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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지요?! 형제님 글을 잘 읽었습니다. 내용이 다소 구수하고 과거와 현재를 풍자하듯 해서인지 재미도 있었습니다. 물론 글을 쓴 취지가 공감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도 잘 살려서 바른 교회와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근데, 표현 중 좀 세속적인 말투가 섞여 있는 것 같아서 조금만 신중을 기하셨으면 해요(개인적 권고). 주님 안에서 항상 강건하시고 승리하세요.
2010-08-25 19:57:58 | 신대준
※ 고전 테마 독립 침례교회들에서 쓰는 학원-_- 같은 책상이 아니라 그야말로 예배당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교회 특유의 롱시트를 기억하는가? 새벽 기도회. 예배 시각이 되면 가운을 입은 목사님이 종 한번 땡~치고서 근엄한 표정과 굵직한 목소리로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 다함께 새벽 기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안 한다. "하나님께 새벽 '제단'을 봉헌하시겠습니다" 라고 한다. ^^;; 비슷한 논리로, 예배당이라는 말 잘 안 쓰고, 성전이라고 한다. =_=;; (절간에도, 성당에도 어딜 가도 종은 있는데 우리 교회 같은 곳에는 없는 게 굉장히 이색적이지 않은가? 십자가만 없는 게 아니다. ^^) 가끔은 몇 박 몇 일 부흥회도 한다. 아주 카리스마적인 부흥 강사가 이끄는 열화와 같은 분위기에 매료되며, 그 끝은 언제나 주여 삼창 통성기도이다. 물론 단순한 분풀이 스트레스 풀이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런 걸 계기로 잠깐이나마 신앙을 각성한 경우도 있었다. "나는 이래뵈어도 '주의 종'이라구. 나의 설교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거기 때문에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어. 어디 감히!" 이런 말은 아마 목사 제도 같은 거 싫어하는 분들이 굉장히 거부감을 가질 표현이다. 성도한테 그런 말을 했다면, 그건 교만이고 양들 위에 군림하려 하는(벧전 5:3) 자비심 없는 목회자의 객기이지만, 유아 세례 반대하다 파면 당했다거나, 일제 강점기 때 신사 참배 반대해서 교회가 폐쇄되고 목사가 잡혀 가는 그런 상황에서 밖에다 들으라고 한 말이라면.. 나름 용기와 믿음으로 한 말이지 않겠는가. 나는 권위주의는 싫어하지만 권위 자체는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목사님과 비슷한 연배인 분이 대표 기도를 할 때야 "목사로 세우신 ○○○ 형제님께" 라고 할 수 있지만, 아직 결혼도 안 한 새파랗게 젊은 애들은 더구나 우리나라 문화와 정서, 예의를 감안하더라도 목사님,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교회의 기둥인 장로님들은 대표 기도는 어쩜 그렇게 화려하게 잘 하시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성구 암송으로 시작해서 원고(?) 없이 드리는 기도문은 한 편의 시조인데 구수함과 운율과 모음 조화, 리듬감마저 느껴진다. "우리를 위하야('위하여'가 아니다) 그 높은 하늘에서 내려와 미천한 피조물들을 찾아오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주님 등등등..." 그러므로 나는 모든 곳에서 남자들이 진노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 2:8) 미국 명절하고 우리나라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수 감사절 때는 강단 위에 오곡백과가 세팅되었고, <산마다 불에 탄다 고운 단풍에> 같은 아주 한국적인 찬송가를 불렀었다. (통일 찬송가에 있음) 주일 오전 예배는 목사님의 축도로 도장을 꽝 찍어야 참석한 걸로 영적 결제가 된다. ^^;; 목사님이 안 계실 때나 구역 예배가 끝날 때는 주기도문 암송이 마무리 프로세스이다. 거기에다 성대한 행사인 부활절, 성탄절 같은 것까지 들어가면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이것이 본인이 어렸을 적, 교회에 대해 갖고 있던 추억이다. 빈정대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힌다. 저기서 변개된 성경, 이상한 은사주의, 구약 율법 잔재, 천주교 누룩, 비성경적인 관행 같은 것만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저런 분위기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며, 친근감을 갖고 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 선조들이 그런 방식으로 교회 기틀을 세우고 그런 문화를 만들어서 기강을 잡은 것이기 때문에, 명백한 오류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일단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고전 테마가 아니면....? 현대 테마가 있다. ※ 현대 테마 서울에서 살기 시작했으면 응당 유명한 큰 교회에 나가서 상류층 자제분들과 인맥도 넓히고, 유명한 목사님의 실물도 먼 발치에서나마 구경한다. 우리나라에서 교회만치 접근성 좋고 예쁜 여자도 많고, 사교 분야에서 가격 대 성능비가 뛰어난-_- 집단이 또 있겠는가. 