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1182개
혼전 성관계: 성경적 정의와 오늘날의 적용 1. 혼전 성관계는 성경에서 어떻게 정의되는가? 성경은 명확하게 음행(forni­cation), 간음(adultery), 그리고 성적 부도덕(sexual immorality)을 죄로 정죄한다. 이 중 '혼전 성관계'라는 단어 자체가 성경에 명시되어 있진 않지만, 그 개념은 음행이라는 용어 안에 포함된다. 고린도전서 7:2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행을 피하기 위해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둘지니라.” (고전 7:2, 흠정역) 이 구절은 혼전 성행위가 음행임을 전제하고 있으며, 음행을 피하는 유일한 정당한 방법이 결혼을 통한 합법적 성적 결합임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히브리서 13:4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말한다: “결혼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존귀한 것이니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라. 그러나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 (히 13:4, 흠정역) 성경은 결혼 밖에서의 모든 성적 행위를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하며, 이는 당연히 혼전 성관계도 포함한다. 2. 성경 전체에서의 일관된 정죄 혼전 성관계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에 포함된 성적 부도덕 안에 포함되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죄악이다: 사도행전 15:20 고린도전서 5:1, 6:13, 6:18, 10:8 고린도후서 12:21 갈라디아서 5:19 에베소서 5:3 골로새서 3:5 데살로니가전서 4:3 유다서 1:7 요한계시록 21:8 이 모든 구절은 음행과 성적 부도덕을 포함한 죄 목록에서 혼전 성관계를 분명히 죄로 포함시키고 있다. 3.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성(性)의 목적 하나님은 결혼 제도 안에서만 성관계를 허락하셨고, 이는 쾌락뿐 아니라 출산과 자녀 양육이라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잠언 5:18–19, 아가서 4장 등은 결혼 안에서의 성관계가 기쁨의 선물임을 말한다. 그러나 결혼 없이 성관계를 할 경우: 하나님의 언약 없는 남녀가 성의 결실을 즐기고 책임지지 못할 생명을 낳게 되는 위험을 감수하며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 구조 밖에서 죄를 짓게 된다. 4. 혼전 성관계의 결과와 사회적 해악 현대 사회는 혼전 성관계를 '개인의 자유'로 미화하지만, 그 결과는 실로 참담하다: 성병의 확산 낙태 증가 미혼모 문제와 원치 않는 임신 양육자 없는 아이들 성경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단지 개인 윤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다. 5. 결론 혼전 성관계는 성경 전체가 명확히 정죄하는 음행이다. 이는 결혼 언약 없이 하나님의 선물인 성(性)을 남용하는 죄이다. 성경은 혼전 성(性)을 죄로 간주하며, 이를 피하고 거룩한 결혼 안에서만 성관계를 하라고 명령한다. 참된 신자는 성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절제하며,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라. 너희는 음행을 삼가고” (살전 4:3, 흠정역)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롬 12:1, 흠정역) 하나님은 결혼 안에서의 순결을 기뻐하시며, 혼전의 정결함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의 길이다.
2025-05-29 12:02:42 | 관리자
히브리서 13장 5절, 도박은 죄인가?: 성경적 관점에서 본 노름과 탐욕   1. 성경은 도박을 직접적으로 금하는가? 성경은 "도박"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 않지만, 돈을 사랑하는 마음, 탐욕, 부정한 재물, 그리고 일확천금의 유혹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한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라.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을 범하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 (딤전 6:10, 흠정역) "너희의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히 13:5, 흠정역) 도박은 본질적으로 일하지 않고 얻으려는 시도이며, 성경은 분명히 수고를 통해 얻는 부를 칭찬한다: "헛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들 것이나 수고하여 모으는 자는 재물을 늘리리라." (잠 13:11, 흠정역)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노라." (살후 3:10, 흠정역) 2. 제비 뽑기와 도박은 다른가? 성경에는 제비 뽑는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재물의 이전이나 내기를 위한 행위는 아니었다. 죽어야 할 희생물 염소와 산 채로 풀어 주는 속죄 염소 구분 (레 16:8) 이스라엘의 땅 분배 (수 18:10) 예루살렘 거주자 선정 (느 11:1) 가룟 유다의 후계자 선정 (행 1:26) "제비는 겹친 옷자락 속에서 사람이 뽑지만 그것에 따른 전체적인 판결은 주께서 하시느니라." (잠 16:33, 흠정역) 이것은 오늘날 도박처럼 우연을 노려 재물을 얻는 행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도박의 진정한 본질은 마태복음 27:35에서 드러난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두고 제비를 뽑는 장면이다: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그분의 옷들을 제비 뽑아 나누니..." (마 27:35, 흠정역) 이 장면은 세속적 탐욕과 영적 무관심의 극단적 표현이다. 3. 도박은 타인의 손해를 기반으로 한 죄악이다 도박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의 손해 위에 자신의 이익을 세우는 행위다. 한 사람이 돈을 따려면, 반드시 다른 이들이 져야 한다. 이는 단순한 어리석음이 아니라, 비윤리적 행위다. "의로운 사람은 자기 짐승의 생명을 중히 여기지만 사악한 자들의 친절한 긍휼은 잔인하니라." (잠 12:10, 흠정역) 이는 이웃의 약점을 이용하고,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며,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4. 카지노, 스포츠 도박, 복권 등 카지노는 마케팅을 통해 가능한 많은 돈을 걸게 만든다. 술을 공짜로 제공하며 분별력을 흐리게 하고, 온갖 화려함으로 탐욕을 자극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게임은 구조적으로 이용자에게 불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스포츠 도박 또한 마찬가지로 점점 대중화되고 있으며, 일부는 이것을 단순한 오락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역시 탐욕과 중독의 위험을 동반하며, 경기의 공정성도 훼손할 수 있다. 미국 도박 문제 위원회(NCPG)에 따르면, 미국인 약 500만 명이 강박적 도박자에 해당한다. 복권은 공익 명목으로 운영되지만, 실제로 가난한 계층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최하위 소득 가정은 연소득의 13%를 복권에 쓰는 반면, 고소득층은 단 1%만 소비한다. 이는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시스템이다. 5.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분별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가? (히 13:5)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진리를 기억하는가? (마 6:24) 청지기로서 맡은 것을 잘 관리하고 있는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고 있는가? "그러므로 탐욕은 우상숭배니라." (골 3:5, 흠정역) 그리스도인은 믿음 안에서 책임감 있게 판단하며, 탐욕과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단순한 재미나 여가라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지 말라. 6. 결론 성경은 도박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탐욕과 돈에 대한 사랑, 부정한 재물에 대해 강력히 경고한다. 도박은 타인의 손해를 기반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로, 윤리적으로도 비성경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청지기적 책임, 간증,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해야 하며, 돈을 사랑하지 말고 경건과 자족함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니" (딤전 6:6, 흠정역)
2025-05-29 11:58:59 | 관리자
방언의 은사: 성경적 정의와 오늘날의 적용   1. 방언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방언(speaking in tongues)은 처음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에서 등장한다. 성령이 임하시자 제자들이 자신들이 배우지 않은 실제 외국어(타언어)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주변 여러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저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우리 언어들로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행 2:11)고 반응했다. 여기서 ‘방언’으로 번역된 헬라어 “글로싸이”(glōssai)는 문자 그대로 ‘언어들(languages)’을 뜻하며, 알 수 없는 소리나 황홀경의 음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외국어를 말한다. 이는 “그런데 어떻게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우리 언어로 듣느냐?”(행 2:8)라는 사람들의 반응으로도 분명히 확인된다. 2. 방언의 목적은 무엇인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의 목적과 한계를 명확히 설명한다: 방언은 외국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표적이었다. “그러므로 타 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고전 14:22)이라고 했고, 이는 사도행전 2장의 사건과 정확히 일치한다. 교회 안에서는 방언을 사용할 경우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며(고전 14:27–28), 통역이 없을 경우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고 자기에게와 하나님께만 말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방언은 개인의 경건을 위한 기도 언어나 자기만족의 수단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타언어를 사용하는 특별한 은사였다. 3. 방언은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고린도전서 13:8은 “타 언어들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교회사적 맥락과 맞물려 방언의 은사는 사도 시대에 그 기능을 다하고 사라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방언은 교회의 기초를 세우기 위한 은사였으며(엡 2:20), 교회가 완성된 이후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었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은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취였으며, 방언은 이 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징조로 주어졌던 것이다(사 28:11 참조). 바울은 “ 모두 타 언어들로 말하겠느냐?”(고전 12:30)라고 반문하며, 모든 성도가 방언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배격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오늘날 복음적 신학자들과 침례교, 개혁주의, 보수적 복음주의 교단들은 방언의 은사는 사도 시대에 끝났으며 오늘날에는 유효하지 않다고 본다. 4. 오늘날의 ‘방언 기도’ 또는 ‘신비 방언’은 성경적인가? 오늘날 많은 오순절파 및 은사주의 교회에서 알 수 없는 소리나 황홀한 경험을 ‘방언’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방언과는 전혀 다르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실제 외국어였으며, 듣는 이들이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비판한 것은 의미 없는 방언 남용과 질서 없는 예배였다. 오늘날 ‘신비한 방언’을 성령충만의 증거로 삼는 주장 또한 성경 어디에도 명령되어 있지 않으며, 성령충만은 말씀에 순종하고 거룩함 가운데 걷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방언 여부로 판단할 수 없다. 5. 방언 은사에 대한 오늘날 교회의 태도 방언은 교회의 기초가 세워지던 특별한 시대의 은사였으며 지금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오늘날 사용되는 방언은 심리적·감정적 현상일 가능성이 높으며, 성경의 방언과는 형태, 목적, 본질이 다르다. 오늘날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 존 파이퍼(John Piper), 웨인 그루뎀(Wayne Grudem) 등도 방언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며, 신약 성경의 방언은 타언어이며 오늘날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방언 현상은 성경적인 것이라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결론: 방언은 성령께서 교회의 초창기에 주신 실제 외국어의 은사였으며, 복음을 전파하고,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표적이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방언은 이미 사도 시대에 그 목적을 이루고 사라진 은사이며,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 현상은 성경의 방언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방언이 아닌, 말씀에 대한 순종과 거룩한 삶으로 성령 충만을 나타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은 항상 질서 가운데 역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전 14:33).
