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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성경 바로 보기와 에스라 성경 사전 책을 읽으세요. 둘 다 무료 pdf도 이 사이트에 있으니 검색해서 찾아서 읽으세요. 아담은 성인으로 만들어졌어요. 묻기 전에 먼저 찾아서 읽고 공부하면 좋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9-03-19 23:58:46 | 관리자
최근에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유튜브로 듣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명확하게 풀어주시는 주옥같은 말씀에 늘 감사드립니다. 최근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궁금한 점이 몇 개 생겨서 이렇게 글을 남기게 됐습니다. 아래 문의사항에 답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을때부터 성인이었나요? 성인이었다면 그 때부터 나이를 1살로 카운트해서 930세까지 산건지 궁금합니다.   2. 신약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왕국(메시아 왕국)을 전하시는데 유대인들이 받아드리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결국, 메시아 왕국이  예수님 재림때로 연기가 됐는데... 그럼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왕국 복음을 받아 드렸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인류구속 죄사함)도 없고, 이방인들의 구원 또한 없었을까요?   3. 인류 최초의 언어는 무엇인가요?  아담이 사용한 언어인지... 성경적으로 추측이 가능한가요..?   4. 새하늘과 새 땅 (제3의 하늘, 천국)에 들어가면 거기서 무엇을 하며 영원토록 지내나요?   아직 성경적 지식이 많이 부족하고 평소에 궁금했던 사항들이라 몇 자 적어봤습니다.
2019-03-19 22:42:48 | 이윤희
답변감사합니다 ! 제가 생각했던 부분과 답변 주신 부분이 일치 하니 이해는 확실히 되네요 다만 말보 뿐 아니라 개혁 등 워낙 향기로 알고 표현적으로 향기가 좋다고 생각되다 보니 전환하기에는 시간이 좀 소요되지 않을까 싶네요 제가 바꾸는게 문제라기 보다 혹시라도 다른사람과 괜히 사소하게 언쟁이 날까봐 좀 그래요 구약에서 말씀하신 부분 따라서도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2번째 성경 분철를 하려고 하니 왠지 기대되네요 ㅋ
2019-03-11 21:23:44 | 박세준
안녕하세요? 어느정도 가늠하고 계시는 것 같아 간단하게 설명을 덧붙여놓겠습니다.    우리는 레위기, 민수기를 묵상하다보면 하나님앞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무장을 하고 성도의 삶을 살아야하는지 자꾸 되새기게 됩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소중한 은혜의 말씀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레 6:23) 제사장을 위한 모든 음식 헌물은 전부를 태울지니라. 그것을 먹지 말지니라. (레 3:16) 제사장은 그것들을 제단 위에서 태울지니 그것은 불로 예비하는 헌물의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주의 것이니라 (레 3:16) And the priest shall burn them upon the altar: it is the food of the offering made by fire for a sweet savour: all the fat is the LORD's.   savour의 그리스어는 오스메(ὀσμὴν, osme)라는 말로 향기, 냄새,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지만, 오조(ozo, 냄새를 풍기다, 악취를 내다)라는 기본어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레위기 말씀들에서 보시다시피 양과 염소를 태우는데 좋은 냄새가 나겠습니까? 하지만, 거의 모든 다른 역본에는 fragrance(향기, 향수)로 번역하여 마치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로 의미를 맞춰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성경은 아래와 같이 향기로운 헌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을 향기로운 헌물과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 같이 사랑 안에서 걸으라.   사도 바울도 자신을 헌물로 하나님께 드릴 준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 2:17) 참으로 너희의 믿음의 희생과 섬김 위에 내가 헌물로 드려질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하리니 (딤후 4:6)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   이제 고린도후서 2장 14, 15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모든 곳에서 그분을 아는 냄새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 (고후 2:15)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나 멸망하는 자들 중에서나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니 (고후 2:15) For we are unto God a sweet savour of Christ, in them that are saved, and in them that perish:   누구의 냄새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이고 주님으로 인해 나는 냄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역본처럼 사람의 향기(fragrance)가 아닙니다. 성경기록들에서 보시듯이 지나온 성도들은 고고하고 우아한 삶을 살았던게 아닙니다. 채찍질, 결박, 감옥에 갇히고, 돌로 맞고, 톱으로 잘리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오직 복음과 그리스도, 그리고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배고픔과 추위속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헌물로 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실때는 레위기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이런 것을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로운 향기로 번역을 한다면 문맥의 의미와 성경전체에 흐르는 말씀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네요.   더군다나 본문의 향기로운 냄새(a sweet savour)는 원어적으로도 유오디아(euodia)라고 하며, '좋은 냄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우리 성도들이 피흘리기까지 싸우며 선진들처럼 살지는 않지만, 그 정신만은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냄새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로 악취를 풍기겠지만,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a sweet savour가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일을 감당할 준비가 된 성도가 지금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샬롬   (고후 2:16)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요,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니라. 누가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으리요?
