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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Heaven): 성경은 세 개의 하늘이 있음을 보여 준다. 성경의 하늘들 선도 참조(80). I. 첫째 하늘 - 새들과 구름이 거하는 곳. “내가 본즉, 보라, 사람이 없으며 하늘들의 새들이 다 도망갔고”(렘4:25; 단4:12; 마6:26; 8:20 비교). 첫째 하늘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거할 처소는 아니다. II. 둘째 하늘 - 해와 달과 별이 있는 곳.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창22:17, 시19:1 비교).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처음으로 첫째 하늘을 가로질러 둘째 하늘로 가는 우주선을 만들었다. 비록 둘째 하늘이 광대하고 아름답다 해도 첫째 하늘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히 거하는 처소는 아니다.   III. 셋째 하늘 -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노니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2, 왕상8:27, 30 비교). 바로 이곳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실제의 셋째 하늘이다. 수 천 년의 노력 끝에 사람들은 첫째 하늘에서 둘째 하늘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리 우주 공학이 발달해도 둘째 하늘에서 셋째 하늘로 사람을 데려다 줄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여행은 ‘뇌’에 의해 가능하지 않고 오직 ‘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하늘에 들어갈 수 없고 심지어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하늘은 셋째 하늘, 하늘의 하늘, 가장 높은 하늘 등으로 불리며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이 여기에 거한다(마6: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하늘에 가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며 자신의 백성이 와서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를 준비하고 계신다(엡4:10; 히8:1; 9:24-28). 한편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죽는 순간 바로 이 셋째 하늘에 간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빌1:23). 여기서 ‘몸을 떠난다는 것’은 육체적 죽음을 가리키며 우리 성도들은 죽으면 곧바로 주님과 함께 셋째 하늘에 있게 된다. 중간 대기소나 연옥 같은 장소로 간다는 것은 성경과는 동떨어진 미신이다.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이 셋째 하늘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거할 도시가 있으며 신구약 성도들은 바로 이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는 그가 기초들이 있는 한 도시를 바랐기 때문이라. 그것의 건축자와 만드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히11:10; 참조 시46:4; 87:3; 요14:2-3). 그런데 이 도시 즉 새 예루살렘은 영원히 셋째 하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이 끝나면 하늘에서 새 땅으로 내려온다(계21:2). 바로 이 도시 새 예루살렘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천국이다. 새 예루살렘 참조. 만물의 회복 선도 참조(94).
2009-05-02 15:54:18 | 관리자
새 예루살렘(New Jerusalem): 이것은 하나님께서 건축하고 만드신 도시 곧 기초들이 있는 도시로서(히11:10)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장막들이 있는 거룩한 처소이며(시46:4) 신구약 성도들이 가기를 바란 천국이다. 만물의 회복 선도 참조(94). 새 예루살렘은 네모반듯하게 놓여 있으며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만 이천 스타디온으로 같다(계21:16). 지금의 척도를 따르면 이 도시는 대략적으로 길이, 높이, 너비가 각각 약 2,240킬로미터 정도 된다. 여기에는 (1) 아버지 하나님(계4:2-3; 단7:9), (2) 아들 하나님(계5:6), (3) 성령님(계1:4; 4:5; 22:17), (4) 거룩하고 선택받은 천사들(히12:22; 계5:11), (5) 스물네 명의 장로들(계4:4), (6) 교회(히12:22-23; 계19:1, 7-8; 21:1, 9-11), (7) 구원받은 이스라엘(히11:16) 등이 거한다. 이 도시의 성벽은 열두 개의 기초석 위에 놓여 있고 거기에는 신약시대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계21:14).새 예루살렘 성벽의 높이는 약 65미터이며 벽옥으로 되어 있다(계21:17-18). 물론 이 성벽은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고 아름다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약 2,240킬로미터 높이의 도시에 약 65미터 높이의 성벽을 쌓는 것은 마치 63빌딩에 2센티미터 높이의 담을 친 것이나 같다.
2009-05-02 15:46:36 | 관리자
진화론 교육 금지 美 캔사스주, 교과과정 삭제 결정  / 과학계 "시대착오적 발상" 반발 美 캔사스주에서는 교육위원회가 진화론을 교과과정에서 삭제키로 결정, 종교계와 과학계간 뜨거운 논쟁이 한창이다. 캔사스주 10인 교육위원회는 11일 생물학은 물론 다른 과학분야에서도 기본원리로 인정되고 있는 진화론을 교과과정에서 제외시키자는 새로운 지침을 6대4로 채택했다고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들이 12일 일제히 보도했다. 캔자스주에서는 앞으로 새로운 종(種)의 출현에 대해 영장류가 인류로 진화했다는 식으로 설명했던 영국 과학자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결정이다. 종교계는 즉각 환영하고 나섰다.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므로 창조과학(창조론)으로 대체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들이나 실험실에서 물고기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이치 아닌가. 학교에서 입증되지 않은 진화론을 가르쳐선 안 된다." 한 종교지도자의 말이다. 그러나, 캔자스주내 6개 공립대학 총장을 비롯한 교육계와 과학계는 "위원회의 결정은 캔자스주의 과학수준을 1백년 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일부 교사들은 "캔자스주에서는 더 이상 진실을 가르칠 수 없게 됐다"며 "다른 분야로 전업하거나 다른 주로 이동하겠다"고 반발하고 있다. 미국 내에는 현재 캔자스주 이외에도 애리조나·앨라배마 등 6개 주가 진화론 폐기여부로 논란을 벌이고 있어 이번 결정은 이들 주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1999년 8월 13일 중앙일보)    
2009-05-02 15:45:33 | 관리자
전자: 전자는 원자의 핵 주변을 도는 아주 가벼운 입자로서 음 전하를 띄고 있고 핵 주변의 궤도에 배열되어 있다. 핵으로부터 전자까지의 거리는 핵 지름의 10,000배 정도 된다.   양성자: 양성자는 핵에서 발견되는 두 종류의 입자 중 하나이며 전자보다 2,000배 정도 무겁고 양 전하를 띄고 있다.   중성자: 중성자는 핵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입자로서 양성자보다 조금 더 무거우며 전하를 갖지 않아 중성이다. 중성자는 대체로 같은 수의 양성자와 함께 원자핵을 구성하며 중성자와 양성자는 핵력(核力)에 의해서 굳게 결합되어 있다. 원자핵 내의 양성자수는 원자의 원자번호와 같다.   원자는 화학 원소로서의 특성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도달할 수 있는 물질의 기본적인 최소입자를 말하는데 각각의 원자는 전기적으로 완전하게 균형을 유지한다. 양 전하를 띈 양성자의 숫자와 음 전하를 띈 전자의 숫자가 같기 때문이다. 원자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은 핵에서 발견되는 핵력이라는 응집력이다. 원자의 핵에서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위배하는 놀라운 현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야 말로 창조의 기적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기초 물리에서 배우듯이 같은 전하를 띈 입자들이 서로 가까이 있으면 서로가 서로를 밀어낸다. 그런데 원자의 핵에서 창조주께서는 전혀 다른 법으로 이 같은 현상을 억제하고 계신다. 다시 말해 같은 전하를 가진 양성자들이 핵에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알 수 없는 신비의 엄청난 응집력에 의해 굳게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원자에 대한 가장 신비한 사실 중 하나로서 ‘우주의 근본적인 신비’라 불린다. 만일 이런 현상이 없다면 온 세상 만물은 다 해체될 수밖에 없다.   “온 우주를 지탱하는 시멘트 같은 힘은 중력이다. 원자를 함께 모으는 것은 전자기적인 견인력이다. 그러나 원자의 핵을 다 같이 모으는 힘은 현존하는 물질 세상의 경험과 지식을 모두 무시하는 신비의 힘이다. 이 힘은 지금까지 사람이 이해한 다른 모든 힘과 다르므로 제대로 그것을 묘사할 방법이 없다”(Robert E. Marshak, "PIONS", American Scientific Magazine).   창조주의 큰 손에 의해 마치 큰 스프링처럼 둘둘 말려 압축되어 있는 이 엄청난 에너지는 보통 핵 에너지라 불리며 이 에너지는 위력이 대단해서 원자 폭탄 하나가 수천 톤의 TNT에 해당하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전자 현미경으로 겨우 관찰할 수 있는 이 작은 원자에 이 같은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겼다는 진화론의 우화를 믿을 수 있을까? 누구라도 원자의 핵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안에 엄청난 지적 설계가 들어 있고 창조주의 놀라운 힘이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처음에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분이시다(창1:1).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들고 있기에(히1:3) 원소들이 붕괴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처음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주님의 날이 임하면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타서 만물이 해체될 것이다(벧후3:10-11). 우리 주님은 자신의 재림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3:9). 창조주의 참으심의 끝이 이르기 전에 오늘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다.
