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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대 형제님,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성경 기록을 바꾸든가, 우리의 생각을 바꾸든가." 말씀에 아멘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성경신자로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겠지요. 그리고 잘못된 성경해석이 미치는 폐단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홍승대형제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5-04-15 08:55:38 | 한원규
(삿11:29 그때에 {주}의 [영]께서 입다에게 임하셨으므로) 상식적으로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서 몰렉의 가증한 인신제사를 서원하고 행한다는 것은 어느누구라도 상상할수 없는 일일것입니다. 명료하게 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경기록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려가면 문제될것이 없지요.
2015-04-14 23:13:08 | 김영익
형제님의 글을 읽으며 다시금 성경은 전체 문맥을 넓게 보며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힘써야 함과 더불어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시공간만 다를 뿐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함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바쁘신 가운데에도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중요한 논점에 관한 귀한 깨달음을 나누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04-14 19:48:38 | 김대용
오늘은 성경 기록대로 입다의 딸에 관련된 사사기 11장을 읽어 볼까 합니다.   이미 킵바이블에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제게 깨달음을 허락하신 대로 부족하지만 소박한 제 의견을 여러분과 나누어 보려 합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801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94    (삿 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떠나 평안히 돌아올 때에 무엇이든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삿 11:34) ¶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작은북을 잡고 춤추며 나아와 그를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아이로 그녀 외에는 그에게 아들딸이 없었더라. (삿 11:37) 그녀가 또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나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삿 11: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고 (삿 11:39)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그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풍습이 되어 (삿 11: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일 년에 나흘씩 애곡하였더라.   위의 성경 기록을 다시 한 번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입다는 무엇이든지 자신을 맞이하는 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2) 그런데, 그를 맞이한 것은 그의 무남독녀입니다.   (3) 딸은 아버지에게 서원한 것을 자신에게 행하라고 합니다.   (4) 그런데 이때 뜬금없이 입다의 딸은 ‘virginity’로 인하여 애곡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지금 자신의 배를 가르고 각을 떠서 태워 죽이겠다고, 즉 번제 헌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는데 자신이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본인은 시집가지 못하는 것이 슬퍼서 애곡합니다. 대단히 이상하죠? 저 같으면, 그동안 못 먹어 본 산해진미를 마음껏 먹는다든가, 여행을 실컷 한다든가, 아니면 정말로 죽기 전에 가서 남자를 안다든가 등등을 하겠습니다.   자~! 성경 기록대로 virginity로 인하여 애곡한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virginity에 즉 ‘처녀로 지내는 것’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5) 그녀는 두 달 뒤에 아버지에게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를 알지 아니 하였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삿 11:38) And he said, Go.              And he sent her away for two months:              and she went with her companions,              and bewailed her virginity upon the mountains. (삿 11:39) And it came to pass at the end of two months, that she returned unto her father, who did with her according to his vow which he had vowed:             and she knew no man.             And it was a custom in Israel, (삿 11:40) That the daughters of Israel went yearly to lament the daughter of Jephthah the Gileadite four days in a year.   누군가는(?) And는 시간 순서를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모든 것이 And에 맞추어 시간 순서대로 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실제로 38절, 39절에 보면 모든 것이 일의 순서대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입다가 딸에게 자신의 서원을 실행했고, 그 결과 그 딸은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뒤에 입다의 딸이 애곡한 것처럼 그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풍습이 되어 이스라엘 딸들이 매년 나흘씩 애곡합니다.   일의 순서를 다시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1절 첫째로 입다는 자신을 맞이하는 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34절 그의 딸이 입다를 맞이했습니다. 38절 그의 딸이 산에 올라가 자신의 virginity로 인하여 애곡했습니다. 39절 입다가 딸에게 자신의 서원을 실행했습니다. 39절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습니다. 39절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풍습이 되었습니다.   분명 입다는 자신의 서원(번제 헌물로 드리는 것)을 실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그의 딸이 재가 된 것도 아니고, 죽었다는 기록도 성경에 나오지 않고, 단지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 입다의 딸이 처녀였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처녀인 것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의 상태를 나타내지만,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행위의 주체가 적극적으로 남자와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즉, 이 말은 입다의 딸이 처녀로 죽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음, 즉 남자와 동침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 죽은 사람은 처녀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knew’를(즉 동침을) 할 수는 없습니다. ‘Knew’는 동사입니다. 