | 장용철
저는 44세에 이를때까지 하나님도 없고 영혼도 없고 오직 물질세계만을 추구하며 생성,변화,소멸된다고 하는 유물론과 이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온갖 철학사상으로 무장하고 온 몸을 던져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날들을 되돌아 보면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죽였고 소위 정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 한국땅에서 알지 못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바르게 증거하고 높이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거지로 누명을 씌우며 공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 또한 15년전에 개역성경을 처음 배우며 살아 계시는 창조주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앞에 심판받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나의 모든 죄를 단번에 영원히 제거 하셨다는 믿음이 내 마음속에 들어 올때 비로소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하여 내 남은 삶의 지표를 오직 예수그리스도에 맞추어 달려 왔습니다 이것 이상으로 놀라운 기적이 어디에 있으며 이 이상의 진리가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도 개역성경의 좋은 점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많은 왜곡과 삭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서도 생명의 말씀을 지켜주시고 구원의 사역을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어느 분의 소개로 킹제임스 흠정역성경과 정동수 목사님을 알게 되었고 성경의 핵심진리와 교리적 측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다는 사실에 뜨거워지는 마음을 금할길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전에는 감추이고 희미하게 다가오고 자세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계시가 환하게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교리인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혼의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과 지옥,불못에 대한 구분된 개념을 뚜렷이 배울 수 있었으며 성경의 대부분의 기록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바르게 증거하고 높이는 일을 하며 나의 삶 가운데 그 분이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뜻이 담겨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나를 새롭게 지으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내 자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생생하게 느끼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먼저 개역성경에 나와 있는 진리의 말씀들조차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가르쳐주지 못하는 사역자들에게 있다 할 것이며 성경신자들 또한 본인의 운명이 걸려있는 성경연구를 게을리 하는데 있다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신앙과 운명은 성경 기록을 근거로 어떠한 믿음을 갖느냐 하는 각자의 판단과 결정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말씀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연구하고 바르게 전하려는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격려하지는 못할지언정 속된 비아냥과 공박을 일삼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이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사역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016-04-21 10:37:18 | 송수근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 즉 일대일 번역의 의미‘형식적 일치’와 ‘기계적 일치’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오늘 한 분이 전도서 3장 10절의 travail에 대해 질문하셔서 잠시 답을 드립니다.   또한 동시에 성경 번역 시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의 일대일 번역의 의미가 무엇인지 즉 ‘형식적 일치’와 ‘기계적 일치’의 뜻이 무언인지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1. 동일 단어 번역 문제   ---------저는 얼마 전부터 흠정역과 영어 KJB를 같이 읽고 있습니다. 흠정역 전도서 3장 10절[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 안에서 단련 받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KJB 3장 10절I have seen the travail, which God hath given to the sons of men to be exercised in it. 두 구절을 비교했을 때, 흠정역 성경에 ‘해산의 고통’이라고 번역 되었는데 해산이라는 뜻이 KJB의 어디에 해당하는지 궁금해서 문의를 드립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제가 읽은 ‘그리스도예수안에’의 킹제임스 흠정역 400주년 기념판은 뜻이 정확하고 가장 KJB와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고를 했을까 생각하니 감사의 마음이 절로 밀려옵니다. 번역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며 중요한 일인지 알기 때문에 정말 조심스럽게 질의해 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 수고를 인정받으면 최고의 기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좀 더 성경을 구체적으로 배우고 알아가며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또한 성도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의하신 분은 아마도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인 것 같습니다.   개역성경(개역개정 포함)은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개역: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사전을 보니 ‘노고’는 ‘힘들여 수고하고 애씀’을 뜻합니다.   