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장 6절, 예수님이 전하신 ‘왕국’은 어디로 갔는가?
― 개역성경의 오역이 감추어 버린 메시아 왕국의 진실
1.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 그분과 제자들이 전한 복음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임하는 왕국'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선포하신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 (마 4:17, 흠정역).
이 왕국은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예언된 '메시아의 왕국',
즉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왕으로서 오셔서 실제로 이 땅에 세우실 하늘로부터 오는 통치 체제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 중대한 진리를 모두 **‘천국’**이라는 추상적 표현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많은 성도들은 예수님이 죽은 후 가게 되는 '하늘나라'만을 전하신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2. 사도행전 1장 6절, 제자들의 질문은 ‘이스라엘의 왕국 회복’이었다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 다시 회복시키려 하시나이까?” (행 1:6, 흠정역)
개역성경: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제자들의 관심은 언제나 예수님이 실제로 이 땅에 세우실 왕국이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 동안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행 1:3).
행1:3절그분께서 수난을 받으신 뒤에 또한 그들에게 절대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자신이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시고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자신을 보이시며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것들을 말씀하시고
그러나 개역성경은 ‘왕국’이라는 단어를 **‘나라’**로 무력화시켰고,
‘그 왕국’을 ‘이스라엘 나라’로 바꾸어 이 중요한 신학적 맥락을 완전히 흐려버렸다.
이 결과로 한국 교회에는 “예수님은 천국을 전했다”는 왜곡된 메시지만 남았고,
이스라엘의 회복, 천년왕국, 메시아의 지상 통치 같은 성경적 주제들은 거의 잊혀졌다.
3. 하늘의 왕국은 실제로 땅에 임할 왕국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세우실 왕국을 끊임없이 가르친다.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흠정역)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그 왕국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왕국’을 ‘나라’로 바꾸며 이를 비현실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모호하게 만들었고,
결국 한국 교회는 성경의 핵심 메시지인 왕국 교리를 상실하게 되었다.
4. 이 왕국은 왜 지금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오셔서 왕국을 제시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분을 거절했고 (마 23:37–39), 결국 왕국은 일시적으로 연기되었다.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분을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요 1:11)
이 거절로 인해 왕국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야 실현될 수 있게 되었고,
그 사이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며 교회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롬 11:25–27).
5. 오역의 결과: 이스라엘 대체 신학과 비유적 해석
개역성경은 ‘왕국’을 일관성 없이 ‘나라’, ‘천국’ 등으로 바꾸었고,
이로 인해 로마 카톨릭의 이스라엘 대체 신학이 한국 교회에 깊이 뿌리내렸다.
이로 인해 성경의 많은 예언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지 않고 **‘영적인 비유’**로 전환되었다.
예루살렘 → 내 마음
시온 → 교회
다윗의 왕좌 → 하늘의 보좌
이런 식의 해석은 성경을 교리책이 아닌 감성적 묵상집으로 전락시켰다.
6. 바른 성경, 바른 번역만이 바른 교리를 세운다
성경 전체에 ‘kingdom(왕국)’은 342회 등장한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것을 천국, 나라, 하나님 나라 등으로 불규칙하게 번역했다.
이는 번역상의 일관성 부족이며, 교리적 혼란을 유발한다.
결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에 그분은 1차적으로 가는 천국을 전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구약의 대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 왕국을 실제로 이 땅에 세우러 오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거절로 그 왕국은 연기되었고,
지금은 교회 시대, 즉 이방인에게 은혜가 전파되는 기간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단지 “신앙생활 열심히 하자”는 감성적인 해석이 아니다.
우리는 하늘의 왕국, 땅의 통치, 재림, 천년왕국, 메시아의 통치라는 하나님의 역사적·계획적 구속 프로그램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 시작은 바른 성경, 바른 번역, 킹제임스 성경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 다시 회복시키려 하시나이까?” (행 1:6)
✝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 왕국은 반드시 이 땅에 팔레스타인 땅에 문자 그대로 임할 것이다.
2025-05-15 14:15:54 | 관리자
끝까지 견디는 자, 마태복음 24장 13-14절
마태복음 24장, “끝까지 견디는 자”는 누구인가?
― ‘하늘의 왕국’을 ‘천국’으로 오역하면 생기는 교리적 혼란
1. 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핵심 계획은 한 단어로 요약된다.
바로 **“왕국”(Kingdom)**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왕국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친히 통치하시는 왕국
구약의 대언자들, 신약의 사도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선포하신 바로 그 왕국이다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4:17, 흠정역)
하지만 한국어 개역성경은 이것을 모두 **‘천국’**으로 번역함으로써
사람들은 이 구절을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로 이해하게 되었고,
결국 하늘의 왕국을 신비화하거나 영적인 개념으로 축소시키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2. 하늘의 왕국 ≠ 천국
그리스어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은
직역하면 **“하늘로부터 온 왕국”**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이 땅에 임하시고,
실제적인 통치를 하시게 될 천년왕국(계 20장)의 실현을 의미한다.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시리니…” (단 2:44)
즉, 하늘의 왕국은 하늘에서 시작되지만, 땅에 세워지는 것이다.
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마 24:13)의 문맥은?
많은 설교자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여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문맥을 무시한 적용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왕국의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3–14, 흠정역)
문맥을 보자:
이 구절은 대환난기(7년 환난) 중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향한 경고다.
“끝”이란 이 세상의 끝이며, 7년 환난의 끝 시점을 말한다.
여기서 “구원”이란 혼의 구원이 아닌, 육체적인 보호와 환난을 통과한 남은 자들의 구원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교회 시대를 말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때 이미 휴거되어 하늘에 있다.
4. “왕국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 왕국의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로 선포되리니…” (마 24:14)
이 역시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한 복음이 아니다.
“왕국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처음 선포하신 바로 그 메시지다: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4:17)
이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왕국(천년왕국)이
곧 임박했다는 선언이자,
예수님을 그 왕국의 왕으로 받아들이라는 요청이었다.
대환난기에는 이 왕국 복음이 다시 전 세계에 선포된다.
특히 유대인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한 복음이며,
이는 마태복음 10:5–7, 요한계시록 7장 등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다.
5. “끝까지 견디는 자”는 누구인가?
이들은 단순한 열심 있는 기독교인들이 아니다.
대환난기에 믿음을 지키고 짐승의 표를 거부하며 살아남은 유대인들이며,
환난 말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영접하게 될 자들이다.
로마서 11:26의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예언이 이때 성취된다.
6. 잘못된 해석이 만들어내는 오류
개역성경이 “하늘의 왕국”을 **‘천국’**으로 번역함으로써:
복음이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로 왜곡되었고
마태복음 24장은 교회 시대 신자들의 경건 생활로 오해되었으며
“왕국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과 혼동되어
선교 전략의 기준 구절로 잘못 사용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마 24:14을 근거로 “복음을 다 전하면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후천년주의 신학적 오류가 퍼졌고, 이는 성경적 재림론을 훼손하게 되었다.
결론: 바른 번역이 바른 교리를 지킨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열심히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다.
이것은 환난기에 왕국 복음을 믿고 순교를 각오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유대인 남은 자들의 구원에 대한 예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진리를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하늘의 왕국’을 ‘천국’으로 바꾼 오역에서 벗어나야 한다.
킹제임스 흠정역은 이 중요한 교리적 흐름을 왜곡 없이 그대로 보여 준다.
개역성경, 공동번역 등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사람 중심의 해석을 심어두었다.
바른 번역이 바른 신앙을 낳는다.
하늘의 왕국을 왕국으로, 끝까지 견디는 자를 환난 통과 유대인으로 문맥적으로 바르게 보자.
2025-05-14 20:05:48 | 관리자
마태복음 21장, 두 아들의 비유 – 회개와 위선, 그리고 성경 번역의 치명적 왜곡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고발하기 위해 두 아들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 간단한 비유 속에는 진정한 순종이 무엇이며, 누가 하나님의 왕국에 먼저 들어가는지에 대한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개역성경은 이 비유의 핵심 구조 자체를 정반대로 왜곡하여 복음의 진리를 가리우고 있다.
