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는 1998년 안동에 있는 고성 이씨(固城 李氏) 이응태(李應台1556~1586)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420년 전에 한 여성이 한글로 기록한 ‘러브레터’이다. 임신 중에 있는 젊은 여인이 31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종이 하나 가득 표현했다. 16세기 조선 여인의 가슴 뭉클한 이 사연은 ‘내셔널지오그래픽’에도 소개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한글 편지에는 종이 가득 420여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한 여인의 애절한 감정이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다. 그렇지만 21세기 한국인이 이 한글 편지 원문을 살펴보자면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충은 읽고 대충은 이해하겠지만 전문가의 도움이 없다면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기껏해야 400년의 시차가 있을 뿐인데 원이 엄마에게는 일상의 글이고 말이었을 것이 우리에게는 사학과나 국문과 교수님이 다룰 수 있는 전문 지식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고문서를 해독하고 과거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분야의 권위자가 따로 있어야 한다.
이것이 언어이고 글이며 말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하면서 ‘원이 엄마의 편지’를 읽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그리스어로, 라틴어로 몰려가며 그 언어의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성경을 알 수 있는 최고 권위자로 인정한다.
성경을 믿음이 아닌 학문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
모든 신자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400년 전에 한글 편지를 썼던 원이 엄마는 죽었다. 그러나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편지를 썼던 여성이 죽었기 때문에 그녀가 사용했던 단어와 표현과 정확한 의미를 알려면 400년 전 중세한글을 연구해야 한다. 그런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이 이 분야에서 권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3천 년 전에 히브어로 말씀하시고 2천 년 전에 그리스어로 말씀하신 원저자가 여전히 살아 계신다. 따라서 3천 년 전 언어를 연구하거나 2천 년 전 언어를 공부해야만 그분이 사용한 단어와 표현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에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당신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셔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 옛날 성경에 써 있는 것과 동일한 진리를 말씀하고 계신다. 진짜 성경을 읽고 싶다면 고대 언어를 공부할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읽을 수 있는 성경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성경인지를 분별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살아 있는 언어로 말씀하신다. 이것이 성경의 보존이다.
400년 전에는 규방의 여인도 자유롭고 생생하게 사용하던 단어와 말과 글이 지금의 전문가의 영역으로 넘어갔는데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인간을 대하신 적이 없다. (생명 없는 종교는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계시를 특정 언어에다 가뒀다. 라틴어, 아랍어, 산스크리트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실 때면 언제나 그들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글과 말을 사용하셨다. 3천 년 전 히브리어는 이스라엘의 언어였다. 그들에게는 일상의 언어였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모세의 율법을 누군가 앞에서 읽기만 해도 남자든 여자든 다 알아 들었다. 메모를 했다가 나중에 단어를 찾아가면서 따로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히브리어에만 권위를 두는 사람들 중에서 이 정도 실력을 갖춘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여성들도 어린아이들도 히브리어를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글과 말로 성경을 주셨다.
2천 년 전 그리스어는 보통 사람의 언어였다. 하나님께서는 저잣거리에 있는 사람들도 알 수 있는 글과 말을 사용하셔서 성경을 주셨다. 언어의 천재들만 그리스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대학 교수들만 그리스어를 이해한 것이 아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셨을 때 누구라도 그분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율법 박사들만 그분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종교 지도자만 그분과 대화할 수 있던 것도 아니다. 어부도 세리도 장애인도 바리새인도 여인들도 어린아이들도 하나님의 아들과 대화했고 그분의 말을 알아들었다. 심지어 죄인과 창녀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고 이해했다. 평생을 ‘개’같이 살았던 한 강도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통을 느끼는 그 순간에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그분과 대화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고 알리시는 방법은 단순하다.
그분의 말을 듣고 이해하며 그분과 대화하는 일에서 전문가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저잣거리의 여인이나 뒷골목의 왈패들조차 알 수 있는 글과 말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셨다.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서 믿고 순종해야 할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언어로만 말씀하셨다. (라틴어 속에만 갇혀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 있는 언어로 전달되기 시작한 사건이 종교개혁이다)
고대 언어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이 있다면 “지금” 나에게 주신 성경은 아니다. 물론 그 성경에 기록된 언어를 자신의 일상의 글과 말로 소유했던 사람은 존재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고대의 언어를 전공하고 중근동 언어를 연구해야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믿고 섬기기에는 너무 어렵고 복잡한 신이 아닌가?
