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륜(Dispensation)
경륜(경영 체계), 청지기직 등으로 번역된 이 말은 원래 ‘무게를 달아서 나누다’란 뜻을 가지며 옥스퍼드 사전은 ‘나누어 주거나 배포하는 행위, 그리고 행정을 보거나 관리를 하며 물건들을 주거나 운영하는 체제, 신학적으로는 점진적 계시의 한 단계, 특정한 민족이나 기간의 필요에 특별히 부응하는 단계 혹은 어떤 체제가 널리 보급된 시대나 기간’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여기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는 ‘관리하다, 집행하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에서 나왔으며 ‘사람이 사는 집의 일을 경영하다’를 뜻한다. 이와 같이 ‘경륜/세대/경영체제/청지기직’이란 단어의 중심 개념은 집안의 일을 관리하거나 집행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는 이 단어가 여러 형태로 20회에 걸쳐 나타난다. 동사 ‘오이코노메오’는 눅16:2에서 ‘청지기가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1회 사용되었고 명사 ‘오이코노모스’는 ‘청지기’란 뜻으로 10회에 걸쳐 사용되었으며(눅12:42; 16:1, 3, 8; 롬16:23; 고전4:1-2; 갈4:2; 딛1:7; 벧전 4:10) 명사 ‘오이코노미아’는 청지기, 직분, 경륜, 위임, 일의 뜻으로 9회 사용되었다(눅16:2-4; 고전9:17; 엡 1:10; 3:2, 9; 골1:25; 딤전1:4).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이 단어는 두 비유에 나와 있다(눅12:42; 16:1, 3, 8). 이 두 비유는 모두 청지기가 집안을 관리하는 내용인데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비유는 청지기직 혹은 세대/경영 체제의 구성 및 배열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보여 준다. (1) 의무를 부과하는 자와 명령을 수행할 책임을 지닌 자가 있다; (2) 청지기에게는 독특한 책임이 있고 또 회계 보고할 책임이 있다; (3) 현재의 경영 체제 하에서 신실하지 못한 요소가 발견되면 언제라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적어도 세 가지 세대를 언급하고 있다. 엡1:10에서 그는 ‘때가 찬 경륜/세대’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은 미래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엡3:2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세대/청지기직’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 바울이 선포한 내용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골1:25-26에서 그는 신약 성도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계시된 현재 세대(혹은 경륜)보다 앞선 또 다른 세대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점진적 계시를 담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점진적 계시란 하나님의 메시지가 단번에 주어지지 않고 일련의 연속적 행위와 다양한 배경을 지닌 많은 사람의 마음과 손을 통해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히1:1-2).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여러 시대에 핵심이 되는 사건들이 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경영 체제에 큰 변화가 생겼다. (1) 사람의 타락; (2) 노아 시대의 대홍수; (3) 바벨탑 심판; (4) 아브라함을 부르심; (5) 율법 수여; (6)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7) 성령 강림; (8)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러한 사건들 사이의 기간을 보통 세대(dispensation)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영어권에서 유대인 세대, 크리스천 세대, 복음 세대 등과 같이 아주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각 세대는 하나님이 독특한 경영 방식과 특권을 허락하신 기간이며 그 길이는 다 다르다.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규정과 권리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빛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책임이 주어진다. 새로운 세대가 열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전 세대에서보다 더 많은 진리와 빛을 허락하신다.
성경에는 여러 개의 세대가 나오며 각각의 세대 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1) 각 세대의 처음에 사람의 상태; (2) 사람의 책임; (3) 사람의 실패: 각 세대마다 사람은 비참하게 실패하며 이 사실은 사람이 위대한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큰 죄인이라는 점을 거듭 거듭 상기시켜 준다; (4) 하나님의 심판: 각 세대는 사람의 실패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이 난다.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면서 사람과 놀랍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셨고 그 길을 열어 놓으셨다. 모든 경륜/세대에 걸쳐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다윗과 이사야와 바울과 우리가 다 이런 식으로 구원을 받았다(히11, 롬1:16-17; 4:6). 경륜/세대주의는 결코 시대마다 구원받는 방법이 다르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방법은 아주 간단하며 은혜에 행위를 더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아니다(롬11:6).
다만 세대/경영체제를 구분하지 않으면 성경 해석에 문제가 생기고 하나님의 의도를 바로 분별할 수 없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자적’이라는 말보다 ‘정상적’ 혹은 ‘평범한’이란 말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 해석 참조. 어쨌든 문자적 해석은 주어진 문장을 영적으로 해석하거나 비유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며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을 대체해서 아브라함과 그의 씨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다(롬11 참조).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지 않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세대 구분을 주장하지 않으며 그 결과 신구약성경의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예언들을 모두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비유적으로 풀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지금 중동에 서 있는 이스라엘과 그로 인한 팔레스타인 분쟁, 문자적인 천년왕국 등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볼 수 없다.
(2)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을 중심 주제로 삼는 인간 중심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 주제로 삼는 하나님 중심의 책이다. 성경은 분명히 구원이 중요하고 놀라운 것이긴 하지만 구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을 위한 방편이라고 가르친다(엡1:6, 12, 14).
결론적으로 경륜/세대주의는 사람이 만든 신학체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면 그것을 정말로 뜻하셨다고 믿으며 그분께서는 오직 자신이 의도한 것만을 말씀하신다고 믿는 믿음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고 충고하였다(딤후2:15). 그러므로 누구라도 정상적으로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으면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2009-05-08 17:18:46 | 관리자
어제, 오늘 일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서 이번에 살해된 4모녀 사건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습니다.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나옵니다. 전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저는 이명박씨가 정말로 훌륭한 대통령이라면 이런 일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국민과 함께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금 경제와 선거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의 근간인 인륜이 무너져내리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나라의 영적 현실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돈을 좇다 보니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박혀 있습니다. 배우지 못하고 가나해서 누더기를 입고 빌어 먹는 거지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이 나옵니다. 홍수 이후에 사람이 사악하게 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은 법을 집행할 수 있는 인간 정부를 처음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1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내가 그것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었노라.3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될 것이요, 푸른 채소와 같이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노라.4 그러나 너희는 고기를 그것의 생명과 함께 곧 그것의 피와 함께 먹지 말지니라.5 내가 반드시 너희 생명의 너희 피를 요구하리니 모든 짐승의 손에서 그것을 요구할 것이요, 사람의 손에서 곧 각 사람의 형제의 손에서 사람의 생명을 요구하리라.6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리니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니라.7 너희는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에서 풍성히 내고 그 안에서 번성하라, 하시니라(창세기 9장 1-7절).
이것은 그 이후로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칙이요, 명령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인본주의를 신봉하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단호한 명령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는 항상 이런 사악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안에 인간의 모든 사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왕정 시대 전에 재판관들의 통치를 받을 때도 이런 사악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사기 19, 20장을 보기 바랍니다. 사악한 벨리알의 아들들로 인해 자기 아내가 치욕을 당하고 죽자 그 남편이 자기 아내의 몸을 열두 조각으로 쪼개서 열두 지파에게 보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토막 살인이 발생한 것입니다. 토막 살인은 가장 사악한 일 중에 하나이며 여기에는 극도로 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토막 살인이 많이 생기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통회하며 하나님께 울부짖어야 합니다. 삿19:1에는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사회가 이렇게 허물어지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람들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번에 허무하게 죽은 영혼들을 생각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슴을 찌르는 자극으로 임하고 그래서 가슴을 치며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는 일이 생겨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심정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09-05-08 17:17:39 | 관리자
지난 주에는 유난히 살인 사건이 많았습니다. 4모녀 살인, 두 여자 아이 토막 살인, 그리고 베트남에서 온 신부 살인 등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베트남 신부 이야기를 적고 싶습니다. 도무지 마음에 걸려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후안마이라는 19세 베트남 처녀가 46세의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가 한 달 뒤 피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남편은 도망가서 없고 시체가 썩는 상태에서 발견되어 부검을 한 결과 갈빗대 16개가 부러져서 죽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런데 판사는 겨우 12년 옥살이라는 가벼운 형을 내리고는 중형이라고 대대선전했습니다. 저는 살인도 살인이지만 후안마이가 베트남 말로 죽기 전에 기록해 놓은 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당신은 아세요? … 베트남에서는 그렇게 많은 일을 했어도 입을 것과 먹을 것만 겨우 충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당신이 저를 이해해 주는 것만을 바랐을 뿐이에요. 따뜻하고 행복한 대화, 삶 속에서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만을 희망했지요. 하지만 더 이상 무엇을 적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 못할 것인데요.
너무 슬픈 일 아닙니까? 제 아내와 살아온 25년을 돌이켜보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남편이 좀 더 많이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약한 그릇이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아담이 이르되, 이것은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2-23).
나그네를 대접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여기에도 관심을 가집시다. 우리 한국람처럼 인종 차별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미국 사람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 사회나 교회나 마찬가지임 - 베트남, 파키스탄 등등의 사람들 앞에서는 완전히 독재 군주가 되는 이 버릇을 고쳐야지요(이 점은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과 비슷함). 하나님 앞에서는 다 마찬가지 사람입니다. 기억합시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음을. 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2009-05-08 17:16:47 | 관리자
지난 주에는 유난히 살인 사건이 많았습니다. 4모녀 살인, 두 여자 아이 토막 살인, 그리고 베트남에서 온 신부 살인 등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베트남 신부 이야기를 적고 싶습니다. 도무지 마음에 걸려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후안마이라는 19세 베트남 처녀가 46세의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가 한 달 뒤 피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남편은 도망가서 없고 시체가 썩는 상태에서 발견되어 부검을 한 결과 갈빗대 16개가 부러져서 죽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런데 판사는 겨우 12년 옥살이라는 가벼운 형을 내리고는 중형이라고 대대선전했습니다. 저는 살인도 살인이지만 후안마이가 베트남 말로 죽기 전에 기록해 놓은 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당신은 아세요? … 베트남에서는 그렇게 많은 일을 했어도 입을 것과 먹을 것만 겨우 충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당신이 저를 이해해 주는 것만을 바랐을 뿐이에요. 따뜻하고 행복한 대화, 삶 속에서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만을 희망했지요. 하지만 더 이상 무엇을 적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 못할 것인데요.
너무 슬픈 일 아닙니까? 제 아내와 살아온 25년을 돌이켜보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남편이 좀 더 많이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약한 그릇이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아담이 이르되, 이것은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2-23).