1. 비유의 기본 구조 (흠정역 기준)
첫째 아들: “안 가겠습니다” → 그러나 뜻을 돌이켜 갔다
세리와 창녀들을 상징
처음엔 불순종했으나 회개하고 순종함
둘째 아들: “가겠습니다” → 그러나 가지 않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상징
말로는 순종하지만 실제로는 불순종함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첫째 아들입니다.”
(마 21:31, 킹제임스 흠정역)
2. 개역성경의 치명적 오류
개역성경은 아들의 순서를 정반대로 바꾸어 버린다:
맏아들(첫째): “가겠습니다” → 가지 않음
둘째: “싫습니다” → 후에 회개함
그 결과,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느냐는 질문에 **“둘째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게 만든다. 이는 복음의 구조 자체를 왜곡하는 중대한 오역이다.
3. 이 비유가 말하는 핵심 교훈
진정한 순종은 말이 아니라 행위다
“주여, 주여” 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회개한 자가 하나님께 합당하다.
하나님 나라는 회개한 죄인에게 열려 있다
세리와 창녀들(첫째 아들처럼)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믿고 회개했다.
바리새인들은(둘째 아들처럼) 의롭다고 자부했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종교인의 위선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그들은 겉으로는 “예, 주여” 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다.
4. 왜 번역이 이렇게 달라졌는가?
흠정역(KJV)은 다수사본(공인본문)에 따른 번역이다. 전 세계 성경 번역, 심지어 가톨릭, 공동번역, NIV까지도 첫째 아들이 옳았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유독 개역성경만 반대 구조로 기록되어 있다.
번역본 누가 회개한 아들인가?
킹제임스, 흠정역 첫째 아들
NIV, NASB, 가톨릭 첫째 아들
개역, 개역개정 둘째 아들 ❌ (역전됨)
이로 인해 복음의 구조 자체가 바뀌며,
회개의 우선성, 겉모습과 실제 행동의 차이, 믿음의 본질이 흐려진다.
결론
예수님께서 주신 이 비유는 “하나님의 왕국은 누가 들어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다.
회개한 죄인들이 먼저 들어가며,
겉만 경건한 종교인들은 오히려 거절당한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의 핵심 메시지가
개역성경의 오역으로 완전히 반대로 전달되고 있다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바른 번역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다수사본을 기반으로 한 흠정역 성경과 같은 바른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참된 의도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느니라.”
(마태복음 21:31, 킹제임스 흠정역)
오직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위선자는 비록 “주여” 외쳐도 문 앞에서 거절당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진심으로 회개하라.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기뻐하신다
2025-05-14 19:56:50 | 관리자
왜 성경 번역이 교리를 바꾸는가? — 마태복음 19장 17절의 ‘선하심’ 왜곡 문제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과 본성을 선하심으로 자주 표현합니다.
▶ “내가 내 모든 선하심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출 33:19)
▶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회개로 인도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2:4)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은 의, 거룩함, 긍휼, 자비, 사랑 등 그분의 성품을 포괄하는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진술 중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 19장 17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한 부자 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킹제임스 성경 (KJV, 흠정역 동일)
“Why callest thou me good? there is none good but one, that is, God...”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구절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자신을 “선하다”고 부른 것에 대해 되묻습니다.
▶ "너는 정말 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말한 것이냐?"
즉,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개역개정 / 공동번역 / 카톨릭 성경 / NIV / ESV: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또는
“Why do you ask me about what is good?”
이렇게 번역이 바뀌면 중요한 신학적 차이가 발생합니다:
‘나를 왜 선하다 하느냐?’ → 예수님의 신성을 전제로 한 질문
‘왜 선한 일을 묻느냐?’ → 예수님은 단순한 도덕 교사 정도로 축소됨
이것은 단순한 뉘앙스의 차이가 아닙니다.
▶ 전자는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다”는 교리적 선언이고,
▶ 후자는 예수님을 좋은 스승, 도덕 선생 수준으로 낮추는 이단적 해석의 여지를 줍니다.
문제의 핵심: 왜 이런 번역 차이가 생겼는가?
그 이유는 어떤 사본을 근거로 번역했는가에 따라 다릅니다.
현대역본(NIV, ESV, 개역, 공동, 카톨릭성경 등)의 근거:
소수사본(알렉산드리아계열) =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이 사본들은 천주교의 라틴 벌게이트(Vulgate) 번역의 기초가 되었고
역사적으로 *에클레시아(교회)*보다 종교기관 중심으로 편집됨
킹제임스 성경(KJV, 흠정역)의 근거:
다수사본(공인본문) = 안디옥계열, 5,000개 이상의 일치하는 필사본들
초기 교회들이 실제 사용해 온 본문을 보존
왜 이 차이가 심각한가?
‘선한 이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핵심 증언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을 비롯한 현대역본은 이 부분을 교묘히 삭제하거나 바꾸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애매하게 흐려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역본내용 요약
KJV / 흠정역"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외에 선한 이가 없다." → 예수님의 신성을 전제로 한 질문
개역 / 공동 / NIV"왜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사라지고 도덕 교사처럼 보임
결론: 왜 킹제임스 성경, 공인본문을 써야 하는가?
이처럼 사본의 차이는 단지 단어 몇 개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교리 전체를 뒤바꾸는 핵심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게 만들고
그분을 단지 착한 선생님, 선한 스승 정도로 낮추며
기독론의 핵심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수사본에 기초한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개역성경, NIV, ESV, 공동번역, 천주교 성경은 모두 동일한 천주교 소수사본 계열에서 나온 것이며,
그 결과 동일한 오역, 동일한 교리 왜곡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9:17, KJV)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이 중요한 진리를 왜곡하는 번역을 우리가 따를 수 있겠습니까?
바른 성경, 바른 본문, 바른 교리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2025-05-14 19:37:56 | 관리자
“열두 영(靈)”이 아니라 “열두 군단”이다 — 성경 번역의 일관성과 신학적 정확성
성경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동일한 원어는 동일한 의미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역개정 성경은 이 기본적인 원칙조차도 지키지 않아 심각한 신학적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26장 53절의 **‘열두 영’**이라는 표현입니다.
문제의 구절: “열두 영”인가, “열두 군단”인가?
마태복음 26:53 (개역개정)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이 구절을 읽으면 독자들은 보통 이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천사령(靈)을 부르실 수 있었구나…”
하지만 이 해석은 명백히 틀렸습니다.
마태복음 26:53 (킹제임스 흠정역)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당장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주시도록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헬라어 원어는 “λεγεωνας (legionas)”, 즉 레기온, 군단입니다.
‘레기온(legion)’은 무엇인가?
‘레기온’은 로마 제국의 군사 단위를 뜻하며,
▶ 하나의 군단은 보통 약 6,000명의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따라서 열두 군단은 약 72,000명의 병력에 해당하며, 이는 압도적인 천상의 전투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를 ‘열두 영(靈)’으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요?
일반 독자들은 이것을 ‘영적 존재 12명’ 혹은 '12의 천사 무리' 정도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 권세, 전능성을 심각하게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왜 ‘군단’은 ‘군단’으로 반드시 번역되어야 하는가?
같은 헬라어 단어 **“레기온”**은 성경에서 여러 번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의 장면입니다.
마가복음 5:9 (킹제임스 흠정역)
“그가 그에게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이름은 군단이니 이는 우리가 많기 때문이니이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여기를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마가복음 5:9, 개역개정)
여기서는 ‘군대’라고 번역하고,
마태복음 26:53에서는 똑같은 단어를 **‘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번역 일관성 위반입니다.
성경 번역은 문맥에 따라 의역이 필요할 수 있지만,
동일한 헬라어 단어를 상황에 따라 아무렇게나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학적 해석에 미치는 영향
“열두 군단”의 천사는 예수님의 전능한 권세와 자발적인 희생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원하시면 언제든지 하늘의 군대를 부를 수 있었지만, 십자가를 지기로 스스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열두 영”이라는 번역은 이 의미를 완전히 흐리게 만듭니다.
