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를 수행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진노로 죽은 유다의 둘째 아들(창38:4-10).
2009-07-19 13:13:58 | 관리자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단7:9, 13, 22).
원래 이 말은 해를 거치며 원숙해져서 존경을 받는 노인을 뜻하며 다니엘의 하나님이 이교도들의 새로운 신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존재임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2009-07-19 13:13:27 | 관리자
I. 하나님의 아들 대언자.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에게 갔고 그 뒤에는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갔다(왕상16:1-7; 대하19:1-3; 20:34).
II. 여호사밧의 아들, 님시의 손자(왕상19:16; 왕하9:2 비교).
그는 요람의 장군이었으나 그를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권을 찬탈하여 28년 동안 통치하였다(왕상19:16-17; 왕하9:1-37; 10:1-36). 그는 아합의 집안을 멸절시키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고 바알의 제사장들과 아합의 친지들을 죽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고 시리아 사람들이 그의 동방 영토를 소유하였으며 결국 그의 왕권은 4대 후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2009-07-19 13:12:52 | 관리자
이 말은 비슷한 것을 뜻하며 모형(롬5:14), 본보기(빌3:17), 틀(롬6:17)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모세는 산에서 자기가 본 양식(혹은 모형)대로 성막을 만들어야 했다(행7:44). 또 이 말은 성경에서 어떤 예언적인 상징으로 앞으로 올 것 즉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사용되었다(히10:1; 비교 골2:17). 그래서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예표를 많이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유월절 어린양과 다른 희생 예물들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그분의 위대한 속죄를 보여 주면서 죄의 대가는 사망이고 오직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희생 예물의 피에 의해서 죄가 사면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이런 것들은 앞으로 실체가 다가옴을 예언적으로 보여 주었다.
구약의 예표에는 사람과 직무와 물건과 사건과 의식과 장소 등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멜기세덱, 만나와 놋 뱀, 물을 낸 반석과 요르단을 건넌 것, 유월절과 속죄일, 가나안과 도피 도시 등은 모두 그리스도와 관련된 예표이다. 비록 구약시대의 사건과 물건 등이 신약시대의 어떤 것과 아주 비슷한 점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런 식으로 지정하지 않으면 적당한 예표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모든 것이 신약시대의 예표라고 주장하면서 문맥에 맞지 않게 예표론을 주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며 종종 위험하기도 하다.
2009-07-19 13:11:33 | 관리자
성경에서 ‘예정된다’는 말은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미래에서의 우리의 상속이 예정되었거나 구원받을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예정되었다는 경우에 적용된다(엡1:11; 롬8:29).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어떤 사람을 예정해서 천국에 보내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보낸다면 그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고 잔인한 하나님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예정과 선택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근거한 합당한 예정이며 여기에는 편파적 요소가 전혀 없다. 선택 참조.
“내가 야곱은 사랑하되 에서는 미워하였다.”(롬9:10-13)는 말씀은 개인의 선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으나 그 안에서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뿐이었다(롬4:9-13). 따라서 민족의 선택을 개인의 선택으로 오해하면 안 되며 더더욱 이것을 무조건적인 개인 예정 교리에 적용하는 것은 합당하지도 않고 매우 위험하다.
2009-07-19 13:10:35 | 관리자
사47:13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갈대아 사람들로 달의 형상 변화에 따라 미래 사건들을 예언한다고 주장하였다.
2009-07-19 13:09:48 | 관리자
원래 이 말은 대언을 뜻하며 대언 중에서 특히 앞날을 예측하는 것을 예언이라 할 수 있다. 대언 참조.
예언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미래를 미리 말하는 것으로 미래에 대해 막연히 좋을 것을 기대하거나 혹은 헛된 신탁을 받는 일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에서 횡행하는 개인의 길흉에 관한 예언은 성경의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참된 예언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며 또한 대언자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에게서 나왔음을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참된 예언에는 다음의 특징이 있다.
(1)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합당한 시간에 공포된다.
(2) 일어나는 사건이 정확하게 상세하게 예측되어야 한다.
(3) 사람의 명철이나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4)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전달해야 한다.
