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안에 옛날 사이트 시절에, 본문을 읽으면서 전율했던 게 2002년도의 일입니다.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접했더랬죠.
크리스천은 이런 UFO 같은 주제에 너무 심취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금기시하고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내용을 접할수록, 환란 전 휴거 교리에 더욱 고마움을 느낄 뿐입니다.
2009-12-17 13:27:01 | 김용묵
요즘 성도들이 새로 오고 늘면서 우리의 믿음과 약속이라는 글을 올릴 필요가 생겼습니다.
우리 교회(사랑침례교회)는 자유로운 곳이지만 무질서한 곳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 우리의 믿음을 기술하였고 또 몇 가지를 서로 지키기로 약속했습니다.
새로 오시는 분들과 기존의 회원들이 시간이 있을 때 이 글을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교회에 책자로 된 것도 비치하겠습니다.
의문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12-17 12:24:00 | 관리자
감사합니다. & 써프라이즈~
2009-12-17 11:51:28 | 임종각
이런 영상자료는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우리앞에 벌어져도 말씀을 붙잡고 주변 환경에 휩슬려 마귀에 미혹되는 일들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12-17 10:39:19 | 김학준
잘 보았습니다. 해당 분야 관계자의 설명이라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모두 의 내용과 일치하는 이야기들이네요.
책을 보면 영상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자세히 설명됩니다.
UFO 이야기를 꺼내면 크리스천들도 이상하게 쳐다볼 때가 있는데
이런 내용도 복음과 함께 더욱 알려야겠습니다.
2009-12-17 10:27:10 | 김재욱
요즘 천사와 UFO에 관한 책을 보던중 아래와 같은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펌 http://www.systemclub.co.kr/
(성경 연구를 통해 UFO는 마귀적 존재로서 마지막 때의 징조 및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야기)
오늘 올리는 영상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서학자중 한 사람인 척 미슬러의 인터뷰로서 UFO 및 외계인과 성경과의 관계, 네피림과 노아의 방주를 통한 인류 멸절 관계 등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내용에 대해 성경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UFO 또는 외계인과 관련된 다양한 혼란을 정리해 주는 자료로서 새로운 시각의 정보에 대한 참고자료로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4-X7usZs2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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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7 09:20:17 | 허광무
원본을 그대로 카피하다 보니... 조금 고처보았습니다.
2009-12-15 19:52:02 | 허광무
네~ 디엘 무디 님의 글이었습니다.^^
이 책은 사랑침례교회에서도 판매하던 것을 보셨을 겁니다.
초신자나 불신자 전도용으로도 좋습니다.
2009-12-15 11:02:45 | 김재욱
허 형제님~ 오늘도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자가 크니 한자가 잘 보여서 좋습니다. 행도 가끔 좀 바꿔 주시지요.^^
2009-12-15 10:11:52 | 김재욱
성경이 만든 한자 제 9강-신(神)
‘천신인출 만물자야(天神 引出萬物者也)’ -하늘의 신이란 만물을 이끌어 낸 자’
런던타임즈 LONDONTIMES
여덟 번 째 글자 ‘신(神)’ 자를 보겠습니다.앞서 말씀드렸듯이, 보일 시(示)가 ‘하나님 시(示)’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이번에 배우게 될 ‘神’자를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이제껏 ‘神’자를 ‘귀신 신(神)’ 자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과연 이 神이 귀신일까요?
그리고 왼쪽에 위치한 부수자 示가 ‘귀신을 섬긴다’는 뜻의 시(示) 자일까요?
허신은 ‘천신인출 만물자야(天神 引出萬物者也)’ 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신이란 만물을 이끌어 낸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하고 딱 들어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神) 자 역시 ‘귀신 신(神)’자로 가르쳐왔던 분들께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하나님 신(神)’ 자로 바꿔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홍콩에서 출간된 한문본 성경책을 봤더니 창세기 1장 1절을 “기초신창조천지(起初神創造天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신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하나님의 자리에 신(神) 자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 신(神)이라 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 보일 시(示) 자야말로 바로 ‘하나님’을 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맨 처음 에덴동산에 한 사람을 만들어 축복하셨다는 축복 복(福)자의 변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양을 받친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라는 상(祥) 자의 변도 됩니다.
이와 같이 ‘神’과 ‘示’ 자는 귀신이나 보인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뜻하는 글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示’ 자를 풀이하면서 유독 아래의 小 자를 설문에서 ‘삼(三)’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까닭은 ‘해와 달과 별’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만물을 표현하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칠 때 상량문(上樑文)을 써서 올렸습니다.
그 상량문에는 龍 자와 龜 자를 서로 마주보게 썼습니다.
위에는 ‘용 용(龍)’ 자를 거꾸로 쓰고 아래에는 ‘거북 귀(龜)’ 자를 썼습니다. 이것은 용이나 거북은 물에서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집에 화제를 예방하자는 의미였습니다. 결코 미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조의 지혜로움을 이 상량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용 용(龍)자와 거북 귀(龜) 자 사이에 쓰인 문구가 창세기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억측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문구는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즉 하늘의 해·달·별님은 감응하시어, ‘비지상지오복(備地上之五福)’ 즉 땅 위에 오복을 갖추어 내려주시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말한 ‘삼광(三光)’은 ‘해와 달과 별’을 의미합니다. 정확히 ‘하나님 시(示)’ 자와 들어맞습니다. 오복(五福)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의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의미합니다.
壽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랄 겁니다. 그래서 五福의 으뜸입니다. 그 다음엔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인들 마음이 불편하거나 사고가 끊임이 없다면 가난하더라도 편히 사는 게 낫다는 명심보감의 글귀처럼 편안하게 사는 것이 두 번 번째의 복입니다.