유명인사 내지 연예인들의 간증 집회도 적지 않다. 역시 큰물에서 노니까 한국의 기독교계에서 행해지는 소위 문화 생활을 다 손쉽게 누릴 수 있다. 예배당 주위로 교인들을 고객으로 하는 은행, 음식점 같은 상권(?)이 발달해 있다. 성경도 읽기도 힘든 세로쓰기 붓글씨로 찍힌 구닥다리 개역성경이 아니라 이제는 최신식으로 세련되게 편집된 현대어 성경을 읽는다. 영어 공부도 NIV 같은 깔끔한 영어 성경을 읽으면서 한다. 사실 예배 때는 대형 스크린으로 찬송가 가사, 성구가 다 알아서 뜨기 때문에, 개인 찬송가와 성경책을 지참할 필요도 없다. 음악은? 최신 CCM들이 넘쳐난다. 찬양 예배, 열린 예배... 별 게 다 있다. 이런 교회는 성가대에 가입하려고 해도 오디션을 봐서 합격해야 하고, 지휘자들은 음대 교수 전문가 집단으로 그냥 물갈이가 돼 있다. 청년부를 지도하는 젊은 부목사-전도사는 해외 유학파이고 엄청 똑똑하며, 소위 신세대 문화란 것도 다 꿰뚫고 있다. 고리타분하고 언뜻 보기에 우악스러워 보이는 성경 본문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이 21세기에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 논의하는 데는 수준급이다. . . . 현대 테마에 대해서는 내가 딱히 더 쓸 게 없다. 고전 테마에서 현대 테마로 넘어가려는 과도기 직전에 나는 교회 노선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싹 바꿔 버렸기 때문이다. 즉, 현대 테마는 내가 경험한 적이 전혀 없다. 비록 고전 테마의 구수함도, 현대 테마의 세련됨도 부족하거나 없을지언정, 본인은 성경대로 믿고 행하며 거품/누룩이 없는 교회를 찾게 된 것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 지금 못 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더욱 잘 했으면 하는 것은... 우리 같은 교회도 우리 진영만의 뿌리와 전통, 기강, 경험, 문화를 착실히 축적해 갔으면 좋겠다. 가령, 관행을 예로 들자면, 하계 수양회 때 침례를 주는 것, 성탄절 때 성탄 축제-_- 대신 복음 전도 집회를 하는 것은 우리 쪽 교회만의 좋은 고유 문화가 될 수 있다. 물론 무익하고 무의미한 족보, 뿌리 논쟁도 많다. 하지만 이것이 전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불신자들이 그런 개념을 괜히 따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너희가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무효화한다"란 책망만 본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대안으로 좋은 전통도 성경에 응당 나온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살후 2:15, 3:6) 이거 뭐 킹 제임스 성경 들고서 자기네들만 옳다고 난리를 치더니만, 성도들은 자기 교회에 제대로 헌신하지도 않고, 머리만 굵고 입만 살아서 논쟁과 남 비판밖에 할 줄 모른다.. 자기네들끼리 단합도 제대로 못 한다(마 12:25),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니기만 한다. 뿌리도 없고 근본도 없다 ...   이거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아무쪼록 세월이 흘러, 고전 테마, 현대 테마에 이은 킹 제임스 테마가 이 땅에 잘 정착했으면 좋겠다. 이는 우리의 믿음이 후세에 잘 전수되어 "KJV 1세대가 다 자기 조상들에게로 거두어지고 그들 뒤에 다른 세대가 일어났으나 이들은 주를 알지 못하였으며"(삿 2:10a 변개)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할 것이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45:2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8-25 18:12:52 | 김용묵
스마트폰에서 답장을 써서 보냈는데 못 받았다니 이해가 안되네요. he shall lay the foundation thereof in his firstborn,를 직역하면 그는 자기의 맏아들 속에다 그것의(여리고의) 기초를 놓을 것이요 입니다. 또 막내 아들 속에다 그것의 문들을 놓을 것이요 입니다. 영어는 히브리말을 그대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을 이처럼 번역하면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한 것입니다. 즉 아들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맏아들 속에다 여리고의 기초를 둘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아들이 죽어야 하겠지요? 우리말 성경은 거의 다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저주의 말이며 왕상은 저주가 성취된 것을 보여 줍니다. 앞으로 개인적인 편지를 올리는 것은 삼가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0-08-25 07:46:42 | 관리자
thereof (adv.) 1. of or concerning that or it 2. from or because of that 정목사님께서는 아마도 스스로 성경을 공부해서 발견해보라고 그렇게 하신 걸로 보입니다. thereof 가 "그것에 관하여, 그것으로부터, 그것 때문에" 등의 뜻이니, "그것 때문에 장자를" 혹은 "장자로부터 (장자를 주고) 기초를 놓으며" 라고 해석하면 되리라 봅니다.