2025-05-29 11:54:37 | 관리자
민수기 12:1-9, 성경은 인종 간 결혼을 어떻게 보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다른 민족,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은 옳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인종 간 결혼은 죄가 아니며, 오히려 믿음 안에서의 하나 됨을 더욱 풍성히 보여 줄 수 있는 결혼임을 가르칩니다. 아래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원리를 바탕으로, 성경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에서 이방 결혼 금지 명령의 진짜 이유는 '종교적 순결' 때문임 신명기 7:3-4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그들과 결혼하지도 말지니... 그들이 네 아들을 빗나가게 하여 나를 따르지 못하게 하므로 네 백성이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기 때문이니..." 여기서 금지된 것은 '인종 간 결혼'이 아니라, 우상 숭배자들과의 결혼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 숭배로 인해 이스라엘이 미혹되어 떠나게 될 것을 우려하신 것입니다 (말라기 2:11 참조). 신약의 동일한 원리: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고린도후서 6:14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않게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이 구절도 피부색이나 민족이 아닌 영적 상태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결혼의 핵심은 상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인가, 즉 중생한 성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종 간 결혼의 긍정적 예 룻과 보아스: 룻은 모압 여자였고, 보아스는 유다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룻기는 이들의 결혼을 정죄하기는커녕 오히려 다윗 왕의 조상으로 연결되는 은혜의 계보로 높이 평가합니다 (룻기 4:13-22). 모세와 구스 여인(에티오피아 여자): 민수기 12장에서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했을 때, 미리암과 아론이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며 모세를 변호하셨습니다 (민수기 12:1-9). 에스더와 아하수에로 왕: 에스더는 유대 여인이며, 남편은 페르시아 왕입니다. 이 결혼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에스더기 전체). 이와 같은 예들은 하나님께서 피부색이나 민족이 아니라, 그분의 뜻과 믿음을 따라 이루어지는 결혼을 귀히 여기신다는 증거입니다. 인종 차별은 성경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음 야고보서 2:1–10은 외모나 지위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죄로 규정합니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10: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이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 모든 사람 위에 계신 같은 주께서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니" 갈라디아서 3:28에서도: "그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없고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으며 남자나 여자가 없나니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라."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민족, 인종, 계급의 구분이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담과 이브로부터 유래한 하나의 인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이를 더욱 뒷받침합니다. 실용적 고려 사항 인종 간 결혼은 성경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 문화적 차이로 인한 도전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커플은 이에 대해 신중한 기도와 준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신성한 제도이며 (히브리서 13:4), 창세기 2:24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은 민족을 초월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5:25–33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통해 결혼의 신비와 영광이 설명되듯, 인종 간 결혼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드러내는 복음의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 결혼의 기준은 '피부색'이 아닌 '믿음' 결국 결혼 상대자를 선택할 때의 핵심 기준은 그 사람의 민족이나 피부색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인가입니다.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결혼은 인종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일 뒤에 내가 보니, 보라,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모든 민족들과 족속들과 백성들과 언어들에 속한 큰 무리가 흰 예복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든 채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요한계시록 7:9) 하늘에서 모든 민족과 언어가 함께 예배드릴 그날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의 결혼 또한 복음의 일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5-05-29 11:39:57 | 관리자
구원의 영원한 안전보장 – 참된 성도는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인가? 혹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어떤 경우에는 그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수많은 성도들에게 신앙의 본질과도 같은 문제입니다. 감사하게도 성경은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결코 그 구원을 잃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 진리를 흔히 “구원의 영원한 안전보장”이라고 부릅니다. 1.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요한복음 3:3: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으며” 구원은 단순히 기도를 따라하거나 감정적인 결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중생(重生)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이 새 생명은 누구도 끊거나 취소할 수 없습니다. 2.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이루어지는 완전한 계획입니다 로마서 8:30: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자신이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자신이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자는 반드시 영화롭게 하십니다. 중간에 떨어져 나가거나 취소되는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합니다. 3. 하나님의 자녀는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3: “누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무슨 일로 고소하겠느냐?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요한복음 10:28–29: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무도 내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누가 그 판결을 뒤집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Advocate)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성도를 끌어낼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4. 영원한 생명은 “잠시 생명”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16: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 도중에 사라질 수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은 영원히 지속되는 구원입니다. 5. 진정한 성도는 결코 완전히 믿음을 떠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신앙을 떠나거나 죄 가운데 지속적으로 거하는 자는 처음부터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았던 자일 수 있습니다. 참된 구원은 변화된 삶의 열매로 증명됩니다. 마태복음 7:16: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6. 하나님의 봉인은 결코 파기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13–14: “... 너희가 믿은 뒤에 또한 그분 안에서 약속의 저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는데... 값 주고 사신 그 소유물이 구속받을 때까지 우리 상속 유업의 보증이 되사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봉인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로서 성령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 확실히 지켜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보증과 봉인은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보장된 것입니다. 한 번 봉인된 자는 결코 영원한 상속 유업에서 제거되지 않습니다. 7. 존 맥아더, 존 파이퍼, 웨인 그루뎀, 그리고 대다수 침례교 목사들의 공통된 신앙고백 이 진리는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 진영의 주요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신학적으로 견고하게 믿어지고 가르쳐지고 있는 진리입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끝까지 지켜진다. 만일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참된 성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이루신다. 참된 성도는 반드시 견디고, 반드시 영화롭게 된다.” 웨인 그루뎀(Wayne Grudem): 그의 조직신학에서 이 진리는 성경적 구원론의 핵심으로 다루어지며, 거듭난 성도는 결코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침례교(Baptist) 교회와 목사들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진리를 성경적 교리로 고백합니다. 이는 단순한 교리적 주장이나 위로가 아니라,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결론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확증된 은혜의 선물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절대로 그 구원을 잃지 않으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끝까지 붙들립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어떤 창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킹제임스 흠정역) “이제 너희를 보호하사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유다서 1:24) 구원의 안전은 내게 달린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행위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2025-05-29 11:34:37 | 관리자
