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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을 위해 간구하는 방법 ● 토저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너희가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약5:16).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 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시려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눅18:1-2) 위에 인용한 세 구절에 주목하라. 첫 번째 구절은, 기도의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이 “많은 유익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고 또 실제로 입증되고 있다. 두 번째 구절은, 기도가 이렇게 영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르게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구절은 약간 다르다. 이 구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도해야 하며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스페인의 위대한 순교자이며 신비주의자인 몰리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을 초월해 계신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이 그분을 뵙거나 그분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창조물 위로 자신을 들어 올려야 한다. 나는 기도에 대한 이 정의에 공감하며 잠시 이 문제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요즘은 많은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 과거 어느 때보다 복음주의 교회 안팎에서 많은 기도가 드려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도 목록을 적어 놓고 그분께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을 이루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 많은 일들을 그분께서 이루어주시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차라리 기도하며 시간 빼앗기지 말고 산책을 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들어달라는 압력을 받고 계시다. 내가 보기에 기도는 이미 로비 차원으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신에 로비한다. 비성경적이고 세속적이며 심지어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일에까지 그분께서 복 주시기를 강요한다. 게다가 빈곤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생활비를 벌기를 원하며 그러한 저급한 프로젝트에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시기를 간구한다. 아니면 다른 사람의 비용으로 여행할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버스나 화물선이 아닌 호화 유람선으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라디오나 편지로 기도를 요청하며 때로는 철야기도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자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에 절대로 응답하지 않으신다. 마치 갈멜 산에서 바알 신이 응답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밤새면서 졸리는 눈을 비벼가며 분노를 발산하고, 스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했다고 착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방관하실 뿐이다. 시간을 빼앗는 기도 제목도 있다 공식적인 기도 모임에서는 절대로 기도 부탁을 해서는 안 될 사적인 문제들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하나님과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종류의 문제들 말이다. 이러한 기도 제목은 듣는 이들을 난처하게 하며 참석자들의 시간을 빼앗을 뿐이다. 내가 젊은 시절 목회할 때 어떤 기도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리더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았다. “아무개 자매가 기도를 부탁해 왔습니다. 그녀의 눈꺼풀에 경련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모두 그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러자 온 회중이 엄숙하게 무릎을 끓고 눈꺼풀을 위해 기도했다. 미소를 띠거나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꺼풀을 문지르라고 권면하고 싶었다. 나 같으면 그렇게 하리라. 문지르기만 하면 멈출 테니까. 이러 사적인 문제를 기도 모임에 끌어들여 교회 공동체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합심 기도’ 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이것은 교인들이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합심기도는 영향력이 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의 한가운데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기도 모임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가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반드시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단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나 산만하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기도의 최우선순위 말씀 속에서 기도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이 시간 나는 기도의 두 가지 목표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한다. 여러분 중 몇 사람은 내가 먼저 선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놀랄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목표는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 제목 맨 위에 와야 할 것이다. 이제 순서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활을 쏠 때 조준하는 과녁과 같다. 마치 기도의 불도저로 밀어붙여야 하는 산처럼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있어야 한다. 감히 단언하기는 이 두 가지가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하다. 이 두 가지 목표가 개인 기도든 합심 기도든 기도의 열정을 자극해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스스로 이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구체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반복이나 갈망 또 훈련이나 자기희생에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열렬하게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기도 형태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마치 군대에서 전략가가 사용 가능한 온갖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첫 번째 목표,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의 회복 이 나라 이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제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내가 여러분에게 지금 전달하는 메시지는 꾸며낸 말이 아니다. 건전한 신학 사상에 근거한 말이기 때문에 점검하거나 테스트해 봐도 좋다. 다른 어떤 일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나약한 존재이다. 그분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친구로 교제하다가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보잘것없고 천박하며 무능한 신으로 전락하였다. 그분은 단지 ‘위층’에 사시는 분이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와서 도와주며,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단체에서는 박제가 된 신을 믿고 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언제나 나아가 간구할 수 있는 신 말이다. 라디오 프로에 한 개그맨이 출연하여 “이제 다 같이 기도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익살로 말문을 열 수도 있다. 아니면 반쯤 개종한 카우보이가 얼간이 복장을 하고 나와 숫자 카드를 튕긴 후에, “이제 제가 ‘거룩한 숫자’(holy number)를 몸으로 보여 드리지요”라고 말하고는 저급한 노래를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종류의 하나님 같으면 누구나 다가갈 수 있기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에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었던 때가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 알미니안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이 의식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확고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면전에 나아갈 때 경외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분이다. 테니스 복장으로 운동하다 말고 냅다 뛰어 들어가 하나님과 밀담을 나눈 후에 빠져나갈 수 는 없다. 시카고에 크리스천 남성 사업가들로 구성된 위원회 모임이 있었다. 지금은 이런 위원회뿐 아니라 다른 모임도 많이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일하며 여러 차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어느 특별한 모임이 열리고 있었는데 위원회의 임원중 한 사람이 갑자기 뛰어나와 연단에 올라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지금 막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었어요.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뉴잉글랜드에서 온 한 멋진 노신사가 일어서더니 “의장!”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의장이 그를 보며 “좋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라고 물었다. 노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뉴잉글랜드에서부터 이곳 시카고까지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저는 이 모임에 참석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경건하게 예배하는 분위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쓸데없는 말이나 들어야 하다니요. 이 자리에 지금 방금 하나님과 밀담을 나눈 사람이 있다니요.” 곤경에 처한 의장은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신사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사실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었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전능하신 여호와, 성부 하나님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제일 가까이 나아가 대화를 나누었던 이사야 대언자는 지존하신 그분을 뵙고 목소리를 높여 “오 하나님, 하나님, 저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며 울부짖었다. 다니엘은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자 엎어져 마치 돌처럼 굳어 그분께서 일으켜 주셔야만 했다. 요한은 예수님을 뵈었을 때 얼굴을 바닥에 대고 납작 엎드렸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간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나 엎드려져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저는 티끌이고 재입니다. 부정한 사람이며 감히 주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습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중략... 지금 많은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자기들이 손으로 만든 값싼 하나님이다. 다양한 신학적 사상과 성가대의 노래 또 설교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혼합물’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은 제일 중요한 명령이며 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이 회복될 때 더 많은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제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성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희생시켜가며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시도는 그분이 받으실 영광을 사취하는 행위이며 결국 어떤 영혼도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한다. 이 경우는 오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이상한 형태의 변절자를 양산하게 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첫 번째 기도 즉 첫 번째 공동체 기도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첫째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이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나님이 제일 먼저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제 대부분의 분야에서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복음주의가 타락하여 무늬만 성경적일 뿐 인본주의와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본주의자를 원하지 않는다. 성경적인 기독교를 원한다. 기독교는 결코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먼저 하나님을 찾고, 그 다음 인간에게 관심을 돌린다. 그러나 휴머니즘 즉 인본주의는 인간을 먼저 찾고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 관심을 돌린다. 우리는 기독교 본래의 자리를 회복해야한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인간에게 쏠려 있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과 말, 인간들을 위한 행동에 빠져 있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제일 우선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오시며”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한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도록 말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놀랍고 영광스러운 임재가 그토록 압도적으로 나타나, 인간의 모든 교만을 꺾고 잘못된 것을 뒤엎으며 인간의 쓸데없는 우스갯소리와 자만심을 사라지게 하리라. 그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짖게 되리라. 이제, 기억하라. 당신이 원하는 모든 계획을 수립할 수 있고, 광고업자들의 도움과 최신 기계들을 활용해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끝냈을 때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그분이 제일 먼저 영광을 받지 못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두 번째 목표, 바벨론 포로에서 교회가 석방되는 것 반드시, 두 번째로 기도해야 할 목표는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서 석방되는 것이다. 오늘의 모든 복음주의 교회는 총체적으로 바벨론 포로 상태에 빠져 있다. 오순절교회, 근본주의 교회, 기독교 연합선교회 등 모든 교회가 포로 상태에 놓여 있다. 당신이 속한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뿐이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있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 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셔서 마침내 회복시키실 때까지, 그들은 원래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못했고, 멀리 떨어진 이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조차 체대로 부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 즉 다시 태어난 복음주의 교회들 역시 바벨론 포로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고 있다. 거기서 그들의 생활 방식과 도덕관을 배우고 익히며 점차 그들이 파놓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교회가 이 세상과 더불어 수치스러운 영적 간음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제 이 작업이 완결되어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교회가 원래 있던 거룩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보좌에 앉으신 거룩한 여호와의 영광을 구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신약 시대의 삶의 표준을 되찾아야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복음주의가 아무리 진보한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바벨론에서 더 많은 자녀들을 낳는 꼴밖에 안 된다. 개혁과 회복을 통해 우리가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장엄한 영광이 우리 위에 다시 임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태어나는 모든 자녀들은 바벨론에서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복음주의 교회가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바벨론에서 더 많은 유대인을 생산하고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을 양산하는 셈이 된다. 기억하라! 우리가 회복되고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면 선교 사업조차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결국은 ‘열등한’ 기독교를 해외의 토양에 이식하는 행위가 될 테니까 말이다. 선교사들이여 명심하라! 당신은 당신 자신보다 더 뛰어난 어떤 인물을 결코 키워낼 수 없다. 성경에서도 “각각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 ‘싸구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선교사를 택해 선교지로 보내 보라. 그의 머리는 온통 천박한 음악으로 가득 차 자신을 닮은 기독교인들을 양산할 것이다. 선교사가 하는 일은 고작해야 변질된 기독교를 그 나라에 이식하는 것이리라. 선교 차원을 넘어 전 세계에서 교회 회복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더 많은 선교사들이 양성되고 그들의 질적 수준 또한 높아져 결과적으로 ‘양질의’ 그리스도인이 탄생하게 된다. 아마 어떤 사람은 “토저 목사님, 저는 그런 말을 처음 듣는데요. 그리스도인이면 다 똑같지 않은가요?” 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30배, 어떤 사람은 60배, 또 어떤 사람은 100배를 거두는 법이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라. 큰 별이 있는가 하면 작은 별도 있고 또 어떤 별은 망원경으로라야 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너희 중 어떤 이는 육신에 속한 자이고 어떤 이는 영적인 자이다”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말한다.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첫째 기초 원리들을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너희에게 있나니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도다”(히5:12)   기독교 신앙은 고급 수준에 머물 수도 있고 적당하거나 평범한 수준 또 낮은 차원에 머물 수도 있다. 오늘 이 시대에 모든 성경학교나 크리스천 대학, 기독교 잡지, 성경연구 모임, 세미나 등을 살펴보라. 거기서 주창하는 기독교 신앙은 삼류 즉 타락한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 선조들이 알고 있었고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간직했던 그런 신앙이 아니다.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을 체험한 고급스럽고 거룩한 신앙, 하나님을 의식하는 겸손하고 은혜로우며 사랑이 넘치는 신앙 말이다. 명심하라! 우리가 개혁을 완수하기 전에 양산되는 모든 책들과 잡지 또 학교들은 부패한 교회에서 우글거리는 박테리아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기독교 연합선교회에서 출간하는 ‘연합회 증언’이라는 잡지는 책을 발간하는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편집장과 부편집장을 비롯한 모든 편집위원들이 타락한 이류급 기독교인들이라면 그 잡지는 이류급 잡지가 될 것이 뻔하고 또 실제로 그렇다. 만약 우리 모두가 원상태를 회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면, 라디오나 텔레비전, 스포츠, 신문 잡지, 예를 들어 ‘라이프 잡지’나 ‘타임지’와 같은 매체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면, 말씀의 정확한 의미대로 성경적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과 나를 포함한 모든 교회와 잡지, 선교사들 또 이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어 타락한 환경 속에서 일대 변혁이 일어나게 되리라 생각한다. 어떤 아이들은 태어날 때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산소를 공급받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또 어떤 아이들은 4.5kg의 몸무게로 마치 저항이라도 하듯 울부짖으며 세상으로 뛰쳐나온다. 아무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일을 떠맡게 된다.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다. 태어날 때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태어날 때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만 하는 아이로 태어날 수도 있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태어나 나기도 전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각자 필요한 단계를 거치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도록, 사람들이 하나님을 노리갯감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나님을 불경스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이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 앞에 머리를 조아리도록, 그분께서 마땅히 전능자가 되시도록, 그렇게 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교회가 신약 교회의 패턴으로 회복되도록 말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위의 두 가지 목표를 최우선순위에 두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영광인가. 사람의 인정인가? 사람들이 기도하는 동산 정원에는 뱀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자아’(self)라는 뱀이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나무 근처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가 독을 발하여 기도를 망쳐 놓는다. 야고보서 4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 일을 하시기를 원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겠는가? 가령, 내가 무릎을 꿇고 금식까지 해가며 하나님께 “오, 하나님! 주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고 치자. 그런데 나는 이렇게 기도하며 그분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그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점검해 보았는가? 이런 식의 기도는 하나님께 그분의 영광의 일부를 달라고 간구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이것은 그분이 받으실 영광의 일정 부분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응답될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서 석방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그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편이 좋다.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느헤미야가 되기를 원하는 일이 가능하다. 바알의 대언자들이 패배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엘리야가 되어 많은 무리 앞에서 불을 내려오게 하는 주인공이 되기를 은근히 열망하는 일이 가능하다. 잘못된 것이 개혁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루터가 되어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이제 도우소서”라고 요청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일도 가능하다. 하나님의 군대가 승리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지휘관이 되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위 행렬 맨 앞에 서서 행진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도 가능하다. 교회가 사탄을 물리치기를 기도하며 정작 승리했을 때 우리가 열심히 싸운 덕분에 승리했다고 자랑하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교회학교가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탁월한 주일학교 교사로 인정받아 “저분이 부장이셨을 때 숫자가 25명에서 39명으로 늘었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제 부탁하건데, 수준을 높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를 바란다. “오,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하소서. 나를 통해서든 아니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든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인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 진정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꼭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메노파 교도’(Mennonite, 16세기에 창시된 기독교 신교의 한 분파)를 사용해 영광을 받으시기로 결정하셨다 해도 우리는 마치 내가 속한 단체가 쓰이는 것처럼 그렇게 열심히 또 진지하게 기도해야만 한다. 내 생각에 아마 여러분 중 몇몇 사람은 이런 관점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심장마비에 걸려 운동장에 나자빠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돼도 좋다.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테니까. 만약 당신이 “오, 하나님!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통해서만 영광을 받아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차라리 ‘메리의 어린 양(Mart's little Lamb)노래의 가사를 거꾸로 부르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응답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을 바꿔 어떤 단체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고 또 그분께서 누군가를 사용해 일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시면 반드시 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영성인가. 게으름인가? 여러분 중 약간 세련되었다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로 부흥의 물결이 밀려오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성도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실 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가 자신들보다 영성이 부족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미리 짜놓은 계획에 맞춰 예배를 드리지만 자신들은 지난 수년 동안 최고의 예배를 구상하며 여러 가지 시도와 시행착오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러한 행위를 ‘영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영성이 아니다. 단지 게으름일 뿐이다. 누군가 예배에 대해 미리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설교 준비를 하지도 않으면서 성령님께 의지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요 그 속에 진리가 있지 않다. 나는 북미대륙에서 큰 교회 중 한 곳에서 설교했던 적이 있다. 교회 이름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혹시 누가 와서 묻는다 해도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추측에 맡기고 싶다. 아무튼 그 교회의 주일 아침예배가 어떠했는지 아는가? 노상 집회였다. 약 3,500명이 운집한 길거리 모임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 교회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나와서 성경책 페이지를 홱 넘겨가면서, 그것도 차에 광택을 내거나 긴 낚시 여행을 마음껏 즐긴 후에 예배를 드린다고 나와서 최고의 예배가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것을 ‘영성’ 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이 아니다.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나태와 무례함이다. 우리는 마땅히 교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교파, 성공회나 루터교 성직자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게 하신다 해도 만족해야 한다. 게다가 교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자신은 무시당해도 좋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제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전도자가 어떤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집회가 시작되기 며칠 전 그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기쁜 소식입니다. 이 지역에서 부흥 운동이 시작되고 있어요.” 그러자 전도자는 급히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제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그 운동을 잠시 중단시키시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나 실상 이것은 비극이다. 복음 전도자가 받을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도자는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다. 당신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오? 어쨌든 영혼을 구원했지 않소?” 그렇다. 그 전도자는 바벨론에서 인큐베이터 아기들을 태어나게 했다. 만약 그가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았더라면 그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필요조차 없는 몸무게 4.5kg의 건강한 아기들을 태어나게 했을 것이고 그 아이들은 본래 태어났어야 할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하다. 어떻게 해서든 기독교로 개종만 하게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버리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오, 하나님! 제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응답해 주소서. 우리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소서. 선교사들을 파송해 주소서. 만약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 숫자보다 다른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 숫자가 더 많게 하신다 해도 저는 만족합니다. 주님, 교회를 회복시켜 주소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축복하신다 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하기도 하고 다른 교회에 먼저 복을 주셔서 우리가 그 흐름에 따라가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꺼이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오,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제가 벽돌 한 장을 놓게 하소서. 저는 그 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소서. 주님께서 저를 도구로 쓰시면 좋고, 쓰지 않으신다 해도 주님께서 쓰시는 자를 적극 후원하겠나이다. 그를 사랑하고 질투하지 않으며 그를 위해 기도하겠나이다. 저는 무대 뒤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겠습니다. 비록 그 일이 무미건조한 일이라 해도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이렇게 기도할 자신이 있는가? “오, 하나님! 어떻게 해서든 교회를 부흥시켜 주소서.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걷어차여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부흥시켜 주소서.”   신약성경의 표준대로 자신이 속한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며, 몇몇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가 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정말 몸서리칠 일이다.  “오, 하나님!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우리 교회에 복을 내려 주소서.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소서.” 교회 집사들이여, 진정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한다면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것이다, 혹시 당신이 다른 도시로 이사가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기도에 ‘정가표’를 붙이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회복시켜 사도행전에 나타난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신약성경의 표준대로 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쓰신다 해도 불평하지 않으리라.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몰리노스(1640-1697. 스페인의 신비주의자)가 한 말을 기억하라. “기도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기도하여 응답을 받지 못한다. 비록 사탄과 인간의 정욕이 방해한다 해도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 잘못된 태도를 바로 잡으며 위축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내가 품고 있는 몇 가지 영적 소신을 제시하였다. 나는 이렇게 믿고 선포한다. 기독교 연합선교회뿐 아니라 장로교회, 침례교회, 메노파교회, 독립교회 어디를 가든 감히 이렇게 외친다. 첫째,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은 소멸되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싸구려 신이 되어버렸고 무릎 꿇을 만한 가치도 없는 신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옷자락으로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계신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바르게 경배하고 예배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교회는 신약 시대의 패턴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문제는 여러분께 맡기고 싶다. 만일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가 계속해서 세속적인 교회를 모방하고 복음주의 교회를 타락케 하며 청년 운동이나 주도한다면 또 이 단체가 세속적인 교회를 따라가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얼마 안 있어 타락한 준(準)자유주의자 계열에 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누군가를 통해 우리가 위임받은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게 하리라. 여러분에게 기탄없이 말하지만 나는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21세 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앞으로 이 단체를 떠날 생각도 없다. 만약 떠나 있다면 결코 잘못을 지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소속되어 활동하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한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단체가 ‘세속적’인 도구와 방법, 철학 또 관점에 완전히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좀 더 참아야 할지 혹시 내가 너무 인간적인 견지에서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교회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한다. 만약 그분께서 우리 단체가 아닌 다른 단체를 통해 이 일을 수행하신다 해도 나는 “오 하나님! 어쨌든 그렇게 되게 해주소서. 되게 해주소서!”라고 간구하리라.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가 성령의 불이 내려올 때 불을 받고, 복이 임할 때 복을 받고, 회복의 역사가 시작될 때 회복되며, 에스라나 느헤미야와 같은 대언자가 무리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 때 우리가 그 대상자 중에 포함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열망하며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영광에 굶주린 세대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회복시켜 주실지 나는 모른다. 아직 그럴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이 시대의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 중에 그런 인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대언자를 보내실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다. 아마 머리카락이 붉고 얼굴에 주근깨가 있으며 마치 택시의 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큰 귀가 삐죽 튀어나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예상 외로 소년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이 택한 사람을 예비시켜 놓았다가 그를 일으켜 회복 운동을 일으키시리라. 수십억이 드나드는 대규모 전도 집회를 열지 않고서도 부흥과 회복을 일으키시리라. “오 하나님! 택한 자들을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쓰시기로 예비한 자들을 보내 주소서. 오, 하나님!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복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또 저로 하여금 그 일부분이라도 감당하게 하소서. 그러나 하나님! 혹시 다른 사람을 통해 하시기로 결정하셨다 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해 주소서. 오직 회복시켜 주소서.”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에 굶주린 세대이다. 20,30대 많은 젊은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고 성경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영광을 목도한 적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하고 두렵게 나타나 참석자들이 말도 크게 못하는 그런 예배에 참석해 본 경험이 전혀 없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너무나 존귀하고 높으신 분이라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말하기조차 두려워해야 하는 그런 분으로 들은 적이 전혀 없다. 기독교 연합 선교회의 창시자인 심슨 목사가 뉴욕 주의 버팔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설교한 적이 있다. 이때 설교가 끝나고 모임을 마쳤지만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참석자들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경외감을 느껴 일어나지도 걷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성장하는 젊은 세대들은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오, 하나님!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자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소서.”