2009-05-02 15:44:13 | 관리자
교리의 중요성과 성경적 의미의 사랑 A: "그래 당신은 환난전 휴거와 후천년 종말론과 네안다르타르 인종을 주장하는 진화론을 믿으며 우리와 교제하지 않는 사람들이 휴거를 받았다가 다시 떨어진다고 말하는 겁니까? 정말이에요? 도대체 당신과 같이 엉터리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하고는 사귈 수가 없습니다." B: "도대체 누구에게 화를 냅니까? 그래 당신은 흐릿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고 환란후 휴거와 환란후 짐승의 출현을 믿으며 환란전 휴거를 단지 상징으로만 받아들이지요. 그래요. 당신은 자유주의자군요. 아니 새 예루살렘 성이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생긴다고요. 이단 교리가 아닙니까? 제발 내게 다가오지 마십시오. "서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십시오" (위의 글은 미국의 CCC가 1972년 5월에 발행한 "Worldwide Impact"지에 서로 삿대질하는 삽화와 함께 실린 것으로 허가를 받고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종종 믿음 안에서 상대방을 경건히 세워주기 보다 다툼만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논쟁에 휩싸이는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딤전 1:4; 6:3-4; 딤후 2:23; 딛 3:9; 빌 2:14). 사실 우리는 항상 주님 안에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일으키고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하고 또 사모해야 합니다(고전 14:26; 8:1 등). 반면에 위에 나와 있는 삽화의 글은 은연중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서로 사랑하기만 한다면 믿음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이 삽화가 실린 동일 발행물(Worldwide 1972년 5월자)은 다음과 같은 인용문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갈라놓는 첨예한 관심사(즉 교리 문제)를 내려놓아야 합니다......우리의 참된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 비록 신학이나 철학(혹은 교리)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사랑해야 함을 상기합시다. 저는 이 사랑의 원리를 가지고 모든 그리스도인 친구들을 받아들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된 관심사가 되도록 힘씁시다.(여기서 볼드체나 괄호는 제가 덧붙인 것입니다.) 아마 이같은 철학을 다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될 것입니다. "교리나 교회(혹은 교단) 이슈를 가지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분리되는 것은 지상의 그리스도의 몸을 갈라놓는 행위이므로 죄입니다. 정통의 진위는 교리가 아닌 사랑으로 판가름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를 갈라놓는 교리나 규례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차이점은 묻어두고 긍정적인 방향에서 복음의 핵심만을 부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같은 철학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해 보겠습니다(살전 5:21). 교리의 중요성과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개념 1. 마태 28:19-20에 나오는 지상명령에서 주님은 가르침(교리)에 어느 정도 비중을 두셨습니까? 제자들의 가르치는 내용은 정확히 무엇과 일치해야 합니까? 그때의 가르침이 "본질적"인 것에 국한되었을까요? 2. 초대교회가 연합하여 강건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행 2:42)? 그들은 교리를 중요시했습니까? 유념하십시오. 진리 없는 연합이란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됩니다. 3.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역에서 모든 교리를 전파하였습니까(행 20:26-31), 아니면 "실족케 하는" 교리는 생략했습니까? 4. 다음의 진술에서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 보십시오: "우리를 분열케 하는 비본절적인 문제는 접어두어야 합니다." 성경에 어디 비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사소한 교리라는 것이 존재합니까? 하나님의 말씀 중 어떤 부분은 복음 선포시 제외시켜야 합니까(행20:27)?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맞추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에게 모든 성경 말씀의 경중을 판단할 자격이 있습니까? 딤후3:16-17을 보십시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유익한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5. 다시 처음에 나오는 삽화의 글로 돌아가 봅시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사이에는 교회의 휴거와 진노의 날(대환란 기간)에 대한 혼란이 있었습니다(살전4:13; 5:1-2; 살후 2:1-5).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왜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 서신들을 기록하게 했을까요? 왜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바울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해 가며 이러한 교리를 가르쳤을까요(살후 2:3-5, 특히 5절)? 과연 바울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실제로 그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무지하길 바울이 원했습니까(살전 4:13)? 6. 과연 우리 주님은 부활에 대해 전혀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사두개인들을 그냥 내버려두셨습니까(마 22:23-33, 특히 29절)? 군중들을 놀라게 한 건 무엇이었습니까(마 22:33; 비교. 마 7:28,29)? 7. 참된 제자 됨의 표시가 무엇입니까(요 8:31-32)? 믿는 이들이 진리를 따라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됩니까(요 13:35; 17:23)? 8.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요 14:21-24; 15:9-10; 요일 2:3-6; 5:2-3 등)? 어떤 목사가 자기 주님에 대한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요21:15-17; 벧전 5:2; 행 20:28)? 9. 과연 하나님은 순결한 교리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까(딛 2:7; 딤전 1:3)?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에서 이탈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딤전 6:3-5; 딤후 2:16-18)? "거슬려 말하는 자들을 어떻게 깨우치라고" 나와있습니까(딛1:9)? 어떤 사람들은 엄히 꾸짖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딛 1:13)?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말해야 합니까(딛2:1)?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의 거짓 교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계 2:14-16)? 10. 그리스도께서 지역 교회에 은사를 가진 사람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엡4;11-12)? 엡4:11-16에 따르면,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이루고 누릴 수 있습니까(비교. 4:1-6)? 교리를 무시할 때 발생하는 위험이 무엇입니까(엡 4:14)? 진리와 사랑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엡 4:15)? 요17:22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믿는 이들의 연합'이 어떤 것인지 잘 살펴보십시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사이에 교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까? 11. 우리가 참으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거짓 교리나 거짓 교사에 대해 경고할 것입니다(행 20:29-31; 빌 3:2; 골 1:28;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참조하기 바람 - 마 7:15-20; 16:6-12; 24:4-5; 눅 12:1,15). 정말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적절한 권징을 시행하지 않겠습니까(히 12:6; 계 3:19; 살후 3:5-6; 14-15)? 12.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본에 따르자면 진정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에게 필요한 것을 말해주어야 합니다(비록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나 실족거리가 될 수 있지만)(막 10:21)? 사랑과 증오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습니까(히 1:9)? 갈1:8-9에서 바울은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사랑은 무엇을 기뻐합니까(고전13:6)? 우리의 사랑이 넘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빌1:9-10)? 13. 진정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꾸짖고 경책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사람들이 거짓 교사들에게로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딤후4:3). 진리를 거절한 후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딤후 4:4)? 14. 사랑의 사도 요한은 진리와 교리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습니까(요이1-9)? 요한은 가이오를 얼마나 사랑했습니까(요삼1)? 요한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이었습니까(요삼3-4)? 우리는 무엇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합니까(유3)?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요일 3:18)? 15. 계22:18-19를 읽어보고 신4:2; 12:32, 그리고 잠 30:6 등과 비교해 보십시오. 과연 교리는 중요한 것인가요? 이 글을 위해 필요한 소재를 제공해 주신 은혜 신학교 위콤(John C. Whitcomb) 박사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그분의 "종교 철학"(Philosophy of Religion) 요강 pp. 8-14를 보십시오. 결론 교리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적인 사랑은 결코 성경적인 교리의 중요성을 축소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모든 하나님의 진리를 일점 일획도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우리의 바램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진리 없이 참된 연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신자들이 진리에 따라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자기 직분을 다할 때에야 비로소 참된 연합이 구현될 수 있습니다(엡 4:11-16).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초석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같은 이해와 순종"인 것입니다. 실제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을 가로막는 요인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믿고 순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교리에 관심을 둔다면 진리가 승리할 것입니다! 이쯤 되면 당신은 앞에 나왔던 삽화의 내용을 성경적으로 검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살전 5:21).
2009-05-02 09:55:57 | 관리자
신복음주의(Neo-evangelism) 지도자들은 "우리들의 주요 목표는 교리적 차이를 제거하고, 스스로 믿는 자임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연합(unity)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복음주의 철학의 기본 개념 중 하나는 사랑이 진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자들은 "사랑은 하나를 만드는 반면에 교리는 나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과연 신약성경에서 사랑이 진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사실인가? 고린도전서 13장 즉 "사랑" 장(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으나 이것들 중의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 어떤 이는 "이 구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사랑은 최고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장(章)을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진리(truth)도 언급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6절에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진리를 기뻐하며"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믿음, 소망, 사랑은 미덕(virtues)이지만, 진리는 전혀 다른 위치를 갖는 것이다. 진리는 기준 틀(frame of reference)이며 기초(foundation)이다. 진리는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같은 것으로 사랑과 같은 미덕은 이 것 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은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 왜 그런가? 이는 진리 없이 사랑을 정의하고, 사랑을 해석하고, 사랑을 보호하고, 사랑을 인도하고, 사랑을 흘려 보낼 때, 그 사랑은 결국 파국을 가져오는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를 미덕과 같은 수준에 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미덕은, 그것이 진리를 위한 것이 아닐 경우, 시들어 죽게 될 것이다. 이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물이 없는 생명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적절한 수로(channel)와 수관(canal)과 수도관 안에 있는 한, 물은 생명체에게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물을 제어할 수 없을 때, 물은 이 행성에서 불 다음으로 대참사를 유발시킨다. 한편으로 물은 절대적인 축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파국적 재앙이 될 수 있다. 사랑도 그와 같은 것이다.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Definition) 신성한 제한(Divine Definition)(곧, 그 안에서만 물이 흐르도록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수로)이 없는 사랑은 이 땅에서 가장 끔직한 것이 된다. 그것은 수백 만의 사람을 파괴할 수 있고 사탄의 감상주의로 떨어뜨릴 수 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정의하신 바에 의하면, 어떠한 희생이 따를지라도 영원의 빛 안에서 어떤 사람을 위하여 최고의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의하신 사랑이다. 아무튼 사랑이 세계 복음주의에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잊어버리고 감상주의에 빠졌다. 사랑과 진리 사이의 차이를 조명하는 몇 가지 핵심적인 성경 말씀을 생각해 보자. (역자 주(註) : "definition(정의)"에는 '한정(限定)'의 뜻도 있습니다. 곧 참과 거짓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구별하는 것입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섞여있는 세상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된 것을 구별함으로써 진리와 순결을 지킬 수 있으며, 이것이 영적 순결을 지켜야 할 우리의 태도입니다. 어떤 특정한 것을 가리키는 정관사(the)를 영어로 definite article 이라고 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구별된 하나님께 속한 것은 특정한 것입니다. 성경이 "The Book"으로 시작하는 것은 세상의 허다한 책 중에서 성경만이 유일한 그 책(the Book)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은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들이니, 너희가 진리를 알 것이요, 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궁극적인 자유는 오직 전적인 복종 - 진리에 대한 무조건 항복 - 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진리에 복종한다(Love obeys the truth)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사랑에 대해 열렬하게 말한다. 요한복음 14:15, 21, 23, 24 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에 대한 복종이 사랑의 최고 형태임을 강조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명령들을 지키라."(15) "나의 명령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23)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4) 어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느냐? - 이것이 소위 사랑에 관한 산성 시험(acid test)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는다면, 사랑에 관해 아무리 많이 이야기할지라도 효과가 없다. 실로 계수(計數)되는 것은 복종이지 말이 아니다. 사랑 없는 복종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복종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 복종 없는 사랑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비되는 사탄의 대용품이다. 사랑은 진리를 가르친다.