일단 제가 주로 아래아 한글을 쓰므로 거기 내장 사전(도구 항목의 사전 모음)에 있는 travail의 정의를 찾아보았습니다.   ᛜtrav·ail [trǝvéil, trǽveil] n. 산고(產苦), 진통; 고생, 노고; 곤란; (흔히 pl.) 노작(勞作).   travail에 대해 옥스퍼드 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1. 육체적 정신적 수고 또는 아픔, 고생되는 일, 이런 것들의 결과2. 해산의 고통   라이프성경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립니다.   travail: 해산의 고통, 아이를 낳을 때 산모가 겪는 고통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97249&cid=50762&categoryId=51387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 travail은 ‘노고’도 되고 ‘해산의 고통’도 됩니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로 번역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인생의 쓰라린 고통을 이야기하는 전도서의 관점에서 travail이 그냥 ‘힘들여 수고하고 애씀’보다 해산할 때 산모가 겪는 고통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이를 좀 더 잘 설명하기 위하여 전도서 1장 13-14절을 보겠습니다.   13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에 관하여 찾아보고 탐구하려고 내 마음을 쏟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이 쓰라린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것으로 단련 받게 하셨느니라. 14 내가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는데,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   13절의 ‘쓰라린 해산의 고통’(sore travail)과 14절의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 서로 매칭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와는 전혀 문맥이 다릅니다.   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3절의 수고와 14절의 바람을 잡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해 아래서 하는 일은 바람을 잡는 일인가?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04   흠정역은 창38:27, 사23:4, 요16:21 등에서는 travail을 ‘해산의 고통’이라는 의미로 번역하였습니다. 앞뒤 문맥이 아기 낳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출18:8, 민20:14 등에서는 고난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번역이란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작업이다. 번역은 껍질을 까서 우리가 열매를 먹도록 해주며 휘장을 젖혀서 우리가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해준다. 번역은, 야곱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굴려내고 물을 길어 그것으로 라반의 양떼들에게 물을 주었던 것처럼(창29:10), 우물의 뚜껑을 열어 우리가 물로 나가게 해 준다. 참으로 보통 사람들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지 않는다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두레박이나 물길을 그릇이 없이(요4:12) 야곱의 그 (깊은) 우물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 같고 이사야서에 언급된 사람, 즉 봉인된 책을 넘겨받아 읽을 것을 요구받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원하건대 이것을 읽으라, 하면 그가 이르기를, 그것이 봉인되었으므로 내가 읽을 수 없노라, 할 것이요’(사29:11).   따라서 어떤 단어를 어떤 단어로 번역하느냐는 문맥에 의해 결정되며 그 결과는 위에 보여 드린 ‘해 아래서 하는 일은 바람을 잡는 일인가?’의 예처럼 판이하게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단어라도 번역자가 문맥을 잘 파악하여 번역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2.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히브리어 원어 성경을 단어 대 단어로 즉 형식적 일치를 이루도록 번역한 성경이다.   전도서 1장 13절을 보면 ‘sore travail’(쓰라린 해산의 고통)이 나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ra’(스트롱 번호 7451)와 ‘inyan’(6045)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런 것이 잘 드러나지 않게 의역하였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travail’이라는 명사는 전도서에 8번 나옵니다(1:13; 2:23, 26; 3:10; 4:4, 6, 8; 5:14). 흠정역은 이것을 모두 ‘해산의 고통’으로 번역하며 일관성을 유지하였습니다. 반면에 개역성경은 수고, 노고, 재난 등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같은 책에서 같은 단어를 일관성 있게 번역해야만 원 저자가 의도한 그 책의 뜻을 더 잘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8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흠정역: 누구의 빵이든 거저먹지 아니하였으며 너희 중의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수고와 해산의 고통 속에서 밤낮으로 일하였나니   KJB: Neither did we eat any man's bread for nought; but wrought with labour and travail night and day, that we might not be chargeable to any of you:   개역: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여기에는 ‘labour and travail’이 나옵니다. 흠정역은 이것을 ‘수고와 해산의 고통’으로 번역하였고 개역은 ‘수고하고 애써’로 번역하였습니다. 역시 둘 다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산의 고통’으로 번역하면 사도 바울의 사역이 산고처럼 힘든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뜻과 함께 그가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일이 아이를 낳는 고통을 수반한다는 뜻을 다 포함합니다. 사람을 구원받게 하는 일은 말 그대로 해산의 고통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이를 travail로 표현하였습니다.   