2010-08-25 02:41:38 | 김문수
안녕하십니까~~   흠정역 성경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있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사실 정동수 목사님께 메일을 보낸 적이 있는데 한 달이 넘도록 답장이 없어서 송구스럽게도 여기에다 글을 올립니다.   And Joshua adjured [them] at that time, saying, Cursed [be] the man before the LORD, that riseth up and buildeth this city Jericho: he shall lay the foundation thereof in his firstborn, and in his youngest [son] shall he set up the gates of it.          - Joshua 6:26   ¶ 그때에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엄히 명하여 이르되, 일어나 이 도시 여리고를 건축하는 자는 {주} 앞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그가 그것의 기초를 놓을 때에 자기의 맏아들을 잃고 그것의 문들을 세울 때에 자기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 여호수아기 6:26   In his days did Hiel the Bethelite build Jericho: he laid the foundation thereof in Abiram his firstborn, and set up the gates thereof in his youngest [son] Segub, according to the word of the LORD, which he spake by Joshua the son of Nun.          - 1Kings 16:34   ¶ 그의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더니 {주}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따라 그가 그것의 기초를 놓을 때에 자기의 맏아들 아비람을 잃고 그것의 문들을 세울 때에 자기의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더라.                             - 열왕기상 16:34   여기서 궁금한 점은 영어성경 어디에도 '잃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없는데 우리말 흠정역 성경에는 '잃다'라는 뜻으로 해석을 해 놓았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해석 한 지 정말 궁금하고 이 구절들을 좀 더 영어성경에 맞게 해석 할 수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이상입니다.   몹시 주제넘은 질문을 한 것 같지만 그래도 너무 궁금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이번에도 답장을 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하시는 일이 잘 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48:4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4:35:13 킹제임스 흠정역 소개에서 이동 됨]
2010-08-25 01:49:22 | 박경호
김길동형제님 조선화자매님 조선화자매님 남편분과 김선녀,김명화자매님이 자유롭게 주님안에서 경배 드릴 수 있도록, 기도해봅니다. 그리고 앞이 잘보이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한 점자성경도 만들어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2010-08-24 13:24:45 | 신진성
김학준 형제님 안녕하세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조선화 자매님이 컴퓨터를 할 수 없기에 충전기가 따로 필요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써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정동수 목사님께 연락을 해서 보내주세요. 주안에서 오늘 하루도 좋은 시간 되세요.
2010-08-24 12:10:53 | 시님사람
MP3는 간단한 것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저도 간단한 MP3를 사용하는데 이제는 눈감고도 대충 사용할 수 있습니다. 눈이 불편하신 분도 처음에는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목사님이 사용법을 숙지하셔서 잘 알려주시면 그분들은 손 감각이 좋으셔서 금방 익숙해지실 것입니다. MP3는 정동수 목사님께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MP3는 USB로 컴퓨터에 꽂고 충전하는 방식인데,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제가 별도의 충전기도 추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충전기가 필요하신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샬롬.