2009-07-17 14:33:23 | 관리자
신앙은? ● 토저 신앙은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덕이 아니다. 신앙은 검은 것은 희다고 믿도록 우리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간절히 원하면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도록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능력이 아니다.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진리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신앙은 온 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믿으면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래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대로 바꾸지 않으신다. 그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우리의 모든 것을 그 거룩한 지식에 조화 되도록 변화시킬 때 우리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선다.   토저의 ‘나는 가짜인가 진짜인가’ 책 중에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9:2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7-17 14:30:40 | 관리자
시간 문제가 아니라 변화   ● 토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오해 중에서 가장 유해한 것은 인간성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힘이 시간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혜롭지 못한 젊은이를 볼 때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저 사람이 지혜로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새로 믿은 그리스도인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 그가 성숙하게 변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상을 말하자면 공간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 힘을 갖고 있지 않듯이 시간도 그렇게 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실로 시간은 우리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바보를 현인으로 죄인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이 아니고 변화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변화를 일으키시기 때문에 그들이 변하는 것이다.   - 토저의 나는 가짜인가 진짜인가 중에서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9:2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7-17 14:29:47 | 관리자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언어 ● 김재근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언어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자의 언어가 아니라, 듣는 자의 언어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보라, 말하는 이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우리 언어로 듣게 됨이 어찌된 일이냐?” [사도행전 2:7-8]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 [사도행전 2:11].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꾼들이 반드시 실행해야 할 좋은 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을 읽으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 군대 대장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진 후에, 바울 사도가 성난 군중 앞에서 히브리말로 설교하자, 그들은 한 동안 바울의 설교에 경청했습니다.  “그가 히브리말로 자기들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더욱 잠잠 하거늘…” [행 22:2]. 이것이 바로 듣는 자의 언어로 진리를 전파할 때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한국에 온 지 8개월째를 접어드는 앳된 몰몬교 선교사와 짧은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혼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위한 그의 ‘열정’과 ‘헌신’ 앞에 내 자신이 오히려 분노와 함께 비장함을 느꼈습니다. 그의 열정은 서투른 한국말로 이야기하기를 힘들어하지 않는 모습에 흠뻑 묻어났습니다. 지옥의 자식들도 자신의 확신을 전파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사실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옥의 자식들만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순수한 교회의 역사를 추적하다 보면, 주께서 맡기신 말씀을 주께서 보여주신 방법대로 전파하고자 전 생애를 걸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생애를 읽어보면 주님을 위한 삶이야말로 최고의 인생임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일꾼들이 갖추어야 할 열정과 헌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 그는 버마에서 사역한 선교사로서 영어-버마어 사전 편찬에 힘썼고, 버마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버마에서 죽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 그는 중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중국말을 하며, 중국옷을 입고서 중국식으로 살았습니다. 심지어 머리를 밀고 ‘변발’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죽었습니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 그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1885년 조선에 왔습니다. 그는 영한사전, 한영사전과 영어 문법책을 출판했으며,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했습니다. 우리를 이 땅에 왔던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을 향해서 병원 짓고, 학교만 세웠다고 비방하지만 그들을 능가하는 열정과 헌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윌리암 케리 : 그는 인도에서 사역한 인도선교의 아버지로서 수많은 인도 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 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지역 언어 문법책과 사전 편찬 작업에 수고 했습니다. 윌리암 카메룬 타운젠 : “가장 훌륭한 선교사는 선교지 현지인의 언어로 쓰인 성경이다. 성경은 선교사들처럼 안식년도 필요 없고 외국인이라고 배척 받는 일도 없다.” 이와 같은 명언을 남긴 그는 위클리프 성경 번역 선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중미 과테말라 지역의 한 인디언의 한 마디가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신네 신이 그렇게 똑똑하다면서 우리말도 모릅니까?” 많은 신자들이 존경하는 충성스러운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선교 현장의 말과 글에 관심을 가졌고, 선교 현장의 말과 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외국인이 현지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과 함께 현지 언어 사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말과 글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혼이 담겨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주님의 일꾼들은 선교 현장에 있는 영혼들을 향한 자신들의 사랑을 그들이 사용하는 말과 글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언어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자기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헌신한 사람들을 잘 새겨두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며” [고린도전서 9:20]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9:2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7-17 14:25:49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18 ● 스콧 휴즈 지금까지 우리는 약 1년 반에 걸쳐 무신론적 진화론이나 균일론보다는 성경적 창조론이나 대격변론이 과학적 사실들을 훨씬 더 잘 설명해주는 것을 보았다. 우주의 무한한 변화, 복잡성, 그리고 질서는 놀라우신 설계자/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으며 그분의 존재를 입증해 주고 있다. 참된 과학은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설명을 지지하며 확증하고 있고 생물체 진화를 거부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무신론적 진화론 사상과 관련된 성경적 사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크리스천들조차도 온 세상에 넓게 퍼져있는 진화론 사상에 의해 협박을 당하고 있으며 또 이에 현혹되어 자기들의 크리스천 믿음과 진화론을 타협하고 비성경적인 사상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인 성경을 존중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타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창조에 대한 성경적 설명과 진화론 사이에는 현저한 모순이 매우 많다는 것을 인식한 채, 하나님께 헌신한 성경 신자들은 진화론 사상을 완전히 거부할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개념은 서로 호환될 수 없으며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다. 다음의 표는 성경의 창조와 진화론이 서로 타협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다.     성경적 창조론 인본주의적 진화론 1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다(창1). 자연적이며 우연한 선택 과정이 모든 것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2 세상은 지금부터 6,000년 전에 문자 그대로 6일 간에 창조되었다(창1). 세상은 매우 긴 시간(약 40 ~100억 년)에 걸쳐 진화되었다. 3 창조는 완전히 이루어졌으며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창2:3). 창조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4 바다가 땅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창1:2). 땅이 바다보다 먼저 창조되었다.   5 두 수권들(hydrospheres) 사이에 대기가 있었다(창1:7). 대기와 수권이 접해 있었다.   6 최초의 생명체는 땅에 있었다(창 1:11). 생명체는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7 최초의 생물은 육상 식물이었다(창1:11). 수생 유기체가 처음으로 진화되었다. 8 지구가 태양과 별들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창1:14~19). 태양과 별들이 지구보다 먼저 있었다. 9 과수(果樹)가 물고기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창1:11, 20-21). 물고기가 과수보다 먼저 있었다. 10 모든 별이 넷째 날에 창조되었다(창1:16). 별들은 각각 다른 시대에 진화되었다. 11 새들과 물고기들은 다섯째 날에 창조되었다(창1:20~21). 물고기는 새가 나타나기 수백만 년 전에 진화되었다. 12 새들이 곤충보다 먼저 있었다(창1:20-31; 레11장). 곤충이 새보다 먼저 진화되었다.     성경적 창조론 인본주의적 진화론 13 고래가 파충류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창1:20-31). 파충류가 고래보다 먼저 진화되었다. 14 조류 다음에 파충류가 있었다(창1:20-31). 파충류 다음에 조류가 있었다. 15 사람이 창조된 후에 비가 내렸다(창2:5). 비가 사람보다 먼저 있었다. 16 남자 다음에 여자가 창조되었다(창2:21~22). 유전학에 따르자면, 여자 다음에 남자가 생겼다. 17 빛이 창조되고 그 뒤에 태양이 만들어졌다(창1:3~19). 태양이 만들어진 후 빛이 나왔다. 18 식물이 창조된 후 태양이 창조되었다(창1:11~19). 태양이 형성된 후 식물이 나타났다. 19 풍부하고 다양한 수생식물이 일시에 모두 창조되었다(창1:20~21). 수생물체는 초기의 단일 유기체로부터 점차로 진화되었다. 20 사람의 몸이 땅의 흙으로부터 창조되었다(창2:9).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 21 사람에게는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는 권리가 있다(창1:28). 대부분의 생명체는 인간이 진화되기 이전에 멸종되었다. 22 인간의 식성은 본래 초식이었다(창1:29). 인간의 식성은 본래 육식이었다. 23 완전히 결정되어 구별되는 종류들이 있었다(창1:11-12, 21, 24-25; 고전 15:38~39). 생명체의 형태는 계속해서 변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24 인간의 원죄는 죽음을 가져왔다(롬5:12). 투쟁과 죽음은 인간이 진화되기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이 같이 직접적으로 모순이 되는 것들 외에도, 무신론적 진화론과 성경적 기독교 사이에는 일반적 원리에 있어서도 확실한 차이점들이 있다. 창조주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좋은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마7:18). 진화론의 열매는 마귀가 주관하는 이 세상 시스템에서 여러 가지 믿음과 행위로 나타났다. 진화론은 히틀러의 나치즘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지적/철학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 암처럼 널리 퍼져있는 상대주의윤리를 위한 기초를 확립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배도, 무신론, 세속적 인본주의, 그리고 성도덕상의 자유주의를 촉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실로 인류의 일반적 복지와 정신문화는 이러한 자연주의/인본주의 철학이 생산한 결과로 인해 큰 피해를 받아 왔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은 책임 있는 창조물이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동기에 대하여 창조주 앞에서 답변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아무런 목적도 없는 진화 과정에 의해 생긴 생산물로 간주하게 되면 사람은 모든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면제받게 되며, 이 경우에 사람은 단순히 자연에서 우연히 생겨난 한 생산물이 되며 기껏 해 봐야 지적 동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악한 행동이, 그가 예전에 동물이었으며 아직도 그 속성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온 인류가 계속해서 이러한 논리로 치닫는다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그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 곧 그 자신만이 소유한 유일한 능력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도덕적 개혁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람의 본성은 사람이 만든 어떤 외부적인 것에 의해 바뀔 수 없으며, 오직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바로잡아 줄 내면의 변화가 있어야만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요3:3-7) 진화론은 특히 윤리와 도덕이라는 영역에서 사람의 마음을 타락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에서 잘 드러난 성경적 윤리는 틀림없이 모든 윤리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 그러나 우연함/무질서의 진화 과정이 우리의 창조주라면 윤리의 절대성에 대해 전 우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시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신윤리(新倫理), 좀 더 정확하게 이름을 붙이자면 ‘윤리 부재’는 생명체의 기원에 대한 무신론적 사상/철학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현대 윤리의 타락이 진화론 사상의 출현과 때를 같이하여 발생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오늘날 온 세상에 널리 파급되고 있는 윤리 붕괴 현상은 모든 윤리 기준을 휩쓸어버리고 있는 체계, 즉 진화론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같이 한탄할 수밖에 없는 악한 추세를 해결할 수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순수와 회개와 성경적 표준과 원리로 되돌아가려는 진정한 마음 자세를 갖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진화론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많은 난제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깊이 생각해 본 문제들만으로도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모든 형태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거절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무신론적 진화론과 타협하고자 하여 개발된 유신론적 진화론은 결코 성경적 기독교와 화해할 수도 없으며 화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최종 결론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는 모든 생물체가 우연의 과정 속에서 진화했다는 관점과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한 설계에 의해 종류마다 독특하게 창조되었다는 관점이 있으며 이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철학적/신학적 개념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생명의 기원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관찰이나 실험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진화론과 성경적 창조론은 둘 다 과학적 실험에 의해서 그 사실 여부를 증명할 수 없는 그런 개념들이다. 이 두 개념은 한결 같이 믿음의 문제이지 결코 과학의 문제가 아니며 종의 기원에 대한 종교적 철학이며, 따라서 믿음을 요구한다. 사실 진화론의 경우에는 ‘믿음’이라는 말보다 ‘쉽사리 믿는 성질’(경신, 輕信)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와이송 박사가 관찰한 바와 같이, 이 같은 정의는 특별히 진화론에 더 적합하다. 실로 진화론은 많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우연에 의해 무엇인가가 형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타파해 버리는 L-단백질이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믿음,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내버려두었더라면 대혼란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을 DNA 암호들이 진화에 유리하게 형성되었다는 믿음, 진화론자들이 모든 생명체의 화학적 조상으로 여기고 있는 아미노산 등을 마구잡이로 파괴시키고 말았을 초기의 불리한 지구 환경이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믿음, 자연적으로 생물이 발생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열역학의 법칙들을 포함한 대자연계의 법칙들이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믿음, 실제로 진화론자들에게 항상 더 많은 문제만 가져다주는 과학의 진보들이 이제는 진화에 유리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 무자비하게도 오직 두 개의 이야기, 곧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확신시켜주는 이야기만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확률이 이번에는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믿음, 고정된 종류들이 시간에 따라 변해서 진화론을 확증해 줄 것이라는 믿음, 진화론자들에게 이중의 부정 효과를 가져다주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 이번에는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믿음, 시대를 통해 동식물의 종류들이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음을 잘 보여 주며 또한 과도기 중간연결고리를 전혀 보여 주지 않고 오직 전 세계적 대홍수가 있었음을 잘 증언하고 있는 화석들이 언젠가는 진화에 대해 유리한 증언을 하리라는 믿음, 언제나 파멸과 붕괴만을 가져오는 시간이라는 인자가 언젠가는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하리라는 믿음 등. 중고등학교 교과서 등에서 과학적이며 확고히 정립된 사실로 묘사되어 온 것과는 달리, 실제로 진화론은 비이성적이며 셀 수 없이 많은 과학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가설이다. 반면에 성경적 창조론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과학적 사실들과 일치하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성경적 기독교에 대한 지적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인상적이고도 확실한 과학적 증거는 참으로 많다. 진화론은 최근 몇 해 동안 우리 사회에 큰 문젯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도덕적 타락과 실로 깊은 관련이 있다. 무신론적 진화론을 추종하는 믿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창조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거부했으며 또한 성경 자체의 메시지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었다. 여기에 바로 사탄의 속임수라는 아주 심각한 위협이 놓여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주의적 진화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구상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불필요한 존재임을 경험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전혀 소망 없는 미래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6:25) 그러나 성경이 전해주는 소식은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된 소식이다. 바로 이 복음 안에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삶에 대한 목적과 의미, 그리고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확실한 영생의 약속들이 들어 있다(요3:6). 이제 진화론의 붕괴는 엄연한 사실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크리스천들의 연구 조사를 통해 과학적인 것으로 입증된 성경적 사실들은 마침내 생명체의 진화라는 마귀의 피상적 속임수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이 시점에서 사실에 입각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성경적 기독교의 타당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올바른 변명 거리가 되지 못한다. 성경적 창조와 대격변론을 지지하는 증거는 너무나 풍부하다. 따라서 이런 사실들을 거부하는 것은 잘 알지 못해서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를 따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실로 많은 이들이 “나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믿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 성경적 기독교에 여러 가지 지적 난제들이 많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항하려 하는 그들의 도덕적 반항을 감추기 위한 연막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글을 맺기 전에 나는 ‘벌거벗은 임금님’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려 한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그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경쟁을 해가면서 그 재단사가 임금님의 옷을 참으로 훌륭하게 만들었다고 격찬만 했다. 그러나 한 순진한 어린아이는 “임금님은 벌거벗고 있어요.”라고 단순하게 사실을 말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님이 바로 진화론과 비슷하지 않은가! 다시 말해 사람들이 진화론에 대해 격찬을 늘어놓지만 실제로 진화론은 아무 것도 없이 벌거벗은 채 우리 눈앞에 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사람들이 진화론의 붕괴를 알리지 않으면 짐승들이 이를 알릴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짐승들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너를 가르치리라. 공중의 날짐승들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일러주리라. 혹은 땅에게 말하라. 땅이 너를 가르치리라. 바다의 물고기들도 네게 밝히 알려주리라. 이 모든 것 중에 어느 것이 주의 손이 이 일을 이루신 줄을 알지 못하랴? 모든 생물의 혼과 모든 인간의 호흡이 그분의 손에 있느니라(욥12:7-10) 이 글을 끝내면서, 파스칼의 ‘유명한 내기’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한 수학자요, 물리학자였던 파스칼은 하나님께서 존재하든지 혹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만일 당신이 이 내기에서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쪽에 당신의 삶 전체를 건다면, 그리고 당신이 옳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혹시라도 당신이 틀린다 해도 당신은 결코 아무 것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즉, 밑져야 본전인 셈이다. 한편 당신이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했는데 만일 당신이 옳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더욱이 당신이 옳지 않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즉, 이 경우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손해인 경우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지금도 당신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잃고자 하는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기 바란다. 생명체의 진화에 대한 실수투성이 개념들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안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바로 오늘 이 시간에 독자께서 시간과 그 외의 모든 것을 초월하시며 변치 아니하시는 여러분의 창조주/구원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원자로 맞아들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히13:8).
2009-07-17 14:19:30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17 ● 스콧 휴즈 과학자들은 모두 진화론을 믿는가?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생물체의 진화를 믿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또한 학위나 지위 등과 상관없이 진화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진짜 과학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진화론자들은 창조주의 그 자체를 모순이 가득한 자가당착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같이 오만하고 편견이 심한 견해는 완전히 거짓이며 누구나 쉽게 논박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과거의 위대한 선구자적 과학자들이 성경을 믿는 창조론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위대한 사람들의 명단을 일부만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아가씨즈(Louis Agassiz), 베이컨(Francis Bacon), 보일(Robert Boyle), 쿠비어(George Cuvier), 파브르(Henri Fabre), 패러데이(Michael Faraday), 플레밍(John Ambrose Flemming), 허쉘(William Herschel), 주울(James Joule), 켈빈(Lord Kelvin), 케플러(Johannes Kepler), 린네(Carolus Linnaeus), 리스터(Joseph Lister), 맥스웰(James Maxwell), 멘델(Gregor Mendal), 모오스(Samuel F.B.Morse), 뉴턴(Isaac Newton), 파스칼(Blaise Pascal), 파스퇴르(Louis Pasteur), 레일레이(Lord Rayleigh), 다빈치(Leonardo Davinci) 등. 오늘날에도 성경적 창조론을 믿으면서도 과학의 여러 영역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과학자들이 수없이 많다. 이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많은 수의 창조과학 연구회가 전 세계적으로 발족되어 큰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오늘날에는 크게 촉망받는 과학자들의 상당수가 생물체의 진화론을 완전히 내버리고 성경적 창조론을 선호하고 있다. 다우화학회사(Dow Chemical Company)에서 기초 연구와 핵 연구 책임자로 일하는 그레베(John Grebe) 박사는 진화를 증명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를 단 하나만이라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상금으로 1,000달러를 주겠다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레베 박사의 도전은 결코 경솔하게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다. 그에 대한 신용장은 실로 굉장히 인상적이다. 그는 100개 이상의 특허와 스타이로폼, 합성 고무, 합성 섬유 그리고 ‘사란 랩’(Saran Wrap) 등의 개발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물론 이에 대해 반응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페니실린을 개발하여 1945년에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았던 체인 경(Sir Ernest Chain)은 최근에 이렇게 진술했다. “적자의 생존과 발전이 전적으로 우연한 돌연변이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전혀 증거가 없는 주장이며 사실과도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진화론은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미묘한 사실들의 많은 부분을 과도하게 단순화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오랫동안 수많은 과학자들이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그런 이론들을 쉽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나는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1971년에 과학 부분에서 노벨상을 받은 게이버(Dennis Gabor)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이 무작위 돌연변이에 의해 진보되었다는 것을 결코 믿을 수 없다.” 영국 박물관에서 근무한 바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석학자인 에더리지(Dr. Etheridge)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진화론자가 주장하는 내용 중의 십중팔구는 상식을 벗어난 것이며, 관찰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사실들에 의해 지지를 받지도 못하는 것들이다. 이 박물관은 그들의 관점이 터무니없음을 증명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이 큰 박물관 안에는 여러 종이 상호간에 돌연변이 과정을 겪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단 한 개도 없다.” 엘란겐 대학의 플라이쉬만(Albert Fleischmann)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진화론을 이미 한물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1830년 이래로 어렵게 성취된 해부학, 조직학, 세포학, 그리고 발생학에 대한 지식이 진화론의 기본 개념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거부한다. 근거 없는 환상적 건축물인 진화론의 이론들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존재하고 있는 본능 곧 헛된 신화를 사랑하는 본능이 없었더라면 이미 오래 전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 미국 우주 항공 연구소(NASA)에서 우주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폰 브라운 박사(Dr. Wernher von Braun)는 1972년 9월 14일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교육 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그로스 씨: 저는 온 우주와 생명 그리고 인간의 기원에 대한 창조론이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과학적 이론인가에 대해 제 의견을 진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저는 다음과 같은 점을 기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창조라는 것이 어느 누군가가 설계하지 않았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법칙과 질서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모든 것 뒤에 반드시 설계와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는 질서 정연하며 잘 짜인 계획이나 록은 설계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식물의 각 종류가 살아남으려 하며 계속해서 퍼져나가려 하는 것을 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해 볼 수도 없을 정도의 규모로 역사하고 있는 강력한 힘 앞에 겸손해 질 수밖에 없으며 또한 조그만 씨를 아름다운 꽃으로 발전하게 해 주는 질서 즉 대자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목적으로 가득한 질서에 의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주와 그 안에 거하는 만물의 기묘함을 더 많이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모든 것 밑에 깔려 있는 내적 설계를 보고 더욱더 놀라게 됩니다. 온 우주가 처음부터 설계되어 창조되었다는 생각을 정리해보면, 결국 우리는 과학의 영역 밖에 어떤 설계자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과학적 방법은, 온 우주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처음부터 어떤 설계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는 자료들을 우리가 배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겼다.” 라는 단 하나의 결론만을 믿도록 강요하는 것은 과학 그 자체의 객관성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온 우주가 어떤 비규칙적 과정으로부터 진화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의 뇌나 눈과 같이 고도로 정밀한 기관을 만들어낼 수 있는 비규칙적 과정은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 우주의 설계자가 존재함을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발견하는 많은 기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과학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많은 해답을 주었으므로 언젠가는 그 위대한 설계자의 의도나 목적이 없이도 대자연의 기본적 법칙들에 대한 창조를 우리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과학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나 있는 태양을 보기 위해서 촛불을 켜야만 한단 말입니까? 지적이며 훌륭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 설계자를 그려 보여 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과연 물리학자가 전자를 그려낼 수 있단 말입니까? 전자는 너무나 작아서 물리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는 그 효과를 이용해서 불을 밝히기도 하고 밤중에 비행기를 안내하기도 하며 매우 정확한 것을 측정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우주에 설계자가 존재함을 생각해 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창조주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물리학자가 있다면, 그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아무도 생각해 볼 수 없는 전자들이 실제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전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들이 다른 분야로부터 매우 제한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와서 전자에 대한 참으로 엉성한 기계적 모델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한된 자료로 전자에 대한 엉성한 모델을 만들어온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모델 즉 창조론 같은 모델에 대해서는 알려고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위에서 설계자라는 측면에 대해 조금 길게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실 사람들이 - 혹은 과학자들이 - ‘설계에 의한 창조’를 현재 유행하고 있는 ‘우연에 의한 진화’에 대한 과학적 대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요 이유는 그들이 마음속에서 그 설계자/창조자를 생각해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한계를 초월하는 어떤 최종적인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없다는 것, 그 자체가 지금까지 우리가 관찰한 자료들간의 상호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고 저는 생각하며 그래서 매우 유용하게 무엇인가를 예측하게 해 주는 어떤 이론을 배제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NASA -미국 우주항공국- 에 근무하는 우리는 달에 보낸 아폴로 우주선이 그토록 놀랍게 성공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변해 줄 것을 종종 요청 받곤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답변이란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간과하려 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가장 적절한 대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로 이 같은 과학적 정직성의 관점에서, 저는 학생들이 과학 시간에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기원에 대한 다른 이론들 즉 진화론과는 전혀 다른 이론들에 대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온 우주가 우연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계획에 의해 생겼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참으로 큰 실수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재배(再拜)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28권으로 구성된 「동물학의 속성」이라는 책을 편집했고,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회장을 역임했던 그래스(Pierre P. Grasse)는 프랑스 동물학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살아 있는 세계에 대한 그의 지식은 참으로 백과사전처럼 많았는데 그는 진화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생물학적 진화에 관한 주석 및 교리들은 날카로운 비평 앞에 살아남을 수 없다.”(「살아있는 생명체의 진화」) 프랑스 지질학회의 회장이며 한 백과사전의 편집자이고 파리 자연사 박물관 원장이기도 한 레모인(P. Lemoine)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심각한 속임수에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진화론은 이 세상이 계속해서 가르쳐온 인본주의적 교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전문분야에서, 식물학자든 동물학자든, 어느 누구도 생물체 진화에 대한 어떤 이론도 적합하지 못함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화론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는 진화론의 사상을 완전히 거부하는 현시대의 다른 과학자들을 더 많이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만으로도 성경을 믿는 과학자들이 거짓 과학을 유포하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논박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획기적 진보, 발견, 그리고 발명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과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과서 등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위대한 과학적 지성인들의 상당수가 성경을 믿는 창조론자들이었고, 지금도 이들은 과학적으로 이미 붕괴된 진화론의 사상을 완전히 거부하며 조롱하고 있다.