수천 년 전에 어린아이들과 여인들에게도 말씀하실 수 있던 하나님이라면 지금도 우리 아이들에게도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 옛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성도들이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면 우리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다. 고대 언어 전문가들에게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믿음 없이 학문의 대상으로만 성경을 관찰하게 되면 ‘고대 언어와 역본’ 얘기로만 가득 차게 된다.
킹 제임스 성경의 위대함은 살아 있는 언어라는 사실이다.
구약의 성도들이 히브리어를 들으면서 알았던 바로 그 말씀을, 신약의 성도들이 그리스어를 들으면서 알았던 바로 그 말씀을 오늘날 우리는 킹 제임스 성경을 통해서 정확하게 알게 된다. 킹 제임스 성경의 어휘를 재정의 하거나 재번역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왕과 신실한 일꾼들을 통해서 그 일을 이미 400년 전에 끝마치셨다. 킹 제임스 성경은 지난 400년 동안 온갖 종류의 비난과 공격, 모함에 대항하여 성공적으로 방어해 왔으며 입증되어 왔다.
비슷한 시기의 두 문서가 있는데 하나는(원이 엄마의 편지) 읽기도 힘들지만, 하나는(킹 제임스 성경) 여전히 최고의 베스트셀러다. 이것이 세속적 학문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차이다.
고대 언어를 해석하는 사전(원어로 된 성경이라고 주장하지만 대개는 사전이다)에서 찾아낸 단어 몇 개로 신비로운 계시를 깨달은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스타일로 일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것은 여기저기서 찾아낸 단어 몇 개 공부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쭉쭉 읽으라고 성경을 주셨다. 지금 내가 아이들과 함께 쭉쭉 읽을 수 있는 성경, 그것이 "지금"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 참고로 다음을 보기 바란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272
루시퍼 간단 정리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25
2012-10-31 23:45:23 | 김재근
반갑습니다. 영적으로 얻은 유익이 있으면 종종 나눠 주셨으면 합니다~
2012-10-24 19:04:46 | 김용묵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일관되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원칙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성경의 하나님은 철저하게, 너무 재미없고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정도로 “세상에 공짜란 없다. 심은 대로 거둔다. (사람에게) 자유 의지는 철저히 존중하고 보장되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은 져야 한다”라는 f(x) → y식의 인과응보 사고방식의 신봉자라는 것이다. 오로지 복음과 구원만이 공짜이다.
물론 인간이 만든 세상 제도는 합리적이지 못하며 부정부패와 비리가 있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이를 일시적으로 허락도 하시기 때문에,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언뜻 보기에 잠시 통용되지 않는 것 같은 면모가 보이기도 한다(전 9:11). 그러나 하나님의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결국 인과응보가 성립하게 된다.
(1)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또한 그것을 거두리라. (갈 6:7)
하나님께서 결코 조롱 당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아, 성경을 보니 A를 하지 말라고? 그럼 B에 대한 언급은 없으니 A 대신 B처럼 하면 되겠네?”라든가,“지금까지 나쁜짓을 좀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걸 보니,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해 먹어도 되겠군? ㅋㅋ”
같은 패턴으로 요리조리 잔머리를 굴리는 게 하나님 앞에서 안 통할 거라는 말이다. 성경을 어떻게든 삐딱하게 해석하고 자기 식대로 갖다 붙이려 하는 불순분자의 심리와 의도를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으니 말이다.그리고 문장 뒷부분의 의미는 말 그대로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단순하면서도 굉장히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속담이다.