그 다음엔 강녕(康寧)입니다. ‘康’은 건강(健康)이란 단어에서 보듯 몸이 편안함이요, ‘寧’이란 안녕(安寧)이란 말처럼 마음이 편안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유호덕(攸好德)입니다. 오래 살고 부자로 살며 편안하게 살아간다 하여도
주변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따돌림을 받는 집안이라면 결코 잘 산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덕을 갖추되 잠시가 아니고 오래도록 갖추라 함이 인간의 네 번째 복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종명(考終命)입니다. 오래 산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임종(臨終)을 교통사고로 죽음을 당하거나 병사(病死)나 객사(客死)를 한다면 그 삶은 결코 잘 살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옛 선조들은 오복(五福)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대로 마치는 것을 다섯 번째에 두었습니다.
이 오복 속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내린 삼광(三光)에 땅위에 사는 인간의 오복(五福)이 갖추어진다는 것을 볼 때, 이 ‘하나님 시(示)’ 자가 대단히 창조적이고 과학적이며 성경과 부합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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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5 09:32:01 | 허광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처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의 언어로 기록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믿음은 이해하고 분석하고 따져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내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주의 말씀을 들을 때 옵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2009-12-14 14:22:02 | 김문수
디즈니 회사에서 나온 백설공주 비디오테잎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 비디오 속 목소리가 얼마나 이뻤는지..노래 목소리.. 정말 감탄을 하면서 들었답니다. 보고, 또 보고...하고 싶었지만, 테잎을 빌려간 새댁이 그 테잎을 망가뜨렸네요. 지금도 그 백설공주라면 다시 사고 싶은 생각이 있답니다. 이젠 비디오테잎이 아니라 CD 로 나와 있으려나..
2009-12-14 11:16:43 | 백화자
하나님께서는 참 진리를 찾아헤매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형제님을 통해서 오늘 또 확인하는군요. 이 방향으로 바꾸었다는 것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이 방향이 맞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받아들이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 형제님은 정말 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품 안에서 많이 성장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진리를 전하는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길 기도합니다. 정말 반갑고, 환영합니다.
2009-12-14 11:11:49 | 백화자
정지현 님, 대단히 반갑습니다.
귀 있는 자가 되어 결국은 진리로 통하는 길을 찾아오셨으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인데 부럽긴요. 앞으로 성경을 즐겨 읽으시면 되지요.^^
세상 모든 일을 주시해 보면, 다른 모든 것과 '참 기독교'는 늘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기원에 대해서 창조 외에는 진화론 밖에 대안이 없다는 것이 그렇고,
참 기독교 외에 다른 모든 종교들은 손을 잡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도 그렇지요.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참신 아니면 사상 최대의 사기꾼일 수밖에 없는 분이지요.
자기가 신의 아들이고 세상의 구세주라고 했다가 사형당한 사람이 세계 4대 성인 중 하나라니
그런 어설픈 인정은 논리에도 맞지 않고, 적당히 회색지대에서 종교로 머물라는 뜻이겠지요.
세상은 정말 커다란 영적 전쟁터입니다.
성경을 통해 계속 참 진리를 발견하시고, 또 참된 교회를 찾아 구원의 길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멀리 계시니 따로 도움을 드릴 만한 일이 별로 없네요.
주소를 남겨주시면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예수안에'의 책을 두어 권 보내드리겠습니다.
여기 남기기 어려우시면 016-239-7763으로 문자 남겨 주세요.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2009-12-13 17:46:05 | 김재욱
경상북도 김천시에 살고있는 25살 남자입니다. 11월까지 직장을 다니다가 지금은 집에서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저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초등학교 4학년때 옆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천주교 성당을 처음 다니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는 교회 다니시는 고모의 소개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교회(장로교)로 옮겼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기독교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서 교회를 떠났다가 군대에서 음모론 관련(그림자 정부 등)책을 보고 군제대후 교회를 띄엄띄엄 다니다가 몇달전부터 어느 기도원 집사님으로부터 교회를 소개받아 다니고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경이 진리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많이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을 따르자니 믿음생활이 헛된것이 되어버리고 성경의 창조론을 따르자니 과학적인 사실과 배치되는것 같아서 참 많이도 혼란스러웠습니다.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아야 진리를 따라서 살아갈텐데 창조론이 진리인지 진화론이 진리인지 도무지 확신할수가 없으니 참 많이도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등학교 2학년때 교회를 조용히 떠났고요.
그렇게 교회를 떠난후 어떻게 살아야 세상사람들에게 저 사람 참 잘살았다고 칭찬받을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역시 돈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판검사의 권력과 자원봉사의 명예도 좋지만 돈이 있으면 못하는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니까 빌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 같이 기술력있는 회사를 차려서 거대 다국적기업으로 성장시키는게 이 세상에서 제일 가치있는 일로 보였습니다. 세계적인 체제가 공산주의로 바뀌지 않는 이상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알짜 기업을 많이 만들어서 국가에 세금도 많이 내고 수출도 많이해서 국가경제 국민경제가 부유해지는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공계, 특히 공대로 가서 대학원 석사박사 과정 밟아서 옛날 에디슨이나 테슬라 같은 사람이 그랬던것 같이 기술집약형의 회사를 만들어서 키우는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었습니다.