2009-07-17 14:16:29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16 ● 스콧 휴즈 공통적으로 인용되는 진화의 증거들 반박 진화론자들은 자기들의 이론을 유지하기 위해 이른바 진화의 증거라는 것들을 종종 제시하며 이런 예들이 생물체의 진화를 확실히 증명해 준다고 믿는다. 이러한 예들은 진화론을 지지해 주는 통합 작용/과정에 대한 긍정적인 예로서 아주 강력하게 제시되곤 한다. 지난 호에 이어 이호에서도 우리는 생물발생설, 밀러와 우레이의 실험 및 비교해부학 등 진화론자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인용하는 이른 바 ‘진화론의 증거들’에 대해 면밀히 조사를 하려 한다. 생물발생법칙 1866년 해켈(Ernst Haeckel)은 이른바 ‘속생설의 법칙’ 혹은 ‘생물발생법칙’을 발전시켰다. 반복의 법칙으로도 잘 알려진 이 개념은 가끔씩 대학교 교재에도 실리곤 한다. 이미 널리 알려진 상투적 문구로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개체 발생(ontogeny)은 계통 발생(phylogeny)을 반복한다.” 이것을 풀어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태아의 발달 즉 개체 발생이 진화론자들이 가정하고 있는, 이른 바 조직체의 진화론적 발달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속생설의 법칙을 지지하기 위해 진화론자들이 자주 사용하여 잘 알려진 예는 사람의 심장이다. 그들은 사람의 심장이 최종적으로 사람의 심장 단계에 다다르기 전에 벌레, 물고기, 개구리, 그리고 파충류의 단계를 거쳤다고 주장한다. 즉 사람의 태아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의 아가미를 닮은 심장 구조야말로 사람이 물고기로부터 진화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조사들은 이 같은 법칙 안에 많은 착오가 있음을 밝혀 주었다. 예를 들어 여러 연구자들은 태아의 여러 단계는 단일 세포로부터 훨씬 복잡하고 정돈된 조직체로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고 확신 있게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태아가 발전하는 단계에서 발견되는, 수없이 많은 예외, 역전 현상, 삭제 및 첨가 현상 등이 태아 연구에서 잘 관찰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분자 유전학이라는 학문은 속생설의 법칙이 불가능함을 보여 주었다. DNA는 각각의 조직체마다 아주 독특하게 설계되었다. 간단하게 말해, DNA는 결코 지금까지 나온 다른 조직체들의 발전적 단계를 재창조하지 않으며 단지 그 고유의 종류대로 재생산해내는 일만 한다. 현재는 거의 모든 과학자들이 속생설의 법칙을 부정하고 있다. 단지 어리석거나 정보에 어두운 진화론자들만이 자신들의 헛된 이론을 방어하기 위해 이 개념을 여전히 인용하고 있지만 사실 이 개념은 아무런 과학적 토대도 지니고 있지 않다. 다음은 2007년 9월 21일 조선일보에 실린 「신을 믿는 사람이 생존경쟁서 살아 남는다」라는 책 소개이다. 여기서 우리는 월퍼트라는 세계의 석학이 가지고 있는 진화론적 사고 구조를 쉽게 볼 수 있는데 그는 바로 위에서 살펴본 생물발생법칙의 추종자이다. 아프리카에 사는 팡 족은 밤마다 하늘을 날며 농작물을 망치는 마녀가 있다고 믿는다. 마녀를 봤다는 사람도 여럿 있다. 웃을 일이 아니다. 팡 족이 보기엔, 인간이 대대로 간난신고를 겪고 사는 이유가 수천 년 전 웬 남녀가 과일을 한 알 따먹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웃길지 모른다. 인간이 신(神)·유령·늑대인간·UFO·사후세계 등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믿는 이유는 “한 마디로 인간의 머리 속에 ‘믿음 엔진’(belief engine)이 있기 때문”이라고 루이스 월퍼트(Lewis Wolpert·78) 런던 칼리지 대학 해부학과 명예교수는 말했다. 그는 발생 생물학(developmental biology)의 대가다. 발생 생물학은 세포가 어떻게 해서 커다랗고 복잡한 장기로 발달하는지 설명하려는 학문이다. 런던 자택에서 전화기를 든 이 석학은 “나는 늘 사람들이 왜 괴상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 의아했다”고 책을 쓴 동기를 밝혔다. 인간의 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도구의 발명과 때를 같이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인간이 도구를 쓰기 시작한 것은 만물에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증거다. 화살을 날리면(원인) 새가 떨어지고(결과), 도끼를 휘두르면(원인) 나무가 쓰러진다(결과). “원인과 결과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진화에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도구의 사용은 언어와 더불어 인간의 진화를 이루었고 현재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가져왔다.” (133쪽) 우리 조상들은 자신에게 닥친 자연 현상을 이해할 과학적 지식이 없었다. 그렇다고 모르는 대로 살자니 “중요한 사건의 원인을 찾지 못하는 무능력 상태가 정신적 불쾌감과 걱정을 유발” 했다. 지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인과적인 이야기를 꾸며내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 믿음 혹은 종교의 기원이자 본질이라는 것이 월퍼트의 주장이다(57쪽). 짐작하시다시피 월퍼트는 철두철미한 무신론자, 진화론자, 환원주의자(reductionist)이다. 요컨대 이 세상엔 신도, 영혼도, 사후세계도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포함한 모든 생물은 섭리가 아니라 진화의 산물이며, 인간의 모든 생각과 감정은 신체의 전기적·화학적·물리적 작용에 불과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내가 그런 허무한 존재일 리 없어!” 하고 발끈한 당신의 형이상학적 고뇌 역시 월퍼트가 보기엔 뇌세포의 농간이다. 모든 인간을 ‘신자(信者)’와 ‘불신자(不信者)’로 가르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보기에 월퍼트는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66) 옥스포드 대학 석좌교수와 마찬가지로 ‘확신범’이다. 그러나 둘 사이엔 차이가 있다. 도킨스는 “신앙을 버리라”고 대중을 설득하고 선동한다. 그러나 월퍼트는 “나는 내 아들(39)이 열성 기독교 신자가 됐을 때도 말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종교적 믿음은 진화의 산물에 불과하지만, 그 믿음을 채택한 개체에게 막대한 이익을 준다. “종교 활동은 심적 스트레스를 줄이고 행복감과 낙관론을 고취시킴으로써 심장에의 부담 같은 신체상의 스트레스를 경감시키는데 일조”하며, 따라서 종교적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218쪽). 월퍼트는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25세기에도 교회와 절은 동네마다 안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에는 신도, 목적도, 소명도 없다”는 월퍼트에게 “그럼 당신 개인의 인생에도 역시 ‘목적’이 없었냐”고 묻자, 그는 차분하고 명랑하게 “즐겁게 연구하며 보람 있게 살아왔지만, 역시 이 나이가 되고 보니 허무하진 않아도 약간 우울하긴 하지요” 했다.   밀러와 우레이의 실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관심을 쏟으며 집중적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의 기원에 대한 분야이다. 지난 20-30년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소들이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진화론자들이 가정하고 있는 생명체의 자연 발생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실험을 수행해 왔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실험 모델이 바로 밀러(Stanley Miller)와 우레이(H. C. Urey)의 모델이다. 그들은 실험에서 수증기, 암모니아, 메탄, 수소에 불꽃 방전을 시켰고 그 결과 아주 단순한 아미노산이 합성되었다. 비록 이 실험을 통해 유기물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는 있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생산물은 결코 진화론자들이 필요로 하는 자연발생적 생명의 합성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의 실험에서는 모든 것이 잘 계획되고 엄격하게 통제된 조건하에서 그리고 실험실 안에서 이 같은 일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사실과, 놀라운 지성을 지닌 하나님의 개입 없이 개방계에서 이와 똑같은 - 혹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한 -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전혀 성격이 달라 서로 비교할 수조차 없다. 우리가 아무리 잘 봐 주려 해도 밀러와 우레이의 화학적 진화 실험은 결코 적합한 모델이 될 수 없으며, 이들의 진화 실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심각한 반대 의견이 있다. 이 같은 반대 의견들 가운데 몇 개는 다음과 같다. 1. 그 실험에서 사용된 메탄과 암모니아의 조성은 틀림없이 유기 분자들을 생성해 낼 수 있도록 매우 신중하게 선택되었다. 그러나 지구의 초기 대기권 내의 조성이 그렇게 이루어졌음을 보여 줄 수 있는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 2. 지구의 초기 대기가 산화 작용을 감소시키는 환원 대기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지구의 역사를 관찰해 보면 지구가 초기에 산화 작용을 잘 일으키는 대기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상당 수의 증거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3. 메탄/암모니아로 이루어진 대기는 모든 생명체에게 치명적이다. 4. 약한 불꽃 방전으로 번개를 대신하는 가상 실험은 매우 비현실적인 것이다. 또한 실제의 번개는 진화론자들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초기 유기물을 다 파괴시켰을 것이다. 5. 밀러와 우레이의 실험 장치에서 만들어진 분자들은 자기들이 진화해서 만들어 내게 될 생명체에 아주 유해하게 반응한다. 다시 말해 화학적으로 그것들은 생명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다 파괴시켜 버린다. 사실 창조론자들은, 세계의 석학들이 생명의 가장 기본이 되는 비밀을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최첨단의 기술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처음에 어떤 지적 존재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고 믿는다. 생명 창조를 위한 인간들의 어리석은 시도는 모두 헛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수많은 실험을 통해 자기들이 얻고자 하는 관계식에 필요한 화학 물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과정에서 결코 생명체가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즉 유기물의 합성이 생명의 생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논제를 증명해 보려는 시도는 죽은 사람을 살리려고 무단히 노력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사실 이미 죽은 시체는 과학자가 애써서 만들어 내려고 하는 복잡한 성분을 이미 다 포함하고 있다(세포들, 유전자, 효소 등등). 와이송(Wysong)은 이 점을 명백하게 보여 주면서 모든 화학적 진화 실험가들의 희망과 꿈을 좌절시킨다. “실험에 의해 적절한 화학 물질과 화학적 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생명체를 생산한다는 희망은 참으로 이상한 열망이 아닌가? 그것은 헛된 것이다. 지금 죽어가고 있는 그리고 지금까지 죽은 상태로 남아 있는 수많은 조직체들은 인간의 자그마한 노력에 의해 탄생될 수 없는 것 즉 유일하며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엄숙한 증거로 존재하고 있다.” 비교 해부학 비교 해부학이라는 과학은 동물의 물리적 구조를 다루는 학문이다. 진화론자들은 서로 관련이 없는 동물들 사이에 여러 가지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뒤 이것을 생물체 진화의 강력한 증거로 제시한다. 그들은 유사한 구조 - 모양은 같지만 기능은 다를 수도 있는 구조 - 가 동물들이 공통된 조상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조론자들 역시 비교 해부학이 보여 주는 대로 설계와 구조에 있어서 동물들 간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이 문제로 여기는 것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한 진화론자들의 설명이다. 유사한 구조에 대한 성경적 해석은 한 창조자가 친히 계획한 대로 공통의 기본적 청사진에 따른 특별한 창조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 형태는 여러 종류의 조직체가 미리 결정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본적 청사진 내에서 충분히 변화되거나 수정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기본적 형태가 여러 종류의 동물의 기능에 완벽하다면, 각 종류마다 다른 형태나 청사진을 만들 필요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위의 두 가지 설명이 다 주관적 선입견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의 관점이 더 경험적이다. 그 예로 화석 내의 기록과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이 서로 완연하게 다른 여러 종류의 조직체를 보여 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만일 진화론자들의 설명이 맞는다면, 우리는 모든 종류의 동식물에서 그것들의 선조들에까지 이르는 연속적이고도 점진적인 중간 연결고리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백한 단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진화론에 의거한 설명/해석을 반박하며 오히려 창조론자의 관점을 지지해 주고 있다. 사실 창조의 관점은 일반적으로 자연계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유사성과 차이점 모두를 다 예측해 낸다.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의 인본주의 철학을 지지하기 위해 이른 바 유사 구조 혹은 상사 구조라 하는 것들을 사용함으로써 또 다른 어려움을 자초하고 있다. 그 어려움이란 진화론자들이 어떤 동물의 선조 동물의 구조를 만들어 내는 일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동일한 유전자들이 현재에도 그것에 상응하는 동일한 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쉬운 말로 바꾸어 말하면, 어떤 개체의 구조를 만드는 것과 관련된 유전자들은 동일하지만 그 구조 자체는 늘 변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것이 진화론자들에게 큰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수많은 유사 구조/상사 구조들이 전적으로 다른 유전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결론 요약하면, 일반적으로 교과서나 백과사전 등에서 인용되는 유명한 진화의 증거들 - 화석화된 말의 계열, 점나방, 오리너구리, 시조새, 자연 발생법칙, 밀러와 우레이의 실험, 비교 해부학 - 은 제대로 그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가정이거나 잘못된 개념들이다. 진화라는 과정은 과거의 화석 기록으로도 증명된 적이 없으며 오늘날에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진화론자들은 자기들의 의심스러운 가설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어떠한 실험적 증거들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2009-07-17 14:14:49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15 ● 스콧 휴즈 공통적으로 인용되는 진화의 증거들 반박 진화론자들은 자기들의 이론을 유지하기 위해 이른바 진화의 증거라는 것들을 종종 제시하며 이런 예들이 생물체의 진화를 확실히 증명해 준다고 믿는다. 이러한 예들은 진화론을 지지해 주는 통합 작용/과정에 대한 긍정적인 예로서 아주 강력하게 제시되곤 한다. 이제 우리는 이미 교과서 등을 통해 알고 있는 유명한 진화의 증거들 곧 화석화된 말의 계열, 흔적기관, 점나방, 오리너구리, 시조새, 생물발생설, 밀러와 우레이의 실험 및 비교해부학 등 진화론자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인용하는 이른 바 ‘진화론의 증거들’에 대해 면밀히 조사를 하려 한다. 화석화된 말의 계열 진화론자들이 가장 높이 평가해 왔고 그로 인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진 생물체 진화의 ‘증거들’ 가운데 하나는 저 유명한 ‘화석화된 말의 계열’이다. 비록 진화론자들이 화석화된 말의 계열을 두고 그것이 아주 확고히 정립된 사실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속임수로 가득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화석화된 말의 계열 속에 담겨 있는 믿기 어려운 점과 차이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진화의 질서 속에 들어 있는 ‘완전한 말 화석 계열’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2. 이른바 화석화된 말의 계열이라 불리는 계보는 무려 20가지 이상이나 된다. 3. 화석화된 말의 계열은 북아메리카에서 시작되어 유럽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북아메리카로 되돌아온다. 4. 여러 개의 발가락을 갖고 있는 작은 형태의 말로부터 하나의 발가락을 갖고 있는 큰 형태의 말로 순서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여 주는 화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5. 말의 진화 계보에서 가장 초기 단계인 에오히푸스(Ehohippus)는 그것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콘딜라르스(Condylarths)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6. 각각의 말들 사이에는 진화의 중간 단계가 없다. 각각의 말이 화석의 기록 속에 갑자기 등장한다. 7. 발견된 말들의 이빨은 제멋대로 생겼고 벗겨진 형태이며 과도기 형태가 전혀 없다. 8. 두 종류의 근대의 말들(Equus nevadenis, Equus occidentails)이 에오히푸스와 동일한 지층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말들의 진화 개념에 치명적 상처를 입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이론대로 말들이 진화하기 전에 이미 말은 말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이른 바 ‘말의 계열’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서로 다른 말의 종류를 나타낸다. 본질 면에서 볼 때 그것들은 성경이 기록하는 대로 원래 창조된 말 종류이거나 그것들의 변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지 말이 원래부터 뚜렷한 종류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진화했다고 가정하는 데는 아무런 과학적 이유가 없다. 심프슨(George Gaylord Simps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라코데리움(초기의 말)으로부터 에쿠스(현재의 말)로 균일하게 지속적으로 변천했다는 사실이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귀중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연계에서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 이제는 현대 진화론자들조차도 말들의 계보를 가지고 진화론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 증거가 너무 희박하기 때문이다. 흔적기관 흔적기관이란 처음에는 완전히 발달되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했으나 지금은 전혀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진화론자들이 가정하는 동물의 구조/기관을 말한다. 진화론자들은 이런 구조들이 이전에 있었던 진화의 변화를 나타내 준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오랫동안 진화의 증거로 인용해 왔다. 그러나 금방 알게 되겠지만 흔적기관 역시 진화론자들이 확실한 증거도 없이 미리 설쳐서 자기들을 곤경에 밀어 넣은 또 다른 좋은 예에 속한다. 사실 생리학에 대한 지식이 점점 늘어나면서, 진화론자들이 쓸모없다고 가정한 흔적기관들이 실제로는 아주 유용하며 어떤 경우에는 매우 필수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 예를 들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교과서들이 갑상선과 뇌하수체를 포함한 약 200가지 이상의 신체 기관들을 흔적기관으로 목록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관과 구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이해도가 증가해감에 따라 그들이 쓸모없다고 판정한 구조와 기관의 목록이 오늘날에는 크게 감소하고 있다. 그 결과, 이전에 흔적기관으로 분류된 대부분의 기관/구조가 생명체가 살아가는 동안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지금은 알려져 있다. 또한 흔적기관에 대한 논쟁 속에 들어 있는 치명적 결점이 최근의 유전학에 의해 노출되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흔적기관이라는 개념은 구조/기관의 발달과 상실이 필요에 의해 결정된다는 라마르크의 이론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기관 및 구조 등은 염색체 혹은 DNA 내의 유전자 변화에 의해서만 수정될 수 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기관/구조가 현재 사용되고 있느냐 사용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은 결코 후대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흔적기관이라는 개념이 맞는다 하더라도 이 개념은 여전히 진화론을 지지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흔적기관이란 반드시 어떤 구조나 기관이 더 나은 것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더 나쁜 것으로 퇴화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은, 어떤 피조물이 기능을 잘 갖춘 단위가 되기 위해 초기 발생 조직 등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런 조직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같은 사실은 생물체 진화를 반대하는 강력한 논제로 사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흔적기관이라는 개념은 결코 생물학적으로 변호할 수 없는 개념이며 옛날에 진화론자들이 과학적 사실들을 일시적으로 덮어버리기 위해 상상 속에서 꾸며낸 그릇된 개념이다. 따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런 개념을 완전히 내다버려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점나방 일반적으로 현대 신다윈주의 지지자들은 진화를 증명하는 놀라운 예로 영국의 점나방 사례를 인용한다. 점나방은 항상 밝은 색, 중간색 그리고 어두운 색을 띤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산업 혁명 이전에는 나무의 줄기들이 밝은 색이었기 때문에 밝은 색의 나방들이 자기 몸을 잘 위장할 수 있었다. 반면에 어두운 색의 나방들은 쉽게 발견되어 새들의 먹이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어두운 색의 나방들은 전체 나방들 가운데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산업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대기의 공해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나무줄기 역시 점점 어둡게 되었다. 그로부터 45년 뒤에 상황은 역전되고 말았다. 예를 들어 맨체스터시 주변의 점나방들 가운데는 95%가 어두운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정말로 진화를 증명한단 말인가? 물론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 과정은 결코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 내지 않았으며 더욱 복잡하고 조직화된 결과를 가져오지도 않았다. 사실 어두운 색깔의 나방들은 항상 존재해 왔다. 다만 공기의 오염이 단순히 어두운 색깔의 나방들과 밝은 색깔의 나방들의 숫자만을 변화시켰을 뿐이다. 점나방의 경우는,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이른 바 획기적인 어떤 변화가 나방들 안에 발생한 것을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니며 단지 자연 선택의 원리를 설명해 줄뿐이다. 1971년판 「종의 기원」의 서문에서 매튜스(L. Harrison Matthew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점나방 사례는 자연 선택 혹은 적자 생존이 실제로 유효함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례는 결코 진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색깔에 따른 구성 비율은 변할 수 있지만 그 나방들은 처음부터 점나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교과서와 백과사전들은 계속해서 진화론을 지지하는 발전/진보의 예로서 점나방을 인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국제야생동물 백과사전」(The International Wildlife Encyclopedia)은 점나방의 경우야말로 ‘사람이 목격한 것 중 가장 놀라운 진화론적 변화’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진화론자들이 자기들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라면 그들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진화를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리너구리 진화론자들은 오리너구리가 포유동물과 조류 사이의 진화를 보여 주는 중간연결고리라고 주장한다. 오리너구리는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고 있는 짐승으로 부드러운 털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포유동물처럼 새끼들에게 젖을 준다. 그런데 새끼 오리너구리는 파충류처럼 알에서 부화하며 오리와 같이 물갈퀴가 있는 다리와 넓적한 부리를 갖고 있다. 또 음식을 옮기기 위해 턱에 주머니를 가지고 있으며 뱀의 독이빨처럼 독이 있는 발톱을 뒷다리에 가지고 있다. 아주 놀랍게도 오리너구리는 돌고래처럼 반향을 이용해서 위치를 찾는다.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오리너구리는 모습과 특징에 있어서 조류와 포유류의 특성을 가진 이상한 혼합체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특징들이 이상하게 조합되었다는 사실이 오리너구리가 진화의 중간 단계에 있는 과도기 동물임을 보여 준단 말인가? 창조론자들은 단순히 오리너구리라는 피조물이 창조적 설계에 의해 모자이크 식으로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진 모습으로 만들어진 짐승이라고 주장한다. 오리너구리의 예가 서로 다른 관점을 지지해 주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리너구리의 기원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을 부인할 수 있는 몇 가지 합당한 이유가 있다. 1. 오리너구리 화석들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오리너구리들과 똑같다. 2. 알과 유선(乳腺)의 복합적 구조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발달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이것들은 자궁이나 유선의 성장과 기원 등에 대해 아무런 해답도 제공하지 않는다. 3. 알을 낳는 오리너구리보다 포유동물의 특성을 더 많이 지닌 짐승들의 화석이, 진화론자들의 애용물인 지질 주상도에서, 오리너구리가 발견된 지층보다 훨씬 더 낮은 지층에서 발견된다. 진화론자들의 이론에 따르자면 저등한 짐승 즉 진화가 덜 이루어진 짐승일수록 그 화석이 지질주상도의 하부 지층에서 발견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위의 세 번째 사실인 이와는 상반되므로, 오리너구리는 복합적 특징을 갖도록 특별하게 설계된 짐승이며 그 자체로 독특한 형태의 동물이라고 우리는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오리너구리는 진화의 과도기 형태가 아니고 오히려 창조주 하나님의 예술적 기교와 유머 감각을 잘 나타내주는 멋있는 예인 것이다. 시조새 진화론자들은 조류가 파충류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이 이 두 계통의 생물체 사이의 과도기 중간연결고리로 제안하는 유일한 화석이 바로 저 유명한 시조새 화석이다. 진화론자들은 파충류로부터 조류가 되기까지 약 8,000만 년 정도의 진화 기간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비록 진화론을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긴 기간 동안에 서로 다른 이 두 계통의 생물체 사이의 중간연결단계로 단 한 개의 화석만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가정하는 것처럼 파충류 선조로부터 나와 ‘비행’(飛行)이라는 놀라운 진화 단계를 거친 수백만/수천만 개의 중간 형태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반은 비늘로 그리고 반은 깃털로 이루어져 있어서 높이 평가를 받아야만 할 조류/파충류 중간 단계 화석 표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만일 파충류로부터 조류로 진화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무엇보다도 수없이 많은 과도기 형태가 화석의 기록으로 객관적으로 보존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더욱이 시조새가 파충류와 조류의 특징을 겸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논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화석학자들은 시조새가 파충류와 조류사이의 중간 형태가 아니라 100% 확실한 새라고 분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조새의 특징이 진짜 새에서는 나타나지만 많은 파충류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리너구리가 포유동물과 조류 사이의 중간연결고리가 아닌 것처럼 시조새는 결코 파충류와 조류 사이의 중간연결고리가 아니다. 파충류로부터 조류로 진화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데는 참으로 중요한 난제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폐와 관련이 있다. 파충류의 폐는 수백만 개의 작은 공기 주머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새들의 폐는 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충류의 폐에서 조류의 폐로 조금씩 진화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반은 관으로 그리고 나머지 반은 공기주머니로 이루어진 폐를 소유한 과도기 생물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현대 조류들의 화석이 시조새 화석이 발견된 바위와 동일한 바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 당시에 이미 새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며 동시에 시조새가 조류의 시조가 아님을 확고히 보여 준다. 그러므로 시조새는 진화를 증명하는 과도기 중간연결고리가 될 수 없다. 결론 온 세상의 아름다운 동식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낸다. TV에서 방송되는 동물의 왕국이나 동식물 다큐멘터리를 보기 바란다. 아니면 가까운 수족관에 가서 상어나 열대어 등을 보기 바란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여기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 양심이 마비되어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얼룩말 사진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지 못한다면 얼마나 심령이 메마른 것일까?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겼다고 천진한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분들은 정말로 대단한 양심을 가진 분들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 주변의 만물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 모두가 하나도 빠짐이 없이 우리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보이니 말도 없고 언어도 없으며 그것들의 음성도 들리지 아니하나 그것들의 줄이 온 땅에 두루 나아가고 그것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 그분께서 해를 위하여 하늘들 안에 장막을 세우셨으므로 해는 자기 침소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경주하려는 힘센 자 같이 기뻐하는도다. 해가 하늘 끝에서부터 나아가며 그것의 순환 회로는 하늘 끝들에까지 이르나니 해의 열기에서 숨을 것이 없도다(시19:1-6).
