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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작고한 버논 매기 목사님의 책을 보니 '배교(떠나감)'는 두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더군요. 참 교회는 휴거로 이 땅에서 떠나고, 명목상의 교회는 진리로부터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을 충족시킬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정말 그런 마지막 때가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이 사진들, 잊을 만하면 접하게 되는 뉴스들인데 크리스천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료들이지요. 이렇게 한 곳에 모으니 더욱 그 음모가 드러나 보이네요. 좋은 자료들 감사드립니다. 맨 위 사진은 정진경이 아니고 정진석 추기경이네요~.
2009-09-05 00:05:52 | 김재욱
앙크 십자가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이용하여 오시리스(T)와 이시스(O)를 상징하는 것일 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태양신 숭배자인 콘스탄틴 황제가 사용한 문장이기도 하고, 타로카드에서는 메이저 4번 카드, 세속적 권력을 지닌 황제가 손에 들고 있는 상징물이기도 하지요. 저 상징물을 보면 로마카톨릭이라는 단체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의 종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2009-09-04 17:42:58 | 김문수
사람이 죽은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고 그들과 마리아와 천사들에게 기도하여 연옥에서 죄를 경감받는 것이 천주교 구원의 핵심이다.   다음은 2009년 9월 4일 조선일보에 실린 성인들 기사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03/2009090302145.html?srchCol=news&srchUrl=news1   원본 자료의 사진을 보면 여의도에 설치된 천주교 제단 앙크 십자가로 된 것을 알 수 있디. 하얀 십자가만 보지 말고 그 하얀 십자가 주변의 큰 앙크 십자가를 보기 바란다. 앙크 십자가는 이집트 이교 종교의 심볼이고 뉴에이저들의 심볼이다. 천주교는 어떤 단체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난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한국에 도착한 일성(一聲)으로 이같이 말했다. 그가 당시 방한한 목적은 김대건 신부 등 한국의 천주교 순교자 103(位)에 대한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시성식에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93명의 한국인 천주교 순교자와 한국에서 순교한 10명의 외국인이 천주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9월은 한국천주교회가 〈순교자 성월(聖月)〉로 기리는 달이다. 한국 천주교는 9월 한 달 동안 순교 성인 103위 시성 25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통해 신앙 선배들의 자취를 기린다. 올해는 특히 최양업 신부와 순교자 124명 등 125위에 대한 시복시성(諡福諡聖) 심사를 교황청에 청원해 놓은 상태여서 순교자 현양에 더욱 관심이 모이고 있다.   서울대교구(교구장 정진석 추기경)는 19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화해·나눔·증거의 축제〉를 연다. 가톨릭심포니오케스트라 등의 문화행사와 함께 헌혈, 장기·골수 기증 등록운동을 벌이고 오후 3시부터는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념 장엄미사〉가 정진석 추기경과 사제단의 공동집전으로 마련된다. 또 25년 전 시성식 당시 제단이 설치됐던 자리에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 표석〉을 설치하고 축복식도 갖는다.  ▲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하는 가운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103위 성인 시성식’. 한국 천주교는 올해 순교자 시성 25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를 마련했다./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지방 교구별 현양행사도 다양하다. 대전교구는 지난 1일 교구장 유흥식 주교와 110여명의 교구 사제, 2500여명의 수도자와 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충남 당진 신리성지~합덕성당~솔뫼성지의 약 8㎞ 거리를 도보로 순례하는 행사를 가졌다. 대전교구는 또 11일 오후 7시30분부터 해미성지에서 〈제등행렬 십자가의 길 기도 및 미사〉를 갖고 오랏줄에 묶여 끌려가 생매장당했던 순교자들의 넋을 기린다. 부산교구는 12일 삼랑진 김범우 토마스 묘소에서 죽림굴~살티~언양성당~오륜대 순교자기념성당까지 123㎞에서 〈성지 이어달리기〉 행사를 갖는다.   서울 절두산성지에 있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도 전시실을 재정비하고 5일부터 11월 22일까지 재개관기념전을 개최한다. 성 김대건 신부가 그린 독도가 포함된 조선지도와 프랑스 신부들이 사용한 기도서·미사경본(經本) 등 미공개 소장품 79점이 전시된다.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회장 한홍순)는 9일 오후 2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1층 강당에서 최양업 신부 서품 160주년 기념 학술포럼을 연다. 포럼에는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가 〈최양업 신부의 신앙과 삶〉을 주제로 기조강연한다. 또 가톨릭신문사는 12일 서울 새남터성지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청소년 백일장〉을 개최한다.  ▲ '103위 성인의 탄생이야기'(사진 왼쪽)와 '꽃이 되어 가신 님, 빛이 되어 오시네'(사진 오른쪽). 한국의 聖人과 聖地에 관한 새책   ■103위 성인의 탄생이야기(윤민구 신부 지음)=103위 성인에 대한 시성(諡聖) 청원인으로 시성 수속을 담당했던 저자가 당시의 뒷이야기를 백서처럼 털어놓았다. 그의 고백을 들으면 한국의 103위 성인 시성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한국천주교는 시성 절차에 대한 지식과 자료준비 등이 부족했고, 교황청이 요구하는 기적에 대한 증거도 불충분했다. 그러나 새로 뽑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호의와 김수환 추기경 등의 노력으로 난관을 극복했다. 저자는 "한국의 103위 성인들의 시성은 가불(假拂)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신자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추진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제라도 103위 성인과 현재 시복시성이 추진되는 125위에 대해서 신자들이 제대로 알고 공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푸른역사, 1만8000원.   ■꽃이 되어 가신 님, 빛이 되어 오시네(이충우 지음)=국내 71곳의 천주교 성지를 사진과 함께 간략하게 정리한 핸드북. 일간신문에서 출발하여 평화방송 보도국장, 평화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원로 가톨릭 언론인인 저자는 《피어라 순교의 꽃》 《신앙유산 답사기》 등 저서를 통해 순교자들과 성지를 소개해왔다. 이번 저서에서는 〈해미-죽음보다 배교가 더 두려웠다〉 〈미리내-인가 불빛, 냇물과 어우러진 은하수〉〈배티-옹기조각에 숨은 사연〉 등 각 성지의 특징을 포착한 짧은 글로 성지순례에 나설 이들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들숨날숨, 7000원.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12:2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9-04 15:00:11 | 관리자