그러나 군대에 가서 이리유카바 최라는 사람이 쓴 '그림자 정부'라는 책 시리즈를 봤었는데 그 책을 보고 놀란것이,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놀란것은 미국의 금융을 총괄하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산하 연방준비은행이 공공기관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축통화 달러의 발행량을 조절하고 세계금융의 룰을 만드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최종적인 헌법재판관이라고 할수 있는 미국의 중앙은행이 미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않고 월스트리트와 런던금융가의 손아귀에 있다는것은 참 뭐랄까.. 제가 이제까지 학교에서 배워왔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견고한 신뢰와 환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이 그렇게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석유중심의 경제체제가 유지되는 이유, 미국이 전쟁을 계속 일으키는 이유, imf사태가 올수밖에 없는 이유.. 결국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인류 역사 발전의 아름다운 결과물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소수 기득권층의 부귀영화를 위한 짜고치는 고스톱판의 추악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과거 줄기세포로 유명했던 황우석 박사의 경우에도 한국의 국부가 커지는것을 원치않는 이런 세력들(음모론에서는 프리메이슨이라고 합니다만)에게 당한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의 명예도, 권력도, 돈도 진리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진리인가.. 근데 그림자정부 책에도 공교롭게 성경과 유대인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은 유대인이며 세상의 온갖 나쁜짓은 유대인의 조종을 받는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이 하고있다는 그런 말들.. 그래서 성경과 유대인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가지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나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성경이 진리인것 같다'는 것입니다.
아직 믿음에 100% 확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화론 아니면 창조론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있는 이 세상을 규율하는 절대법칙은 하나밖에 없기때문에.. 저는 제가 나름대로 얻은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생각해본 결과 성경이 진리일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성경을 열심히 묵상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로마서 말씀처럼..
1년 정도 눈팅만 하다가 이렇게 늦게나마 인사드립니다. 성경을 만화책처럼 곁에두고 읽기좋아하시는 신실하신 여러 형제자매님들이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0:52: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13 14:02:34 | 정지현
본인은 어렸을 때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를 즐겨 봤었다. 얘네들은 특히 중간중간 뮤지컬처럼, 영화로 치면 Sound of Music처럼 극중에 노래까지 나오는지라 어렸을 때 정말 동심을 자극했으며 신기함을 선사했다. 도널드 덕, 미키 마우스처럼 너무 클래식한 거 말고, 90년대에 나온 장편 영화(feature film) 말이다.
가장 먼저 라이온 킹!
본인이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94년은 눈과 귀를 사로잡는 명작 미디어가 유난히도 많이 등장했다. 드라마 <모래시계>와 <납량특집 M>, 그리고 마로니에의 불멸의 명곡 <칵테일 사랑>. 중국의 액션 배우 이 연걸의 <정무문>, <보디가드>도 비슷한 시기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 <라이온 킹>도 94년 여름에 개봉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일이다.
흥행 성적은? 더 말이 필요 없다. 그야말로 돌풍을 일으켰고, 전세계에서 극장 수입에 캐릭터 로열티 등으로 제작비의 20몇 배를 벌었다. 디즈니의 이런 성공 사례는, 문화 컨텐츠 하나 잘 만들면 자동차, 반도체 만드는 것보다 소자본으로도 더 대박 낼 수 있다는 예화로 자주 인용되곤 한다.
이 라이온 킹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사건 구성이 셰익스피어의 <햄릿>하고 비슷하지만 그래도 이건 <인어 공주>나 <알라딘> 같은 작품과는 달리, 원전이 따로 없이 디즈니가 완전히 새로운 아프리카라는 배경으로 사자 캐릭터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사자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그려내기 위해 직접 아프리카로 답사 여행까지 갔다고 한다.
stampede라고 불리는 들소 떼 돌진 씬은 극중에서 가장 무섭고, 드디어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가 죽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것도 당대로서는 꽤 최신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해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람 손으로 그 수백, 수천 마리의 들소 떼를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사실, 그 전에 Be Prepared 씬에서 하이에나 떼들이 척척 행진하는 장면은 저것보다도 더 노골적인 반복 패턴이니, 이 역시 CG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 본다.
라이온 킹은 애니메이션의 제작 과정에서, 놀랍게도 북한의 IT 업체로부터 일부 외주를 받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stampede 씬을 만든 건지는 모르겠다. 라이온 킹의 credit roll을 보면 한두 명 한국인 이름이 있었는데, 남한 사람인지 북한 사람인지 그게 헷갈릴 지경이다.
이런 비주얼뿐만이 아니라 라이온 킹의 감동을 더욱 배가시키는 것은 역시 음악!
OST라 할 수 있는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뿐만이 아니라, 끝날 때 배경음악에 정말 홀딱 반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 중에 이보다 더 환희와 감동의 도가니를 선사하는 음악과 함께 끝나는 건 접하지 못했다. 어느 지점을 말하냐 하면, 삼촌 스카가 제거된 후, 심바가 Pride Rock을 오르고 구름 속에서 아버지 무파사가 “Remember!” 이렇게 말한다. 심바를 비롯한 사자들은 감격에 북받쳐오른 나머지 포효를 하고.. 그때부터 시작되는 엔딩 음악 말이다. 정말 한국인의 정서에다 비유하자면.. 35년간의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되던 그런 느낌이다. 어떤 영감을 받아서 이런 음악을 작곡해 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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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 킹 얘기가 좀 길었고,
음악으로 치자면, 이듬해인 1995년에 발표된 <포카혼타스>도 훌륭했다.
이건 내가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된 후 역사적 의미가 200% 이상으로 뛰었다. 시간(1607년)과 공간(영국) 배경이 완전 그 제임스 1세 시절이기 때문이다! 왈츠 풍인 <금 캐러 가세>-_-;;; 그리고 <Savages>도 재미있고, 무엇보다도 If I Never Knew You도 무척 훌륭한 노래이다. 비록 Colors of the Wind에 밀려서 정식 OST로는 채택이 안 되고 극중에도 삽입이 못 됐지만 OST급 곡으로 손색이 없다.