2009-07-17 14:10:58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14 ● 스콧 휴즈 인류학 인류의 기원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과 진화를 믿는 사람의 견해는 어떤 다른 주제보다도 이 중요한 주제에 있어서 가장 크게 일치하지 않고 있다. 과연 사람은 단순히 진화라는 무작위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생명체인가? 아니면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창조자가 직접 만든 특별한 창조물인가? 죄, 구원, 책임, 공의, 영원한 심판 등의 개념과 대부분의 성경의 원리는 어떤 인생관을 택하느냐에 따라 개개인에게 참으로 중요할 수도 있고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진화론자들은 지금부터 약 3천만 년에서 7천만 년 전에 사람과 유인원 모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공통의 선조로부터 진화해 왔다고 믿는다. 이러한 주장을 떠받들기 위해 그들은 화석화된 많은 뼈와 치아 등을 그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반면에 창조론자들은 사람은 단지 수천 년 전에 - 좀 더 정확하게는 약 6,000년 전에 - 초자연적으로 창조되었고 다른 창조물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라고 주장한다(창세기 1장; 고전15:39).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자들이 인용하는 화석들이 인간의 진화 단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런 화석들이 실제로는 유인원도 아니며 사람도 아닌 그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런 화석 유물들이 사람과 유인원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어떤 미지의 중간 동물/인간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전 세계의 여러 박물관을 가보면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근거하여 사람의 진화를 설명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매우 인상적인 진열물이 많이 있다. 사실 이러한 전시품이 아주 적은 양의 조각 증거들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화석 전시회를 가 보면 진화론자들은 사람의 진화가 아주 정립이 잘 된 확고한 사실로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80년에 미국의 ‘자연사 박물관’은 사람의 진화에 대한 영구 전시관을 건립했다. 진화론자들이 사람의 선조로서 제시한 동물에 대하여 직접적인 화석의 증거가 하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회에서 그들은 사람이 짐승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강하게 전달했다. 소위 사람과 유인원 사이의 중간 연결 고리로 불리는 ‘원인’(ape-men)은 그 화석이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어 왔으며 그 예로는 ‘네브래스카인’(Nebraska Man), ‘자바인’(Java Man), ‘북경원인’(Peking Man) 등이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람의 진화에 대한 진실성을 평가하기 위해 ‘화석 원인’(fossil ape-man)이라 불리는 것들 가운데 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몇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네브래스카인 네브래스카인은 1922년에 미국 중서부의 네브래스카주의 제3기 최신세 지층 속에서 쿡(Harold Cook)에 의해 발견된 화석 유물이다. 진화론자들은 이 유물이 백만 년 전에 살은 사람과 유인원 사이의 ‘잃어버린 중간연결고리’라고 대대적인 선전을 했고 그 결과 이 유물에 대하여 수없이 많은 보고서가 쏟아져 나왔다. 1925년 테네시주 데이톤에서 있었던 저 유명한 ‘스코프스의 진화 재판’에서 진화론자들은 네브래스카인이라는 화석 유물을 진화의 증거로 제시했다. 그 때에 브라이언(Willian Jennings Bryan)이라는 신실한 사람은 네브래스카인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 - 실제로는 다 추정한 사실들임 - 을 가지고 자기를 깜짝 놀라게 한 ‘여러 명의 위대한 과학 전문가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브라이언은 실로 그들의 증거가 너무 희박하다는 것과 그 증거의 연구를 위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외에 달리 답변할 것이 없었다. 그러자 아주 자연스럽게도 그 ‘전문가들’은 브라이언을 비웃고 조롱했다. 도대체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로 군림하는 과학의 권위자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진화론자들이 네브래스카인의 정체를 보여 주기 위해 제시한 명확한 과학적 증거란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들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는 한 개의 이빨이었다. 실로 그들은 단 한 개의 이빨만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한 개의 이빨을 조사했고, 그 뒤에 그것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았던 선사 시대의 종족에 대한 긍정적 증거라는 평을 내렸다. 이것은 소위 세계의 최우수 과학자라 불리던 진화론자들이 자기들의 엄청난 상상력을 동원하여 꾸며낸 비극적 사실을 보여 주는 극명한 예인 것이다. 스코프스 재판 이후 몇 년이 지난 뒤에 그 첫 번째 이빨이 나왔던 동물의 전체 뼈대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진화론자들로 하여금 네브래스카인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는 일에 주춧돌 역할을 했던 그 이빨이 멸종된 어떤 돼지 종류의 이빨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이다. 브라이언을 무식한 사람이라고 비웃던 ‘과학의 권위자들’은 자기들의 상상력을 무한정으로 동원하여 돼지의 이빨로부터 인류의 조상을 창조해 냈던 것이다! 소위 지식층이라 불리는 과학계 전체가 인류의 조상에 대해 이처럼 주목할 만한 주석을 내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던가! 그런데 과연 이런 사실이 진화론 과학자들을 당혹케 했던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렇게 거짓으로 발견된 모순은 공개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소위 과학 전문가들이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을 얼마만큼 신뢰해야만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네브래스카인과 비슷하게 역시 단 한 개의 이빨에 근거를 둔 화석 유물은 ‘남서부 콜로라도인’(South-West Colorado Man)이다. 이것 또한 보통 사람들을 교묘히 속이거나 위협하는 데 사용되어 왔지만 지금은 이 특별한 이빨이 실제로 말의 이빨이었음이 밝혀졌다! 때때로 하나님을 떠난 진화론 과학자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참으로 엉뚱한 결과를 창조해 내곤 했다. 그들에게 사람의 것이 아닌 어떤 이빨 한 개를 주어 보라. 그러면 그들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선사 시대의 인류의 종족을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자바 원인 모든 원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자바 원인 즉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 직립 원인)이다. 자바 원인은 열성적 진화론자였던 두보이(Eugine Dubois) 박사가 1891년에 발견한 것이다. 두보이 박사가 발견한 것은 두 개골 윗부분의 작은 조각과 왼쪽 대퇴골의 한 부분 그리고 어금니 등 모두 세 개였다. 이 증거들은 확실히 이전의 다른 어떤 증거보다 실제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체의 매우 적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이 유물들은 동일한 장소에서 함께 발견된 것이 아니고 약 20m 반경의 범위 안에서 수집되었던 것이었다. 또한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증거들이 동시에 발견된 것이 아니라 약 1년간의 기간을 통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유물들이 멸종된 다른 동물들의 뼈들이 묻혀 있는 오래된 강의 배사 구조 안에 함께 묻혀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자바 원인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은 자바 원인이 지금부터 약 75만 년 전에 살은, 사람과 원숭이 사이의 중간연결고리라고 조심스레 확신하고 있다. 이 ‘과학 전문가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몇몇 조각이 선사 시대 인류의 전체적 모습을 재구성하는 데 충분한 정보를 준다고 믿게 하려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도 몇 개의 문제점이 있다. 예를 들어, 도대체 그렇게 빈약한 증거들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 전체를 완전하게 재구성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전문가들은 도대체 그 모든 조각이 같은 동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도대체 화석화되지도 않은 이 뼛조각들이 흩어지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자!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심지어 ‘화석 전문가들’조차도 이 뼛조각들의 정체에 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사실 그 때에 발견된 조각들을 평가하기 위해 모인 24명의 유럽 과학자 중에서 10명은 그 조각들이 유인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했고 7명은 그것들이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했으며 나머지 7명은 그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원숭이 사시의 중간연결단계에 속한 존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이 뼛조각의 발견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모순과 분열이다. 유명한 베를린의 버르초우 교수는 “이 뼛조각들이 다 한 생명체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것을 발견한 두보이 박사마저도 나중에는 자신의 학설을 수정했다. 그는 그 뼈들이 긴팔원숭이에게 속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일반 대중 가운데 박물관 전시회를 찾아보거나 교과서를 읽음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그렇게 유명한 자바 원인이라는 증거가 애매모호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전시회나 교과서들이 한결같이 너무 독단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진화했다는 주장을 펼 때와 비슷하게 진화론자들은 자바 원인 역시 이미 잘 정립된 과학적 사실이라고 선전하고 다님으로써 이 유물에 대한 매우 의심스러운 본질을 숨겨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자바 원인에 관해 밝혀두어야 할 한 가지 주의 사항이 있다. 자바에서는 1926년에 또 다른 피테칸트로푸스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물론 진화론자들은 이것 또한 사람과 원숭이 사이의 확실한 중간연결고리라고 간주했으며 곧장 대단한 발견으로 공표 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은 이미 멸종된 어떤 코끼리의 무릎 뼈로 확인되었다. 필트다운인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필트다운인의 유적은 1912년에 아마추어 화석연구가 도우슨(Charles Dawson)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는 몇 개의 뼛조각과 이빨 및 원시 도구 몇 점을 만들어 놓고는 마치 자신이 그것들을 영국 서섹스주의 필트다운(Piltdown, Sussex, England)에 있는 자갈 단지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유물들을 영국 박물관의 저명한 화석학자였던 우드워드 박사에게 들고 갔다. 늘 그러했듯이 인류학자들은 곧 바로 이 유물들이 지금부터 약 50만 년 전의 것으로 인정해 버렸다. 여러 박물관과 책의 선전을 통해 그 유물이 아주 위대한 발견인 ‘필트다운인’(Piltdown Man)으로 알려지자 이 유물에 대해 수많은 문헌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5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필트다운인을 주제로 해서 박사 본문을 썼다. 확실히 이번의 발견은 시간의 시험을 다 견디어 내고 진화론을 확고히 증명해 줄 수 있는 과학적 사실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을까? 1956년 10월, 도우슨의 발견한 것이 거짓으로 들통 날 때까지 모든 것은 참으로 순조로워 보였다. 그런데 「인기 과학」(Popular Science)이라는 월간지에서 발췌한 ‘놀라운 필트다운 사기극’(The Great Piltdown Hoax)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지에 실렸다. 불소 흡수에 기초한 새로운 방법을 사용해서 그 뼈들의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필트다운인의 뼈들이 다 거짓으로 판명나고 말았다. 더욱 정밀하게 조사한 결과 필트다운인의 턱뼈는 그 유물이 발견되기 겨우 5년 전에 죽은 원숭이의 것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사실 필트다운인의 진짜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한 장본인은 그 이빨들을 줄로 다듬었고 뼈와 이빨은 다 칼륨의 이염화물로 변색시켜 버렸다. 따라서 필트다운인은 속임수에 기초한 완전 사기극이었으며 그것을 확실하게 지지했던 모든 ‘과학 전문가들’은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보우덴에 의하면, 필트다운에서 그 유물들이 들어 있던 구덩이 속에 가짜 화석을 집어넣은 장본인은 샤르뎅이라고 한다. 사실 샤르뎅이라는 인물은 기독교 신앙과 진화론을 조화시키기 위해 몇 권의 철학 서적을 저술한 바 있는 열렬한 진화론자였다. 그러나 자기가 신봉하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음으로 인해 그는 심히 분노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잃어버린 중간연결고리를 스스로 구성함으로써 진화론을 도와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이런 사기극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같이 사기극으로 이루어진 필트다운인이 마치 확고한 과학적 사실로서 지난 수십 년간 주요 교과서들에 실리고 많은 연구자들이 에에 대해 연구를 수행했으며 주립/국립 박물관들에서 진화의 증거로 전시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진화론자들이 ‘확고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진화 문제는 가까운 미래에 과연 어떤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인가? 또 다시 우리는 ‘전문가들이 내세우는 과학적 증거들’의 정직성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우둔하게 되었다.”(롬1:2)고 기록한 성경의 말씀이 얼마나 합당한 말씀인가! 네안데르탈인 네안데르탈인은 20세기 초에 독일 뒤셀도르프 근처 네안데르탈 계곡에 있는 동굴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존재이다. 이것은 반직립인으로 원통형 가슴을 갖고 있으며 아주 잔인한 존재로 사람과 원숭이 사이를 연결해 주는 중간연결고리로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다른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을 발견하고 연구를 수행한 결과 그는 완전한 직립 보행인이었고 더욱이 완전한 인간이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그의 두개골 용적은 현대인의 두개골 용적보다 무려 13%나 더 컸다. 진화론자들은 두개골의 용적이 크면 클 수록 더 많이 진화한 것으로 평가하는데 그런 차원에서 보면 네안데르탈인은 현대인보다 더 많이 진화한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그릇된 개념은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생겨났다. 첫 번째 요인은 네안데르탈인을 재구성한 인류학자들이 이미 진화론에 의해 세뇌를 당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요인은 처음에 평가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이 관절염과 구루병(곱사등)에 걸려 다리를 저는 사람의 뼈였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과학자들조차도 네안데르탈인을 완전한 사람인 호모사피엔스(Homosapiens)로 분류하고 있다. 루시 최근 들어 사람의 진화에 대한 연구는 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ines)라 하는 몇몇 화석 집단에 대해 이루어져 왔으며 특히 전체 유골 중 40%가 완전하게 남아 있는 루시(Lucy)라 명명된 표본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루시는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진행된 연구 조사를 통해 이디오피아의 아파르 지역에서 요한슨(D. C. Johanson)이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1976년 12월호) 잡지에서 요한슨은 이렇게 주장했다. “대퇴골의 각도와 및 대퇴부와 무릎을 연결해 주는 무릎 관절 부분의 납작한 표면은 루시가 두 다리로 걸었음을 증명해 준다.” 그러나 루시가 직립 보행인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무릎 관절이 지층으로부터 70m 이상이나 내려간 곳에서 그리고 다른 뼈들로부터 무려 3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대퇴부의 무릎 관절 끝 부분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으므로 사실상 요한슨의 결론은 순전히 추측에 불과한 것이었다. 해부학자인 옥스나르드는 뼈대의 상관관계를 컴퓨터로 분석한 결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직립 보행을 하지 않았으며 결코 사람과 같은 식으로는 걷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침팬지가 하루에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서서 걸어 다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따라서 루시가 두 발로 걸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합당한 과학적 증거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예상하건대, 루시와 그 친척들은 아마도 유인원의 일종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시가 있기도 전에 이미 사람이 직립 보행을 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 있다. 카나포이인(Kanapoi hominid)과 카스테네돌로인(Castenedolo Man)이 그 증거들이다. 만일 사람이 루시 시대 이전에 직립 보행을 했다면 루시는 진화론자들의 주장하는 이른 바 ‘사람의 진화론적 조상’으로서의 자격을 분명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요약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찾는다. 그런데 이 행복의 시작은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데서 시작된다. 지금까지 많은 인본주의자들이 창조의 단순한 사실을 왜곡하고 무시했으나 이 세상 자연만물은 아주 단순하게 또 확실하게 모든 것이 설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무궁한 진리임을 다시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숨은 그의 콧구멍에 있나니 어떤 점에서 그를 수에 넣어야 하겠느냐?(사2:22) 참으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어다(롬3:4).
2009-07-17 14:08:47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13 ● 스콧 휴즈 진화론의 모순 이론 진화론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생명체들의 진화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어떤 절차나 과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비록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과정이 제안되기는 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유기체 진화에 대한 만족스러운 구조를 제공하지 못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어떻게 진화가 일어났는가를 설명해 주는 4개의 주요한 진화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라마르크의 진화설 ‘획득된 형질의 유전 이론’(용불용설)으로 알려진 이 이론은 라마르크(Jean Baptiste de Lamarck, 1744~1829)에 의해 처음 제안된 것으로 유기체 진화에 관한 최초의 체계화된 이론이었다. 이 이론의 기본 전제는 계속해서 사용하는 기관은 점점 발달하고 동시에 쓰지 않는 것은 점점 퇴화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필요에 의해 얻게 되는 특성들은 결국 새로운 종으로 진화될 때까지 계속해서 후대로 계승된다는 것이다. 라마르크는 기린의 긴 목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발달되었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 그는 기린이 나무의 잎사귀들을 먹으며 지속적으로 목을 뻗어 높은 곳에 있는 잎사귀들을 먹으려는 과정을 통해 기린의 목이 가늘고 길게 발달하게 되었다고 믿은 것이다. 이러한 특성들을 유전으로 계승받은 후손들 역시 스스로 이것들을 개선하여 자기들의 후손들에게 넘겨주고 그래서 결국 그런 특성을 갖는 후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자손에게 유전될 수 있는 변화는 오직 유전자의 변화와 그들이 갖고 있는 DNA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대한 근본적인 오류가 발견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이 이론은 거부를 당하게 되었고 그 결과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획득한 특성의 계승 이론’(용불용설)은 과학계 전체에 의해 자연스레 버림을 받게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 이것은 1859년에 다윈(Charles Darwin)에 의해 체계화된 진화론의 구조이다. ‘자연 선택설’(Theory of natural selection)로 알려진 이 이론은 적자생존의 개념을 핵심으로 한다. 다윈은 어떤 생명체가 먹이와 물과 집 등을 얻기 위해 경쟁하며 생존을 위해 계속되는 투쟁을 하고 있다는 점을 관찰했다. 그는 생명체들 가운데는 다양한 것들이 존재하므로 보다 우수한 특성을 지닌 것만이 잘 싸우게 되고 그 결과 많은 자손을 만든다고 추론했다. 다윈은 기린의 긴 목이 생존을 위한 투쟁의 결과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더 긴 목을 가진 기린이 음식물 얻기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고 따라서 자신들과 비슷한 자손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더 이상 과학자들이 추측하고 있는 생명체의 진화를 설명해 주는 유일한 구조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자연적 선택은 적자의 생존을 설명하는 것이지 결코 적자의 출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윈의 저서인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과 「사람의 혈통」(Descent of Man) 안에 무려 800번이 넘게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돌연변이 이론 이것은 1901년에 드브리스(Hugo de Vries)에 의해 제안되었으며 1866년에 유전학자 멘델(Gregor Mendel)이 진행한 연구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완두콩 꽃을 사용한 멘델의 역사적 실험은 다윈의 진화론의 근본적 오류를 드러내 주었다. 원래 빨간색과 흰색의 꽃을 내는 모(母)식물을 교배해서 생긴 제2대 빨간색 꽃식물을 이종 교배했을 때, 멘델은 빨간색 꽃 뿐 아니라 하얀색 꽃도 얻을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윈은 모 식물이 하얀 특성을 소유하지 않았으므로 하얀색 꽃이 생긴 것은 진화론에 따른 새로운 발전/진보라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멘델은 이러한 특성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사실 그것은 모 식물의 세대 안에서 우성의 유전자(빨간색)에 의해 일시적으로 감추어진 채 열성의 성질(흰색)로 항상 존재했던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새로운 사실들을 직시하고 그에 따라 주장하는 바를 적당히 바꾸어야만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아주 편리하게도 유전자가 돌연변이의 과정을 통해 완벽하게 새로운 형태로 변화할 수 있다는 설이 제안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돌연변이 이론인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새로운 종은 유익을 끼치는 돌연변이(DNA 교체의 기회)의 결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자들은 이러한 과정 역시 유기체의 진화를 설명하는 유일한 구조로 인정하지 않는다. 신다윈주의 사실 현대 진화론들은 다윈의 사고를 수정하고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신다윈주의라 불린다. 이러한 형태의 과정을 제안하는 현대 과학자들은 유기체의 진화가 자연 선택(다윈주의), 돌연변이 그리고 지질학적 연대 등의 종합적 효과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신다윈주의자들은 돌연변이라는 과정이 진화에 필요한 잡종들을 제공하며 굉장히 긴 시간을 거쳐 자연 자체가 자기의 뜻대로 그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돌연변이나 자연 선택 하나만으로는 자기들이 가정하는 생명체의 진화 과정을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비록 이것이 가장 최근의 진화 이론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아주 기본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럴듯한 진화의 구조로는 부적격하다. 예를 들어, 만일 돌연변이가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 정말로 필요했다면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생명체의 생존 능력을 증대시켜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돌연변이는,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불행한 생명체에게 비록 치명적이지는 않다 해도, 거의 대부분(99.99%) 해로운 것으로 밝혀졌다. 다시 말해, 돌연변이는 더 약하고 살아가기에 불리한 생명체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돌연변이에 의해 생긴 존재들은 생존을 위해 싸우기가 어렵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 진화론의 가정과 희망적 기대에 회복할 수 없는 큰 타격을 주는 것이다. 또한 돌연변이는 기린의 긴 목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목 길이의 작은 차이는 음식의 차이나 혹은 목의 길이를 제어하는 여러 가지 우성 유전자수의 변화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이미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돌연변이는 단지 해로울 뿐 아니라 또한 매우 드물게 일어난다. 그것은 DNA 분자가 1,000만 번 복제될 때 겨우 한 번 일어난다. 다시 말해, 돌연변이는 무작위로 일어나며 방향성이 없어서 예측할 수도 없다. 또한 유기체 진화에 관한 개념이 가능하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확실히 기대할 수 있는 어떤 의도된 설계나 계획 등을 따르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단순한 무작위적 돌연변이는 체계화되어 있고 늘 방향성을 띠고 있는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그 안에는 지적 설계를 위한 중요한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돌연변이의 99.99%가 해롭고 매우 드물며 완전히 무작위적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신다윈주의자들은 이러한 어려움들이 지질학적 연대와 자연 선택에 의해 다 해결된다는 ‘초특급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진화에 의해 만물이 형성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풍부하고도 알맞은 돌연변이들이 생산되고 선택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고 믿는다. 비록 우연의 과정들에 의해 어떤 것이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연에 의해 창조된 것의 대부분이 순간적으로 소멸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연한 과정에 의해 지금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그와 똑같은 객관적 확률에 의해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화론자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 실로 유기체 진화를 구원시켜주는 구원자가 아니라 그것을 대적하는 큰 원수라는 사실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토론에서 이미 배웠듯이, 시간이 해 주는 일은 분해와 붕괴이지 결코 종합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자연 선택의 과정을 외쳐대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도 신다윈주의자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부서질 수밖에 없는 이론을 지탱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연 선택은 단지 적합한 생명체의 생존과 연속성을 보증하고 동시에 적합하지 못한 생명체는 파괴시키는 전통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새로운 생명체를 생산하는 혁신적 과정이 아니며 단지 이미 존재하는 구조체나 생명체를 보존하는 역할만 할뿐이다. 결론적으로,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과 시간의 구조를 조합한 신다윈주의는 진화론자들이 가정하는 생명의 진화 과정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 돌연변이는 항상 이전보다 덜 적합한 생명체를 만들어 낸다. 자연 선택은 적합하지 못한 생명체를 파괴한다. 시간은 죽음과 붕괴만 가져온다. 따라서 이 세 가지로 구성된 진화의 구조는 어떠한 긍정적인 것도 낳을 수 없는 삼중 부정 구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진화론자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근거나 혹은 설명도 없이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람이 믿는 비과학적인 상상을 계속해서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신 즉 사탄이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을 골라 그들의 마음을 멀게 한 것은 참으로 사실이 아닌가?(고후4:4) 생물 발생설 진화의 현대적 개념은 16세기 과학자들이 주장한 자연 발생설 즉 죽어서 부패한 물질로부터 생명체가 자연히 생겨났다는 이론이 세련되게 단장되어 복귀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연 발생설의 지지자들은 피상적인 관창을 통해 여러 가지 ‘흥미로운’ 것들 즉 바나나 껍질에서 과일 파리가 나오고 거름에서 구더기가 나오고 죽은 송아지에서 벌이 나왔다는 것 등과 같은 것을 보았고 그 결과 이 같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자연 발생설은 레디(Redi, 1688), 스팔란자니(Spallanzani, 1780), 파스퇴르(Pasteur, 1860)와 버어쵸우(Virchow, 1858) 등과 같은 생물학자들의 신중한 연구에 의해 논박되었다. 이들은 피상적 현상을 넘어선 아주 조심스런 실험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어떤 물질이 미리 살균되어 가능한 생물학적 오염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면 그것으로부터 어떤 생명체도 발생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그러므로 자연 발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과 또 다른 이들의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생물발생에 대한 법칙이 정립되게 되었다. 생명은 오직 먼저 존재하는 생명체로부터만 나오며, 오직 자신의 종류만을 영원토록 존속시킬 것이다. 분명히, 이 법칙은 자연 발생설과 생명체의 종류의 변형이란 있을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학생들이 먼저 자연 발생설의 반증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배운 뒤 곧바로 생명체가 나타나는 이유가 진화론의 구조 즉 자연 발생이라는 사실을 배운다면 그것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반면에 생물 발생설의 법칙은 성경적 창조주의와 일치하며 여기서 우리는 모든 생명은 먼저 존재한 생명으로부터 나오고 스스로 같은 종류만을 재생산할 뿐이라고 배운다. 창조론자들은 또한 이 법칙이 창조주의 존재에 대한 간접적 증명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결국, 생명이 없었던 처음 지구는 오직 먼저 존재했던 생명 되신 창조주로부터만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요약 진화론자들을 당혹케 만들 정도의 복잡하고 다양하고 아름다우며 질서 있는 생명체들이 보여 주는 놀라울 정도의 완벽함은 생명체에 대한 진화론자들의 설명/해석을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생명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의태, 공생, 기생 등의 놀라운 상호 관계들은 분명하게 계획된 것이며 지능적 설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놀랍도록 정밀한 이주 능력과 그 밖의 다른 본능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진화론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DNA 분자의 복잡함은 오직 특별한 창조의 관점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유기체 진화에 관한 이론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생물학의 일관되고 압도적인 증거는 성경적 창조주의를 지지하고 있으며 신화와 동화와 같은 진화론을 확실하게 논박하고 있다. 한때 다윈은 자신의 신학이 ‘단순한 혼란’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인한 적이 있다. 이제는 이 같은 그의 진술이 그의 생물학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이 아주 확실해졌다.