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여러 번 말했던 한 사람의 예가 나온다. 그러나 정작 복종해야 할 때에 이르자, 그는 복종하지 않았다. 어려움이 닥치자, 그의 결의는 무너졌고, 주님을 부인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주님께서는 다정스럽게, 그러나 진리 안에서 베드로와 대면하셨다. "그들이 식사를 한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말씀드리되, 예, 주님,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말씀하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말씀드리되, 예, 주님,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15, 16) 어떻게 이 만남에서 주신 가르침을 따라 주 예수님께 사랑을 표현할 것인가? 우리는 그분의 양을 먹임으로,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은 무엇이든 다 가르쳐 준수하게 하라 "는 위대한 사명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모든 계획안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킴으로 그분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20 장에는 그 위임에 복종했던 사람에 관한 좋은 예가 있다. 그는 에베소인들에게 사랑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가 보여주어야 최고의 사랑을 에베소인들에게 나타냈다. 그가 어떻게 했는가?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라고 말했는가? 사도행전 20:26-27이 그 답을 준다.  "그러므로 내가 이 날 너희로 하여금 증거하게 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로부터 내가 깨끗하니라. 이는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너희에게 회피함이 없이 밝히 말하였음이라."  사랑은 아무 것도 버려 두지 않는다 위의 말씀대로 행한 결과, 아시아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 곧 유다인과 그리스인 모두가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주의의 기초를 건전한 교리적 가르침에 두었다. 이것이 세계 복음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열쇠이다. 갈라디아서 1:6의 바울의 증거는, 갈라디아서 4 장에서와 같이,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무뚝뚝하지만, 없어서는 안될 필연의 것이었다. 에베소서 4 장은 우리에게 어떻게 완전한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를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섬김과 사역을 위하여 참된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에게 주셨던 은사들을 주목하라. "그분께서 얼마는 사도로, 얼마는 대언자로, 얼마는 복음 전도자로, 얼마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인격의 형체로 주어진 이 은사들은 모두 교리적 인격(doctrinal person)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진리 안에 포함된다. 이들 은사는 전적으로 계시된 진리의 빛 안에서 복음의 선포와 가르치는 것과 훈련을 포함한다. 신약성경에는 사랑이 교리나 진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어떠한 가르침도 없다. 사랑에 관해 에베소서 4:15 에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랑은 진리를 말하는 태도와 방법이다. 사랑은 진리의 종이다. 사랑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소화하기 쉽게 한다. 그러나 결코 사랑이 진리를 가리거나 무시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진리는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이라는 전달자의 수중에 있을 때는 매우 연약하며 깨지기 쉽다.  사랑은 독(毒)을 물리친다 과학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모든 살아있는 조직은 독(毒)으로부터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복잡하고 정교한 내부 조직을 가지고 있어서, 끊임없이 이 해독하는 조직을 사용하며 생존한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독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정결케 하는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떠한 조직도 생존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고도로 오염된 환경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탄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사탄은 그의 타락한 본성을 통하여 끊임없이 모든 하나님의 종들에게 접근한다.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외한 채 어떻게 사역의 성공을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성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과연 누가 결정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양떼를 보호한다.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격려하시며, 그 당시의 다른 종교지도자들의 소리를 공감하여 들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던가? 그분의 대답이 마태복음 7:15에 있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먹이를 찾는 이리들이라." 오늘날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 대학교나 또는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분열(division)보다 나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타협에 의한 평화'이다. 진리는 세상의 거짓 연합(unity)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랑은 오류를 교정한다 어째서 그런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가족들조차 적개심을 가지고 나뉘어지지만, 적어도 그 중 한 사람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기 때문이다. 로마서 16:17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일으키며 실족케 하는 자들을 지목하고 그들을 피하라." 만약 우리가 주 예수님을 공경하고 사랑한다면, 그분의 진리를 파괴할지 모르는 것들을 주시해야 한다. 또한 그렇게 하는 자들을 피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서 배운 교리에 반대되는 것들을 구분하고 분별할 수 있었고, 그것들을 피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 종교 전체를 추방해버렸다. 선한 생명의 길이나 선한 교리는 항상 나쁜 환경이나 나쁜 교제에 의해 오염된다. 선한 자가 단순히 악한 자와 교제하는 것으로는 결코 나쁜 것을 더 좋게 만들지 못한다. 좋은 것은 나빠지지만, 나쁜 것은 개선되지 않는다. 통에 있는 썩은 사과가 좋은 예다. 나쁜 것은 결코 좋아지지 않으나, 좋은 것은 점점 썩어 간다(고전 15:33). 세속적인 교회 연합을 위하여 교리적 순결을 물 속에 잠그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는 분명히 성경을 통한 성령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2009-05-02 09:54:48 | 관리자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갈2:20) 당신은 이러한 사실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삶(갈2:20) 1. 믿음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열어주는 열쇠가 됩니다(요일 5:4-5). 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요1:12). 또한 그렇게 주님과 함께 걸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골2:5-6; 고후5:7). 이런 삶은 육신적인 노력이나 투쟁이 아닌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 이루신 일입니다(히4:10; 빌2:13; 히13:21). 2.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고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고전15:1-4). 나는 그분께서 완성하신 일을 의지하였습니다(요19:30; 롬4:5).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롬6:6; 6:3; 골2:20; 갈2:20)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 되심(골3:1-4; 갈2:20; 빌1:21; 롬6:11; 고전15:22 등)을 믿음으로 죄의 권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구원받은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히4:9-11). 의롭게 되려면(칭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처럼 거룩함 가운데 살려면(성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3.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와 있는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먼저 믿는 이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롬6:3 -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롬6:6 - "우리가 알거니와"). 둘째로 믿는 이는 이 일이 실제 자기에게 일어났다고 여겨야 합니다(롬6:11 - "여기다"라는 단어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즉,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에 나와있는 사실에 기초하며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경우에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4.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신분(지위)과 실제 내 상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의 신분은 완전하고, 영원한데(골2:10: 고후5:17; 롬8:1) 이는 내가 완전하신 구주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1:30).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의 모습입니다(엡1:6; 고후5:21). 내 상태라고 함은 매일의 삶에서 드러나는 나의 모습입니다. 나는 롬6:6을 통해 내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로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신분을 보여 준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제 삶에서 내 옛사람이 건재해 있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목표는 바로 이 신분과 상태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성령님께서 하십니다(고후3:18). 그러나 내가 맡은 부분도 있습니다. 자신을 롬6:6이나 6:11; 갈2:20과 같은 말씀에 있는 존재로 여기면 여길수록 그 말씀의 실현을 실제 삶에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신분과 실제 상태와의 괴리는 이와 같이 믿음으로 극복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실패할 때 느낌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완전한 신분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자신들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아니다"  왜 더 이상 내가 아닌가? "오직 그리스도이다"  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는가? "내 속에(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롬7:18-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나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다."(사64:6)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사 지혜와 의가 되셨도다."(고전1:30) "죄가 내 안에 거한다."(롬7:20)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2:20) "내 자신을 위한 삶."(고후5:15)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한 삶."(고후5:15) "육신의 행위는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음란과 우상 숭배와 마법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분노와 다툼과 폭동과 파당과 시기와 살인과 술취함과 흥청댐......""(갈5:19-21)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이다."(갈5:22-23).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8:8). "나는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주한다."(롬8:9). "나는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렸다."(골3:9) "나는 새 사람을 입었으니 곧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이 새로워진 사람이다."(골3:10) "내 옛 사람은 속임으로 가득한 정욕들에 따라 부패했다."(엡4:22) "내 새 사람은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피조되었다."(엡4:24). "내 옛 사람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롬6:6) "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3:3)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골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다."(골3:1) "나는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갈2:20) "나는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어졌다."(롬6:5)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갈2:20) "지금 내가 사는 삶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갈2:20) "옛 것들은 지나갔다."(고후5:17).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물이다."(고후5:17) "나는 죄에 대해 죽었다."(롬6:11) "나는 하나님께 대해 살아있다."(롬6:11) "나는 첫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전15:22)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고전15:22). "나는 한 때 죄의 종이었다."(롬6:17;20).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롬6:18-22). 5.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먼저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아야 했습니다. 즉 길 잃고 소망이 없으며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죄인으로서 말입니다(롬3:10-23 등).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에 기초하여 구원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또 죄의 지배와 권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나는 하나님의 관점에 내 자신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번엔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히고 일어나고 하늘의 처소들에 앉은 자로서 말입니다(엡2:5-6; 골3:1-4). 나의 초점은 자아나, 내 자신의 노력, 형편없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 곧 그분의 영광, 그분께서 완성하신 일, 그분의 완전한 대속, 그분 안에 있는 나의 새로운 생명에 맞추어져 있습니다(고후3:18; 5:17). 나는 그분 안에 있는 나의 신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성령님께서 장차 나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영광에서 영광에(그리스도와 같은 모습) 이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고후3:18; 벧후3:18). 6. 성경을 보면 볼수록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내가 소유한 부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엡1:3; 고후8:9). 그리고 믿음으로 이 부유함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영적인 억만장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사실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나는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이미 내가 도달한 것을 또한 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이므로(엡5:8) 빛 가운데 걸어야 합니다(엡5:8). 성도이므로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엡4:1; 살전4:1-7). 7. 복음을 한 마디로 압축해 놓은 구절이 요3:16이라고 한다면 갈2:20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 마디로 압축해 놓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내용을 몇 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열쇠는 믿음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에 있다; 3) 동일시됨이 강조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고 내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4)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것이지만, 실제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만 역사 한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살고 있다; 5) 갈 2:20은 위의 표에 계속해서 설명되어 있다. 