나그네를 대접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여기에도 관심을 가집시다. 우리 한국람처럼 인종 차별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미국 사람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 사회나 교회나 마찬가지임 - 베트남, 파키스탄 등등의 사람들 앞에서는 완전히 독재 군주가 되는 이 버릇을 고쳐야지요(이 점은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과 비슷함). 하나님 앞에서는 다 마찬가지 사람입니다. 기억합시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음을. 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2009-05-08 17:16:07 | 관리자
불신자들은 종종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과연 정당하냐?”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그리하심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은혜로운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종종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을 비난하면서 그가 죄를 짓지 않았으면 사람에게 이런 정죄가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자유 의지가 없다면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보십시오. 사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 해도 분명히 우리 모두가 그처럼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개개인을 심판하시면 누구나 다 아담처럼 불순종하는 자로 들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이후의 모든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지 않고 그들을 모두 로봇으로 만들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누가 과연 아무 생각 없이 로봇처럼 살기를 원합니까?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 의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고 그분께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의 상태를 한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과 그의 천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공의(혹은 거룩함)가 훼손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든 우리든 사탄이든 하나님의 훼손된 공의가 회복되지 않는 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남이 공평한 분이라면 이렇게 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경우에 하나님은 묘한 방법을 써서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한 사람 아담을 통해 전 인류를 정죄하심으로써 또 다른 한 사람(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을 통해 전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인종적으로 모두 아담에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의 행위는 지금 이 시간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히7:9-10참조). 이와 달리 타락한 천사들은 아담과 같은 대표자가 없으므로 개인적으로 죄를 짓고 개인적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나와 여러분은 아담이라는 공통 조상 안에서 죄를 지었으므로 새로운 창조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이 우주 공간 안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은 거룩한 분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holy)고 하는 것은 그분이 그분의 창조물 혹은 창조 세계와 확연히 구분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즉 그분은 ‘클래스’가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도 그분의 훼손된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자신의 훼손된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류의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구원하고자 하신다면 그분께서는 지금까지 태어난 모든 사람 각각에게 자신의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아들이 수백 억 번 이 땅에 와서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우리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하나뿐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혜롭게 또 은혜롭게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과 범죄 속에서 모든 사람이 육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죽은 것으로 간주하심으로써(영어로는 이것을 imputation이라고 함) 자신의 아들을 단 한 번 보내사 사람의 죄 문제를 단번에 영원토록 해결하셨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특권을 주셔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벗어나 그분의 임재가 있는데서 그분과 같이 교제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벧후1:4). 할레루야!
그러면 우리가 인종적으로 아담에게 연합되어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롬5:12-14에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논점은 이와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그런데 죽음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까지 모든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었습니다. 자, 이런 일반적인 현상에는 일반적인 이유가 있음이 틀림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아담의 불순종입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뒤 곧바로 영적으로 죽었고 결국 육신적으로도 죽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아직 율법이 없는데도 모두 죽었습니다(창세기 5장). 그러면 여기서 드러나는 명백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모두 아담의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롬5:12)는 것은 곧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해 육신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죄없는 갓난아기들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롬9:11).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죽는 것은 그들이 모두 인종적으로 한 사람 아담에게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말합니다(고전15:22).
모든 사람이 육신적으로 죽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입니다. 이것은 첫째 사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예외인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둘째 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영원히 그분의 임재 밖으로 쫓겨나서 불 호수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사망은 아담 때문에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각 사람의 불순종의 죄 즉 우리의 창조자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구원 계획을 거절함으로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의 상태를 잘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2009-05-08 17:15:36 | 관리자
지난 주 제주도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소화관운동학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2박 3일간의 빡빡한 일정 속에 세계적인 석학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시쳇말로 '머리에 쥐가 나는 낮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둘째 날 저녁에는 주최측이 특별히 마련한 '난타' 공연을 잠시 본 후 동료 선후배 의사들 여러 명이 함께 중문단지를 산책하며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상쾌한 바닷바람, 만개한 벚꽃, 별로 수놓은 밤하늘, 그리고 많은 의료분야 가운데에서도 오랫동안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정다운 동료들로 인해 산책시간은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처음에는 다양한 주제로 삼삼오오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며 제주도의 밤길을 즐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화제는 전날 밤에 있었던 엘리베이터 사건과 관련된 귀신 이야기로 옮아가기 시작하였다.
누군가 전날 밤 학회장소인 롯데호텔의 엘리베이터를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불이 깜박거리며 엘리베이터가 이상하게 작동되는 바람에 아주 혼쭐이 났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꿈보다 해몽이라고, 한 후배가 풀이하길 서울의 롯데월드를 짓는 동안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제주 롯데호텔도 규모면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니 분명 또 여러 사람이 공사로 인해 목숨을 잃었을 터인데 바로 그 혼령들이 귀신이 되어 엘리베이터에 이상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온갖 귀신 이야기가 등장하는 가운데 결국 진짜로 귀신이 있는 것이냐 하는 물음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증거로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비그리스도인에 의해 인용되는 해프닝이 발생하게 되었다.
'성경이 귀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성경에 분명히 귀신이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도 온갖 귀신들을 친히 내쫓지 않으셨던가. 그러니 귀신이 없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는 신앙의 유무를 떠나 너무도 타당한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도 이처럼 귀신의 존재를 확실히 믿고 가르쳐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정말 귀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먼저 귀신이란 무엇인지 그 정의부터 확실히 해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같은 낱말을 사용하면서도 그 의미가 다르다면 결국 다른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전에서는 귀신(鬼神)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1997년 1월 발행된 민중 엣센스 국어사전에는 '죽은 사람의 넋'이라 나와 있고, 어문각에서 발행한 한글학회 우리말 큰사전에도 '사람이 죽은 뒤의 넋'이라 씌어 있다. 또 '넋'은 '사람의 몸에 있으면서 목숨이 붙어 있게 하여 몸이 죽어도 영원히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즉 귀신이란 죽은 사람의 혼(魂, soul)이라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인가? 사람이 죽으면 몸(body)은 흙으로 돌아가고 혼(soul)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 남아 배회하며 우리들의 삶을 간섭한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가?
아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렇다. 사람이 죽으면 그 혼(soul)은 바로 천국(Heaven; 낙원, 셋째 하늘) 아니면 지옥(hell)으로 가게 된다. 누가복음 16장에서도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거지 나사로는 죽은 뒤 낙원에 갔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고 계신다. 물론 그 천국과 지옥의 기준은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김 받았는지 여부에 달려 있지만 어찌 되었든 죽은 사람의 혼(soul)은 더 이상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정확한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귀신 얘기가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데 이는 또 어찌된 영문인가? 이것은 우리가 흔히 접하여 읽어오고 있는 한글 개역 성경이 지니고 있는 한계이다.
최근에 번역 출간된 한글 흠정역 성경에는 귀신이란 단어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귀신 대신에 마귀(devil)로 다 번역이 되어 있다. 성경에 나오는 마귀(a devil; devils; the Devil)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교도관으로서 청송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에서 수많은 사형수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던 박효진 장로님의 개인 간증을 발췌 요약하여 들어보자.
<하나님을 참으로 만난 후에도 제사문제는 내 마음 속에 항상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제사 지내기가 그토록 싫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 아련한 향수처럼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모든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고 난 후에도 이 갈등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기도에 깊이 몰입하려는 순간마다 마귀가 길목을 가로막고 서서 제사문제를 내 앞에 내밀었으며, 나는 그때마다 정리되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 수없이 주춤거려야 했다. 왜 우리 기독교는 제사문제를 그토록 극단적으로 평가하는가? 한국 전통문화로서 조상에 대한 경애와 뿌리 찾기의 한 방편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한 번 시작된 불신과 회의는 좀처럼 꺼질 줄 모르고 내 가슴 깊은 곳에 고집스러운 성(城)을 쌓아가고 있었다. 기쁨의 노래가 점점 사라지고, 목사님의 피를 토하는 설교마저 마음에 와닿는 강도가 줄어들고 있던 어느 날, 나는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믿음의 동역자 한 사람과 밤늦도록 기도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옹기도마 앞을 지나쳐 오는 순간에 썩는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역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가봅시다." 사냥개처럼 냄새를 따라 들어가는 우리 눈앞에 이윽고 환하게 불이 켜진 집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빨랫줄을 풀어 마당에 늘어놓고 젯상 중앙에는 돌아가신 내외분의 사진을 놓고 젯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눈앞에서는 기상천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젯상 위는 물론이고 아래에도, 천장에도 빌로드처럼 진한 흑색의 영체(靈體)들이 온통 북적대고 있었다. 수백을 헤아리는 엄청난 마귀떼들이 온 집을 누비고 있었다. 그들은 한꺼번에 무리를 지어 종횡으로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사람들의 몸속에까지 들락거렸다.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놀란 것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오늘의 주인공인 두 사람의 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보기에도 섬뜩한 마귀들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북적대고 있을 뿐 정작 제사를 받는 사람의 영혼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순간 내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셨다.
'지금 네가 보는 것이 바로 사탄의 실체이며 귀신의 실상이다. 인간의 혼은 육신을 떠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그 날까지는 임의로 이 세상을 들락거릴 수 없다. 영계(靈界)에 들어간 인간의 영혼이 제삿날이라고 외출하여 제사상 앞에 찾아온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일 뿐!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 윗대 조상님들도 죽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 낙원과 지옥으로 구분되어 들어간다. 제삿날에 후손들이 벌여놓은 이 제사상에는 조상의 혼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네 눈에 보이는 저 더러운 마귀들이 대신 몰려들어 무지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외에는 그 어느 제사라도 마귀들의 놀이터요, 인간을 더럽히는 사탄의 유희임을 알라!'
짧은 시간에 내 마음이 정리되고 있었다. 성령님의 놀라운 가르치심에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전율했다.>
"이방인들이 희생으로 드리는 것은 마귀들에게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 흠정역)
귀신(鬼神)은 없다. 즉 사람이 죽은 뒤의 넋이 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은 없다.
그러나 마귀(魔鬼)는 실제로 존재한다.
마귀(the Devil)는 속이는 자요, 용이요, 옛 뱀이요, 사탄(Satan)이다(계20:1-3). 사탄의 원래 이름은 루시퍼(Lucifer)로서 하나님의 존전에 거하던 그룹(cherub)이었는데 교만으로 타락하여 인간을 속이는 자 곧 마귀(魔鬼)가 되어버렸다(사14:4-23; 겔28:11-19). 이 마귀(the Devil)의 꼬임에 아담이 넘어가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또 하늘의 천사들도 마귀(the Devil)에 의해 삼분의 일이 타락하여 또 다른 속이는 자인 마귀들(devils)이 된 것이다(계12:3,4).
그리하여 이 마귀와 그의 천사들은 영존하는 불(everlasting fire) 곧 불못(the lake of fire)에 들어갈 것인데(마25:41; 계20:10) 한 영혼이라도 자기들과 같이 영원토록 불못에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사람들을 속이며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거부하도록 만들고 있다(고후11:14; 계20:8).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효도사상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 '죽은 사람의 혼'인 귀신(鬼神)이 존재한다고 하는 이단교리를 유포시키면서 마귀(魔鬼)는 우리의 혼(soul)을 도둑질하려 하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벧전5:8,9a, 흠정역)
2009-05-08 17:14:42 | 관리자
1. 프롤로그
구랍 11일 개최된 제24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올드보이’는 감독상(박찬욱), 남우주연상(최민식), 여우조연상(강혜정)의 3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최다 수상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세계적인 인터넷 영화사이트 ‘에인트잇쿨(aint-it-cool-news.com)’이 뽑은 ‘올해의 10대 영화’로도 선정이 되었다.
‘에인트잇쿨’의 운영자이며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는 해리 놀스(Harry Knowles)는 “‘올드보이’가 당신이 앉아 있는 곳을 뒤흔들며 마음속에 깊이 남을 것”이라고 평하고 최민식에 대해서도 “올해 모든 영화의 연기 중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아울러 “굉장한 연기자와 솜씨 좋은 감독, 매력적인 촬영과 놀랄만한 각본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관객을 끌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극찬하였다.