2009-07-17 14:07:22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12 ● 스콧 휴즈 창조의 생물학적 증거 II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특별 창조의 예들을 제시하려 한다. 폭격수 딱정벌레 당신은 가끔 아주 작은 상자 속에 깜짝 놀랄 만한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주의해 본 적이 있는가? 작은 폭격수 딱정벌레가 바로 이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폭격수 딱정벌레는 훌륭한 방어 시스템을 가진 매우 작은 곤충이다. 적의 공격을 받을 때면, 이 활발한 작은 딱정벌레는 언제나 자극적이고도 불쾌한 가스를 폭발시킨다. 이 가스의 온도는 무려 100℃나 되며 그것은 꼬리에 있는 두 개의 관으로부터 나와 그를 공격하려 했던 자의 불행한 얼굴 위에 뿜어진다. 독일의 화학자 쉴트크넥트(Herman Schildknecht)는 폭격수 딱정벌레가 어떻게 이러한 훌륭한 화학적 묘기를 연출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딱정벌레가 두 개의 매우 위험한 화학물질(사진 현상액으로 쓰이는 하이드로퀴논과 과산화수소)을 혼합해서 자기의 폭약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두 개의 화학물질 외에도 이 영리한 작은 딱정벌레는 ‘억제제’로 알려진 또 다른 형태의 화학 물질을 만든다. 이 ‘억제제’는 화학 물질들이 분사되는 것을 막아 주며 딱정벌레가 언제까지라도 이 화학 물질들을 안전하게 보관 할 수 있게 해 준다. 만일 딱정벌레에게 개구리 같은 적이 접근하면 그는 언제든지 저장된 화학물질을 두 개의 연소관으로부터 마치 안개처럼 분출시킨다. 그리고 아주 정확한 시기에 다른 화학 물질(반억제제)을 첨가한다. 이 ‘반억제제’는 억제제를 무력화시키며 불쌍한 적의 얼굴에서 정확한 시기에 격렬한 폭발이 일어나게 한다. 이런 불가사의하고도 복잡한 기능이 수백만 년을 거쳐 점차적으로 진화될 수 있겠는가? 진화론자들은 종종 기가 죽은 채 ‘그럴 수 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 대해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고 생각해 본다면 누구라도 진화론의 모순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진화론의 ‘견해’대로 수천 세대의 딱정벌레들이 치명적인 진화론 실험 속에서 이처럼 위험한 화학 물질들을 잘못 배합하기도 하고 제대로 배합하기도 하는 시행착오 끝에 결국 우연하게 신비로운 배합 공식을 개발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과연 그것들은 어떻게 억제제를 개발했을까? 억제시키려는 두 개의 화학 물질을 당신이 이미 갖고 있지 않다면 억제제의 개발 자체가 전혀 필요 없는 것이다. 반면에 만약 당신이 억제제 없이 이미 두 개의 화학 물질을 가지고 있다면 때는 이미 늦어서 당신은 이미 스스로 폭파되고 말았을 것이다. 명백히 이러한 화학 물질과 억제제의 조합은 어떤 지적 예견과 계획을 떠나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딱정벌레가 어떻게 해서든지 필수적인 억제제와 두 개의 화학 물질을 동시에 개발했다고 가정하자. 이런 결과로 얻게 된 용액은 무해한 혼합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딱정벌레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한다. 그것이 딱정벌레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기 위해서는 반억제제가 반드시 그 용액에 첨가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또 다시 수천 세대 동안 이 가련한 딱정벌레들은 어떤 특별한 이유나 이익도 없이 반억제제가 우연히 완성될 때까지 단지 그 화학 물질들을 섞어서 저장해야만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반억제제가 개발된다 해도 그것을 조절해 주는 시스템이 완성되어야 하므로 그 동안에 그는 자기 자신을 산산이 폭파시키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그를 잡아먹기 원하는 굶주린 적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아! 그는 아직도 두 개의 연소관을 개발해야만 하고 방향을 정확히 맞추고 폭파 시간을 제어하기 위해 정확한 통신 및 타이밍 회로망을 개발해야만 한다.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수천 세대 동안 이 태평한 딱정벌레들은 스스로 새롭게 발명한 능력에 익숙해질 때까지 스스로 자신을 폭파시켜가며 대포를 쏘아대는 독립운동 잔치를 벌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비참한 시행착오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단계적 진화론을 지지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진화론자들은 진화론 구도 안에서 모든 것을 유익한 것으로 간주하며 논리적 목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들은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며 전체적 방어 시스템이 모두 일시에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 불가능한 것이다. 대자연계 속에는 이러한 완벽한 조화의 예가 셀 수도 없이 많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놀라운 작은 폭격수 딱정벌레들이 특별한 창조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놀라움에 대해 어떤 다른 합리적 설명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위의 예와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물 딱정벌레 역시 훌륭한 방어 조직을 가지고 있다. 그는 땀샘으로부터 정화 물질을 분비함으로써 자기의 적을 도망가게 한다. 뿜어 나오는 정화제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룬다. 첫째, 딱정벌레를 앞으로 빨리 나아가게 하여 임박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둘째, 정화제는 물의 표면 장력을 부수어 그것을 쫓던 곤충으로 하여금 물속에 빠지게 한다. 시편에 기록된 말씀들이 얼마나 진실한가! “오 주여, 주께서 행하신 일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것들을 다 만드셨사오니 주의 부요하심이 땅에 가득하나이다.”(시104:24). 이주 본능 철새들은 뛰어난 항해 기술로 멋진 묘기를 펼칠 줄 안다. 철새의 한 종류인 작은 휘파람새는 독일에서 여름을 나고 아프리카에서 겨울을 보낸다. 이 새는 여름에 새끼를 낳고 새끼와 함께 지내다가 여름이 끝나갈 무렵 어느 정도 독립심이 생긴 새끼들을 뒤로 하고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리고 남아 있던 이 새로운 세대는 몇 주일 뒤에 수천 킬로미터의 낯선 땅과 바다를 향해 본능으로 날아가서 자기들의 부모와 합류한다. 어떻게 그것들이 그 먼 거리를 그렇게 정확히 항해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것들은 전에 결코 그 곳에 가본 적도 없다. 이 새들의 두뇌 속에 별을 보고 위도, 경도, 방향 등을 찾는 방법과 달력, 시계를 비롯해 항해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유전된 정보로 쌓여 있음이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 이처럼 고도로 정교한 장치는 그것들로 하여금 어느 누구의 인도 없이도 정확하게 자기들의 부모를 찾아갈 수 있게 해 준다. 또 다른 많은 새와 동물들도 이와 비슷한 이주 본능을 발휘한다. 황금 물새 떼는 허드슨만 어귀를 떠나서 약 13,000km를 여행하는데 그것들은 캐나다의 노바스코시아주로부터 카리브해 국가들에 이르기까지 약 3,000km의 바다를 가로질러야 하고 그 뒤 남쪽으로 가서 아르헨티나에서 겨울을 난다. 다음 해에 그것들은 중앙아메리카와 미시시피강 유역을 거쳐 다시 허드슨만으로 되돌아온다. 제비는 북부 캐나다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약 15,000km의 거리를 이주한다. 북극 제비갈매기는 극과 극을 왕복 여행하느라 매년 약 22,000km를 날아다닌다. 고래, 물개, 박쥐, 연어, 바다거북이, 뱀장어, 나그네쥐, 그 외에 다른 다양한 동물들 역시 이주한다. 이것들이 이주하는 이유와 이러한 동물들이 보여 주는 불가사의한 방향감각은 진화론자들을 매우 당혹하게 만드는 과학적 난제 중 하나이다. 진화론자들은 어떻게 이러한 뛰어난 능력들이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우연한 기회를 통해 점진적으로 진화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본능이 점진적으로 발달한다는 것은 매우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주 본능은, 그것이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으면,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양의 절반만 완벽히 건널 수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주 본능의 완벽함과 복잡함 그리고 수많은 동물들을 광범위하게 보존시켜 주는 월동(越冬)을 위한 집단 이주의 필수적 역할 등은 점진적 단계적 진화 과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놀라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논리적인 결론은 이 짐승들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뛰어난 능력으로 주의 깊게 이것들을 설계하고 창조했다는 것이다. 곤충의 비행 곤충은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아주 놀라운 능력 즉 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유일한 무척추 동물이다. 그것들은 다른 무척추 동물보다 훨씬 다양해서 약 100만 종이나 된다. 곤충의 날개는 비행하기 위해 멋지게 설계된 도구이며 이것은 매우 강하게 노 젓는 동작을 가능케 한다. 곤충들의 날개의 움직임은 매우 복잡하여 상승과 하강 운동, 앞뒤로의 이동, 움츠리고 펴는 운동, 때로는 모양을 바꾸기 위해 접거나 구부리는 운동도 다 할 수 있다. 많은 곤충들은 한 곳에 계속해서 떠 있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거꾸로 날 수도 있다. 또 어떤 것은 옆으로 날거나, 똑같지 않은 날개의 움직임을 이용해 머리나 꼬리를 중심으로 회전하기도 한다. 꿀벌이나 말벌, 파리 같은 곤충들은 작은 날개 면적과 뛰어난 비행 기술을 동시에 잘 조화시켜야만 한다. 예를 들어 꿀벌의 경우 만일 그것들이 큰 날개를 갖고 있다면 벌집 안에서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꿀벌의 날개는 작아야만 하는데 이 같은 날개 면적의 축소는 매우 빠른 날개 짓에 의해 보상된다. 이렇게 날개 짓을 하는 속도는 딱정벌레의 경우 초당 55번에서 꿀벌의 경우 초당 200번에까지 이른다. 더 작은 곤충들 가운데 어떤 것은 놀랍게도 초당 1,046번의 날개 짓을 한다. 곤충의 비행하는 모습은 실로 공학적 경이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지혜를 보여 준다. 성경에 증명되어 있듯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들이 그분의 창조물로 인해 드러나므로 만일 사람이 진실을 거부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핑계도 댈 수 없게 된다(롬1:20). 미끼고기와 낚시고기 하와이의 오하우 섬 근처에는 미끼를 가지고 있는 아주 흥미 있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비교적 보기 드문 이 물고기는 자기의 등지느러미를 미끼로 사용하여 자기가 잡아먹으려는 다른 물고기들을 유인한다. 그리고 저녁 먹을거리가 눈에 들어오면 이 미끼고기의 등지느러미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등지느러미는 마치 ‘입’과 ‘눈’이 완벽히 맞춰진 분리된 작은 물고기처럼 보이게 된다. 미끼고기는 자기의 제물을 유인하기 위해 자기의 등지느러미를 들어 올리면서 아가미의 움직임까지 멈추고 또 숨을 죽이며 가짜 미끼가 짙은 빨간색을 띠게 만든다. 동시에 가짜 미끼와 미끼고기를 연결하는 부분은 투명해져서 가짜 미끼가 마치 미끼고기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 미끼고기는 가짜 미끼가 좌우로 움직이도록 한 뒤, 부동자세를 취하고 미끼의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게 한다.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는 희생자가 가짜 미끼에 접근하여 마침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미끼고기는 전광석화같이 그것을 낚아채 버린다. 미끼고기는 이미 생물학적 세부 사항까지도 고려되어 만들어졌으며 그 안에 대단한 독창성과 목적성이 뚜렷하게 있음을 보여 준다. 어느 누구도 진화론으로 이러한 불가사의를 설명 할 수는 없다. 이처럼 확실한 설계는 단순히 우연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며 고도의 능력이 있는 프로그래머(즉, 창조주)가 미끼고기의 DNA 속에 암호화해서 만들어 놓은 청사진 즉 조심스럽고도 상세한 청사진을 필요로 한다. 다른 물고기들은 자기들의 먹을거리를 잡기 위해 또 다른 형태의 미끼를 사용한다. 입 위에 걸린 움직이는 낚싯대 끝의 가짜 미끼는 많은 낚시고기들의 특징 중 하나이다. 낚시고기 중의 한 종류는 등에서 뻗어 나온 ‘낚싯대’를 가지고 있는데 그 끝에는 빛나는 ‘전구’가 달려 있다. 깊은 바다에 사는 어떤 낚시고기는 입천장에 달린 ‘빛나는 전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가짜 미끼를 좌우로 흔들흔들하면서 활짝 벌려진 입 주변을 돌아다닌다. 작은 물고기들은 이 광경에 끌려들어 자기들의 무덤인 낚시고기의 입안으로 헤엄쳐 들어온다! 낚시고기들의 놀라운 모습 중 하나는 그것들이 포착한 먹이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은 새우처럼 보이는 가짜 미끼로 고기를 잡아먹는 낚시고기는 미끼로 하여금 거꾸로 쏘는 듯한 동작을 취하게 해서 마치 그것이 진짜 작은 새우의 움직임을 흉내 내게 한다. 물고기 모양의 미끼를 단 낚시고기는 헤엄치는 물고기 흉내를 내기 위해 측면으로 물결치는 동작을 취한다. 우리는 이따금 ‘미끼’가 작은 고기들에 의해 따먹히는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불행은 이미 예측된 것이며 이러한 물고기들에게는 새로운 ‘미끼’가 빨리 자라게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 사실상 새로운 미끼는 일반적으로 수일 내에 자라기 시작하며 2주 내에 옛 것을 완전히 대치한다. 이처럼 복잡하고 목적으로 가득하며 정확한 형태학적 구조들에 대해서는 진화론에 기반을 둔 어떠한 형태의 합리적인 설명도 있을 수 없다. 아주 그럴듯하게 진화론에 따라 상상한다 해도 이러한 놀라움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설계의 놀라운 모습은 분명히 어떤 설계자를 필요로 한다. 요약 독특한 설계와 적응은 대자연의 복잡한 구성물을 통해 풍부하고 완벽하게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진화론에 의거한 그 어떤 설명도 완전히 타파해 버린다. 대부분 이러한 구조와 능력은 단순히 단계적으로 진화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오직 완벽하고 완전할 때에만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든 자연은 선포한다. “보라, 주인 되신 창조자를!” 영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켈빈 경(Lord Kelvin)은 이렇게 말했다. “지혜롭고 은혜로 가득한 창조 설계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우리 곁에 놓여 있다. 무신론에 입각한 생각은 내가 말로 옮길 수 없을 만큼 무의미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진리는 이성 만능주의 과학자들의 복잡한 머릿속에 있지 않고 우리 주변에, 늘 볼 수 있는 데 존재한다. 다만 그들이 유명한 고등교육기관에서 과학을 전공했다는 말에 진리를 알고 있는 일반인들이 기가 질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들 역시 다 편견을 가지고 산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과학자들은 사실을 다루는 과학을 연구하므로 편견이 없다고 믿으며 바로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죄 덩어리요, 편견에 파묻혀 산다. 그런데 불행히 과학자들의 대부분은 이성주의라는 온상에서 자란 학문의 독을 먹고 지독하게 하나님을 배격한다. 그래서 사실 복음은 간단한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창조주를 시인하고 그분께 솔직하게 나아가면 그분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덮어 주신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2009-07-17 14:03:34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11 ● 스콧 휴즈 창조의 생물학적 증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참으로 놀라우며 불가사의한 곳이다. 이 지구는 시간당 100km를 달릴 수 있는 치타, 17년간이나 잠잘 수 있는 곤충들, 45분 동안이나 물속에 머물 수 있고 500m나 잠수할 수 있는 웨델 물개(Wedell seals), 자신의 팔을 먹으면 또 새로운 것이 자라곤 하는 8개의 팔을 갖고 있으며 잉크를 쏘는 낙지, 물을 5m나 쏘아 벌레를 잡는 사수어, 시간당 230km의 속도로 먹이를 덮치는 송골매 등의 고향이다. 이러한 생명체들과 그들의 놀랄 만한 능력을 다 나열한다는 것은 아마도 끝이 없는 일일 것이다. 지구는 진화론적 설명을 완벽하게 무시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고 난해한 ‘적응품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대자연 안에는 독창적인 설계와 목적을 보여주는 수많은 예들이 흘러넘친다. 우리가 사는 이 놀라운 세계에서 목적과 설계라는 개념은 ‘목적론’(teleology)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창조론자들은 생명체들이 그것들의 환경에 대해 불가사의하게 적응하는 것과 그것들의 놀라운 상호 관계를 경외의 눈으로 지켜본다. 그들은 이러한 복잡하고도 정밀한 ‘적응품들’이 어떤 목적이나 의도가 전혀 없는 자연적 진화의 점진적 과정에 의해서는 절대로 생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또한 온 지구상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광범위한 생명체들의 아름다움, 복잡함, 그리고 완벽함이 초지성적인 창조자와 설계자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된다고 믿고 있다. 자연 속의 뛰어난 설계 유명한 여론 조사 기관의 창시자인 갤럽(Georgy Gallup)은 한때 하나님의 존재를 통계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몸을 생각해 보라, 각각의 모든 기능이 저절로 생길 수 있는 확률은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인체의 모든 불가사의한 미스터리들을 표면적으로라도 짚고 넘어갈 만한 충분한 시간과 장소가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을 당혹케 할 정도로 복잡한 인체의 작은 부분인 눈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대자연 속에 있는 뛰어난 설계에 대한 우리의 연구를 시작해 보려 한다. 인간의 눈 진화론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인간의 눈을 점진적인 우연적 발달로 설명하려 하지만 사실 거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다. 자동으로 목표를 찾으며 초점을 맞추고 알맞게 조리개를 열 수 있는 인간의 눈은 거의 완벽한 어둠 속으로부터 눈부신 태양 빛 사이의 전 영역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며, 머리카락과 같이 가는 물체들도 볼 수 있고 매일 평균 10만 번의 서로 다른 동작을 취할 수 있으며, 컬러 입체 화면을 연속적으로 우리에게 정확히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보통 아무런 불편 없이 행해지며 우리가 잠잘 때 그것은 스스로 정비하는 일을 수행한다. 인간의 눈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해서 과학자들은 아직도 그것의 복잡한 기능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함께 움직여서 인간의 시각을 만들어 내는 복잡한 구조와 작동은 정말로 놀라우며, 고도로 정교한 눈의 동시성 등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어떻게 진화론자들이 인간의 눈이 점진적인 시행착오를 거치며 진화론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눈이란 완전히 발달되기 전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이것은 더 분명한 진리가 될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집적된 완전한 기능체로서의 역할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눈이 단계적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은 참으로 이상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개념이다. 다윈(Charles Darwin)은 눈과 같은 구조물을 설명하려 할 때 진화론이 전적으로 부적절함을 시인했다. “눈과 같이 거리에 따라 초점을 맞추고,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하고, 입체적 및 색채적 차이를 종합할 수 있는 독특한 장치가 자연 선택에 의해 저절로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스스럼없이 고백하건대 터무니없는 일이다. 눈만큼 완벽한 조직체가 자연 선택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는 신념은 모든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우호적이며 종합적이며 동시적인 돌연변이들이 무한히 생긴다면 혹시 눈과 같은 기관이 만들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진화론자들에게 관대히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와이송(Wysong)은 그런 식으로 눈이 형성 될 가능성이 번 중 단 한 번 정도뿐임을 계산하였다. 만일 진화론이 주장하는 대로 눈이 지금의 눈처럼 진화하기 위해서는 우연이 단 한 차례만이 아니고 여러 차례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진화론자들의 문제들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샐리스배리(Frank Salisbury)는 이런 의심스런 추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의심은 소위 평행 진화라 불리는 것과 관련이 있는 데 그것은 심지어 눈과 같이 복잡한 것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오징어나 척추동물 혹은 절지동물 등에서 매번 우연한 발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단 한 번에 이러한 것들의 기원을 설명한다는 것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진화에 의해 생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다.”이제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내려야만 하는 결론은 더욱더 명백해졌다. 눈은 진화적 발달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처음부터 완벽하고 놀라운 형태로 창조되어진 것이다. 스터미우스는 다음과 같은 현명한 말을 했다. “눈에 대한 조사는 무신론에 대한 해결책이다.” 삼엽충의 눈 비록 지금은 멸종되었지만 삼엽충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자연 안에 있는 독창적 설계와 목적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살아 있는 유기적 조직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눈의 수정체와는 달리 삼엽충의 눈은 무기적 방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과적으로 많은 삼엽충의 눈의 수정체들은 화석의 기록으로 잘 보존되어 왔고 따라서 화석학자들은 그것들을 연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하나의 수정체로 이루어진 인간의 눈과는 달리 삼엽충의 눈은 종류에 따라 한 개의 눈에 100~15,000개의 수정체를 갖고 있으며 매우 독특한 이중의 수정체 구조로 설계 되었다. 이 특별한 구조는 삼엽충으로 하여금 물속에서도 찌그러짐 없이 완벽하게 사물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애비의 ‘사인의 법칙’(Abbe's Sine Law)과 ‘퍼르맷의 원리’(Fermat's Principle) 그리고 다른 여러 광학의 원리에 대한 지식들이 이 같은 삼엽충의 수정체들의 설계 속에 담겨져 있다. 그것들은 매우 지식 있는 물리학자(하나님)에 의해 조심스럽게 설계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사실 창조주의자들은 그러한 사실에 대해 동의한다. 해삼 해양 생물 가운데 존재하는 가장 흥미로운 신비 중 하나는 놀랍게도 해삼에서 발견된다. 해삼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 지역의 해안을 따라 거주하며 주로 말미잘을 먹고 산다. 말미잘은 그다지 해삼의 마음에 드는 저녁거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누가 그들을 조금이라도 건드리기만 하면 그는 촉수 위에 있는 수천 개의 날카롭고도 작은 세포를 사용하여 침입하려는 적을 독이 있는 침으로 찌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찔리게 된 침입자는 전신이 마비되고 결국 말미잘의 위로 빨려 들어가 소화되어 버리고 만다. 비록 말미잘이 이러한 놀라운 방어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해삼은 결코 말미잘에게 찔리거나 그것의 날카로운 세포를 자극하지 않고도 혹은 그것들을 소화하지 않고도 그것들을 먹을 수 있다. 대자연 안에 있는 이러한 환상적인 신비들 중 하나는 해삼이 이 불쌍한 말미잘의 날카로운 세포들을 어떻게 처치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해삼이 먹은 말미잘의 찌르는 세포들은 소화되지 않은 채 위와 연결된 섬모가 있는 관을 따라 내려가서 끝에 있는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찌르는 세포들은 이 작은 주머니들 안에서 정렬되고 저장되어 해삼의 방어를 위해 쓰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삼이 공격을 받게 되면 그것은 가련한 말미잘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침을 사용해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다. 이처럼 믿기지 않는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고도로 복잡한 변형의 과정은 진화론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다. 무엇보다 이 찌르는 세포들이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삼은 일시적으로 그것들을 중성화 시킬 수 있는 어떤 종류의 화학적 수단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또한 해삼은 말미잘의 조직만 소화하고 날카로운 세포들은 소화하지 않는 새로운 소화 시스템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해삼은 날카로운 세포들을 정렬하고 저장하고 유지하는 고도로 복잡한 구조뿐 아니라, 섬모가 있는 매우 정교한 관과 작은 주머니를 교묘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결국, 진화론의 기대와는 반대로 말미잘은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해삼의 계획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명백하게도 이렇게 놀라운 적응 설계의 존재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렇게 신비한 관계에 대한 유일하며 합리적인 설명은 이러한 조직체들이 그들의 생태학적 지위에 맞게 창조자에 의해 특별히 창조되었고, 조심스럽게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정원을 가꾸는 개미 자연에서 관찰 되어왔던 또 다른 흥미 있는 관계는 중남미의 아카시아 나무에 대한 것이다. 이 나무는 사납게 먹어대는 개미들이 서식하는, 속이 텅 빈 커다란 가시들을 갖고 있다. 또한 나무에 있는 작은 혹들은 개미들에게 음식을 공급한다. 따라서 개미들은 이 나무로부터 음식과 피난처를 동시에 공급받는 것이다. 이 나무는 이들 개미들과의 거래 조건으로 모든 동물 침입자와 식물 경쟁자로부터 완벽한 보호를 제공받는다. 이 개미들은 모든 침입자들을 무섭게 공격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생 관계의 참으로 놀라운 면은 이 개미들이 모두 훌륭한 정원사들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자기들의 집이 되는 나무로부터 모든 방향으로 규칙적인 습격을 감행하여 그 나무 주위에서 감히 머리를 내미는 모든 녹색의 어린 가지들을 물어 뜯어버린다. 그 결과로 이 특별한 나무는 풍부한 태양빛과 공간을 갖게 되는데, 사실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한 경쟁이 항상 치열한 열대의 정글에서 이런 광경을 본다는 것은 드물다. 실험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나무들 중 하나로부터 모든 개미들이 제거되었을 때 그 나무는 2~15개월 안에 죽고 말았다. 진화론자들은 보통 이러한 유형의 공생 관계를 상호 순응의 예로 분류한다. 물론 그들은 결코 이처럼 뒤얽힌 관계가 진화론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화론의 관점은 과학이 아닌 믿음과 가정의 문제로 계속 남게 될 뿐이다. 이러한 경이적인 관계들이 전지하신 창조자의 손에 의해 계획적이고 지능적으로 설계되었다고 인식하는 창조론자들의 믿음은 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이다. 정화 공생 진화론적 생각이 옳지 못함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자연계의 경이로운 관계는 청소하는 공생 관계이다. 예를 들어, 작은 물고기나 새우를 잡아먹으러 돌아다니는 큰 물고기들의 입은 고기 부스러기들과 기생충 등으로 인해 결국 더럽혀지게 된다. 몇몇 종류의 물고기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지역의 청소를 담당한 부서를 찾아간다. 청소 담당 부서에서 큰 물고기는 입과 아가미실을 열어 무서운 이를 드러낸 채 서 있고 용감한 작은 청소 물고기들과 새우들은 자신들의 임무인 청소를 하며 입속을 헤엄쳐 다닌다. 그들의 임무를 수행한 후에, 작은 물고기들은 큰 물고기의 입에서 무사히 헤엄쳐 나오고, 큰 물고기들도 유유히 헤엄쳐 사라진다. 이러한 관계로부터 쌍방이 이익을 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사실이 이렇게 특별한 관계의 기원과 발달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 같은 관계가 성립된 이후에는, 오직 생존 가치라는 것이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유로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포식성 물고기와 청소 고기 그리고 작은 새우의 여러 종류들이 이러한 운영 체계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진화론자들을 더 당황하게 만들어 버린다. 창조론자들은 이러한 유형의 관계는 결코 단순한 기회나 진화론의 시행착오 과정에서 생겨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동물들의 자기 보존 본능은 작은 물고기들이 이치에 맞지 않게 자살 행위를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물론 쉽게 먹이를 얻을 수 있다는 유혹(작은 물고기들)과 귀찮게 하는 청소자들에 대한 역반응(큰 물고기)은 이러한 관계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만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공생 조합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들이 어떤 특별한 창조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나는 정화 공생이 단지 물고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말하려 한다. 놀랍게도 어떤 이집트 물새는 나일 강에 사는 악어의 음식 찌꺼기와 기생충을 치우기 위해 악어의 입 안으로 똑바로 걸어 들어가 청소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 새 역시 전혀 자기 몸에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온다. 이번 호에서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특별 창조의 예를 몇 가지 살펴보았다. 이런 증거들이 너무나도 명백히 창조를 가리키는데 어째서 과학자들은 혹은 많이 배운 사람들은 이런 증거를 묵살하고 진화를 택하는 것일까? 어제도 이 질문을 받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명체와 온 우주에 관한한 창조와 진화 둘 중에 하나뿐이 없음을 시인한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창조를 인정하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주인이요 심판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자기가 창조물이라고 시인하게 되면 자기를 만든 창조주에게 자기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며 그분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고 스스로 심판자가 되기를 원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와 믿음이 나오게 되며 그 중에서 가장 편만한 것이 바로 인본주의/진화론 종교체제이다. 성경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며 이들 모두가 죄인임을 증언한다.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생각에 내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 그들은 곧 모든 불의와 음행과 사악함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하며 시기와 살인과 논쟁과 속임수와 적개심으로 가득하고 수군수군하는 자요, 뒤에서 헐뜯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업신여기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한 일들을 꾸미는 자요,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요, 지각이 없는 자요, 언약을 어기는 자요, 본성의 애정이 없는 자요, 화해하기 어려운 자요, 긍휼이 없는 자라. 그들이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같은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들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느니라.”