2010-08-24 07:48:57 | 김학준
김** 형제님이 위로의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하고 김학준 형제님이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MP3 으로 되어있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강해 씨디가 저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mp3인데 그것도 소경들이 쓸 수 있는 간단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mp3이 있어서 보내주길 원하신다면 정동수 목사님이나 김재근 목사님을 통해 저에게 전해주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2010-08-23 16:45:45 | 시님사람
목사님 글을 통해서, 그 분들에게 물질은 없지만 그 분들이 누리시는 평안과 사랑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풍족한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사진과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흠정역 신약이 이미 MP3로 만들어진 것이 있는데, 아직 거기에는 없으신가 보네요? 목사님 주소를 남겨주시면, 휴대용 MP3 플레이어에 흠정역 신약을 담아서 하나 보내드리겠습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조선화 자매님께 전달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추가로, www.bizhard.com에 접속(ID : keepbible, password : 1611)하시면 성경오디오 파일을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성경오디오01&02.zip)
2010-08-23 12:51:18 | 김학준
  8월 달 연변지역 다녀왔습니다. 8월 15일 저녁차로 연길에 일주일간 다녀왔습니다. 그간은 연길에 이 따끔 한 번씩 갔지만 가서 그냥 모임을 가지고 전도를 하군 했는데 이번에는 그러기보다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들의 생활을 체험하고 교제를 나누다 오고 싶었습니다. 이번에 가서 그곳에 형제자매님들 집을 방문했습니다. 연길 교회에 제일 먼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분은 조선화 자매님입니다. 조선화 자매님은 거의 소경인 자매님입니다. 낮에는 그래도 희미하게 라도 보이기 때문에 길을 다닐 수가 있는데 조금만 어두워도 앞을 보지 못하는 자매님입니다. 자매님은 원래 이런 소경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병으로 인하여 눈이 그렇게 되자 남편은 아내와 딸을 버리고 이혼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자매님이 조금씩 벌어서 생활해나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다 저를 만나게 되었고 자매님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현제 한형제님과(현제의 남편) 결혼하게 되었고, 지금 연길시에서 많이 떨어진, 차도 다니기 어려운 아주 깊은 산골에 들어가 초가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자매님과 살고 있는 남편은 자매님을 만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제가 연길에 갔을 적에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번에 조선화 자매님 집에 가는데 차로 약 반시간 가량 타고 가고 다음은 경운기를 타고 또 15분 정도 들어가서 자매님이 있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울퉁불퉁한 시골 산길이었습니다. 제가 경운기를 타고 조자매님 집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느껴지는 것은 이런 깊은 산골에 이런 곳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뻗쳐서 구원을 받은 형제자매님이 살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고, 참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현제 중국에서도 그런 초가집이 보기가 드문데 그 동네는 5가정이 사는데 4가정이 초가집에서 삽니다. 그곳 분들은 산에서 내려오는 도랑물에 세수하고 머리를 감으며 산의 샘물을 마시며 살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는 고구려 역사이야기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가자마자 짐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고 고추밭에 가서 고추를 따는 일을 했습니다. 시골에서 돈이 나올 때가 없으니깐 그래도 조그마한 돈이라도 벌려고 고추를 심어 시내에 가져다 팔면 푼돈이라도 쓸까 해서 사천 고추를 심어놓았는데, 지금 빨리 따서 팔아야 돈을 벌수가 있었습니다. 사천 고추 한 근에 1원 30전을 합니다. 하루 종일 두 부부가 땡볕에서 고추를 따야 겨우 30~40근의 고추를 땁니다. 사천 고추는 아주 작은 고추인데 작아도 아주 매운 고추입니다. 이 고추를 소금에 절였다가 먹는데 아주 맵지만 맛이 있는 고추입니다. 제가 고추 따는 일을 해보니 이 일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추가 아주 작아서 아무리 따도 양이 빨리 불어나지 않고, 또한 밭이 산비탈이라 그런 고추밭 속에서 무더운 날에 옆으로 서서 쪼그리고 앉아 고추를 따려니 참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과 고추를 따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고, 신앙의 교제를 할 수 있어서 참 은혜로웠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밥을 해먹고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 어려운 환경속에서 두 부부가 살고 있지만 그분들 마음은 정말 천국이었습니다. 조선화 자매님은 눈이 잘 안보이고 신체도 아주 약한 자매님인데 시내에서 살다가 시골로 들어와서 이런 힘든 일을 하고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삶인데, 자매님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정말 밝아 있었습니다. 자매님은 육신적으로는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기억력도 얼마나 좋은지 한번 들은 것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있는 컴퓨터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자매님이 눈이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세상에서 크게 해먹고 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화 자매님이 간증하기를 내가 눈이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자신이 한없이 높아있을 것인데 눈으로 인하여 그래도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가면 더 이상 소경이 아닐 것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 정말 저의 마음이 찡해났습니다. 