2019-03-11 17:38:16 | 이명석
  가입이 안되었는 줄 알았는데 7년전에 질문을 드린적이 있더라구요 ㅋㅋ 킹제임스 말씀보존학회 번역 성경 15년 정도 읽었는데 너무 오래 사용한거 같고 제 나름에 성경 환기? 가 필요한거 같아서 사람들의 평판이 좋은 흠정역을 사용해보려고 하거든요 영어를 못하는 저에게는 한글번역된 성경이 권위입니다 ㅠㅠ 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영어는 못하네요 ;;   제가 속해있었던 교회가 단독침례교회였다보니 킹제임스영어 성경과 한글번역 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잠깐 봤던 기억이 있는데  궁금 했던게 해당 구절에 관한거에요   고린도후서 2장 14~17절   14 Now thanks be unto God, which always causeth us to triumph in Christ, and maketh manifest the savour of his knowledge by us in every place.   15 For we are unto God a sweet savour of Christ, in them that are saved, and in them that perish:   16 To the one we are the savour of death unto death; and to the other the savour of life unto life. And who is sufficient for these things?   17 For we are not as many, which corrupt the word of God: but as of sincerity, but as of God, in the sight of God speak we in Christ.   다른 번역하신 분들 내용 봤을때 보통 그리스도의 향기로 번역들을 많이 하셨더라구요 근데 그리스도의 냄새라고 번역하신 이유가 있나 해서요   영어사전으로 보니까 savour 가 맛으로 뜻이 나오던대 하나님앞에는 그리스도인의 행실이 맛보여 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되네요 영어를 못하니까요 ㅋㅋ;   아무래도 구약쪽에서 하나님께 불살라질때 향기로운 냄새다 라는 내용이 있었던 구절들을 봤었는데 그부분을 기준으로 하여 그렇게 번역하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사람의 행위가 항상 향기가 나지 않을테니 그러신거 같기도 하구요   왜냐면 제가 흠정역 성경을 사용하게 되면 그 성경에 맞춰 그리스도의 냄새 나는 사람이라고 여겨야 하는게 맞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향기는 긍정적이라면 냄새는 상황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는 순수한 의미가 있는거 같아 차이는 좀 있을거 같아서요
2019-03-11 13:05:55 | 박세준
참고로 부르스 메츠거의 추신(로마서 16장 27절 추신)에 대한 글을 영어로 올립니다. 이런 자료들은 추신이 본문인지 아닌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추신)의 차이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Romans 16:27      Subscription (a) The earliest subscription is merely πρὸς Ῥωμαίους א A B* C D* al. Other subscriptions include: (b) πρὸς Ῥωμαίους ἐγράφη ἀπὸ Κορίνθου (to the Romans from Corinth) B2b Db (P); (c) πρὸς Ῥωμαίους ἐγράφη διὰ Φοίβης ἀπὸ Κορίνθου (to the Romans, carried by by Phoebe the servant) 35 (201 om πρ. Ῥωμ.); (d) πρὸς Ῥωμαίους ἐγράφη ἀπὸ Κορίνθου διὰ Φοίβης της διακόνου (to the Romans written from Corinth through Phoebe the servant) 42 90 216 339 462 466* 642; (e) as (d) but prefixing τοῦ ἁγίου καὶ πανευφήμου ἀποστόλου Παύλου ἐπιστολή (of the saints and to the Romans written from Corinth carried by Phoebe the servant) L; (f) ἐγράφη ἡ πρὸς Ῥωμαίους ἐπιστολὴ διὰ Τερτίου· ἐπέμφθη δὲ διὰ Φοίβης ἀπὸ Κορινθίων 337; (g) as (d) but adding τῆς ἐν Κεγχρεαῖς ἐκκλησίας 101 241 460 466c 469 602 603 605 618 1923 1924 1927 1932, followed by the Textus Receptus. •Metzger, Bruce Manning, United Bible Societies.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Second Edition a Companion Volume to the United Bible Societies’ Greek New Testament (4th Rev. Ed.). London;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4. Print.