(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여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노라. (살후 3:10)
성경은 단호하다. 일을 해서 스스로 돈을 벌지 않을려거들랑 밥도 먹지 말라고 그런다. 성경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유야 어쨌든 다 큰 성인이 백수나 니트족으로 있다거나, 정상적인 근로 의욕마저 상실시킬 정도로 이상하게 돌아가는 퍼 주기식 '무상' 복지 포퓰리즘 같은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삭 줍기를 생각하면 알 수 있듯, 성경이 말하는 복지는 복지 수혜자라 해도 최대한 일은 하고서 먹을 것을 얻는 구도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건전한 근로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사람마다 사유 재산과 빈부 격차를 명백히 인정하는 논조이며, 통념과는 달리 심지어 돈으로 돈을 버는 것조차도 전면 금기시하지는 않는다(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이 게으른 종에게 왜 이자놀이라도 안 했냐고 책망을..). 탐욕을 그렇게도 정죄하고 싫어하는 성경이 한편으로 그런 자유주의 경제관도 지지한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성경적인 사고방식과 공산주의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들더러 읽으라고 쓰여진 성경에 '불신자만도 못한 자'라는 표현이 있을까, 없을까? 성경에서 쓰이기에는 다소 강하고 자극적인 비하 표현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성경에 나온다. 출처는 바로 딤전 5:8. 성경이 규정한 책망 대상이란 바로 '자기 힘으로 일해서 돈 벌어서 가정을 부양하지 않는 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단,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성경의 모든 법칙에는 예외도 있다. 저건 다치거나 아파서 정말 타당한 이유 때문에 일을 못 하는 사람들까지 쫄쫄 굶으라는 소리는 물론 아니다.또한, 잘못된 사회 제도 때문에 뼈 빠지게 일하고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성경은 공산주의가 생길 빌미를 제공한 악덕 자본가나 기업주, 지주, 탐관오리들을 야고보서 5장에서 신랄하게 디스해 주고 있다. 그러니 성경의 논조가 특정 이념 편향적이라는 오해는 없기 바란다.
(3)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출 21:24; 레 24:20; 신 19:21)
갈수록 점점 더 중요하고 진지한 주제가 나온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조는 함무라비 법전이 아니라 성경(모세 율법)이다!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구약에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 표현에 대해서 안타깝지만 오해가 엄청 많다.
하나님이 세우신 준엄한 원칙은, 뭔가 사고가 발생하고 안 좋은 결과가 야기되었다면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상황을 모조리 수습하고 원래대로 복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당연한 거 아닌가?) 가끔은 위자료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힌 사람이 배상을 n배로 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형법은 현대의 법보다 처벌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엄하다.
그리고, 뭔가 영구적인 손해를 입혀서 복구가 불가능하다면? 그러면 그 피해를 가해자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 사형 제도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는 대표적인 법규이다! 고의성이 있었는지 같은 변수가 참작되긴 하지만, 대원칙은 이러하다. 이런 법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의 높은 공의만이 담겨 있을 뿐, 오늘날 같이 죄인의 무슨 교화 가능성이 어떻고, 가해자의 불우한 성장 배경 운운하는 배부른 변수 따윈 없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지 오늘날은 이게 완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법칙으로 인식되어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지금도 이슬람권 국가에는 여자 얼굴에다 염산을 끼얹은 남자에게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으라는 판결이 이따금씩 나는가 보다. 이슬람 국가들이 다른 데서는 좀 꼴통 같은 짓을 하지만, 저런 일부 윤리 규범은 성경의 사고방식을 이어받아서 아주 바람직하게 잘하고 있다.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여자의 인생을 이것 말고 무슨 방법으로 아쉽게나마 보상하냐 말이다.
그리고 사실은 인간에게 내재된 보복 심리에 비해서 성경의 원칙이 오히려 훨씬 더 자비롭다고 볼 수 있다. 정확히 당한 만큼만 갚으라고 명령하니까 말이다.
원래 인간이란 나쁜 일을 되로 받으면 말로 돌려주기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북한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깽판 칠 때 공갈을 어떻게 하던가? “도발 시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겠다”고 절대로 안 그런다. “천 배, 만 배로 보복하겠다”고 그런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했다가는 지구는 헬게이트로 변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국민을 대표해 보복이라는 걸 딱 당한 만큼만 집행해 주는 공권력을 제정하신 것이다.
아, 물론 성경에는 마 5:38-39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이(?) 보이는 명령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돌려대라는 구절도 있다. 그런데 그건 구원받은 예수쟁이라 해도 정말 성령 충만한 상태가 아니면 지킬 엄두를 못 내는 엄청난 명령이다.