로마서 14장 23절, 성경은 문신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오늘날 문신은 더 이상 특정 계층이나 반항의 상징이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문신을 예술, 개성, 또는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믿는 자로서 문신을 해도 되는가?,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신약 성경은 문신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문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금하거나 허용하는 명령이 없습니다. 따라서 문신을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는 일종의 '그레이 존(회색 영역)'에 해당하며, 각자가 믿음 안에서 자기 양심에 따라 결정해야 할 영역입니다. 로마서 14:23 (흠정역):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 자신의 결정이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신에 적용할 수 있는 원칙들을 제공합니다 1. 부모에게 순종하는가? 에베소서 6:1–2: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것은 약속 있는 첫째 명령이니).” 미성년자가 부모의 동의 없이 반항심으로 문신을 하려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반항에서 비롯된 문신은 죄입니다. 2. 외적 치장이 내적 경건보다 앞서는가? 베드로전서 3:3–4: “너희는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거나 옷을 차려입는 그런 외적 단장으로 단장하지 말고 오히려 마음의 감추어진 사람으로 단장하라. 그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요, 썩지 아니하는 것이니 즉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 장식이니라."   문신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거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동기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숭배이고 허영이며 죄가 될 수 있습니다. 3.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고린도전서 10:31: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문신을 하려는 동기가 단지 ‘유행이니까’, ‘나만의 개성이니까’라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결정인가를 진지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4.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그분을 하나님에게서 받았고 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믿는 자의 몸은 자기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문신이 성전의 정결함과 거룩함을 훼손하지 않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단순한 문신을 넘어서, 과도하거나 신체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죄가 될 수 있습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고린도후서 5:20: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가 되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문신은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인식하게 하는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자로서, 문신이 복음의 전달에 도움이 되는가, 혹은 걸림돌이 되는가? 이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6. 문신이 미신적 요소나 세속 문화를 따르는 것은 아닌가? 레위기 19:28: “죽은 자로 인해 너희 살을 베지 말며 너희 몸에 아무 표도 새기지 말라. 나는 주니라.”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으로, 오늘날 신약 성도에게 율법 그 자체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율법은 이방인의 우상 숭배나 미신적 상징과 관련된 문신을 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어떤 이유로든 미신적 상징, 우상 숭배적 요소, 또는 세속 철학을 담은 문신을 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 문신은 죄가 아닐 수도 있지만,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문신 자체가 항상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왜 하려는가, 무엇을 새기려는가, 어떤 태도로 하려는가는 반드시 성경의 원칙에 따라 점검해야 합니다. 반항에서 비롯된 문신은 죄입니다 허영과 자기 과시를 위한 문신은 죄입니다 미신적 또는 우상적 문신은 죄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문신은 죄입니다 믿는 자는 자기 양심과 믿음 안에서 판단해야 하며, 자신의 결정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인지 늘 기도와 말씀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 (로마서 14:23, 흠정역)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20)
2025-05-29 11:23:29 | 관리자
동성애는 왜 하나님 앞에 특별히 가증한 죄인가?   오늘날 많은 사회가 동성애를 인권의 문제로 보며, 도덕적 판단을 넘어서 받아들여야 할 개인의 성향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성애를 가증한 죄로 정죄하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로 규정합니다. 이 문제는 문화의 변화나 시대 흐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거룩하게 여기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죄입니다 레위기 18:22 (흠정역): “너는 여자와 함께 눕는 것같이 남자와 함께 눕지 말라. 그것은 가증한 것이니라.” 레위기 20:13: “또한 남자가 여자와 함께 눕듯이 남자와 함께 누우면 그들이 둘 다 가증한 짓을 행하였으므로 반드시 그들을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그들에게 돌아가리라.” 동성애는 단순한 도덕적 일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증한 일(abomination)’이라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여 다른 죄들과 구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 결혼 제도(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연합),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는 심판의 징조이며, 사회의 타락을 드러냅니다 로마서 1:26–27 (흠정역): “이런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러운 애정에 내주셨으니...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보기 흉한 짓을 행함으로 자기 잘못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자기 속에 받았느니라.” 동성애는 단순한 개인적 취향이나 기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이 스스로를 최종 권위로 삼을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로마서 1장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자들을 ‘그들의 정욕에 내어주신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시대를 ‘노아의 날들과 롯의 날들’에 비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28–30 (흠정역): “마찬가지로 롯의 날들에도 그와 같았으니... 그날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같이 쏟아져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바로 그와 같으리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가 노아의 날들과 롯의 날들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대표적인 죄는 동성애였으며, 유다서 1:7은 이를 “다른 육체를 따르는 음행”이라고 밝힙니다. 마지막 시대에 동성애가 창궐하는 것은 단지 사회의 타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동성애적 유혹은 죄가 아니지만, 그 유혹을 따르는 행동은 죄입니다 야고보서 1:14–15: “오히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을 때에 시험을 받나니... 그런즉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느니라.” 동성애적 유혹이나 경향은 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유혹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고, 그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유혹에 순복하고 그것을 삶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어떤 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9–11 (흠정역):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여성화된 남자나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나... 너희 중에도 이 같은 자들이 얼마쯤 있었으나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기고 거룩히 구별되어 의롭다고 인정받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과거에 동성애자로 살았던 자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용서받았으며, 더 이상 그 죄로 정의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복음은 동성애자에게도 열려 있으며, 예수님의 보혈은 모든 죄를 정결케 할 능력이 있습니다. 새로운 창조물로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흠정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을 과거의 죄로 정체화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거룩한 백성,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적 타락으로부터도 완전한 자유와 회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론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가증히 여기시는 죄입니다. 이는 단지 개인적 취향이나 성적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 결혼 제도, 생육과 번성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 표지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은 모든 죄인에게 소망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와 용서는 가능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유혹을 이기고, 진정한 정결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죄를 합리화하거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고 다시는 그들의 죄들과 그들의 불법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느니라.” (히브리서 8:12, 킹제임스 흠정역)
2025-05-29 11:19:57 | 관리자