2019-03-01 09:54:54 | 관리자
안녕하세요?   킹제임스 성경에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 뒤에 추신(Postscripts)이 들어 있습니다.   위의 질문자가 말한 대로 데살로니가전후서의 마지막에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내는 첫째(둘째) 서신을 아테네에서 써서 보내다."가 있습니다.   이런 추신들은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본문의 일부로 생각하고 넣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스테파누스와 베자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에도 이것들이 들어 있고 심지어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 성경이라고 할 때에는 이런 추신들은 본문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저는 믿습니다. 즉 추신은 말 그대로 추신이지 본문은 아닙니다. 제목, 장, 절 번호 등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인 것과 성경이 아닌 것>   http://keepbible.com/KJB6/View/2Zd   감사합니다.   패스터 정동수
2019-03-01 09:46:53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이인혜 자매님.    신약성경 연대기   위 신약성경의 연대를 보시면 사도행전은 AD 65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야고보서가 45년경이고 그 다음이 데살로니가전후서가 기록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절에 보시면    (살전 3:1) 이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참지 못하여 우리만 아테네에 남는 것을 좋게 생각하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 연대기와 함께 말씀을 보시면서 잘 이해를 하셔야합니다. 고린도전후서를 쓴 시기와 얼마 차이가 나질 않습니다.  성경 사전에 '이 기간에 그는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기록했고' 라는 것은 그 얼마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고, 링크 해 주신 데살로니가전서 개요에도 '바울사도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사전과 개요에 대한 글들의 이해 문제이니 이 부분들은 더 설명이 필요 없어도 될거 같습니다.    추신부분은, 성경앱이나 베들레헴 성경에서는 이 영문을 빼 버렸지만 흠정역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흠정역 :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서신을 아테네에서 써서 보내다. KJV    : The first [epistle] unto the Thessalonians was written from Athens. 원문  : 4314 prov (에게) (unto)  2331 Qessalonikeuv (데살로니가인들) (Thessalonians)   4413 prw'to (첫번째는) (first)  1125 gravfw (기록되었다) (was written)  575 ajpov (로부터) (from)  116  jAqh'nai (아테네) (Athens)    Scrivener's Textus Receptus 1894 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μεθ’ ὑμῶν. ἀμήν. πρός Θεσσαλονικείς πρώτη ἐγράφη ἀπό Ἀθηνῶν   Stephanus Textus Receptus 1550 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μεθ' ὑμῶν ἀμήν πρός Θεσσαλονικείς πρώτη ἐγράφη ἀπό Ἀθηνῶν   원문에는 이렇게 나와있지만, 문맥의 성격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첨가한 추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보충설명이 필요하면 목사님께서 보시고 시간 되실때 따로 해 주실것입니다. 샬롬  
2019-02-24 01:49:53 | 이명석
안녕하세요? 흠정역 성경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킵바이블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고 있는 이인혜 자매입니다. 흠정역 사역을 위해 수고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데살로니가서를 묵상하고 공부하다가 의문이 생겨서 질문을 드립니다.   사도행전 17-18장을 봐도 그렇고, 성경사전과 우리가 보는 흠정역 성경 개요에도 쓰여 있듯이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써서 보낸 것으로 사료됩니다. *성경사전: http://keepbible.com/Dictionary/View/2ys *데살로니가전서 개요: http://keepbible.com/BQNA52/View/4Hw   그런데 데살로니가전후서의 마지막에 쓰여 있는 각주를 보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내는 첫째(둘째) 서신을 아테네에서 써서 보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얼핏 듣기로는, 사도 바울 서신의 각주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기록이 아니라 번역자들의 첨언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요... 각주에 오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지식이 잘못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2019-02-23 14:57:43 | 이인혜
성경에서 야베스에 대한 기록은 역대기상 4장 9~10절을 빼고 나면 전무합니다.  이 두 구절을 가지고 주님을 믿는 많은 신자들이 그 기도를 따라 복을 달라고 간구하며, 잘못된 신앙관으로 나가는 일이 많아 야베스는 누구이며 그 기도가 지금도 유효한가 하는 것을 성경적으로 짚어보려 합니다.    1. 야베스는 누구인가?   역대기는 아담부터 시작하는 긴 족보와 함께 주로 남 왕국 유다의 사건들을 보여주며 다윗과 그의 자손들 속에, 약속된 왕 메시아의 계보를 따라 이름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오백 명 이상의 많은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야베스는 바로 다윗 왕의 혈통인 유다 지파에 속했습니다.    성경 인물들의 이름을 조금 살펴보면,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은 자' 혹은 '빼앗는 자'(grabber)인데 이름 그대로 그는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또한 나오미가 그 두 아들에게 지어준 이름은 말론과 기룐인데, 말론은 '병약한'(puny)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기룐은 '수척해지다'(pining)라는 뜻을 가진 것과 같이 이 이름대로 두 사람 모두 젊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솔로몬의 뜻은 '평화'(peace)인데 그는 이름처럼 전쟁에 한번도 나가지 않은 첫 번째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의 뜻이 한 사람의 운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지어준 야베스라는 이름도 주의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베스가 살던 시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12지파에 골고루 땅의 지분을 나누어 주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주전(B.C) 1450년대경으로 추정됩니다. 