“영”이라는 단어 자체가 영적 존재들 중 일부, 혹은 막연한 하늘의 도우심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번역은 신학이다
성경 번역은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해석이며 신학입니다.
개역성경이 이렇게 잘못 번역한 이유는 천주교에서 번역된 라틴어 성경과 소수사본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며,
**공인본문(다수사본)**을 바탕으로 한 킹제임스 성경은 이러한 실수를 철저히 피하고 있습니다.
‘군단’은 반드시 ‘군단’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레기온’이 ‘군단’으로 통일되게 번역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권세와 말씀의 정확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의 열두 군단도 지금 부를 수 있으나,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말씀의 위엄을 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정확한 성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2025-05-14 19:29:44 | 관리자
“요나의 아들 시몬아…” 요한복음 21장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는 오역이다 — 왜 우리는 다수사본(공인본문)을 따라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성경의 작은 차이 하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표현이 사실은 성경의 권위를 흔드는 중요한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한복음 21장 15–17절 (개역성경)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구절은 오랫동안 복음성가나 설교에서 그대로 인용되어 왔지만, 정확한 원문에 따르면 "요한"이 아니라 "요나"의 아들이어야 맞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이 맞는 이유
마태복음 16장 17절을 보면 개역개정조차도 이렇게 말합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여기서 *‘바’*는 아람어로 “~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요나’*는 히브리식 인명입니다. 즉, **‘바요나 시몬’은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21장에서도 동일하게 **‘요나의 아들 시몬’**이어야 일관성 있는 성경 번역입니다. 실제로 **킹제임스 성경(KJV)**과 흠정역에서는 모두 정확하게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Simon, son of Jonas”
“요나의 아들 시몬아…” (요 21:15, 흠정역)
왜 개역성경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로 되어 있을까?
이것은 단순한 오역이 아닙니다. **천주교가 채택한 소수사본(Alexandrian Text, 소위 비잔틴이 아닌 본문)**에 따른 오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은 초기에 **천주교에서 번역된 성경(라틴어 벌게이트 및 알렉산드리아 사본계열)**을 참고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식의 이름 혼동과 본문 왜곡이 자주 발생합니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과 흠정역 성경은 **다수사본(Received Text, 공인본문)**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일관성과 정확성을 유지합니다.
고유명사 문제는 사소한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든 요나든 어차피 발음이 비슷한데 큰 문제가 되겠느냐?"
그러나 유대인 문화에서 아버지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정체성과 족보, 신뢰의 근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한 이유는 바로 그 아버지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정확한 번역은 곧 정확한 신학과 교리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왜 우리는 다수사본 기반의 공인본문 성경을 사용해야 하는가?
개역성경은 천주교 계열의 소수사본에 근거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에 곳곳에 오역과 혼동이 존재합니다.
그 결과 '요한의 아들 시몬아' 같은 오역이 생기며, 오랫동안 신자들이 복음성가까지 잘못 부르고 믿게 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KJV)**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다수사본, 즉 **공인본문(Received Text)**에 따라 정확하게 **‘요나의 아들 시몬’**으로 번역합니다.
우리는 소수사본의 불확실성에 흔들릴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보존된 공인본문을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곧 바른 성경, 바른 믿음, 바른 신학의 출발점입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진실한 부르심 앞에, 우리는 바른 성경으로 바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2025-05-14 19:23:16 | 관리자
박옥수 씨의 회개 폐기론 이단 교리와 개역성경 오역의 위험성
나무위키 발췌
1944년생 박옥수 씨는 통칭 ‘구원파’에 속하는 기쁜소식선교회를 설립하고, 현재 기쁜소식강남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흰 눈보다 더 희게 씻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죄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기쁜소식선교회의 기본 교리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구원받은 자는 더 이상 죄가 없다”? - 성화를 부정하는 위험한 주장
박옥수 씨는 구원받은 자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다고 단정한다. 이는 단순한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성경의 근본 교리를 왜곡하는 이단적 주장이다.
그 결과, 그는 구원 이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을 부정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목적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구원은 시작일 뿐이며, 그 이후에는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기쁜소식선교회는 구원 그 자체에만 집착한다. "나는 죄가 없다"는 주장만을 반복하며, 실제 삶에서는 계속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이를 정당화한다. 그들은 회개 폐기론까지 주장하면서, 죄를 지어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회개 폐기론의 위험성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는 **회개(悔改, repentance)**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세상과 육신, 마귀의 유혹으로 인해 죄를 지을 수 있으며,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는 삶이 요구된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한 성령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런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구원받은 교회들에게도 “회개하라”는 명령이 반복된다.
박옥수 씨와 그가 이끄는 선교회는,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씻으셨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며,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 전체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는다.
요한일서 1:9의 오해와 왜곡
박옥수 씨 교리의 핵심은 다음 구절에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개역개정)
그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여러분,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간음하는 것이 죄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 죄의 ‘증상’일 뿐입니다. 문둥병의 증상과 같이, 도둑질이나 간음은 죄가 아니라 ‘결과’일 뿐입니다.”
— 박옥수, 『죄사함』 1권, p.33
즉, 그는 죄와 범죄를 구분하며, 요일 1:9에서 말하는 "죄"는 근본적인 죄이지, 구체적인 행위(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해석은 개역성경의 오역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오류이다.
원문이 말하는 것은 ‘죄들(plural)’이다
개역성경은 요일 1:9을 **‘죄’(단수)**로 번역했지만, 모든 영어 성경과 헬라어 원문은 '죄들'(sins, 헬라어 tas hamartias)로 되어 있다.
즉, 요일 1:9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체적인 죄들(sins)**을 하나님께 자백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옥수 씨는 개역성경의 단수 번역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근본적 죄’로 해석하면서 ‘죄들을 자백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번역 오류에 근거한 성경 해석의 왜곡이다.
성경적 해석: 구원받은 자들도 죄들을 자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요일 1:9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구원 이후에도 성도는 육신 가운데 살아가며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죄들을 자백하고, 다시금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해야 한다.
이는 요한계시록 2–3장에서 반복되는 회개 명령과도 일치한다.
결론: 박옥수 교리는 성경 오역에서 비롯된 이단 사상이다
박옥수 씨의 ‘죄 없음’ 교리, ‘회개 폐기론’은 모두 개역성경의 오역과 잘못된 성경 해석에서 기인한 것이다.
“죄”를 단수로 이해하여 죄의 자백과 회개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성화’를 부정함으로써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방해한다.
이는 단순한 해석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과 복음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심각한 이단적 가르침이다.
성도는 바른 성경, 바른 해석 위에 신앙을 세워야 한다.
“나는 죄 없다”고 반복하는 것으로 신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진리 가운데 거하고, 날마다 말씀 안에서 자기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
2025-05-14 17:25:16 | 관리자
박옥수의 <죄사함> 책, 요한일서 1장 9절의 문제
요일 1:9절은 박옥수 씨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성경구절이다. 따라서 책의 맨 처음 내용부터 이것을 비중 있게 취급하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박 씨가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구절인 요일1:9절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경 본문과 이에 대한 박 씨의 해설 살펴본 후에 그것에 대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좀더 깊이 있게 분석을 해 보자. 먼저 요일1:9절의 성경 본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개역개정)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경구절이다. 이 구절에 대한 박옥수 씨의 해설을 들어보자. 물론 박 씨의 <개정판>에 나타나는 내용이다.
“요한1서 1장 9절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지은 죄를 하나하나 모두 고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달랐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는 것이 죄입니까? 천만에요.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 문둥병이 무엇입니까? 손가락이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코가 일그러지면 문둥병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들은 문둥병의 증상이고, 문둥병의 결과이지 문둥병 자체는 아닙니다. 여러분, 장티푸스가 무엇입니까? 열이 나고 머리가 빠지는 것입니까? 그것이 장티푸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장티푸스 균이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그것처럼 죄와 범죄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박옥수, <개정판> p. 40, <죄사함> 1권 p.33)
죄와 범죄는 ‘근본’이 다르다고 한 박 씨의 해설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도둑질, 거짓말, 간음 그리고 살인도 죄가 아니라고 했다. 범죄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일1:9절을 해설한다면서 그가 하는 말이다. 이렇듯 박 씨의 괴상한 주장을 조금 더 들어보자.