디모데전서 3장 여성 목사,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여성이 목사나 교회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이는 단순한 성 평등의 문제도 아니고, 여성의 재능과 영적 성숙을 폄하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 교회의 질서를 어떻게 정하셨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성경은 여성의 목회 사역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1–12절 (흠정역): “여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잠잠히 배울지니라. 더욱이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여자는 잠잠히 있을지니라.” 사도 바울은 남녀 간의 사회적 지위나 시대적 배경 때문에 이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그 근거는 창조 질서 자체에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3–14절: “이는 아담이 먼저 지어지고 그 뒤에 이브가 지어졌으며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법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영적 지도력과 공적 가르침의 책임을 맡기셨고, 여자는 조용함 가운데 배우며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정하셨습니다. 감독(목사)과 집사의 자격은 남성으로 제한됩니다 디모데전서 3장 2절, 12절 (흠정역): “그러므로 감독은 반드시 책망받을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표현은 성경적으로 감독(목사)과 집사의 자격이 반드시 남성에게만 해당됨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여성이 남편이 될 수 없듯이, 여성이 이 직분을 맡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결코 여성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지만, 공적 가르침과 영적 권위는 남성에게 주어진 책무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브리스길라, 뵈뵈, 드보라 등의 사례는 목회 권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 속 여성 인물들—예: 드보라, 미리암, 브리스길라, 뵈뵈 등—을 근거로 여성도 목사로 세워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공적 예배에서 남성을 가르치거나 영적 권위를 행사한 사례가 없습니다. 드보라는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인도했지만, 이는 국가적 재판 사역이며, 교회 목회 사역과는 다릅니다. 브리스길라는 아굴라와 함께 아볼로를 개인적으로 지도했지만, 공개적으로 교회를 가르치거나 다스린 것이 아닙니다. 뵈뵈는 교회의 "섬기는 자(servant)"로 칭송받았을 뿐, 장로나 감독으로 인정된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예외적 사역 사례들을 교회 직분의 원리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여성은 교회 안에서 귀중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성들이 다음과 같은 사역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장합니다: 다른 여자를 가르치는 사역 (디도서 2:3–5) 자녀들을 가르치는 사역 (딤후 1:5) 복음을 전파하고 간증하는 일 (마 28:18–20, 행 1:8) 성령의 은사를 통한 섬김 (고전 12장) 공적인 기도와 대언 (고전 11:5) 봉사와 긍휼 사역 (롬 16:1–2, 딤전 5:10) 하나님께서는 여성에게도 성령의 은사를 주셨으며, 교회 안팎에서 귀히 쓰임 받을 사역의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단지 남자를 가르치거나 교회를 다스리는 공적 권위는 허락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교회 역사와 복음주의 진영의 일치된 입장 현대 복음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도 이 점에서 한 목소리를 냅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여성이 목사가 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공개적 반역”이라고까지 말하며, 교회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 남녀의 차이는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복된 질서임을 강조합니다. 웨인 그루뎀(Wayne Grudem): 여성의 목회는 성경에 위배될 뿐 아니라, 교회와 가정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최대 복음주의 교단인 남침례교단(Southern Baptist Convention, SBC)은 공식적으로 “여성은 목사직을 맡을 수 없다”는 입장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최근에도 이 원칙을 어긴 교회를 제명시킨 사례가 있습니다. 즉, 성경적 보수주의를 따르는 전통적인 교회들과 신학자들은 모두 여성 목사의 불가를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으며, 그 입장은 성경의 명확한 계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결론 성경은 분명하게 여성의 목회직 수행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을 차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세우셨는지를 그대로 따르려는 순종의 문제입니다. 여성이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여성의 가치가 낮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질서와 역할을 각 성별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 (잠언 30:5, 킹제임스 흠정역) 오늘날 교회가 이 질서를 무시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가 무너지며,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역할도 약화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경의 가르침 위에 바로 서서,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 안에서 겸손히 각자의 자리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2025-05-29 11:12:01 | 관리자
가인의 아내는 누구였는가? – 성경이 주는 분명한 답 성경을 읽다 보면 창세기 4장 17절에서 가인이 아내를 알았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직 세상에 사람이 많지 않았을 그 시점에 도대체 가인의 아내는 누구였는가? 이 질문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신뢰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고, 믿지 않는 자들이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그대로 따라가면 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습니다. 1. 모든 인류는 아담과 이브의 후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그러므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창세기 3장 20절: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이브라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살아 있는 모든 자들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더라.” 사도행전 17장 26절: “또 그분께서 사람들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에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성경은 아담이 인류의 첫 사람이고, 이브가 모든 사람의 어머니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계열의 인류가 따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는 아담과 이브에게서 나왔습니다. 2. 아담과 이브는 여러 아들과 딸들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5장 4절: “아담이 셋을 낳은 뒤 그의 생애는 팔백 년이었으며 그가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흔히 알려진 가인, 아벨, 셋 외에도 아담과 이브는 수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자신의 누이 또는 가까운 친척과 결혼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인류 초기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3. 초기에는 근친혼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근친혼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성경에서 근친혼을 금지한 바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복 누이 사라와 결혼하였습니다 (창 20:12) 이삭은 사촌 리브가와 결혼하였습니다 (창 24:15)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딸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창조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당시에는 사람의 유전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순수하였기 때문에, 유전적 결함이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근친 간의 결혼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근친혼을 금지하신 것은 유전적 돌연변이가 누적된 시기, 즉 모세 시대부터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아담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성경은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씨로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고, 구속도 반드시 아담의 자손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장 16절: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 누가복음 3장: 예수님의 족보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만약 아담 외에 다른 인류 계열이 있었다면, 그들은 구속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류 전체가 아담에게서 나왔으며,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자로 오셨습니다. 결론 가인의 아내는 그의 누이 또는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담과 이브가 많은 자녀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에는 근친혼이 자연스럽고 허용된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를 숨기지 않고 분명히 밝혀주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바르게 믿고 따르면 혼란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킹제임스 흠정역)
2025-05-29 11:02:27 | 관리자
지옥의 위치 및 지하 세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지옥'(헬, 스월)은 때로는 넓은 의미의 '지하 세계'를 가리키기도 하고, 좁은 의미로는 뜨거운 불이 있는 고통의 장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지하 세계는 문자적으로 땅 아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지하 세계에는 두 가지 주요 장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뜨거운 불이 있는 지옥으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가 갔던 곳입니다. 다른 하나는 낙원(파라다이스) 또는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이 두 장소는 지하 세계 안에 있었지만, 서로 왕래할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죽으면 지하 세계로 내려갔는데, 의인들은 아브라함의 품/낙원으로 갔고, 악인들은 뜨거운 지옥으로 갔습니다. 사무엘상 28장의 사무엘이 엔돌의 무당에 의해 '위로' 올라오는 것처럼 묘사된 것은, 구약 시대에는 모든 혼이 땅 아래 지하 세계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의 경우는 특별하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로 설명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육체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혼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시편 16편을 인용하여 설명하듯이, 지옥(지하 세계)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것은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지옥 뱃속 같은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은 표적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의 혼이 내려간 지하 세계의 특정 부분은 누가복음 23장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로 그 낙원(아브라함의 품)이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도 예수님께서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언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면서 이 지하 세계의 낙원에 갇혀 있던 구약 시대의 성도들, 즉 아브라함이나 다윗, 모세, 아담, 이브와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로 인해 지하 세계에 있던 낙원(아브라함의 품)은 이제 비어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셋째 하늘로 채 올라갔다고 말한 장소가 바로 옮겨진 낙원이라고 설명됩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는 성도가 죽으면 예수님과 함께 바로 하늘에 있는 낙원(셋째 하늘)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영들은 노아 시대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불순종하던 자들로, 하나님의 아들들(타락한 천사들)이나 그들과 사람들 사이에 태어난 거인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감옥은 탈타로스라고 불리는 곳으로 언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 갇힌 영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지하 세계 개념에서 지옥은 계속해서 땅 아래에 있는 뜨거운 고통의 장소로 존재하며, 구약 시대의 낙원(아브라함의 품) 또한 땅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지하 세계의 낙원에 있던 구약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옮겨졌으며, 이제 낙원은 셋째 하늘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지하 세계의 뜨거운 지옥은 장차 천년 왕국이 끝나고 흰 왕좌 심판 이후에 사망과 함께 불 호수로 던져져서 둘째 사망이 될 것이라고 요한계시록은 이야기합니다.