(롬1:28-32) 창조주를 바로 알고 창조물로서의 위치를 깨닫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첫걸음이다. 혹시 독자들 가운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분이 있으면 진지하게 깊이 고민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솔직하게 갈구하는 심령에게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2009-07-17 14:01:29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10 ● 스콧 휴즈 창조의 수학적 증거 지금까지 여러 회에 걸쳐 제시한 지질학적 사실들은 생물체의 진화에 대한 일반적 이론에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혔다. 사실 진화론이 제시하는 것은 우주의 모든 복잡한 구조나 계가 순전히 자연적이고 우연한 자연 과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관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외부의 어떠한 초자연적 존재 즉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우주가 독립적이며 스스로 진화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에 대해 정반대의 견해를 표명하는 성경적 창조론은 수도 없이 많고 매우 복잡한 시스템과 우주의 미묘한 구조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특별하고 강력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고 주장한다. 우주 전체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그 복잡성과 질서는 너무나 엄청나서 결코 단순히 우연에 의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들이며 창조론자들은 이런 것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재주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호에서 우리는 수학적 확률의 기본 원리를 이용하여 생물체의 우연한 진화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해 볼 것이다. 확률이란 단순히 어떠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번개에 맞을 확률은 다행히도 약 60만 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한 장의 복권만 가지고 1등으로 당첨될 확률은 불행히도 약 520만 분의 1이다. 진화론자들은 내부적으로 서로 연관된 많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몹시 복잡한 계들이 단순히 아무 목적도 없는 과정에 의해 발생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적용하자면 많은 원숭이에게 넉넉한 시간을 주어 타자를 치게 하면 결국 그 중 한 마리는 완벽한 대백과 사전을 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며 간단한 확률 통계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이러한 관점의 우매함과 천진난만함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가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26 글자로 구성된 영어 알파벳으로부터 임의로 9개의 글자를 선택하여 ‘evolution’(진화)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269번의 시도 중에서 단 한 번뿐이다. 이것은 5조 4천 2백 9십 5억 3백 6십 7만 9천 번 중의 한 번과 같은 것이다! 우연히 26 글자 중 9 글자를 택하는 것 같이 단순한 요구에 대해서도 수학적 확률은 참으로 그것이 기대할 수 없는 불가능한 사실임을 제시해 준다. 1부터 20까지 번호를 매긴 20장의 카드를 생각해 보자. 이 카드들을 잘 섞어서 일렬로 내려놓았을 때 1부터 20까지 순서대로 놓일 확률은 2,432,902,008,176,640,000번 중 단 한 번이다! 이 어마어마한 숫자는 20계승(20!)이라고 하며 1부터 20까지의 모든 숫자를 곱함으로써 ‘쉽게’ 구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 -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 을 우연히 만들 수 있는 확률은 2644번 중 단 한 번이다. 이것은 1.81479392×1062번의 시도 중에서 단 한 번 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바꿔 말하면, 성경의 첫 구절을 우연히 만들어 낼 수 있는 확률은 181,479,392,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번 중에서 단 한 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성 요소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확률은 급속히 감소한다. 이제 단지 200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매우 단순한 시스템 즉 생명체와 비교하면 참으로 단순한 시스템이 우연히 발생하게 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질서 정연한 시스템을 형성할 수 있을 확률은 200계승(200!) 중 단 한 번뿐이다. 이것을 다시 쓰면, 788,657,867,364,790,503,552,363,213,932,185,062,295,135,977,687,173,263,294,742,533,244,359,449,963,403,342,920,304,284,011,984,623,904,177,212,138,919,638,830,257,642,790,242,637,105,061,926,624,952,829,931,113,462,857,270,763,317,237,396,988,943,922,445,621,451,664,240,254,033,291,864,131,227,428,294,853,277,524,242,407,573,903,240,321,257,405,579,568,660,226,031,904,170,324,062,351,700,858,796,178,922,222,789,623,703,897,374,72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중에 한 번인 셈이다. 이 어마어마한 숫자는 다시 간단히 쓰면 약 10375이다. 이처럼 처음 시도에 200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시스템을 적당한 배열로 만드는 것은 10375 경우 중 단 한 번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다른 조합을 시도해 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결국에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우주에는 단지 약 1080개의 전자가 있다. 이것이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는 최대 부품 숫자라고 가정한다면 어떤 주어진 시간에 각각 200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집합체의 숫자는 1×1080/2×102=5×1077 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정확한 배열을 얻기 위해서는 그러한 집합체를 10375번 구성해 보아야만 한다. 첫 번째 시도한 집합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고 1초에 10억 번씩 시도해서 계속 진행해 나간다고 생각해 보자. 더 나아가 진화론자들에게 가능한 모든 이익을 주기 위하여, 300억 년(1018초) 동안 계속해서 이 같은 시도를 해 왔다고 생각하자. 왜냐하면 이 기간은 진화론자들이 우주의 연대로 추측하고 있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이 양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도할 수 있는 조합의 최대치는 아직도 이다. 즉, 이렇게 많은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번의 시도 중 하나가 우리가 원하는 200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시스템을 산출해 낼 수 있는 확률은 단지 번 중의 한 번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200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복합 시스템이 단지 우연에 의하여 발생될 기회는 실제적으로 없다. 진화론자는 자기의 의견을 옹호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것을 실수라고 얼버무릴는지도 모른다. 또한 200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시스템이 한 번에 갑자기 구성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대신에 단계적 돌연변이나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주장은 진화론자들의 생각에 더욱더 악영향을 끼칠 뿐이다. 단계적 과정에 의해서 200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는 확률은 급수 형태인 2!+3!+4!+···+200! 중 단 한 번이다(!은 계승을 의미). 분명히 이 수는 200!보다 훨씬 더 큰 수이다. 실로 200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시스템을 이러한 단계적 방법에 의하여 발전시킬 수 있는 확률은, 이미 위에서 우리가 확인한 대로, 거의 0의 확률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동시 발생의 경우’보다 실제적으로 훨씬 더 적다. 사실 200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시스템은 생명체에 비하여 우스우리만큼 원시적인 것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행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생명체로 분류될 수 있는 가장 기초적 형태의 단백질 분자는 적어도 400개의 아미노산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각각의 아미노산은 4개 또는 5개의 원자들의 특별한 조합으로 이루어져있고, 각각의 원자들은 양자, 중성자, 전자들의 독특한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골레이는 복제하기에 가장 간단한 단백질 분자가 형성될 수 있는 확률은 중 단 한 번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와이송(Wysong)은 가장 작은 분자가 자기 분열을 할 수 있는 어떤 물질을 형성하기 위해 단백질과 DNA가 형성될 수 있는 확률을 계산했는데 그것은 번 중 단 한 번의 확률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과 시약을 주었다는 가정 하에서 계산한 것이다. 좀 더 복잡한 구조나 사람의 머리 안에 있는 뇌의 피질같이 복잡한 기관들에 대한 우연적 발생 가능성을 누가 상상이나 해 볼 수 있겠는가? 뇌의 피질은 특별한 계획에 따라 정교하게 정돈된 10,000,000,000개 이상의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포 한 개 한 개는 그것만으로도 환상적으로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파리 대학의 슈첸버거 교수는 “진화에 관한 신다윈주의적 해석에 대한 수학적 도전”이라는 학술회의에서 돌연변이나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의 확률은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그것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만일 글자를 불규칙적으로 변화시켜가며 컴퓨터로 그런 상황을 모의실험 한다면 우리는 수정된 프로그램이 무엇을 계산할는지 전혀 알 수 없다(즉 확률이 이하임). 다시 말해 그 프로그램은 전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Schutzenberger, Algorithms and the Neo-Darwinian Theory of Evolution, in Mathematical Challenges to the neo-Darwinism Interpretation of Evolution).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들에 대한 확률이 매우 작으므로 대개 수학자들이 1050번의 경우의 수 중에서 단 한 번 일어날 확률을 갖고 있는 사건을 0의 확률을 가진 사건 즉 불가능한 사건으로 여긴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생물일지라도 단지 우연에 의하여 발생한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생명은 결코 우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명석한 과학자들이 조합해 낼 수 있는 어떤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유기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은 초자연적 설계와 계획 없이 그 같은 생명체가 발생할 수 있었다는 생각, 즉 단순히 우연에 의존하는 생각을 완전히 배제한다. 수학적 분석에 기초를 두면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특징짓는 매우 복잡하고 질서 정연한 시스템들이 결코 우연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고 우리의 창조주 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손으로 만드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기록한 시편 기자의 말이 얼마나 정확하고 적당한 표현인가!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노래로 우리 하나님을 찬양함이 선하고 즐거우며 또 찬양을 드림이 마땅하도다. 주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들을 함께 모으시며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그분께서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그것들의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고 권능이 크시며 그분의 명철은 무한하시도다(시147 : 1-5).
2009-07-17 13:59:35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9 ● 스콧 휴즈 창조의 물리학적 증거 지난 호까지 제시한 지질학적 사실들은 생물체의 진화에 대한 일반적 이론에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혔다. 이제 우리는 부가적으로 우리에게 사실적 증거를 제시해 주며 또한 진화론을 반박하고 성경적 창조론을 지지해 주는 역할을 하는 물리학이라는 과학적 분야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열역학 제1, 제2법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데 이 두 법칙은 모든 종류의 계(system)에 대해 계속해서 반복 시험되어 확실성이 증명된 과학적 법칙들이다. 유명한 과학자들 치고 이 법칙의 타당성과 광범위한 적용성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열역학 제1법칙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열역학 제1법칙이란 어떤 형태의 에너지가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바뀔 수는 있으나 저절로 생성되거나 소멸되지는 않는 것을 말한다. 이 법칙이 결론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주가 저절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주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연 법칙이란 것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과학적 사실은 자연주의적이며 혁명적인 진화론의 기본 개념과 직접적으로 배치가 되며 큰 갈등을 일으킨다. 현재 우주의 구조는 진화론이 요구하는 바와 같이 혁신적 구조가 아니라 보존적 구조이다. 과학자들은 에너지와 물질의 기원 혹은 전체 에너지의 보존 이유 등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지만 성경은 해답을 갖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200억년 전에 빅뱅이 생겼으며 그때에 콩알만 한 것 안에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그 콩알은 어디서 생겼을까? 그냥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누군가가 그것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 콩알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만이 스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다. 인간은 단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개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영어 단어 create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데 사용되고 그런 존재를 creator라고 한다. 반면에 사람은 유에서 유를 만들므로 maker라 부른다. 사람은 실제로 아무것도 create 할 수 없다. 이 차이를 인식하면 누구나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읻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끝내신 뒤부터(창2:3) 에너지는 더 이상 창조될 수 없다. 에너지가 소멸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떠받치시기’ 때문이다(히1:3). 그분은 자신의 창조 세계를 보존하시며 간수하신다(느9:6; 벧후3:7). 열역학 제2법칙 진화론은 열역학 제1법칙에 의해 큰 타격을 받은 뒤 열역학 제2법칙으로부터 거의 살아남지 못할 정도의 치명적 일격을 받게 된다. 열역학 제2법칙은 유용 에너지 감소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이 법칙은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이 가능한데 어떤 경우에도 그 의미는 다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열역학의 중요한 적용 분야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고전적 적용 전체 에너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하여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처음에 누군가가 에너지를 불어넣지 않았다면 온 우주 자체가 보존될 수 없다. 비록 진화론자들이 ‘빅뱅’을 주장하지만 이 ‘빅뱅’을 위해서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이들은 한결같이 이 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에너지가 어디에선가 생겼다는 공허한 주장만 되풀이한다. 전체 에너지는 유용 에너지와 무용 에너지의 합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어떤 작용계 내에서 유용 에너지를 사용하면 할수록 무용 에너지가 증가하며 우리는 이를 가리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표현한다. 2. 통계적 적용 어떤 시스템의 질서도는 자유자재의 형태 즉 무질서의 상태로 변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계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확률이 적은 경우에서 큰 경우로만 진행된다. 예를 들어 커피 잔에 담은 뜨거운 물은 뜨거운 상태로 유지되는 것보다 주변 환경의 온도로 차갑게 되려는 경향이 있다. 이를 다시 표현하면 뜨거운 상태로 있을 확률이 차가운 상태로 있을 확률보다 낮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뜨거운 물은 차가운 물로 변하는 것이다. 3. 정보적 적용 통신 시스템에 의해 전달되는 정보는 방해를 받아 불완전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의 핵심 내용은 모든 계를 가만히 둘 경우 질서 있는 상태로부터 점점 무질서한 상태로 변화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우주는 조직체의 질서를 감소시켜 해체시키는 방향 즉 쇠퇴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로 구성된 것들은 다 쇠퇴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결국 먼지로 되돌아가고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임의의 저급 열에너지로 될 것이며 우주는 보통 열사(heat-death)라고 하는 상태로 죽어가게 될 것이다. 에딩턴 경(Sir Arthur Eddington)이 열역학 제2법칙을 가리켜 ‘시간의 화살’(Time's Arrow)이라고 부른 것은, 화살이 지속적으로 아래 방향을 향해 떨어진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결코 놀랄 만한 일이 못된다.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하면서 좀 더 질서를 띠고 복잡한 개체를 이루는 진행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그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드물며 사실상 일시적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만일 진화론이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보이려면 적어도 열역학 제2법칙을 수십 억 년간이나 위배해야만 한다! 이처럼 열역학 제2법칙은 진화론을 통계적으로 거의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당신의 이론이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된다면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그 이론은 매우 비참하게 붕괴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창조론자들은 열역학 제2법칙으로부터 나온 엔트로피 증가(무질서도 혹은 불규칙성의 증가)의 법칙이 인간의 타락(창3:17-19)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저주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설명한다. 창조론자들은 또한 모든 피조 세계가 결국에는 부패와 쇠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롬8:18-23). 그래서 지금의 세상에는 에너지와 물질만이 보존되며 엔트로피는 증가하지만 앞으로 오는 세상에서는 엔트로피도 보존될 것이다. 이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아메바와 사람의 질서도를 보면 사람이 아메바보다 훨씬 더 크다. 그러므로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 질서도가 낮은 아메바가 저절로 진서도가 놓은 사람으로 진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사람과 원숭이에게도 적용된다. 원숭이가 사람이 되려면 열역학 제2법칙이 변해야 한다. 하지만 이 우주에서는 그런 일이 생길 수 없으므로 진화는 불가능한 것이다. 단지 마음속에 창조주를 두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진화의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로마서 1장 20-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神格)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자기들의 상상 속에서 허망해지고 또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선언하나 어리석은 자가 되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것들과 같은 형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들 마음의 정욕을 통해 부정함에 내주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겼느니라. 그분은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이시로다. 아멘. 열역학 제2법칙이 진화론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므로 일반적으로 그들은 그것을 무시하려 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해 설명해 보라는 압력을 받게 되면 그들은 열역학 제2법칙을 교묘히 빠져나가기 위한 시도로 보통 두 가지 의견을 제시한다. 첫 번째 의견은 열역학 제2법칙이 지구 같은 개방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태양이 엔트로피로 인한 에너지 손실을 보충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충분히 지구에 제공하고 있으므로 제2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럴듯한 진술로 보이지만 이 주장은 두 가지 주요한 잘못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로 모리스(Henry M. Morris)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주장은 에너지의 양을 에너지의 변환과 혼동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 자연계에는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진화 과정을 일으킬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실제 문제는 “어떻게 태양 에너지가 진화를 유지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단지 에너지가 있다고 해서 질서를 띠며 구조적 성장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으로 추정되는 진화가 자동적으로 보증되지는 않는다. 어떤 방향성을 가진 프로그램 기구(Program mechanism)들이 이 같은 에너지를 ‘좀 더 발전된 구성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에너지로 변환시켜 주는 것이 필요하다. 목재, 벽돌, 못, 그리고 공구 더미 등을 예로 들자면, 비록 그것들이 일을 수행시킬 만한 충분한 에너지를 태양으로부터 받고 있는 ‘개방계’임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계획 없이 자동적으로 진화해서 건물로 변할 수는 없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건물이 복잡하다 해도 살아 있는 가장 단순한 세포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원시적이라는 점이다. 둘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진정한 ‘폐쇄계’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열역학 제2법칙이 지구와 같은 개방계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모든 계 역시 ‘개방계’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엔트로피 법칙과 진화론이 서로 보조를 맞추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두 번째 주장은 열역학 제2법칙이 ‘살아 있는 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생명 현상이 엔트로피 법칙과 눈에 띄게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고 태아가 성장하여 성인이 된다. 그러나 모리스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생명체의 성장 과정은 실제로 열역학 제2법칙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생명체의 성장 과정은 실제로 발아 세포의 놀라운 구조가 이루어 낸 업적일 뿐이다. 그리고 발아 세포는 그 안에 생명체 내부로 들어오는 화학물질들을 동화시켜 점차 모체(母體)의 구조와 같은 구조를 이루어 가는 데 필요한 비밀스런 정보들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제로 질서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 체계의 신비한 복잡성과 그것이 사용할 수 있는 주변의 에너지가 외부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체가 실제로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하면서 더 복잡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성장한 생명체는 유전자 내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질서가 단순하게 바깥으로 표현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성장한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필요한 성장 과정과 발전을 위한 청사진은 이미 모체의 유전자 내에 있었던 것이다. DNA 안에 이미 있었던 질서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기원은 창조론자에게 아무런 어려움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론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직면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지적 질서와 설계가 이미 존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생명체가 시작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는 무신론을 믿는 진화론자들을 영원히 괴롭히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엔트로피가 외관상으로 감소하는 현상이 단지 외부 환경 내에 더 큰 엔트로피 증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이처럼 전체 계 혹은 우주는 열역학 제2법칙이 요구하는 대로 계속해서 소멸되는 방향으로 진행 중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과정들은 일시적이고 결국에는 사라지거나 해체되고 만다. 생명체는 열역학 제2법칙을 연기시켜보려 하지만 엔트로피는 결국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야 만다. 한 마디로 생물학적 계와 생물학적 과정들은 복잡한 화학적/물리적 과정들이며 열역학 제2법칙은 이 모든 것에 확실하게 적용된다. 진화론을 지지하는 생화학자 블럼 박사(Dr. Harold Blum)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가 아무리 세밀하게 생명체의 ‘에너지론’(Energetics)을 조사한다하더라도 열역학 법칙들을 무너뜨릴 증거는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생명체 내에만 존재하며 비생명체의 세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엄청난 복잡성을 보게 된다.” 이제 우리는 열역학 제2법칙이 생명체가 진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창조 모델은 열역학 제2법칙이 효력이 있을 것이며 따라서 여러 가지 과학적 사실에 의해 구체화 된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예측하고 있다. 요약 두 개의 가장 신뢰할 만한 과학 법칙인 열역학 제1, 제2법칙은 ‘보존과 쇠퇴’라는 두 개의 과정이 여러 가지 물질로 구성된 우주를 특징 있게 만들어 주고 있으며 우주의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이런 사실은 우주 전체가 점점 더 나아지기를 소망하는 진화론의 체계가 요구하는 것과 예상하는 것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한다. 우리는 모리스 박사의 유명한 글을 인용함으로써 이번 호의 결말을 지으려 한다. “열역학 제2법칙은, 소위 과학이 어떤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만큼이나 아주 확실하게 우주에 시작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와 비슷하게 열역학 제1법칙은 우주가 스스로 시작될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우주 내의 전체 에너지량은 일정한 값이지만 사용 가능한 유용 에너지량은 감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간을 역행해서 되돌아가게 되면 사용 가능한 에너지량이 점점 증가하게 될 것이고 결국 사용 가능한 에너지량이 전체 에너지량과 같았던 시작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시간’이라는 것은 이 이상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이때가 바로 에너지와 시간이 존재하게 된 때이다. 에너지는 자체적으로 창조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2009-07-17 13:55:26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8 ● 스콧 휴즈 노아의 홍수: 대격변 지난 호에서 우리는 시베리아 지방에서 갑작스레 얼어 죽은 매머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큰 초식성 열대 짐승들이 그곳에서 죽어 묻혀 있을까? 창조론자들은 이 놀라운 상태에 대해 아주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그 이유는 지금부터 약 4350년 전에 발생한 노아의 대홍수 때문인데 이때에 홍수 이전의 세계를 덮고 있는 증기 막이 홍수 이후에 붕괴되었다. 창세기 7장 11절에는 “그 날에 큰 깊음의 모든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증기 막은 세계 도처에 온실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 같은 온실 효과로 인해 홍수 이전의 기후는 거의 계절의 변화 없이 지구 전체를 통해 온화했을 것이다. 또한 그때에는 비와 무지개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창2:5-6; 8:22; 9:13). 오늘날 우리가 전 세계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심한 폭풍은 이 같은 증기 막으로 인하여 결코 생성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창2:5,6; 히11:7). 이 같은 증기 막의 존재는 야자수 잎들, 과일 나무, 열대 해안의 갑각류, 산호초, 거대한 양의 아열대성 식물들이 추운 극지방에 묻혀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사람의 수명은 홍수 이후에 계속 줄어들어 지금은 70-80세가 되었다. 또한 이 증기 막은, 돌연변이와 노화 작용을 가속화시키는 영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진 우주 공간으로부터의 해로운 열복사를 걸러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막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또한 홍수 이전의 족장들의 긴 수명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로도 잘 알려져 왔다(창 5:5-27). 