“성경에는 ‘죄’와 ‘범죄’에 대해 명백하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 말씀에서 ‘내가 도둑질했습니다’하고 범죄한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라는 뜻입니다.”(박옥수, <개정판> pp.42-43, <죄사함> 1권 p.35)
“그러니까 요한1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 말씀에서는 내가 지은 범죄나 죄의 결과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근본적으로 죄인이므로 해도 안 되니까 주님 당신이 구원하여 주옵소서’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그 모든 문제를 주님이 해결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해서 덮어놓고 회개만 합니다.”(박옥수, <개정판> p.45, <죄사함> 1권 p.38)
무슨 말인가. 박 씨의 주장을 요약하면 요일1:9절 중 “우리 죄를 자백하면”에서 ‘죄’는 ‘범죄’가 아니라 근본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설한다. 이러한 박옥수 씨의 성경 해설은 옳을까? 요일1:9절은 과연 그런 의미일까? 살펴보자.
우리는 여러 번역본 성경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각 성경 구절이 원어로 처음에 사용될 당시의 의미는 물론 오늘의 의미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을 먼저 활용해 보자. 성경 번역의 원칙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직역과 의역이다. 직역은 있는 그대로의 번역이고, 의역은 오늘의 의미를 첨가한 형식의 번역이다. 그 중간이라고 할 수 있는 역동적 번역 원칙도 있다. 먼저 역동적 번역 성경으로 잘 알려진 NIV와 의역 성경인 NLT를 살펴보자. 물론 요일1:9절이다. 여기에서는 ‘죄’라는 단어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요일1:9, NIV)
“But if we confess our sins to him,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cleanse us from all wickedness.”(요일1:9, NLT)
두 성경은 ‘죄’에 해당되는 단어로 모두 ‘sins’를 사용했다. 이는 복수형이다. ‘죄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박옥수 씨의 표현에 따르면 ‘범죄’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바로 문제가 발생한다. 위 박 씨의 요일1:9절 성경 해설의 내용과 NIV, NLT 성경의 내용이 정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박 씨는 요일1;9절의 ‘죄’는 범죄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성경(NIV, NLT)은 죄의 복수형인 ‘sins’(죄들)로 기록하고 있다. 박 씨의 표현에 따르면 ‘범죄’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직역 성경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KJV과 NASB를 살펴보자.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orm all unrighteousness.”(요일1:9, KJV)
역시 마찬가지다. 직역 성경에도 ‘sins’로 되어 있다. 요일1:9절의 ‘죄’에 대한 박 씨의 성경 해설은 근본적으로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박 씨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시점에서 혹시 원어성경(헬라어)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직역 성경을 참고하면 될 것을 굳이 헬라어 원어를 고집하는 이도 가끔 나타난다. 그들을 위해 헬라어 원어까지 살펴보자. 아래와 같다.
“ἐὰν ὁμολογῶμεν τὰς ἁμαρτίας ἡμῶν, πιστός ἐστιν καὶ δίκαιος ἵνα ἀφῇ ἡμῖν τὰς ἁμαρτίας, καὶ καθαρίσῃ ἡμᾶς ἀπὸ πάσης ἀδικίας”(요일 1:9, 헬라어 성경)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죄’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하마르티아’(άμαρτία)이다. 이 단어가 위 본문에서는 ‘τὰς ἁμαρτίας’라고 사용되었다. ‘타스 하마르티아스’라고 읽는다. 문법적 설명이 필요하다. 헬라어 명사는 남성형, 여성형, 중성형으로 구분이 된다. ‘하마르티아’(άμαρτία)는 여성형 명사다. 성경 본문에 쓰여진 ‘타스 하마르티아스’(τὰς ἁμαρτίας)의 ‘타스’(τὰς)는 여성 복수형 관사이고, ‘하마르티아스’(ἁμαρτίας) 역시 여성 복수형 명사다. 단어 끝에 영어의 '에스'(s)자처럼 생긴 ‘시그마’(ς)표시가 복수형이란 의미다. 결론적으로 헬라어 성경에서도 요일1:9절의 ‘죄’는 복수형, 즉 ‘죄들’의 의미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요일1:9절에 대한 박 씨의 성경 해설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의 성경 해설이 잘못된 것이니 이것을 바탕으로 나온 그의 사상 역시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이단 교리의 문제는 개역성경의 번역에서 생긴 것이다.
박옥수 씨는 순진하게 개역성경을 그대로 믿고 요한일서 1장 9절의 죄를 단수의 죄로 보고 그것이 근본적인 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기의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이들은 구원 이후에도 죄들을 지으므로 요한계시록 2-3장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 자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교제가 원활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의 단복수 번역은 큰 차이를 가져오고 심지어 이단 교리까지도 생산될 수 있다.
2025-05-14 17:00:18 | 관리자
요한복음 1장 29절: 기쁜소식선교회(기소선) 박옥수 목사의 안수 복음이라는 거짓말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개역성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안수 복음은 곧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세례 요한의 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원래 글에 세례라고 되어 있기에 일단 세례라고 썼지만 세례라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의 책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1, 영원한 속죄 편)에서 박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 세례를 베풀 때 머리에 안수를 합니까, 안 합니까? 합니다.
이 안수가 전 인류의 죄를 세례 요한이 대표해서 예수님께 넘기는 그 과정입니다.
알겠습니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났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왜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머리에 안수하고 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니까 모든 죄가 예수님께로 건너갔습니까, 안 건너갔습니까?」(1권 218쪽).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에게 안수했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넘겨졌고, 예수님이 그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이었고요.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1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 세례 요한은 인간 중에서 가장 큰 자였습니다. 가장 큰 자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어른이며 대표자란 의미입니다((기쁜소식지 2001년 8월지. 김성훈)
여러분 모두 여자가 낳았지요. 여자도 여자가 낳았고, 남자도 여자가 낳았어요. 온 세상은 여자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인류의 대표자로 세워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인간 중에 제일 큰 자이고,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마지막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온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례 요한을 온 인류의 대표자로 세운 이유는 예수님에게 온 인류의 죄를 넘겨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해야 할 일과 예수님이 하셔야 할 일은 마태복음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 이 두 분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보면, 하나님을 만나고 복 받는 거는 너무 쉬운 것입니다. 이 두 분이 잘 돼야 저나 여러분이 잘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갈릴리 요단강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고 있는데, 예수님이 뚜벅뚜벅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요한이 궁금해 하는데 예수님이 요단강에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아, 내가 이런 목적을 가지고 왔다.” 하고 이야기를 하시니까 세례 요한이 깨달았습니다. “아, 이분이 죄 사함을 이루기 위하여 준비된 그 예수님이시구나. 구원자시구나.” 그것을 세례 요한이 깨달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한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라는 말은 안수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야, 세례 요한아, 너 나한테 안수해.” 하니까 세례 요한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안수를 합니까? 내가 받아야지.”
근데 예수님이 이야기를 해주니까 세례 요한이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짜 교만한 사람이구나.”
“네가 내게 안수해야 모든 의가 이루어진다.”는 말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안수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봅시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이틀 전에 예수님에게 넘겨준 죄는 세상 죄입니다. 즉 이틀 전에 세례 요한의 안수를 통해 세상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온 인류의 대표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안수할 때 세례 요한의 죄만 넘어갔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가 다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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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례자 요한이 인류의 대표라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2. 침례자 요한이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에게 안수를 주었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3. 그 안수에 의해 세상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갔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4. 더욱이 예수님은 머리에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온 몬이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안수했다는 주장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5. 침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 이방인들이 아니라 -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회개의 침례를 선포한 구약의 마지막 대언자입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드러나야 하므로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노라, 하니라(요1:31).
6. 세상의 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에게 전가되어 심지어 그분 자신이 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7. 침례자 요한의 안수가 없었으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기소선의 안수 복음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고 창조물인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개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사람의 혼을 구원하는 데 악한 영향을 미칩니다.