상태의 ‘was’가 아닙니다.   만약에 입다의 딸이 처녀로서 죽었음을 표시하려면, “그녀는 처녀였다(she was virgin)” 또는 “그녀는 처녀였었다(she had been virgin.)”라고 표현하는 것이 전체 문맥상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형보다 한 단계 앞선 과거완료형을 써서 죽기 전의 입다의 딸의 상태를 알려주는 것이 맞습니다. 이러면, 논란의 소지도 없이 입다가 자기 딸을 짐승처럼 불태워 죽였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she knew no man)”고 말합니다.   바로 이 기록이 입다의 딸이 결코 죽지 않았음을 명백히 알려줍니다. 이제 우리는 위의 성경 기록이 우리의 상식과 모순됨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번제 헌물로 드리면, 당연히 죽여서 태우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성경 기록은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며 죽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구체적인 행동을 하였음을 우리에게 더없이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성경 기록을 바꾸든가, 우리의 생각을 바꾸든가 말입니다. 사람을 번제 헌물로(조금 더 정확하게는 ‘번제 헌물을 대신하여’, for burnt offering, ‘as burnt offering’이 아님), 바친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을 죽여서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태워 오직 주님께 바치는 번제 헌물처럼 (2) 사람의 전 생애를 주님께 바치는 것이며 (3) 여자인 경우는 남자를 알지 않고 처녀로 주님이 정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사사기 11장을 성경 기록대로 읽는 방법입니다.   이것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성경이 읽히나요? 앞 문장인 ‘번제 헌물로’에 너무 집착하시지 말고, 39절 뒤 문장도 같이 읽어 주세요. 37절에서 39절까지 전체문맥이 계속해서 viginity를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난해 구절로 분류하는 성경 기록일수록 앞뒤 문맥을 넓게 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한 지식과 지능이 없어도 편견 없이 차분하게 성경을 읽으면 누구라도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를 능히 깨달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의 소박한 나눔이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5-15 18:22:50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5-04-14 18:28:34 | 홍승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 킵바이블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익히는 모든 형제/자매님 평안하신지요.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세상은 재창조된 것이라고 믿는 분들의 글과 강의를 접하며 그동안 생각했던 몇 가지를 소박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재창조론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세상’이 아니고 ‘세상들’이라고 복수로 표현된 것을 두고는 너무나도 단호히 이것들이 ‘멸망 당한 이전 세상’과 ‘재창조된 현 세상’을 가리킨다고 하며, 그 주장의 토대 위에서 계속해서 다른 성경 기록들까지도 자신들의 믿음에 짜 맞추다가 크게 실족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Through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fram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things which are seen were not made of things which do appear.   히브리서 11장 3절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11장 1절과 2절에 나와 있으며, 3절을 포함하여 뒤따르는 11장의 나머지 구절들 전체가 이 두 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확증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히11:1-2)     이제 이 말씀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입니다. 2.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3. 믿음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은 위의 내용 중 “2.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와 연관된 구절입니다.   3절을 읽어 보면, 두 개의 문장이 나란히 세 가지 내용을 대비하면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비된 부분을 손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아래에 도표화해 보았습니다.         이 구절은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에 의해 지어지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을 통해 깨닫는” 것임을 먼저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를 통해 우리가 알고 기억해야 할 원리, 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온 우주의 모든 것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ings which are seen’이라고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말하기 전에 쓴 바로 앞의 문장에서 등장한 ‘세상들이’라는 단어는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세상들이’에 ‘현 세상’ 외에 (재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옛 세상’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이미 멸망 당해 없어졌기 때문에 현재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보이는 것들’이라고 표현한 사도 바울의 의도와는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여기 나오는 ‘세상들’은 지금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며, 결국 재창조를 믿는 분들이 주장하는 허구의 공간인 ‘옛 세상’을 포함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3절에서 ‘세상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뜻은 이미 히브리서 1장 2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아들 하나님께서 친히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라고 번역된 영어 단어 ‘world’는 1차적으로 사람들이 사는 공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세상 외에도 동물, 식물, 물고기, 곤충, 별들이 거하는 세상들도 다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려면 세상(world)을 세계(world)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위에 수많은 세계들이 있음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즉, 크게는 은하계, 태양계, 자연계, 해저 세계 등으로부터, 인간 세계, 동물 세계, 식물 세계, 광물계 등등 얼마든지 총칭적 용어인 ‘세계’를 세부적으로 나누어 구분해 표현하고 있지요.   