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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복음주의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설교야말로 사람의 소명 중에 가장 고귀하고 위대하며 영광스러운 소명'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관여하시는 하나님께서 주님의 교회의 강단에 세울 목자를 구별해 놓지 않으실리는 만무하고다 봅니다. 문제는 설교자라는 위대한 사명을 저버리고 강단을 세속적인 것과 욕망이 분출하는 무대로 변질시킨 목자들이겠지요. 교우들끼리 말씀을 나눈다는 평신도교회가 인간의 눈으로는 발전된 교회 모델로 보여질지도 모르겠지만 말씀의 위대한 권위마저도 낮추어 버릴 치명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왜곡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성을 지키고 그 말씀 그대로를 선포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강단을 찾아 나서는 것이라 봅니다. 자신이 다니던 교회라서 아무 고민도 갈등도 없이 주일마다 성경책 챙겨 습관적으로 교회로 나아가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주님이 인정하시는 강단을 찾아 떠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얼마나 이쁘게 보실까 상상해봅니다. 저도 몇 개월 전 부터 성경지킴이 사이트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소박하게 덧글로 인사드립니다.^^ 변질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에 간절해있는 사람들에게 인터넷공간에 이런 귀한 말씀의 장을 여시고 운영하시는 정동수목사님 그리고 돕는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010-04-13 21:23:45 | 김대용
올리신 내용의 글은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시키려는 자들의 속임수일 뿐입니다. 구약족보에 없는 이름일지라도 신약에 기록되어 있으면 실제로 존재한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의 말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정확히' 읽고 기록된 그대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철학이나 헛된 말들에 속지 않는 비결입니다. 이해하고 못하고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아무도 헛된 말들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5:6a).
2010-04-13 20:23:39 | 김형식
작년말에 저도 교회를 옮기면서 독립침례교회를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 방문하여 설교를 들었습니다. 예배후에 집에 오면서 아내가 제게 얘기하더군요(하나님의 종인 목사님에 대해 서로 비교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죄송하게도 잠깐하겠습니다), "이전교회 목사님 보다 말씀중심이고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다". 그 자매님도 이런 느낌 아니었을까요 ? 그후로 이 교회에 나가게 되고 이전 교회에서는 전혀 움직이지 않던 사람이 지금은 자발적으로 일을 있으면 하려고 하고 이전 교회 생활에서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설교 말씀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김문수 형제님 책도 아내가 주위분들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이게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적극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성경에 근거한 말씀 선포를 들으면 사람이 변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2010-04-13 19:10:50 | 김학준
지난 주에는 예배를 마치고 한참을 서서 울고 있는 한 자매님을 보았습니다. 예쁘게 생긴 딸아이는 엄마를 맴돌며 위로하고 있었고 지긋이 미소를 짓고 있는 아빠가 옆에 든든이 서 있었는데 ... 민망할 것 같지만 그 눈물의 원인이 무엇일지 궁금해져서 진정되기를 기다렸는데 온 가족이 함께 이곳에 와서 예배드리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과연 나는 언제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는가? 또한 온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에 대한 감동이 있었는가? 딱딱하고 무뎌진 제 마음이 부끄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자매님댁은 이동원목사님이 시무하는 지구촌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이동원목사님은 지성과 인품이 있는 분으로 평판이 나 있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분이지만 우리나라에 관상기도를 설파하고 두 날개 운동을 펼친다는 소식에 안타까운 마음만 있었는데 오늘은 그곳의 동정이 어떤지 궁금해져서 그 교회 홈피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지구촌교회는 ‘3·3·3 비전’ 달성을 자축했다.  교회 설립 때부터 품어온 성도 3만명, 평신도 선교사 3000명, 해외 선교사 300명 양육의 바람을 실현한 것이다. 이 목사는 이어 새로운 ‘2020 비전’인 ‘동역으로 펼쳐가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축제는 연합 합창단 700여명의 ‘할렐루야’ 찬양과 꿈과 비전을 담은 오색 풍선들을 하늘로 띄워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곳에 모였던 수 많은 군중들은 과연 어떠한 마음이었는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모임이었는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만큼의 비중을 두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하더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안일하고 편안하고 자유롭고 게을렀던 제가 자다가 깬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 혹시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위해 쓴웃음과 괴로움을 겪는 또 다른 가족이 있는지 찾아 헤메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전쟁의 후방에서 전방의 긴박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야 할 것 같아 부족한 글솜씨지만 올려봅니다.   (부족한 글솜씨라 용기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저를 시작으로 해서 용기내시라는 의미도 담으면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2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4-13 18:38:50 | 정혜미
(마 1:11) 요시야는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는데 그 무렵에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니라. 원래 역사적 사실대로 서술하자면, "요시야 - 여호야김 - 여고니야" 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집트왕 파라오느고가 세운(대하 36:4, 왕하 23:34) 꼭두각시 왕 여호야김을 다윗 왕가를 계승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메시야 계보에서는 삭제했습니다. 여호야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빠지고 대신 요시야의 손자인 여고니야가 들어가 있습니다. (참고: 게시물 166번,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숙부인가, 형제인가?")