진짜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친아들을 흉악범에게 잃고 나서는 그 흉악범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을 자신 있겠는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이 세상에서 왼뺨 맞고 나서는 오른뺨 돌려대고, 강도가 웃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내어 줄 참인가? 그건 그저 적당한 연기, 가식, 위선 떠는 구실로 인용하라고 있는 말씀이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세상의 법이라는 건 그런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worst를 기준으로 삼고 만들어야 한다.
구약 율법이 뉴턴 고전 역학이라면, 천년왕국 헌법 내지 신약 계명은 상대성 이론 정도의 위치에 대응한다 하겠다. 시간이 가는 속도가 차이가 생기고 질량이 그대로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상대성 이론은, 고전 역학보다 더 고차원적인 자연 법칙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전 역학을 바탕으로 아주 극단적인 문맥에서 물리학의 영역을 확장한 것일 뿐, 기존 고전 역학의 영역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지간한 현실 세계를 재현하는 게임 물리 엔진 정도를 만드는 데 상대성 이론이 동원되지는 않는단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는가?
(4) 그런즉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우리 속담 중에서는 “꼬리가 길면 밟힌다”가 성경 말씀과 정확히 같은 문맥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한 심상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 준엄한 말씀이 정확히 적용되어 패가망신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았을까?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데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죄의 결실은 사망이니, 연역법에 따라 사람은 누구나 죽고 더 나아가 지옥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5)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라. (마 12:36)
(6)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 15)
위의 두 구절은 우리의 말과 관련하여 단 하나도 빠짐없이 “심은 대로 거둔다”를 설파하는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이 세상의 저명한 개독안티들이 남긴 신성모독 발언과 독설들.. 다 자기가 했던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날이 온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신자라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적인 동기로 남긴 실언이나 폭언, 남에게 덕이 되지 않는 말이나 심지어 음담패설 같은 것은 결국 자기에게 올무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혀를 상대로 심하게 디스를 거는 야고보서 3장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만약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 당장 기도로 '온라인'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과 미리 정산하는 게 좋다. 마치 경찰서 정모를 당하듯 훗날 하나님을 오프라인으로 대면하여 정산을 하게 되면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러울 것이다.
..
우리는 지금까지 신구약 성경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심은 대로 거둔다” 원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것은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가르쳐야 하는 원칙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죄를 짓는 것은 좋아하지만, 참혹한 죄의 결과물을 거두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심상에 대한 대리 만족을 시켜 주는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에 자연스럽게 끌리게 되고, 형벌도 가능하면 곧이곧대로 엄하게 집행하지 않고 어지간한 결과 수습은 그냥 세금으로 다 때우려 한다.
이렇게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안일한 사고방식의 폐단은 결국은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세금으로 도저히 감당을 못 할 정도로 교도소 운영 비용이 증가하고 있으며(지금 미국처럼), 흉악 범죄는 갈수록 증가한다.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교도소나 가고 싶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까지 생긴다. 그 반면, 흉악 범죄 피해자의 인권은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가해자에게 너무 가벼운 형벌이 부과되는 걸 보며 통곡하고 울부짖는다.
난 구체적인 물증이 없기 때문에 논쟁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사형 집행이 흉악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이 범죄율 증가와 무관하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나는 이런 식으로 “성경적으로 단순한 원론적인 인과응보” 사고방식을 좋아한다. 몇 가지 예를 열거하자면,
- 무단횡단을 하다가 누가 차에 치였다면, 지금 현행법보다 보행자의 과실을 훨씬 더 높게 잡아야 한다.- 정당방위도 지금보다 훨씬 더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 젊은 여자가 만취 상태로 심야에 혼자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사로부터 성추행/성폭행을 당했다면, 물론 기사는 크게 처벌 받아야 마땅하지만 여자도 잘한 게 없으며 어느 정도 지탄받아야 한다.
이런 식.물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저런 원칙을 곧이곧대로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법학자나 그쪽 계층에서 변명을 할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능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성경대로 행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 주제만 더 다루고 글을 맺겠다.여러분은 노예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성경이 노예 제도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가?