8. 침례자 요한이 안수함으로 모든 의를 이루었다는 것 역시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례자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회개의 침례를 승인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복음으로 즉 다른 복음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 다른 복음을 가져오는 자가 있고 그런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강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우리가 전에 말한 것 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 8-9).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11:4).
이런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그런 구원이 과연 성경적인지 궁금합니다.
기소선을 세운 대표 목사의 성경 해석이 이 정도면 나머지는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한 사람이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하기 시작하면 한 가지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의 신학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골병들어 고칠 수 없게 됨을 보여 줍니다. 즉, 오류는 오류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오류를 생산해 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실로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죄악입니다.
사람의 혼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이 홀로 하신 일입니다. 여기에는 절대로 만의 하나라도 사람의 행위가 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 같은 사람을 높이는 안수 복음은 영원히 하나님께 저주받을 ‘다른 복음’입니다.
아, 이런 것을 복음으로 알고 그것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픕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탐구해야 이런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요5:39).
2025-05-14 16:49:48 | 관리자
단수와 복수의 중요성
마태복음 12장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곡식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곡식 이삭을 따서 먹기 시작하자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그분께 이르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행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것을 행하나이다, 하고 제자들을 비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자 주님은 안식일 규정과 다윗이 제사장의 빵을 먹은 것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이 말슴하신다.
마태복음 12장 7절
킹제임스 흠정역: 그러나,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들을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니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즉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율법의 희생물을 드리는 것보다 나은데 이것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들을 정죄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무죄한 자들은 영어로 the guiltless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개역처럼 the guiltless를 무죄한 자라고 단수로 하면 그들이 무죄하신 예수님을 비난한 것으로 오해가 생긴다.
그러나 그리스어는 복수이며 따라서 무죄한 자들이라고 이것을 번역해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죄가 없다고 하신 것이 된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보자.
킹제임스 흠정역: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해 한 번 고난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성령에 의해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가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의로운 자(단수)이고 그분은 불의한 자들(복수)을 대신하셨다.
그러나 개역은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라고 하여 그분이 불의한 자 하나를 대신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디모데후서 4장 1절도 동일한다.
킹제임스 흠정역: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또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개역: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킹제임스 흠정역은 예수님이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지만 개역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
복수와 단수의 이런 구별이 있어야만 성경이 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원어도 영어도 단복수 구별이 있고 우리말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런데 개역 성경에는 단복수 구분이 안 되는 곳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이 되기 위해 이런 명사들의 단복수를 반드시 명기해야 한다.
2025-05-14 14:30:28 | 관리자
왜 마태복음 11장 25절부터 갑자기 아기들이 나오는가?
마태복음 11장 25-27절에는 갑자기 아기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이것들을 지혜롭고 분별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기들에게는 드러내셨으니 감사하나이다.
26 과연 그러하니이다. 아버지여, 그리하심이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좋았나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넘겨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하며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낼 자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하나이다.
이 표현을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이전 담화가 끝났고, 이 말씀이 단지 그 시기에 하신 독립적인 발언이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앞선 내용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응답하여”라는 표현 자체가 그런 연결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응답하여 말했다”고 할 때, 실제 누군가의 질문이 없더라도 이 표현은 보통 방금 전 이야기된 내용이나 상황에 대한 정신적 또는 감정적인 반응으로서의 “응답”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말씀하신 것은 분명히 앞서 탄식하신 사역의 비통한 결과들에 대한 반응이다.
곧, 많은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거부했으며,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기회가 외면당한 현실에 대해 슬퍼하셨던 바로 그 직후의 말씀이다.
사실 바로 앞의 20-24절에는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 그분께서 강력한 일들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때에 그분께서 그 도시들을 꾸짖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25절부터는 마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그래, 많은 이들이 영원한 생명의 메시지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그림에도 밝은 면이 있다.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단지 자기 마음속의 교만 때문이며, 오히려 진리의 영광은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눈멀었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빛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도 모두가 복음을 거절한 것은 아니다. 구원을 갈망하는 영혼들은 기쁨으로 구원의 샘물에서 물을 길었고,
지친 자들은 안식을 얻었으며, 굶주린 자들은 좋은 것으로 배부름을 받았다.
반면에 자기가 부요하다고 생각한 자들, 자기의 의로 가득 찼던 자들은 오히려 빈손으로 돌아갔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이 사람의 교만한 이성이나 세상적 지혜가 아닌, 겸손하고 갈급한 자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의 이 감사는 복음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결코 좌절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가 더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신앙고백이다.
이 구절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선택에 기초한 복음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2025-05-14 14:12:56 | 관리자
지혜가 자기 자녀들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의미: 마태복음 11장 19절
예수님께서 다시 세대를 무엇에 비유하실까?
예수님께서는 당시 자신의 세대의 변덕스러움과 모순된 태도를 꾸짖으신다. 그들은 마치 어떤 것도 만족하지 못하는 아이들과 같았다. 예수님은 여기서 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비유로 사용하신다. 당시에 결혼식이나 축제에서는 피리 연주와 춤이 기쁨의 표시로 흔히 사용되었다(참조: 사 5:11–12; 욥 21:11; 삼하 6:14; 삿 11:34; 눅 15:25).
아이들은 종종 어른들의 행동을 따라하며 그들을 흉내 내어 놀이 속에 담는다. 따라서 그들의 놀이 가운데에는 결혼식이나 잔치를 흉내 내는 것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장례식도 슬픈 음악과 통곡, 곡소리와 함께 진행되었는데(마 9:23 참조), 아이들이 슬픈 장례 행렬을 따라하는 놀이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비유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은 심통을 부리고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러자 다른 무리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너희를 기쁘게 하려고 온갖 수고를 다했는데, 너희는 함께 놀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픈 곡을 불러도 울지 않는다.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 않느냐?"
예수님은 당시 세대가 바로 이런 아이들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침례자 요한은 금욕을 하는 나사르 사람으로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기뻐하지 않았다.
반대로 예수님 자신은 사람들과 같이 먹고 마시며 일상의 삶을 사셨지만, 그들은 그분 역시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더 심하게 비방과 비난을 했다.
그들은 요한에 대해선 "마귀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에 대해선 **"먹기를 좋아하고 포도즙을 많이 마시는 자이며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한다.
결국 그 세대는 아무것도 만족하지 못하는 세대, 변덕스럽고, 일관성 없으며, 결국 자기 방식대로 모두를 비판하는 세대였다.
용어 설명
시장(Market): 음식 등을 거래하는 장소였으며, 동시에 아이들이 모여 노는 장소이기도 했다.
피리를 불다(Piped): 피리는 바람을 불어 소리를 내는 악기이며, 보통 목자들이 연주하거나 축제 때 사용되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Neither eating nor drinking): 요한은 일부 음식과 포도즙을 삼가는 금욕적 생활을 했다. 완전히 안 먹었다는 뜻이 아니라, 특별한 절제를 실천했다는 말이다.
마귀 들렸다(He hath a devil): 유대인들이 보기에 요한은 너무 특이하고 괴상해서, 악한 영에 영향을 받았다고 본 것이다.
먹고 마시는 자(Son of man came eating and drinking): 예수님은 요한과 달리, 보통 사람처럼 식사도 하고 음료도 마셨다.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탐식가"나 "술주정뱅이"**처럼 비난한 것이다.
포도즙(Wine): 예수님 시대의 포도즙은 포도에서 직접 짜낸 천연 주스였다. 성경에 나오는 'wine'이 항상 현대의 알코올 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술처럼 인공 첨가물이나 발효를 강하게 거친 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바로 다음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그러나 지혜는 자기 자녀들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느니라”(Wisdom is justified of her children)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비록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요한을 모두 비난하고 그들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참된 지혜를 가진 자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사역을 옳다고 인정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지혜는 그 열매로 증명된다.
요한의 삶도, 예수님의 삶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으며, 그것을 이해한 자들은 다 그들의 사역을 정당하게 여긴다.