2010-04-13 18:07:36 | 김문수
이 문제에 대해서 논증의 글을 올려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괜히 쓸데없는 억측과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가 있어서 성경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기초하여 답하겠습니다. -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지만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롬3:4). 그런즉 위에서 성경을 공격하는 신학자나 문서비평가들의 말이 거짓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입니다. - 성경은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쓴 글이 아니라, 성경 기록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것입니다(딤후3:16). 성경의 각 단어들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것이므로 누가복음 3장에 게난이 들어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단어를 주셨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기록자가 어느 문서를 보고 족보를 계산했느니, 이것이 어느 사본에서부터 등장하느니, 필사가들이 제대로 옮겨 적었느니 못 적었느니 하는 논의는 믿을 수도 없거니와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 창세기와 역대기의 기록이 누가복음하고 일치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는 다윗의 간음사건이 나오는데 역대기에는 안 나옵니다. 그렇다고 역대기의 기록에서 다윗의 간음사건을 필사가들이 삭제했다거나 사무엘기에 누군가가 다윗을 모함하려고 있지도 않은 간음사건을 집어넣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각 기록들은 각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과 기록하신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누가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하고 차례대로(눅1:3) 하나님께서 주신 단어들로 기록했습니다. 누가가 창세기나 역대기의 족보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기록한 것은 하나님께서 게난이라는 단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 아르박삿은 살라를 낳았는데 여기서의 낳았다(begat)는 것은 "출산"(bear)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속 관계가 법적으로 성립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관계는 대부분 자녀 출산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유다의 며느리가 낳은 아이가 유다의 아이로, 요셉의 두 아들들이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처럼 인준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 누가의 족보 기록은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입니다. 이것은 사실적인 관계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창세기와 역대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게난(가이난)이 법적 상속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시고 그를 계보에 넣어주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2010-04-13 17:55:50 | 김문수
제 아내가 성경 공부중  누가 복음 족보에 가이난(게난) 2번 나오는데 아르박삿의 아들 셀라는 성경의 오기 라고해서 성경이 잘못될리가 없다고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창조과학 홈에서 찾았습니다. 무엇이 잘못된건지 알고 싶습니다.    아르박삿의 아들은 누구인가? : 가이난, 셀라? (Who was Arphaxad’s son: Cainan or Shelah?)  Answers Magazine    만일 당신이 성경 관련 잡지에서 족보 도표를 대조해 본다면, 대부분의 현대 번역 성경들에 기록되어있는 누가복음 3:36절의 가이난(Cainan)의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신은 이 이름이 창세기 10:24, 11:12, 그리고 역대상 1:18,24절에 있는 상응하는 족보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 그럴까? 첫째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딤후 3:15-17), 이 모순은 무오 했던 성경 원본에서는 오류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이 삽입(insertion)은 후대의 70인역(Septuagint, LXX) 필사본들(비-영감된 히브리 필사본들)에서 발견되어진다.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라는 이름이 삽입된 것에 대해서는 2 가지의 가능성 있는 설명이 존재한다. 첫째, 가이난은 원본 사본에는 들어 있었는데, 히브리 필사자들이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을 필사하던 중에 이 이름을 누락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 모리스 박사가 지적했던 것처럼[1] 히브리 서기관들은 필사 과정에 매우 신중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성이 낮은 설명이다. 