우리는 대홍수 이후에 성경에 있는 여러 족장들의 나이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노아 = 950년 살라 = 433년 벨렉 = 239년 아브라함 = 175년 모세 = 120년 다윗 = 70년 현재 = 70-80년(시90:10) 창조론자들은 이 거대한 증기 막의 붕괴만이 창세기 7장 11-12절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일간 밤낮으로 비가 땅에 쏟아졌다.”는 이 구절은 결코 평상시의 폭우가 내린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 대기의 수증기와 구름이 다 지면에 떨어진다 해도 이로 인한 강우는 몇 시간 후에는 끝이 나며 강우량은 전 세계에 걸쳐 겨우 10cm 높이의 물만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홍수 이전의 거대한 증기 막의 붕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도대체 시베리아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되고 있는 거대한 매머드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수증기 막의 붕괴로 인해 북극 지방에 살고 있었던 매머드가 갑작스럽게, 거의 순간적으로 얼어 죽었을 것이다. 창조론자들은 이 수증기 막이 초기에 붕괴되기 시작했을 때 영하 150℃정도의 차가운 기운이 그들을 덮쳤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물론 이 같은 이론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이 이론은 상당한 과학적/성경적 지지를 받고 있으며, 현재는 어떠한 균일론/진화론적 설명보다도 적합하게 매머드 등이 묻힌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노아의 대홍수 이전에 있었던 증기 막에 대해 더 알기를 원하면 딜로우(Joseph C. Dillow)가 지은 「위에 있는 물들」(The Water Above, Moody Press, 1981)을 참고하기 바란다. 한편 창조를 지지하는 다른 증거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멸종: 지난 수십 년 동안 진화론자들은 공룡이나 삼엽충 같은 강인하며 확고히 정립된 동물들이 갑자기 화석의 기록으로부터 없어져 버린 사실로 인해 매우 당황해 하고 있다. 그것들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사실 자체가 진화론자들에게는 큰 수수께끼이지만 창조론자들은 그것들의 불행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창세기의 대홍수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창조론자들은 증기 막이 갑작스럽게 붕괴됨으로 인해 홍수 이후의 기후는 홍수 이전의 기후와 완전히 다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이런 동물들은 더 이상 따뜻하고 안정되며 온화한 기후 속에서 살 수 없게 되었고, 매우 차가운 온도, 맹렬한 폭풍, 지독한 겨울 등과 같이 상대적으로 불안정하고 좋지 못한 환경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어떤 동물들은 좋지 못한 새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집단 전체가 멸종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공룡 같은 냉혈 동물은 체온이 외계의 온도에 의해서 유지되므로 이 같은 기후에 의해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2) 석화(石化)된 나무토막: 돌처럼 딱딱하게 된 이 나무들은 균일론/진화론자들에게 또 다른 수수께끼를 던져 주는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소위 ‘균일화된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화석 기록에서 수천 개씩이나 발견되곤 하며 이것들의 섬유질과 세포 조직은 실리카로 대체됨으로써 완전하게 보존되어 왔다. 이런 나무토막들에 관한 증거는 한결같이 갑작스런 대격변의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이 나무토막 중 그 어느 것도 서 있는 채로 발견되지 않았다. 이 나무토막들의 가지들은 다 떨어져 나갔으며 그 중 어떤 것들은 아직까지도 손상되지 않은 껍질을 갖고 있는데 결국 이런 사실은 썩는 현상이 생기기 전에 그것들을 갑작스럽게 매장시킨 어떤 급격한 일이 일어났음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 원래의 삼림은 굉장한 힘을 갖고 있던 물로 말미암은 대격변에 의해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고 거기서 퇴적되어 결국 석화 되었던 것이다. 창조론자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단 하나의 합리적이며 그럴듯한 설명이 창세기의 대홍수라고 주장한다. (3) 다층 나무: 다층 나무란 보통 키가 6m을 넘는 나무로 지층의 여러 단면에 있는 화석나무를 말한다. 이런 화석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지층이 그 위에 서서히 쌓이는 동안에 그것들이 다 썩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나무들이 진화론자들이 가정하는 진화론적 시간 구도 상에서 무려 몇 백만 년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명백하게도, 언제나 성경에 기초하여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창조론자들은 이런 나무들의 수송 및 침전이 그것들 주변에 있던 퇴적물과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균일론/진화론의 가정에 심각한 문제를 던지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화석의 증거들은 창세기 대홍수라는 성경적 대격변론을 지지한다. (4) 수명이 짧은 일시 흔적: 물결 자국, 빗방울 흔적, 벌레 자국, 그리고 동물의 발자국 같이 수명이 짧아 금방 사라지게 되는 흔적들이 화석 기록 안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이 같은 종류의 화석은 원래 최근에 침전된 퇴적물 층의 표면 위에 살짝 스쳐가듯이 자국만 남긴 채로 형성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이와 같이 수명이 짧은 일시 흔적들은 형성되지도 않고 보존되지도 않는다. 이들의 보존은 화학적 변화 과정과 관련이 있으며, 매우 비정상적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매장 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같은 흔적들이 전 세계의 모든 화석 기록 속에서 수도 없이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창세기 대홍수 같이 갑작스럽게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대격변에 의해 퇴적층이 형성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 (5) 유기체의 부드러운 조직: 화석 기록에는 실제로 유기체의 부드러운 부분(혹은 조직)이 그대로 보존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소위 가장 오래된 지층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도 이런 것들이 발견된다. 또한 이런 화석들은 대개 한꺼번에 대량으로 발견된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화석 학자 느웰(D. D. Newell)은 최근에 이 같은 화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기체의 조직이 방부제의 늪 속에 보존된 예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중부 독일 가이셀탈에 있는 신생대 제3기 에오세 갈탄 침전 지역에 있는 ‘화석 무덤’ 안에서 발견된다. 무려 6,000개가 넘는 척추동물의 유해와 수많은 곤충들, 연체동물들, 식물들의 잔해들이 그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런 동물들의 부드러운 세포들이 압축된 잔해들은 상세하게 그 세포들의 조직을 보여 주었고 그 중 몇몇은 화학적 변화를 거의 거치지 않았다.” 이처럼 놀라운 퇴적물들은 정상적이며 느리고 균일하게 한 곳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의해 형성될 수가 없다. 생물체들이 어디에선가 운송되었고 퇴적물에 의해 급속도로 매장되었음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부드러운 조직들이 수백만 년 동안 썩으면서도 침해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해 왔다고 주장하는 균일론/진화론의 가정은 분명히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대안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일어났던 대격변 즉 수력에 의한 전 세계적 대격변뿐이며 이런 대홍수만이 이런 생물체들을 파멸시키고 운반하고 쌓아서 그들로 하여금 퇴적물 안에서 썩지 않고 보존될 수 있게 할 수 있다. 오직 창세기 대홍수만이 이렇게 관찰된 사실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대안인 것이다. 지질학자들은 지금까지 화석학이 진화론을 확고히 해줄 수 있으며 참으로 중요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실제 화석 기록에서 관찰된 것은 진화론을 대적하며 오히려 성경적 창조론과 대격변론을 지지해 준다. 진화론적 선조들을 갖고 있지 않은 채 매우 다양하며 발전된 형태의 생명체들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사실과 시간에 따라 종류들이 변하지 않고 여전히 같다는 사실, 그리고 화석 기록 안에 과도기 중간 단계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성경적 창조론/대홍수를 지지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매머드와 석화 된 나무들, 다층 나무들, 순간적 흔적들, 부드러운 조직들, 화석 무덤 등의 화석화 현상과 같은 증거들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른 바 ‘창세기 노아의 대홍수’라는 큰물에 의한 대격변이 순간적으로 전 세계에 이루어 놓은 역사를 보여 준다. 따라서 화석 기록이 제공해 주는 증거들은 창조와 창세기 대홍수에 대한 성경 기록을 확증해 주며, 동시에 진화와 균일론을 단숨에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구의 독특함 창조가 있었다는 사실은 반드시 창조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복잡한 설계는 주의 깊고 지적이며 숙련된 설계자를 필요로 하며 모든 조직은 조직체의 주관자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며 간단한 논리이다. 우주비행사들이 달에 착륙했을 때 바위 사이에 놓인 아주 섬세한 컴퓨터 시스템을 발견했다고 생각해 보자. 만일 그 컴퓨터가 공간 속에서 생겨난 바위들과 운석들의 우연한 충돌을 통해 또는 어떤 우연한 사건을 통해 진화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과연 그것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일까? 아니면 그것이 어떤 지적 창조자에 의해 세심하게 고안되었다고 결론짓는 것이 더 논리적일까? 일반적 상식대로라면 물론 후자의 설명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주스를 만드는 믹서 그 자체가 달착륙선 아폴로 16호로 변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이것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일이며 분별없고 불합리한 일이 아닌가? 분자의 우연한 조합을 통해 우연히 사람이 만들어져서 우연히 지금까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이 분별없고 불합리한 일은 아닐까? 물론 온 우주와 태양계가 하나님에 의해 고안되었다는 증거는 그것들이 단순히 우연에 의해 조합되었다는 그 어떤 가능성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다. 이제 우리는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해 매우 주의 깊고 특별하게 고안된 태양계의 몇 가지 특징을 생각해 보려 한다. 1.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매우 적당한 거리에 위치해 있고 이로써 우리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적당한 열량을 정확하게 받는다. 우리의 태양계 내의 다른 유성들은 태양에서 너무 가깝거나 멀어서 생명체들이 살 수 없다. 2. 지구의 회전 속도에 조그만 변화만 있어도 생명체들은 살 수 없다. 예를 들어 만일 지구가 현재 속도의 1/10으로 회전한다면 모든 식물이 밤에는 얼어 버릴 것이고 낮에는 바삭바삭 타 버릴 것이다. 3. 지구가 거의 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기 때문에 온도 변화는 적당한 한계 내에서 유지된다. 4. 극한 온도는 대기권 안에서 온실 효과를 나타내는 이산화탄소와 수증기 등에 의해 온화하게 만들어진다. 5. 지구로부터 약 384,000km 정도 떨어진 채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달은 지구에 전혀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바다의 조류를 일으킨다. 만약 달이 지구에서 현재 거리의 1/5 되는 위치에 있게 되면 대륙은 하루에 두 번씩 완전히 바다에 잠길 것이다. 6. 지구 지각의 두께와 바다의 깊이는 정교하게 고안되어 있다. 만일 지각의 두께가 증가하거나 바다의 길이가 단지 몇 미터 정도 더 길어진다면 자유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흡수율이 갑작스럽게 변해서 식물과 동물이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7. 지구의 축은 궤도 평면에 대한 수직축으로부터 23.5도 기울어져 있다. 이 같은 경사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과 더불어 먹이 공급을 원활히 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계절의 변화를 일으킨다. 8. 지구의 대기권(오존층)은 무서운 태양의 자외선 복사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보호막의 역할을 하는데 만일 이것이 없다면 모든 생물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9. 지구의 대기권은 날마다 초당 50km의 속도로 들어오는 약 2천만 개의 운석들로부터 지구를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일 이 같이 중요한 방패가 없다면 인류에 대한 위험이 무한대가 될 것이다. 10. 지구는 아주 완전한 물리적 크기와 질량을 갖고 있으므로 대기 압력과 중력 즉 물과 대기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힘 사이에 세심한 균이 유지되어 생명체가 존속할 수 있다. 11. 지구의 대기권을 이루는 두 가지 주요 성분은 질소(78%)와 산소(20%)이다. 이 두 물질 사이의 기묘한 조성비는 모든 생명체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12. 지구의 자기장은 해로운 우주 방사선으로부터 생명체를 보호하는 매우 중요한 보호막으로서 작용한다. 13. 지구는 필수적인 물리적 성질을 다 갖고 있으며 특히 생명체의 존속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물을 원활하게 공급하는 축복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지구가 어떤 목적을 위해 세심히 고안되고 창조되었다는 개념을 뒷받침 해주는 이런 형태의 예들을 얼마든지 많이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만으로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섬세한 생명체들에게 꼭 필요한 상호 의존적 조건들과 요소들이 완전하고 복잡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이 일들을 위해 누군가가 치밀하게 지적이고 목적으로 가득한 설계를 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토록 복잡하고 균형을 갖춘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들이 단지 우연에 의해 생겼다고 믿는 것은 절대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정직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라면 태양계가 하나님에 의해 지적으로 그리고 섬세하게 만들어졌다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편 115편 16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늘과 하늘들은 주의 것이로되 그분께서 땅은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주셨도다.” 아직도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못하는 독자는 다음의 말씀을 잘 음미해 보기 바란다. “그러나 이제 짐승들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너를 가르치리라. 공중의 날짐승들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일러 주리라. 혹은 땅에게 말하라. 땅이 너를 가르치리라. 바다의 물고기들도 네게 밝히 알려 주리라. 이 모든 것 중에 어느 것이 주의 손이 이 일을 이루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모든 생물의 혼과 모든 인간의 호흡이 그분의 손에 있느니라.”(욥12:7-10)
2009-07-17 13:52:19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7 ● 스콧 휴즈 중간 진화 단계의 부재 일반적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으로까지 발달하는 생명체의 기본적 단계는 다음과 같다. 제1단계 : 무생물 무기체, 제2단계 : 원생동물, 제3단계 : 무척추 후생동물, 제4단계 : 척추 어류, 제5단계 : 양서류, 제6단계 : 파충류, 제7단계 : 조류, 제8단계 : 네 발 가진 털 짐승, 제9단계 : 유인원, 제10단계 : 사람 지난 호에서 확인했듯이, 만약 진화가 이러한 방식으로 실제로 일어났다면, 우리는 화석의 기록 안에 보존된 수많은 과도기 중간 형태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즉 완벽하고 논리적이며 객관적인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모든 경우에 있어 주요한 집단들 사이의 존재하지 않는 과도기 중간 형태들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 이제 다음의 거대한 차이들을 살펴보자. 첫째, 죽은 물질로부터 살아 있는 원생동물로 변한다는 가정 속에 담긴 변화는 정말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변화인데 이것은 자연 발생을 반증했던 레디(Redi), 스팔란자니(Spallanzi), 그리고 파스퇴르(Pasteur) 등의 업적을 무시하는 순전한 추측일 뿐이다. 둘째,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진 미생물과 후생 동물인 무척추 동물의 복잡성과 다양성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셋째, 무척추 동물과 척추동물 사이에 존재해야 할 것으로 추정되는 ‘진화를 위한 과도기 중간 형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진화론자들이 이 두 형태 사이에 무려 1억 년이라는 기간이 있었다고 주장하므로 이 사실은 더욱더 놀라운데, 왜냐하면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과도 형태의 동물이 수십 억 개는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과도기 중간 형태는 단 한 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넷째, 어류로부터 양서류로의 진화론적 진보/발전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류가 양서류로 진화하는 데는 약 3천만 년이 걸린다고 알려져 있으나 아직 어느 누구도 한 마리의 양서/어류 중간 단계 생물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다. 실러캔스(Coelacanth, 멸종된 것으로 믿고 있던 중생대의 물고기. 최근 남아프리카해에서 몇 마리가 생존하고 있는 것이 발견됨)는 한때 과도기 중간 형태의 동물로 인용되곤 했으나 후에는 합당치 않은 예로 판명되었다. 실러캔스는 수백만 년 동안 멸종되지 않았고 1938년까지 살아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다섯째, 양서류와 서로 다른 파충류 사이에는 결코 중간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세이무리아(Seymouria)가 이 같은 연결고리로서 알려져 왔으나 그것은 지질 주상도에서 다른 파충류들이 이미 있었던 시대보다 2천만 년 뒤에나 나타난다.45) 여섯째, 파충류와 포유류 사이에는 어떠한 과도형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곱째, 파충류와 조류를 연결해주는 진화론 연결 고리가 하나도 없다. 진화론자들은 한 때 시조새가 이 둘 사이를 연결해주는 고리라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화석학자들의 발표에 의하면 그것은 완전한 조류이다. 여덟째, 진화론자들이 가정하는 인류의 조상(즉 어떤 형태의 유인원)으로부터 사람을 연결해 주는 중간 단계 혹은 과도 형태는 전혀 없다. 진화론자들이 사람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는 화석원인들은 실제로 유인원이거나 혹은 사람의 화석이며 결코 중간 단계가 아니다. 그런 화석들이 유인원과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동물들의 화석이라고 주장할 만한 과학적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 과도기 중간 형태의 동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로, 최근에 몇몇 과학자들은 진화가 점진적 작은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갑작스런 큰 변화에 의해 발생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단절 평형’(punctuated equilibrium)이라고 알려진 이 개념은 1977년부터 화석학자 굴드(Gould)와 엘드릿지(Eldredge) 등이 발전시킨 것이다. 일순간에 파충류가 알을 낳고 조류가 그 알로부터 부화된다는 것을 제안하고 있는 골드슈미트(Goldschmidt)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괴물’(hopeful monster)이라는 용어로 이 개념을 정립했다! 창조론자들은 이런 생각들이야말로 완전히 가상적이며 과학적 증거가 결여된 거짓 속임수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과학자들이야말로 상상 속에서 알을 낳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화석의 기록은 종들의 불변성을 보여 주며 대단히 중요한 증거 곧 과도기 중간 연결고리들을 전혀 보여 주지 않으며 매우 다양하며 복잡한 형태의 생물들이 자기들의 진화론적 조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나타났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들이야말로 우리가 강력하게 진화론을 거부하는 분명한 이유들이다. 한편 이 사실들은 성경적 창조 모델과 거의 완전하게 일치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화석의 바위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창조!”를 굳게 선포하고 있다. 화석화 과정 비록 충분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화석 기록은 진화론의 모체가 되는 균일론에 대해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대규모의 화석화 현상은 오늘날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물고기가 죽었다고 해서 곧장 바닥에 가라앉아 화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분해되거나 분해시키는 고기들에 의해 곧장 소멸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지금부터 50~60년 전에 도처의 평야에서 죽은 수백 만 마리의 버팔로(buffalo, 미국 들소) 시체들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에는 화석화 현상이 거의 없지만 과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화석화 현상이 많이 있었다. 우리가 화석 기록 속에서 발견하고 있는 ‘잘 보존된 수십 억 개의 화석들’은, 균일설/진화론을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이 추측하고 가르쳐 온 것처럼, 지금 이 세상에서 관찰할 수 있는 과정들에 의해 형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같은 화석들의 보존 상태는 비정상적이며 예외적이며 비규칙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지구 화석들의 기록은 불규칙하며 전 세계적 지각 변동 및 대홍수 등을 확실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 지질 주상도에 나타나는 화석의 기록들은 생물체 형성이 진화론을 따라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는 진화의 역사가 아니고 오히려 갑작스럽게 어떤 시대로부터 생명체들의 종말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대격변의 역사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주전 2,300년경에 노아의 대홍수에 의한 홍수 이전 시대의 전멸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노아의 대홍수성경은 노아의 대홍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지면 위에 있던 모든 생명체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하늘의 날짐승이 멸망하였더라. 그것들이 땅에서 멸망하였고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은 살아남았더라.”(창7:23). 화석의 기록진화론자들은 자기들이 추정하는 생물 형태의 진보 즉 간단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의 진보를 보여 주는 사실들이 화석의 기록들에서 발견되므로 이런 사실이 생명체의 진화를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화석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 생명체의 진보에 대한 사실이 전 세계적 대격변을 몰고 온 대홍수의 작용에 의해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화석의 기록을 살펴보면 마치 수중의 무척추 동물이 물고기로, 양서류로, 파충류로, 포유동물로, 그리고 사람으로 진보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에 대해 창조론자들은 단순히 대홍수로 인한 죽음과 파괴를 피할 수 있는 능력의 정도가 그 안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런 대격변의 사건 속에서는 수리학적, 생태학적, 생리학적 분류에 관한 일반적 규칙들에 대한 예외가 있을 수도 있으며, 창조 모델 안에서는 이러한 예외들이 예측될 수도 있고 수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같은 반전 현상은 그것 자체가 진화론자들이 추측하고 있는 생명체의 진화론적 변화에 대한 역전 현상이 되므로 진화론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지각 변동의 대파괴라 할 수 있는 창세기의 대홍수 기사를 확신시켜줄 수 있는 놀라운 화석화 현상들이 세계 도처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짐승들은 대개 입을 벌린 채, 등이 활처럼 구부러진 채, 무서운 모습으로 묻혀서 발견된다. 우리는 간단히 그 몇 가지 예를 들 것이다. 화석 무덤 : 전 세계에 걸쳐 문자 그대로 대규모의 화석들로 가득한 동굴, 계곡, 매장지가 발견 되었다. 이같이 다양한 동물의 화석들은 종종 무질서한 상태로 내버려진 채, 위치나 기후가 매우 다른 지역에서 나온다. 이 같은 현상은 전 세계적 대홍수로 인한 대변동에 의해서만 만족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아열대성 지역, 건조 지역, 추운 북쪽 지역의 여러 동물의 잔해들이 보존된 미국 메릴랜드 주 컴벌랜드의 동굴을 생각해 보라. 영국의 노퍽 산림 지대는 북쪽의 추운 지방 동물과 열대 지역의 따뜻한 기후에서 사는 동물, 그리고 온대 지역의 식물들이 서로 뒤섞인 채 남아 있다. 발트해의 호박무지, 네브래스카 주의 어게이트 스프링 채석장, 캘리포니아주의 라브리피트 목장, 스코틀랜드의 올드레드 샌드스톤, 영국과 프랑스의 무수한 바위균열계곡, 유럽의 많은 다른 지역도 이와 비슷한 매장물을 갖고 있다. 균일론/진화론 원리들은 결코 이런 이상한 현상들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거대한 화석 무덤과 대규모 매장지는 오직 전 세계에 걸쳐 일어난 대변동 즉 창세기의 대홍수를 강조하는 성경적 지각 변동에 의해서만 올바르게 설명될 수 있다. 분명히, 이것들은 창세기의 대홍수로 인한 강력한 물살에 의해 홍수 이전의 식물들과 동물들이 파괴되고 운반되고 쌓여서 화석으로 남은 것이다. 매머드 : 거대하고 갑작스런 지각 변동이 한때 지구를 강타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더욱 놀라운 증거는 북극 지방(북시베리아와 알래스카)에서 순식간에 죽은 수백만 마리의 매머드와 다른 거대한 짐승들 안에서 발견된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무릎을 꿇고 있거나 입에 음식을 물고 서 있으며 살과 털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물론 죽은 것을 빼고는) 원형 그대로 발견되고 있다. 눈과 적혈구는 굉장히 잘 보존되어 있으며, 세포 안에는 수분 분리 현상이 부분적으로 있었는데, 이것은 매머드들이 매우 갑작스럽게 얼게 되었고 지속적으로 얼려진 채 역사를 통과해 왔음을 잘 말해 준다. 다음은 네이버 지식 사전에 기록된 매머드에 대한 정의이다. 매머드 : 홍적세 중기부터 후기에 걸친 빙하기에 생존하였다. 특히 중기에 생존했던 것은 고형(古形) 매머드라고 한다. 크기는 3m가 넘지만, 코끼리로서는 중형으로 약간 큰 부류에 들 정도이다. 어금니는 엘레파스라의 공통적 특징인 능판(稜板)이 많이 모여서 빨래판 모양으로 되어 있다. 어금니는 굵고, 나선상으로 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대지방에 적응하여 생활하였으며 약 1만 년 전인 홍적세 말에 절멸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얼음 속에서 죽은 매머드가 동부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알래스카 등지에서 많이 발견되어 화석 코끼리 중에서 잘 알려져 있다. 몸은 약간 길고, 온몸이 담갈색 또는 암갈색의 긴 센털로 덮였으며, 피하지방이 두껍게 발달해 있다. 진화상으로 고형 매머드는 온난한 기후에 적합했고, 그 중 일부가 한랭지에 적응하여 전형적인 매머드가 되었다. 매머드는 인류와 관계가 깊은데, 구석기시대 후기에는 대형동물의 대표로서 사냥의 첫째 대상이었다. 그 당시의 동굴벽화에 매머드 사냥 그림이 묘사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관계가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유라시아·북아메리카 대륙에 분포하였다. 한국에서는 발견된 일이 없으나, 일본에서는 홋카이도에서 발견되었다(네이버 지식 사전). 이런 사전들은 한결같이 매머드가 죽은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매머드들이 화석 형태가 아니라 얼음에 묻혀 냉동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1846년 시베리아의 인디기르카 강 바닥에서 찾아낸 키 4m, 몸 길이 4.5m의 매머드는 어찌나 보존상태가 좋았던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특징은 서 있는 자세로 얼어붙었다는 점이다. 이는 매머드가 죽은 뒤에 냉동된 게 아니라 살아 움직이다가 한순간에 빙결됐음을 말해 준다. 급속 냉동을 보여 주는 증거는 또 있다. 그 후 발견된 매머드 일부의 경우 위뿐만이 아니라 입 안에도 씹던 풀들이 남아있었다. 이것은 ‘식사’중에 그대로 동결됐다는 것이다. 또한 희한한 사실은 매머드가 먹던 풀들이 열대 혹은 온대 식물이었다는 점이다. 이 현상을 규명하려 했던 균일론자들은 다 실패하고 말았다. 19세기 균일론의 대표격인 리엘(Charles Lyell) 역시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고, 이 문제가 자기의 진화론을 심각하게 위협함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그는 매머드들이 수영을 하다가 한파를 겪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분명히 부적당하며 우리가 목격한 사실과 전혀 맞지도 않는다. 다윈 역시 매머드들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고 인정하였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균일론/진화론은 이에 대해 결코 해답을 제시할 수 없으며 갑작스런 지각 변동에 의해서만 이런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창조론자들은 이 놀라운 상태에 대해 아주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그 이유는 대홍수 이전의 세계를 덮고 있는 증기 막이 대홍수 이후에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7장 11절에는 “그 날에 큰 깊음의 모든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증기 막은 세계 도처에 온실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 같은 온실 효과로 인해 홍수 이전의 기후는 거의 계절의 변화 없이 지구 전체를 통해 온화했을 것이다. 또한 그 때에는 비와 무지개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창2:5-6; 8:22; 9:13). 오늘날 우리가 전 세계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심한 폭풍은 이 같은 증기 막으로 인하여 결코 생성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창2:5,6; 히11:7). 이 같은 증기 막의 존재는 야자수 잎들, 과일 나무, 열대 해안의 갑각류, 산호초, 거대한 양의 아열대성 식물들이 추운 극지방에 묻혀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심지어 진화론을 믿는 과학자들 중에도 ‘극(極)이동’,또는 ‘극 점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 가설의 골자는 강력한 소유성의 충돌로 지구의 자전축이 약 20도 이동함에 따라 온화한 지역이 단 몇 시간 만에 극권으로 변하는 등 기후대가 급속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북반구에서는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남반구에서는 남극대륙에서 갑작스런 결빙이 야기됐다고 한다. 지구의 자전축에 변화가 올 경우 기후 이변 등 지구 생태계에 엄청난 영향이 미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4계절의 변화가 지축의 기울기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의 이런 주장은 기본적으로 노아의 대홍수 같은 대격변이 이 땅에 있어서 지구의 자전축을 바꾸었음을 지지한다. 다만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속에 두려 하지 않기 때문에 유성이나 우주인 등의 중립적 존재가 이 일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믿을 뿐이다. 자세히 지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부정할 수 없는 사건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말씀대로 믿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우리 주님은 선언하신다.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요20:29)