이러한 평가에 걸맞게 이 ‘올드보이’는 현재까지 일본, 영국, 프랑스 등과는 총 250만 불의 수출계약을 맺기도 하였으며 또한 좀처럼 같은 목소리를 내기 힘든 수많은 영화평론가들에 의해 (미네기시 노부아키의 동명 일본 만화의 설정을 따왔지만) 원작의 명성에 기대지 않는 창조적인 각색과 풍부한 영상적 표현으로써 우리나라 영화의 수준을 확실하게 업그레이드시켜준 놀랄 만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미 이 영화를 감상한 수백만의 영혼들뿐 아니라 앞으로 접하게 될 세계인들에게도 분명 놀라운 충격을 주게 될 그 창조성(?) 즉 어느 영화보다도 스포일러(spoiler: 영화 내용에 대한 과도한 정보 노출) 방지를 철저히 할 수밖에 없었던 반전의 내용이 담고 있는 코드에 대해 성경적 조명을 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올드보이의 시대’를 함께 진단해 보도록 하자.
2. 시놉시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기에도 힘든 인물 ‘오대수’(최민식 분)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경찰서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결국은 친구 ‘주한’(지대한 분)이 그를 데리러 온 날 새벽 어느 공중전화 부스 근처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정체 모를 괴한에게 납치되어 얼마나 또 왜 갇혀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채 8평의 감금방에서 군만두로 연명하던 대수는 감금된 지 1년이 지나 텔레비전을 통해 자신의 아내가 살해되었고 자기가 가장 유력한 살해용의자로 지목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자서전’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납치한 그 누군가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몸을 단련하기도 하며 또 침대 밑의 벽을 숟가락으로 계속 파서 외부세계와 통하는 벽돌 한 장 크기의 구멍을 만들어 탈출을 목전에 두기까지 하였지만 갑자기 또 다시 영문을 모른 상태로 풀려나게 된다.
15년 만에 풀려난 오대수는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일식 조리사 미도(강혜정 분)와 함께 감금의 사연을 더듬어가기 시작한다. 유일한 단서였던 군만두에서 나온 나무젓가락 포장조각에 쓰여 있었던 중국집 이름을 근거로 동명의 중국집들을 전전하며 자신을 감금했던 사람과 그 이유를 찾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결국 오대수는 우여곡절 끝에 자기를 납치하였던 주범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우진(유지태 분)이라는 청년 실업가였다. 그는 대수에게 가둔 이유를 알아내면 자신이 기꺼이 죽어주겠다며 게임을 제안한다. 대수에게 주어진 시간은 5일. 대수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그 이유를 찾아가는데 마침내 자신이 다녔던 고향 고등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왜 자신이 15년 간 갇혀 지내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3. 우진과 수아
전학을 앞두고 학교 운동장에서 시간을 보내던 오대수. 그는 같은 학년의 여학생 수아(윤진서 분)를 보게 된다. 호기심에 그녀가 앉은 벤치 옆으로 다가간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그녀. 스스럼없이 오대수의 땀에 젖은 머리를 살짝 만져주기도 한다. 내심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학생으로 착각한 오대수. 그녀가 부탁한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 여학생은 갑자기 자리를 떠나고 황망한 오대수는 그녀의 뒤를 몰래 쫓아간다. 그리고 청순해 보였던 그 여학생이 아직 짧은 머리의 남학생 곧 자기 남동생인 우진과 과학실에서 서로의 몸을 탐하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게 된다.
그렇다. 남매간의 근친상간은 오대수의 눈으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로부터 확실한 금기의 대상임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올드보이의 박감독은 동성동본간의 사랑이 부당하게 억압받고 있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이러한 설정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진과 수아의 경우에서처럼 친남매간의 에로스와 가인이 자기 누이 중에서 아내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는 뭐가 다를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창4:17).
물론 인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 위해서 첫 세대인 아담과 이브의 자녀들은 남매임에도 서로 결혼을 해야만 했다(창1:28). 그러나 나중 세대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남매간의 결혼이란 ‘근친상간’을 철저히 금지하셨다(레18:9,29).
“너는 네 누이 곧 집에서 태어났든지 다른 곳에서 태어났든지 네 아버지의 딸이나 네 어머니의 딸의 벌거벗음 곧 그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레18:9, 이하 흠정역)
“이는 누구든지 이런 가증한 일 가운데 하나라도 행하는 자 곧 그것들을 행하는 혼들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임이라.”(레18:29)
이것은 비단 성경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세상 법조문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는 이 같은 결혼을 통해서 태어난 자녀들이 기형아가 되거나 병약하거나 저능아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이 같은 확률에 대한 유전학적 근거는 이처럼 해로운 특성을 유발하는 변이 유전자를 양쪽 부모가 다 가지고 있을 경우에 그것을 물려받은 자식들한테서 실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아담과 이브의 유전 체계에는 변이된 유전자가 없었기 때문에 가인처럼 아담의 다른 아들들이 자기 누이와 결혼했다 해서 유전적인 이상이 생겨날 수는 없었다. 사실 근친간의 결혼이 유전적으로 해롭게 되어 인류의 피 속에 유전적 변이가 축적되기 시작한 것은 여러 세대가 지난 후였다. 특히 노아의 홍수이후에는 궁창 위에 있던 물층(water canopy)의 소실로 말미암아 균일한 온도와 적절한 습도를 유지케 하였던 온실효과도 사라지고 유해한 우주광선에 노출됨과 동시에 각종 스트레스원이 더욱 증가하기 시작하여 활성산소가 과다 생성됨으로써 DNA 유전자 손상과 변이가 증대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명확하게 남매간의 결혼을 금하시게 되었던 것이다.(이에 대해 좀더 알고 싶으신 분은 졸저 <성경으로 세상보기> 중 ‘성경 속 수명 이야기’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4. 대수와 주환
한창 혈기왕성한 십대의 오대수가 남매간의 근친상간 광경을 보고 외면했다면 오히려 정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삿짐을 나르는 것을 도와주러 온 친구 ‘주환’에게 자신이 학교에서 본 그 광경을 말한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자신의 여자친구를 만나러 간다던 주환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오대수에게 안녕을 고한다. 그리고 오대수는 그 기억을 까맣게 잊는다.
그렇지만 주환의 입을 통해 수아에 대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이상하게 퍼져나간다. 수아가 여러 남자들과 놀아난 결과 임신까지 하였다는 것인데 이 소문을 들은 수아는 근심하여 자신이 임신하였다고 믿어 버리고는 동생 우진한테 안녕을 고하며 우진의 손을 놓고 합천댐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렇다. 대수와 주환의 경우에서와 같이 혀를 잘못 놀려 말 한마디로써 사람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약3:2-8).
“우리가 다 많은 것에서 실족하나니 만일 말에 실족하지 아니하면 그는 곧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 …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다스릴 수 없는 악이요, 죽이는 독으로 가득한 것이라.”(약3:2,8)
그런데 대수와 주환처럼 성적인 스캔들에 관해 소문을 쉽게 퍼뜨리는 인물이 성경에도 소개가 되고 있다. 즉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있는 것을 본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이 사실을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알려 나중에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는 사건이 창세기에 잘 나타나 있다.
“노아가 농부가 되어 포도원을 세우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있더니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올려놓고 뒷걸음쳐 들어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덮더니 그들의 얼굴이 뒤를 향하였으므로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고 또 이르되, 주 곧 셈의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며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만드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였더라.”(창 9:20-27)
많은 성경 주석가들은 노아가 벌거벗었다는 것으로 보아 노아에게 성적인 죄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적 스캔들은 성적인 관심이 많고 성적 방종을 하기 쉬운 가나안이나 함 같은 자에 의해 빨리 타인에게 전파가 될 수 있는 것도 당연하리라 생각된다.
5. 최면술사
누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은 우진에게 있어 분노하고도 남을 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수아는 소문처럼 남자들과 성적으로 문란했던 여자가 아니었다. 수아는 우진만을 사랑하고 있었고 우진에게만 몸을 허락한 우진의 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문을 듣고 낙심한 수아가 자살하자 우진은 누나를 자살로 몰아간 그 소문의 최초 발설자 오대수에게 복수를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우진은 청년실업가로 성공하자 막강한 금력을 갖고 매우 뛰어난 능력의 최면술사를 고용해 오대수를 기계적으로 움직이도록 조치하게 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오대수가 감금방에서 풀려난 뒤 이우진을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또 이우진에 의해 로봇 내지는 인형으로 길들여진 오대수는 이우진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진 끔찍한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15년이나 감금됐던 중년의 남자 오대수와 일식집에서 보조 요리사로 일하던 소녀 미도는 (일반적으로 ‘사랑’ 같은 주제에 대한 암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또한 사회통념상 어긋나는 행위에 대한 암시도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면술로 인해 특정한 멜로디에 반응하여 사랑이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그렇다. 오늘날 최면은 이우진의 선택에서 보듯 하나의 검증된 과학적인 (또는 의학적인) 기술이라고 알려져 점차 별다른 저항 없이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최면의 배후에는 악한 영들의 커넥션이 있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최면술사(enchanter, charmer)는 주님 보시기에 가증한 자라고 단언하신다(레19:26; 신18:10-12).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자나 점을 치는 자나 때를 관찰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enchanter)나 무당이나 마법사(charmer)나 부리는 영에게 묻는 자나 마술사나 강신술사가 너희 가운데 있지 못하게 할지니라. 아는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가 다 주께 가증한 자이기 때문이니 이런 가증한 일들로 인하여 주 네 하나님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18:10-12)
6. 대수와 미도
오대수가 예전에 살았던 동네에 대수와 미도가 함께 찾아가도록 만들고, 금은방 주인으로 하여금 대수의 딸이 입양되었다고 말하도록 설정한 것 역시 이우진이 연출한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우진의 의도대로 고향 학교에 가서 생활기록부를 뒤지던 대수는 자신이 왜 우진에게 복수의 대상이 되었는지 비로소 감지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대수는 예전의 그 기억을 되살려내고 우진이 제시한 문제를 풀어냈다는 확신을 갖고 펜트하우스로 가 우진을 만난다.
그러나 대수는 우진이 넘겨준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결국 자기와 몸을 섞은 미도가 자신의 친딸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즉 남매간의 근친상간에서 출발한 사건은 부녀간의 근친상간이라는 복수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최면에 의해 대수와 미도가 부녀간의 근친상간을 행하게 된 것과 비슷한 사건이 성경에서도 잘 언급이 되고 있다. 동성애 등 성적 방종이 창궐하였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불심판에 의해 멸망당한 후 롯은 두 딸과 함께 산속 굴에 거하고 있었는데 그 딸들은 자기들이 결혼할 수 없으므로 대신 아버지의 씨를 보존하겠다는 미명하에 롯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한 후 롯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 아버지 롯과 몸을 섞어 각기 모압(Moab: from father)과 암몬(Ammon: son of my people)이라는 아들을 낳았다(창19:29-38).
그러나 이러한 부모자식간의 근친상간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근친상간들에 앞서 철저히 금지하셨다(레18:6,7,29).