노예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대동소이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보통은 어떤 사람이나 국가 백성이 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빚을 지게 됐을 때, 죽지 않는 대신 신분을 박탈당하여 노동으로 빚을 갚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제도가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이 쫄딱 망했거나, 아니면 국가적으로는 국가가 전쟁에서 져서 패전국의 백성들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나눠 갚아야 할 때 말이다.
노예를 상대로 발생하는 가혹한 인권 유린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몸으로라도 안 때우면 그 빚은 누가 상환하며, 전쟁 때문에 국가가 쑥대밭이 된 건 누가 복구하고 수습하는가? 노예 제도가 있기에 앞서 죄가 있었고 그로부터 파생된 전쟁 같은 참혹한 행위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 역시 “심은 대로 거둔다”로 귀착될 뿐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구원받기 전까지는 어차피 영적으로 죄의 노예이기도 하고. 성경이 과거의 그런 현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구시대적이고 반인권적이라고 딴지를 거는 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짓이다.
또한 구약의 이스라엘 율법은 노예를 영원무궁토록 부려먹지 말고(정확히는 노예도 아니고 그냥 종 servant이지만), 주기적으로 풀어 주라고 명시한다. 게다가 거의 반세기 간격으로 국가 경제와 국민 신분을 아예 전부 reset시키는 아주 파격적인 제도를 통해, 부의 세습과 지나친 양극화를 막고 있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2012-10-24 18:59:10 | 김용묵
열정이 느껴지는 자료 감사합니다. 자주 뵈어요^^
2012-10-24 12:01:21 | 이태성
안녕하세요? 성경을 사랑하는 형제님이신 것 같아 반갑습니다.^^
복잡한 개념이나 여러 개념들이 섞인 것을 정리할 때 직접 개념도를 그리면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라킨 같은 분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은 것처럼 그림을 통해 잘 이해하고 또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정말 열심히 잘 그리셨네요. 자주 오셔서 나눠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2-10-23 09:29:04 | 김재욱
안녕하세요,
저는 형제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는 오현민 형제라고 합니다.
자주 들르지만 처음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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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개인 성경공부 하는 방법은 주로 관심있는 주제(단어)를 검색하는 방법입니다.
검색한 결과물을 문서로 만들어 살펴보고, 다시 검색어를 발견해서 또 검색합니다.
물론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다양한 신앙서적(에스라 성경사전 등)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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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곳에 제 개인 성경공부 결과물을 올려도 될런지요?
읽어보시고 이상한 점이 있으면 더 가르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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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한 파일은 제가 용서라는 주제로 성경공부할 때,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이 있어서 정리한 것입니다.
제 개인 성경공부의 첫번째 결과물입니다.
처음 만든 이후로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고 요즘도 가끔 수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저 안에 있는 모든 단어를 다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드러내기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저는 나름대로 이걸 만들면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앞으로 주님 안에서 좋은 교제 부탁드립니다.
2012-10-22 23:29:17 | 오현민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라, 그속에 설마 비진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
이므로 일반적으로 믿게 되며 그대로 굳어져 이제는 이의를 제기하기가 어려워져 버렸네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학교 선배인 목사님께 질문을 드렸더니, 그 선배님은 신학교의
사본학 교수님께 자문을 구하고서 저에게 답을 해주었는데 그 답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선배님 왈, 킹제임스성경에도 번역본의 한계로 인해 오류가 많이 있으며, 심지어 그 오류들
자세히 연구해보면 사탄이 의도적으로 개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로 더이상 흠정역성경에 대해서는 선배님께 묻거나 답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신학체계에 갖혀서 마음을 열지 않으니, 인내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2012-10-22 13:50:03 | 양희석
목사님. 말씀 잘 읽었습니다. 왜 말씀보존학회에서 그렇게 썼는지 이해가 안갈 따름이네요.
특히 '이기다'의 뜻으로 쓰일때는 목적어를 '사람'으로 둘 수가 없는데...
예를 들어, I won you.라고 하면, '내가 너를 얻었다'의 뜻으로만 쓰이듯...
'내가 너를 이겼다'라는 표현으로 I won you. 라는 말은 없지요. 'I beat you.'는 있어도...