또한 그 이름은 구약성경의 다른 고대 판(사마리아역, 불가타역, 가장 오래된 70인역 등)들에서도 빠져있다. 두 번째의 설명은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즉 누가의 편지를 필사한 70인역 필사자들이 부주의로 인해 아르박삿(Arphaxad, 아박삿)과 셀라(Shelah, 살라) 사이에 가이난을 실수로 삽입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11:12). 따라서 그 사이에 가이난이 들어가는 것은 나이 상으로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나중의 70인역 필사자들이 누가복음에 있는 명단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에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을 삽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래리 피어스(Larry Pierce)는 이러한 설명이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38 – 약 100)의 자료에 의해서도 지지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요세푸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를 편집하기 위해 분명히 70인역을 사용했지만, 가외의 가이난을 포함시키지 않았음을 그는 입증하였던 것이다 : 만약 요세푸스가 ‘70인역(LXX)’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70인역에 기초하여 쓰여진 어떤 다른 문서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저술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70인역의 실수들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의 시대에는 가이난이라는 가외의 세대가 70인역 또는 요세푸스가 사용했던 문서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 않았다면 요세푸스는 그(가이난)를 넣었을 것이다! 만일 70인역에 가이난의 이름이 포함되어있었다면, 요세푸스가 착오로 그것을 누락시켰거나(가능성 없음), 그 자료를 가볍게 취급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제롬(Jerome, 약 AD 347 – 419/420)은 벌게이트 성경(Vulgate, 성경의 라틴어 판)을 AD 5세기에 번역하였을 때, 어거스틴(Augustine, AD 354 – 430)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는 70인역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롬은 70인역이 너무나도 부정확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변동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던 히브리 텍스트(Hebrew text)를 사용했다[2].  피어스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 AD 약 180 – 약 250)로부터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누스도 그가 분명히 70인역의 부풀려진 연대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대표(AD 220년에 쓰여짐)에 가이난을 누락시켰다. 가외의 가이난의 추가는 AD 220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피어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 ... 요세푸스는 크리스천 저술가가 아니었고 누가복음 족보의 필사본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에 반해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아리스티데스에게 보낸 서신(Epistle to Aristides) 3장에서, 그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족보에 대해 철저히 연구했다. 사실 그는 누가복음 3:25절을 인용하고 있었다[3]. 따라서 아프리카누스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사본들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프리카누스가 누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누가복음의 사본들에 이 가짜 가이난이 들어 있었다면, 아프리카누스는 분명히 그것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의 연대기를 수정했을 것이다. 사실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누가복음 사본이라고 알려진 P75 (AD 175-255년 사이[4])라 불려지는 보드머 소장품(Bodmer Collection)의 파피루스 사본(papyrus codex) 102 페이지(원래는 144 페이지)에는 가이난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3:36절에 있는 내용은 AD 220년 이전에는 존재했다고 볼 수가 없다. 또한 개혁주의 침례교파 신학자인 존 길(John Gill)은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 더해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이 가이난은 창세기 11:12절에서 모세에 의해서 언급되지 않았고, 구약의 어떤 히브리어 사본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또한 사마리아어 판(Samaritan version)이나, 탈굼어 판(Targum version)에도 없다. 또한 요세푸스도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가계의 족보가 반복되고 있는 역대상 1:24절에도 없고, 베자(Beza)의 가장 오래된 누가복음의 헬라어 판에도 없다. 