사람이 죽은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고 그들과 마리아와 천사들에게 기도하여 연옥에서 죄를 경감받는 것이 천주교 구원의 핵심이다.   다음은 2009년 9월 4일 조선일보에 실린 성인들 기사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03/2009090302145.html?srchCol=news&srchUrl=news1   원본 자료의 사진을 보면 여의도에 설치된 천주교 제단 앙크 십자가로 된 것을 알 수 있디. 하얀 십자가만 보지 말고 그 하얀 십자가 주변의 큰 앙크 십자가를 보기 바란다. 앙크 십자가는 이집트 이교 종교의 심볼이고 뉴에이저들의 심볼이다. 천주교는 어떤 단체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난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한국에 도착한 일성(一聲)으로 이같이 말했다. 그가 당시 방한한 목적은 김대건 신부 등 한국의 천주교 순교자 103(位)에 대한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시성식에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93명의 한국인 천주교 순교자와 한국에서 순교한 10명의 외국인이 천주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9월은 한국천주교회가 〈순교자 성월(聖月)〉로 기리는 달이다. 한국 천주교는 9월 한 달 동안 순교 성인 103위 시성 25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통해 신앙 선배들의 자취를 기린다. 올해는 특히 최양업 신부와 순교자 124명 등 125위에 대한 시복시성(諡福諡聖) 심사를 교황청에 청원해 놓은 상태여서 순교자 현양에 더욱 관심이 모이고 있다.   서울대교구(교구장 정진석 추기경)는 19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화해·나눔·증거의 축제〉를 연다. 가톨릭심포니오케스트라 등의 문화행사와 함께 헌혈, 장기·골수 기증 등록운동을 벌이고 오후 3시부터는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념 장엄미사〉가 정진석 추기경과 사제단의 공동집전으로 마련된다. 또 25년 전 시성식 당시 제단이 설치됐던 자리에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 표석〉을 설치하고 축복식도 갖는다.  ▲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하는 가운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103위 성인 시성식’. 한국 천주교는 올해 순교자 시성 25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를 마련했다./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지방 교구별 현양행사도 다양하다. 대전교구는 지난 1일 교구장 유흥식 주교와 110여명의 교구 사제, 2500여명의 수도자와 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충남 당진 신리성지~합덕성당~솔뫼성지의 약 8㎞ 거리를 도보로 순례하는 행사를 가졌다. 대전교구는 또 11일 오후 7시30분부터 해미성지에서 〈제등행렬 십자가의 길 기도 및 미사〉를 갖고 오랏줄에 묶여 끌려가 생매장당했던 순교자들의 넋을 기린다. 부산교구는 12일 삼랑진 김범우 토마스 묘소에서 죽림굴~살티~언양성당~오륜대 순교자기념성당까지 123㎞에서 〈성지 이어달리기〉 행사를 갖는다.   서울 절두산성지에 있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도 전시실을 재정비하고 5일부터 11월 22일까지 재개관기념전을 개최한다. 성 김대건 신부가 그린 독도가 포함된 조선지도와 프랑스 신부들이 사용한 기도서·미사경본(經本) 등 미공개 소장품 79점이 전시된다.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회장 한홍순)는 9일 오후 2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1층 강당에서 최양업 신부 서품 160주년 기념 학술포럼을 연다. 포럼에는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가 〈최양업 신부의 신앙과 삶〉을 주제로 기조강연한다. 또 가톨릭신문사는 12일 서울 새남터성지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청소년 백일장〉을 개최한다.  ▲ '103위 성인의 탄생이야기'(사진 왼쪽)와 '꽃이 되어 가신 님, 빛이 되어 오시네'(사진 오른쪽). 한국의 聖人과 聖地에 관한 새책 ■103위 성인의 탄생이야기(윤민구 신부 지음)=103위 성인에 대한 시성(諡聖) 청원인으로 시성 수속을 담당했던 저자가 당시의 뒷이야기를 백서처럼 털어놓았다. 그의 고백을 들으면 한국의 103위 성인 시성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한국천주교는 시성 절차에 대한 지식과 자료준비 등이 부족했고, 교황청이 요구하는 기적에 대한 증거도 불충분했다. 그러나 새로 뽑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호의와 김수환 추기경 등의 노력으로 난관을 극복했다. 저자는 "한국의 103위 성인들의 시성은 가불(假拂)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신자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추진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제라도 103위 성인과 현재 시복시성이 추진되는 125위에 대해서 신자들이 제대로 알고 공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푸른역사, 1만8000원.   ■꽃이 되어 가신 님, 빛이 되어 오시네(이충우 지음)=국내 71곳의 천주교 성지를 사진과 함께 간략하게 정리한 핸드북. 일간신문에서 출발하여 평화방송 보도국장, 평화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원로 가톨릭 언론인인 저자는 《피어라 순교의 꽃》 《신앙유산 답사기》 등 저서를 통해 순교자들과 성지를 소개해왔다. 이번 저서에서는 〈해미-죽음보다 배교가 더 두려웠다〉 〈미리내-인가 불빛, 냇물과 어우러진 은하수〉 〈배티-옹기조각에 숨은 사연〉 등 각 성지의 특징을 포착한 짧은 글로 성지순례에 나설 이들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들숨날숨, 7000원.