2025-05-28 20:39:00 | 관리자
롬 8:13 – ‘영으로 몸을 죽인다’는 것인가, ‘성령을 통해 죽이는가’?   개역: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흠정역: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KJV: “through the Spirit do mortify the deeds of the body” ▶ 여기서 개역은 ‘영으로써’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마치 우리 안에 있는 ‘영’이 몸을 제어하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한다. ▶ 그러나 성경은 그 어떤 ‘인간의 영’도 죄의 행위를 죽일 수 없다고 말한다.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죄의 정욕을 이길 수 있으며, 성령 안에서 걷는 삶만이 육신을 이기는 삶이다(갈 5:16–17). ▶ 이 구절은 영과 몸 사이의 대결이 아니라, 성령 대 육신의 대조다. 개역의 번역은 독자로 하여금 영지주의적 이원론(몸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을 떠올리게 하며, 행위의 주체가 왜곡된다. 결론: 죄를 이기는 능력은 인간의 영이 아닌 성령의 권능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번역은 ‘성령을 통해’로 정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2025-05-27 15:25:01 | 관리자
롬 8:10 – ‘영이 살았다’는 것인가, ‘성령이 생명이 되셨다’는 것인가?   개역: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흠정역: “성령은 의로 인해 생명이 되시느니라” KJV: “the Spirit is life because of righteousness” ▶ 개역은 "우리의 영이 산 것이다"라고 번역하여 구원받은 자의 영이 따로 살아나서 죄와 상관없어진 존재처럼 이해되게 만든다. ▶ 실제로 이 표현은 영지주의적 이단들이 주장하는 "나는 영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내 몸이 짓는 죄는 상관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해석으로 오용될 수 있다. ▶ 하지만 로마서 6장에 따르면, 구원은 단순히 영의 부활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의의 생명’의 시작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영의 생존’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 생명이 되셨다는 사실이다. 결론: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셔서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지, 내 영이 독립적으로 의롭고 깨끗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2025-05-27 15:24:12 | 관리자
롬 8:6 – ‘영의 생각’인가, ‘영적으로 생각함’인가?   개역: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흠정역: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KJV: “to be spiritually minded is life and peace” ▶ 개역은 ‘영의 생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마치 영(spirit)이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인격체처럼 묘사한다. 이는 인간 구성에 대한 성경적 삼분론(영–혼–몸)에 어긋난다. ▶ 성경에 따르면 판단과 사고의 주체는 ‘혼’이며, 영은 생명과 교통의 기관이다. 따라서 올바른 표현은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 즉 혼이 성령의 지배 아래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상태이다. ▶ 또한 에베소서 4:23, 딤후 1:7 등에서는 ‘생각의 영(spirit of your mind)’이란 표현이 쓰이지만, ‘영의 생각’은 성경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론: “영적으로 생각함”은 성령의 인도 아래 내면이 변화되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단순한 ‘영적 추상성’이 아니다.
2025-05-27 15:23:05 | 관리자
롬 8:5 – ‘영을 좇는 자’인가, ‘성령을 따르는 자’인가?   개역: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흠정역: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나니” KJV: “But they that are after the Spirit the things of the Spirit” ▶ 개역 성경은 ‘영을 좇는다’고 표현함으로써 **구체적 대상이 없는 ‘영적인 존재 일반’**을 의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성령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 영들(요일 4:1), 점치는 영, 귀신의 영들도 존재한다. 따라서 단순히 “영을 좇는다”는 표현은 은사주의, 무속 신앙, 심령술까지 포함할 수 있는 위험한 해석을 낳는다. 결론: 성경이 말하는 것은 막연히 ‘영적’인 삶이 아니라 성령님께 순복하는 삶이다.
2025-05-27 15:21:51 | 관리자
팔레스타인의 소금   예수님께서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이라는 말씀을 하신 배경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실제로 사용되던 **암염(rock salt)**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비유는 단지 화학적 개념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일상적인 현실에서 나온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예시이다. 다음은 이 말씀을 팔레스타인 지방의 소금 상황과 연결하여 논리적으로 정리한 요약이다: 1. 당시 소금의 중요성과 가치 예수님 당시 소금은 귀중한 자원이었다. 오늘날처럼 정제된 소금이 대량 생산되기 전에는, 소금은 노동의 대가로 지급되기도 했다. 라틴어 salarium에서 유래한 영어 ‘salary’(급여)는 실제로 “소금으로 주는 보수”를 의미하며, 소금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생필품이었는지를 보여준다. 2. 이스라엘 지역에서의 소금 공급원: 사해의 암염 팔레스타인, 특히 사해 지역에서 소금은 암염 덩어리 형태로 채취되었다. 그러나 이 암염은 오늘날 정제염처럼 순수한 염화나트륨이 아니라 다양한 불순물과 석회질이 섞인 혼합 광물이었다. 이 암염을 물에 담가 소금기를 추출해야만 사용이 가능했고, 몇 차례 물에 우려낸 후 포화용액을 농축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염분이 빠져나간 껍데기만 남는데, 이것은 외형은 여전히 소금 같지만 더 이상 짠맛이 없는 돌가루에 불과하다. 3. 맛 잃은 소금의 실제 모습과 용도 폐기 가축들에게 미네랄을 공급하기 위해 정제하지 않은 암염 원석을 그냥 땅에 던져놓았다. 시간이 지나며 가축들이 핥아먹고, 비바람에 노출되면 암염에서 짠맛이 사라지고 결국 구멍이 숭숭 뚫린 흉측한 찌꺼기만 남게 된다. 이 찌꺼기는 땅에도, 거름더미에도 쓸모가 없고, 오직 사람들과 짐승들의 발밑에 밟히는 존재가 된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맛을 잃은 소금"이다. 4. 영적 교훈과 적용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고 하시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역할을 설명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 영향력을 잃은 자에 대해 경고하신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만, 안에는 진리와 경건의 능력이 사라진 자는 결국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모가 없어지고, 세상에 밟히는 신세가 된다. 마태복음 5:13과 누가복음 14:34–35에서 반복된 이 말씀은 소금의 지속적인 본질 유지, 즉 진리와 거룩함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결론 예수님께서 하신 “맛을 잃은 소금”의 비유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무나 현실적이고 직관적인 교훈이었다. 사해에서 채취한 암염처럼, 겉모양만 남은 그리스도인은 결국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세상에 짓밟히고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소금의 본질을 유지해야 하며, 세상을 향한 정결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025-05-27 15:01:20 | 관리자
요한계시록 15장 3절 성도들의 왕 만국의 왕?   요한계시록 15장 3절은 구속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장면이다. 이 노래의 핵심 구절 중 하나가 "성도들의 왕이여"라는 표현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표현을 "King of saints"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지만, 다수의 현대 역본들과 로마 가톨릭에서 사용되는 사본에서 이 표현은 "King of the nations"(NASB), "King of the ages"(NIV) 등으로 바뀌어 있다. 한글 개역, 공동번역, 천주교 성경 등도 "만국의 왕" 또는 "만민의 왕"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단순한 문장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구속 언약 관계를 훼손하는 심각한 신학적 변개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자 주들의 주로 선포할 뿐 아니라, 특별히 자신의 피로 구속한 성도들의 머리이자 왕으로 계신 분으로 묘사한다(계17:14, 골1:18, 엡5:23). 요한계시록 15장 3절은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드리는 직접적인 찬양으로, "성도들의 왕이여"라는 표현이야말로 이 찬양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핵심 문구이다. 하지만 이 표현이 로마 가톨릭 계열 사본에서 "만국의 왕"이나 "만민의 왕" 등으로 바뀌게 된 데에는 명백한 신학적 배경이 있다. 로마 가톨릭은 중세 이후 교황을 교회의 머리로 삼고 있으며,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 자처해왔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도들의 유일한 왕이시라는 성경의 선언은 교황의 권위와 직접 충돌하는 위험한 진리로 인식된다. "성도들의 왕"이라는 표현은 곧 교황이 결코 차지할 수 없는 자리를 가리키며, 이는 로마 가톨릭 체계 속에서 불편하고 제거되어야 할 표현이었다. 이와 함께 가톨릭 신학에서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보편구원론"도 관련이 깊다.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인류가 잠재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리스도를 직접 믿지 않는 자라도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을 채택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이러한 보편주의 신학은 급속히 확산되었고, 이는 성경 해석과 번역에도 반영되었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이라는 특정 구원 공동체보다는 "만민"이나 "만국"과 같은 보편적 표현이 더 선호되었고, 이는 신학적 의도를 반영한 번역 선택이 되었다. 이러한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특정한 무리(즉, 믿는 자들, 성도들)와 맺은 언약의 관계라는 사실을 흐리게 만들고, 단지 인류 전체에 대한 보편 통치 개념만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중심적, 언약 중심적 정체성은 점점 희석되고, 예수님의 통치는 단지 형식적이고 외적인 통치 권위로만 축소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의 머리이시며(행20:28), 성도들의 왕이시다. 