3. 형식적 일치와 기계적 일치의 큰 차이   번역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 번역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단어를 기계적으로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단어 대 단어’의 일치 번역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주는 글’ 등을 뜻을 왜곡한 채 인용합니다. 즉 그 서문에서 번역자들이 기계적 일치를 하지 않았다고 기술하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단어 대 단어를 번역한 성경이 아니라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이것은 'word for word'라는 영어 말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무지의 결과입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본의 모든 단어를 영어로 ‘일대일 대응’이 되게 번역한 성경 즉 형식적 일치를 이룬 성경입니다. 즉 주어, 목적어, 단수, 복수, 수동태, 능동태, 시제 등이 원본과 같습니다. 다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을 하면 반드시 추가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 그런 부분은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 번역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의 ‘단어 대 단어’(word for word)는 형식적 일치를 뜻합니다.   성경 번역 기법: 형식적 일치 vs 동적 일치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84   그런데 이 경우도 히브리어/그리스어의 한 단어가 영어에서는 두 단어로 혹은 히브리어/그리스어의 두 단어가 영어에는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원어와 수용 언어가 다르므로 번역에서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즉 히브리어가 5단어라고 해서 영어로 꼭 5개가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주어, 동사, 목적어, 수동태, 도치 등은 원래대로 유지되며 4개나 6개 혹은 7개 단어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단어 대 단어의 번역 즉 형식적 일치의 번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히브리어/그리스어의 같은 단어를 기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게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단어를 기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게 번역하는 것을 영어로는 ‘word for word equivalence’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word for word’ 라는 말도 형식적 일치인지 기계적 일치인지 잘 구분해야만 합니다. 기계적 일치는 구글 번역기와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하는 일이고 그것은 심지어 번역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한 단어에는 몇 가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번역자들은 앞뒤 문맥을 보고 같은 단어라도 달리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제대로 된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히브리어/그리스어의 같은 단어를 기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게 번역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위키 백과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번역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에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King_James_Version         위 그림에서 보듯이 명사 travail은 신구약 성경에 총 31회 나옵니다(구약 26회, 신약 5회). 여기서 맨 오른쪽의 숫자는 스트롱 번호입니다. 구약의 경우 3205, 8513, 60045, 5999, 2342, 2470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다른 원어입니다. 그런데 이 원어들에는 다 해산의 고통, 수고, 노고 등의 뜻이 있으므로 번역자들은 그중에서 문맥을 보고 원어는 달라도 다 travail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킹제임스 성경이 ‘단어 대 단어’의 일대일 번역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이거나 알면서도 마치 약점인 것처럼 부각시키려는 의도입니다. 만일 그런 단어들을 삭제했다면 그것은 ‘단어 대 단어’의 일대일 번역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형식적 일치를 이루지 않는 번역입니다. 하지만 그런 예는 킹제임스 성경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성경 중에서 ‘단어 대 단어’의 일대일 번역을 가장 많이 이룬 성경입니다.   전도서만 보더라도 travail에 해당하는 원어는 6045와 5999입니다. 전3;10의 6045의 원어 사전 뜻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6045  @y:nÒ[i   `inyan  {in-yawn'}6031에서 유래;‘노고’, 즉(일반적으로)‘고용’, 또는(특히)‘용무’:-사무, 고생   전4:4의 5999의 원어 사전 뜻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5999  lm;[;   `amal  {aw-mawl'}5998에서 유래;‘수고’, 즉 ‘진저리나는 노력’;따라서(신체적이건 정신적이건)‘걱정하다’:-불만, 통한, 사악, 고역, 과실, 불쌍한, 불행, 고통, 아픈, 완고함, 슬픔, 노고, 고생, 싫증나는, 사악함   보시다시피 이 둘은 다 엄청난 수고와 고통을 뜻합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이것을 해산의 고통과 같은 의미로 보고 ‘travail’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단어 대 단어의 일대일 대응을 기계적 일치로 보면 번역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번역과 반역 사이에서: 기계적 일치 번역은 안 된다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12   4. 단어 대 단어를 기계적 일치로 여기면 번역을 망친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루아흐(스트롱 번호 7307)를 봅시다. 이것은 영, 바람 등으로 번역됩니다. 