2009-09-04 14:56:53 | 관리자
이번에 한국에 개최되는 WCC와 관련해서 교황과 관련된 사진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아래 사진들을 보시면 현재 및 앞으로 진행될 세상일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유추하실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들을 쭉보면 한편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데요.....      이번에 WCC를 개최하는데 앞장서신 김삼환 목사입니다.                         사진으로만 보면 "뭐 만나서 인사하는게 어때서 ?"라고 생각하실분도 있으시겠지만, 저런 지도자급들이 서로 인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사를 뛰어넘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부로 인사하기도 쉽지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일반인들이 서로 인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WCC은 여러 종교의 연합협의체입니다.  배후는 로마 카톨릭이구요. 이제 한국의 개신교도 로마 카톨릭이 그들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12:2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9-04 08:16:46 | 김학준
8월 28일 북수원교회에 다녀왔습니다. 김승학안수집사라는 분의 발표가 있었는데 이분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왕자 주치의로 15년간 있었고 거의 20년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고, 이 분이 현지에서 조사한 결과 현재 시내산의 위치가 잘못 지정되어 있고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자발 알 라우즈산이 실제의 시내산이라고 합니다.   http://www.sinaimount.com/index.html 에 가보면 자세한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일부를 퍼왔습니다. 시내광야와 시내산 시내광야와 시내산(N28'35"42/E35'20"05)으로 간주되는 지역에는 산 아래 시내 산에서부터 흐르는 물줄기가 세 갈래로 흐르고 있으며 산 아래 광야에는 사우디 정부에서 고고학지역(N28'34"53/E35'23'46)이라는 간판과 함께 110x50m의 철망으로 감싼 금송아지를 올렸던 단이 있다. 그 단에는 애굽신 하토르가 12마리나 암각되어있다. 또한 765m의 철망으로 산 전면을 고고학 간판과 감싸고 그 안에는 성막을 쳤을 것으로 확실시되는 성막터(N28'35"03/E35'22"44)와 그 주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날 때 하나님의 명령으로 12지파를 기념하는 12개의 돌기둥이 아직도 뒹굴고 있다. 시내산 봉오리 아래에는 호렙동굴이라 할 수 있는 동굴이 산 아래를 내려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특히 희생제를 드린 곳에는 성경말씀처럼 들어가는 입구가 동으로 향하고 동물들을 불태워 재를 모아 둔 곳과 불에 그은 흔적들이 역력하다. 단순하게 쌀을 쌀이라 하고 콩을 콩 이라하자 는 단순한 논리일 것뿐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더 큰 사진으로 상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 시내산이 애굽의 시나이반도가 아니라 미디안이라는 증거 1.출2:15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머물며 2.출3:1미디안 제사장 양 무리를 치더니 광야 서편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3.출3:12 내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4.출4:18 애굽에 있는 네 형제들에게로 5.출4: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6.갈4:25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은 지금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시내산이 시나이반도의 부적합성 고센땅에서 자발무사(시내산)까지 애굽땅이다. 가까운 곳에서 11개월5일간 지낼 수 없다. 시나이반도는 미디안 광야가 아니고 애굽 땅이었다, 시나이반도는 침범당하여 남의 땅이 된 적이 없는 애굽 땅이다. 모세는 주위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6일 전쟁 후 15년간 조사 착수 후 관련증거 없음. 르비딤과 호렙산 사이 48km는 비성경적이다.(출17:6) 시내산 앞에는 2만명도 앉을 자리가 없다. 홍해를 건넌 자리가 없다. 시내산에 있어야할 것들 엘리야동굴: 왕상19:9 산주위지경: 출19:12 성막친 장소: 출26 12돌 기념기둥: 출24:4 바위틈: 출33:22 시94:22,왕상19:11 산에서 흐르는물: 신9:21 금송아지단: 출32 참고문헌 References and Bibliography 1.The British Museum (1997) 2.The Louvre (1990) Egyptian Antiquities Editions Scala Christiane Ziegler -General Curator in charge of the Department with the collaboration of Marie-Helene Rutshowscaya 3.Off-Road in the Hejaz (1997) Patric Pierard and Patrick Legros 4.Prehistoric Rock of Northern Saudi Arabia (1993/1414) Majeed Khan Ministry of Education Department of Antiquities and Museums Kingdom of Saudi Arabia 5.THE ROCK ART OF ARABIA (2000) SAUDI ARABIA OMAN, QATAR, THE EMIRATES & YEMEN DR. MUHAMMED ABDUL NAYEEM Department of Archaeology and Museology College of Arts, King Saud University Riyadh HYDERABAD PUBLISHERS 6.이집트 (1997) 아바스 칼라바이 한국어판 BONECHI 7. STORIES OF THE PROPHETS FROM ADAM TO MUHAMMAD (1997) (PEACE B UPON THEM) By- AHMED BAHGAT Translated by: Sheikh Muhammad Mustafa Gemea'ah Office of the Grand Imam, Sheikh Al-Azhar By- Islamic Home Publishing and Distriution 8.Gods and Pharaohs of Ancient Egypt (1998) Ancient Cultures Published by Grange Books 9.Desert Treks From Jeddah (1996) Patricia Barbor Stacey International 10.The Gold Of Exodus (1998) Coronet Books Hodder and Soughton Howard Blum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07:1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8-31 11:11:38 | 허광무