2009-07-17 13:50:41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6 ● 스콧 휴즈 화석학 지금까지 화석학은 진화론에 대해 가장 긍정적이며 확실한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화석학이란 한 마디로 화석 연구를 통해 선사 시대의 생명체를 다루는 지질학의 한 분야이다. 진화론자들은 생명체의 진화에 대한 실제적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화석의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화석의 기록은 실제로 진화론을 지지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성경적 창조론이나 대격변론을 지지하는가? 우리는 진화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과학자들이 펴낸 동화에 지나지 않으며 왕자로 변한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 같이 믿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줄 것이다. 다만 진화의 경우에는 마법적 변화가 동화에서처럼 순간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거의 무한대의 지질 시간이라는 마법의 지팡이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곧 살펴보겠지만 화석의 기록은 실제로 진화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성경적 창조론이나 대격변론을 지지해주고 있다. 진보된 생명체의 갑작스런 출현 지구 지각의 밑에서 약 3분의 2 되는 지점(선캄브리아기로 불림)에서 발견된 화석의 기록을 살펴보면 거기에 생명체의 형태가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선캄브리아기 다음 단계인 캄브리아기 암석에서는 수십 억 개의 매우 진보된 형태의 생명체 화석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 무척추 동물의 대부분이 캄브리아기의 화석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동물들은 매우 다양하므로 진화론자들조차도 이러한 진화를 위해 적어도 15억 년은 필요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정도이다. 만일 진화가 사실이라면 이 캄브리아기 생명체들에 대한 수십 억 개나 되는 진화론적 조상들이 선캄브리아기 암석들에서도 발견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유명한 생화학자 기쉬(Duane T. Gish)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선캄브리아기 암석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단 한 개의 다세포 동물 화석도 발견되지 않았다! 모순의 여지없이, 우리는 캄브리아기 동물군의 진화론적 조상들은, 설사 진화론자들이 그것들이 존재했음을 역설한다 하더라도,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략히 말해서 화석의 기록은 생명체들이, 진화론자들의 주장과 같이 진화를 위해 꼭 필요한 그것들의 조상들도 없이, 대단한 다양하고 복잡하고 풍부한 가운데 갑작스럽게 나타났음을 보여 준다! 분명히 이것은 점진적 유기체 진화의 증거가 아니며 초자연적 창조에 대한 증거이다. 종류들의 영원성 오래 된 것으로 추정되는 암석들 안에서 발견된 수많은 식물과 동물 화석들은, 그것들이 진화하여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현대판 후손들과 비교해 볼 때,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진화론자들이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한 것으로 추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갑각류 어족인 링굴라(Lingula)와 불가사리, 바퀴벌레, 박테리아 등은 각각 2.5억 년, 5억 년, 6억 년 전에 살았다고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그것들의 조상들과 비교할 때 아무런 차이도 없다. 다윈은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했는데 그의 말은 지금까지도 진리이다.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했다는 것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한 종이 다른 것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진화론자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또한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화석의 기록이 ‘종류에 따른 재생’이라는 성경적 원리를 강력히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생명체가 지속적인 흐름의 상태에 있어야만 한다는 진화론에 통렬한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성경은 창세기 시각부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만드셨다고 기록한다. 창세기 1장 11절: 식물이 종류대로 창조됨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과일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과일 나무를 땅 위에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장 21절: 바다의 생물들과 날짐승들이 종류대로 창조됨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이 풍성히 낸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피조물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날개 달린 모든 날짐승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장 24절: 땅의 생물들이 종류대로 창조됨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살아 있는 피조물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장 21절에는 진화론자들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진리가 들어 있다. 그들은 고래와 같은 포유동물이 육지에서 살다가 바다로 들어가 진회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고래들도 그때에 창조하셨다고 한다. 한편 사람의 타락 이후로 죄악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해서 그의 가족과 모든 짐승과 날짐승을 구원하셨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또 ‘그것들의 종류들이’ 등장한다. 바로 그 날에 노아와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과 함께한 그들의 세 아내가 방주로 들어가되 그들과 모든 짐승이 그것의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땅에서 기는 모든 것이 그것의 종류대로, 모든 날짐승 곧 모든 종류의 모든 새가 그것의 종류대로 들어가고(창7:13-14)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은 이처럼 치밀한 분이시다. ‘그것의 종류대로’(after its kind) 창조했다는 성경의 기록은 단지 화석의 기록에 의해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과학적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노련한 품종 개량사와 유전 공학자들은 종의 안정성이 그야말로 뛰어난 특성임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물론 특별한 유기체만을 위한 DNA에 의해 규정되는 어떤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이른 바 ‘종 안에서의 수평적 형질 전환’(때때로 미시적 진화로 불림)은 가능하며, 이것은 여러 가지 품종 개량에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자면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200개가 넘는 다양한 개가 있다. 또한 자연적 변이에 의해 1,500개의 다양한 산사 나무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 다윈이 목격한 다양한 피리새 역시 이러한 수평적 형질 전환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심지어 인류도 다양한 인종으로 될 수 있는 충분한 잠재성을 갖고 있다.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민13 : 28-33; 신2:10-11, 21)의 키가 2.7m나 되는 거인 아낙 자손들(Anakim)과 현재 중앙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키가 겨우 1.2m밖에 안 되는 피그미족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라. 그러나 하나의 유기체 종류가 완전히 새로운 유기체로 변하는 ‘수직적 형질 전환’(거시적 진화로 불림)은 불가능하며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개는 결코 말로 변할 수 없으며, 산사나무는 장미가 될 수 없고, 피리새는 다른 특성을 갖는 피리새 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여러 세기에 걸친 품종 개량실험은 유기체 진화론에 대항하여 설득력 있게 반박할 수 있는 확고한 증거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종 사이의 경계는 매우 실제적이며 끊을 수 없는 생물학적 사실이다. 또한 비정상적 교배가 시도될 때에는 언제나 번식 불능의 결과가 뒤따른다. 말 + 당나귀 ⇒ 불임 노새 얼룩말 + 말 ⇒ 불임 지브론키(Zebronkey) 사자 + 호랑이 ⇒ 불임 라이거(Liger) 이렇게 태어난 잡종들이 모두 다 어김없이 불임성을 갖게 되어 번식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진화론을 반박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성경적 용어인 ‘종류’(kind)가, 비록 어떤 사람들이 ‘종류’와 동식물의 ‘과’(family)가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낌에도 불구하고, 린네의 임의적 동식물 분류계와 어떤 직접적인 상호 관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기쉬 박사는 성경적 용어인 ‘종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종류란 보편적 특성들에 대해 여러 가지 상이한 유전자들을 소유한 유기체 집단이며, 일반적으로 평범한 환경 하에서 다른 집단과는 상호 교접하지 않는다.” 종류들의 영원성에 대한 마지막 예는 초파리에 대한 것이다. 초파리는 실험실에서 방사능 충격을 계속해서 받음으로 쉽게 1,000세대가 넘게 번식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진화론을 지지하는 어떤 종류의 발전이 일어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이 매우 다양한 형태의 돌연변이 기형 초파리를 생산해 내기는 했지만, 결코 어떠한 새로운 종류의 생명체 즉 진화론에 따른 새로운 생명 형태도 생산해 내지는 못했다. 그것들은 여전히 초파리였을 뿐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실질적으로 관찰된 과학적 사실들이 성경적 기록을 확인해 줌을 깨닫는다. 창조된 생명체들은 다른 종류가 아닌 바로 자신들의 종류대로만 번식하였다. 영원히 고정된 종류(창 1: 11, 12, 21, 24, 28) 안에서 허락된 제한적 변이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법칙은 신약 성경의 고린도전서 15장 38-39절에서도 또한 확인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그것(알갱이)에게 몸을 주시며 또 모든 씨에게 그것의 고유의 몸을 주시느니라. 모든 육체가 같은 육체는 아니니 한 종류는 사람의 육체요, 다른 것은 짐승의 육체요, 다른 것은 물고기의 육체요, 다른 것은 새의 육체라.” 과도기 형태의 부재 이제부터 우리는 아마도 진화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인 과도기 형태의 완벽한 부재 현상에 대해 논하려 한다.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 만일 생명체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하는 흐름 속에서 항상 존재해 왔다면, 각 종류가 뚜렷이 많은 만큼이나 그 수가 많은, 서로 다른 형태들 간의 중간/과도기 단계를 담고 있는 화석이 많이 존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떠한 화석에서도 ‘속’(major groups)이나 ‘문’(phyla) 사이의 과도기 중간 단계라 할 수 있는 것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 생명체들은 오늘날과 똑같이 선명하게 구별되어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화석의 기록에 보존된 촘촘한 단계적 변화의 기록을 발견하지 못하며, 대신에 늘 그 안에서 거대한 간격만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유기체 진화 이론에 치명적인 것이다. 심지어 뛰어난 진화론 수호자였던 다윈 자신도 이 같은 치명적 결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셀 수도 없이 많은 과도기 형태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지구의 지각 안에서 이들이 묻혀 있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모든 자연계는 우리가 보는 것처럼 잘 정돈된 종류들로만 존재하고 있으며 혼란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지질학 연구는 이 이론에 필요한 변화 즉 과거와 현재 사이에 무한정으로 많이 있어야 할 단계적 변화를 보여 주지 않는다. 참으로 이 사실은 진화론을 반박하는 많은 반론 중 가장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과도기 중간 단계의 부재는 지질학적 기록이 극도로 불완전하다는 데에 있다”. 비록 다윈이 이 같이 과도기 중간 단계들이 없음을 진실하게 인정하고 그 문제점을 심각하게 느꼈을 정도로 정직하기는 했지만, 그는 이것이 단지 화석 기록의 불완전함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희망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 이 중간연결고리들이 발견될 것이고 진화론에 치명타를 입힌 시간상의 간격들이 채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같이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변명들은 사실상 진화론자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피난처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네빌(George Neville)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화석 증거의 빈곤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변명할 필요가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화석은 이제 거의 다루기 힘들 정도로 많이 발견되었고, 발견된 화석들을 종합해 보기도 전에 새로운 것들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화석이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화석의 기록은 그 안에 여전히 많은 시간상의 간격을 포함하고 있으며 결코 연속적이지 않다.” 스웨덴 룬트 대학의 닐슨(N. Heribert-Nilsson) 교수는 40년이 넘게 진화론이라는 주제에 대해 연구해 왔고, 이 존재하지 않는 중간연결고리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사실 화석학에 근거한 사실들을 떠나서 진화론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화석들은 현재 매우 완벽하므로 과도기 형태의 부재 원인이 화석의 수량이 적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형태의 부재는 사실이며 화석들은 결코 그런 간격을 채워주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윈의 시대가 지나간 지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는 그 때보다 더 적은 수의 ‘과도기 중간 형태’가 남아 있을 뿐이다. 다윈이 희망한대로 보다 많은 수의 과도기 중간형태가 발견되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실질적으로 더 적은 수의 형태만이 남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예전의 몇몇 고전적 진화론 사례들 - 예를 들어 시조새 등과 같은 사례 - 이 오늘날에는 새로운 정보와 발견으로 인해 버림을 받거나 무시를 받게 되었고, 더 이상 새로운 과도기 형태들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의 겁 없는 믿음은 더욱더 완강하다. 룬(A. Lunn)은 언젠가 이러한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풍자의 글을 썼다. “믿음은 바라고 기대하는 화석에 대한 실상이요, 볼 수 없는 중간연결고리에 대한 증거이다.” 잘 발달되고 확고히 정립된 생물 분류학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 성경적 창조론을 지지하는 데 사용된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생명체는 계속적으로 흐르는 상태에 있으며 심지어 극소한 돌연변이 같은 변화를 통해 변화한다는 진화론적 모델의 근본적 가정을 잠시 생각해 보자.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때는 생물의 분류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만다. 그러나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잘 구별되며 서로 분리된 범주 안에서 쉽게 분류된다는 사실은 창조 모델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성경은 창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히11:3).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이미 존재하던 것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창11:6). 이런 믿음을 가지려는 모든 분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치길 원한다.
2009-07-17 13:48:04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5 ● 스콧 휴즈 지구의 형성 연대 2 지난 호에 이어서 이번 호에서도 성경의 연대가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몇몇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려 한다. 사실 지구의 연대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6000년에 지나지 않음을 확신하면 창조와 진화 문제의 90% 이상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조금 더 현실적인 데이터와 함께 짚고 넘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a) 인구 증가 지구의 형성 연대가 매우 짧음을 설득력 있게 증언하는 또 다른 사실은 인구 증가 과정이다. 진화론자들은 인류가 적어도 1백만 년 전부터 이 땅에 거주해 왔다고 믿고 있고 반면에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인류가 단지 몇 천 년 전부터 이 땅에 거주해 왔다고 믿고 있다. 사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근본적 크리스천들은 아담부터 지금까지 약 6000년이 지난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서로 다른 견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인구 증가에 대한 통계로부터 얻은 자료/정보는 어떤 것을 더 지지하고 있는가?”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는 평균 인구 증가율을 현재 인구 증가율의 약 1/4인 ‘1년당 평균 0.5%’ 정도라고 가정하면 현재의 전 세계 인구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단지 4,000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음을 간단한 계산을 통해 보여 준 바 있다. 이 계산은 전쟁이나 질병으로 인해 인구 증가율이 평균치 이하로 떨어진 기간도 충분히 감안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리스 박사는 약 50억 정도인 현재 인구가 백만 년이라는 진화 역사의 결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결코 통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만일 인구가 백만 년 동안 매년 0.5%씩 증가한다면 현 세대의 사람 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숫자인 10의 2100승(1에 0이 2100개 붙은 수)이 될 것이다! 온 우주를 꽉 채우기 위해서 단지 10의 130승 개 정도의 전자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진화론의 허구가 어느 정도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터무니 없이 증폭된 인구의 증가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류 연대기에 대한 성경의 창조 모델이 인류의 형성 연대에 대해 훨씬 더 믿을 만한 수치를 말해 준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단지 수천 년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수백만 년 혹은 수십 억 년이나 된 것이 아니다. 인구 증가 등과 관련해서 성경의 기록과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세계의 모든 문명은 지금부터 약 4300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의 일들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아 즉 선사시대에 일어났으므로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다. 그런데 성경은 이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가? 지금부터 약 4350년 전에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죽었고 단지 그의 가족 8명이 살아남아 온 인류의 새로운 조상들이 되었다. 그들은 급격히 불어났지만 하나님의 명령 즉 “온 땅에 퍼져 나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거역하고 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 부근에 있던 바벨탑에 모여 살면서 마귀를 숭배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은 각각 같은 말을 쓰는 무리들끼리 떼를 지어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민족의 시작이요, 문명의 시작이 되었다. 다시 말해 BC 2300년 전에 다른 지역에 문화나 문자 혹은 역사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그때까지 그런 지역에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세계 4대 문명이 모두 BC 2300년경에 시작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단기는 어떤가? 한민족의 시조로 알려진 단군의 즉위를 기점으로 이루어진 단군기원(단기)은 성경과 얼마나 잘 부합되는가? 단기의 기원은 BC 2333년이며 이때는 노아의 홍수 이후로서 민족들의 대이동 바로 전으로 추정된다. 사실 성경의 기록이 아니므로 단기 등은 틀릴 수 있으나 중국, 인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한국 등의 역사가 모두 BC 23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 민족들이 나뉜 사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사실 중국인들의 원래 종교는 유일신인 상제를 섬기는 것이었으며 지금도 남아 있는 북경의 천단은 바로 이 상제를 경배하던 장소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일하신 하나님 사상이 마귀 숭배에 의해 모두 희석되었지만 세계 도처에 노아의 후손들이 처음에 전해 준 유일신 여호와의 신앙은 여전히 군데군데 많이 남아 있다. (b) 지구의 자전 지구의 자전 속도는 지구에 대한 태양과 달의 중력, 저항력과 다른 원인들로 인해 점차 느려지고 있다. 균일론을 믿는 지질학자들이 고집하는 대로, 만일 지구의 나이가 수십 억 년이며 또한 지구의 자전 속도가 일정하게 감속되었다면 현재 지구의 자전 속도는 “0”이 되어야만 한다. 게다가 만일 수십 억 년을 거슬러 계산해 보면 그때에는 원심력이 매우 컸을 것이고 따라서 모든 대륙은 다 적도 지역으로 이동했어야만 했을 것이며 지구의 전체 형태는 얇은 판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지구의 모양은 구형이다. 지구 내의 대륙들은 적도 지방으로만 모여 있지도 않으며 또 지구는 그 회전축을 중심으로 적도에서 시간당 약 1600km의 속도로 계속해서 돌고 있다. 분명한 결론은 지구의 연대가 결코 수십 억 년이 아니라는 것이다. (c) 달의 퇴행 지구로부터 달이 퇴행한다는 사실은 지구와 달의 형성 연대가 비교적 짧다는 것을 보여 주는 또 다른 간단한 증거이다. 현재 달의 퇴행률은 잘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지구와 달의 형성 연대가 그리 길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진화론자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반드시 변호해야 할 기본적 문제는 현재 달이 지구에 너무 밀접해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달의 퇴행 속도와 진화론자들이 40억 년에서 50억 년 정도로 가정하고 있는 지구의 형성 연대를 사용하여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에 대한 계산을 해 보면 달은 현재 위치보다 지구로부터 훨씬 더 멀리 있어야만 한다. 지구와 달은 진화론을 믿는 과학자들의 가정처럼 그렇게 오래 전에 형성된 것이 결코 아니다. 생명체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진화론자들이 꼭 필요로 하는 엄청나게 긴 시간 즉 50억 년이니 200억 년이니 하는 긴 시간은 분명히 신화 속에나 나오는 것이며 실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d) 대기 중의 헬륨 지구의 형성 연대가 짧음을 잘 입증해 주는 또 다른 예는 대기 중에 있는 헬륨의 양이 매우 작다는 점이다. 진화론자들은 헬륨을 생산하는 우라늄과 토륨의 방사능 감소 현상이 지각 내에서 지난 수십 억 년간 존재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이 같은 현상이 수십 억 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면 지구의 대기는 현재 대기의 헬륨 농도(200,000개 중 1개)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헬륨을 포함해야만 한다. 이처럼 많이 있어야만 하는 헬륨의 부재 현상에 대해 그들은 일반적으로 헬륨이 외기권을 통해 날아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같은 가정을 지지할 만한 증거는 전혀 없으며 더욱이 최근의 자료를 보면 헬륨은 수소처럼 우주 공간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진화론자들을 더욱더 어렵게 만든 것은 실제로 태양의 코로나로 인해 헬륨이 지구의 바깥 공간으로부터 들어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수치에 근거해서 계산을 해 보면 자연적 알파선 감소 현상이 현재 관측되고 있는 대기 중 헬륨 조성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약 만 년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우주의 형성 연대 (a) 혜성 혜성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태양계와 거의 같은 연대를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혜성들은 태양 주위의 궤도를 한 번씩 돌 때마다 전체 질량의 일부분이 불타서 사라지게 된다. 신중한 연구 끝에 과학자들은 짧은 주기를 갖고 있는 혜성들의 경우 이러한 질량 감소 현상으로 인해 약 만 년 안에 혜성들 자체가 완전히 소멸됨을 밝혀냈다. 혜성들이 저절로 형성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여전히 수많은 혜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태양계의 형성 연대가 만 년 이상 될 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태양계의 형성 연대가 매우 짧음을 보여 주는 이 증거를 반박할 수 있는 설명을 하지 못했다. (b) 포인팅-로버트슨 효과 거대한 진공청소기 같은 역할을 하는 태양은 매일 약 10만 톤 정도의 미소 유성체를 쓸어 모으고 있다. 또한 태양의 복사압에 의한 힘은 행성간의 작은 먼지 입자들을 우주로 몰아내고 있으며 이 현상은 '포인팅-로버트슨 효과'(Poynting-Robertson Effect)라고 알려져 있다. 만약 태양계가 정말로 수십 억 년간 존재했다면 이 먼지 입자들은 현재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현재의 감소 비율대로 진행했다면 감지할 수 있는 그런 먼지들을 재충전시키는 근원이 없음을 감안해 볼 때 태양은 만 년 이내에 ‘자기의 집 청소를 다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태양계 내에는 아직도 아주 작은 유성체가 많이 있으며 이 사실은 태양계의 형성 연대가 매우 짧음을 확실히 보여 준다. (c) 성단 성단(星團) 역시 우주의 형성 연대가 짧음을 보여 준다. 성단은 어떤 작가가 '벌떼와 같다.'라고 표현 한 것과 같이, 수백 개 혹은 수천 개의 움직이는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별들은 중력에 의해 서로 뭉쳐 있는데 어떤 성단에서는 그 내부의 별들이 매우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수백만 년이나 수십 억 년 동안은 계속해서 뭉쳐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우주에 성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주의 형성 연대가 수천 년 정도뿐이 안 됐음을 확실히 보여 주는 증거이다. (d) 거성 태양이 내고 있는 에너지는 10억 개의 수소 폭탄이 매초 계속해서 폭발할 때 내는 에너지와 같은 것으로 추산된다. 어떤 별들은 매우 크고 밝기 때문에 태양이 내는 것보다 무려 10만에서 100만 배 정도나 빠르게 에너지를 여러 곳으로 방출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별들은 이 같은 비율로 수백만 년 혹은 수십 억 년 동안 계속해서 핵융합 에너지 생산 과정을 실행시킬 만큼의 충분한 수소를 초기에 포함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이 별들의 초기 무게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대로 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별들의 연대는 수십 억 년이 아닐 뿐 아니라 심지어 수백만 년도 아니며 단지 수천 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제시한 예들은 지구와 태양계와 우주의 형성 연대가 비교적 짧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많은 현상 중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외에도 다른 많은 예를 인용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제시한 것만으로도 지구와 우주의 형성 연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개념을 지지해 주는 증거를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사람은 증거에 의해 조금 변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마음의 편견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지옥이 있음을 확실한 진술로 보여 주셨다. 그곳은 영원한 불구덩이요, 유황불이 타는 곳이며 거기 들어간 사람들의 벌레들이 무수히 그들을 갉아먹어도 그들의 육체가 소멸되지 않는 곳이다. 이렇게 사실을 증언하시고는 누가복음 16장에서 지옥에 간 부자의 증언을 직접 소개하셨다. 그 부자는 죄로 인해 지옥에 갔으며 거기서 너무나 뜨거워서 애타게 물 한 방울 얻기를 갈망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러한 처참한 사실을 깨달은 그는 비록 자기는 늦었지만 자기 집에 아직 남아 있는 자기 형제들이 생각나서 그들에게 전령을 보내어 지옥이 있으니 제발 그들이 믿고 회개함으로 거기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 간청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분명히 그에게 대답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대언자들이 기록해 준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것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것을 믿지 않으면 심지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사람이 지옥의 실상을 증언해도 그의 말을 믿지 못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특별 창조를 증언하는 증거들은 수도 없이 많다. 우리 집에는 보스톤 테리어 종류의 개가 하나 있다. 나와 내 아내와 딸들은 그 개의 눈과 털과 발바닥과 혀와 이빨을 보면서 감동에 빠진다.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가! 사람이 이런 것을 제조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이 그냥 생길 수 있을까? 한 마디로 기이함 그 자체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몸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가?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내가 주를 찬양하리니 내가 두렵게 또 놀랍게 만들어졌나이다. 주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놀라우니 내 혼이 그것들을 매우 잘 아나이다.”(시139:14) 이번 달에는 독자 여러분의 몸을 가만히 보면서 창조의 신비에 두려움을 갖고 놀라움을 갖기 바란다.
2009-07-17 13:46:2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