예수님은 단지 당시 세대의 불신과 비판적인 태도를 지적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그분의 방식이 아닌 인간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심지어 서로 모순된 이유로 비난하고 거부하는 완악한 마음을 고발하신 것이다.
요한이 금욕적으로 살면 마귀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이 보통 사람처럼 살면 탐식가라고 한다.
하나님의 일은 방식이 다를 수 있지만,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데 있다.
지혜 있는 자들은 지혜(침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자녀들이며, 이들은 지혜를 분별하고 그들의 사역을 정당하게 여긴다.
“그러나 지혜는 자기 자녀들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느니라.” (마 11:19, 킹제임스 흠정역)
2025-05-14 14:05:27 | 관리자
천국은 쟁취해야 할 곳인가? – 마태복음 11장 12절의 오해와 진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떠올립니다.
“신앙생활도 전쟁이다. 천국은 열심히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이 구절은 정말 우리가 천국을 공격적으로 차지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번역의 오류와 문맥의 오해로부터 발생한 신학적 혼란일까요?
1. 핵심 구절 다시 보기: 마태복음 11장 12절
개역성경: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흠정역 (킹제임스 계열):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영어 KJV: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주목할 점:
‘천국(kingdom of heaven)’을 우리가 들어가는 하늘나라로 착각하고,
‘침노’라는 단어를 신앙의 열정적 노력으로 오해하면
이 구절은 행위 구원, 무조건적 싸움, 경쟁 신앙으로 왜곡될 수 있습니다.
2. 용어 바로잡기: '천국'이 아니라 '하늘의 왕국'
‘Kingdom of heaven’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임하는 지상 통치 왕국, 즉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왕국을 말합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다니엘 2:44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시리니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
마 2:2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고, 그분의 왕국은 이 땅에서 세워질 하늘의 왕국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천국에 들어가는 법”이 아니라 “왕국을 방해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3. “폭력을 당한다”는 무슨 뜻인가?
킹제임스 흠정역과 영어권 주요 성경은 **‘폭력을 당한다’, ‘강제로 빼앗기려 한다’**는 의미로 번역합니다.
즉, 메시아 왕국을 세우시려는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 백성들이 폭력적으로 저지하려 했다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반대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예수님의 기적을 바알세붑의 힘이라 모함 (마 12:24)
유대 종교지도자들: 백성들에게 왕국의 문을 닫음 (마 23:13)
가룟 유다를 통한 예수님의 배신과 체포, 십자가 처형
“폭력배들이 강제로 빼앗으려 했다”는 것은 하늘의 왕국이 임하지 못하도록 집단적 폭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4. 왜 “침례자 요한의 때부터”인가?
침례자 요한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며 선포했습니다: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3:2)
그의 사역은 왕국 선포의 출발점이었고, 그 이후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은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1장 12절은,
“요한의 때 이후 하늘의 왕국이 선포되었지만,
그 왕국을 방해하려는 폭력배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5. 천국은 쟁취해야 하는가?
흔히 이 구절을 **‘가나안을 침공하듯 싸워서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은:
죄인이 살고 있고,
전쟁이 있으며,
결국 하나님을 잊어버린 백성이 있는 곳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모형으로는 부적절합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며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났습니다(막 9:4).
또한, 어린아이들과 장애인, 믿음 약한 자들은 어떻게 천국을 쟁취할 수 있습니까?
구원은 은혜이며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지 쟁취 대상이 아닙니다.
6. 적용 정리: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해당되는가?
✔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메시지이며,
✔ 우리는 이미 복음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자들입니다.
✔ 하늘의 왕국은 예수님의 재림 후에 세워질 천년왕국을 말하며,
✔ 그 왕국이 임하기 전에 우리는 휴거되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것입니다.
7. 결론: 바른 성경 번역과 바른 해석이 자유를 준다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해석은 행위 구원과 경쟁 신앙을 조장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이렇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느니라.” (요 10:28–29)
구원은 전쟁이나 침노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핵심 요약
오해된 개념바른 의미
천국은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하늘의 왕국은 메시아 왕국이며, 폭력배들이 그것을 훼방하려 했다
천국 = HeavenKingdom of Heaven = 하늘로부터 오는 메시아 왕국
침노 = 신앙적 열정침노 = 종교지도자들이 메시아 왕국을 막는 폭력
이 구절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유대인과 예수님의 왕국 사역과 관련된 말씀
구원은 행위로 이루어진다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늘의 왕국은 아직 빼앗기지 않았으며, 때가 되면 반드시 이 땅에 세워질 것입니다.
그 전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교회로 휴거되어 왕과 함께 다스릴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바르게 배우고,
오역과 억지 해석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와 진리 안에 거해야 합니다.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2025-05-14 12:10:08 | 관리자
도량형 표기 마태복음 25장 15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 그러면 언어도 표준이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은 진리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번역된 성경 역시 해당 언어의 문법과 표현에서도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수량과 도량형(길이, 부피, 무게, 돈) 같은 일상적인 표현에서는, 국어의 맞춤 표현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오류이며, 번역의 신뢰성을 해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개역성경은 ‘한 달란트’, ‘두 므나’ 같은 식의 잘못된 수 단위 표현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외국어 수량 단위는 “일, 이, 삼…”으로 표현해야 한다
한글 맞춤법과 국립국어원 표기에 따르면:
국산 고유어에는 “한, 두, 세” 등 고유어 수사를 사용합니다.
예: 한 사람, 두 마리, 세 그릇
그러나 **외국어 도량형(수입어)**에는 “일, 이, 삼” 같은 한자 수사를 써야 합니다.
예: 일 달러, 이 달러 / 일 리터, 이 리터 / 일 킬로그램, 이 킬로그램
따라서 달란트, 므나, 앗사리온, 에바 같은 외래 도량형 단위에는 당연히 “일, 이, 삼”이 맞습니다.
개역성경의 반복되는 오역 사례
달란트 – 금액 단위
마태복음 25:15
킹제임스 흠정역: “오 달란트… 이 달란트… 일 달란트”
개역: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달란트’는 히브리-헬라 도량형 단위로, 외래어입니다.
“한 달란트”는 고유어 수량어와 외래 도량형 단위가 혼용된 비문법적 표현입니다.
므나 – 무게 및 화폐 단위
누가복음 19:16
흠정역: “주의 일 므나로 십 므나를 벌었나이다”
개역: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므나’는 구약 성경의 무게 및 돈 단위이며 외래어입니다.
“일 므나”가 맞는 표현입니다.
앗사리온 – 동전 단위
마태복음 10:29
흠정역: “참새 두 마리가 일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개역: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앗사리온’은 로마 화폐입니다. 외래 도량형에는 “일”을 써야 합니다.
에바 – 부피 단위
룻기 2:17
흠정역: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일 에바쯤 되었더라”
개역: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에바’는 히브리 부피 단위입니다. “일 에바”가 맞습니다.
왜 이 문제가 중요한가?
성경은 진리의 표준일 뿐 아니라, 언어의 기준이 되어야 할 책입니다.
그런데 문법적으로도 비표준적이고, 국어 표현 원칙에 어긋나는 표현이 성경 곳곳에 등장하면:
독자들은 정확한 의미를 혼동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배우기에 부적절한 언어 표본이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권위를 흐리게 됩니다.
정확한 성경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까지도 바르게 번역된 성경이어야 하며, 흠정역은 이 점에서 우수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결론: “진리를 바르게 나누고, 말도 바르게 써야 한다”
성경은 내용만 바른 것이 아니라, 표현도 바르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한, 두 달란트가 아니라 일, 이 달란트입니다.
한 므나가 아니라 일 므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시대를 초월한 진리라면, 언어 사용에서도 시대 표준에 부합해야 합니다.
정확한 번역이 바른 교리와 올바른 믿음을 지켜주는 울타리입니다.
2025-05-14 11:29:56 | 관리자
마태복음 9장 35절: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신 것이 아니다 – 개역성경의 결정적 오역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특히 킹제임스 성경(KJV)과 흠정역을 바르게 살펴보면 예수님은 **‘천국 복음’(Gospel of Heaven)**이 아니라 **‘왕국의 복음’(Gospel of the Kingdom)**을 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혼동이 생겼을까요? 그것은 바로 개역성경의 오역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것은 “왕국의 복음”이다
마태복음 9:35 (흠정역)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들과 마을들을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들에서 가르치시고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환과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니라.