그분은 성도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신 목자이시며(요10:11),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참된 왕이시다. "성도들의 왕"이라는 표현은 이 언약적 관계를 정통적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구절로, 그 말씀을 지운다는 것은 복음의 핵심 교리를 삭제하는 것과 다름없다. 요한계시록 15장 3절의 "성도들의 왕"이라는 표현은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만 남아 있다. 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성도들과의 관계를 왜곡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한다. 이 한 구절은 단지 찬양 가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교리의 수호이며, 진리의 기준이며, 변개된 사본과 왜곡된 교리에 맞서 참 진리를 수호하는 최전선이다.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성경이 이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는지를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심과 동시에, 자신의 피로 사신 성도들을 다스리는 언약의 왕이시다. 그분의 통치는 단지 외적인 지배가 아니라, 피로 맺어진 신적 언약에 근거한 내적이고 인격적인 다스림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왕"이라는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단어 하나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과 구속 언약의 진리를 지키는 것이다.
2025-05-27 14:51:58 | 관리자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 곧 그는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5) 이 구절은 오랜 세월 동안 오해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기는 자가 되어야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주장은 마치 구원이 조건부이거나, 행위의 결과인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가르침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이기는 자”란 누구입니까? 1. 요한의 서신에 나타난 명확한 정의 요한일서 5장 4–5절은 "이기는 자"가 누구인지 성경 스스로 해석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본문입니다. “무릇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 (요일 5:4–5) 이 구절에서 분명하게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곧 믿는 자다. 믿음이 곧 세상을 이긴 승리다. 즉, “이기는 자”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이며, 그 승리는 믿음 자체를 통해 이미 확보된 것입니다. 이는 믿는 자가 반드시 어떤 “능력 있는 업적”이나 “영적 전투에서의 승리”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2. 요한계시록 2–3장과의 일관성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주신 약속에는 모두 **“이기는 자에게는…”**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계2:7, 11, 17, 26; 3:5, 12, 21). 여기서 주님은 교회의 상태에 따라 책망하거나 칭찬하시면서도, 이기는 자들에게는 동일하게 보상과 상속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약속들은 모두 "믿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일곱 교회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이며, 그 구성원들은 이미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이 현재 영적으로 무기력하더라도 그들이 이기는 자임을 선언하고, 그 신분에 걸맞게 살기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승리에 연합된 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이므로, 예수님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입니다. 성경은 “이기는 자”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신분(position)**으로 말하지, **노력의 결과로 얻는 상태(condition)**로 말하지 않습니다. 신분: 이긴 자 (이미 이루어진 위치, 확정된 정체성) 삶의 상태: 매일의 순종과 성장 (성화의 여정) 이 둘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신분은 믿음으로 얻으며, 상태는 순종으로 자랍니다. 그러나 신분이 상실되는 일은 없습니다. 4. 이기는 자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 계3:5에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표현은 경고가 아니라, 보장의 약속입니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믿는 자는) 결코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 말씀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는 자의 구원은 확실하고 안전하다는 격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고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이중 부정법을 사용한 강한 보증의 말투입니다. 결론: 이기는 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믿는 자다 이기는 자란 누구인가?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요일5:5) 이 말씀에 따라, 이기는 자는 곧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입니다. 이는 영적 업적이나 도덕적 우수성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를 통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김은 어떻게 오는가? 이김은 우리의 행위나 노력에서 오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라는 말씀처럼, 믿음이 곧 승리의 통로이며 근거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세상을 이기셨고, 그분과 연합된 자는 그 승리에 함께 참여하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는 구별된 소수의 특별한 그룹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믿는 자는 이기는 자입니다. 일곱 교회에게 각각 주신 말씀에서도 보듯, 주님은 각 교회의 상태와 관계없이 믿는 자들에게 “이기는 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어떤 엘리트 영적 계층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은 어떤 의미인가? “이기는 자는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위협이나 불안의 선언이 아니라,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시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하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생명은 결코 취소되거나 지워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3장 5절은 “열심히 살아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경고가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기는 자가 된 성도들에게 주어진 확정적 약속이며, 그 신분에 걸맞게 담대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2025-05-27 14:42:47 | 관리자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계3:10) — “keep from”의 문법적·성경적 의미에 대한 해석 들어가는 말 요한계시록 3장 10절은 말세를 살아가는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약속이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그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 (계3:10, 흠정역) 이 말씀에서 핵심 표현은 “지켜 면하게 하리니”(keep thee from)이다. 이것은 단순히 “시험을 통과하게 해준다”거나 “시험 중에 보호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험의 시간” 자체에 들어가지 않도록 면제하신다는 의미다. 이 점은 영어 표현, 헬라어 문법, 그리고 성경적 사용례를 통해 분명하게 입증된다. 1. 영어 표현 “keep from”의 의미 영어에서 “keep from ~ing”은 단순히 지킨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행위나 상황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방지한다, 면하게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I kept him from going. → 나는 그가 가는 것을 막았다, 못 가게 했다. She kept me from making a mistake. → 그녀는 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이처럼 “keep from”은 무언가 하지 못하게 하거나, 그 상태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그 일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히 “곁에서 지켜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어 속담에도 이런 표현이 있다: The Bible keeps you from sin, and sin keeps you from the Bible. → 성경은 너를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죄는 너를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여기서 “keep”은 “지킨다”가 아니라 “떨어지게 만든다,”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다. “keeps you from”은 곧 단절, 회피, 면제를 뜻한다. 2. 헬라어 원문 표현: τηρέω ἐκ (tēreō ek) 계시록 3장 10절의 “지켜 면하게 하리라”는 헬라어로는 **“τηρήσω ἐκ”**이다. τηρέω (tēreō): “지키다”, “보존하다”, “보호하다” ἐκ (ek): “~에서부터 밖으로”, “~로부터 나와” 즉, “keep from”은 시험 속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임하기 전 단계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다. 만약 주님께서 환난기 중간에 성도들을 보호하시려 하셨다면 **ἐν (en, ~안에서)**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ἐκ이 쓰였고, 이는 시작 전부터의 분리를 뜻한다. 3. 동일 표현의 사용 예: 요한복음 17:15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원치 아니하옵고, 다만 악에서 저들을 지키시옵소서.” (that thou shouldest keep them from the evil) (요17:15) 여기서도 keep from은 “악 속에서 보호한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의 접촉을 막아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세상에 남아 있지만, 악에 물들지 않도록 “떼어놓은” 상태로 보호받는 것이다. 