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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님 오랫만이네요..그동안 독립교회로 옮기셔서 적응하시느라 바쁘셨나봐요.^^ 킹제임스를 믿고 그런 교회를 다니고 믿음을 지키다보면 더 많은 외로움과 부담이 생기는데 부디 잘 견뎌내시고 더욱 지치지 않도록 기도할께요...
2010-02-26 21:55:33 | 정혜미
저도 교회 도서실에 한 권을 기증했는데 관심있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더군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펼쳐 보이며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래? 좋은 건가 보군요' 하는 정도의 반응을 보이고는 이내 다른 곳으로 향하기도 하고요... 어쩌면 제일 좋은 방법은 성경공부를 할 때에 개역성경과 흠정역을 비교해 보며 확인하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그런 기회를 만들기도 쉽지 않아서요... 그래도 우선은 흠정역이 있고 좋은 성경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부각시키다 보면 자연스럽게 접할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참, 흠정역을 기본 성경으로 사용한다고 독립침례교회 교단(?)측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다거나 지침으로 삼았다는 자료가 있나요? 독립침례교회들이 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는데 어떤 공식적인 자료가 있나 싶어서요... 샬롬~~
2010-02-26 11:10:13 | 이재연
글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낙심 안 하기가 참 쉽지 않네요. 갈 길은 멀고... 오늘따라 여러 일로 무기력해져서, 빨리 예수님이 오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래도 회계보고를 해야 하니, 힘을 내야겠습니다!!
2010-02-25 18:02:04 | 김재욱
킹제임스 성경을 전할 때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 그래요 !"하고 호기심을 보이고 본인도 정보를 알아본다고 인터넷을 검색해봅니다.정성권 형제님도 언급하셨듯이 이내 "이거 이상한 성경인 것같은데 ?"하고 바로 전화가 옵니다. (저도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로 옮기면서 겪었던 저를 보는 부담스런 시선들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럼 아는 범위내에서 설명하고 선입견을 버리고 킹제임스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고 스스로 판단해보라고 하며 자료도 드립니다.하지만 기대보다는 모자라서 솔직히 낙담할때가 많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갖게되는 세상적 시각/선입견을 극복하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저 또한, 킹제임스를 너무 세상지식같이 전달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됩니다.    그런데 왜 옳은 말씀을 읽으라고 전하는데 있어 사람마다 반응하는 것이 다를까요 ?믿음의 방향과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절대적인 길이라고 맹신하시는 분과 방향은 잘못됐지만 그쪽으로의 옅은 믿음을 가지신 분은 반응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후자는 대화라도 좀 되지요....물리적 현상에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외부로부터 힘이 작용하지 않는한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등속으로 움직이려고 하고 정지상태는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믿음에 맞는 일정 속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빠른 속도를 가지고 그 방향으로 급속히 성장하시는 분도 있고 느린 속도를 가지신 분도 있으며 반면에 거의 정지 상태로 머물러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옳은 방향으로 가시는 분들은 점점 더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시겠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가시는 분들은 상당한 외부의 힘이 작용해야 정지상태를 거쳐 "돌이키게" 됩니다.이런 분들에게 킹제임스 소개를 처음할 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돌이키도록하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이 어디서 올까요 ?  말씀과 주님의 도우심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알려주는 메신저에 불과한 아무 힘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Word는 말씀이고 World는 word에 l이 추가된 것이라 하며 여기서 l은 lie 거짓말이라고 합니다.그래서 말씀과 세상은 절대로 같이 공존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옳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세상에 옳은 말씀을 전할때에 오해를 당하거나 세상이 우리의 열심/노력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아무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의 능력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희망적입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1:5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2-25 13:12:37 | 김학준
또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창 3:18) -> 그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셔서 그분은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셨습니다(요 19:2). 주께서 이 날 지면으로부터 나를 쫓아내셨사온즉... (창 4:14) -> 그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셔서 그분의 발은 지면에서 떨어져 공중에 달렸습니다(요 3:14, 행 5:30).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니라(신 21:23). -> 그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셔서 그분은 나무에 달리셨습니다(갈 3:13). 내가...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 우리의 죄 때문에 그분은 벌거벗으시고(요 19:23,24),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옷으로 주셨습니다(롬 13:14). 