성경의 예언들은 실제로 사건들이 발생하기 수세기 전에 예언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었고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은 사건이나 사람들의 역사와 성격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예언들은 정확하게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처형과 유대인들의 흩어짐과 보존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성경의 예언은 대규모의 예언으로서 가장 초기의 예언이 세상 역사의 끝에까지 이르는 엄청난 규모를 보이고 있다. 물론 이런 예언들은 점진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시대에서 시대로 넘어가면서 발전하였고 같은 주제를 여러 사람이 예언하였으며 심지어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벧전1:10-11). 따라서 예언은 하나님의 일이며 단지 우리 눈에 놀라울 뿐이다. 대언자들의 기록에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있으며 기도하며 연구할 때에 이런 부분들이 드러날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 특히 우리 주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예언들은 곧 그분께서 오실 때에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2009-07-19 03:08:06 | 관리자
I. 잇사갈의 유명한 도시(수19:18).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지도 참조(19).
이곳은 벳스안의 서쪽에 있었고(삼하4:4) 아합은 여기에 궁궐을 만들었다. 이 도시는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것으로 유명한데(왕상21:1-29) 그 뒤 아합은 이 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왕하9:10, 14-37; 10:1-11).
II. 예스르엘과 아크레 사이의 큰 평야.
이곳은 보통 므깃도 골짜기라고 불리며(대하35:22) 이곳의 서쪽에 예스르엘 골짜기 혹은 평야가 놓여 있다. 이곳은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중해에서부터 고도가 점점 증가하여 120미터 정도 올라가며 북쪽으로 22킬로미터, 동쪽으로 27킬로미터, 그리고 남서쪽으로 32킬로미터 정도 된다. 한편 기손 강이 이곳을 가로지른다. 엘리야는 바로 이 평야를 가로지르면서 아합의 병거 앞에서 갈멜 산에서 예스르엘까지 달려갔다(왕상18:46). 여기는 여러 전쟁의 격전지였다. 여기서 시스라의 군대가 멸망하였고(삿4:1-24) 요시야 왕이 파라오느고와 싸우다가 패하였으며(왕하23:29) 후에 로마 사람들과의 싸움도 여기에서 일어났다. 아마겟돈 전쟁 역시 여기에서 일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아마겟돈 참조.
2009-07-19 03:07:11 | 관리자
여호사닥의 아들.
그는 여호수아라고도 불리며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 유대인들이 귀환할 때에 대제사장이었다. 그는 예루살렘과 성전과 하나님 경배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스4:3; 5:2). 그의 이름은 그 당시의 대언 속에서도 등장한다(학1:1; 2:2; 슥3:1-10; 6:11-15).
2009-07-19 03:06:36 | 관리자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이분은 모든 대언의 중심 주제로서 구약시대에는 모형으로 혹은 예표로 그 모습이 제시되었다. 족장들은 한결같이 그분을 고대하고 바랐으며 이분이야말로 이방인들의 소망이요 구원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이요 행복이며 위로이다. 예수는 히브리말로 여호수아이며 이것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백성의 죄들에서 그들을 구원하는 사역을 감당하여 이런 호칭을 받은 적이 없으며 오직 그분만이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들에게 자신의 피를 통하여 천국을 선물로 주신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직접 주신 이름이며(마1:21) 이분이야말로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구원자이셨다. 구원받아 천국에 이른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그분만을 자신들의 구원자요 구속자로 시인하고 영화롭게 영원토록 그분을 높일 것이다.
예수는 구원자를 가리키는 보통 이름이고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그리스도 즉 메시아는 그분의 공식 호칭이다. 이 두 이름은 복음서와 서신서에서 서로 구분되어 사용되었으나 예수는 그분의 생애를 서술한 복음서에서 보통 홀로 쓰였다. 반면에 예수님의 신성과 구속 사역을 기술하는 서신서에서 그분은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 등으로 불렸다. 그리스도 참조.