“너희 가운데 아무도 가까운 친족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나는 주니라. 너는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이나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레18:6,7상)
“이는 누구든지 이런 가증한 일 가운데 하나라도 행하는 자 곧 그것들을 행하는 혼들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임이라.”(레18:29)
7. 니므롯과 그 아내
기독교 변증에 있어서 최고의 책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알렉산더 히슬롭(Alexander Hislop)의 ‘두 개의 바빌론’(The Two Babylons)이나 잭 칙(Jack T. Chick)의 ‘사보타주’(Sabotage)를 보면 노아의 홍수이후 최초의 ‘근친상간’은 니므롯(Nimrod, 창10:8,9)과 그의 어미인 세미라미스(Semiramis)에 의해 저질러졌다.
세미라미스는 원래 구스(Cush, 창10:6-8)의 아내였는데 당대의 절세미인이면서도 가장 음란하고 사악한 여자였다. 그녀는 자기 아들 니므롯이 바빌론의 군주가 되자(창10:8-14), 그와 결혼하여 바빌론 군주의 어미이자 왕후가 되었다. 그러다가 니므롯이 셈(Shem, 창10:1,21)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자 자신의 입지가 위태해짐을 느낀 그녀는 재빨리 자기가 낳은 니므롯의 아들 담무스(Tammuz, ‘생명의 아들’, 겔8:14)를 죽은 니므롯이 환생한 것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 아들이 초자연적으로 잉태되었으며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된 씨(seed, 구세주)라고 주장하면서 담무스를 태양신(sun-god)으로 신격화하여 ‘바알’(Baal, 주인)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신의 어머니’가 된 그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바알티’(Baalti, 여주인) 혹은 ‘레아’(Rhea, 위대한 ‘어머니’ 여신)라 하여 ‘월신’(mood-god) 곧 ‘하늘의 왕후’(queen of heaven, 렘7:18; 44:17-19,25)로 숭배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숭배자들이 죽은 니므롯(담무스)을 위해 애곡하는 것을 바빌론 비밀종교의 중요한 예배의식으로 정해 놓았다(겔8:14).
이러한 사실은 욥기 31장 26-28절에서 이미 족장 시대인 욥의 시대에 태양신과 월신 숭배가 성행했었던 기록으로써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세미라미스는 ‘이시스’(Isis)로, 니므롯은 아기 ‘호루스’(Horus)이자 어른이 된 ‘오시리스’(Osiris)로 둔갑했다. 그리고 이 바빌론의 왕후인 세미라미스는 각 민족의 역사 가운데 아프로디테(Aphrodite), 비너스(Venus), ‘아스타르테’(Astarte), 아스다롯(Ashtaroth, 삿2:13), 다이아나(Diana, 행19:24,27,28,34,35)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퍼져나갔다.
8. 새 시대 운동
본래 사냥꾼(창10:9)인 니므롯이 천하를 장악한 후에 제일 먼저 했던 일은 백성들의 기억 속에서 주 하나님을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보와 전략의 전문가인 가나안의 지략을 세미라미스를 통해 전달받고서는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고 새로운 신화들을 만들어서 보급하였다. 즉 성경 전체를 대표하고 진리의 근본이 되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인 창세기 1장 1절 곧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없애버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모든 일에 ‘시작’과 ‘끝’이 있다는 (곧 성경의 뼈대인) ‘창조론’과 ‘종말론’을 없애기 위해 세미라미스는 니므롯의 신분을 그들의 조상인 노아보다 상위에 놓기 위하여 그를 홍수 이전의 인물인 가인의 환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가인을 아담의 후손이라고 하면 그 위에서 다시 하나님과 만나게 되므로 세미라미스는 이것을 왜곡하려고 창세기의 이야기에 ‘태양의 신’을 삽입하고 그 빛의 신(Lucifer)이 이브와 동침해서 낳은 아들이 가인이라는 거짓말을 꾸며내었다.
아울러 그 다음 단계로 세미라미스는 ‘천지가 늘 그대로 있다’고 하는 또 다른 윤회설의 기반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바탕이 되었고 다윈의 진화론을 만들어낸 씨앗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도 사람들은 이 세미라미스의 거짓말에 속아서 살아간다. 세미라미스의 환생설이란 토대 위에 단일론과 범신론 등이 혼합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새 시대 운동’(New Age Movement)은 올드보이의 시종을 주관하고 있는 이우진의 세계 (곧 박찬욱 감독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우진은 자신의 펜트하우스에서 엎드린 상태에서 아주 유연하게 다리부터 온 몸을 들어올리는 고난도의 코브라(Cobra) 자세를 취한다. 루시 리델(Lucy Lidell)의 요가 교과서에 보면 이러한 코브라 자세를 취함으로써 뱀-여신(the serpent-goddess) 곧 쿤달리니 힘(the Kundalini force)이 약동케 되어 신(god)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데 이는 곧 다름 아닌 마귀의 영과 교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우진의 허리에는 십자가 문신이 새겨졌고 그가 소유한 자동 옷장이 십자가 모양으로 갈라지고 다시 닫히기도 하였는데 올드보이의 미술감독이었던 류성희 씨의 인터뷰를 보면 박찬욱 감독은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감독은 뉴에이저들의 관점에서 이우진을 하나의 그리스도로 간주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더욱이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읊어주었던 잠언 6장 4절과 5절(“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네 눈꺼풀이 졸지 말게 하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새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네 자신을 건질지어다.”)의 말씀은 뉴에이저들에게는 인내천(人乃天)의 구원관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구절로 호도될 수도 있을 것이다.
9. 올드보이
사전에 나오는 ‘올드 보이’(old boy)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동창생, 교우, 졸업생(alumnus). ② 「친밀히 부르는 말」 여보게. ③ (the ∼) 책임자, 고용주, 보스; (the O- B-) 악마. ④ (an ∼) (구어) 정정한 노인, 나이 지긋한 남성.
그렇다면 이 영화 올드보이에서는 과연 어떠한 번역이 정답이 될 것인가? 다 나름대로 답이 될 수 있겠지만 최상의 정답은 현재 이 땅이 사탄의 다스림(satanocracy) 하에 놓여 있다는 사실(요12:31; 14:30; 16:11; 고후4:4; 엡2:2)을 나타내주는 “the Old Boy(惡魔)”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정말로 ‘근친상간’의 권리(?)와 운명(?)이 예술로 승화되어 성정체성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올드보이(the Old Boy)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성도라면 그리스도의 신부와 아내로서 자신을 예비하며 다시 오실 주 예수님과 만나리라는 복된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요1:12; 엡5:22-33; 딛2:13; 계19:7,8; 22:20). 아울러 이러한 종말론적 신앙을 소유함으로써 더욱 성결의 삶을 살아가려고 해야 하며 가정에서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매순간 확인하면서 뚜렷한 성정체성을 가지고 생활하여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성정체성을 처참히 붕괴시키는 올드보이와 같은 세속적 인본주의에 호도되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이 시대를 본받지 말며 이제 곧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너희는 우리가 이 날 여기에서 행하는 모든 것 즉 무엇이든지 각 사람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본받아 행하지 말지니라.”(신12:8)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6:25)
“형제들아, 너희 중에 진리를 떠나 잘못하는 자가 있는데 누가 그를 돌아서게 하면 그 죄인을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한 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인즉 그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할지니라.”(약5:19,20)
10. 에필로그
신약성경의 첫 장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금지된 성(gender & sex)의 파격적인 허용이 눈에 들어온다. 즉 구약의 족보는 창세기 5장, 10장, 11장 등에서 확인되듯이 남성의 계보이고 또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의 총수를 성인 남자로만 계수하라고 하셨다(민26:1,2). 그런데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40세대가 기록되는 가운데 남성들의 족보 사이로 다섯 명의 여성이 감히 언급이 되고 있다. 즉 다말(3절), 라합(5절), 룻(5절),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6절), 그리고 마리아(16절)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계보를 설명하는 데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해서 ‘근친상간’하여 쌍둥이를 낳았고(창38:12-30), 라합은 여리고의 창녀였고(수2:1), 룻은 롯이 자기 맏딸과 ‘근친상간’하여 낳은 모압(창19:36,37)의 후손 곧 모압 여인인데 과부였고(룻1:4,5),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는 밧세바로서 다윗과 간통한 여인이었고(삼하11:2-5), 마리아는 처녀인데 성령님에 의해 아이를 배었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다(신22: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믿음’으로(히11:31)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고 감히 메시아가 오시는 중요한 통로로 사용됨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올드보이 시대 곧 혼돈된 성정체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진과 수아와 대수와 미도 등에게도 소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즉 ‘예수(Jesus)’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이름(마1:21)인 것을 믿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받아들여서 자기의 죄를 씻음 받으면, (곧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면) 누구든지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7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Jesus)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2009-05-08 17:11:18 | 관리자
(이 글은 1999년에 작성된 글입니다.)
우리 나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특별검사가 탄생하였다. 온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옷 로비 사건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에 대하여 최병모 변호사와 강원일 변호사가 변협의 추천을 거쳐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특별검사로 임명이 되었다. 이처럼 전국민적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데 대해 일부에서는 특별검사의 한계로 인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여야가 모두 한 목소리로 환영과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으며 각 언론들 또한 한결같이 아낌없는 지지와 격려를 보내고 있다. 자 이제 금세기 안에 옷 로비 의혹이 완전히 규명되고 조폐공사 파업유도의 실체가 명확히 드러날지는 알 수가 없지만 특별검사 탄생으로 인하여 '보통검사'로 전락(?)된 이들에 의해 범죄자로 고발당했던 피고인들이 한 번 더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아니 심지어는 명백히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 취급받는 것을 싫어한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여기에는 남녀노소의 차이도 없고 학식과 교양의 차이도 없으며 더더구나 죄의 경중에도 차이가 없다. 단지 타인의 눈에는 자신의 어떠한 죄라도 비춰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인간의 가장 깊은 자존감 만이 작용할 뿐이다.
그러나 죄(罪)에 대한 인간의 평가가 과연 얼마나 올바른 것일까? 특별검사에 의해서 죄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는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 자기 양심에 비추어 죄가 없다고 느끼면 그는 죄인이라고 불리어질 수 없는가.
성경은 말한다.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10,12,23)
그렇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롬2:11; 엡6:9; 골3:25; 약2:1,9; 벧전1:17)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의 어떤 죄라도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다.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조차 하나님과 만나게 되었을 때 자기의 죄를 인식하게 되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죄가 한 점이라도 있으면 결코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고, 죄가 있어야 할 장소인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건져주시기 위해 자신의 유일하게 나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셨다. 이천 년 전 유대 땅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로 구성된 '특별검사'에 의해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진 후 십자가에 못박혀 무죄한 피(the innocent blood)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7)는 말씀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즉시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고발하던 '특별검사'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함 받은 자들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계12:10)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2009-05-08 17:10:31 | 관리자
성도들을 향한 마귀의 전쟁
(War on the Saints)
볼 만한 책이 많지 않은 시점에 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참으로 좋은 책을 출간하였기에 소개한다. 제시 펜 루이스는 1861년에 영국에서 태어나 1900년대초 영국의 웨일즈 영적 대각성에 큰 영향을 미친 여성도이다. 그녀가 지은 책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성도들을 향한 마귀의 전쟁」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간되고 있는 고전인데 이번에 「사단은 성도를 어떻게 속이는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미 100년 전에 루이스는 오늘날의 오순절/은사주의를 잘 간파하여 아주 상세하게 마귀의 기법을 파헤쳐 놓았다. 마귀가 성도들을 유린하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동적이 되게 하는 것인데, 힌두교의 요가, 만트라, 명상, 좌선, 단전 호흡, 오순절주의의 입신, 방언, 기괴한 웃음 현상 등이 다 사람을 수동적이 되게 하는 것으로 그 뿌리가 같은 것이다. 수동적이 되어야만 성령이 역사한다고 거짓 부흥사들은 외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마귀의 각종 수법을 아주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하고 있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필독서이니 꼭 구입하여 읽고 다른 이들에게도 권면해 주기 바란다. 잘 아시다시피 귀신은 없으므로 책을 읽으면서 귀신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마귀로 생각하고 읽기 바란다. 실력 있는 분이 번역을 해서 아주 부드럽게 되어 있다. 좋은 책을 내준 기독교문서선교회에게 감사를 드린다.