즉, 시험이나 악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막는 것, 그것이 바로 “keep from”의 의미이다. 4. “시험(the test)”이 아닌 “시험의 시간(the hour of test)” 계3:10은 단순히 “시험으로부터 면제”가 아니라, “시험의 시간(the hour of temptation)”으로부터 면제라 하셨다. 이는 시련 자체뿐 아니라 그 시련이 진행되는 시공간 전체를 포함한다. “hour”는 문자적 시간이 아니라 심판의 시기,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시대적 국면을 뜻한다. 다시 말해, 계3:10의 약속은 시험을 견디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험의 시간 자체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5. 그 시험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본문은 분명히 말한다: “그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 이 시험은 신약 교회 성도들을 연단하거나 성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불신 세상 전체에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계시록 전체에서 항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짐승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이다 (계13:8, 계6:16, 계16:2). 반면에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요3:36, 살전5:9, 롬5:1). 따라서 시험의 시간 자체에 들어가지 않는다. 6. 교리적 일치: 성도는 진노에서 제외됨 성경은 반복적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참여하지 않음을 증언한다. “우리를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건지시는 예수님” (살전1:10)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살전5:9)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롬5:1)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시험의 시간 그 자체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교리적 확증이다. 다시 말해, 단순한 “시험 면제”가 아니라 시험의 시간에서의 분리이다. 결론 – “keep from the hour of temptation”은 시간적 면제의 선언이다 요한계시록 3장 10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keep from은 "시험 가운데서 보호"가 아니라 시험의 시기 자체에 들어가지 않도록 막는다는 뜻이다. 시험의 시간은 하나님의 진노가 전 세계에 임하는 환난기 전체를 말하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포함되지 않는 시간이다. 이 약속은 단순한 보호가 아니라 면제이며, 이는 헬라어 문법, 영어 표현, 신약 전체의 교리와 일관된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구원받은 신약 교회 성도들이 환난기 중간이나 끝에 구출되는 것이 아니라, 환난기 시작 전에 휴거되어 그 시간 전체로부터 면제받게 된다는 확실한 약속이다. “I will keep thee from the hour of temptation” = “나는 너를 그 시험이 임하는 시간에조차 들어가지 않도록 막겠다” 이 진리는 성경적 문맥, 원어의 의미, 교리적 정합성, 영어 표현상의 용법에 근거한 해석이며, 킹제임스 성경이 보여주는 번역의 정직성과 정확성을 더욱 명확하게 입증해 준다.
2025-05-27 14:36:45 | 관리자
  “신들을 욕하지 말라” (출애굽기 22:28) — 성경 전체에 비추어 본 정확한 번역의 근거 1. 원어 히브리어와 주요 번역 비교 출애굽기 22장 28절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לֹא תְקַלֵּ֣ל אֱלֹהִ֔ים וְנָשִׂ֥יא בְעַמְּךָ֖ לֹ֥א תָאֹֽר׃ Lo tekalel elohim, ve-nasi be-ammekha lo ta’or. 여기서 핵심은 **“엘로힘”(אֱלֹהִים)**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히브리어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God) — 창1:1 외 다수 신들(gods) — 출20:3, 신6:14 등 재판장(judges) — 출21:6, 22:8~9 권위자들 — 시82:6, 요10:34 해석상 KJV(킹제임스 성경)은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Thou shalt not revile the gods, nor curse the ruler of thy people.” (Ex. 22:28, KJV) 이에 비해, 대부분의 현대 역본은 이 “gods”를 하나님 혹은 재판장으로 번역한다. 예: 개역: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가톨릭역: “하느님을 욕하거나…” NIV: “Do not blaspheme God or curse…” 그러나 KJV는 ‘gods’라는 원어 그대로의 의미를 보존하고 있으며, 이는 본문의 문맥, 문법, 신약의 인용구까지 고려할 때 정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2. 구약에서의 “엘로힘”의 용례 분석 히브리어 성경에서 “엘로힘”은 맥락에 따라 하나님, 신들, 사람들(권위자 또는 재판장)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다음과 같은 구분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지칭할 때: 엘로힘 + 단수 동사 (예: 창1:1 “엘로힘이 창조하시니라” = 단수 동사 사용) 여러 신들(gods)을 지칭할 때: 엘로힘 + 복수 맥락 (예: 출20:3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elohim)을 두지 말라”) 출애굽기 22장 28절은 "엘로힘"을 "욕하다(revile)"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문맥상, 하나님에 대해 쓰일 때는 보통 **“blaspheme”(신성모독)**이나 **“curse”(저주)**가 사용되며, **“revile”**은 사람이나 인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욕설이나 경멸에 사용된다. 실제 예: 레위기 24:15–16에서는 하나님을 “curse”, “blaspheme”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한다. 반면 **“revile”**은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대제사장을 “revile”한 것에 대해 경고받는 장면(행23:5)과 같이 사람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된다. 결국 출22:28의 문장은 두 인물군을 병렬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신들(gods) → 욕하지 말라(revile) 치리자(ruler) → 저주하지 말라(curse) 문장 구조상, 앞의 “신들”이 어떤 존재이든 하나님이 아니라 ‘치리자’와 대응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3. 성경적 문맥 — 병행체(parallelism) 구조 출애굽기 22장 28절은 구약에서 흔히 나타나는 병행체 구조를 따른다. 이는 시편, 잠언 등에서 자주 발견되는 방식으로,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등하거나 유사 개념을 나란히 배치하는 형식이다. “너는 신들을 욕하지 말며 / 네 백성의 치리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이 구조를 고려할 때, 앞의 “신들”은 뒷부분의 “치리자”와 의미상 대응한다. 이는 출애굽기 21:6, 22:8 등에서 “엘로힘”이 **사람 재판자들(judges)**을 지칭한 용례와도 일치한다. 하지만 “신들”을 단지 재판장으로 번역하는 것은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구절을 인용하셨기 때문이다. 4. 신약에서의 인용 – 요한복음 10:34–35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이라고 돌을 들자, 구약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율법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하였노라, 하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들을 그분께서 신들이라 하셨으며…” (요10:34–35) 예수님이 인용한 구절은 명확하게 시편 82:6이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너희는 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82:6)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들”을 가리켜 **신들(gods)**이라 하셨다. 이는 모세오경, 곧 율법(Law)에서 나온 구절을 지칭한 것으로, 출애굽기 22:28이 가장 직접적인 예이다. 다시 말해: 시82:6은 “시편”에 있고 요10:34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기록되었다”고 하셨으므로 예수님이 인용하신 구절은 출22:28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출22:28에서 “엘로힘”을 재판장으로 바꾸면, 예수님의 인용 근거가 사라지며 성경의 통일성이 훼손된다. 반면 KJV의 “gods” 번역은 시편 82편, 요한복음 10장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5. 이교 신(gods of the nations)들과의 관계 출애굽기 22:28의 “gods”를 이교도의 신들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해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문맥상 적절치 않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신들을 언급하지도 말라고 명령하셨다. “다른 신들의 이름은 언급하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 (출23:13)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말며… 섬기거나 절하지 말고” (수23:7) 따라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이교 신들을 존중하라는 의미에서 “욕하지 말라”고 하셨을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그들의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는 강력한 금지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출22:28의 “gods”는 실제 존재하는 통치자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정확하다. 결론 – 킹제임스 성경의 “gods” 번역이 옳다 출애굽기 22장 28절에서 “엘로힘”을 “gods”(신들)로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은 다음의 점에서 옳다. 원어적 정직성 – ‘엘로힘’은 복수형이며, 문맥상 ‘하나님’이 아닌 존재들을 가리킨다. 문법적 구조 – 병행체 문장에서 “치리자”와 대응하는 복수적 존재는 ‘신들’이 가장 자연스럽다. 신약과의 연계 – 예수님은 구약 율법에서 사람들을 ‘신들’이라 부르셨다고 하셨고, 이는 출22:28과 연결된다. 교리적 조화 –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들을 ‘신들’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상징하며, 성경 전체 맥락과 일치한다. 따라서 “신들을 욕하지 말라”는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은 문자 그대로 정확할 뿐 아니라, 신구약을 연결하고, 신적 권위와 인간 대표자들의 위치를 올바르게 설명하는 유일한 번역이다. 현대 역본들의 해석은 이러한 본문의 문맥과 신약의 인용까지 무시하고 있으며, 결국 성경의 일관성과 권위를 훼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만 빛을 발한다. “신들을 욕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담은 정확한 표현이며, 그 권위를 가장 충실하게 지켜낸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이다.