야베스(יַעְבֵּץ֙, Jabez)라는 이름의 뜻은 '슬픔에 잠긴' 또는 '슬퍼하다' '고통을 겪다'이지만, 그는 그 의미와 다르게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름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지어 주었다는 사실에서 유복자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견해도 있고, 8절의 아하헬의 가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으로 보면 원래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는데 어머니가 지어준 것을 보면 유복자라는 말이 신빙성이 있습니다. 또, 아이가 할례를 받을 때까지도 그 어머니가 낳았던 고통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평생 그 고통을 기억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전승에 보면 그는, 훌륭한 율법학자요 많은 제자들을 남겼습니다.  대상 2:55절에서 보듯이 '야베스에 거주하던 서기관 가족들'이라고 기록된 말씀이 유대인의 전승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야베스는 자기 형제들보다 더 존귀한 자더라'라는 말씀으로 보아 경건과 학식에 뛰어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이라 함은 그가 드리는 기도에서 보듯이 항상 하나님을 삶에서 인정하려 하는 것과 그분의 축복과 보호하심에서 떠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율법학자로서 제자들을 배출할 만큼 학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존귀하다는 말씀은 그 지역에서 명예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성경 기록들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삼상 9:6) 그가 그에게 이르되, 이제 보소서, 이 도시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존귀한 사람이니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반드시 다 이루어지니 이제 우리가 거기로 가사이다. 혹시 그가 우리가 가야 할 우리의 길을 보여 줄까 하나이다, 하므로    위 구절은 사울과 그의 종이 사무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2. 야베스의 기도는 무엇인가?   그의 집안이 별로 좋은 집안은 아니었던지 3장에 나오는 왕족의 족보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4장에 유다의 아들들에서만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름에서 보듯이 고통과 슬픔을 안고 태어났지만,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그가 구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 많은 신자들에게 붐? 이 일어나며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보면서, 다른 말씀은 왜 따라 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빌 2:5-8)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이 빌립보서 2장 말씀은 웬만한 신자라면 다 아는 구절인데 말입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의 기도를 한번 보겠습니다.    (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원하건대 주께서 참으로 내게 복을 주사 내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이 나와 함께 하사 주께서 나를 악에서 지키시며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는 것을 그에게 주셨더라.    야베스는 야곱이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견주며 사람들과 견줄 능력으로 이겨서 얻은 이름. 바로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니 이는 네가 통치자로서 하나님과 견주며 사람들과 견줄 능력이 있어 이겼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창 32:28) And he said, Thy name shall be called no more Jacob, but Israel: for as a prince hast thou power with God and with men, and hast prevailed.    이 말씀도 어떤 목사님들은 야곱이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육체적으로 이겼다고 이해를 하며 설교를 하는데,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 이기다니요? 위 말씀의 뜻은, 기도를 그만큼 끈질기게 하며 사람들 중에 통치자로서의 파워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이겼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prince hast thou power"를 히브리어로 보면 싸라(שָׂרִ֧יתָ, sarah)이며, '왕으로서 힘을 가지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견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이는 야곱, 바로 자신과 견주어 이겼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형 에서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바로 눈앞에 닥쳐오니 얼마나 그 마음이 다급하고 간절했겠습니까? 바로 그 심정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한 것처럼 야베스의 기도가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광야에서 태어나 죽을 고생을 다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야베스가, 고통과 수고와 슬픔으로 얼룩진 모친의 마음속에 있는 아픔을 뼈저리게 겪고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으며 야곱의 마음과 동화된 심정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여호수아로부터 분배될 자신의 땅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평안을 구한 것입니다.  정말 간절한 기도를 드릴 때는 하나님께서 바로 앞에 계신 것처럼 야곱이나 야베스와 같은 진실되고 간절한 심정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막연히 집이 잘되고 풍족하게 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의미 없는 간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들을 잘 살펴봐야 할거라 생각됩니다.  허벅지 뼈가 탈골될 정도로 자기 육신(사람)을 이기고 오직 그분만이 내 생명이 된다는 심정 속에서 기도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완전한 마음으로 무장하고 그분께 매달린 적이 있습니까?   