2012-10-20 11:51:19 | 김재원
사실 교인들이 이 글을 읽고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심사숙고했습니다. 그래도 사랑침례교회 성도님들이나 킵바이블의 깨어있는 분들이라면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라는 판단이 들어서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형제님 말씀 맞습니다. 저 또한 성탄절 날, 가족과 함께 예수님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는 의미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공감합니다.참~제 이름 '재'자는 '실을 재'입니다. 그리고 성은 울산 김씨랍니다.
2012-10-20 10:53:20 | 김재원
고전15:20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런데 말씀보존학회 성경은 끝을 '첫 열매들'로 해서 그리스도를 복수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이지요.
참으로 안타까운일입니다.
2012-10-20 10:00:25 | 관리자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2-10-20 09:39:10 | 이태성
옛날에는 저는 성경에서 착착 맞아떨어지는 부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에 더 관심이 갔는데 지금은 아예 그런 걸 초월하여 알쏭달쏭한 부분, 하나님의 비효율적인(?) 듯한 면모, 불신자들이 실족할 만한 면모에 대한 묵상을 더 하게 되더군요.
그래도 복음을 거부하는 논리들은 대부분이 형제님의 말씀처럼 자기들이 잘못한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이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악에 대해서 언제나 100% 즉결심판이 이뤄졌으면 사람은 모조리 구원받을 기회도 없이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졌겠죠~!
좋은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
2012-10-20 08:14:40 | 김용묵
위에 Link 주소창을 클릭하시면 관련 동영상 "크리스마스의 진실" 볼수 있습니다.
짧아서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 상당한 임팩트의 동영상입니다. 저도 보곤 섬뜩하더군요..
게시판 용량부족으로 글을 다 못채운 채로 끝냈네요.
마지막 참고싸이트는 알 레이시박사 의 저서 '아이들의 천국'의 부록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정동수목사님께서 번역을 하신 것으로 위 크리스마스의 내용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알아야 할 것은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올린 글이니
양해바랍니다.
2012-10-19 16:12:20 | 김재원
며칠 전 처음 글을 올렸는데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올라와 있는 글의 수준을 비교해 보면 저는 여러모로 너무나 부족합니다...
여러 책들과 자료를 보며 조금 조금씩 진리를 탐구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왜 이리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우리는 역사적 진리로 알고 있는 사실 또는 상식이 깨어질 때를 경험합니다.
그때 받는 충격의 느낌은 누가 뒤에서 쇠망치로 저의 머리를 세게 내리꽂는듯 한 느낌입니다.
제가 그동안 역사적 진리로 알고 있었던 것들이 맞은 줄 알았는데,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거기에 동조하는데,
자세히 분석하고 알아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거기서 오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킹제임스성경을 알고서 받았던 느낌도 그랬습니다. 개역성경이 문제가 있는 성경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수 십년을 살아왔는데..어느 누구하나 알려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더 충격을 받은 것은 그 내용적인 차이보다도...
그 내용 안의 발단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사탄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쭈욱 역사해왔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렇죠...사탄이 이를 두고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겠지요.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우리 일상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듯이...
마귀가 해도 해도 안되니까 성경변개 등 온갖 술수를 쓰며 많은 사람들을 통해 지금의 이 지경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로마카톨릭에 사탄이 역사함으로서 지금까지 고도의 전략과 술책을 쓰며 그리스도의 신성함에 먹칠을 하고
우리들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년 천주교의 실체를 알고서 그것이 계시록의 음녀(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사실 기독교의 모태가 천주교이며, 그 안에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작년에 전 세계적으로 '뉴월드오더'를 주도하는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세력들을 우연히 알 기회가 있었고
관련서적을 읽고 알아가던 중, 그들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놀라웠지만 더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들을 움직이는
주동세력이 로마카톨릭의 '예수회'라는 것을 알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미국의 칙출판사에서 나오는 만화책, 알베르토시리즈를 보면 그 실체에 대해서 명확히 나와 있는데
그때 천주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종교집단인지를 재차 실감했습니다.
서론이 길었는데요. 얼마전 유튜브에서 검색 중에, '크리스마스의 진실'이라는 동영상을 보고....