그리스도의 인간적 이름 예수에는 그분의 인성과 지상에서의 그분의 생애가 묘사되어 있다. 복음서에는 사람의 혼과 몸을 가진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영원히 찬송 받을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육체에 관한 한 이스라엘 사람이었다(롬9:5). 그분은 자신 위에 완전한 인성을 지니심으로 완전한 구원자가 되셨으며 완전한 사람이신 이 예수님 안에서 확고함과 온유함과 위엄과 겸손과 열정과 고요함과 지혜와 단순함과 거룩함과 사랑과 공의와 긍휼과 동정심과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가장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분의 인성 안에는 어떤 것도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았으며 이 세상은 그와 같은 인물을 상상해 보거나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복음서에서 나타난 그분의 모습은 복음서가 하나님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향한 사랑과 영원한 희생으로 인해 영원토록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을 수 있으며 그래서 그분은 사람의 친구요 우리를 위해 희생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은 빛과 같이 투명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문제에 대해 답변하실 때에는 어떤 혼란도 주저함도 없었다. 그분은 가장 심오한 진리를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가르쳐 주셨다. 그분은 자신이 세상에 오기 전에 관여했던 일과 사물들에 대해 말씀하셨고 떠나신 후에 일어날 일들과 자신이 어느 것에 관여하실지 예언하셨다. 그분은 결코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지 않았으며 마치 세상의 온갖 지혜가 그분 안에 집중된 것처럼 보였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다룬 모든 주제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끝내셨으며 실로 그분의 비유들은 더 이상 향상시킬 수 없는 완벽한 것들이었다. 그분은 결코 추측하거나 추론하지 않았고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자신이 의도했던 것으로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질문하셨을 뿐이다.
그분은 사람들을 아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특성을 간파하고 그들의 생각을 읽으셨다. 성경의 다른 인물들은 자신들의 잘못과 죄를 고백했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리 하지 않았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허물이 없었고 완전함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결코 자신을 질책하거나 자신이 행하고 말씀하신 어떤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셨으며 담대하게 “내가 항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행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깨어있으라고 하셨지 결코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메시아이고 죄들을 용서하는 권세가 있으며 안식을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주장하셨다. 그분은 첫 번째 자리를 요구하셨고 어느 누구도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나는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고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는 생명수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사기꾼이요 신성 모독자요 따라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결코 의사가 아니었으므로 수술하기 위해 칼을 사용한 적이 없고 처방전을 준 적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든 자를 다 치료하셨고 나병 환자를 깨끗케 하셨으며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게 하셨다. 그분은 집필가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한 그분께서는 단 한 줄의 글만 쓰셨으며 심지어 그 글마저도 모래 위에 썼기 때문에 바람이 다 지워 버렸다. 그러나 그분이 선포한 복음은 제자들의 마음을 극도로 감동시켜 그들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였고 이 글은 시대를 타고 내려오면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간주되었다.
그분은 이 세상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연설가가 아니었다. 그분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으나 보통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분은 모든 종류의 연설의 대가였으며 어느 누구도 비유로 말씀하시는 그분의 연설을 능가한 적이 없다. 비록 그분이 시인은 아니었지만 그분의 삶 자체가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시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고 성도들에게도 훌륭한 찬송을 주었다. 그분은 음악가가 아니었으나 세상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이 그분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분은 예술가가 아니었으나 만일 그분이 없었다면 위대한 미술 작품들이 화폭 위에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은 단지 겸손한 갈릴리 목수로 나무를 깎고 도끼자루를 만드는 사람이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예술적인 건물들이 그분을 기념하기 위해 설계되었고 그분에게 봉헌되었다.
이 세상에 그와 같은 분은 결코 없었다. 어떤 작가도 그러한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분은 외부인이었고 이 세상이 낳은 사람이 아니었으며 다른 영역으로부터 온 분이었다. 그분은 우리를 친족으로 삼기 위해 오셨고 우리의 본성을 지닌 채 자신의 왕국으로 되돌아가셨다.
그분께서 초림 때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오셨으므로 재림 때에도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오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주장했던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 즉 ‘육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이셨으므로(딤전3:16) 그분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 사건은 사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런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출생은 기원을 가르는 중요한 사건으로 그분은 기원전과 기원후의 주님으로서 첫 사람 아담의 창조 이후 약 4000년 뒤에 이 땅에 마지막 아담(혹은 둘째 아담)으로 오셨다.