자매님의 남편 한형제님도 정말이지 아내는 눈이 잘 안보여서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전혀 불평하지 않고 낮에는 나가 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또 자신이 손수 밥을 해 잡수십니다. 조선화 자매님은 겨우 남편을 도와 더듬더듬 하면서 그릇을 씻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정말 웃으면서 다정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 두분을 보면서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저희 부부는 사지가 온전한 사람으로서 더욱이 저는 목사라는 사람이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이해해주지 못하고 마음을 꺾지 못하고 다투고 싸울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저녁 모임에서 기억하고 있는 아는 찬송이 있냐고 물으니 자매님이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이 찬송을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찬송가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라고 했습니다. 그 찬송을 우리 함께 부르면서 [예수 밖에는 없네]라는 찬송가 가사가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옹근 이틀 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정말 제가 수양회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 마음에 수양회 말입니다. 김길동 형제님 집도 방문했습니다. 형제님은 방이 한 칸짜리 집에서 형제님 부부와 또한 자녀 3명에다가 처제네 아이까지 둘이 있는데 7명이 그 한 칸 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너무 좁게 불편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님의 큰 딸이 나이가 스무살이 넘었고, 게다가 열 몇 살 나는 아이들이 세 명이 있는데 그 한 칸 방에서 살고 있으니 참으로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아침 새벽 4시 반이면 출근을 합니다. 그리고 저녁 6시에 퇴근해서 집에 돌아옵니다. 형제님에게 유일한 신앙을 할 수 있는 삶은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말씀을 듣고 저희들과 교제를 나누는 일입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그 인터넷 비용도 낼 돈이 다 떨어져서 인터넷이 끊겼습니다. 형제님의 생활비로는 그 인터넷 비용까지 댈 돈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님이 얼마 전에 저에게 이 일을 교회들에 좀 말해서 해결해줄 수 없을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뭐 교회에서 이런 것까지 해결해 달라고 하는가? 라고 생각이 되었는데 그 형제님 편으로 생각해 볼 적에 자신이 해결하기가 너무 힘든 것이었고 다른 것도 아니고 말씀을 듣겠다고 하는데 이런 일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이 문제를 놓고 많이 고민이 되었고 기도가 되었습니다. 인터넷 비용이 중국에서는 일 년 것을 한 번에 물어야 하는데, 일 년 인터넷 비용이 중국 인민페로 6백원입니다.(백불 조금 안됩니다.) 그런데 저의 교회에서도 대어 줄 수가 없고 또한 한국 교회에다 부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음에서 든 것이 제 자신부터 믿음으로 살아가자 라는 마음이 들어서 저의 생활비를 온 것에서 그 돈을 떼어내서 형제님 인터넷 비용을 내줘야 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도 그렇게 하자고 토론이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제 자신 육신의 마음으로는 6백원을 그곳에 떼어내 준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형제님 집에 가서 사는 모습을 보니 무조건 믿음으로 살라고 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고 일 년에 것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일 년에 것을 내주었습니다. 정작 돈을 내어주고 나니 이번 한 달 우리 가정의 생활비용 걱정은 사라지고 주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김길동 형제님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인터넷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읽고 할 생각을 하니 정말 마음이 기쁨으로 벅차올랐습니다. 김형제님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저녁이면 성경 한 장씩 글로 씁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신구약 한 벌 다 쓰고 새로 또 많이 써나가고 있습니다. 그냥 성경을 읽기보다 이렇게 쓰면서 보니 더 많이 마음에 남더라는 것입니다. 김길동 형제님과 그의 가족식구들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기도해주세요. 김선녀 자매님, 김명화 자매님은 또한 장애인들입니다. 허리 등이 곱추입니다. 그래서 키도 자라지 못해서 아주 작습니다. 그리고 그들 또한 구차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화 자매님 고모님도 구원을 받았는데 70이 넘은 할머님인데 혼자서 밥을 해 잡수며 겨우 살아가는 형편입니다. 저는 연길에 갈 적마다 저와 연결되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왜 이러한 가난하고 약하고 병들고 힘이 없는 사람들인가? 좀 건장하고 잘 살고 하는 사람들이 먼저 구원을 받게 하지는 라는 인간적인 마음도 들기도 했지만 이러한 형제자매님들을 보면서 이러했던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가 되군 합니다. 고전1장 26절에서 부터의 말씀이 더 실감이 납니다. 현제 연길에 필요한 것은 제가 그곳에 없어도 모임을 인도해 줄 수 있는, 아니 그렇게 할 형편이 되는 그러한 형제님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전에 김길동 형제님이 모임을 인도했는데 김길동 형제님도 출근하다 보니 지금 제가 가지 않을 적에는 모임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님들이 여기 저기 뚝 떨어져 살고, 또한 출근을 해야 하고 하기 때문에 모임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가용들이 있어서 저녁에라도 모일 수 있는 형편도 아닙니다. 