<금 캐러 가세>의 노래 가사 중에는
My dear friend king Jimmy will probably build me shrine.. (노다지만 잔뜩 캐 가고 나면, 우린 떼부자가 되고 귀여운 우리 젬쑤 왕은 날 기리는 기념관도 만들어 줄 거야!)
이런 말이 있다. 번역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왕을 아주 만만하고 애교· 익살스럽게 일컬은 뉘앙스이다.
그러니... 젬쑤 정도는 돼야 그 제임스 1세 폐하라는 걸 알 수가 있는데 저걸 자막이 다 ‘지미’라고 적어 놓으면, 그게 제임스 왕을 기리키는 걸 알기 어려울 것 같다. 한국에는 애칭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나도 실제로 어렸을 때 혼동하기도 했었고... 외국 동화를 번역하면서도 이런 초보적인 실수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이 외에 포카혼타스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사실은, 영국 국인 존 스미스의 성우가 멜 깁슨이라는 것. 굵직하고 안정감을 주는 좋은 목소리이다. 이 사람은 We Were Soldiers에도 나오고, 나중에 2004년엔 사비까지 털어서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아주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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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미녀와 야수> 얘기를 하고 글을 맺겠다.
앞의 포카혼타스와 <미.야.>는 둘 다 벽화로 시작해서 벽화로 끝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 Beast는 원래 짐승라는 아주 우악스러운 단어인데-_- 누가 어째 ‘야수’라고 무척 서정적인 용어를 잘 만들었다.
서양식 미의 기준에 세뇌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역대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의 여러 여자 주인공 중에서 역시 <미.야.>의 주인공인 벨이 제일 예쁘다. 포카혼타스, 인어 공주, 알라딘의 자스민, 뮬란 등하고는 상대도 안 된다. ㅋㅋ 괜히 Beauty가 아니다.
극중에 미녀와 야수가 무도회장에서 같이 춤출 때 궁궐 배경이 화려한 CG로 3차원으로 잠시 비춰진다. 그리고 얘도.. 엔딩 음악이 라이온 킹 만하지는 못해도 짱이다. 마법이 풀리면서 갑자기 음악 분위기가 확 바뀐다. “Belle, it's me!” ... “It is you!” (벨, 나예요, 나! .... 야수 씨군요! ㅜ.ㅜ)사이의 은은한 음악도...;; 음악이란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어루만진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교리-_-적으로는... 휴거가 일어나기 전에 크리스천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는 그 모습이 연상된다.
예쁜 주인공의 예쁜 목소리는 누가 맡았을까? 뮤지컬이 포함된 만화영화의 경우, 같은 주인공이라도 일반 목소리 성우와 노래 성우가 따로 있는 게 보통이다. Credit roll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미.야.>의 벨 목소리는 ‘페이그 오하라’라고 하는 1956년생의 여자 성우 겸 가수가 대사와 노래를 모두 담당했다. 사실 이게 제일 이상적인 경우일 것이다.
<미.야.> 정도 되면 참 동심을 자극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만화영화로 각색한 거라고 볼 수 있는데, 인어 공주, 알라딘, 미.야 등 여러 작품 제작에 공을 세우고 월트 디즈니 명예의 전당에 이름까지 오른 한 유명한 음악가는 제작 도중에 에이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니 이 또한 참 역설적인 일이다. 이 사람의 명복을 빌며 우리는 그의 업적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추모 문구가 <미.야.> 다 끝나고 Credit roll까지 올라가고 나서 잠시 뜬다.
난 어렸을 적부터 음악에 무척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아무리 만화영화가 현란한 CG 비주얼로 승부해도, 내 기억에 지금까지 뼛속까지 남아 있는 건 역시 감동적인 음악이 남아 있는 것들이다. 그 근성과 광기가 나중에 주찬양 선교단으로 쏠렸고, 더 나중에는 철도(철도 음악-_-)로 폭발한 것이다.
음악은 성경적으로도 무척 의미 있는 수단인 반면, 한편으로 사탄 마귀란 놈도 타락하기 전에 음악의 달인이었고 악기 기술자의 원조가 바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2차, 3차 산업을 최초로 만들어 낸 카인의 후예라고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게 정말 의미심장하다.
이런 안목이 조금만 있으면, 음악이 가치 중립적이라는 소리는 절대 할 수 없게 된다. 가사와는 완전히 별개로 음악은 그 자체가 이미 언어이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음악이 사람을 어떻게 뒤흔들고 바꿔 놓을 수 있는지 궁금하면 나를 벤치마킹하면 된다. ㅋㅋ 그러니 교회에서 찬양의 수단으로 수용하는 음악도 그 범위를 철저하게 검증해야 하는 것이다. 본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다.
끝으로, 월트 디즈니.. 참 대단하다. 그 옛날에 만화만으로 애니메이션으로도 모자라서 아예 장편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고 실제로 이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그 사람도 젊었을 적 인생은 엄청 힘들고 불우했다고 하는데, 결국은 후세에 잊히지 않을 이름을 남기고 간 셈이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0:49:4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12 23:24:01 | 김용묵
이 글은 LA말씀침례교회서 사역하시는 윤성목 목사님께서 쓰셨습니다.
오늘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해보고, 함께 묵상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합니다.
첫째, 기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해야 합니다. 기도의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창20:17). 느헤미야 역시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에 왕이 내게 이르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에 내가 하늘의 하나님께 기
도하고](느2:4).