「사단은 성도를 어떻게 속이는가?」의 책소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패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사단과 싸워 승리하는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사단과 싸워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단에 대해서, 사단이 누구이며, 그의 본성과 싸움의 전략은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런 다음 싸움에 임할 수 있도록 무기며 갑옷을 갖춰 입어야 한다.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사단은 흔히들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피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이 글의 저자인 펜 루이스 여사가 말하는 사단의 가장 큰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속이는 자이며 그가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속임수는 위조(counterfeit)이다. 위조 지폐범이 진짜 지폐와 너무나도 똑같이 위조하기 때문에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위조 지폐를 식별할 수 없다. 이처럼 위조란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인 것처럼 똑같게 만들어 진짜인 것으로 통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과 환상과 은사 등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위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조들은 성도들이 쉽게 식별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오직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단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는 자만이 이러한 위조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단은 빛의 천사로 자신을 가장하기 때문이다(고후 10:14). 생각해 보라. 위조가 어설프면 어떤 사람이 속아넘어가겠는가!
선하다는 것,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이 사단의 속임수를 방지해 주는 보증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속지 않으려면 그리고 싸워 이기려면, 먼저 사단이 어떻게 속이는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게 되면 그 그물 치는 일은 허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책은 이러한 사단의 속임수들에 대해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사단은 성도를 어떻게 속이는가?」의 서문
(멧칼프, J. C. Metcalfe)
요한 웨슬레는 지나침과 광신을 다루면서 광신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광신주의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음의 무질서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성의 작용을 방해하는 무질서이다. 뿐만 아니라 광신주의는 이성을 완전히 배제시켜 버리기까지 한다. 광신주의는 오성(understanding)의 눈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아예 닫아 버리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광신주의가 일종의 미친 짓으로 여겨지는 것도 당연하다. 어리석은 짓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미친 짓이다. 바보란 올바른 전제들로부터 잘못된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자들을 말한다.
이와는 반대로, 미친 사람은 올바른 결론들을 끌어내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전제들에서 나온 것이다. 광신주의자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의 전제가 올바르다면, 그의 결론들도 필연적으로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의 잘못이 있다. 그의 전제들은 거짓이다. 그는 자신의 본래 모습(what he is)이 아닌 거짓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므로 그는 잘못된 출발을 하고 있으며, 더 멀리 가면 갈수록 바른 길에서 더 많이 벗어나서 헤매게 된다."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로 좀더 가까이 가 보자. 내 서재에는 스트레시(Ray Strachey)가 쓴 『과거의 그룹 운동과 그 실험적 지침』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스미스(Hanna Whitall Smith)의 논문에서 발췌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녀가 세밀하게 조사했던 19세기 중엽의 기묘한 종교 분파들에 대한 기술을 담고 있다. 두람의 주교였던 고 헨슬리 헨슨(H. Hensley Henson) 박사는 이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교회 역사의 초창기에는 일종의 전도된 겸손을 따르려는 미묘한 유혹이 있었다. 이것은 영적 자만을 보여 주는 가장 나쁘고 가장 위험한 형태로, 스스로 잘난 체하는 추문들 속에서 그 모습들을 드러내었다."
주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일상생활에서의 책임을 거부했던 재림주의자들이 데살로니가에 있었다. 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여러 종파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이러한 계승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신조들과 행동들을 수행해 왔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고 한 바울 사도의 단호한 말씀이 이들 모두에게 적용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엄격주의자인 체하면서도 그 시대의 위험한 도덕적 방종에 빠져들었던 골로새의 금욕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계승하는 무리들이 모든 기독교 세대들마다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중세의 수도승들과 현대의 분리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경우들 모두는 똑같은 영적인 병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 주는 것들이다. 이렇게 성령의 명령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조아리는 모습이 어쩌면 진정한 겸손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소유한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영감이 완전한 것이라고 하는 암묵적 가정이, 도덕적으로 파괴적인 영적 오만을 드러내고 조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정(假定)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의 경험이 다음과 같은 위대한 사도들의 판결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었다. 고집스러운 경건주의의 슬픈 겉치레 그리고 이 경건주의가 그 희생자들에게 한 이색적이며 제멋대로이고, 심지어는 괴이하기까지 한 요구들을 꼬집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3).
20세기가 동틀 무렵에 일어난 웨일즈 부흥운동의 여파로 많은 수의 사이비 종파들이 일어났으며, 이들은 자주 "오순절" 운동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신앙생활"이라는 잡지의 책임자로서 웨일즈 부흥운동의 많은 것을 목격한 펜 루이스(Penn-Lewis)여사는 이러한 광신적 가르침들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분명히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웨일즈 부흥운동에서 탁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반 로버트와 공동으로 『사단은 성도를 어떻게 속이는가?』(War on the Saints)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이러한 극단적이고 도를 넘어선 신앙들과 행위들이 침략적인 악한 영들의 책동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속임수"가 이 책의 중심 단어이다. 이 용어는 요한 웨슬레와 헨슨 박사가 발견한 것들과도 정확하게 조화를 이룬다.
지금 여기에 내놓는 판은 7판까지 나온 원저를 요약한 것이다. 오버커머 출판사(The Trustees of The Overcomer Literature Trust)는 『사단은 성도를 어떻게 속이는가?』가 출판되었을 때 어떤 면에서 우려를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우려했던 것은 중생하고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귀신들릴 수 있다는 가르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성령 세례" 그리고 어둠의 세력들을 대항하는 공격 전쟁에 대한 이 책의 가르침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둘은 부흥을 가속시키는 방법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촉하는 방법이다.
그 '오버커머 출판사'의 편집자로서, 나는 이 책을 다시 내는 일의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앞에서 말한 요소들을 배제하는 동시에, 현대 "분파"(sects)의 극단적이며 비성경적 강조점들 밑에 깔려 있는 위험들에 대한 가르침과 경고를 선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과제도 포함되었다. 왜냐하면 속이는 영들이 분파들 뒤에 숨어서 이들을 조종하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었으며, 그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와 함께 이 책을 낸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의 눈이 열려져서 극단적인 "광신주의"의 길에 가득한 중대한 위험들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전능하신 구원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가져다주기를 바란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모든 악과 속임수의 권세를 이기시고 당신의 백성들의 힘이시요 피난처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다.
2009-05-08 17:09:44 | 관리자
산타클로스에 대해 거짓말 하지 맙시다
* 이 글은 레이시 박사의 "아이들의 천국"(도서출판 말씀과 만남 출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어떤 독자께서는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을 보고 매우 기분 나빠하실 지도 모릅니다. 제 말에 동의하지 않거나 제 말을 뒤집어 엎어버리고자 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제가 단언하건대, 만일 당신이 자녀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도록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들에 대해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해 중대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산타클로스를 살펴봅시다. 도대체 당신은 산타클로스에 대해 무어라고 가르칩니까? 저는 이것이 다음의 노래 하나로 잘 요약된다고 생각합니다. "산타클로스가 마을에 오시네"라는 노래의 가사를 살펴봅시다.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데.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누가 착한 아인지 나쁜 아인지
오늘밤에 다녀가신데.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낼 때 장난할 때도,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데."
자, 왜 아이들이 토라지거나 울어서는 안됩니까? 그 이유는 산타클로스가 자기의 사슴 썰매를 타고 기적적으로 하늘을 날아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는 위대한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12월이 되면 산타클로스를 기다립니다.
이같은 산타클로스 신드롬에는 몇 가지 사악하고 가증한 죄악이 들어 있습니다.
a. 먼저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막 10:19)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 증거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거짓말 뒤에 누가 숨어 있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매우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 자기 본래의 것을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 8:44).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사실상 사악한 마귀의 일입니다. 물론 많은 부모들이 제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제가 매우 편협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제가 아이들로부터 어린 시절의 즐거움과 낭만을 빼앗아 가려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선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세 자녀들은 산타클로스를 모른 채 자라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성탄절이 일년 중 가장 흥미진진한 때라고 말할 것입니다. 정직과 진리 안에서라면 분명히 성탄절이 의미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우리 가족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크고 놀라우며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고후 9:15).
"하지만...해가 되지 않는 거짓말을 한 것이 뭐 그리 나쁜 겁니까?"라고 반문하실 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제게 그렇게 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당신은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야 합니다. 아직도 제가 너무나 편협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대면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분은 너무나 편협하신 분이시므로 어떤 거짓말(그것이 새빨갛건 시커멓건 녹색이건 갈색이건 회색이건 횐색이건)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더럽게 하는 어떤 것이든지,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지어내는 그 무엇이든지 절대로 그곳에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오리라"(계 21:27).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그 거짓말의 아비입니다.
b. 이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시내 산에서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 말지니라"(출 20:3).
하나님보다 우선시 되거나 그분과 동등한 수준에 놓이는 것은 모두 다 우상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는 다른 신들 즉 너희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지니(이는 너희 가운데 계신 주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이라) 주 너의 하나님께서 진노를 네게 발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하실까 하노라"(신 6:14,15).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신(神)을 따라서는 안된다는 말씀에 주의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절대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산타클로스를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당신 주변에 있는 불경건한 사람들이 그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에 대해 가르칠 때, 결코 그를 하나님보다 앞세우거나 하나님과 같은 수준에 놓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가 한 번 살펴봅시다.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누가 착한 아인지 나쁜 아인지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낼 때 장난할 때도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데."
이것은 바로 산타클로스의 신성(神性)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는 그를 전지하고 무소부재한 존재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여! 오직 하나님만이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눈은 어느 곳에서나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을 살피시느니라"(잠 15:3).
"주님의 눈은 온 땅을 이리저리 달리시며"(대하 16:9)
"그분 앞에 드러나지 않는 피조물이 하나도 없고, 오직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 하시는 그분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 나느니라"(히 4:13).
당신의 자녀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도록 가르치는 것은 사악하며 공개적인 우상 숭배입니다! 만일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살아계시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우상들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살전 1:9).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아멘"(요일 5:21).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전 10:14)
c. 이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는 어린 아이에게 한 번 물어 보십시오 "성탄절에 이 선물은 누가 주었니?" 그러면 그 아이는 "산타클로스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오류를 범치 말라.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 1:16,17).
따라서 위의 성경 말씀과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며 신성모독입니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곧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지 않은 신앙심은 고난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신을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산타클로스는 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대적이 되느니라"(약 4:4).