그럼 왜 간단히 ‘세상’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을 ‘세상들’이라고 했을까요? 재창조를 믿고 싶은 분들은 “단수를 썼더라면 재창조에 관한 추측이 없었을 텐데 복수를 쓴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면서, 또 다른 근거를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세상들’이라는 단어는 그 다음 문장에서 쓸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과 연계(대비)되어 사용된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단어가 총체적이고 개념적인데 반해 ‘세상들’은 구분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이므로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다 더 시각화해 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은하계’ 하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습니까? 따라서 ‘세상들’이라고 복수형 단어를 사용한 것이 그 문장이 의도한 의미에 더 적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세상들’이란 단어를 하나 보았다고 해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 세상’ 외에도 ‘옛 세상’이 있었는데 멸망 당했다고 생각하면서 성경 말씀에 있지도 않은 내용을 자기 확신 가운데 주장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주석가들이 있었지만 단 한 사람도 이런 곳에 나오는 ‘세상들’을 재창조와 연관시켜 ’옛 세상’, ‘현 세상’ 등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앞뒤 문맥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우주 공간의 모든 것들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고 그 일을 예수님이 직접 하셨으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 일을 안다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성경기록자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성경을 왜곡하려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주석은 요한복음 1장: 2-3절에 있습니다.   바로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   우리 예수님은 재창조를 알지 못하십니다.   사람을 지은 일 자체가 창조가 시작될 때, 우주 공간과 땅이 만들어진 그때, 즉 창세기 1장 1절에서 6일째 되는 날에 이루어진 것이지 재창조 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막10:6)   여기도 시작(beginning)을 창세기처럼 처음으로 바꾸어서 이해하시면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처음부터 즉 창조를 시작하시는 그 처음에 사람들을 만드셨습니다. 재창조 같은 것은 우리 주님의 머릿속에 없었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72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87       (*) 다음은, 재창조가 킹제임스 성경의 진리이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어 거기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기록된 대로 믿는 이들만 알 수 있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글에 대한 반박입니다. <관리자>   --------------------------  어떤 재창조론자의 주장 --------------------------   *현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아는 이들에게 주는 보너스   지금 있는 현 세상을 셋으로 나누면 노아의 홍수를 기준으로 옛 세상, 천년 왕국으로 기준으로 오는 세상(마12:32)이 된다. 천년 왕국을 기준으로 이 세상(천년 왕국 전)과 저 세상(천년 왕국)으로 구분한다(눅20:34,35). 옛 세상, 이 세상, 저 세상 이 셋이 현 세상이며 천년 왕국이 끝날 때 "현 세상"은 불로 멸망한다(벧후3:10-12).   -------------------  이에 대한 반박 -------------------   문맥이 이상해서 정확한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지만, 불의 멸망 이후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므로 땅은 영원하다. 노아의 홍수 이전 세상도 물로 멸하셨지만 일정 기간을 거쳐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세상을 여러 개로 나눈다 해서 완전 멸망과 재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재창조를 합리화하기 위한 속임수다.   홍수 이전과 이후, 천년왕국 이전과 이후는 거주민이 다르고 환경이 다를 뿐 같은 세상이다. 노아에게 “모든 것이 죽으리라.” 하신 말씀도 정말 '모든 것'인가? ‘방주 속 생명들과 코로 숨 쉬지 않는 모든 것’을 제외한 심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세상을 멸하신 것이며(창6:13, 17), 노아가 맞은 세상이 새로운 세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는 명령을 다시 주신다(창9:1, 7). 그러므로 <물의 넘침으로 인한 멸망 = 노아의 홍수>의 공식이 성립된다. 천년왕국에 갈 때도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있었다고 주장되는 재창조 수준의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1. 홍수 이전 세상 2. 지금 세상 3. 다가올 세상   굳이 세상을 나눌 필요도 없지만 재창조를 주장하는 모든 구절을 이렇게 보아도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자연스럽다. 근거 없이 지금의 세상은 하나의 세상이고 그때의 세상은 재창조 이전의 세상이라고 우길 아무 근거가 없다.   ━━━━━━━     부디 우리 모두가 편견과 왜곡 없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읽고 해석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성화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5-15 18:23:2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5-04-10 16:56:14 | 최상만
안녕하세요?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 저는 계시록을 강해하며 계3:5의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는’ 것의 의미를 성실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기는 자 곧 그는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 시절 강해한 내용을 되돌아보니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뒤 다시 글을 썼지만 역시 전체 성경과 조화를 이루는 데 조금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1999   이런 가운데 요즘 저희 교회에서 성경 Q & A를 오후에 진행하는데 성도들 중 이것을 궁금해하는 분이 다시 질문을 올려 주셨습니다. 이분의 질문의 핵심은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지으면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고 구원이 취소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여기저기를 찾아보며 이 말씀에 관하여 연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팀 라헤이(Tim LaHaye) 목사님이 설명해 놓은 것이 성경 전체를 아우르며 조화를 이루는 바른 해석인 것 같아 소개합니다. 라헤이 목사님은 킹제임스 성경을 쓰며 환난 전 휴거를 설명하는 분입니다. 