사람은 짐승과 달리 글로 자기의 모든 것을 표현합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쓰는 연습을 하면 평생토록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기계쟁이로 교육을 받아 글을 잘 못 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글의 묘미와 힘을 많이 느낍니다. 우리 근본주의 성도들 가운데서도 글을 잘 써서 하나님의 진리를 통괘하게 전달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리의 아이들이 좋은 글을 잘 쓰면 너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제가 보는 전문 잡지에 다음의 글이 실렸습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서 한 번 읽어 보면 좋을 것 같아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포스와 내공 강신호: 한전KPS(주) GT정비기술센터 고온부품팀장   요즘 흔하게 쓰는 말 중에 ‘포스가 느껴진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포스’는 선과 악의 균형을 다스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의 대명사로서 영화 스타워즈 중 대사에 등장한다. 말 그대로 외부로 발산되는 독특한 기운(氣運)이나 힘을 의미한다. 또 개성이나 의지, 심지어는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의 열망 등을 함축해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기존에 널리 쓰이던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하지만, 카리스마가 지배구조의 수직성이나 권위로부터 나오는 힘이라면 포스는 수평적인 관계에서의 힘마저도 표현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다양하고 보편적이다. 비슷하게 쓰일 수 있는 말로 무협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공력(功力) 이나 내공(內功)이라는 단어도 생각할 수 있다. 공력이 안과 바깥 모두로부터 발휘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면 내공은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즉 실체를 알 수 없는 힘을 통칭하면서 ‘수양과 단련의 깊은 정도’를 표현하는 말일 게다.    갑자기 뜬금없이 영화나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단어들을 나열하고 있으니 글머리의 분위기가 다소 경직되는 듯도 하지만, 사실 진짜 의도는 언어를 통해 주고 받을 수 있는 의미들의 발랄함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중에는 굳이 ‘포스’나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제법인데’라거나 좀 더 구체적으로는 ‘힘이 있네’ 라고만 해도 충분히 느낌을 표현할 수도 있고 알아들을 수도 있는데, 우린 굳이 색다른 단어를 찾아내어 쓰고야 만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포스는 외국영화를 통해서 알려진 단어이다. 공력이니 내공이니 하는 말도 무협소설을 통해서나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작품을 즐겼던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되새김되던 단어들이 언제부터인가 유행을 타면서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대중들에게 단어가 주는 의미 이상의 상상력을 제시하고 있다. 대부분은 보편성과 일상적인 것으로부터의 탈피가 주는 즐거움과 통쾌함을 느끼게 해준다. 너무나 잘 알려진 어휘밖에 쓸 수 없다면 얼마나 따분하고 식상할 것인가.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서로 할 말만을 주고받는 행위일 뿐이라면 그런 관계는 너무 건조할 것이다. 마치 기계나 로봇 시스템을 제어할 때처럼 명령어 몇 줄 입력해주면 되는 식의 관계라면 그건 제대로 된 인간관계가 아니다. 다행히 인간의 지적 감성적 능력은 상대방의 혀끝으로 발음되는 몇 가지 단어들로도 많은 정보를 상상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다. 단지 상대방의 발음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구사한 단어들의 의미와 느낌으로부터 밝고 어두운 측면, 기쁘고 슬픈 측면, 선하고 악한 측면 등을 가려낸 뒤, 대응하기 위한 단어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극도로 짧은 반응시간 내에 자신이 판단한 내용을 근거로 적절한 단어들을 조합해내고 얼굴 표정과 몸짓, 목소리의 톤을 바꾸어가면서 자신의 의도와 감정으로 표현한다. 이때 대화를 윤택하고 부드럽게 해주는 요소들을 얼마나 많이 담고 있느냐에 따라 대화의 질과 깊이가 달라진다. 다양하고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담은 적당한 용언들을 분위기나 상태에 따라 제때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언어의 마술사이다. 그저 의미만을 전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쉬우면서도 짧은 말로써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더 바랄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무슨 시구처럼 미사여구를 섞어야 한다거나 은유법과 같은 기교를 부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진부하거나 사무적인 분위기로 흐르기 쉬운 대화 도중에 신선하면서 톡 튀는 단어로 상대방의 감성을 자극한다면 대화의 과정이나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자주 보는 TV 드라마들은 배우들을 통해 의도한 내용을 전달하는데, 화려한 대사로 시청자들을 웃게도 울게도 만든다. 유창하고도 논리 정연한 대화들이 오가면서 감정이 빠르게 전달되다보면 보는 이들은 어느새 극중 상황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배우들의 연기능력에 따라 감동의 깊이는 더해진다. 웃기는 장면에서는 기발한 대사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드라마나 개그프로그램 등을 통해 세상에 소개되는 유행어들은 시대적 상황을 담거나 대중 정서와도 일치할 때 더욱 반향이 크고 수명이 길어진다. 다양한 신조어나 줄임말의 등장과 활용 또한 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를테면 핸드폰과 컴퓨터가 폭 넓게 보급되어 다양한 통신매체로서의 구실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통신매체들은 온전한 문장을 주고받을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 속성을 지녔다. 시간과 비트(bit) 수를 제한하고 쓴 것만큼의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기존의 질서가 갖는 헤게모니는 무의미하다. 만일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격식과 맞춤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못 박는다면 당장 컴퓨터와 핸드폰의 활용이 위축될 것이다. 때문에 현명한 유저들은 신조어나 줄임말과 같은 대안을 만들어 내었다.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단어와 감정을 전달하게 위한 온갖 궁리의 결과인 것이다. 이는 톡톡 튀는 창의력이나 감성의 순발력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며, 당시의 문화와 정서에 동화되어 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혹자는 인터넷 속어나 신조어가 난무하는 문화적 현상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법을 무시하면서 만들어진 만큼 우리말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조어와 유행어가 담고 있는 재치와 새로운 정서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왜냐면 언어란 감정을 담는 그릇과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그릇을 만들어서 어떻게 쓸 것인가는 사회적 수요층의 공감대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물론 수요층이 다양한 만큼 모두의 공감을 얻지 못한 상태로 생겨난 그릇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릇들은 밑이 좁거나 깊이가 얕아 많이 담지 못하는 그릇이다. 