"내가 가장 높으신 분과 같이 되리라"(사 14:14)고 외쳤던 그 날부터, 루시퍼 즉 사탄 마귀가 가장 강렬히 추구해 온 것은 경배를 받는 것이었습니다(마 4:9). 참 하나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요일 5:20)로부터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경배하게 할 때마다, 사탄 자신은 간접적으로 경배를 받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신입니다(고후 4:4). 신이란 숭배 받는 대상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사탄은이 세상의 신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산타클로스에게 돌리게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사탄을 숭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한 번 물어 보십시오. "크리스마스는 누구에 관한 것이니?" 만일 아이가 "산타클로스요"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소위 크리스천 가정이라 불리는 집안에서 자란 대다수의 아이들이 그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이가 "산타클로스하고 예수님이요"라고 대답한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신성모독입니다. 그 대답이 100%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악한 것이며 신성모독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는다면, 그것은 마귀에 의해 이루어진 신성모독입니다. 누가복음 19:10에서 예수님은 참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말해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왜 말구유가 등장합니까?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동방의 현인들을 인도하던 별이 마구간 위에서 멈추어 섰습니까?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천사들이 떨고 있는 목자들에게 다윗의 동네에 구세주가 태어났다고 이야기했습니까? 이는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바 되어 구세주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왜 성탄절이 있습니까? 잃어버린 자들 때문입니다.
"신실하도다 이 말이여,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도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들어오셨다, 함이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부글부글 끓는 유황,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길, 검고 메스꺼운 연기로 가득한 지옥에서 죄인들을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은 갈보리에서 십자가형을 당하셨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도대체 솜이 붙은 빨간 색 옷을 입은 채, 사슴을 타고 나타나는 뚱뚱이 산타클로스가 속죄의 피, 십자가, 구원, 하늘 등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산타클로스는 마귀의 도구로서 우리 주님의 존귀와 영광과 경배를 가로채는 존재입니다. 자,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봅시다.
산타(Santa)라는 단어에서 중간에 있는 'n'을 떼어, 맨 뒤로 붙여 보십시오. 그러면 그의 정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사탄(Satan)
이쯤되면 여러분은 이 책을 덮어 버리려 할지도 모릅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계속해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거짓말을 하십시오. 그들의 인생 여정에 걸림돌을 던져 놓으십시오. 계속해서 신성모독적인 우상 숭배를 하십시오. 언젠가 당신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 산타클로스 거짓말에 대해 물으실 때, 당신은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이제 당신은 제게 화를 낼 것입니다. 좋습니다. 제가 나쁜 사람이라고 욕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저는 언젠가 당신이 주 하나님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경고로 말씀 드립니다. 당신은 당신이 자녀들에게 가르친 내용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말은 어디까지나 거짓말이며, 거짓말은 죄입니다. 죄는 어린아이들을 실족케 만드는 거침돌입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단 채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그에게 더 나으리라"(눅17:2).
2009-05-08 17:08:46 | 관리자
사탄(Satan, 쎄이턴) 대적하는 자(왕상11:14; 시109:6). 예수님은 베드로를 이런 의미로 꾸짖으셨다(마16:23; 막8:33). 그러므로 사탄은 사람의 혼의 가장 큰 대적자 즉 마귀, 타락한 천사들의 통치자,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고소하는 자를 가리킨다(욥1:7, 12; 슥3:1-2; 계12:10). 그는 사람들을 유인하여 죄를 짓게 하고(대상21:1; 눅22:31) 따라서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육신적 도덕적 죄의 창시자이며 특히 각종 재난 특히 죽음까지도 가져오는 악한 성향을 만드는 장본인이다(눅13:16; 히2:14). 그러므로 사탄은 사람을 부추겨 죄를 짓게 하고 또 기독교를 가로막는 모든 방해 요소의 근원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방해 요소들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마음과 삶을 개혁하려는 것을 크게 저지하고 있다(마4:10; 요13:27; 롬16:20; 엡2:2). 마귀 참조.
사탄은 단순한 악의 원리가 아니라 한 인격체이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사탄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우주의 권세자이고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이며(엡2:2) ‘이 세상의 신’(고후4:4)이다.사탄의 기원은 다소 신비 속에 가려져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피조물이고 한때 극도로 높여진 존재라는 점이다. 타락하기 전 사탄은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었다. 그룹 참조. 그는 하나님의 왕좌의 근위병이었으며 창조된 날로부터 죄악이 그 안에 발견되기까지 모든 길에서 완전했다. 비록 그에게 지혜의 충만함과 완전한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은 그의 마음속에 창조주와 같게 되려는 교만을 일으켰고 결국 그의 타락으로 이어졌다(사14:12-20; 딤전3:6). 그는 가장 귀하고 보배로운 보석들로 덮여 있었고 금으로 짠 옷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거주했고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살았다(겔28:11-19). 루시퍼 참조. 사탄: 이 세상의 신 선도 참조(70).많은 사람들은 지금 사탄이 자신의 천사들과 더불어 지옥에 감금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재 사탄과 그의 천사들은 자유로운 상태에 있으며 욥1:7; 2:2 등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고 주님께서 사탄에게 묻자 그는 “땅에서 여기 저기 다니고 또 그 안에서 위아래로 거닐다가 오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탄은 하늘에서 완전히 추방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하늘의 영역에서와 땅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움직이고 있다(벧전5:8).사탄은 왕으로서 왕국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도 “사탄이 만일 사탄을 내쫓으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왕국이 서겠느냐?”라고 하시면서 이것을 확증하셨다(마12:26). 이와 더불어 엡6:12는 사탄의 왕국이 정사들, 권세들, 이 세상 어둠의 주관자들, 그리고 높은 곳들에 있는 악의 영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세상을 속이는 존재이다. 여기서 세상이란 사탄의 체제에 속하는 모든 사람과 사탄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요일5:19). 사탄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눈을 가림으로써 그들을 속이고 있다(고후4:3-4). 말세에 사탄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설교자들을 관장하는데(갈1:6-9) 이 복음은 마귀들의 교리이다(딤전4:1). 그는 엄청난 배도의 선동자이며 베드로는 마지막 때에 도처에서 일어날 거짓 교사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벧후2:1-2). 그들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몸의 부활’,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천년 재림’을 부인한다. 사탄은 사람들을 미혹하면서 아주 교활한 방법을 사용하고 이로써 심지어 선택 받은 자들조차 속이려 한다. 사탄은 폭력과 박해로는 교회를 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전술을 바꾸어서 지금은 교회가 세상과 연합하도록 미혹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멸하시려고 작정하신 이 세상을 좀 더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현재 그가 추구하는 것은 웅대한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며 교회를 미혹하여 사회의 개선을 통해 그리스도 없는 천년왕국의 도래를 믿도록 하는 것이다. 사탄은 여전히 자신의 처소를 하늘에 속한 곳에 두고 있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하늘에 속한 곳에서 쫓겨나 땅에 거할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계12:9-12). 그리고 그 이후에 사탄은 자신의 때가 단지 3년 반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의 분노로 인해 지구에는 엄청난 공포가 있을 것이며 이때에 그는 짐승인 적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계13:2-8). 7년 환난 기간의 종말에 이르러서 그의 짐승과 거짓 대언자는 산채로 불 호수에 던져질 것이며 하늘로부터 내려온 한 천사가 사탄을 사로잡아 이미 만들어진 거대한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끝없이 깊은 구덩이 속에 던져 버릴 것이다(계20:1-3). 1000년이 다 찰 즈음에 사탄은 잠시 동안 풀려나지만 곧 그의 천사들과 함께 그를 위해 오래 전에 예비된 불 호수에 영원토록 던져질 것이다(계20:7-10; 마25:41). 이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의가 거하는 시대가 온다.계2:9, 13의 ‘사탄의 회당’은 아마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 즉 모세의 율법을 수호한다고 하면서 복음의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을 몹시 박해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특히 순교자를 많이 배출한 서머나 교회에 많았다.
2009-05-08 17:08:05 | 관리자
천사(Angel): 임무를 수행하는 자. 이것은 히브리말이나 그리스말 모두 일차적으로 사자(使者)를 의미하며 그래서 그렇게 번역된 곳도 있다(마11:10; 눅7:24). 이 말은 종종 보통의 사자에게 적용되었고(욥1:14; 삼상11:3; 눅9:52), 대언자에게(사42:19; 학1:13), 제사장에게(전5:6; 말2:7) 그리고 심지어 움직이지 않는 물체에게도 적용되었다(시78:49; 104:4; 고후12:7). 한편 일반적인 의미로 이 말은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되었고(말3:1) 그분의 복음의 사역자들과 교회의 감독들에게도 적용되었다(계2:1, 8, 12).
2009-05-08 17:06:17 | 관리자
질문: 불가지론은 무엇입니까?
대답: 이것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네이버 지식 사전에서 내린 정의를 살펴봅시다.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은 초경험적(超經驗的)인 것의 존재나 본질은 인식 불가능하다고 하는 철학상의 입장이다. 불가지론은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s)나 회의론자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기원을 찾을 수도 있으나, 신의 본체는 알 수 없다는 중세의 신학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인간은 일종의 지적(知的) 직관(直觀)인 그노시스(gnosis)에 의하여 신의 본체를 직접 알 수 있다는 그노시스파(派)나 본체론자의 주장에 대하여 그노시스를 부정하는 것이 불가지론이다. 로마 가톨릭 주의는 신의 존재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이성(理性)에 갖추게 되는 ‘자연의 빛’에 의하여 알게 되지만 신의 본체 자체는 알 수 없다고 하여 그노시스를 부정하였다. 신은 현세(現世)에 사는 사람에게는 거울에 비치는 모습처럼 뚜렷하지 않으며 신과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세상에서 가능하다.
불가지론은 근세에 들어서서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그 지력(知力)도 한정되어 있어 세계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알 수는 없다고 말한 철학설에 다시 등장한다. 신, 즉 자연의 속성은 무한하지만, 그 중에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연장(延長: 物體)과 사유(思惟: 精神)뿐이라고 주장하는 B. 스피노자의 설이나, 인간의 지식은 인상(印象)과 관념에 한정되어 있어 그것을 초월한 사항은 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D. 흄의 주장도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지론이다. 또 사물 자체는 인식하지 못하여도 주관형식인 시간 ·공간 내에 주어지는 현상만은 인식할 수 있다는 I.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생각도 일종의 불가지론이다. 1869년에 불가지론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는 T.H.헉슬리나 H.스펜서와 같은 실증론자는 지식을 경험 가능한 사실로만 한정시켰다. 이와 같이 형이상학적인 여러 문제에 관하여 분명히 불가지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경향은 현대의 논리실증주의와도 이어진다. 고대 회의론자의 시조 피론, 현상론자 W.해밀턴, F.H.브래들리, E.H.뒤부아 레몽 등도 넓은 뜻에서는 여기에 속한다.
인도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가 주장하였다. 산자야는 내세(來世)가 존재하느냐, 선악(善惡)의 과보(果報)는 존재하느냐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하여 일부러 애매하게 대답함으로써 확정적인 대답을 피하였다. 여기서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한 판단 중지의 사상이 처음으로 표명되었다. 원시불교에서 무기사상(無記思想)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신학으로 되돌아가면 칸트나 R.H.로체의 영항을 받은 A.리츨은 인간이 아는 것은 현상뿐이나, 신은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주장하여, 신학은 종래의 형이상학과 같이 신을 존재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매력 있는 이상(理想)으로 다루어,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시키고 기독교는 도덕면에서만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위의 네이버 지식 사전에서 알 수 있듯이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알 수도 없고 증명해 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Agnostic의 본래 뜻은 ‘지식이 없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불가지론은 무신론을 지적인 차원에서의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무신론은 하나님은 없다고 합니다.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을 할 수 있고 혹은 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에서 불가지론은 옳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도 없고 증명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 장 6절은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신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4:24). 그러므로 그분은 볼 수 없고 또한 만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나타내지 않는 이상 인간의 시각으로는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롬1:20).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는 우주/자연 가운데서 아주 자명하며(시19:1-4) 또 자연을 통해 느낄 수 있고(롬1:18-22) 사람의 마음 가운데서 양심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전3:11).