그 이름은 정말이지 현대의 70인역에만 나타나고 있는데, 원래는 거기에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자료로부터 누가가 취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어떤 부주의한 누가복음 필사자의 탓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위 있는 70인역에 부주의하게 삽입되어진 그때부터, 많은 헬라어 판들(Greek copies), 라틴어 판인 벌게이트(Vulgate Latin), 모든 동방 판들(Oriental versions), 심지어 그들 중 가장 오래된 시리아어 판(Syriac)에도 가이난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박삿의 아들이며 셀라의 아버지가 되는 그러한 가이난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성경의 어느 사본에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5]. Footnotes[1] Morris, H.M.,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 1976, p. 282. [2] Pierce, L., Cainan in Luke 3:36: insight from Josephus, CEN Technical Journal 13(2):76, 1999. [3] Ante-Nicene Fathers 6:126, Hendrickson, Peabody, MA, 1994. [4] Geisler, N.L. and Nix, Wm. E., A General Introduction to the Bible, Moody Press, Chicago, revised and expanded, pp. 390–391, 1986. [5] Commentary available online.   *참조 : What about Caina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41-43.pdf Some remarks preliminary to a biblical chronology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56   출처 : AiGURL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chronology-conundrums번역자 : IT 사역위원회[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21:13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4-13 16:39:08 | 허광무
기존 교회의 목사제도 등에 염증을 느낀 분들이 너무 과도하게 반발하는 것이 바로 그런 대안교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평신도'라는 말 자체가 그런 것을 구분짓는 말입니다. 목사자격이 있는 분은 그 교회에 갈 수 없나요? 말씀하시는 곳이 지방교회인지 가정교회, 형제교회.. 용어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성경대로 하면 됩니다. 신약에 해당 구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김재근 형제님이 찾아 주셨네요.^^ 목사님이시지만 이렇게 형제님이라고 부를 수 있답니다. 성경대로 하면 자유가 생깁니다. 아무튼 (평)신도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닌, 말씀을 맡아 가르치고 이끄는 목자는 꼭 필요합니다. 물론 교단 등에서 지정한 학교를 졸업하고 안수받는 사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다음은 목사에 대한 성경사전 검색 내용입니다. 어떤 결정을 하시든 선택에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 목자. 이것은 그리스도의 양 떼를 먹이고 보호하는 직무를 가진 사람으로 감독과 장로와 같은 사람이다(엡4:11; 벧전5:2). 목자, 감독, 장로 참조. 신약성경에서 목사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포이멘’이며 이것은 18군데에서 모두 목자로 번역되었다(마9:36; 막6:34; 눅2:8; 요10:11; 히13:20; 벧전2:25 등).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자신의 교회를 위해 목사 즉 지역 교회의 목자라는 선물을 주셨다(엡4:11). 목사는 감독으로 교회를 감독하며(빌1:1) 장로로 위엄 있게 치리하고(딛1:5) 목자로 꼴을 먹이는 의무를 수행한다(엡4:11).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요10:11), 큰 목자(히13:20), 우리 혼의 목자와 감독(벧전2:25), 목자장(벧전5:4)이시며 따라서 목사는 하늘에 계신 그분을 대신해서 땅의 성도들을 먹이는 작은 목자 혹은 보호자를 뜻한다. 목사의 자격은 딤전3:1-7과 딛1:6-9에 나와 있다. 어떤 이들은 엡4:11을 잘못 해석해서 목사, 교사 등이 직분이 아니라 선물(은사)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문맥을 벗어난 자의적 해석이다. 성경은 그 부분에서 분명하게 교회에게 목사, 교사 등의 선물을 주셨음을 말하며 결코 개인의 선물(은사)을 말하지 않는다. 목사는 집사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교회에게 주신 직분(office)이다(딤전3:1-7). 목사는 권위를 가지고 모범을 보이면서 감독하며 지역 교회의 양들을 이끌고(히13:7, 17; 딤전5:17; 살전5:12) 먹이며(엡4:11-16) 양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교회는 목사를 존경하고 신뢰하며 사랑하고 후하게 대우하며 기도해 주고 격려하며 감사히 여기고 그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 한편 구약성경에서도 pastor는 목자이며 또 다른 목자를 나타내는 shepherd와 구분하기 위해 목양자로 번역되었다(렘2:8; 3:15; 10:21; 23:1-2). 목자 참조.