이는 너희 손이 피로, 너희 손가락이 불법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이며(사 59:3) -> 우리 손이 행한 죄 때문에, 그분의 손은 십자가에서 못박히셨고(요 20:25),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므로(롬 3:15) -> 우리 발이 행한 죄 때문에, 그분의 발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눅 24:39). 오직 너희 불법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들이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사 59:2) -> 이 때문에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죄가 되신 그분을 외면하셨습니다(시 22:1, 마 27:46).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사 53: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모두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2010-02-23 10:18:02 | 김문수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떤 형태였습니까?   유관순, 전태일 같은 열사형? 전혀 아닙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라!” “우리 유대인에게 독립을 달라!” 열사라고 부르기에는 예수님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나 조용히 침묵을 지켰으며,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무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흥분한 군중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제자들까지 맥빠지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신 것입니다.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던 사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허무하게 죽을 수가 있는지 저라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순교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우상 숭배하던 동족을 책망하다 죽어간 그런 대언자들과 같은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와는 정반대로 제 딴에는 ‘신성모독’이라는 구실로 정작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정말 말이 안 되죠. 예수님을 따라 훗날 이루 셀 수 없는 크리스천들의 순교 행렬이 이어졌지만, 예수님 자신이 무슨 이념이나 신앙을 위해 순교한 것은 아닙니다.   흔히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면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모습을 두고 예수님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게 예수님이 좀 있다 체포되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대못이 박힐 게 무서워서, 그게 두려워서 그렇게 괴로워한 거라고 믿는다면, 심하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형은 전인류 역사를 통틀어 매우 고통스럽고 잔학한 사형 방법으로 손꼽히지만, 역사적으로 예수님만 십자가형으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또한 십자가형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비참하게 죽은 순교자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괴로워한 이유는 그런 것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더 고차원적인 것입니다. 창세 이래로 서로 사랑하며 기쁨만을 주고받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가 오로지 인간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잠시 끊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전혀 짓지 않은 차원을 넘어 죄라고는 알지도 못하던 분이 죄 덩어리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게만 하던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저주가 되고 진노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늘 아버지라고만 부르다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 모든 계획이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지혜로 나온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인간의 감정으로 쉽사리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 (눅 22:42, 44)   그래도 결국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순종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뤘습니다. 예수님은 탈진과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기에 앞서 스스로 자기가 목숨을 내어 줬습니다. (요 10:15)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죄수들보다 유난히 빨리 숨을 거두었지만, 장사된 후 부활하셨고, 우리 크리스천들의 믿음의 창시자가 되고 우리의 구원자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감동과 도전은 주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한낱 고문과 사형 집행이 두려워서 예수님이 저렇게 기도한 거라고 아는 건 정말...   그나저나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형을 택하셨을까요? 성경적인 원칙대로라면 인간의 죄를 사하려면 피를 흘려야 했기 때문에 일단 독극물 주사나 교수대, 화형 등은 아닙니다. 유혈 공법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능지처참 정도로 오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율법을 어긴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방법인데 예수님이 그런 사유로 죽으시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제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미 예수님은 몇 차례 돌로 맞을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는 오히려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럼 참수는? 참수의 신약 성경적 의미는 믿음을 지킨 의인의 억울한 죽음에 가깝습니다. 침례인 요한의 죽음이나 계시록에 기록된 환란 성도들의 죽음 등. 이것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님의 죽음과는 성격이 약간 다릅니다. 