저녁이 되면 공공 버스도 일찍 끊어지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조선화 자매님이 성경을 자유롭게 들을 수가 있는, 우리가 사용하는 킹제임스 성경 엠피스리가 하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 킹제임스 성경 낭독을 한 것을 소경이 자유롭게 들을 수 있도록 엠피스리로 만들 수 있는지요?   자매님이 너무 성경을 듣고 싶어합니다. 자매님이 맹인 글을 읽을 수 있는데 우리 킹제임스 성경 맹인글이 없지 않습니까? 자매님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이번 연변에 다녀오면서 직접 형제자매님들 집에 가서 돌아보면서 마음으로 많은 것을 깨닫고 느끼고 왔습니다. 어째보면 제가 형제자매님들께 은혜를 끼치러 갔다 라기 보다 제가 은혜를 입고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더 알게 되었습니다. [위에 사진은 조선화 자매님 시골집입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5 12:11:5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8-22 18:11:57 | 시님사람
저도 <나 아>로 알고 있었죠 ..저도 한자에 대한 정확한 식견은 없습니다만... 이렇게 정리하고싶어요..김**형제님 설명대로 <나 아(我)>는 <손 수(手) + 창 과(戈)>로 이루어져 있는데 레위기 1장에 보면 사람이 죄를 지으면 소나 양(염소)을 가지고 성막에 와서 자신(죄인)이 희생물의 머리에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킵니다. 그후 죄인 자신(제사장이 아님)이 희생물을 죽이고 그 피를 제사장이 가져다가 제단에 뿌려서 죄를 속죄 받습니다.. 이 진리는 나의 죄 때문에 죄 없는 무언가(우리 예수님)가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그 희생물을 내가 죽이고 피를 흘려야하고 희생물은 번제단(지옥)에 태워야 한다는 겁니다.결국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을 내가 죽인 것이고 그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내가 갈 지옥을 예수님이 대신 가셨다는 진리가 함축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죽인게 아닙니다..내가 죽인겁니다.. 내 대신 지옥에 가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그는 번제 헌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내가 그를 위하여 그것을 받고 그를 위하여 속죄하리라그는 주앞에서 그 수소를 잡을것이요 아론의 아들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회중의 성막문옆에 있는 제단의 주위에 뿌릴것이며 ~그가 그것의 내장과 다리를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 전부를 제단위에서 태울지니(레1:4~13) 주의 피로 한 지체된 한기만형제
2010-08-20 13:28:52 | 한기만
좋은 내용이네요. 그런데 누군가 수용하고 성경에 충실하려 한다 해도 성경조차 이상하니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한 가지를 바로잡으려면 100가지를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힘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08-20 10:13:38 | 김재욱
제가 전에 활동하던 레마선교회 이명범 여자목사님도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목회를 시작 하였다고 간증하셨지요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음성인지는 음성을 직접들었다는 본인과 음성을 들려준 존재(?)만이 알겠지요 귀한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바른성경인 킹제임스 성경과 바른진리를 알게 해주시고 바른교회로 인도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2010-08-20 10:08:05 | 송재근
상기 주제에 대해서 이승구 교수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이 쓰신 글을 오늘 아침에 읽었습니다.제대로 설명해주신것 같아, 형제/자매님들께서 한 번 읽어보시라고 글을 올립니다.신학교에서 이상한 것도 많이 가르치지만, 이렇게 바르게 가르치시는 분이 계시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아직도 직통계시, 환상, 꿈에 천국을 보고 왔다는둥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 분들에게 보여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삶의 방향 전환을 이루었거나 하나님의 음성에 근거하여 인생길의 여러 가지 판단을 해 나간다고 말한다. 성경 계시 시대에 그러한 것이 있었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별 생각 없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현상이 있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또한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이 일류(一流)가 못되는 이류(二流)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오해에 근거한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일이 많이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태도를 취하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먼저 이 문제에 대해서 ‘세 가지의 각기 다른 사유 방식과 태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 유형의 사유 방식과 태도는 ‘세 가지 다른 유형의 종교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이 과연 어떤 유형의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첫 번째 유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셔서 놀라운 계시를 주시거나 인생의 방향을 이끌어 나가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성경 시대에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의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삶을 인도하셨던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동일하게 