즉 그릇의 생김과 크기에 따라 담기는 감정의 양과 전달되는 형식이 달라질 것이고 대화와 교류의 성격도 달라질 것이다. 그럴 바에야 이왕이면 재미있고 식상하지 않은 그릇들이 많은 편이 사회를 밝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게 아닐까. 여유와 재치가 넘치는 사람과의 대화가 좀 더 즐겁듯, 밝은 표정으로 늘 진지한 사람과의 만남이 더욱 기다려지듯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만 그럴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의 재치와 유머 수준 자체가 동떨어져 있어서는 통할 수 없는 노릇이다. 상대방에 집중하는 총기 있는 눈빛과 매너를 통해서 만남을 유쾌하게 만들려는 진지한 의지가 마구 발산되어야 한다. 최소한 이 정도의 ‘포스’와 ‘내공’도 없이 남들이 그래주기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2009-08-15 12:02:30 | 관리자
율법주의를 부수는 것은 결코 무법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 교회에 대한 확신과 신약시대에 성행하는 율법주의로 인한 페단 등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우리의 과거와 율법주의를 부수자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고 글도 쓰고 책들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저 사람이 혹시 완전히 무정부주의자 혹은 세상이 말하는 자유주의자가 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는 결코 무정부 상태나 무법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른 것을 가르쳐 주면 꼭 반작용으로 무정부 상태나 무법주의가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신정 정치 하에서의 십일조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가르치면 꼭 헌금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따서 말을 전하거나 퍼뜨립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므로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개의치 않고 노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증거 구절로 내민 것은 이사야서 54장 9-10절이었습니다. 9 이것이 내게는 노아의 물들과 같으니라. 내가 다시는 노아의 물들이 땅을 덮지 못하게 할 것을 맹세한 것 같이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꾸짖지도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나니 10 산들이 떠나가고 작은 산들이 움직일지라도 내 친절이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내 화평의 언약도 움직이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주}가 말하노라. 구원받으면 우리가 죄를 져도 하나님이 근심하지도 않고 노하지도 않는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이것은 극도의 방종으로 사람을 몰아넣는 마귀의 교묘한 가르침입니다.   자, 지금 하나님이 누구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너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앞뒤 문맥을 보면 신약시대가 지나 주의 날이 이르러(즉 재림이 이르러)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된 시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스라엘이 천년왕국 속으로 들어가는 내용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비록 과거의 오래 기간에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지만 이제 온 민족이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뒤에는 더 이상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인용해서 구원받은 사람은(교회는) 죄를 지어도 더 이상 하나님이 근심하거나 노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신약과 구약을 바로 나누어야 한다고 열렬히 외치는 자들이 이렇게 성경을 오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엡4:30).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영이 슬퍼하고 근심합니다. 이것은 부모의 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왜 성도들이 이런 것을 가르치는 협잡꾼들에게 넘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를 배격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들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1. 구체적인 하나님의 명령들에 순종하는 것(요일2:3-4). 십계명의 대부분(안식일 제외)2. 주님을 섬기기 위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살전4:3, 7), 술, 담배 안하고 청결하게 사는 것 등3.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분리하고 세상의 풍조에 따르지 않는 것(롬12:2), 록 음악, 옷, 세상 문화4. 지역 교회에서 성령님의 인도 하에 지도자들이 정한 규례를 따르는 것(행15:29), 방언 안하고 교회에 깨끗하게 옷입고 가는 것 등 5. 형제를 위해 내 권리를 포기하는 것(롬14:21)6. 인륜을 지키는 것   구원받았으니 규칙도 없고, 헌금도 없고, 인륜도 없고, 교회 모임도 없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속히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방종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물을 흐려놓으니 예수님 안에서의 참 자유를 이야기해도 다 이상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곧 교회니 "교회에 가자"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가자"고 할 때의 교회는 교회 모임을 말하지 "예수님의 몸"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말의 유희를 가지고 사람을 속이려 드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의 자유는 결코 무법주의가 아닙니다. 자유하기 때문에 오히려 금하고 가릴 것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바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성장합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릅시다. 이런 협잡꾼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합시다. 