구원자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사복음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분의 공생애는 그분께서 약 서른 살 정도 되었을 때 시작되었으며 3년 반 정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눅3:23). 비록 여러 사람들이 선한 의도로 그분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배열하려 하였으나 복음서들이 시간 별로 기록되지 않았고 그 안의 내용 중 시기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으므로 연대기적으로 그것들을 완전하게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끝으로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흔한 이름이었으므로 마술사 엘루마의 아버지도 이 이름을 가졌고(행13:6) 바울의 동역자요 친구인 유스도도 이 이름을 가졌다(골4:11). 에스라 당시의 대제사장과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간 대장 여호수아 역시 히브리말로 예수라는 이름을 가졌다(삼상6:14; 왕하23:8 참조). 한편 구약시대의 여호수아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대장으로 표현된 곳에서 그리스말로 두 번 예수라고 표현되어 중요성을 더해 주고 있다(행7:45; 히4:8).
2009-07-19 03:06:09 | 관리자
우리 주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날은 예비일 혹은 유월절의 예비일이라 불렸는데 이것은 해가 지면서 시작되는 유월절 안식일 전을 뜻한다(마27:62; 요19:31).
2009-07-19 03:05:17 | 관리자
사례의 뜻으로 주는 물건.
예물은 고대로부터 애정과 존귀와 존경의 표시로 흔하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지금 대부분의 경우 선물로 번역되었다. 왕에게 바치는 공물이 예물로 표현되었고(삼상10:27; 사36:16) 신분이 높은 사람들도 선물을 받았다(창43:11; 삿6:18; 삼상9:7; 왕상14:3). 왕은 명예를 주려는 사람에게 옷을 선물로 주었고(창45:22-23; 삼상18:4) 다른 치리자에게 두려움에서 혹은 존경하는 마음에서 보화를 주었다(왕하16:8; 18:14; 대하9:9, 12). 정복자들은 승리의 기쁨과 관용을 보여 주기 위해 개선 수레에서 선물을 흩었다(시68:18). 대언자들은 선물을 받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했다(왕하5:15; 8:9; 단2:48; 5:17). 또한 선물이라는 단어는 종종 뇌물을 뜻하며 그렇게 번역되기도 하였다(출23:8; 사5:23). 또한 이 단어는 율법이 요구하는 헌물을 가리키기도 하며(신16:17; 마5:23-24) 복음의 복과 영원한 생명 즉 가장 좋은 선물을 가리키기도 한다(행8:20).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은혜(엡4:8, 11)와 사도들의 놀라운 기적의 선물(고전12:1-31; 13:1-13; 14:1-40)을 가리키기도 한다. 선물 참조.
2009-07-19 03:04:50 | 관리자
약속의 땅의 으뜸 도시.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이 가장 거룩한 기억의 보고이자 종교적인 경외심과 민족의식의 원천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승리의 현장이다. 이곳은 가나안 지역의 남쪽 높은 곳에 위치하며 지중해와 요르단에서 각각 56, 3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지중해성 기후와 사막 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북위 31°41'에 위치하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고 봄가을에는 이따금 37℃의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예루살렘은 유대의 고원 즉 지중해로부터 720미터 위에 있는 높은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여호사밧 혹은 기드론 골짜기가 있고 남쪽으로는 힌놈의 골짜기가 있다. 한편 도시 안에도 두 개의 작은 계곡이 있어서 이 도시를 시온과 아크라와 모리아로 3등분 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시온은 도시의 남서쪽에 있었으며 ‘다윗의 도시’ 혹은 ‘위에 있는 도시’라고 불렸다. 이곳은 아주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가장 강한 요새였으며 성채와 궁궐이 여기에 있었다. 한편 시온보다 높지 않은 아크라가 있었으며 시온의 북동쪽에는 거룩한 산지 모리아가 있었다. 처음에 모리아는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후에는 성전을 두기 위해 크게 확장되었다.
모리아 산, 다윗의 도시, 시온 지도 참조(54, 55).
한편 예루살렘의 동쪽에는 기드론 골짜기에 의해 도시와 구분되는 올리브 산이 있었으며 여기서는 도시의 모습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또 모리아와 올리브 산 사이에 기드론 골짜기 근처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었고 예루살렘의 남쪽, 시온의 남동쪽 구석에는 실로암 연못이 있었으며 시온의 서쪽과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들에는 기혼의 연못이 두 개 있었다. 예루살렘 주변의 바위들과 기드론과 힌놈의 골짜기 벽에는 굴과 돌무덤이 많이 있었다.