전 경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 그것은 제게 상당한 쇼크였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로써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크리스마스트리, 산타클로스 등...성탄절이 다가오면 괜히 설레고 즐겁게 보낸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는 Christ(그리스도) + Mass(미사)로 풀어쓰면 '그리스도의 미사'를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천주교의 '미사'의 개념을 다들 아시겠지만, 성경적이지 못하며 교리상 부적합한 요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의 어원 자체가 천주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첫번째로, 예수님은 12월 25일에 태어나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2장8절을 보면,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말하는데, "바로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들에
거하며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라." 여기서 '양떼를 지키더라'가 포인트인데, 그 당시 이스라엘의 겨울은 매우
추웠다고 합니다. 한 겨울 밤에 들에서 양떼를 지킨다는 게 말이 안되지요, 3월 말~10월 말까지 양떼를 들에서 지키기
가능한 때라고 합니다.
두번째는,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쯤, 로마 황제인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백성에게 자기 도시로 가서 조세등록하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 무렵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칙령을 내려 온 세상이 조세 등록을 하게 하였는데 이 조세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 처음 한 것이더라. 모든 사람이 조세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의 도시로 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과 혈통에 속하였으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시에서 나와 유대로 올라가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도시에
이르러 자기의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조세 등록을 하려 하였는데 그녀가 아이를 배어 배가 불렀더라. (누가 2:1-5)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이동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거리를 직선 최단거리로 잡을때 120km라고 하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지역을 피해 돌아서 이동하였으므로 그 거리는 대략적으로 150~180km정도라고
추정한다고 합니다. 하루에 평균 30km를 이동한다는 가정하에 대략 만5~6일 정도 소요된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산악지대의 지형특성과 만삭이 다 된 마리아를 봤을때 대략 10일정도는 걸렸을 거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정해보지요. 만약 12월의 매서운 추위와 비가 왔을때 예수님께서 출생하셨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10일이나
되는 장거리이동을 과연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상식적으로 아우구스투스가 하필이면 그 시기에 모든 백성에게
조세등록을 하라고 했을까요? 마태 24장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러나 너희의 도피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너희는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참조: 만삭이 다 된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한 거리
http://blog.naver.com/keepfuture?Redirect=Log&logNo=163621437
세 번째로, 12월 25일은 고대 바빌론 시대 이교도들의 태양신 축제일인데 세미라미스의 아들
니므롯(바알, 타무즈, 오시리스라고도 불림)이 21일 해가 가장 짧은 날에 죽었다가 24일 길어져 부활했다고 하여
25일을 탄생일로 축제하였는데 이것이 로마 카톨릭에 의하여 기독교의 성탄절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로마시대 때에는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는 축제로 불리웠으며 이때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즐겼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Tree) 또한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푸른나무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것으로 우상숭배사상으로 가득찬
이교도들의 사타니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기시하시는 푸른나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여러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밑에서 희생물을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역대하 28:2~4)
“너희가 모든 푸른 나무 밑에서 우상들과 더불어 너희 자신을 불태우며 바위 낭떠러지 밑의 계곡에서 자녀들을
죽이는도다.”(이사야 57:5)
“옛적에 내가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매 네가 이르기를, 내가 범법하지 아니하리라, 하더니 네가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돌아다니며 창녀 짓을 행하는도다.”(예레미야 2:20)
결국 12월 25일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일은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그 탄생일을 기리라는 말씀 또한 없으며 AD.354년
로마카톨릭의 리베리우스 주교에 의해 크리스마스가 공식 제정되기 이전까지 그 날을 지켰던 기독교인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고 하며.... 참고로 산타클로스는 4세기 미라(Myra)의 감독이었던 니콜라스(Nikolaas) 혹은 북극에 살면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던 이집트의 신 베스(Bes)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빨간색 털옷을 입고 수염이 덥수룩하며 사슴이 끄는 눈썰매를 모는 지금의 산타이미지는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인해
코카콜라 매출이 저조해지자 활성화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코카콜라가 이미지마케팅을 한 결과물이구요.
전부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겁니다.
SANTA라는 알파벳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운데 N자를 제일 뒤에 위치시켜 보세요...