2009-08-12 12:08:06 | 관리자
예수님이 곧 오실 징조들   지금으로부터 꼭 1천년전인 1009년,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이슬람권을 지배하고 있던 파티마 왕조의 괴짜 왕(칼리프) 알 하킴은 느닷없이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 있는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er)와 그 부속 건물들의 파괴를 명한다. 성묘교회는 그로부터 30년 후 복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훗날 약 2백년간 지속된 십자군 원정의 빌미가 된다.   지난 6월 12일 이란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가히 부정선거의 백미였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이 선거 아닌 선거의 후폭풍으로 테헤란을 비롯한 이란의 곳곳에서는 수백만의 인파가 거리로 몰려나가 연일 시위를 벌였고, 극심한 유혈사태로까지 치달았다. 1979년, 친미 절대군주였던 팔레비를 쫓아내고 백발의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최고지도자로 옹립했던 이슬람 혁명 이래 최대의 민중봉기였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지난 30년간 지구 위에 가져온 변화는 돌이켜보면 정말 커다란 것이었다. 무슬림들은 모하메드 사망 직후부터 거의 천년 동안이나 유럽을 압도하는 세계적인 패권과 찬란한 문화를 누렸던 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서는 서구의 식민통치 아래서 기를 펴지 못한 채 지내왔다. 그 결과로 오늘날 많은 비이슬람권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슬람의 이미지는 ‘미개한 아랍 유목민들의 종교’ 정도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런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미국을 몰아내고 수백년 만에 외세의 도움이 없이 순수한 이슬람만의 이름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어떤 영향을 미쳤겠는가? 아마도 전 세계 10억 무슬림들에게 신선한 충격 그 자체이자, 집단 카타르시스 이상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이란에서 일어났던 그 해 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소련군 역시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이라는 이슬람 전사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다가 결국은 10년 만에 피눈물을 머금고 철수를 하였고, 이는 간접적으로 구소련의 붕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후 아프가니스탄에도 이란의 신정체제 못지않은 이슬람 근본주의 정부인 탈레반 정권이 들어섰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줌도 안 되는 이슬람 전사 무자헤딘에 의해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던 소련군이 쫓겨나고 급기야는 무신론을 신봉하던 소련제국이 통째로 무너지는 계기가 된 이 사건은 앞서 이란의 이슬람 혁명보다 더 큰 반향을 전 세계 무슬림들의 영혼 속에 불러왔다. 우리가 잘 아는 알 카에다나 오사마 빈라덴은 바로 이 사건이 빚어낸 부산물들이다. 결국 이 두 사건을 축으로 하여 지난 30년간 세계는 미·소간의 냉전체제에서 기독교 혹은 서구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의 충돌로 패러다임이 바뀌어버렸다. 지난 수백년간 깊은 잠을 자고 있던 이슬람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는 오일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돈을 전 세계적으로 뿌리며 수없이 많은 마드라사 신학교를 세계 방방곡곡의 가난한 무슬림 지역에 지어주고 있다. 이 마드라사 신학교에서는 일반 교양과정은 거의 가르치지 않고, 대신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교리 가운데 하나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을 어릴 적부터 집중적으로 주입시킨다. 이러한 추세는 그 추구하는 이상으로 볼 때 와하비즘의 행동부대라고 할 수 있는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라덴의 등장으로 지난 20년간 더욱 가속화되어왔다.   그 덕에 오늘날 이슬람은 외형적으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일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가장 강력하게 결속되고 있는 집단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 성숙도마저 무르익어 이슬람 혁명 후에 태어난 30세 이하 인구가 70퍼센트에 달한다는 이란에서는 그 이슬람 신정체제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많은 자유를 갈망하는 욕구가 하루에 2백만이나 되는 인파를 테헤란 거리로 내보내게까지 된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성급한 서방 언론에서는 풀뿌리 차원의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보다 더 현실적인 시각은 아마도 이슬람 혁명 30년 만에 보수와 개혁으로 분리된 두 대표 세력 간의 내부투쟁이 본격화된 것으로 보는 ‘이란 이슬람 혁명의 제2 단계론’일 것이다.   어떤 시각이 더 정확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 사건으로 분명해진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동안 보수·강경화 일변도로만 치닫던 이슬람 문명의 확장 가도에 앞으로 큰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이번에 이란의 젊은 무슬림들이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와하비즘과 알 카에다로 상징되는 폭력적, 퇴행성 이슬람주의에 맞서 이슬람 안에서도 폭넓은 자유와 공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진취적인 기운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싹트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서구인들이 이슬람에 대해 거의 무지한 것에 비하면 오늘날 중동의 많은 젊은이들은 할리우드에 푹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서구지향적인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중동판 베이비부머라고 할 수 있는 30세 혹은 25세 이하의 젊은 층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상 때문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강퍅해진 사람들의 마음 밭을 갈아 옥토로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순수한 이슬람 신앙심마저 퇴색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 간의 충돌이 오늘날의 역사현실을 대변해 주는 화두라면 이슬람을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당면한 숙제 중의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막상 이슬람에 대해 너무도 아는 바가 없다. 