환난 전 휴거에 대한 그분의 소설 <Left Behind>는 미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책입니다.    http://www.gnfi.org/articles/teachings-pdf-downloads/103-the-book-of-life (다음 글은 라헤이 목사님이 지은 <Prophecy Study Bible>에 있는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런 글을 통해 성경을 통합적으로 보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   먼저 생명책(book of life)을 살펴봅시다. 구약에는 생명책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사악한 자들)을 산 자들의 책에서 지우사 의로운 자들과 함께 기록하지 마소서(시69:28).   이 책은 하나님의 책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32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리하지 아니하시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서 나를 지워 버리소서, 하니 33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그를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출32:32-33).   이 책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 책이며 여기에는 우리의 몸이 모태에서 형성되는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눈이 아직 불완전한 나의 실체를 보셨으며 계속해서 형성된 나의 모든 지체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되 그것들 중에 아직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 기록되었나이다(시139:16).   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죄를 짓고 용서받지 못한 자(출32:33), 즉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얻지 못한 자 2. 이기지 못한 자(계3:5), 여기서 ‘이기는 자’는 행위를 많이 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 즉 모든 성도를 말합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3. 성경 말씀을 고의로 변개한 자(계22:19)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대개 우리는 사람이 구원받을 때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그것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면 누구든지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그가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 있는 한 신자든 불신자든 그의 이름은 여전히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자 즉 불신자와 성경 변개자 같은 죄인들의 이름은 거기서 지워집니다.   한편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책이 등장합니다. 이 책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그 이름이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책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곧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계13:8).   여기의 어린양은 물론 세상 죄를 제거하는 예수님을 말합니다(요1:29).   ‘어린양의 생명책’에는 그분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일단 이름이 오르면, 즉 구원받으면 어린양께서 끝까지 그를 구원하실 수 있으므로 이름이 지워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심을 보건대 그분은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느니라(히7:25).   그러므로 ‘생명책’과 ‘어린양의 생명책’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책으로 생각됩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더럽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또 무엇이든지 가증한 것을 이루게 하거나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도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경우 그 이름은 처음부터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 그의 이름은 살아있는 동안 기록되어 있던 ‘생명책’에서 제거됩니다.     --------- 결론 ---------     비록 구약 시대 이야기지만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를 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 땅에서 이름이 있었지만 죽은 뒤에는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모르십니다. 반면에 구원받은 아브라함과 나사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도 비슷한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제 너희가 [하나님]을 안 뒤에 혹은 [하나님]께 알려진 뒤에 어찌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 다시 그것에 속박 당하려 하느냐?   여기의 ‘너희’는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받을 때 하나님에게 알려집니다. 물론 하나님은 구원받기 전에도 그를 아시지만(생명책으로), 구원받아야 비로소 그를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으로 아십니다. 갈4:9는 구원받지 않으면 그 사람을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말합니다. 즉 ‘어린양의 생명책’의 이름으로는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럭크맨의 영향을 받아 재창조를 굳게 지지하는 리건(David Reagan) 목사도 이에 대해서는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learnthebible.org/blotting-out-of-names-the-book-of-life.html   그의 마지막 권고가 인상적입니다. 영어로 그대로 적습니다.   If all men are in the book of life, then there is hope for them as long as they live. We need to strive to make sure that more of them continue to live--even when they have left the land of the living. We need to take to them "all the words of this life" (Acts 5:20) about how to trust in "the Prince of life" (Acts 3:15) so that their names will not be blotted from the book of life.     참, 질문을 주신 분에게 답을 드립니다.   어린양의 피로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토록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이름이 삭제되지 않습니다.한편,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죽으면 그의 이름은 살아있는 동안 기록되어 있던  ‘생명책’에서 지워집니다.   제가 처음부터 조금 더 잘 연구해서 알려드렸으면 혼동이 조금 덜 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세심하고 성실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 럭크맨이든 리건이든 라헤이든 그 누구든 극단적 세대주의 해석을 하지 않고 누가 봐도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온전한 의견을 제시하면 언제라도 우리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가진 우리는 다만 그들의 몇몇 극단적인 주장만 피하면 됩니다.  