시편 기자 역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주]께서 낮에는 자신의 인자하심을 명령하시며 밤에는 그분의 노래가 내게 있으므로 내가 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42:8).
성도들이 기도를 하면서 자신이 하는 기도 자체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도 자체보다 더 집중해야 할 것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는 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별로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단지 ‘기도하더라’고 기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주]께 기도하니라.”와 같이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으나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4).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 하더라”가 아니라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더라”란 점에 주목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란 우리가 기도할 때 분명하게,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함을 말합니다.
R.A 토레이 목사님은 기도를 가르치면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굽어보시며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분명하고도 생생한 인식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기도를 하다보면 많은 기도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거의 들어 있지 않고, 마음은 이리저리 방황하거나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곳 미국 사람들은 대화할 때 상대 눈을 주시하면서 대화를 하는데 이는 상대방을 똑바로 인식하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 역시 말하는 사람의 눈과 입을 보면서 듣습니다. 반면 동양 사람들은 어른 앞에서는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하면 예의가 없다고 생각해서 눈을 보지 않고 말을 합니다. 이는 성경적으로는 좋지 못한 버릇입니다. 기도하기 전이나 기도하는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과 우리가 간구하고 구하는 것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더 많이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성령께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구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대상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약 성경에서 전혀 가르쳐 주시지 않는 기도에 관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증거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신 바를 믿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께 먼저 드린 것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시고, 성경에 약속된 모든 것을 성취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전에 어떤 사기꾼이 고관대작들, 재벌들을 상대로만 대형사기를 많이 쳤습니다. 그는 잡힌 후에 검찰의 심문(審問)을 받는데 ‘청와대를 사칭하니까 안 되는 일이 없더라’ 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이런 예는 허다합니다. 이는 그곳이 권력의 핵심이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누구를 들이대어도 소용이 없지만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남아 있게 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그분께서 다 주시게 하려 함이라.](요15:16).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기도의 원칙을 봅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요16:23).
여기서 다시 나옵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이것은 기도의 원칙(原則)입니다. 이것은 킹제임스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요, 하나님 자신이시며, 구약에 약속하신 구속에 관한 모든 하나님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내가 믿고 받아들였음을 주님 앞에 간증하는 것이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나의 공로나 의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 흘리신 피의 공로와 의로 구원받은 것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히10:19).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음을 믿을 뿐 아니라 다시 오실 것을 또한 믿는 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나의 죄가 십자가에서 이미 처리되었음을 알며,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그 사실을 선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진영 밖에 계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진영 밖에 나간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휘장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러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자기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그런즉 우리가 그분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그분께로 나아가자.](히13:12-13)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아서 확실하고 굳건하여 휘장 안에 있는곳으로 들어가나니](히6:19).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증거를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인 동시에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신실한 믿음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올라오는 기도에 예외없이 모두 다 응답하십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라....](요16:26a).
전에 제가 공항에 경찰로 근무할 때 어떤 택시 기사가 한국 여행을 하던 미국인을 끌고 왔습니다. 기사의 말인즉 손님이 택시를 내릴 때 요금을 달라고 했더니 돈을 주지 않고 종이에 뭐를 써서 주더란 것입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이곳 미국인들이 쓰는 개인 수표(personal check)을 봤습니다. 택시 기사 역시 개인 수표에 대한 개념이 없었는데다, 그 check는 한국에서는 어느 은행에 가더라도 현찰로 쓸 수가 없는 것이기에 사기꾼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미국인 여행객은 현찰이 없어서 수표를 줬는데 왜 안받느냐? 고 했습니다. 저는 “당신은 한국의 어떤 은행에도 계좌가 없으므로 당신의 이름으로 된 수표는 소용없소!”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저 하늘에 어떤 계좌도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거부가 자신의 서명이 된 수표책을 한 권 준다면 우리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마음대로 필요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서명이 된 백지수표 책이 있는데, “나는 돈이 없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할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된 백지 수표 책을 평생 동안 사용해도 남을 만큼 많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고 자꾸 다른 방법으로 주님께 청구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셋째,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란 기도에 대한 이 두 가지는 기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계시라고 할 수 있으며, 성도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하여 모든 인내와 간구로 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엡6:18).
제자들은 이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도들에게 이 둘은 모든 종교와 구분해 주는 것이며, 참된 기도의 능력이요, 비결입니다. 유대인들은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많은 이단 종파에 속한 사람들도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결코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가 아닌 것은 결코 바른 기도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뢰하고 있습니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만 깨어져도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이름으로 예수께 구하는 것은 바른 기도가 아니며,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께 기도하는 것 역시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바른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과의 인격적 교제와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이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는 자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인해 (딛3:5-6)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살며, 성령 안에서 걸으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신비처럼,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남아 있는 말이 ‘성령 안에서’란 말입니다. 도대체 성령 안에서 걷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냥 살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보통 그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해서 알려면 그 어휘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보면 됩니다. 여러분은 성령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순절 교회나 은사주의 교회 성도들은 흔히 성령하면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나 불같은 능력을 생각합니다. 많은 교회들과 거짓 교사들이 그렇게 가르친 까닭에 성도들 가운데는 성령 세례, 성령 은사 등과 같은 것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하면 지혜와 지식, 계시의 영으로 이해하는 분도 있습니다. 성령하면 '성령의 불'이라고 폭발적인 부흥, 강력한 권능을 연상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마다 성령에 대해서 자기 마음 가운데 배운 대로, 들은 대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성령 세례(침례)가 아니라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하며,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많이 맺히기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성도의 거듭남에서부터 전 일생을 관장하시지만 오늘 저희가 특별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성령과 기도]의 관계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돕는 기도의 동역자요,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구하시는 기도의 중보자이십니다. 하늘에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고, 이 땅에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성령은 그 다양한 역할로 인해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지치고 상한 영혼을 위로하시는 위로자요, 진리 한가운데로 인도하는 인도자이시고, 우리 구주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시며, 놀라운 카운슬러(상담자)이십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돕는 자이신데, 특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仲保)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6).