2009-05-02 09:53:02 | 관리자
성경교리문답(Fundamental Catechism)   천주교인들은 "교리문답"(Catechism)을 비성경적인 의미로 사용하지만 근본적 성경 신자들은 이것을 사전적 의미로 즉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정리된 성경 교리"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성경 교리 목록은 크리스천들이 신뢰할 수 있는 성경적 교리문답 가운데 가장 필수적인 성경의 원리들을 모은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이 같은 성경의 교리들을 가르치고 외우게 하는 일이 중요할 줄로 생각합니다. 1. 누가 당신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습니다(창1:27; 욥33:4). 2. 하나님께서는 사람 외에 또 어떤 것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창1:1-31; 신10:14; 느9:6; 요1:3). 3.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과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저와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대상16:28; 롬11:36; 고전6:20; 10:31). 4.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아무도 하나님을 만들지 않았습니다(시90:2). 5. 하나님에게 시작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계신 분입니다(시90:2; 93:2; 계4:8). 6. 하나님도 언젠가는 죽으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시는 분입니다(시90:2). 7.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함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미6:8; 요15:8; 요일5:3). 8. 당신은 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만드셨으며 항상 저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저는 마땅히 그분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시117:1-2; 146:5-10). 9. 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존재합니까?    아닙니다. 오직 한 하나님만 존재합니다(사45:6, 18, 21-22; 딤전2:5). 10. 이 한 하나님은 몇 분으로 존재하십니까?      한 하나님은 세 분으로 존재하며 이것을 가리켜 삼위일체라고 합니다(마3:16-17; 28:19; 고후13:14). 11. 한 하나님의 세 분은 누구입니까?     한 하나님의 세 분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님입니다(마28:19). 12.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영으로서 사람처럼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신 분입니다(요4:24). 13.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변함이 없는 분이십니다(시90:2; 139:7-10; 말3:6). 14.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모든 곳에 계시며 또한 천국에서 왕좌에 앉아 계십니다(대하2:6; 시139:7-12; 잠15:3). 15. 당신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저를 보고 계십니다(렘23:23-24; 요1:18). 16.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욥34:21; 겔11:1). 17.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마19:26). 18.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법을 어디서 배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법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신:30:11-16; 수1:8). 19. 누가 성경을 기록하였습니까?     성령님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벧후1:21). 20.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은 아담과 이브입니다(창2:7, 18-22; 3:20). 2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을 언제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에 땅의 흙으로부터 아담을 만드셨고 아담의 몸으로부터 이브를 만드셨습니다(창2:7, 21-22). 22.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육체 외에 무엇을 주었습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결코 죽을 수 없는 혼과 영을 주셨습니다(창2:7). 23. 당신은 육체뿐만 아니라 혼과 영도 가지고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저는 결코 죽을 수 없는 혼과 영도 가지고 있습니다(전:12:7; 막8:36; 살전5:23). 24. 당신이 혼과 영을 가지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魂)이 되니라."라는 창세기 2장 7절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5.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어떠한 상태로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거룩하고 행복하게 만드셨습니다(창1:27-31). 26.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언약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인격체 사이에 맺는 약속입니다(창9:11-17; 시105:8-11). 27. 하나님과 아담의 언약에서 아담이 에덴 동산에 머물기 위해 지켜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담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해야 했습니다(창2:15-17). 28. 그러면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창3:6). 29. 아담의 죄는 아담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를 갖지 못하게 되었고 죄성을 지닌 채 태어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롬5:14; 6:23: 엡2:3). 30.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을 보시고 어떻게 처벌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육체적 죽음과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처벌을 내리셨습니다(창3:17-24; 롬5:12). 31.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요일3:4). 32. 죄를 범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죄를 범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대상10:13; 시25:6-7; 마15:3-6). 33. 사탄은 누구입니까?      사탄은 악한 영으로서 하나님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대적자이며 믿지 않는 자들의 아버지입니다(마13:39; 눅22:3; 요8:44; 벧전5:8). 34. 사탄도 한때 선한 적이 있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탄도 아주 오래 전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적 존재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사14:12-15). 35. 사탄이 하나님의 선한 영적 존재였을 때 그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당시 사탄의 이름은 루시퍼였습니다(사14:12). 36. 그러면 오늘날에는 왜 루시퍼가 하나님의 선한 종이 아닙니까?     루시퍼는 하나님을 시기하고 하나님같이 위대해지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하늘에서 내쫓으셨습니다(사14:12-15; 계12:7-9). 37. 오늘날 루시퍼는 무엇이라 불립니까?     오늘날 루시퍼는 사탄 또는 마귀라고 불립니다(눅10:18; 요일3:8; 계12:9). 38. 하나님과 사탄 중에 누가 더 강합니까?     하나님이 훨씬 더 강합니다(요일3:8; 4:4). 39. 사탄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까?     아닙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들을 사람들이 항상 행하지 않기를 원합니다(대상21:1; 요8:44; 엡6:11-12, 16). 40.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의 죄는 무엇입니까?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창2:17; 3:6). 41.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그런 죄를 짓도록 유혹한 자는 누구입니까?      사탄이 이브를 유혹하였고 이브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었습니다(창3:1-6). 42.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은 더 이상 거룩하고 행복한 존재가 되지 못하고 죄가 있고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창3:8-24). 43.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게 되었고 죄성을 받게 되었으며 악을 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롬5:12). 44.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을 무엇이라 합니까?     우리의 타락한 죄성은 원죄라 합니다(시51:5; 롬5:12). 45. 모든 죄의 대가는 무엇입니까?     모든 죄의 대가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입니다(창2:17; 시89:30-32; 갈3:10). 46.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친히 사람이 되셨으며 그리하여 한 인격체 안에 하나님과 사람의 두 본성을 가지셨던 분입니다(요14:6; 행4:12). 47. 사람이 천국에 가려 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가 회심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마음의 변화가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요3:3, 16; 5:24; 14:6; 행4:12). 48. 회심 즉 마음이 변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마음이 변한다는 것은 곧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겔36:26-27; 딛3:5-6). 49. 그러면 누가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딛3:5). 50. 당신의 마음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저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 주신 놀라운 은혜로 인해 성령님에 의하여 변화되었습니다(딛3:4-7). 51.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우리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친절입니다(신7:6-9; 롬3:22-24; 5:1-8, 19-21; 엡2:8-9). 52.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고후5:21; 빌3:10; 히5:8-9; 9:11-14; 10:11-22). 53.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갈2:16; 엡2:8-9; 딛3:4-7). 54. 예수님께서 죄를 지으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죄가 없으시며 순결한 분이십니다(사53:9; 고후5:21; 히4:15; 7:26; 벧전2:21-23). 55.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께서는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순종하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롬5:1-21; 빌2:7-8; 3:10; 히2:9; 5:8-9). 56. 속죄란 무엇입니까?     속죄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고 죽으셔서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를 이루신 것을 말합니다(롬5:8-11). 57.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의롭다 하시며 거룩히 구별하십니다(고전6:11; 갈2:16; 딛3:5-7; 히2:9-11). 58. 칭의 즉 의롭다고 칭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칭의란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하셔서 마치 죄를 전혀 짓지 않은 사람처럼 대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롬3:24-25; 8:1; 고후5:19,21). 59. 당신은 어떻게 칭의를 얻을 수 있습니까?     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그분의 의로 인해 칭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행13:34; 롬3:25-28; 갈2:16). 60. 성화 즉 거룩히 구별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성화란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과 행위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고전6:11, 19-20; 엡1:3-4; 4:22-24; 살전5:23; 딤후2:19-21; 히13:12,21). 61. 성화의 두 가지 요소는 무엇입니까?     성화의 두 가지 요소는 죄에 대하여 죽는 것과 의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롬8:13; 갈2:20; 골3:5). 62.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순종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순종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롬5:8). 63.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죽음을 당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눅23:33-38; 갈3:13; 빌2:8). 64.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사55:7; 눅13:3; 24:47; 요3:16; 6:47). 65. 회개란 무엇을 뜻합니까?     회개란 죄가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기 때문에 죄를 후회하고 미워하고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대하7:14; 고후7:9).   66.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 오직 예수님만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롬3:22-25; 갈2:16; 빌3:9; 히12:2). 67. 당신 자신의 힘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요3:5-6; 16:7-11; 고전2:9-12; 딛3:5). 68.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9. 예수님께서는 언제 이 땅에 오셔서 얼마 동안 사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33년 반 동안 사셨습니다. 7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주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창15:6). 7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들의 믿음을 나타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 자기들의 믿음을 나타냈습니다(히11:4). 72. 그런 희생 제물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까?     그런 희생 제물은 죄인들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요1:29, 36; 히9:11-14). 73.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직분을 가지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직분을 가지셨습니다(행3:22; 히5:5-6; 계19:16). 74. 예수님의 직분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직분은 대언자와 제사장과 왕입니다(사9:6-7; 눅4:18; 행3:22; 히4:14-15; 5:5-6; 계19:16). 75.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대언자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십니다(눅4:18; 요15:15). 76.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제사장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롬3:26; 히7:25-27; 9:14, 28). 77.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왕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통치하시고 보호하시며 궁극적으로 이 땅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시27:1-5; 사33:22; 고전15:25). 78.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몇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출20:1-17). 79. 그 십계명은 때때로 무엇이라 불립니까?     그것은 모세의 기본 법규라 불립니다. 80. 십계명 가운데 처음의 네 가지 명령은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처음의 네 가지 명령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쳐 줍니다(출20:1-11; 마22:37-38). 81. 