2015-04-10 15:43:28 | 관리자
안녕하세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 메일 드립니다.   마태복음 18장 22절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seventy times seven’이라고 나와 있고 흠정역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Jesus saith unto him, I say not unto thee,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개역성경에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나와 있는데 개역성경과 함께 배열된 NIV에는 ‘seventy-seven times’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일흔일곱 번을 뜻하는데 작년에 교황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도 77번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또 같은 ‘seventy times seven’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 맞는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로 주신 말씀이 이렇듯 달리 표현되기에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킹제임스 성경신자로써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혹시 이 문제에 대해서 킵바이블 사이트에 정확하게 정리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그렇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질문자께서 지적하신 대로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70 x 7)까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7이 완전수이므로 이 말은 보통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영어로 된 다른 역본들을 살펴보았는데 유독 NIV만 77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 NIV는 '곱하기'(times)를 '더하기'(plus)로 바꾼 셈이 됩니다. 이러고는 조금 미안했던지 각주에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우리 성경 그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보시면 됩니다. 바로 이렇게 그리스어, 영어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15-04-10 12:26:33 | 관리자
성경 Q&A 02 (입다의 딸은 살았는가, 죽었는가?)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94 들어 보시면 아주 명쾌합니다. 저는 반대 입장에도 약간의 여지는 있으니 각자 믿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정동수 목사님의 이 강해를 듣고 그런 생각을 다 버리게 됐습니다. 성경의 사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 회색지대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하나님이 명백히 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속성 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 가지 추가로 말씀드리면, 유대 전승문학 등을 보면 대개 입다가 딸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세비우스 등 예수님 당대와 후대 정도의 기록들은 입다가 번제를 드린 것으로 알고 있으니 거의 진실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일리가 있고, 그런 것들도 충분히 참고자료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록을 남긴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신약을 믿은 크리스천일까요? 대부분은 유대교인이며 예수님과 바울 등에 적대적인 사람들일 것입니다. 탈무드가 얼마나 신약과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입다가 딸을 죽였다고 하는 분들도 하나님이 인신제사를 불허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입다는 잘못된 서원을 회개했어야 했는데 고집을 부려 딸을 불태워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위의 강해에도 나오듯이 히브리서의 믿음의 선진들에 입다의 이름이 왜 기록되었을까요?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또 다윗과 사무엘과 대언자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 불법인 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서원을 이룰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그가 믿음의 선진일까요? 불법으로 인해 반드시 죽임 당해야 하는 죄인인데 멀쩡히 살아서 아브라함과 노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 기록들을 남긴 이들이 예수님을 인정하는 유대인들이라 해도 유대 전승문학보다도 우리는 신약성경을 믿습니다. 비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실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저지른 입다가 그 뒤에 회개한 사실도 없는데 바울이 저렇게 기록을 했을까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또한 유대문학에서는 재창조론 등을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유대문학 이야기를 채택하지 않겠죠? 필요할 때만 가져오면 안 됩니다. 성경도 필요한 것만 가져오면 안 되겠습니다.