불가지론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 모두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이들은 회색지대를 주장합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지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서도 안 되고 불신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면 그분의 존재를 증명하여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논쟁 자체를 위해서 일단 하나님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분명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증거들을 생각하지 말고 유신론과 무신론/불가지론 모두 동일하게 옳은 것으로 봅시다. 그리고 죽음 후 가능한 상황들에 대해 어느 입장이 더 합리적인지 살펴봅시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두 가지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은 후에 소멸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신다면 무신론/불가지론자들은 죽고 나서 곧바로 누군가에게 즉 자기들이 부인한 창조주 하나님에게 답변을 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유신론자가 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입증할 수도 없고 입증 못할 수도 없다는 입장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도 있는 이상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측면에서 그다지 지혜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의심을 갖는 것은 정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해서 의심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도록 이미 주신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로마서 11장 33-34절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었느냐?”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으로 믿어야 하고 또 그분의 방법/길들을 믿음을 가지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한 그러길 원하십니다. 신명기 4장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만일 네가 거기서 주 네 하나님을 찾으면 곧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리라.”
2009-05-08 17:05:40 | 관리자
질문: 무신론은 무엇입니까?
대답: 무신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입니다. 사실 이 이론은 최근에 새롭게 개발된 것이 아닙니다. 기원전 1000년경에 다윗에 의해 기록된 시편 14 편 1절은 무신론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줍니다. “어리석은 자가 자기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최근 통계는 무신론자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 주며 전 세계적으로 약 10%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은 철저한 무신론자라고 주장함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 무신론자들이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신론은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논리적으로 옳을까요?
먼저 무신론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심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간단히 증명하지 않을까요? 보이심으로 증명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간단히 믿을 텐데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알리길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아주 간략하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자신을 신뢰하고 (벧후3:9) 구원을 선물로 받기 원하십니다(요3:16).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단번에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꼭 사람들이 그분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그분은 여러 차례 구약에서 자신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창6-9장; 출14:21-22; 왕상 18:19-31).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악한 길에서 떠나 모두 하나님께 순종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도 구원자로서 믿을 수 없습니다(엡2:8-9).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분을 모셔 들이라는 것이지 단순히 신을 혹은 신의 존재를 논하는 신학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신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을 때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요20:29).
그런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결코 비논리적인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의 해와 달과 별을 통해(시19:1-4), 자연을 통해(롬1:18-22)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통해(전3:11)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는 입증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일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무신론을 믿는 데에도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명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알 수 있는 지식을 모두 찾아보고 또 우주 속에 가 볼 수 있는 모든 곳을 가 보고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았다는 전제하에 이런 결론이 나와야 우리가 그 주장을 믿을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무신론자도 이런 가정 하에 무신론을 주장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그럴 거라고 믿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가 되려면 유신론자가 될 때 필요한 믿음이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무신론도 입증될 수 없는 추측이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반드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두 개의 믿음 중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삽니다. 자, 어느 것이 더 현명한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살다가 죽었는데 혹시 하나님이 있어서 당신을 지옥 불속에 넣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보이니 말도 없고 언어도 없으며 그것들의 음성도 들리지 아니하나 그것들의 줄이 온 땅에 두루 나아가고 그것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시19:1-4).
2009-05-08 17:05:09 | 관리자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5:7)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특이한 것이다. 삼위일체란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고 아버지, 아들, 성령님의 확연히 서로 구분되는 세 인격체가 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한 하나님으로서 이 세 인격체 중 하나가 없으면 한 하나님이 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예가 있다. 시간은 반드시 과거, 현재, 미래가 있으며 각각이 다 시간이고 이 셋 중 하나가 없으면 더 이상 시간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체는 공간을 차지하면서 반드시 길이(x), 너비(y), 높이(z)를 가지고 있으며 이 중 하나가 없으면 더 이상 물체가 아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며 각각의 인격체가 완전하고 동등한 분이시며 어느 인격체도 다른 인격체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속성은 여럿이지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만드는 근본 속성은 그분의 거룩함이다. 하나님은 죄를 보면 즉시 심판하는 공의의 하나님이므로 죄인은 그분 앞에 설 수 없다. 이처럼 완전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생물은 죄가 없으신 아들 하나님뿐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이 발동되어 아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만족시켜 완전한 대신 속죄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공의와 거룩함이다(벧전1:15,16). 성도들이 사랑이라는 엔진이 달린 기차를 운행할 때 반드시 공의와 거룩함이라는 레일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규제받지 않은 사랑으로 인해 교회와 사회에 혼란과 무질서가 생긴다. 따라서 교회에서 공의와 사랑이 갈등을 일으킬 때 공의를 택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따라야 할 근본 속성이기 때문이다.
2009-05-08 17:04:26 | 관리자
왜 하나님을 믿는가?
사람이 세상을 보고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하늘을 보고서 어떻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 에이브라함 링컨
핵심내용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네 가지 타탕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정글 속의 피라미드
내가 고고학자가 되어 일단의 조수들의 데리고 과테말라의 정글을 터벅터벅 걷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빽빽한 초목을 칼로 베어 겨우겨우 길을 열어 가면서 마야 유적이 있다고 확신하는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정글의 뜨거운 열기와 뱀과 모기와 온갖 벌레들이 진로를 방해한다. 눈은 따끔거리고 발바닥은 타는 듯이 뜨겁고 온몸의 근육이 쑤신다. 그래도 우리는 백 년도 더 된 덩굴을 헤치고 정글을 빠져나간다. 그렇게 어느 지점에 이르자 마치 정글 바닥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녹색 다이아몬드가 불쑥 솟아오르는 것처럼 열대의 덤불에 덮인 거대한 피라미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야 유적이 있을 거라고 내가 확신했던 지점이 분명하다. 우리는 즉시 캠프를 설치하고 발굴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탐사와 발굴이 진행된다. 이제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마야 유적지가 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탐사를 시작하기 얼마 전, 나는 비행기를 타고 과테말라 정글상공을 날다가 바닥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루어진 둔덕을 발견했다. 순간 나는 어떤 지적 존재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만든 게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연은 바닥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둔덕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시 그 지점의 위도와 경도를 기록하여 탐사에 착수했던 것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것일까? 중앙아메리카 정글 한가운데 고대 마야 문명의 유적지가 있을 것이라고 내가 믿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목적과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그 이면에 ‘지적 존재’가 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주는 자기 자신이 목적을 갖고 있음과 그 이면에 지적 존재가 있음을 명백히 드러낸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네 가지 타당한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주의 존재를 해명하기에 충분할 만큼 광대하시고 위대하신 유일한 ‘원인’이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히 말했다.
“집마다 지은 자가 있으되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히3:4).
우리는 중앙아메리카 정글 한가운데에 바닥이 정사각형으로 된 둔덕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해야 한다. 우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주는 목적과 의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주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진화론은 지구의 생명체에 대해 하나님을 배제한 채 설명하지만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두 가지 입장을 선택 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견해를 거부한다. 다른 하나는 우주가 저절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므로 ‘믿음을 요한다’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보다 우주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는 것이 훨씬 더 큰 믿음을 요구하는 것 같다.
둘째 이유: 우주의 질서와 목적은 그 이면에 지적인 창조자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롬1:20).
우주는 분명 우리 눈앞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존재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우주는 분명한 질서와 계획과 목적을 지닌다. 이것은 책상 위에 시계 부속이 난잡하게 어질러진 상태와 그 부속을 짜 맞추어 시계를 움직이게 하는 것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난잡하게 어질러진 시계 부속들의 기원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것과 어떻게 그것이 정교하고도 절묘하게 조립되어 움직이는지 설명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우주는 우리 눈앞에 존재할 뿐 아니라 정밀한 시계처럼 움직인다. 과테말라 정글의 정사각형 둔덕은 마야 문명을 암시한다. 우주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소리친다.
셋째 이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세 번째 이유이다. 바울은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언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이느니라”(롬2:15).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한다. 자신의 기원에 대해 알기를 갈망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알기를 갈망한다.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알기를 갈망한다. 인간은 다른 짐승보다 월등하다. 인간은 다른 짐승보다 지적이다. 양심을 갖고 있으며 영적인 세계를 느낀다. 역사의 모든 문명은 종교를 갖고 있다. 짐승의 세계에는 이런 것들이 없다.
넷째 이유: 성경은 자연과 인간을 정확히 보여 준다.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밣기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진리라면 과학과 모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결코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 사실 현대 과학의 토대가 된 것은 성경이다. 우주는 의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만이, 우주는 예측 가능한 법칙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만이 우주를 연구하려는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성경은 현대의 과학자들에게 이러한 확신을 제공한다.
시편 19편 1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정교하게 설계하심으로써 그것이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하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8-20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연과 우리의 내적인 직관적인 인식력을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다고 말했다. 우리의 경험이 사실을 입증한다. 밤하늘에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별들을 보면 직관적인 생각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하나님이 계신 게 분명해!’
물질적인 것들에 관한 성경의 언급은 정확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것들에 관한 성경의 언급도 정확하다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히11:6).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히브리서 기자가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 ‘믿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시험관이나 컴퓨터 자료를 조사하는 실험실에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지만 자연과 역사의 법정에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과 역사의 법정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 주는 증거들, 이성적인 의심을 압도할 증거들, 방자한 인간의 마음을 설득하여 이성의 의심을 떨치도록 하는 증거들이 충분히 널려 있다.
물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믿지 않을 이유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만한 증거는 충분지 않다. 따라서 불신은 곧 또 하나의 믿음이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은 믿을 만한 근거를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만한 논리적, 철학적 근거들이 충분할 뿐만 아니라 진화론이 우주의 복잡함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강력한 물질적 증거는 수도 없이 많다. 현대의 유능한 과학자 가운데에도 진화론에 의심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에 반해, 진화론이 우주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유일한 대안인 창조론이 자기 입에 맞지 않아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이를 믿으려 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불신 과학자의 고백: “나는 불가능한 것을 믿는다!”