나머지 여섯 가지 명령은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나머지 여섯 가지 명령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쳐 줍니다(출20:12-17; 마22:39). 82. 십계명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십계명의 핵심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마22:37-40). 83. 누가 당신의 이웃입니까?     모든 사람이 저의 이웃입니다(눅10:25-37; 갈6:10). 84.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잠언 8장 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사랑하나니 일찍 나를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5.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시편 7편 11절은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심판하시며 하나님은 사악한 자를 향하여 날마다 분노하신다"고 말씀합니다. 86. 그러면 십계명의 첫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명령은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취하지 말라."입니다(출20:3). 87. 첫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첫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출34:14; 신26:17; 마4:10) 88. 두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 명령은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는 나 곧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입니다(출20:4-6). 89. 두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두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경배할 것과 우상을 가까이 하지 말 것을 가르쳐 줍니다(출20:23; 신6:13-18; 12:30-32). 90. 세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세 번째 명령은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 이는 주가 자신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할 것임이라."입니다(출20:7). 91. 세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세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행하신 일을 경외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시29:2; 107:21-22; 138:2; 계15:3-4). 92. 네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네 번째 명령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네가 수고하고 네 모든 일을 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거하는 나그네나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입니다(출20:8-11). 93. 네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네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일 주일 중 하루는 하나님의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레19:30; 신5:12). 94. 그리스도인들은 일 주일 중 어느 날에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까?     신약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시대의 안식일이라 하는 일곱째 날 즉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이라 하는 첫째 날 즉 일요일에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요20:19-26; 행20:7; 고전16:1-2). 95. 왜 그 날을 주일이라 부르며 그 날 주님께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주의 첫 날인 일요일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마28:1-6; 막16:1-6; 눅24:1-6; 요20:1-9). 96. 주일은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주일에는 마땅히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으며 복음을 선포하고 또 이웃에게 선을 행함으로 보내야 합니다(레23:3; 시92:1-2; 사58:13; 눅13:10-13; 행15:21; 16:13; 17:2). 97. 다섯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다섯 번째 명령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이 네게 주는 땅에서 네 날들이 길리라."입니다(출20:12). 98. 다섯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다섯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부모님을 사랑하고 그분들에게 순종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롬13:1; 엡6:1-3). 99. 여섯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여섯 번째 명령은 "너는 살인하지 말라."입니다(출20:13). 100. 여섯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여섯 번째 명령은 다른 사람을 죽이지 말 것과 해를 끼치지 말 것을 가르쳐 줍니다(창9:6; 마5:22; 갈5:15; 요일3:15). 101. 일곱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일곱 번째 명령은 "너는 간음하지 말라."입니다(출20:14). 102. 일곱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일곱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 것과 마음과 언어와 행위에 있어서 순결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고전7:2; 엡4:29; 5:3-4). 103. 여덟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여덟 번째 명령은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입니다(출20:15). 104. 여덟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여덟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도둑질하지 말 것과 다른 사람의 재산을 존중할 것과 정직하고 근면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105. 아홉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아홉 번째 명령은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입니다(출20:16). 106. 아홉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아홉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만을 말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잠14:5; 슥8:16; 벧전3:16). 107. 열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열 번째 명령은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입니다(출20:17). 108. 열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열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탐내지 말 것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고전13:4; 갈5:26; 빌4:11; 히13:5). 109. 십계명은 우리에게 어떠한 소용이 있습니까?       십계명은 우리에게 우리의 의무를 가르쳐 주고 또 구원자가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신29:29; 수1:7-8; 갈3:21-26; 약2:10). 110.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 감사드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들을 간구하는 것입니다(시10:17; 요16:23; 빌4:6; 요일5:14). 111.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요16:23). 112.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지침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주셨는데 이것은 타종교에서 주문을 외우듯이 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그 안의 내용대로 합당하게 기도를 드리라고 모범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마6:9-13). 113. 주기도문을 암송해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日用)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는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임이니이다. 아멘."(마6:9-13). 114. 주기도문에는 몇 가지 청원이 들어 있습니까?       주기도문에는 여섯 가지 청원이 들어 있습니다(마6:9-13). 115. 첫 번째 청원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청원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6:9). 116. 첫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와 모든 사람들에 의해 영화롭게 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시67:1-3; 145:1-13; 사64:1-2; 롬11:36; 살후3:1).   117. 두 번째 청원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 청원은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6:10). 118. 두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는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순종할 것과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 세워질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시67:1-3; 68:1; 롬10:1; 살후3:1; 계22:20). 119. 세 번째 청원은 무엇입니까?       세 번째 청원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6:10). 120. 세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는 천국에서 천사들이 하나님을 섬기듯이 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길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시103:20-22; 119:34-36; 행21:14). 121. 네 번째 청원은 무엇입니까?       네 번째 청원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6:11). 122. 네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과 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잠10:22; 30:8; 딤전4:4-5). 123. 다섯 번째 청원은 무엇입니까?       다섯 번째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6:12). 124. 다섯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에게 해를 가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시51:1; 마6:14-15; 18:21-22,35; 눅11:4; 롬3:24-25). 125. 여섯 번째 청원은 무엇입니까?       여섯 번째 청원은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6:13). 126. 여섯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시험 들었을 때에 죄를 짓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시19:13; 51:10, 12; 마26:41; 고전10:13). 127. 규례란 무엇입니까?       규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수단입니다(롬6:3-10; 고전11:23-26). 128. 성경에는 몇 가지 규례가 있습니까?       성경에는 두 가지 규례가 있습니다(마28:19; 고전11:23-26). 129. 그 두 가지 규례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규례는 침례와 주의 만찬입니다(마26:26-28; 28:19). 130. 누가 이 규례들을 정하였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정하셨습니다(마26:26-28; 28:18-19). 131. 왜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 규례를 정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세상과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또 그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기 위해 이 규례들을 정하셨습니다(행2:38-41; 롬6:4). 132. 침례에서는 어떤 표적이 어떤 방식으로 사용됩니까?       침례에서는 물이 표적으로 사용되며 우리는 완전히 물 속에 잠겼다가 일어나서 예수님의 죽음과 매장과 부활을 외적으로 드러내어 보입니다(마3:6,11,14-17). 133. 침례는 무엇을 뜻합니까?       침례는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과 그분을 따르겠다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내어 보여 주는 표적입니다(롬6:3-11; 갈3:27). 134.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습니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습니다(마28:19). 135. 주의 만찬은 무엇입니까?        주의 만찬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마26:26-28; 막14:22-25; 눅22:17-20; 고전11:23-26). 136. 주의 만찬에는 누가 참여합니까?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의지하며 그분을 위해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고전11:28-29). 137.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것은 누룩이 들지 않은 빵과 포도즙입니다(마26:26-28; 막14:22-25).   138. 주의 만찬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즙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빵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며 포도즙은 우리를 위해 흘려 주신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마26:26-28; 막14:22-25; 눅22:17-20). 139.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무덤에 그대로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뒤 사흘만에 무덤에서 몸을 입고 부활하셨습니다(마16:21; 28:1-6; 롬6:4; 고전15:3-4). 140.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님은 지금 천국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중재하고 계십니다(행1:9; 엡1:19-21; 히4:14-16; 7:25). 141.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데려다가 자신과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14:1-3; 행1:11). 142. 예수님은 언제 다시 오십니까?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마24:42, 50; 25:15). 143. 재림의 두 단계는 무엇입니까?       재림은 성도들의 휴거를 위한 공중 강림과 왕국을 세우시기 위한 지상 강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고전15:51-52; 계19:11-16). 144. 휴거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휴거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다 살리시고 또 살아 있는 자들을 변화시키며 그들에게 썩지 않는 육체를 주십니다(고전15:51-52; 살전4:15-17). 145.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지상에 강림하실 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강림하셔서 모든 악한 자들을 멸하시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살후1:7-10; 계19:11-16). 146.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혼은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갑니다(창3:19; 롬6:23). 147. 심판 날에 사악한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사악한 자들은 죽어서 곧바로 지옥에 가고 최종적으로 영원토록 불못에 던져집니다(시9:17; 계20:11-15). 148.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지옥은 무시무시하고 영원한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마25:41, 46; 막9:43; 눅16:19-26; 계20:10, 13-15). 149. 그러면 의로운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의로운 자들은 죽어서 곧바로 천국에 가고 최종적으로 영원토록 새 예루살렘에 거합니다(마5:11-12; 25:46; 요10:28; 14:1-3; 골3:4).150.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천국은 영광스럽고 행복한 곳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거하는 곳입니다(요14:1-3; 살전4:17; 계7:15-17; 21:3-4, 22-27; 22:1-5).