그리스도 당시의 예루살렘 지도 참조(47).
이곳은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함으로써 거룩하게 하신 곳이다(창22:1-24; 대하3:1). 이곳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에 있었으나 유다가 이곳을 정복하였으므로 유다에게 속한 것으로 간주되었다(수15:8; 18:16, 28; 삿1:1-8). 이곳의 고대 이름은 살렘이었고(창14:18; 시76:2) 후에 여부스 족속이 이곳을 차지하였으므로 여부스라 불렸다(삿19:10-11). 이곳은 강력한 도시였으므로 이스라엘이 이곳을 정복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고 결국 다윗은 이곳의 요새를 파괴시켰으며(삼하5:6, 9) 그 후에 이곳은 예루살렘 혹은 다윗의 도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뒤 이곳은 왕국의 종교 및 정치의 중심이 되어 크게 영역이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안의 성전에 참 하나님께서 거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신 데 있다.
왕국이 남북으로 나뉜 뒤에 이곳은 유다 왕국의 수도로 남았으나 여러 차례 외세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기도 하다가 드디어 바빌론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왕하14:13; 대하12:9; 21:17; 24:23; 25:23; 36:3, 10, 17-20).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지난 뒤에 이곳은 주전 536년경에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에 의해 재건되어 이전의 영광스런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다. 그 뒤 주전 332년에 그리스의 알렉산더가 이곳을 차지하고 그가 죽은 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안식일에 이곳을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그 뒤 주전 170년경에 예루살렘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황제의 손에 넘어갔는데 그는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전에 주피터 형상을 세우며 모든 것을 동원하여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게 하였다. 그러나 주전 163년에 마카비(혹은 마카베오)들의 인도 하에 유대인들은 독립을 얻었지만 그 뒤 100년이 지나서 로마 사람들이 이곳을 정복하였으며 헤롯 대제는 돈을 많이 들여 이곳을 아름답게 꾸몄다.
하나님의 시간표에서 충만한 때가 되었을 때에 메시아가 이 도시와 그곳의 성전에 임하셔서 자신의 발이 닿은 곳을 영화롭게 하셨으나 예루살렘은 그분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자신의 죄의 잔을 가득 채웠으며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들의 땅을 떠나 유랑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주후 70-71년경에 로마 사람 티투스(디도)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의 건축물 중에서는 세 개의 망대와 서쪽 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다. 그 뒤에도 유대인들은 거기로 돌아가 하나님께 경배하려 했으나 아드리안 황제는 주후 135년에 이곳에 식민지를 세우고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고 돌아오는 자는 사형시켰다. 그리고 그는 도시의 이름을 앨리아캐피톨리나라 부르고 가능한 한 이곳을 완전히 더럽혔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흔적을 모두 없애기 위하여 이방 신들에게 이곳을 바쳤다.
그 뒤 콘스탄틴 대제는 로마를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고 이곳을 다시 예루살렘이라 부르며 몇 개의 교회를 건립하였지만 주후 614년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비잔틴 제국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많은 교회를 불사르고 다수의 시민을 끌고 갔다. 또한 주후 638년 이슬람교로 단결한 아랍 사람들이 이곳을 함락시켰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비잔틴제국에서 이탈하여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예루살렘의 바위 사원에 있는 큰 바위는 마호메트가 꿈에 대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제7천에 있는 알라신 앞까지 갔다는 승천(미라지)의 장소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아랍 사람들은 압둘 말리크 왕 때에 다윗이 성전을 마련한 곳에 바위 사원을 건립하였다.