2025-05-27 14:29:56 | 관리자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 (출애굽기 31:18)   하나님의 말씀은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도 깊은 의미와 목적이 있다. 하지만 많은 현대 번역 성경들은 이런 중요한 단어들을 의역하거나 삭제하며, 원문이 의도한 의미를 흐리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손가락(finger of God)"이라는 표현도 그 중 하나다. 킹제임스 성경(KJV)과 킹제임스 흠정역은 이 표현을 네 번 그대로 번역하고 있지만, 개역 성경과 대부분의 현대역본은 이를 “친히”, “손으로”, “권능” 등으로 바꾸어버렸다. 사람의 생각에는 "손가락"이 너무 작고 연약해 보일 수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손가락"을 위엄과 권능의 상징으로 제시한다. 이 표현은 단순한 묘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계시이다. 본 글에서는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손가락"이 어떻게 등장하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펴보며, 우리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손가락"은 실제로 존재하는 성경적 표현이다 출애굽기 31장 18절은 이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중요한 본문이다. “그분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와 대화하는 것을 마치고 증언 판 두 개를 모세에게 주셨는데 그것들은 돌 판이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것이더라.” (출31:18, 흠정역) 히브리어 원문에는 "에쯔바 엘로힘"(אֶצְבַּע אֱלֹהִים)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며, ‘에쯔바’는 손가락을 가리킨다. KJV는 이를 정확히 **“finger of God”**으로 번역했고, 흠정역도 그에 따라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개역성경은 이 표현을 아예 제거하고 “친히 쓰신”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원문에 있는 단어를 없애거나 다르게 바꾸는 것은 단지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계시에 대한 신학적 존중의 결여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단어는 인간이 임의로 바꿔서는 안 된다. "손가락"이라는 단어 하나 속에도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특별한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직접 말씀을 기록하셨다 출애굽기 31:18과 신명기 9:10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율법이 단순한 영적 영감이나 선지자의 기록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친히 쓰신 직접적인 계시임을 강조한다. “주께서 내게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두 돌 판을 넘겨주셨느니라. 그 위에는 집회의 날에 주께서 산에서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 기록되었느니라.” (신9:10) 이 돌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가락”으로 새기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추상적 에너지나 비물질적 인식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현실 속에 임하신 실제 계시임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굳이 “말씀하시기만” 해도 율법을 모세에게 전달할 수 있었지만, “손가락”으로 기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으시며, 그들에게 직접 증언의 증표를 주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율법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법적이고 인격적인 언약 관계가 성립되었음을 상징한다. 3. “하나님의 손가락”은 심판과 권능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또 한 번 등장하는 곳은 출애굽기 8:19, 즉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실 때이다. “그때에 마술사들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 하였으나 파라오의 마음이 강퍅해져서 그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 (출8:19) 이집트의 마술사들조차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두 손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장면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을 보고, 이것이 단순한 마술이나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심판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여기서 “손가락”이라는 표현은 인간적인 연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속하고 정확하며 제한 없는 능력을 보여준다. 마치 인간이 손가락 하나로도 버튼을 누르거나 돌을 던질 수 있듯, 하나님께서도 굳이 팔이나 주먹이 아닌 “손가락 하나로도” 역사를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4. 예수님도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를 내쫓으셨다 이 표현은 신약에서도 직접 등장한다. 누가복음 11:20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내쫓으면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11:20)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 곧 하나님의 손가락,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세로 마귀를 쫓아내셨다고 하신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이 율법을 새기고 이집트에 재앙을 내릴 정도의 절대 권능이었다면, 신약에서는 영적 전쟁의 승리와 하나님의 왕국 도래를 알리는 표시가 된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단지 문자적인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 개입,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인격적인 행위를 뜻한다. 5. 다니엘서의 “손가락” –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시는 손가락 다니엘 5장에서는 바벨론 왕 벨사살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탕한 연회를 벌이는 중에, 벽에 글씨를 쓰는 손가락이 나타난다. “그때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촛대 맞은편 왕궁 석회벽에 글을 쓰매 왕이 그 글 쓰는 손가락을 보았더라.” (단5:5) “그러므로 그분께서 손의 일부를 보내사 이 글을 기록하게 하셨나이다.” (단5:24) 이 손가락은 곧 하나님의 심판의 손가락이다. 그 손가락은 벽에 글을 새기며 바벨론의 몰락을 선언했다. 단지 쓰기만 하셨을 뿐인데, 그 한 줄의 글은 한 제국의 운명을 뒤흔들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가락”의 권능이다. 6. “하나님의 손가락”은 창조의 능력도 나타낸다 시편 8편 3절에서도 “주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주의 하늘들 곧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작품과 주께서 정하신 달과 별들을 내가 깊이 생각하오니” (시8:3) 하늘의 해와 달과 별, 이 광대한 우주도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만드셨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손가락으로 만든 것”이란, 아주 쉬운 일, 정교하지만 능수능란한 손길을 의미한다. 하나님께는 하늘의 별들을 만드시는 것도 손가락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결론 –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행하신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은 전능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인격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그것은 율법을 새기고, 재앙을 내리며, 마귀를 내쫓고, 제국을 심판하고, 하늘과 별들을 지으신 하나님의 실제 역사이다. 이 표현을 삭제하거나 축소하거나 “손길”, “친히”, “권능” 같은 일반적이고 모호한 단어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섬세함과 권위를 경시하는 태도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표현으로 드러내셨는지를 정확히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연약함이 아니라 위엄이며, 하나님의 손가락은 은유가 아니라 실재이며, 하나님의 손가락은 기록이며, 심판이며, 구원이요 창조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들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들보다 강하니라.” (고전 1:25)
2025-05-27 14:25:00 | 관리자
First Prev Back 1 2 3 4 5 6 7 8 9 10 Forward L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