창세기 1:2; 6:3 등의 영(靈)이 바로 루아흐입니다. 출10:13, 19에는 동풍과 서풍이 나옵니다.   모세가 이집트 땅 위로 자기 막대기를 내밀매 {주}께서 그 땅에 동풍(東風)을 가져오사 그 온 낮과 그 온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이 되어 동풍이 메뚜기들을 몰아오매   자 이런 부분을 단어 대 단어의 기계적 일치를 위해 동영(東靈), 서영(西靈)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모든 영어 성경은 물론 개역성경까지도 이를 다 동풍, 서풍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단어 대 단어의 기계적 일치를 일대일 대응 번역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닙니다.   자 그러면 우리말 성경으로 이런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spirit은 대개 ‘영’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기 5장 1절의 spirit은 영으로 하면 말이 안 됩니다.   흠정역: 요르단 서쪽에 있던 아모리 족속의 모든 왕과 바닷가의 가나안 족속의 모든 왕이 우리가 건널 때까지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요르단의 물들을 마르게 하신 것을 들었을 때에 그들의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더 이상 정신이 없었더라.   KJB: And it came to pass, when all the kings of the Amorites, which were on the side of Jordan westward, and all the kings of the Canaanites, which were by the sea, heard that the Lord had dried up the waters of Jordan from before the children of Israel, until we were passed over, that their heart melted, neither was there spirit in them any more, because of the children of Israel.   흠정역 맨 끝의 “정신이 없었더라”의 정신은 영어로 spirit(스트롱 번호 7307, 루아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영이 없었더라”라고 번역하면 말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영어에서는 spirit이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으므로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면 되지만 우리말에서는 spirit의 또 다른 뜻인 정신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개역성경 역시 이것을 정신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개역: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5.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형식적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한 성경이다.   흠정역과 개역은 뜻이 비슷하지만 흠정역은 단어 대 단어의 형식적 일치를 이루었고 개역은 단어를 삭제하였습니다. 영어의 끝 부분은 ‘neither was there spirit in them any more’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any more’를 보기 바랍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오데(스트롱 번호 5750)이며 뜻은 앞의 neither와 합쳐지면서 말 그대로 ‘더 이상’입니다. 이런 단어는 이미 중학교 영어 시간에 다 배우는 말입니다.   단어 대 단어의 형식적 일치를 이루려면 반드시 any more를 표현해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세심하게 그것을 놓치지 않았고, 우리말 흠정역도 같습니다. 그러나 개역은 그 단어를 삭제함으로써 형식적 일치를 벗어났습니다. 흠정역의 표현은 ‘여리고 사람들이 그 이후로 계속 정신이 없었다’는 뜻(다 죽었으니까요)이고 개역은 ‘그 당시만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단어 대 단어를 일대일 대응이 되게 번역한 성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한 구절만 그런 것이 아니라 100% 모든 구절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로 완벽히 보존된 성경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흠정역 성경은 이 성경을 우리말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로 신실하게 번역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원어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성도들은 영어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저처럼 번역을 하거나 목사로서 설교를 하거나 성경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다른 용례를 살펴보기 위해 원어나 영어를 참조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이미 컴퓨터로 누구나 다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좋은 도구는 슈퍼바이블입니다. 이것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원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딜럭스바이블도 있습니다(아마도 이것은 슈퍼바이블에서 나온 것으로 보임, 형태가 거의 같음). 다만 이것은 몇 년 전에 업데이트를 하면서 소수 본문 원어를 사용하므로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데가 많습니다. 즉 개역성경이나 NIV와 비슷합니다. 그래도 위에서 제가 보여 드린 것들은 동일함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어를 과도하게 의지하면 안 되는 이유(원어 소프트웨어)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9   그래서 심지어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더라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다면 우리말 흠정역 성경을 성실히 연구하고 성경 소프트웨어 등을 잘 활용하여 뛰어난 설교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글도 참조해 주십시오.   영어를 못하면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다고요?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17   6. “이렇게 원전분해가 다 되어 있는데 왜 번역을 해야 할까요?”   