바위 사원
이때부터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는 서로 상대편의 성지를 존중하였으며 주후 1099년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제1차 십자군이 이 도시를 침략해서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대학살을 자행하고 이곳을 수도로 하는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187년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모아 이곳을 탈환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으나 카톨릭 교도들의 성지 탈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이곳은 맘루크 왕조의 세력 하에 들어가서 다마스커스 총독의 지배를 받았으나 1516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셀림 1세가 시리아에 있는 맘루크 왕조의 세력을 꺾고 예루살렘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19세기 중엽부터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투르크에 압력을 가하여 이곳의 성지 보호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투르크 군이 패퇴하고 앨런비 장군이 거느리는 영국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으며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자 예루살렘이 그 수도가 되었다. 그 뒤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밸푸어 선언에 따라 유대교도의 이민이 격증하면서 아랍 사람들과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었으나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도와 아랍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은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동서로 양분하여 각각 한 쪽을 영유하였는데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 - 6일 전쟁 -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랍 국가들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동부 즉 구(舊) 예루살렘마저 점령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곳을 탈환하여 언제라도 성전을 지으려고 기회를 보고 있다.
현대 중동, 현대 이스라엘 역사, 현대 이스라엘 국가 지도 참조(45. 46).
고대의 거대한 도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 예루살렘 시가지는 이슬람교도,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구역을 다 포함한다. 현재의 예루살렘 지도 참조(47). 이 구 시가지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헤롯이 높이 쌓아올린 헤롯 성전 구역이며 이 구역 안에는 이슬람교의 성소인 바위 사원과 모스크가 있다. 통곡의 벽으로 알려진 서쪽 성벽은 유대교 성지로서 가장 성스러운 곳 가운데 하나이다. 성벽 안의 나머지 지역은 전통적인 동방의 도시로 이슬람교 사원들과 미로처럼 복잡한 상점가와 많은 교회와 고대 유대교 회당 및 학습당이 있다.
현재 이스라엘과 아랍의 갈등은 바로 구 예루살렘 시에 성전을 짓느냐 아니면 모슬렘 신전을 그대로 유지하느냐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이스라엘은 합당한 때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하던 모리아 산 - 지금 모슬렘들의 바위 사원이 있는 곳 - 에 성전을 지을 것이며 적그리스도가 바로 이곳에 들어가 자신을 하나님이라 선포하는 가증한 일이 있을 것이다(단9:25-27; 마24:15; 살후2:4). 이때부터 7년 환난기의 후반부 즉 창세 이후로 없었던 대환난이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인들에게 임하게 된다(단12:1; 슥13:8-9; 마24:16-22; 계12:1-17). 그로부터 3년 반이 지난 뒤에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 강림하시면서 예루살렘의 모든 원수들을 멸하시고(행1:11-12; 슥14:1-5) 예루살렘에서 1000년 동안 평강의 왕으로 친히 다스리실 것이다(슥14:12-21). 이때에 예루살렘은 영광의 왕이 거하시는 곳, 모든 민족들의 경배의 장소가 있는 전 세계의 중심 도시가 될 것이다.
2009-07-19 03:04:18 | 관리자
구약시대 주요 대언자들 가운데 하나.
그는 요시야, 여호야김, 시드기야 시대와 시드기야가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대언하였다. 그는 아나돗에서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고 하나님의 지정을 받아 대언자가 되었으며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 직무를 맡기로 예정되었다(렘1:1, 5). 그는 요시야 왕의 제13년에 어릴 때에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었다. 선한 요시야 왕은 그를 도와 종교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그의 후반부 삶은 고난과 박해로 가득한 고통의 나날이었다. 여호야김 왕은 그의 말씀을 담은 두루마리를 불태우고 그를 죽이려 했으며 시드기야 왕은 그에게 교훈을 듣고 자기 백성의 죄로 인한 심판에 대하여 경고를 받고 70년간의 포로 생활에 대하여 들었으나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신실하게 말씀을 전함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 감옥에 갇혀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를 풀어 주고 그에게 바빌론에 가서 살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남아 있는 유대인들과 함께하기를 원했고 얼마 뒤에 그들에 의해 이집트로 끌려가서 거기서도 신실하게 백성들을 권고하고 책망하였다. 그는 42년 동안 반역하는 백성을 향하여 꾸준히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였다. 그는 자신의 백성이 회개하지 않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끝까지 그들의 번영을 기원한 눈물의 대언자였다.
2009-07-19 03:02:45 | 관리자
세상에 드러나는 영광.