2009-05-02 09:48:43 | 관리자
크리스마스에 대한 바른 이해 *  이 글은 레이시 박사의 "아이들의 천국"(도서출판 말씀과 만남)의 부록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신들이 아닌 것들을 섬겼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께서 너희를 아시거늘 어찌하여 약하고 천한 초등원리로 돌아가 다시 거기에 속박되기를 바라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8-11). "그러므로 누구든지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성일이나 월삭이나 안식일들을 인하여 너희를 판단치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이나, 실체는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크리스마스는 비단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세간의 모든 사람들이 가장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르는 축제입니다. 이 날을 통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기억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유래, 그리고 이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조명해 본다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이 글을 쓰는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하지만 성경대로 믿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여 이 글을 씁니다. 결코 어떤 개인이나 특정 교회나 단체를 정죄하거나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크리스마스에 대한 성경적이고 올바른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부디 이 점을 이해하시고, 끝까지 주의 깊게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크리스마스'라는 용어의 뜻 '크리스마스'는 성탄절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만, 이 단어의 정확한 어원과 뜻을 살펴본다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용어가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어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크리스마스 = 그리스도 + 미사 Christmas = Christ + Mass   쉽게 말해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입니다. '미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제사'를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미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단지 요한복음 4장 24, 25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경배를 드릴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크리스마스'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야 합니다. 부득이 불러야 한다면 차라리 '성탄절'(聖誕節)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어원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비롯되었음을 금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유래, 그리고 그것의 비성경적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냥 교회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지키고 있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날'(day)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한 날을 다른 날보다 중히 여겨 매번 정기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모든 날을 같게 여기므로 특별한 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음식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을 만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채소만 먹는 연약한 사람도 있습니다(롬14:1-5). 따라서 어떤 특정한 날을 지정하여 지키는 문제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고 안 먹고 하는 문제는 각자 자기 마음에 확정한 대로 행하는 믿음과 확신의 문제입니다(롬14:5).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명확한 성경적 원칙과 기준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원칙과 기준을 반드시 제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영적 규칙과 질서는 파괴되고, 판관(사사) 시대와 같이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게 될지라도 수수방관만 하는 영적 무방비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영적 탈선과 타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규칙에 따라 적법하게 경기를 해야 하듯이(딤후 2:5), 믿는 사람들도 각자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때 반드시 말씀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요12:48). 처음에 제시한 갈라디아서 4:9,10 말씀은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킴으로 '약하고 천한 초등원리'로 되돌아가 거기에 다시 속박되는 문제에 대해 아주 강력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자신의 교회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규례는 '밥티스마'(침례)와 '주님의 만찬' 두 가지뿐입니다. 그 외의 모든 행사나 절기들은 아무리 좋은 의미로 가장되고 장식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와는 동떨어진 것들입니다. 크리스마스 축제가 이교도 국가인 바빌론의 풍습에서 유래되었음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에 대해 먼저 성경적으로 살펴본 후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 성경은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나 그분의 탄생연도에 관해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에 대해서 우리가 알기를 원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탄생은 이 대속을 위한 과정입니다. 더 중요한 구심점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분의 재림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도 그분의 구속의 과정을 되새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제시하지 않은 사실을 우리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신 바를 따라 행해야 합니다. 꼭 그분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 알아야겠다고 한다면 알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 시기는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것처럼 12월 25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12월 25일이라는 설은 고대 바빌론 종교에서 유래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 이교적 풍습을 받아들여 기독교와 접목시켰으며,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까지 흘러 들어온 것입니다. 우선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특성과 유다인들의 관습, 그리고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가 12월 25일이 아님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들판에 있던 양떼들이... 우리는 누가복음 2:8에서 천사가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그분의 탄생을 알려주었던 때에, 목자들이 넓은 들판에서 밤까지 양떼들에게 풀을 먹였으며, 밤에 들에 묵으면서 양떼들을 지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겨울은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상당히 추우며 비가 오는 계절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0월 말 이후에 목자들이 들판에서 자신들의 양떼들을 먹이고 지키는 것은 그들의 관습이 아닐 뿐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3월 하순이나 4월 초순경부터 양떼들을 들판에 방목하다가 10월경 첫비가 내릴 때쯤에는 추위로 인해 모든 양떼를 집으로 몰고 돌아와서는 우리 안에서 겨울을 나게 했습니다. 에스라 10:9-13을 보면,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았을 때인 아홉째 달 이십일 경(유다 월력-우리 월력으로는 11월 중순경 이후임)에 비로 인해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 사실로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늦어도 10월말 또는 11월초 이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베들레헴에 있는 여관에 그들이 있을 방이 없어... 유다인들은 일년에 세 차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출 23:14-17, 참고 - 출 34:24; 시 50:5).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까지는 유다인의 7대 절기 중에서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을 지키러 가는 시기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던 그 시기에 예루살렘 근교에는 각처에서 올라온 많은 순례자들이 일시적으로 증가하여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던 날 저녁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조차도 거할 장소가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즉, 마리아와 요셉이 아우구스투스의 칙령에 의해 호적을 등록하려했을 뿐 만 아니라 이 유다인의 절기 중 하나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상경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예루살렘의 총독을 통해 유다인들의 이러한 풍습이 있음을 듣고 이 시기에 맞춰 호적등록을 하라고 칙령을 내렸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의 위력은 정치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탄생일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인 근거는 없지만 성도 요한의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하면서 '거하시니'(tabernacled, 장막을 치시니)라는 예상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니"(요1:14) 위 구절에 나오는 "거하시니" 라는 말은 영어로는 "dwelt"이고 그리스어로는 "tabernacled"로서, 이 "tabernacl"이라는 단어가 바로 장막절을 나타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분께서 장막절에 출생하셨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유다인의 장막절은 지금의 월력으로는 대략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경에 해당합니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정상적인 수태기간이 사십 주임을 고려해 볼 때 정확하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의 12월 25일에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참으로 신비하지 않습니까?   3. 만삭된 여인이 한겨울에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에 모든 여인과 아이들도 자기들이 속한 도시에 조세등록을 하러 가야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주 길고 오랜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한겨울에 여인들과 아이들이 여행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만삭의 몸인 여인이 여행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지방의 겨울이 그렇게 혹독하게 춥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마태복음 24장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유다인들)의 도피하는 일이 겨울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겨울이 유다인들에게 있어 도망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계절이라면, 아이들이나 여인들이, 특히 아기를 밴 여인이 여행을 한다거나 목자들이 밤에 들판에 묵으면서 양떼들을 지키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위의 고찰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가 12월 25일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아무도 이를 반증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이 어떻게 유래된 것일까요?   크리스마스는 어디서,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초대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였지만, 탄생을 기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1:26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대영백과사전」도 "크리스마스는 초기 교회의 축제들 중에는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카톨릭 백과사전」(1911년판)도 "크리스마스는 교회의 가장 초기에 있었던 초기 축제일에 들어 있었던 축제가 아니라... 그 축제의 기원은 이집트이다... 이레니우스와 터둘리안은 축제일 목록에서 크리스마스를 삭제하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로마 교회는 4세기 후반에 고대 로마의 태양신 솔(Sol)의 탄생일인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정하여 지키기 시작하였고, 5세기에 이르러서는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영구히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대영백과사전」도 그 기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기념하는 이유는 불확실하지만, 초기 기독교들이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 is Solis Invicti)이라는 로마의 이교 축제와 같은 날에 기념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이교 축제는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고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지를 기념한 것이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전통 관습들은 이교도들이 한겨울에 벌이던 농신제 및 태양 의식들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한데 합쳐서 생기게 된 것이다. 