그의 계시의 도구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렇게 하여 인간들을 인도해 가신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직통 계시파’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이런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성경 계시와 우리 시대에 주시는 계시를 별로 구별하지 않고, 그 관계를 연속적으로 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때로는 음성으로, 때로는 꿈이나 환상으로, 또 때로는 내면적 깨달음으로 그의 뜻을 드러내어 주시는 계시적 활동을 지속하시므로 우리는 그렇게 계속되는 계시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결국 각각 다른 계시 주장을 하는 이들이 주관주의적 대립에로 나아가고 말거나, 아니면 우리들로 하여금 몇몇 종교적 엘리트에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하여 가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계시가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몇몇 사람이 받았다고 하는 새로운 계시에 의존해 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직통 계시파’는 결국 성경 계시에 새로운 계시를 덧붙여 나가는 일을 하지 말라는 성경의 금령을 깨고 지속적인 계시 수납을 시도하는 이단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이 첫째 유형은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에 속하지 않은 이단의 주장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이들은 대개 이런 유형에 가깝게 가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두 번째 유형은 ‘좀 온건한 직통 계시파’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논리적으로 철저하지 않은 입장을 보인다. 즉, 이 온건한 직통 계시의 주장은 한편에서는 성경 계시의 독특성과 종결성을 인정한다. 성경 계시와 같이 우리들의 구원에 대해 필수적인 계시는 이미 다 주어진 것이므로 그런 계시는 이제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이들은 구원에 필수적인 성경 계시의 종결성을 인정하면서도, 오늘날에도 성도의 삶을 인도하시고 교회를 인도해 가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가 지속된다고 자신들의 종교 경험에 근거한 주장을 한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우리들은 구원을 위해서는 성경 계시로 만족해야 하지만, 지금도 우리의 삶을 인도해 나가시기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개인적 계시가 있으므로, 우리는 그런 개인적 계시를 기다리면서 그런 계시로 주시는 바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고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일부 인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나가실 때 일상적으로는 (다음에 생각할) 세 번째 유형과 같이 하시나, 때때로 아주 특수한 경우에 주께서 직접적인 계시를 주시기도 한다고 주장한다.세 번째 유형은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임을 주장하는 유형의 입장이다. 이는 성령님께서 성경의 계시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에 바르게 적용하게 하시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께 순종하여 성경 전반의 뜻을 파악하여, 그것에 비추어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께서 성경 말씀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신다”는 주장이 된다. 그러므로 이런 입장은 성경 계시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또한 선지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었고, 그런 계시의 도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시기도 했으나, 성경 계시가 마쳐진 후에는 이 말씀 외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말씀을(계 22: 18, 19) 계시적인 뜻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제 성경 계시가 종결된 상황에서는 주께서 음성으로나 꿈으로나 이상(vision)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주셔서 성문화하신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성령님의 조명을 따라서 자신들의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는 것인지를 깨닫게 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며 성도를 통치해 가신다”는 유형의 사유에 의하면 이제 성경 계시가 종결된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음성으로 들려오는 일은 우리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그쳐진 것이다. 이것은 메마른 기독교의 주장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성경 말씀을 사용하셔서”(cum verbo) 우리를 통치하시며 인도하시며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가장 성경적으로 바르게 주장하는 기독교의 주장이며, 가장 건전한 성령파 기독교의 주장인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이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성령적인 입장이 고래(古來)로부터 가장 건강하고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 온 입장이었다.예를 들어, 17세기 영국에 살던 청교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으로 고백하였으며, 한국의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신앙 고백서로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 가운데서 제 1장, 1항 마지막에 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지되어 버렸다”는 진술과 6항 중에 진술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아니면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이든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는 말을 생각해 보라. (1) 이와 같은 노선에서 성경적인 신학자들은 아주 온건한 형태의 예언 인정의 논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하여 왔다.