2009-07-19 03:02:11 | 관리자
지옥의 불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진짜 불 즉 이 세상에서 우리가 뜨겁게 느끼는 그런 불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불 곧 상징적인 불이며 또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자신의 창조물을 진짜 불 속에 영원토록 던져 넣는 잔인한 분이 아니기에 불신자의 혼은 죽어서 소멸된다는 가르침. 이런 주장을 펴기 위해 안식교인이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eternal이다. 이 말은 원래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을 나타낼 때 혹은 천상의 것의 우수함이나 고매함 등을 지상의 것과 비교할 때 즉 질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말이다(마19:16). 반면에 영어에서 양을 강조하면서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을 나타낼 때는 ‘영존하는’이란 뜻의 everlasting을 사용하며 마18:8은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존하는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해 지옥의 불이 영원토록 지속됨을 보여 준다.
이렇게 하나님은 치밀하게 everlast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영혼멸절설’ 같은 이단 교리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셨다. 사악한 자들은 영원토록 계속해서 지옥 불 속에서 고통을 받으므로 영혼은 멸절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생명은 질적으로 우수한 ‘영원한 생명’인 동시에 양적으로도 영원토록 계속되는 ‘영존하는 생명’이고 불신자에게 주시는 생명도 질적으로 양적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다. 혼, 지옥 참조.
2009-07-19 03:01:50 | 관리자
주후 1-4세기경 그리스, 로마, 유대, 소아시아, 이집트 등 근동의 여러 지역에서 유행한 이단 사상.
이것은 신의 세계와 물질세계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역사적 예수님/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부정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그노시스’(Gnosis)라는 말은 지식에서 나왔으며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지식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신의 세계와 물질세계 그리고 그 사이에 천사, 인간, 마귀가 있고 인간은 물질세계에서 포로가 됨을 피하여 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금욕해야 하며 또 물질세계에서의 해방을 방해하는 마귀를 극복하기 위해 최고의 완전한 ‘신지’(혹은 영지) 즉 신에 대한 지식인 ‘그노시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철저하게 영육의 이원론을 펴며 영의 청순성과 신비성을 강조하고 육체적인 면을 타락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들은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미를 설명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사상의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들은 이처럼 역사적 예수를 부정했을 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최고의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침내 구약성경까지 거부하게 되었다.
이들의 믿음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신약의 복음서를 믿는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영원한 심연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이를 부인한다. 그들은 자신을 깨닫는 것이 곧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자아와 하나님의 신성(神性)은 동일하다고 믿는다. 이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일을 방불케 하는 가르침이다.
(2) 영지주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는 달리 죄와 회개가 아니라 불교의 제행무상 즉 “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한다.”는 사상과 제법무아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인연으로 생겼으며 변하지 않는 참다운 자아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과 비슷한 교리를 말하고 또 깨달음에 대해서 말한다. 즉, 영지주의자들은 현대판 동양의 구루와 비슷한 예수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3)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기에 예수 또한 인간과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을 가진 존재로 믿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또한 인간들과 같은 근원에서 왔다고 말한다.
(4)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여호와를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전쟁을 좋아하며 살육을 즐기는 구약의 신이야말로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계를 만든 악마로 본다.
(5) 영지주의자들은 윤회를 인정하며 또한 위대한 어머니(태모)에 대한 숭배를 이야기한다(현대 영지주의자들은 과거 영지주의 시대와 대승불교 시대가 같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예수가 인도로 가서 힌두교 사상을 배웠다고 주장함).
한편 영지주의자들 가운데는 자기들이 신의 지식을 가졌으므로 무엇이나 자유롭게 행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자가 많았으며 그래서 거기 속한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방종에 빠져 죄 가운데 살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같은 태도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며 구원받은 자는 죄에서 해방되어 거룩함에 이르러야 함을 강조했다(롬6:1-11).
사도 요한 역시 구원 받은 자들이 계속해서 죄 가운데 거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요일3:4-10).
2009-07-19 03:01:13 | 관리자
영지, 장원 따위의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
2009-07-19 03:00:12 | 관리자
eternal이 질적인 영원을 표시한다면 everlasting은 시간적 개념의 영원을 나타낸다. 영혼멸절설 참조.
2009-07-19 02:59:49 | 관리자
환영하며 맞이하여 대접함.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분을 마음속에 구원자로 모셔 들이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다(요1:12).
2009-07-19 02:59:2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