로마 세계에서는 농경신 사투른을 기념하는 축일 '사투르날리아'(12월 17일)에 흥겹게 지내며, 서로 선물을 교환했다. 또한 이란 사람들은 12월 25일을 신비로운 신, 미트라(정의의 태양)의 탄생일로 여긴다. 로마력 설날(1월 1일)에 사람들은 자기 집을 푸른 나무와 등불로 장식했고, 자녀들과 가난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었다. 튜튼족이 갈리아, 브리튼, 중앙 유럽으로 침입해 들어오면서 게르만족과 켈트족의 크리스마스 축제 의식들이 이러한 관습들에 융합되었다. 음식과 교제, 크리스마스 이브에 벽난로에 때는 장작과 크리스마스 케이크, 푸른 나무들과 전나무들, 선물과 인사 등이 이 축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되었다. 이교도에게나 기독교도에게나 겨울 축제일은 언제나 따뜻함과 꺼지지 않는 생명을 상징하는 불, 등불들과 관련되었다." 「카톨릭 백과사전」 또한 이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12월 25일에 지켜 온 잘 알려진 나탈리스 인빅티의 태양 축제(즉, 정복되지 않은 태양의 탄생)는 우리가 12월 25일에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것에 대한 좋은 근거가 된다"(제3권, p. 727, Christmas). 이러한 이교적 태양신 숭배의 관습이 로마에서 '기독교화' 되었을 때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몇몇 사람들은 예수님이 태양신인 '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터툴리안은 솔(Sol)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어거스틴조차도 그리스도를 솔과 동일시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탄핵했던 것입니다. 고대의 동계 축제는 대단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인기로 인해 로마 교회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때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크리스마스의 관습 중 많은 것들이 로마의 농신제(Saturnalia)의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베일리라는 저술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마스 기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즉 휴일들, 선물 교환, 겨울나무 등이 이교주의의 유물인 로마의 겨울 농신 축제가 계승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알렉산더 히슬롭 목사도 그의 저서 「두 개의 바빌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이교도의 축제일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을 지킨 날짜와 그 때 행하는 의식이 그 날의 기원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하늘의 여왕을 이시스(Isis)라고 불렀는데, 그녀의 아들이 '동지'인 바로 이 때에 태어났다. 우리들이 크리스마스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인 '율 데이'(Yule day)는 이 날이 바로 이교도 국가인 바빌론에서 유래되었음을 밝혀 준다. 여기서 '율'(Yule)은 '어린 아이'를 뜻하는 칼대아 말이다. 12월 25일은 기독교가 들어서기 훨씬 전에 이교도 앵글로색슨 조상들이 '율 데이', 또는 '아이의 날'이라 불렀으며, 그 전날 밤은 '어머니의 밤'이라 불렀다는 것은 그 날의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 탄생일은 이교도 국가 도처에서 지켜졌다."   크리스마스의 뿌리는 바빌론 신비 종교 만리 홀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따르면 고대 바빌론 왕국을 건설했던 니므롯 이전부터 카인의 후예들은 모든 생명의 근원을 태양으로 믿어 숭배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풍습이 바빌론의 니므롯 시대로 흘러 들어와 바벨탑을 쌓았던 니므롯이 죽은 후에 그의 아내이자 어머니였던 세미라미스가 니므롯을 당시 백성들에게 태양신으로 숭배하게 하였고, 자신은 그의 아내로서 '하늘의 여왕'으로 격상시켜 달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 태양신이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 (Osiris), 또는 '라'(Ra) 등으로, 카나안 땅에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오염시켰던 '바알'(Baal)로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태양신 숭배 풍습이 로마에서는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는 축제를 하면서 12월 25일을 '나트리스 솔리스 인빅티'(Natlis Solis Invicti)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탄생일'이라는 의미입니다. 태양신 '솔'은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12월 22일 동짓날이 해가 가장 짧은 날이므로 이 날은 태양이 죽은 날로 믿었으며, 12월 24일은 해가 다시 길어져 태양이 살아나는 것으로 믿어 12월 25일을 해가 다시 살아난 날, 태양의 탄생일로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빌론에서 세미라미스에 의해 태양신으로 숭배되었던 니므롯의 죽음과 재탄생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위의 증거들을 통해 크리스마스라는 절기가 이교도들의 풍습에서 유래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모든 교회와 온 세상이 크리스마스를 지키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세상 밖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탄생이 없었다면 그분의 십자가 사건이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일년에 하루를 떼어(혹은 일년에 한 주일을 떼어) 성탄절로 혹은 성탄주일로 지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12월 25일에 예수님이 태어났다.", 혹은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준다." 등과 같은 거짓말을 하지는 말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연말에 있고 휴일이므로, 멀리 떨어진 가족들이 함께 모여 즐거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에게도 성탄절의 의미와 또 무엇이 잘 못된 것인가 등을 가르치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믿습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이 모든 것이 이교도들의 풍습에서 나왔으므로, 나와 내 가족은 크리스마스를 지키지 않겠다고 결심할 것입니다. 저는 이 것 역시 각 자의 마음에 따라 주를 위해 하는 것이므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제가 타협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단지, 이 날을 지키는 사람도 주(主) 안에서 양심에 따라 거짓 없이 지키고, 지키지 않는 사람도 주(主) 안에서 양심을 따라 지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날에 대해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며, 즐겁게 휴일로 지키면서 가족과 함께 주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음미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2009-05-02 09:47:07 | 관리자
부활절(Easter)에 대한 바른 이해   지난번에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배경과 그 이교적인 유래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이제부터는 부활절이 과연 주님께서 명하신 주님의 절기인지, 아니면 사람이 만든 전통에 따른 사람의 절기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부활절(Easter)의 기원   부활절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과연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 달걀에 색칠을 했을까요? 부활절을 언제부터 지켰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서머나의 감독인 폴리갑과 로마의 감독 안티케투스가 서로 주고받은 서신에 "부활절 논쟁"이 있었다는 불확실한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나 기타 문서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 축제를 지켰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더욱이 부활절을 축제의 날로 잡아 기념하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영백과사전」초판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경이나 사도적 교부들의 저술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을 지켰다는 암시는 없다. 특정한 날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이 축제일이나 기타 다른 어떤 축제일도 지키라고 명한 바가 없다." 뿐만 아니라 3세기경, 교회에서 지킨 부활 축일은 오늘날 '이스터'(Easter)란 이름으로 지켜지는 부활절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또 이 기념일은 그 당시에 '이스터'란 이름으로 불리지도 않았습니다. 이 기념일은 파스카 즉 유월절로 불렸고, 이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한 것으로 전해질 따름입니다(히슬롭, 「두 개의 바빌론」). 그런데 이 '파스카'를 '이스터'라 불러 '춘분 뒤에 오는 만월(滿月) 직후의 일요일'에 축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였습니다. 주후 325년 그리스 동방 정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교회가 니케아 공회에서 부활절을 정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카톨릭 백과사전」, p. 505).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도 로마 카톨릭주의에서 나온 '이스터'(부활절)를 '춘분 뒤에 오는 만월 직후 일요일'에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점은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단어는 'Resurrection' (성경에서 총 41회 언급)인데, 왜 '이스터'(Easter)를 부활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유다인들의 유월절 주간(유월절은 니산월 14일에 있었으며 이것은 유다 민력으로 7월에 해당하며 우리 달력으로는 3-4월에 해당하고, 그 주간에 무교절, 초실절 등이 동시에 있음)에 있었는데, 왜 부활절을 '춘분 뒤에 오는 만월 직후 일요일'에 지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의문점을 풀기 위해 우리는 먼저 몇 가지 영어사전과 신학사전에서 '이스터'(Easter) 항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웹스터의 신국제 사전 제3판」(Webster's 3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1. 고대 이교도들의 봄 축제, 2.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일로서 3월 21일 춘분이 지난 뒤에 오는 만월을 기준으로 해서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거행된다. 부활절은 춘분과 음력이 연결된 일자이기 때문에, 그 날짜는 매해 달라진다. 「펑크와 와그날의 대학표준사전」(Funk & Wagnalls's The College Standard Dictionary) 1.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 축제, 혹은 부활제가 거행되는 날 「시사 엘리트 사전, 1987년판」 "부활절(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일, 3월21일 이후의 만월 다음의 첫 일요일) 「현대 영한 사전, 1994년판」 "그리스도의 부활절, 춘분(春分) 3월 21일의 만월. 그 날이 만월이 아니면, 그 뒤의 만월 후 최초의 일요일이며 그 날짜는 정해진 것이 아님. 이 날을 '부활절'(Easter Day)라고 말하며 기독교 국가에서는 크리스마스 다음 가는 중요한 축제일임. 원래는 봄의 여신 '에오스트레'(Eostre)의 제일(祭日)임." 「성서대백과, 정인찬 편, 기독지혜사 1979」 "이스터라는 명칭의 어원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비드(Bede)에 의하면, 이 명칭은 고대 튜우튼 족이 4월에 희생제물을 바쳤던 봄의 여신 '이스터'(Eastre)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크리스천 의식은 아마도 이 이교도 축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사탄을 숭배하는 신비 종교들이 극도로 성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태양신 숭배' 혹은 '바알 숭배' 그리고 '월신 숭배' 등이었습니다. 태양신(솔, 호루스)은 최초의 적그리스도이자 바빌론 왕국을 세운 '니므롯'을 상징하는 것입니다(창10:8,9). 그의 이름은 '담무스'(Tammuz)라고도 하는데(겔 8:14) 그는 원래 니므롯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니므롯의 아내였던 세미라미스는 자기 남편 니므롯이 죽자, 그 니므롯이 환생하여 담무스가 되었다고 사람들을 속였던 것입니다. 이 담무스는 바알이라고도 불리며(렘 19:5), 마르둑, 벨, 오시리스, 쥬피터, 오리온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담무스의 어미이면서 그의 아내가 된 세미라미스는 월신으로 알려졌고 '하늘의 여왕'(queen of heaven, 렘 7:18; 44:17-25)이라 불렸으며, 여러 고대 국가에서 에오스트레(Eostre), 오스테라(Ostera), 아스다롯(삿 2:13), 아스타르테, 다이아나(아데미, 행 19:24), 시벨레, 비너스, 마리아, 이쉬타르(Ishtar)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특히 고대 영국의 색슨족은 이 '이쉬타르'란 이름을 취해 이스터(Easter, 빛과 봄의 여신)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터'(Easter)는 에오스트레, 오스테라, 아스타르테, 또는 이쉬타르 등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부활절 풍습: 부활절 계란, 부활절 토끼, 사순절 등 원래의 이스터는 하늘의 여왕을 기념하는 이교도들의 축제일로서, 이것을 상징하는 심벌로는 플레이보이지의 심벌인 '토끼'와 하늘의 여왕인 비너스 혹은 이스터의 탄생을 상징하는 달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스터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부활절 기간 중에 행해지는 관습들 역시 이교도들의 신비주의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자면, 부활절 달걀을 삶아 색칠하여 먹는 것 등은 비기독교적인 이교도의 관습입니다. 어떤 이들은 병아리가 달걀에서 나오듯 그리스도께서 무덤으로부터 나오셨다는 의미로 부활절 달걀의 의미를 재해석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습은 결코 성경이나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유래된 것이 아닙니다. 고대 바빌론 신화에는 하늘로부터 유프라테스 강에 떨어진 것으로 알려진 굉장히 큰 전설상의 달걀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 달걀에서 여신 아스타르테가 부화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고대 바빌론 사람들 사이에서 달걀은 거룩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여신 아스타르테(혹은 이스터)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고대 영국의 드루이드 교도들은 달걀을 자기들 종교의 거룩한 상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아테네에서는 바카스의 제전이나 디오니시아카의 제전 때 알을 성별하여 바치는 종교행사가 거행되었습니다. 