성령은 우리를 직접 도우실 수 있지만 먼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고, 기도해 주심으로 우리를 돕는 방법을 택하십니다. 우리가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과 지혜와 필요한 모든 것들을 능히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게 하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기도란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한 가운데로 인도하심으로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구하도록 도우십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욕심을 따라 구할 때가 많습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육체의 소욕을 대적하십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먼저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심으로 그들을 도우십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리니...](슥12:10).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성령이 기도를 도우시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회개로 돌이키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바르게 기도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의 뜻
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심으로 우리에게 기도 제목을 주십니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데, 성령께서는 바로 그 역할을 하십니다.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잠1:23).
주님은 자신의 영(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내 말들’(말씀들)을 알려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조명을 주시고, 성령께서 이해하게 하시며,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바른 기도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기도한 결과입니다. 주님이 성령을 보내주시도록 아버지께 구한 것은
첫째, 우리와 영원히 함께 거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요14:16).
둘째, 우리를 가르치시고 말씀을 기억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다 기억나게 하시리라.](요14:26).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서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넷째, 우리를 도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仲保)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6).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우리는 사역에 필요한 지혜와 명철을 얻고, 주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온갖 일을 할 줄 알게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타고난 지혜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명철로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할 줄 알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6:1을 보십시오. 역사상 처음으로 성막을 짓게되었을 때, 그 일을 누가 했습니까?
[그때에 브살레엘과 아홀리압과 마음이 지혜로운 자 곧 [주]께서 지혜와 명철(明哲)을 부어 주사 성소에서 섬기는 데 필요한 온갖 일을 할 줄 알게 된 자들이 [주]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일을 하니라.](출36:1).
일찍이 배운 적도, 본 적도 없는 각종 모형과 그릇들, 정교한 모든 것들을 그들은 주님께서주신 지혜와 명철을 통해 온갖 일을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을 통해서 지역 교회를 세우고, 지역 교회를 섬기는데 필요한 온갖 일을 할 줄 알게 됩니다. 지역 교회를 섬기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성령은 기도를 가르치시고, 기도로 사역을 지원하게 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성령을 통해 열매맺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 비결은 주님 안에 꾸준히 거하는 것이며, 말씀이 풍성히 우리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우리의 마음 상태입니다. 밭의 상태에 따라 씨는 좋은 열매,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가시덤불, 돌짝밭에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면 광야가 열매를 맺는 밭이 되고, 밭은 아예 울창한 숲으로 변합니다. 이는 풍성한 생명력을 통한 넘치는 수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주께서/ 위로부터 영(靈)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열매를 많이 맺는 밭이 되며 열매를 많이 맺던 밭은 숲으로 여겨지리라.](사32:15).
주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좋은 땅(밭)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막4:20).
씨앗은 모두 동일하지만 밭의 상태에 따라서 열매를 맺는 비율이 다릅니다. 여기에 좋은 밭이 되는 비결이 제시되어 있는데, 광야같은 곳이라 할지라도 /주/께서 위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면 열매를 많이 맺는 밭이 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 밭을 일구는 것입니다.
[[주]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의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렘4:3).
세상 근심과 염려로, 마음의 완악함과 불신으로 교회는 겨우 겨우 나오지만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기도를 거의 하지 않거나, 기도를 해도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마음 밭은 묵은 땅이요, 가시덤불과 같아서 씨가 뿌려져도 자랄 수가 없습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로 거두며 너희의 묵은 땅을 부술지니 이는 지금이 곧 [주]를 찾을 때이기 때문이라. 마침내 그분께서 오사 의를 비같이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호세아 역시 열매 맺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해 ‘너희의 묵은 땅을 부술지니’라고 권면합니다. 대충 아무렇게나 기도하고 기도했다고 생각하면 그는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멋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생물들을 창조하신 후 ‘열매를 맺으라’(창1:22, 28)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많은 열매, 더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열매를 맺는 기도가 됩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각양 좋은 은사들을 주십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을 통해서만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 없는 사람은 거짓 은사를 자랑할 수는 있지만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성장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성장하지 않으면 그것은 재앙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잎사귀도 못 내는 나무가 열매를 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는 내가 목마른 자에게 물을 부어 주며 마른 땅에 큰 물들을 내고 내 영을 네 씨에게 내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줄 것임이니 그들이 풀 가운데 있는 것같이 솟아나며 수로(水路) 옆의 버드나무같이 솟아나리라.](사44:3~4).
빈들의 마른 풀 같고 광야의 히스나무 같은 백성들이 솟아나기 위해서는 주님이 큰 물들을 내고, 성령을 부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성령은 주로 물로 상징됩니다.
수로(水路) 옆의 버드나무처럼 솟아나기 위해서 우리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1복있는 사람은... 2오직 [주]의 율법을 기뻐하며 그분의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강가에 심은 나무가 제 철에 열매를 맺으며 또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강가의 나무는 더위가 와도,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심겨있는가? 우리의 뿌리는 어디에 내려져 있는가?는 우리의 영적인 삶에 승패를 좌우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릴 때강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될 것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속에 거하게 하옵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엡3:17).
강가에 심긴 나무처럼 되려면 주를 신뢰하고 주께 소망을 두면 됩니다.