많은 설교자들이 야베스의 기도를 4 분법으로 나누어서 설교를 하지만, 이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3. 신약 교회에서 바라본 관점과 결론   그의 기도는 땅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그리고, 근심과 환난이 없는 복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누구에게 구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구한 것입니다.    (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고 했습니다.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 복은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해당이 되지 않는 기도의 복입니다.  왜 그런가 다음 구절들을 한번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엡 1:3)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으니   (롬 8:16-18)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라.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면 이것은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빌 1:29-30)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것도 주께서 그분을 대신해서 너희에게 주셨나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보았고 또 지금도 내 안에 있다고 듣고 있는 그 동일한 싸움이 너희에게도 있느니라.    더 많은 구절들이 있지만, 이 말씀들로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위 말씀들이 초대교회 시대만 해당되는 것이고 지금의 우리에겐 해당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까?  사도바울과 초대교회 성도들만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린 아닙니까? 이미 우리는 야베스가 받았던 복보다 더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눈에 보이지가 않거든요. 실질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내 손에 잡히지가 않으니까 자꾸 헛된 것을 구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그런 물질적인 복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마 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나니)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이 자기 것들을 염려할 것이요, 그날의 악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세상에 충만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아버지께서 육신의 아버지보다 못할까요? 육신의 부모도 자식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좋은 것을 해 주려 하는데 영원에 같이 있을 자녀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필요한 것을 채우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완전한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더디고 그분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나 바른 믿음 안에서 그분의 숨이신 말씀을 대하고, 그것을 절대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바로 공의(公義, judgment)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성경 기록들을 통해 확실하고 바꿀 수 없는 많은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어떤 성도들은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는 발동이 되지 않게 됩니다. 공의는 그분께서 세워놓으신 잣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잣대 안에 있게 되면 자연히 야베스의 기도의 복은 모두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과 신약의 믿음은 모두 동일하지만, 신분이 바뀐 것을 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의 권리로 다시 태어난 그 순간부터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고난이 오면 고난으로, 그분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복이 오면 축복으로, 때로는 어려움이 찾아오면 어려움으로, 감당하지 못할 고통이 오면 브니엘의 야곱의 심정으로 그분께 매달리며, 오직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의 절대적 믿음으로 쇠벽을 뚫는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되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성경 기록들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   모든 성경 기록은 우리의 배움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절대적인 믿음 안에서 지금 곧 죽을 것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내일 죽는 것이 확정되어 있다면, 얼마나 실질적이고 애절한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지금 신약시대에는 정욕에 쓰려고 구하지 말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주신 말씀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약 4:3)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요일 5:14-15) 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진 확신이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그분께서 우리 말을 들으신다는 것이라.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우리 말을 들으시는 줄 우리가 안즉 또한 우리가 그분께 구하여 청원한 것들을 얻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바로 공의가 되시는 성경 기록들입니다.  그분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바로 다음 구절의 말씀으로 잣대를 삼으시면서 구하시게 되면 잘못된 기도가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이 잣대 안에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롬 14:8~9)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일어나사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아멘. 
2019-01-11 20:14:40 | 이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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