마태복음 10:7 (흠정역)
너희는 가면서 선포하여 이르되,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라.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 “왕국의 복음”을 모두 “천국 복음”**이라고 번역해 버립니다. 심지어 "하늘의 왕국"이라는 말도 "천국"이라는 추상적이고 불명확한 표현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천국”과 “왕국”은 전혀 다르다
**천국(Heaven)**은 죽은 후 가는 하늘나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왕국(Kingdom)**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이 땅에 실제로 세우시는 지상 통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침례자 요한이 선포한 “왕국의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대해 온 다윗의 후손이신 메시야가 오셔서 예루살렘에서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에 관한 소식입니다(눅 1:32–33).
마태복음 24:14의 “왕국의 복음”은 교회 시대의 복음이 아니다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으로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흠정역)
이 구절을 은혜 복음,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복음은 “왕국의 복음”이며,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환난기 동안 선포될 메시야 왕국에 대한 증언입니다.
대상은 이스라엘이며, 이는 계시록과 말라기서가 예언하는 대환난 기간과 직접 연결됩니다.
주기도문에도 “왕국”이 등장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왕국이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마 6:9–10, 흠정역)
이 기도는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고, 하늘의 뜻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즉 메시아 왕국이 실현되는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이 기도는 그분이 이 땅의 왕으로 오셨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오역이 위험한가?
개역성경은 왕국의 복음을 “천국 복음”이라고 바꾸며:
예수님의 초림 사역의 핵심 메시지를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유대인을 향한 왕국의 약속을 보편적인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로 바꿔 버렸습니다.
종국적으로 구약과 신약을 분리시키고, 성경 전체의 일관된 메시지를 무너뜨립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 수많은 설교자들이 "예수님이 우리를 천국에 보내기 위해 오셨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왕국을 세우기 위해, 다윗의 보좌를 이어받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눅 1:32–33).
결론: 정확한 번역이 복음의 본질을 지킨다
성경에서 복음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시대에 전파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대환난 기간에 선포될 왕국의 복음
그리고 계시록에 나오는 영존하는 복음 등 각각의 복음은 대상과 시기, 내용이 다릅니다.
그런데 성경 번역이 부정확하면, 그 복음들이 전부 똑같은 것인 줄 오해하게 되고, 성경 전체를 한 줄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왕국의 복음”은 단순히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오셔서 실제적인 지상 왕국을 제안하셨고, 그 왕국은 그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유보되었으며, 장차 환난기 후에 다시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2025-05-14 11:12:00 | 관리자
마가복음 5장 15절 “군대에 집혔던 자”? — 개역성경 번역 표현의 문제점
마가복음 5장 15절은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놀라운 사건을 담고 있다. 그런데 개역성경에서는 이 핵심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개역)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에 집혔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 번역을 읽고 '군대에 집혔다'는 게 무슨 뜻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독자들이 많다. 사실상 대부분의 성도는 이 표현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군대에 집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표현은 원어(헬라어) ‘레기온(Λεγεών)’을 번역한 것인데, 이는 **로마 군단(Legion)**을 뜻한다. 로마 시대의 한 군단은 약 5,000~6,000명의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 사람 안에 수천의 귀신들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킹제임스 성경과 흠정역은 이 점을 명확하게 전달한다.
(킹제임스 흠정역)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려 군단을 지녔던 자가 옷을 입고 바른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하더라.”
이처럼 **‘군단(Legion)’**은 마귀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예수님의 권세가 얼마나 크신지를 드러내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왜 “군대에 집혔다”는 번역은 문제인가?
현대어로는 이해 불가능한 표현이다
“군대에 집혔다”는 말은 성경 외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며, 일반 독자들은 그것이 귀신의 수나 영적 상태를 설명하는 것임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군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
군대? 육군? 로마군? 귀신? — 아무런 설명 없이 '군대'라는 단어만 던져지면 오해의 소지가 크다.
‘집혔다’는 말은 부정확하고 모호하다
원어는 **‘군단을 지닌 자(having a legion)’**인데, ‘집혔다’는 말은 수동적이고 수갑을 채우거나 구금된 느낌을 줄 수 있다. 이는 본문의 의도와 어긋난다.
올바른 번역이 주는 유익
“군단을 지닌 자” 혹은 **“레기온을 가진 자”**라고 번역하면
귀신의 수가 많았음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수천 마귀가 항복했다는 점이 더욱 부각된다.
마태복음 8:28의 복수 표현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마귀들").
2025-05-14 10:56:55 | 관리자
단수와 복수는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마태복음 8장 28절을 중심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단어 하나하나까지 정확해야 한다. 단순히 뜻이 비슷하다고 해서 단수와 복수를 섞어서 번역한다면, 본문의 정확한 의미가 훼손되고, 신학적으로도 잘못된 해석을 낳게 된다. 마태복음 8장 28절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마태복음 8:28 — 단수와 복수의 번역 차이
개역성경
“…귀신 들린 자 둘이… 저희는 심히 사나와…”
→ 이 번역만 보면 두 사람이 한 마귀에게 들린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킹제임스 흠정역
“…마귀들(multiple devils, demons)이 들린 두 사람이…”
→ 두 사람이 각기 여러 마귀들에 들렸음을 분명히 밝힌다.
마귀 ‘들’이 들린 자들 – 복수 표현의 중요성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가다라(또는 게르게사) 지역에 가셨을 때, 마귀들이 들린 두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주님을 만난다.
▶ 마태복음 8:31 (흠정역):
“마귀들이 그분께 간청하여 이르되…”
이처럼 마귀는 **복수(plural)**로 표현되어 있다. 한 마귀가 아니라 여러 마귀들이 두 사람 안에 들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마가복음 5:15 — 병행 구절에서 더 명확한 증거
개역성경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
킹제임스 흠정역
“마귀 들려 **군단(Legion)**을 지녔던 자…”
“군대” 또는 “군단”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로마 군단(Legion)은 약 5,000명 이상의 병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표현은 곧 그 사람 안에 수천의 마귀들이 들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복수가 아닌 단수로 표현하면 실제 상황을 심각하게 축소 왜곡하는 셈이 된다.
왜 복수 표현이 중요한가?
실제 영적 상태를 정확히 드러냄
한 마귀가 아닌 수천의 마귀들이 들려 있었다는 사실은 그 영적 심각성과 주님의 권세를 동시에 보여준다.
오해를 방지함
개역성경처럼 단수로 표현하면 독자는 “두 사람이 한 귀신에게 들린 것인가?”라는 혼란을 가질 수 있다.
신학적 의미와 연결됨
성경은 마귀의 실체, 예수님의 권위, 그리고 구원 사역의 능력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럴 때 단수/복수 표현 하나가 교리의 해석까지도 바꿔버릴 수 있다.
결론: 성경은 단어 하나도 정확해야 한다
성경은 단수와 복수를 철저히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를 충실히 번역해야만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왜곡 없이 전달할 수 있다.
마귀들(demons)이 들린 두 사람
2025-05-14 10:55:41 | 관리자
성경 번역의 중요성: 마태복음 6장 34절의 오역이 가져오는 혼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씀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마태복음 6장 34절은 그 대표적인 예다.
마태복음 6:34 – 서로 다른 번역
개역성경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이 자기 것들을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악은 그날에 족하니라.”
두 번역은 단어는 비슷하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오역의 핵심 문제
개역성경은 이렇게 읽히게 된다:
“내일 일이 걱정거리라면, 그건 내일 가서 네가 걱정해라.”