(2) 좋은 개혁신학자의 한 사람인 로버트 레이몬드 교수의 이런 문제에 대한 강한 입장을 들어 보라: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예언자들과 방언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고 믿는 것은 그만큼 그가 성경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오직 성경의 위대한 종교 개혁적 원리를 버려 버린 것이다.”(3) 그는 다른 개혁 신학자들과 함께 “신약 선지자들의 영감은 그쳐졌으므로, 선지자직도 그쳐졌고,” “선지자적 직임은 가르치는 직임 속으로 편입되어졌다”고 한다.(4) 한마디로 개혁파 신학에서는 오늘날에는 선지자(예언자)가 없고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온 것이다.(5) 그러므로 이런 입장에서는 오늘날 음성으로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이 개개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① 모든 점에서, 즉 신앙과 생활에 속한 모든 점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개연성이나 우리의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②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적용하게 하시는 말씀의 원리에 따라 매일 매일 매순간순간의 결단을 주의 백성답게 하여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성경을 존중해 가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건전하고 바른 방식으로 성령님께 의존하며 순종해 가지 않고서 이상하고 기괴한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자신들이 과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 나간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게 된다. 또 그런 주장자들로 인해서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는 바를 모른 채 결국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 가게 되는 것을 더 안타깝게 여긴다. 또한 많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바르지 못한 주장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는 바른 도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게 된다.부디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변에서 난무하는 비정상적인 주장에서 벗어나서 성경이 가르쳐 왔고 과거에 가장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 온 바와 같이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통치하시는 대로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란다.[각주]1.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 1, 1 & I. 1, 6.2. Cf. Richard B. Gaffin, Jr., Perspectives on Pentecost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1979), 65-67; R. Fowler White, "Richard Gaffin and Wayne Grudem on I Cor. 13:10: A Comparison of Cessationist and Nocessationist Argumentation,"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5, no. 2 (1992): 173-81; idem, "Gaffin and Grudem on Ephesians 2L20: In Defense of Gaffin's Cessationist Exegesi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4 (Fall 1993): 303-20; O. Palmer Robertson, The Final Word (Carlislie, Pa.: Banner of Truth, 1993), 85-126; Edmund P. Clowney, The Church (Downers Grove, Ill.: IVP, 1995), 257-68.3.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Nashville, Tennessee: Thomas Nelson Publishers, 1998), 59.4. Reymond, 84. Cf. David Clyde Jones, "The Gift of Prophecy Today," The Presbyterian Guardian (December 1974), 163-64.5. John Murray, Collected Writings, 1:19-22. [출처]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작성자 향기나무 향나아빠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45:2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8-20 10:01:28 | 김학준
예전에 은사운동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습니다. 최근에서야 조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정목사님께 예전에 간략하게 메일을 보낸적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은사주의 바로알기 책을 정독하라고 권하셨습니다. 책을 이것 저것 두서없이 읽다 은사주의 바로알기 책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왠지 잘 진도가 안나가는것입니다. 그래도 띄엄띄엄 계속 읽고 있지요 그책을 접하고 다시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정리가 안되어 머리속 한켠에 처박아 두었던 여러가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알아갈수록 탄식이랄까 무거움과 슬픔?, 비애? 뭐 이런것들이 계속 교차하는 것을 느낍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존중은 말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깊은 공감을 가집니다. 감사합니다
2010-08-20 00:57:59 | 노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