이거야말로 예수님 자신보다는 그 이후의 순교자적 죽음이란 의미로 남겨 둬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 반면 십자가형은 채찍질부터 시작해서 충분히 유혈 공법임과 동시에 나무에 매달린 자라는 수치와 저주의 의미(신 21:23, 갈 3:13)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가 높게 쳐든 불뱀에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란 의미를 넣어 둔 것도 정말 절묘한 일치입니다. (요 3:14)   십자가형은 그 자체가 죄수의 목숨을 끊는 방법이 아닙니다. 죄수를 극도의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상태로 만들어 놓고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는 방법이란 점에서 더욱 잔인하고 비인간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갑자기 숨을 거두신 것 역시 십자가형 자체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언제까지나 '내가 스스로 목숨을 내어 놓은 것'이라는 논리가 틈탈 여지가 있습니다. 이런 집행 방법 하나하나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명절은 사형 집행은커녕 오히려 죄수를 한 명 풀어 주는 날이었고 오히려 악한 무리들부터가 명절에는 예수님을 안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배신자 가룟 유다의 동조 덕분에 기적적으로 명절 바로 직전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부적절한 시기에 완전히 졸속으로 전시용으로 사형이 집행된 바람에, 옆의 두 들러리 강도는 십자가에 잠깐 폼으로 매달려 있다가 나중에 다리까지 꺾인 채 더욱 비참하게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혼자만 사형에 처하기에는 좀 뭔가 허했나 보죠?) 십자가형 집행으로 사형수가 죽기까지는 원래 며칠 정도 걸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사형 집행을 계속할 수 없는 바로 전날 집행을 강행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의미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조차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악한 무리들의 음모들조차도 다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는 성경 예언을 이루는 도구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8)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예수님 명령에 즉시 살아난 것처럼, 온 몸이 채찍질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으신 예수님도 문자 그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때 무덤 안에서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의 몸은 나사로와는 달리 썩지도 않았겠죠. 시체에서 갑자기 상처가 사라지고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고 일어나고, 게다가 옷까지 짠하고 다시 생겼을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절대 밀어낼 수 없다던 돌문은 그냥 통과했을지도 모릅니다. 돌문 개방은 예수님의 무덤 탈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명하는 전시용으로 하신 거겠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가시면류관을 쓴 얼굴의 상처와 다른 채찍을 맞은 상처들은 다 사라졌지만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요 20:27) 이 역시 참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그분이 당한 상처로 인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영원히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찬송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크리스천이 두고두고 묵상하고 감동 받고 영적으로 도전 받아야 할 주제입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1:5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2-22 15:45:10 | 김용묵
혼자 하는 QT를 통해 성경을 자기 선에서 해석하고 잘못 이해하는 것도 큰 문제지요.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는 아침마다 각자 같은 범위의 성경을 묵상하고 조별로 나누는 것이 아침 일과의 시작이었는데요, 각자의 묵상을 통해 진지하고 그럴 듯한 이야기들로 남의 생각도 알고 스스로도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은 사실이지만 해석이 들어가면 문제가 커집니다. 생활영성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한데요, 어떤 사물과 현상을 보고서도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를 (과도하게) 연상시키는 것이 은사라고 생각하는 식이라서 성경과 신앙에 대한 왜곡이 많이 일어납니다. Quiet Time은 '명상' 등이 떠올라서 그리 좋은 용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2010-02-10 10:07:57 | 김재욱
1882년 캠브리지 대학에서 시작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별한 성경적 근거를 가진 용어가 아니라 그들이 그 시간을 Quiet Time 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Quiet Time 이라는 용어 자체에는 말씀 묵상이나 기도와 같은 개념이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기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어떤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명상의 시간과 혼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점이 문제가 된다면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경건의 시간, 주께 헌신하는 시간, 주님과의 교제시간, 성경말씀 묵상 시간 등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2010-02-10 09:35:13 | 김문수
궁금합니다. 늘 보고듣는 용어중에 Q.T(Quiet Time)가 말씀에 대한 명상/묵상정도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 같은데 이것이 원래 영어적 어원을 제대로 갖고 있는건지 아니면 교회전통으로 쓰다보니 사용되온것인지요 혹시 한국사람들만이 쓰는 토속영어(콩글리쉬)는 아닌지요 검색해보면 1800년대에 누가 최초로 사용했느니등등의 정보가 보이지만 만족한 용어설명은 아닌듯합니다. 진정 올바른 역사를 가진 표현이 아니라면 많은사람들이 쓰고있고 써왔다는 이유만으로 사용되서는 안될텐데요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0:3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2-10 08:26:54 | 김규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