2015-04-08 09:37:24 | 김재욱
마태복음 27장 9-10절은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가 아닌가요?   다음은 어느 분이 질문한 내용입니다.   -------------- 개역성경 마태복음 27장 9-1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태복음 기록자는 이 구절을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실상 이것은 스가랴서 11장 1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필시 마태의 실수나 킹제임스 성경의 모태가 된 공인 본문 즉 텍스투스 리셉투스의 오류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7장 9-10절은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가 아닌가요? --------------   아닙니다. 이 구절은 흠정역이나 개역이나 다 같습니다.   흠정역: 이에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니라. 일렀으되, 그들이 값을 매긴 자의 가격 곧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자들이 값을 매긴 자의 가격인 은 서른 개를 취하여 [주]께서 내게 정하신 바와 같이 그것들을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도다, 하였느니라.   이것은 성경 기록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기록 해석의 문제입니다. 차대식, 김대용 형제님께서 잘 답변해 주셔서 그대로 올립니다.   ----- 차대식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마태복음 강해설교 74과 43:30 정도에서 설교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195 아래 내용은 강해설교 노트에서 발췌했습니다. 9-10절: 대언자 예레미야가 기록한 말씀이 아니다. 슥11:13 예레미야가 기록한 말씀과 그가 외친 말씀이 있다. 여기는 후자이다(슥7:7).     ----- 김대용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차대식 형제님께서 너무나 명쾌하게 잘 설명해 주셨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첨언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9~10절은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예레미야서에 가서 해당하는 말씀을 찾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스가랴서 7장 7절을 읽어보십시오.   예루살렘과 그것의 사방의 도시들에 사람들이 거주하며 형통하게 지낼 때에 또 남쪽과 평야에도 사람들이 거주할 때에 주가 이전의 대언자들을 통해 외친 그 말씀들을 너희가 들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서 ‘대언자들을 통해 외친 그 말씀들’이란 기록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약 시대 활동했던 대언자들의 모든 대언 중에는 외침으로만 끝난 것이 있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경 기록으로 남겨주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일들도 낱낱이 모두 성경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확히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요21:25).   그러므로 마태복음 27장 9~10절의 기록은 예레미야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레미야가 대언자로 활동하던 당시 외쳤던 말씀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스가랴 이전에 예레미야의 대언으로 마태에게 기록하게 하신 겁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문제가 없는 것을 의심과 불신의 눈으로 보기에 성경이 오류가 있는 책으로 여겨지고 걸림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악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다음의 글도 참조해 주십시오. *킹제임스 성경의 영광 8장: 본문 문제 2, 마가복음 1장 2절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30   윗글 중간에 보시면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 9절은 마가복음처럼 “기록된바”(As it is written)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마태복음의 본문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었다.’고 진술한다. 성경 기록의 저자인 하나님은 누가 무엇을 기록하고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고 계신다. 간단히 말해 스가랴가 그 구절을 기록했다는 것은 결코 예레미야가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스가랴는 이전의 대언자들이 말한 것에 주목하라고 이스라엘에 경고했다(슥7:7). 고대 유대인들은 “예레미야의 영이 스가랴 안에 있었다.”고 말했다. 스가랴가 받았던 많은 것은 실제로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또 스가랴 이전의 대언자인 예레미야로부터 받은 것이다.”   도움이 되시기 바라며 봄볕으로 인해 화사하게 피어 미소 짓는 벚꽃처럼 진리의 말씀으로 기쁨과 평안을 풍성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5-04-07 13:52:01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느 분이 “창25장의 팥죽은 콩 스프인가요?”라고 질문해 주셨습니다.   답: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창세기 25장 34절에는 야곱이 에서에게 빵과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사는 기록이 있습니다.여기서 팥죽은 영어로 ‘pottage of lentiles’입니다.   지금은 lentil이라 하지만 과거에는 lentile이라 하였습니다.네이버에 가서 렌틸이라고 치면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옵니다.    렌틸 콩은 그 색상에 따라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갈색, 회색, 검은색 등으로 구분되며, 종종 반점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성경의 용례를 보면 렌틸은 콩 종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콩과(삼하17:28) wheat, and barley, and flour, and parched corn, and beans, and lentiles, and parched pulse,   역시 네이버에서 팥을 쳐 보면 팥은 빨간 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흠정역에서는 콩과 구분하기 위해 렌틸은 다 ‘붉은색 렌틸 콩’의 의미로 팥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역시 네이버 사전에서 죽을 치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국어사전, 죽: 곡식을 오래 끓여 알갱이가 흠씬 무르게 만든 음식.영어사전, 죽 1. porridge, gruel, pap   그래서 우리는 ‘pottage of lentiles’을 팥죽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성경을 고치지는 말고 원하시면 ‘렌즈 콩 스프’라고 보셔도 됩니다.   참고로 또 다른 콩 종류는 삼하17:18에 있는 것처럼 pulse가 있습니다. 다니엘이 먹은 것이 바로 pulse입니다(단1:12).  사전에 가서 보면 펄스는 콩 종류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냥 콩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샬롬
2015-04-04 11:16:01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