한편 힌두교도들은 금빛을 띤 창조의 알을 숭배했으며 중국인들은 종교축제 때에 염색하거나 색칠한 달걀을 사용하였고, 고대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종교의식에서 알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비밀스런 목적을 위해 자기들의 사원에 알의 형상을 만들어 비치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로마에서는 풍작의 여신 케레스를 섬기는 행렬이 지나갈 때 계란을 앞세워 갔으며, 일본에서는 거룩한 달걀을 봄의 여신의 상징으로 색칠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달걀이 태양 즉, '황금달걀'과 관련되어 있었고, 그들은 염색한 달걀을 거룩한 제물로서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전 세계적인 바빌론의 알 숭배 사상의 자취는 우리 나라에도 유입되어 '박혁거세 신화'에서도 발견됩니다. 「대영백과사전」은 달걀을 채색하여 먹는 이런 '알 숭배 사상'의 기원을 고대 이집트인과 페르시아인까지로 소급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이교도들의 관습이 기독교와 연관을 맺게 되었을까요? 「카톨릭백과사전」에 나오는 다음 인용문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달걀 사용이 금지된 까닭에 사람들은 부활절 날 부활의 기쁨을 상징하는 붉게 칠한 달걀을 상에 가져 왔다. … 이 관습은 그 기원을 이교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봄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경축하는 많은 이교 관습들이 부활절과 접목되었기 때문이다"(「카톨릭백과사전」제5권 p. 227, '부활절' 항목). 부활절과 관련되어 이교로부터 유입된 부활절 관습에는 부활절 달걀 외에도 부활절 초, 부활절 토끼, 부활절 백합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예로 부활절 토끼의 경우를 들어보면, 「대영백과사전」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부활절 달걀과 마찬가지로, 부활절 토끼도 고대 이교로부터 기독교화 된 것이다. 토끼는 고대 이집트의 전설에서나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 달과 관련되어 있다. 토끼에 해당되는 이집트 말 'um'이 '열린'(open)이란 의미와 '기간'(period)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이 토끼는 어떤 주기성 사상과 관련을 갖게 되었다. 즉 달과 인간에게, 그리고 젊은 청춘 남녀에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다산과 새로운 삶의 상징이 되었다. 이와 같이 토끼는 부활절 … 달걀과 관련되어 있다."  위에서 인용한 「카톨릭백과사전」은 "토끼가 이교의 상징으로 항상 다산의 상징이 되어왔다"고 말하며, 「그림으로 보는 세계 문화 상징 사전, 진쿠퍼 지음, 이윤기 옮김, 까치」은 부활절 달걀과 부활절 토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에, 부활절 달걀 혹은 토끼는 춘분에 즈음하여 생명의 새로운 탄생과 갱생을 가져다주는 상징이었다. 야생토끼나 집토끼는 게르만의 여신 오스타라(중세 영국의 에오스트레)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마도 이 여신의 이름이 이스터의 어원일 것이다." 부활절 기간에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일출예배에 참석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절 일요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는 때에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부활은 태양이 떠오를 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무덤이 이미 비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아직 어두울 때였습니다. 한편 이 일출 예배의 모형은 해돋이 때 해맞이를 하던 고대 태양 숭배의 일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해가 뜰 때 부활예배를 드리는 것이 결코 태양을 숭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관습은 성경에 없는 것이며 이교에서 비롯된 혼합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대언자 에스겔 시대에 참 하나님을 아는 자들도 태양숭배에 빠졌고, 그것을 자기들 종교의 일부분으로 삼았습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주의 집 안뜰로 들어가기로, 보니, 주의 전 문 앞 현관과 희생단 사이에서 약 스물 다섯 명이 주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 경배하더라"(겔 8:16). 백성들이 동쪽을 향하여 태양을 경배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곧 해돋이 때의 의식임을 보여줍니다. 대언자 엘리야 시대에 바알의 선지자들이 바라보았던 곳도 역시 동쪽이었습니다. 바알은 태양신도 되고 불의 신도 됩니다. 엘리야가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분이 참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바알 선지자들에게 도전했을 때, 그는 단도 직입적으로 바알 숭배와 맞섰던 것입니다. 이 바알의 선지자들이 바알을 부르기 시작한 때가 하루 중 어느 때였습니까? 그것은 바알, 즉 태양이 그 첫 모습을 동쪽 지평선 위로 나타낼 때였습니다. 그 시간은 '아침'(왕상 18:25,26) 즉, '동틀 때'였습니다(「로마 카톨릭의 어제와 오늘」, 랄프 E. 우드로우, 기독교문서선교회)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관련한 의식들은 여러 형태로 많은 고대 국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동쪽을 바라보도록 위치를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본의 후지산에서는 떠오르는 태양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순례자들은 산기슭을 오르는 동안 떠오르는 태양에 기도를 한다.... 종종 흰 예복을 입은 수백 명의 신토 순례자들이 그들의 거처에서 나와 떠오르는 태양에 시를 읊는 것을 볼 수 있다"(도빈스,「 세계 예배 이야기」). 고대 로마의 미트라 교도들도 태양신을 경배하기 위해 동틀 녘에 함께 만났습니다. 이스터란 이름에서 비롯된 봄의 여신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심지어 'East-er'(동쪽-사람)이란 단어 자체도 이를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동쪽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과 부활절이란 이름 그리고 봄이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대 전설에 따르면, 담무스는 죽임을 당한 뒤 지하세계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이쉬타르(세미라미스)가 애곡함으로 인하여 그는 봄에 신비하게 소생하였다고 합니다. "이쉬타르의 슬픔을 통한 담무스의 부활은 농작물의 다수확과 사람들의 다산을 보증하기 위해 매년마다 극적으로 재현되었다. 해마다 사람들은 이쉬타르의 은총과 은전을 얻기 위해 이쉬타르와 함께 담무스의 죽음을 슬퍼하고 이 신의 귀환을 축하해야 했다"(스미스,「인간과 그의 신들」). 새로운 식물이 움트고 나올 때, 고대인들은 그들의 '구세주'가 지하세계로부터 나와 겨울을 끝내고 새롭게 봄을 가져오는 것으로 믿었습니다(우르딘,「축제와 성일과 성인의 날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해마다 이교도의 봄축제 의식과 교리들을 받아드렸는데, 이에 대해 에스겔 대언자는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겔8:14)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는 단순히 자연계의 소생이나 또는 봄에 새로운 식물이 소생하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년 중 봄에 있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믿음에서 떠나 세상과 결탁한 4세기의 교회가 이교도들의 봄축제를 받아들여 기독교와 혼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영백과사전」은 이같은 혼합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큰 축제일을 기념하는 데에 있어서 이교도들의 많은 의식과 관습을 통합시켰다."(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기독교는 천주교를 말하는 것임) 이제 사순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주후 5세기에 그 당시 교회와 초대 교회를 비교하는 글을 쓰면서 마르세이유 수도원의 수사였던 카시아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순수함이 변질되기까지는 사순절을 지킨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순절 행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순절에 사십일 간 금식하는 관행 역시 바빌론 여신을 섬기는 자들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담무스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멧돼지에게 받혀 죽었다고 합니다. 히슬롭은 이 사순절의 '40'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40일의 하루는 담무스가 지상에서 살았던 한 해를 말하며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는 날'로 정해 놓은 날이다." 고대에는 40일이라는 기간을 우는 날로, 금식하는 날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날로 여겼습니다. 이는 담무스의 은총을 얻어 지하세계로부터 나와 봄을 맞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의 준수는 바빌론에서뿐만 아니라 페니키아인, 이집트인, 멕시코인, 그리고 한동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히슬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교도들에게 이 사순절은 담무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연례 대축제에 없어서는 아니 될 예비기간이 되었던 것 같다"(「두 개의 바빌론」, 도서출판 안티오크). 쿠르드족 중 사탄 숭배자들은 지금도 매년 봄에 40일 동안 금식을 합니다. 쿠르드족은 이같은 관행을 일찍이 그들을 지배했던 바빌로니아인들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멕시코인들도 봄에 40일간 계속되는 축제를 엽니다. 멕시코의 이런 관습에 대해 험볼트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합니다. "춘분이 지난 지 삼일 후부터 태양신을 위한 40일 간의 종교적인 금식이 시작된다." 이집트에서도 오시리스를 위해 40일간의 금식을 행했는데, 이것은 윌킨슨의 책「이집트인들」을 참고하면 알 수 있습니다. 봄축제와 관련된 이교도들의 여러 가지 관습이 이미 카톨릭 교회 안에 유입된 고로, 이 축제에 앞서 행해지던 이교도의 "금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단계로의 발전일 뿐이었습니다.「카톨릭백과사전」은 아주 솔직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4세기의 저술가들은 확실히 그렇다고 여길만한 주장이 없는 이 사도적 제도에 관하여 많은 관행들(예를 들면 사순절의 40일간의 금식)을 기술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교황이 공식적으로 고기나 그 밖의 다른 몇 가지 음식들을 먹지 않는 기간, 즉 "거룩한 금식기간"이라고 부르는 사순절을 준수할 것을 명령한 것은 6세기경이었습니다. 카톨릭 학자들은 이교주의로부터 받아들인 관습들이 교회 내에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 이를 시인하고 있습니다(「카톨릭 백과사전」, 제11권, p.390. '이교주의' 항목). 그러나 그들은 비록 이교도의 기원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많은 것들을 기독교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는 어떤 이교도가 이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40일간 금식을 했다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자 이와 같은 동일한 방법을 취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비록 이교도들이 동쪽을 향하여 태양을 경배하였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 역시 해 뜰 때 예배를 드릴 수 있지 않은가?" "비록 이교도들이 달걀을 사용했지만 무덤 앞에 놓인 큰돌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비록 이교도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사용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사용한다해도 무슨 상관이 있단 밀인가?" 이 모든 주장이 합리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성경은 이에 대해 안전한 지침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너는 스스로 조심하여 그들이 네 앞에서 멸망한 뒤에 그들을 따라감으로 올무에 걸려들지 말며 또 그들의 신들을 좇으며 물어 말하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리라, 하지 말라.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그와 같이 행하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주께서 미워하시는 일 곧 그분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자기 신들에게 행하되 심지어 자기 아들딸들을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음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거기에 더하거나 빼지 말지니라."(신12:30-32). 끝맺음의 말 부활절 문제 역시 크리스마스 문제와 비슷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결코 제 아이들에게 계란을 만들게 하거나 부활절 토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고, 물론 사순절이니, 재 수요일이니 하는 카톨릭 전통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이 날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주간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 보고 아이들에게 그 의미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물론 미국과 같은 경우는 이 날이 휴일이므로 집에서 쉬면서 몸과 마음에 재충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크리스천의 마음의 태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로는, 이 세상이 나에 대해 그리고 내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세상이 무어라 하든지, 이제는 내 마음에서 정한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런 명절들의 유래에 대해 살펴본 것입니다. 이제 이런 것을 알게 된 독자께서는 자신과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게 행하면 됩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이 일년 내내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 넘쳐나기를 기도 드립니다. 오직 이것만이 성탄절과 부활절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2009-05-02 09:45:56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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