이슬람과 기독교 간에 다른 점들을 열거하기에 앞서 공통된 부분들을 먼저 열거해보면 이슬람은 놀라울 정도로 우리와 가까운 영적 집단이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이슬람을 기독교의 이단 교파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우선 그들은 아브라함(이브라힘―이하 괄호 안은 기독교 용어의 코란식 표기)을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으며, 아담(아담), 이브(하와), 노아(누후), 욥(아윱), 야곱(야쿱), 모세(무사), 아론(하룬), 다윗(다웃), 솔로몬(술레이만), 요나(유누스), 엘리야(일리야스), 엘리사(알야사), 스가랴(자카라), 에스겔(둘키플), 세례요한(야히야), 예수(이사) 등 모든 신·구약 인물들을 인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된 5가지 거룩한 책을 인정하는데 유실된 아브라함서, 구약(토우라), 시편(자불), 신약(인질), 그리고 천사 가브리엘(지브릴)을 통해 하나님이 모하메드에게 암송하도록 명한 코란이 그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유대교, 기독교와 더불어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 이슬람에서 말하는 알라는 하나님, 즉 God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히브리어의 엘, 엘로힘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가 메시야(마식)이자 하나님의 말씀이셨음, 동정녀 탄생, 복음서의 기적들, 승천하셨음과 지금은 하나님 곁에 계심을 믿는다.   그러나 물론 이슬람에는 기독교와 크게 다른 점들이 있다. 철저한 유일신 신앙인 이슬람이 기독교에 대해 가장 크게 반발하는 부분은 삼위일체론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신격화하게 되면 유일신 신앙을 저버리는 결과가 된다는 논리에서이다. 이를 두고 어떤 기독교 학자들은 모하메드가 살아있을 당시 존재했던 ‘성부, 성모, 성자의 삼위일체론’에서 유래된 이단의 오류가 코란에 반영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과 마리아가 육체적인 관계를 맺어 태어난 아들로 보는 관점이 삼위일체론으로 오해된 채 이슬람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학자들의 주장이지 이슬람권에서도 인정받는 이론은 아니다. 그러나 코란에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이시자,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라고는 한다.   또 한 가지 크게 다른 점은 코란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보인 것일 뿐이며, 실제로는 결코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시지 않았다고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고 하나님 가까이에 계시다가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고 되어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이슬람이 인간의 원죄와 죄사함의 필요성을 교리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음과 일맥상통한다. 이슬람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하늘나라의 낙원에서 사탄(이블리스)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난 후 하나님께 자복하고 용서를 받은 다음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땅 위에 보내심을 받아 내려왔다고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에 절대 복종함으로써 평화를 누리고, 사탄을 따라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날 인류 전체에 대한 심판이 있을 때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이슬람의 구원론이다.   여기에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함께 믿고 기다리는바 궁극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슬람에서도 마지막 날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 때에 예수님이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을 굳게 믿는다는 점이다.   우리 주변에는 지난 2~3년간 예수님이 곧 오실 징조들이 부쩍 많이 눈에 띄고 있다. 유대인들은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지었던 죄를 애통해 할 것으로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이 신약성경의 완성 이후에 생겨난 종교인만큼 무슬림들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 과연 무슬림들은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을 가질까? 그때 우리는 그 무슬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엇보다 중요하기로는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무슬림과 우리들을 각각 어떻게 보실까? 곧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한번쯤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들이다.    (필자는 최근 방글라데시에 다녀왔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무슬림에게 보내심을 받고 이슬람권으로 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2009-08-12 12:01:26 | 관리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주신 것은 검증과 분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킹제임스성경을 알고 나서 깨달은 점들과 다른 번역본과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분석하는 것 역시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그 분의 뜻대로 순종하기 위함이랍니다.
2009-08-08 21:48:18 | 김문수
우연히 남편의 책상에서 이 책을 보고 읽게 되었는데, 제 자신을 돌아보며 많은 부분 자극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는데 있어 조나단 에드워즈의 일생은 많은 부분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무더운 여름을 이기시는데 있어서 한 번 쯤 읽어 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되어 올려봅니다.