2010-04-13 15:23:37 | 김재욱
....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에베소서 4장 11절] 선포자(preacher)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로마서 10장 14절]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이방인들과 선포자(preacher)와 사도와 교사로 정하여졌느니라. [딤후1:11]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oversight).... [베드로전서 5장 2절]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히브리서 13장 1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을 기억하며... [히브리서 13장 7절] 남자가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으리요? [디모데전서 3장 5절]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overseer)로 삼으사 하나님의 교회 곧 그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먹이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0장 28절]
2010-04-13 15:11:20 | 김재근
오늘 아침에 마태복음 5장을 읽게 되었는데 5:13-16을 읽으면서 좀 생각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제가 거듭나기 전에는 제가 다녔던 많은 교회들에서 목사님들이 늘 교인들에게 설교하기를 [너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서는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을 한 것이 아니라 [너희는 땅의 소금이로되(마5:13)............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마5:14).......]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보면 이미 소금이고 빛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소금이 아니로되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소금되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왔고 빛되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도 소금과 빛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들은 다 소금이요 빛이라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에서 말하는 것은 다만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부분과 빛이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깊이 좀 묵상이 되었습니다. 소금이로되 맛을 읽은 소금, 빛이로되 통으로 가려놓은 빛- 아무도 쓸모없는 소금이요 빛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말씀으로 많은 설교를 했고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하면서 형제자매님들께 세상에서 또한 교회 안에서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었고 나 또한 그렇게 살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가정으로 부터라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만들기 전에 가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제일 먼저 만든 교회입니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님을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것은 큰 신비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 가정은 하나님이 제일 먼저 만든 교회입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어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잘 나타내주고 있는 부분이 바로 엡5:25- 6:4까지의 말씀에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제일 가까운 부부간의 관계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길 원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가 부모님께, 부모님이 자녀에게 ...... 막9:50에 보면 소금에 대해 말하면서 [........너희속에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화목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시면서 어찌 세상에서 교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이 뜻을 마음으로 알고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주 저의 아내와 충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 아내 때문에 내가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고 저 아내 때문에 내가 사역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론 전도를 나가려 하면 아내가 이런 환경에서 전도를 나가려 하느냐고, 오늘만 같이 있어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마귀에 속아서 나를 막으려 하니 이런 아내의 말을 들어주면 안 된다 싶어서 아내를 뿌려치고 전도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나를 향해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제일 가까운 아내의 영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이 지냈습니다. 그냥 다 마귀의 역사로만 때려 붙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나는 영적인 사람이고 아내는 늘 육적인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난 너무 위선적인 사람이었고 육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교회를 맡기기 전에 가정이란 교회를 맡겼습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도다. 선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것에 신실하였은즉 내가 너를 많은 것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으리니 너는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 하니라.](마25:21) [가장 적은 것에 신실한 자는 또한 많은 것에 신실하고 가장 적은 것에 불의한 자는 또한 많은 것에 불의하리라.](눅16:10) 저는 그간 신실하지 못했고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보게 되면서 회개가 되었고 아내에게 마음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잘 읽지도 않던 아내가 성경을 보는 것을 보게 되었고, 기도를 잘 하지 않던 아내가 기도를 잘 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늘 저의 부모님과 불화를 하고 늘 저를 만나면 시 어머님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불평을 털어놓던 아내가 그 소리가 서서히 줄어들고  시 어머님을 섬기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는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는것 보다도, 교회 봉사를 하고 전도하는 일보다도 아내가 문제가 되면 아내에게 먼저 관심을 가집니다. 