원전 분해와 원어 사전은 말 그대로 원어의 뜻을 나열한 것입니다. 이것을 번역자가 앞뒤 문맥을 보고 신학적으로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여 문장으로 만들어야 성경이 나옵니다. 이 일을 이루려면 시적인 감각, 수용 언어(자국어) 실력, 문법, 맞춤법 등을 모두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위클리프 이후로 완벽한 영어 성경이 1611년에 나오기까지 무려 230여 년이 걸린 것입니다(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짐).   알렉산더 스커비가 낭독하는 영어 성경을 들어보기 바랍니다. 말 그대로 웅장함과 시적 아름다움의 극치가 드러나 있습니다.   Alexander Scourby의 영어 킹제임스 성경 낭독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41   그래서 1611년 킹제임스 성경 반포 이후에는 괄목할 만한 다른 역본이 나오지 않았고 1970년까지 약 360년 동안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 성경으로 구원받고 신학을 정립하고 경건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천주교 소수 본문에 근거를 둔 여러 가지 현대 역본들이 나왔지만 여전히 영국, 미국, 캐나다, 아프리카, 중동, 인도 등 영어권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이 독보적 성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우리는 번역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번역이란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작업이다. 번역은 껍질을 까서 우리가 열매를 먹도록 해주며 휘장을 젖혀서 우리가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해준다. 번역은, 야곱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굴려내고 물을 길어 그것으로 라반의 양떼들에게 물을 주었던 것처럼(창29:10), 우물의 뚜껑을 열어 우리가 물로 나가게 해 준다. 참으로 보통 사람들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지 않는다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두레박이나 물길을 그릇이 없이(요4:12) 야곱의 그 (깊은) 우물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 같고 이사야서에 언급된 사람 즉 봉인된 책을 넘겨받아 읽을 것을 요구받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원하건대 이것을 읽으라, 하면 그가 이르기를, 그것이 봉인되었으므로 내가 읽을 수 없노라, 할 것이요’(사29:11).   그리고 인터넷에 떠도는 유언비어나 한두 사람이 망상 속에서 그런 유언비어들을 모아서 기록한 허접한 책의 부정확한 주장 – 심지어 ‘영어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드리는 글’ 등을 자기들 편의대로 곡해한 말 - 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독보적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려는 사람들의 선동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망상이란 말 그대로 ‘1.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 즉 망념(妄念)이며 2. 근거가 없는 주관적인 신념. 사실의 경험이나 논리에 의하여 정정되지 아니한 믿음으로, 몽상 망상ㆍ체계화 망상ㆍ피해망상ㆍ과대망상 따위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이 존귀하게 보존해주신 말씀을 100% 담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의 놀라운 영광을 폄훼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400년이 넘는 검증을 거친 킹제임스 성경의 위용은 그러한 산들바람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존귀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의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위로자 성령님의 큰 평안이 임할 줄로 확신합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Heaven and earth shall pass away, but my words shall not pass away.   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6 The words of the LORD [are] pure words: [as] silver tried in a furnace of earth, purified seven times. 7 Thou shalt keep them, O LORD, thou shalt preserve them from this generation for ever.   
2016-04-19 15:57:28 | 관리자
번역하신 고정은 자매님에게 감사합니다 맨 밑에 음영진 목사님 글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문법 들먹이며 하나님 말씀 보존을 거부 하는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것인지 명쾌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성경 속에 있는 현상(The Biblical Phenomenon)"에 대해서 "히브리어 단어 ‘법’(Law, 토라), ‘증언’(Testimony), ‘명령’(Commandment), ‘법규’(Statute), 그리고 ‘말씀’(Word)은 히브리어 문법상 여성형이다. 히브리 문법의 패턴은 선행명사와 그것을 받는 대명사는 성(性)과 수(數)가 일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남성형 단수(m.s.) 명사는 남성형 단수 대명사를 취하고, 남성형 복수(m.p.) 명사는 남성형 복수 대명사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성경 기록자는 어떤 특별한 진리들을 강조하려는 신학적인 목적을 위하여 이와 같은 통상적인 문법의 틀에서 벗어나서 기록하였다(The biblical writers deviated from this "grammatical norm" for theological purposes, emphasizing specific truths.). 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된 언어들(히브리어, 아람어 그리고 헬라어)의 유일한 권위는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기록이다! 이와 같은 성경 속의 히브리어의 한 현상 곧 신학적인 목적에 따라 성(性)의 불일치 현상을 밝혀주는 실례들이 구약성경을 구성하는 세 파트인 율법서, 성문서, 시가서 모두에 나와 있다. "
2016-04-18 22:59:23 | 김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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