2009-08-08 13:44:22 | 김경민
    에드워즈는 자신의 64번째 결심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시편 기자가 시편   119장 20절에서 말하는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하는 마음' 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있는 힘을 다하여 이것   들을 향상시키도록 하자. 또한, 나의 소원을 아뢰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는 것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러한 열심을   반복적으로 내는 것이 약해지지 않도록 하자."   말하자면, 애드워즈는 하나님에대한 지식을 계발하는 만큼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을 개발하는 것에 힘을 기울   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진리만이 아니라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 자신의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결심문 30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주보다 신앙과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더 나아지도록 매주 노력하자."    그리고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이러한 진보는 아주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추구했던 바   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수갈채를 받거나 다른 사람과의 논쟁 능력을 기르기 위해 지식의 성장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여러분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실천......   여러분이 가진 지식에 맞게 실천하기 위해 추구하십시오. 시편 119장 100절에 의하면 이것이 더욱 지식을 얻는 방법입니   다.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 위의 글은 존 파이퍼의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 - 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출판사 부흥과 개혁사)[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08:2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8-08 13:34:39 | 김경민
알고보니 정혜미 자매님이 사모님이셨네요..^^ 전 그저 그것이 신약이든 구약이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대로 믿고 행하도록 노력하고자 할 뿐인 사람이구요.. 늘 귀한 사이트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감사하고 있답니다. 만약 제 생각도 잘못된게 있다면 마땅히 수정되어야 겠지요.. 사모님의 귀한 사역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2009-08-06 16:37:13 | 김은식
사람들을 관찰하여 보니 머리와 몸의 연결관계에서 8가지 경사현상이 있으며 한의학에서 주장하는 사상및 팔체질과도 연관성이 있고 인체의 골격을 형성하는 머리뼈와 척추뼈의 연결관계에서 치아의 역할에 의하여 설명이 가능한 것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것이 사실이라면 아담과 하와 2종류의 사람이 존재해야하는 데 8종류의 경사현상을 가진 사람들이 관찰되는 것을 보고 성경을 읽으면서 8가지가 관찰되는 이유가 인간의 범죄에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으로 설명이 되지않나 생각해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인간이 재창조된 사례가 성경에 나와 있지않습니다.
2009-08-06 10:34:26 | 안홍헌
제 결론은 이겁니다. 십일조도 헌금인 이상 강요되어서도 강요될 수도 없습니다..단 우리가 십일조의 참의미 (내가 가진 모든 소유가 실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또 내가 이것을 드림으로 하나님에대한 진정한 사랑을 표현한다는- 말씀에 "네 재물(혹은 보물)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마 6:21)고 하셨죠?-)를 생각한다면 신앙인의 아름다운 미덕으로서 바와 충분히 권면할 가치가 있겠지요? 물론 하고 안하고는 본인의 믿음에 달려 있겠지만요. 누가복음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라기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씀대로 삽시다
2009-08-05 18:57:55 | 김은식
고린도후서 9장의 말씀은 헌금(더 엄밀하게 말하면 선교헌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구요... 물론 헌금 전체를 이야기 한다면 당연히 십일조도 포함되겠지요.. 십일조 하기 싫으시면 안하셔도 됩니다만.. 6절 말씀에 보면 '많이 심은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은자는 적게 거둔다'는 말씀도 있지요?? 성경전체 문맥으로 보자면 바울도 약간은??? 강요를 (비록 권면조이지만)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각설하고 말씀은 전체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해 가면서 이해해야 바로 이해할 수 있겠죠.. 참고로 저는 어릴때 부터 용돈을 비롯해서 제가 기억하는모든 수입에 정확히 10분의 일을 드리려고 노력해 왔구요.. 월급을 받으면 세전수입에서 정확히 십분의 일을 띱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그게 맞다고 생각해서 거의 100%완벽에 가깝게 실제로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구요. (절대 자랑은 아닙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절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니까요. 암튼 저는 실제로 그렇게 십일조는 드리고 있으니까 거기엔 해당사항이 없겠네요^^ 암튼 저도 억지로 드리는 십일조는 목적자체가 잘못되었음으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만 십일조 신앙자체를 무시하는 것도 썩 옳은 태도는 아닌것 같습니다.(더 자세한 건 다음에 기회가 되면) 암튼 성경은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자매님이 십일조를 내든 무슨 헌금을 하건 신앙양심만큼 하나님사랑하시는 만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에 정당하게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평가하시겠지요...
2009-08-05 18:43:38 | 김은식
저는 재창조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는 전제하에 인체를 연구하였습니다. 8가지 경사현상이 사람들에게 관찰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처음에 아담과 하와 두사람만 창조했는데 왜 8종류의 경사현상이 생겨난 사람들이 관찰되는 가에 관심을 갖고 성경을 읽고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머리와 몸의 연결관계가 틀어져 8종류의 사람이 생겨났다는 것을 생각해보았다는 것입니다. 저의 글을 자세히 읽으시고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관찰해보세요. 이런 경사현상을 누구나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2009-08-04 09:43:34 | 안홍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