하버드 대학 교수로 1967년에 생리학/의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생물학자 조지 왈드(George Wald)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생명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한 가지 가능성은 자발적인 발생 곧 진화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발적인 발생론은 이미 120년 전에 파스퇴르와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불신임을 받았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한 가지 논리적 귀결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로 생명이 발생했다는 결론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결론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아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믿기로 했다.”(George Wald, ‘The Origin of Life’, Scientific American, May 1954)
결론
당신은 무엇을 믿든지 믿음으로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믿음으로 믿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도 믿음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내가 믿음을 갖고 있나,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진화론을 믿을 것인가,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가 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우주의 존재에 대한, 그 정교함과 광대함과 목적과 설계에 대한, 인간의 독특함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만에 꿰뚫는 기독교 진리(맥스 앤더스, 지음, 규장 출판서)에서
2009-05-08 17:03:44 | 관리자
하나님(God): 크리스천 믿음의 대상. 이 분은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서 영원하고 무한하며 완전한 분이시고 만물의 창조자요, 자신의 권능과 섭리로 모든 것을 지키고 다스리는 분으로 모든 사람들의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 되는 분이시다(신6:4-5). 하나님은 의와 사랑이 충만하신 인격적 존재로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유일무이하게 살아 계신 신이라는 점에서 세상의 다른 신들과 현저하게 다르다(시18:46; 42:2).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인간 역사에 능동적으로 개입하셔서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역사의 주님이시며(사40:10) 자연의 신비나 공포심 등에서 발생한 자연 종교의 신이나 사람의 이성에 의해 형성되거나 이해되는 철학적인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창1:1; 사44:24) 전능한 분이시고(창17:1; 대상29:11) 온 세상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고(행7:48) 사람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는 거룩한 분이시다(출3:5; 시47:8). 삼위일체 하나님 선도 참조(60).
영어 단어 God은 실제로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잘 모르며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라 불렀는데 이것은 모세가 그분의 이름을 물을 때에 그분께서 친히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일러 주신 것으로(출3:14)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과 자존(自存)하심을 잘 보여 준다. 여호와 참조. 그러나 이 이름이 너무나 두려웠으므로 그들은 성경에서 이것이 나올 때마다 발음하지 않고 대신 주를 뜻하는 아도나이(Adonai)라 읽었다고 전해지며 Adonai Jehovah 즉 Lord Jehovah가 나오면 ‘주 주’라 할 수 없으므로 Adonai Elohim 즉 ‘주 하나님’으로 읽었다. 한편 복수형의 엘로힘(Elohim)은 ‘창조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분이 여러 면에서 완전함을 뜻하기도 하고 삼위일체를 암시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 참조.성경은 아무런 변명도 없이 혹은 이유도 주지 않고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시작부터 확증한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1:1)는 말씀은 그분의 존재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고 그분의 본성과 의지를 보여 주는 교훈이 된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무신론은 존재할 수 없으며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으므로 범신론도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유일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므로 다신론도 무효하며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셨으므로 물건이나 천체를 숭배하는 유물론도 무효하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므로 진화론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창1:1은 창조 사역 속에 드러난 하나님 자체를 보여 주고 동시에 그분의 섭리 속에 드러난 그분의 길과 그분의 성품의 영화로움을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다.성경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나 세 가지 뚜렷이 다른 인격체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 이 같은 세 인격체는 영원 전부터 존재하며 동등하며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지 않다. 삼위일체 참조.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리고 그 민족을 통하여 온 세상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다(신7:6-11; 사66:18-21). 하나님은 먼저 족장 아브라함을 은혜로 불러 특별한 사랑과 약속을 주셨으며 부르심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자신의 계획을 이루셨다(창12:1-4). 이 후에 계속해서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여호와로 알려 주시고(출3:14)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출3:13-17). 이때 여호와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요 이스라엘이 순종하고 신뢰할 분으로 이스라엘을 속박에서 구출하여 자신의 은혜를 온 천하에 밝히 드러내신 분이시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한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오직 그분께 경배하고 그분의 뜻에 절대 복종하여 은혜에 부응하여야 했다(출20:2).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사랑하시며 지키시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며(시9:8)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므로(출20:5)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다른 신에게 달려가 불의를 행할 때에는 엄히 심판하신다(신28:15-6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우상숭배의 길을 가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70년간의 바빌론 포로 생활을 거쳐 고국에 돌아와 다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으나 율법의 노예가 되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찾지 않고 믿음이 피폐해져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대망하게 되었다(말3:16-18; 눅2:25-39). 한편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죄로 인한 공백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하게 채워졌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신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성품과 계획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 공의, 긍휼, 사랑, 심판, 통치 등을 모두 볼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일하심을 통해 믿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자신의 아들로 삼으시며(롬4:4-8; 요1:12-13) 이로써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롬8:14-16). 아버지 참조.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천이요 소유자요 치리자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미리 아심에 근거하여 사건과 사람을 선택하고 예정하신다. 또한 그분은 영원한 재판장이시다. 참된 종교는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되며 그분을 고귀하게 사랑하고 신실하게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요17:4).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참조.
2009-05-08 17:02:30 | 관리자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영의 양식을 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레이시 박사님의 책들은 읽으면 읽을 수록 성도들에게 깊은 감명을 줍니다. 미국 내 유명한 크리스천 소설가이기도 하시며 근본적 침례교인으로 복음 전도자의 사역을 감당하는 박사님의 글을 통해 많은 영혼들이 하늘의 만나를 공급받았습니다. 박사님과 서신과 전화통화를 주고받고 박사님의 모든 책을 번역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는 때가 되면 반드시 다 번역하겠다고 다짐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여 년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때가 온 것 같아 한 권 한 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발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The Blood of His Cross)에서 박사님은 추리 크리스천들이 간과하기 쉬운 기본적인 진리를 하나하나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통찰력과 확고한 믿음 그리고 해박한 성경 지식 그리고 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번역을 하면서 역자 역시 많은 감명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릎을 치면서 참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완벽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피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가르쳐 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좋은 책을 출간해 주신 ‘말씀과 만남’사의 최헌근 형제님과 출간 작업을 해 준 여러 자매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주 예수님의 보혈(寶血)의 능력과 권세가 높임을 받기 바랍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참으로 그분께서는 창세 전에 미리 정하여졌으되 이 마지막 때에 너희를 위해 드러나셨으며 너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은 너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 풀은 마르고 그것의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지속되나니 복음으로 너희에게 선포된 말씀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18-25).
2009-05-08 16:56:44 | 관리자
오늘날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믿으면' 충분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함께 교제를 나누며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같은 철학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이 철학은 많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복음들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약 2000 년 전에 사도 바울은 이 문제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될까 내가 염려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 11:3-4)
고린도 교회는 부주의하고, 육적이며, 비성경적인 관념을 용납했다. 바울은 만약 거짓 교사들이 그들에게 와서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선포할 경우, 고린도 교회가 거짓 교사들로부터 분리되는 대신 그들을 용납할 것임에 대해 염려했다.
이것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완벽하게 묘사한 것이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중하게 시험하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복음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대신에 그들은 관용과 "다양성 내에서의 연합"을 자랑했다.
이에 관한 완전한 실례(實例)가 '예수님을 위한 행진(March for Jesus)'집회이다. 이 집회는 매년 개최되며, 신앙고백을 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된 증거를 보이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것을 시도한다. 예수를 위한 행진의 캐나다 국제 조정자인 마티 클레인은 금년에 몰몬 교도들이 행진에 참여해도 좋다고 증거했다. 오타와의 샤프(Alan Sharpe)는 5 월 2 일 클레인에게 편지를 써서 "나는 예수님을 위한 행진에 관심이 있다. 그 행진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몰몬교도들도 참여할 수 있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클레인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누구든지 참가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이 행진이 예수님을 위한 행진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 행사는 특정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오직 한 인격(예수) 외에는 어떠한 것도 조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나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샤프는 5 월 11 일에 다시 편지를 써서 몰몬교가 예수님을 위한 행진에 참가하는 것에 관해서 확정 여부를 물었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내가 스스로 선한 몰몬교도라고 부르기를 원할 경우, 루시퍼가 예수님의 형제이며, 예수님은 일부다처주의자였으며, 그분의 아내로는 마리아, 마르다(나사로의 여동생), 막달라 마리아 등이 포함된다는 장로들의 가르침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이것이 정통 몰몬주의의 전부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믿으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찬양하기를 원하는 경건한 몰몬교도가 예수님을 위한 행진에 여전히 참가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클레인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하나님과 본인 외에는 아무도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만약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면...., 만약 우리가 그분과 개인적인 만남의 교제를 가지며,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거주한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다. 여하튼, 나는 다음 사항을 계속 주장하는 바다. '누구든지 참가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이 행진이 예수님을 위한 행진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 행사는 특정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직 한 인격(예수) 외에는 어떠한 것도 조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나 다른 이들이 그들의 다양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엄청난 무지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세상에 있는 거짓 그리스도들 중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로마 카톨릭 미사에서 경배를 받는 성병(wafer) 예수
2. 일부다처주의자인 몰몬 예수
3. 처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현대주의자(Modernist) 예수
4. 하나님이 아닌 유니테리안(Unitearian) 예수
5.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을 보편적 구제주의자(Universalist) 예수
6. 부유한 성공주의자 예수
7. 사람들의 영을 파괴하고 그들을 통제 불능 상태로 웃게 만들며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게 하는 웃는 예수
8. 한 번도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신의 자아상 만을 세우려는 자존(自尊)(Self-esteem) 예수
9. 자유주의 신학의 창시자인 혁명가 예수
이들은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거짓 그리스도들 중 단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 교사들을 식별하기 거부하는 자들과 거짓 교사들과 거짓 복음들을 드러내기 거부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거짓 예수를 미워하지 않고 참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단지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선포하고 논쟁에 빠지지 말도록 자신을 부르셨다고 주장하는 자는 크게 미혹된 자이다.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들어왔나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런 자가 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너희 자신을 살필지니 이로써 우리가 이룬 그것들을 우리가 잃지 아니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죄를 지으며 그리스도의 교리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교리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느니라."(요이 7-9)
"사랑하는 자들아, 공통으로 얻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글을 쓰려고 열심을 내던 차에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너희가 힘써 싸우라고 너희에게 써서 권면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기언 들어온 어떤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유3)
2009-05-08 16:56:04 | 관리자
이것은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책이라(창5:1).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마1:1).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느니라(고전15:45).
성경은 두 명의 상징적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 번째 인물은 아담이라 불리며 두 번째 인물은 마지막 아담, 둘째 사람, 혹은 하늘로부터 오신 주(고전 15:47) 등으로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첫째 아담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한 책임을 지고 있다(롬5:12). 반면에 마지막 아담은 첫째 아담이 행한 것을 되돌리기 위해 즉 죄를 없애기 위해 이 땅에 왔다(롬5:17; 히9:26). 구약성경은 첫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것으로 그들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창5:1-27). 구약성경에는 아벨, 에녹,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엘리야, 느헤미야 등과 같은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런 훌륭한 사람들 모두가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도시를 소망하면서 결국 죽는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의 모든 세대가 죽는다는 것이 구약성경이 보여 주고자 하는 핵심이다. 반면에 신약성경은 사람의 최대의 원수인 사망을 이기신 분, 영원한 도시를 예비하시고 성도들을 맞으러 다시 오시는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한 세대 뿐이 없다(시22:30; 사53:8; 벧전2:9). 그분 안에는 단 한 세대뿐이 없으므로 그분에게서 난 자들은 과거, 현재, 미래에 상관없이 모두 형제, 자매이다. 마귀는 세상의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요일2:16)으로 첫 아담을 좌절시키고 죄를 이 땅에 가져왔으나(창3:5-6)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그것들을 다 말씀으로 물리치고(마4:1-11) 공생애를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무덤에서 일어남으로써 마귀의 최대 무기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로 구원 사역을 완수했다(히2:9-18). 첫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육체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분께서 육체로 부활한 것 같이 그분의 의를 힘입어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육체적으로 살 것이다(고전15:51-57; 살전4:13-17).
2009-05-08 16:54:19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