이 가정은 하나님이 저에게 섬기라고 준 교회고 이 가정을 잘 섬김으로 교회도 잘 섬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아내나 가정 식구들이 영적으로 곪아터져 있는데 그냥 마귀의 일로 핑계대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저는 그간 이런 삶을 살았고 많은 사역자들이나 형제자매님들이 이렇게 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하나님 앞에 칭찬은커녕 빵점이고 책망을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소금의 역할, 빛의 역할은 가정에서 부터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5장에 소금과 빛에 대해 읽으면서 들어지는 마음이 있어서 이렇게 순서 없이 적어봅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2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4-13 14:51:29 | 홍승현
삶이 분주한 이유로 일방적으로 질문만 자꾸 올리고상호 커뮤니케이션 하지 못하는 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요즘 고민이 많다보니 질문이라도 올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여유가 생기는대로 제 의견들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현재는 대형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소위 [대안교회]라 불리는 평신도 교회로 옮길까 고민중입니다...   하지만 이 사이트를 운영중이신 분들은 아마도 목사가 존재하는 교회를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근거들을 알고 싶습니다.   제가 가고자 하는 평신도교회는 어느정도 성숙된 크리스천들이라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설교라기보다는 말씀을 나눈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말씀에 대해 서로 자유로운 질문과 대화가 얼마든 가능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제도권 교회와 극명한 차이라고 저는 느낍니다.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성경의 내용과 저사람이 말한 성경의 내용이 다르다면 그 차이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의 권위에도 기대지 않고 정말 각자가 말씀 앞에 홀로(동시에 공동체가 함께) 서야 하는 그런 교회입니다.   마치 이미 평신도교회를 편드는 것같이 보이겠지만 저는 현재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자 합니다.   교회에 목사가 존재해야하는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지 다른 분들의 의견을 부탁드립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2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4-13 14:35:51 | 장경선
흠정역으로도 손바닥만한 성경이 만들어져 북한으로 들어갈 수는 없나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모퉁이돌 선교회에선가 북한말로 성경을 새로 만들어 보낸다고해서말이죠. 흠정역을 통해서 남북한 언어도 잘 소통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2010-04-12 15:07:47 | 김선희
'성경지킴이' 사이트를 통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UFO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왜 이제야 이걸 알게 되었을까 한심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UFO에 대해선 비성경적이니 관심조차 가지지 말라고 덮어버리는 허약한 기성교회의 강단을 떠 올리며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말세에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은 기성교회들의 배교에 UFO의 존재가 무언가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 봅니다. 영화, 인터넷등을 통해 UFO는 외계인이라는 둥 몇 천년 전부터 인류의 운명을 좌지우지 해 왔다는 둥 되지도 않는 엉뚱한 얘기를 토해내는 사탄의 전략으로부터 도무지 우리 아이들을 막아주지 못하는 허약한 교회교육 앞에 우린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요.......
2010-04-11 20:21:01 | 김대용
간단히 요약을 하자면 에스겔서에 나오는 내용은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상의 존재 그룹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UFO는 모방의 천재인 마귀가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기 위해서 그 모습을 흉내낸 것에 불과합니다.
2010-04-10 09:32:40 | 김문수
28~29절이 아니라 1장 전체의 내용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책에 나오듯이 그것은 하나님의 왕좌를 지키는 그룹들을 묘사한 것이며 계시록 4장에도 나옵니다. 사람들을 미혹하여 노아의 때와 같은 씨의 혼합을 시도하는 악한 세력은 그룹이었던 마귀와 그의 천사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에스겔서에 나오는 모습과 비슷한 것이지요. 사람들은 UFO가 미래에서 왔거나 고도의 과학문명을 지닌 외계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성경에 이런 묘사가 나오면, 그것 봐라, 외계인이 수천 년 전부터 있었고 지구에 인류의 씨를 뿌렸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표현하는 겁니다. UFO의 모습이 성경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묘사된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지요. 그것들을 목격하고 형상화시키면서 공상과학적 외계인의 형태와 이야기를 만든 것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야기와 공상에 하나님의 모습과 존재 자체를 끼워 맞추려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단의 교주가 자기 탄생 스토리와 기적의 레퍼터리를 잔뜩 꾸며 놓고 성경에서 비슷한 것을 찾아 스스로를 신임을 입증하는 사례로 삼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2010-04-10 01:21:23 | 김재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