결과적으로 크리스마스는 고대 바빌론 타무스(바알)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축제일인데, 사람들은 그 기원도 모른 채
성탄절 술에 취한 채 흥청망청 떠들어대고 있으며 동시에 사탄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참고: http://blog.daum.net/ssha-1/10680124
레이시박사의 "아이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2012-10-19 15:23:09 | 김재원
인간의 입장에서 극히 상대적인 논리로 진리와 맞서려는 사람들을 대할 때면 답답하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사람의 죄 탓에 발생한 문제들을 끌어모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며 진리 안에 들어오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정말 그들 안에 혼이 "제발 제발 나를 살려줘~~!"라고
절규하는 소리가 고막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합니다.(물론 환청을 듣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위에 밝혀 주신 그런 고민을 통해서 믿는 우리가 진리를 모르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사망의 달음박질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는 전도자로 사용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오래간만에 반가운 글에 감사합니다.
2012-10-19 13:35:32 | 김대용
네, 사람이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고방식을 따라야 함을 글을 쓰면서 느꼈습니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인간의 아집과 고집, 교만, 자기 의 때문에 못 하는 것이지요.
2012-10-18 17:54:05 | 김용묵
오랜만이네요. 공감이 갑니다.
사실 하나님의 조건은 너무 쉽고 간단해서 교만한 인간이 받아들이기 어렵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꼬투리잡다가 자멸하기 딱 좋은 구조라고나 할까요.
결국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시스템이겠지요.
2012-10-18 13:57:19 | 김재욱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언제나 한 단어의 성경적 용례가 어떠한지 성경 전체를 찾아보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말씀보존학회의 이상한 번역을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잠언 11장 3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나무니 혼들을 얻는 자는 지혜로우니라.The fruit of the righteous [is] a tree of life; and he that winneth souls [is] wise.
말씀보존학회 성경은 끝부분을 “혼들을 이겨 오는 자는 지혜로우니라.”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겨 온다’는 말은 우리말에 없는 말입니다.말 자체가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요?
영어를 보면 win이라는 동사가 나오는데 중고등학교에서 win은 ‘이긴다’라고 배웠으므로 이것을 살리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말이 안 되게 만드는 번역은 성경을 오히려 망칩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구절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빌립보서 3장 8절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Yea doubtless, and I count all things but loss for the excellency of the knowledge of Christ Jesus my Lord: for whom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do count them but dung, that I may win Christ,
이 구절의 끝부분에는 win Christ라는 말이 나옵니다.
말씀보존학회 식으로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이겨 오고’라고 해야지요?
벌써 웃기지 않습니까?
신약성경에서 win에 해당하는 말은 켈다이노(스트롱 번호 2770)입니다.누가복음 9장 25절에서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버림을 받으면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For what is a man advantaged, if he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mself, or be cast away?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여기서 켈다이노를 gain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모체인 틴데일 성경은 이 단어를 win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win과 gain은 같은 말입니다.
KJB의 전체적인 용례를 살펴볼 때 대개 사물을 얻을 때는 gain으로, 사람(인격체)을 얻을 때는 win으로 썼습니다.
자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 쓰는 21세기 영한사전으로 17세기의 영어를 해석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옥스퍼드 사전은 win에 대해 다음의 용례를 보여 줍니다.
6.6 To get, obtain, acquire; esp. to get as something profitable or desired; to gain, procure. a.6.a with concrete (material) obj. Obs. or arch. exc. in specific uses: see 7
또 이것은 고어로 쓰이는 용례라고 보여 줍니다.
즉 win은 얻다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win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얻다’로 번역해야 합니다.
‘혼들을 이겨 온다’는 이상한 번역은 킹제임스 성경을 망치는 사례입니다.
부디 우리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특히 좋은 목사가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샬롬
2012-10-18 13:03:25 | 관리자
킹 제임스 성경만 읽은 지 10년 가까이 되지만 저는 (부끄럽게도) 이런 이슈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집합명사여서 단수형이지만 복수로 쓰는 단어도 있고, 반대로 저렇게 복수 형태이지만 실제로 단수로 쓰는 단어도 있군요.. 정보에 감사합니다.
2012-10-18 10:19:17 | 김용묵
이곳 게시판에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꾸벅~
2012-10-18 10:09:03 | 김용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