즉, ‘오늘 걱정하지 말고 내일 걱정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예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 “내일 가서 염려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원래 의미
“Take therefore no thought for the morrow: for the morrow shall take thought for the things of itself. Sufficient unto the day is the evil thereof.” (KJV)
흠정역: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이 자기 것들을 염려할 것이요…”
예수님은 내일이라는 시간이 자기 몫의 일, 자기 분량의 어려움을 책임질 것이니, 오늘은 오늘 하루의 일만 감당하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내일’을 맡아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역이 가져오는 신앙적 혼란
하나님이 금하신 걱정을 오히려 미루어 정당화시킴
개역성경의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는 표현은 마치 걱정은 필수적이며 때만 내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암시한다.
예수님의 교훈과 정반대되는 메시지
주님은 염려 자체를 금하셨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립보서 4:6),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마태복음 6:27) 등 모든 말씀은 염려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도의 삶에서 신뢰보다 불안을 조장함
하나님의 공급을 믿고 현재를 감사함으로 살아야 하는 성도가,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염려는 필요하다’는 오해를 갖게 될 수 있다.
왜 정확한 번역이 중요한가?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이루어진다고 하셨다(마 5:18).
그렇다면 번역자들은 그 말씀을 충실하게 옮기는 사명을 지녀야 한다.
단어 하나의 차이, 시제 하나의 차이로도 신학적 교리가 흔들릴 수 있다.
특히 마태복음 6장 34절은 성도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매우 중요한 교훈인데, 개역성경은 그 핵심을 흐려 놓았다.
결론
예수님은 ‘염려는 내일로 미루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오늘의 문제는 오늘 하나님께 맡기고 내일은 그분께 속한 것임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정확한 성경 번역은 진리를 보존하고 바른 믿음을 지켜주는 핵심 요소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원어 그대로, 정확하게 번역한 성경(KJV,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이 자기 것들을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악은 그날에 족하니라.”
– 마태복음 6:34 (킹제임스 흠정역)
2025-05-14 10:41:57 | 관리자
단일한 눈(single eye)은 무엇인가? — 마태복음 6장 22절의 바른 해석
“네 눈이 단일하면 네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요” (마 6:22, 킹제임스 흠정역)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이 말씀은 단지 시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과 ‘영적 시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이다. 그런데 개역성경을 포함한 여러 현대 역본은 이 구절을 오해하게 만드는 번역을 하고 있다.
왜 ‘단일한 눈’인가? — 성경 원어에 주목하라
그리스어 원어는 haplous (ἁπλοῦς)로, 단순한, 겹치지 않은, 주름지지 않은, 혼합되지 않은 이라는 뜻이다.
즉 “단일한 눈”이란 일편단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눈, 잡념 없는 순전한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KJV는 이를 정확히 **“single eye”**로 번역한다. 반면,
개역: 성한 눈
카톨릭: 맑은 눈
바른: 좋은 눈
공동: 밝은 눈
한킹: 순전한 눈
이렇게 각각 다른 단어로 번역함으로써 단일성(singleness)의 의미를 흐려 놓는다.
이 단어 haplous는 “접히지 않은 상태”, 즉 ‘주름 없이 펼쳐진 종이’처럼 빛을 가리지 않는 상태를 비유한다. 눈꺼풀이 접히면 빛이 들어오지 않듯이, 마음에 주름(혼합된 동기, 이중적인 생각)이 생기면 진리가 차단된다.
영적 적용: 왜 ‘단일한 눈’이 중요한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전체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하시며 이어서 단일한 눈을 강조하셨다. 즉,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단일한 눈은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선’을 말한다
욥은 “내 눈과 언약을 맺었다”(욥 31:1)고 하며 눈을 지키는 것이 영적 순결의 시작임을 말한다.
단일한 눈은 골로새서 3:22–23에서 말하는 “단일한 마음(singleness of heart)”과 연결된다.
그 반대 개념은 “악한 눈”(evil eye)이다. 이는 탐욕과 음욕, 이중적 동기, 하나님보다 재물을 섬기려는 마음이다(마 6:23; 벧후 2:14).
단일한 눈이 아닌 삶의 결과는?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이 어두움으로 가득할 것이니라.”
눈이 복잡하고 주름지면, 빛이 차단되고 결국 내 삶 전체가 혼돈과 어둠에 놓이게 된다.
영적으로 말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향하지 않은 마음은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 인식의 열쇠
진리는 정보가 아니라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다(요 14:6).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 8:12)고 하신 주님은,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그분께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신다.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 5:8). 이것이 단일한 눈의 상태다.
눈이 단일하다는 것은 지적 정보가 아니라 전인격적인 태도다. 마음이 하나님께 열려 있는 사람만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다른 모든 것도 그 빛 안에서 분별할 수 있다.
결론: 단일한 눈 vs 성한 눈
“단일한 눈”은 원어적으로도, 문맥상으로도, 교리적으로도 정확한 표현이다.
“성한”, “맑은”, “좋은” 눈 등은 단어의 의미를 흐리고, 마음의 상태, 동기의 순수함, 하나님께 전적인 집중이라는 핵심을 전달하지 못한다.
정확한 번역은 단지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 전체를 비추는 등불이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나아가기 원한다면, 우리의 눈이 단일해야 한다.
주름 없는 마음, 혼합되지 않은 동기, 이중적 시선이 없는 단일한 눈으로 오직 주님을 바라보자. 그때 우리 삶은 빛 가운데 거하게 되고, 진리가 보이며, 자유가 주어진다.
“네 눈이 단일하면 네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요”
– 마태복음 6:22 (킹제임스 흠정역)
2025-05-14 10:34:40 | 관리자
마가복음 3장 30절, 성령 훼방죄(신성모독죄)는 지금 우리 시대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12장, 마가복음 3장, 누가복음 12장에는 “성령을 대적하는 죄”, 흔히 **‘성령 훼방죄’ 또는 ‘성령 모독죄’**라고 불리는 특별한 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을 문맥에서 벗어나 오용하거나 자기 주장에 끌어다 붙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오늘날 성령 모독죄를 오용하는 대표적 예
오늘날 일부 신비주의나 오순절, 신사도 운동 계열의 교회에서는 “자신들이 하는 비성경적인 행위들”―예를 들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입신, 랄랄라 방언, 진동 현상 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거나 성경적으로 지적하면, 즉시 “성령 훼방죄를 범했다”는 말로 상대를 위협하거나 정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성경이 말하는 성령 모독죄의 의미와 전혀 다릅니다. 성경 말씀은 정확하게 문맥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자신의 주장이나 경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끌어다가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행위입니다.
성령 모독죄란 무엇인가? (복음서 문맥에 따른 정의)
마태복음 12:31-32, 마가복음 3:28-30, 누가복음 12:10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을 대적하여 신성모독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3장 30절은 이 죄가 어떤 상황에서 적용된 것인지 분명히 설명해 줍니다.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부정한 영에 사로잡혔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막 3:30, 흠정역)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기적을 행하신 것을 마귀의 힘, 곧 바알세붑의 권세로 했다고 고의적으로 비방한 자들에게 적용된 것이 바로 이 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마귀의 역사로 몰았고, 성령의 권능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고의적이고 완고하게 하나님을 모독했던 것입니다.
이 죄는 지금도 적용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은 이 성령 모독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직접 모독하는 이 죄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마귀의 역사로 비난한 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계시며, 우리는 그분의 지상 사역을 직접 목격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누군가가 어떤 은사를 부정한다고 해서 “성령 훼방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은 말씀의 문맥을 무시한 오류이며, 성경을 오용하는 심각한 잘못입니다.
오직 오늘날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유일한 죄
오늘날 시대에 하나님께서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거부하는 죄” 단 하나뿐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복음의 은혜를 끝까지 거절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에게는 영원한 정죄 외에는 길이 없다.” (갈 1:8-9 요약)
결론: 성경은 성경의 문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 말씀은 자신의 신비 체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끌어다가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말씀을 임의로 왜곡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사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해 당시 문맥과 대상, 적용 범위를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모독죄”는 오늘날 누군가가 은사를 부정했다고 해서 함부로 적용할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적용은 자기 주장에 성경을 끼워 맞추는 위험한 오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모든 죄를 자백하고 돌이킬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용서하신다는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이 글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무분별한 오용으로부터 성도들이 지켜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5-05-14 10:33:4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