[[주]를 신뢰하며 [주]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물가에 심은 나무 같아서 그 뿌리를 강가에 뻗치고 더위가 오는 때를 보지 아니하며 그 잎이 푸르르고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으며 열매 맺는 일을 그치지 아니할 것임이라.](렘17:7-8).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영적 전투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기도는 전투의 승리를 결정지어주는 가장 핵심 요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 전신갑주를 지어 주셨습니까? 에덴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이후로 주님은 우리에게 옷을 입혀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은 우리에게 새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고, 직업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입어야 할 옷은 갑옷입니다. 우리는 사울이 다윗에게 준 그런 종류의 갑옷을 입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기업간의 전쟁이나 국가간의 첩보전이나 정보 전쟁이나 무역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빛과 어둠의 전쟁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군사로 모집한 자들에게 빛의 갑옷을입게 하셨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이 옷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 소집된 군인들에게 모두 값없이 지급해 주셨기에 ‘하나님의 전신갑주’(엡6:11,13)라고 불립니다.
이 옷은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갑, 화평의 복음을 예비한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이 한 세트로 된 그런 옷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8은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차려 믿음과 사랑의 흉갑(胸鉀)을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쓰자.](살전5:8)고 말하는데 ‘의의 흉갑’이 ‘믿음과 사랑의 흉갑’으로, ‘구원의 투구’가 ‘구원의 소망의 투구’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갑옷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고 보호하는 부분인 바로 가슴(흉갑)과 머리(투구)란 점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가슴을 찔리면 즉사합니다. 머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가슴을 지키는 장비를 의의 흉갑이요, 믿음과 사랑의 흉갑이라고 언급하는 점을 볼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의, 말씀을 통한 믿음,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의, 믿음, 사랑 이것이 우리의 가슴을 지켜 줍니다. 우리의 머리를 지켜 주는 것은 구원의 투구, 구원의 소망의 투구란 점을 볼 때 분명한 구원의 확신이 없이는 머리가 텅빈 것과 같으며, 뇌성마비 환자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이 흔들리면 머리가 흔들리는 것이며, 구원에 대한 확신이 공격받으면 머리를 두들겨 맞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갑옷만 입었다고 전쟁을 잘 하는 군사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검을 잡았으면 그에 해당하는 실전적 전술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하여 모든 인내와 간구로 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엡6:18).
여호수아가 칼로 적과 싸울 때 모세는 산에서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여 죄를 회개할 때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 사무엘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전체로 번제 헌물로 [주]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그의 말을 들으셨더라. 사무엘이 번제 헌물을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왔으나 그 날에 [주]께서 큰 천둥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치사 그들을 무찌르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므로 ](삼상7:9-10).
이스라엘에 기도하는 엘리사가 있을 때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엘리사를 잡고 난 후에 전쟁을 하고자 군대를 보냈지만 주님은 불말과 불병거를 시리아 군대보다 더 많이 배치해 두셨습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리아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그가 [주]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이 사람들을 치사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니 그분께서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을 치사 눈을 어둡게 하시니라.](왕하6:18).
엘리사의 이 짧은 한 마디의 기도로 그들은 모두 눈이 어둡게 되어 버렸습니다. 기도 없이는 아무리 좋은 갑옷, 좋은 칼을 잡았다 해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유대의 아사 왕은 이디오피아의 100만 대군을 맞아서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사가 [주] 자기 하나님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많은 사람들로 돕든지 능력이 없는 자들로 돕든지 주께는 문제가 되지 아니하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는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으로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음이니이다. 오 [주]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대하14:11).
히스기야 역시 이런 좋은 기도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가 당시 최강의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런즉,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땅의 모든 왕국이 주는 유일하신 [주] 하나님인 줄 알리이다, 하니라.](왕하19:19).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는 칼도 활도 잡지 않았지만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주님은 주의 천사를 보내셔서 전쟁을 단숨에 끝내시고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 밤에 [주]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사람들의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치매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보라, 그들이 다 죽어 송장이 되었더라.](왕하19:35).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갑옷이나 무기의 덕이 아니라 주를 이름을 믿고 부르는 믿음에 있었듯이 우리 역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뿐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법을 배워서 항상 기도하고,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너희 자신을 세우며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고](유20).
마지막 때에 우리는 더욱더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는 성도들
이 되시기를 빕니다.
2009-12-12 15:12:43 | 박준화
제가 보관하고 있던 어떤 글입니다. 전적으로 옳은지는 계속 묵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XX신학대학교 교수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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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전쟁과 전신갑주: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 기도하라
I. 들어가는 말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바울이 믿음의 영적전쟁을 싸우기 위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는 말씀 바로 다음에,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즉 바울은 우리를 계속해서 공격해오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함을 강조한 뒤에, 연이어서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영적전쟁을 치루기 위하여 성도들이 무장해야 할 전신갑주를 이야기 한 뒤에, 곧바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서서 사탄의 무리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내적인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이 내적인 힘이 없이는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자들의 공격에 서서 대항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효과적으로 영적 전쟁을 수행하려면,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내적인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영적전쟁을 싸우는데 있어서 전신갑주를 입을 뿐만 아니라, 항상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몸 말: 예수님의 기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 사탄과의 영적전쟁을 치루셨던 주님께서도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밤을 새워 기도하기도 하셨고, 기도하시려고 새벽 미명에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제에 늘 힘쓰셨습니다. 그것은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기도가 그의 사역의 본질임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심이 당신의 사역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데, 그리고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을 치루는데 있어서 이렇게 열심히 그리고 항상 기도하셨다면, 오늘 우리들은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눅 18:1)고 말씀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모든 기도로 기도하라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내적으로 공급받아야 함을 말하면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기도”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즉 바울은 우리가 기도하되, 모든 종류의 기도와 다양한 형태들로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개인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도의 골방을 가져야 합니다. 은밀한 기도, 외딴 곳에서의 혼자 하나님과 영적으로 깊은 교제를 나누는 그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시간을 따로 내어 규칙적으로 질서 있게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방해받지 않는 그런 환경 속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골방이 있습니까?
또 때로는 사도행전에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함께 모여서 하는 “공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합심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power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정기적으로 합심하여 기도하는 동료들이 있습니까?
또 우리는 때때로 절규하며, 탄식하며, 통곡하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믿음 없음과 부족함을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자복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의 죄악됨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해야할 탄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탄식해야 할 때에 탄식하지 않고, 고통스러워해야 할 때에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회개해야 할 때에 회개하지 않으므로, 성령님께서 대신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최근에 탄식하며 기도하신 때가 언제입니까?
또 때로 우리는 침묵가운데 조용히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얼마나 많은 순간에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하고 기도를 끝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주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들어가려면, 우리는 때때로 나의 소리를 없애고, 주님의 음성만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형식과 종류를 사용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기도, 공기도, 찬양의 기도, 감사의 기도, 탄식하며 부르짖는 기도, 침묵으로 드리는 기도, 철야기도, 심야기도, 등 우리는 모든 형태의 기도를 통해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성령의 기름을 발라 더욱 강한 모습으로 무장할 수 있게 됩니다.
2.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그래서 바울은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렇게 모든 종류의 기도를 하되,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하는 기도, 이것은 참된 기도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유다서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발견하게 되는데, 유다서 20-2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그렇다면 왜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라”고 하면서,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추가한 것일까요? 도대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먼저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을 해보면,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길이로서 그 효과를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말만 토해내는 의미 없는 반복을 계속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것은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더욱이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냉랭하고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기도와는 정반대 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다운 말과 화려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우리의 심령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듣기에 훌륭한 기도일 수는 있으나,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내 기도를 주장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도록 힘을 제공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롬 8장 26절에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즉 성령 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며, 소원을 주시고, 생각을 명하기도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기도케 하시고, 기도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란 성령 님께서 내 영과 혼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모두 주장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을 초청하여 그 분이 내 모든 것을 주장하도록 나를 내어 맡기는 기도를 말합니다.
사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는 더 이상 말로 설명하기가 매우 힘든 개념입니다. 이것은 경험을 해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하게 되면 우리의 심령에는 홀연히 자유와 기쁨과 환희로 충만해집니다. 성령 님께서 임하셔서 나의 기도를 주장하시면, 내 자아가 사라지고, 우리의 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이 쏟아져 나오고,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나를 주장하시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내 영이 그 분과 함께 깊이 교제하게 됩니다.
저는 제가 처음 방언으로 기도하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의 전부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게 있어서 방언이 터져 나올 때, 그 순간의기도는 온전히 성령님의 주장하심에 의한 기도였습니다. 제일 먼저 제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회개의 눈물이 방언과 함께 터져 나왔습니다. 제가 아무리 절제하려고 해도 계속해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함께 저의 혀는 제가 주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유와 기쁨과 충만함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순간을 회상해 보건데,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 님께서 저의 기도를 주장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무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성령 안에서, 성령님의 주장과 인도하심 아래서 드리는 기도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온전히 주장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성령님의 손길에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마음을 감화 감동시킬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성령님의 권능을 힘입어 영적인 원수들과 더욱 힘있고,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기고도 남게” 될 것입니다.
3. 항상 기도하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언제나 어디서든지 평생토록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같은 권면을 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언제든지 기도해야 합니다. 일이 잘못되어 갈 때뿐만이 아니라,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문제가 생기면 그 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이미 많은 상처를 입고 난 뒤입니다. 이미 사탄의 무리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고 난 다음입니다. “아차” 하고 깨닫는 순간에 이미 우리는 많은 피해를 당하고 난 다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기도하라고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잠에 빠지지 말고 깨어 있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III. 나가는 말
사랑하는 학우 여러분,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영적인 잠에서 깨어납시다. 겟세마네에서의 제자들의 잠에서 깨어납시다. 마귀는 잠들지 않고 있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넘어뜨릴 틈과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저부터 시작해서 우리들 중에 어떤 사람도 이 마귀의 공격과 유혹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그 순간까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깨어 있어 기도함”으로 이 영적인 전쟁에서 싸워 계속해서 승리하는 십자가의 군병들이 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 기도의 용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갖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2009-12-12 12:51:25 | 박준화
거기 그림은 대부분 이스라엘 사진입니다.
2009-12-12 09:58:07 | 관리자
[킹흠정 엡6:18]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그 일에 깨어 있고 Praying always 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in the Spirit, and watching thereunto with all perseverance and supplication for all saints;
[킹흠정 유1:20]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너희 자신을 세우며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고 But ye, beloved, building up yourselves on your most holy faith, praying in the Holy Ghost,
[킹흠정 고전14:15]그러면 어찌하리요? 내가 영과 함께 기도하고 또 이해하면서 기도하며 내가 영과 함께 노래하고 또 이해하면서 노래하리라. What is it then? I will pray with the spirit, and I will pray with the understanding also: I will sing with the spirit, and I will sing with the understanding also.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책마다 나타내는 바가 각양각색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서 기도하는 것,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하는 기도 등...
아니면 금식하며 부르짖는 기도일까요?
그런데 '아! 바로 그거야' 하고 느낌이 오는 답은 잘 없었습니다. 항상 조금은 아쉬운 듯...
함께 나누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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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1 19:43:24 | 박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