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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장 30절, 성령 훼방죄(신성모독죄)는 지금 우리 시대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12장, 마가복음 3장, 누가복음 12장에는 “성령을 대적하는 죄”, 흔히 **‘성령 훼방죄’ 또는 ‘성령 모독죄’**라고 불리는 특별한 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을 문맥에서 벗어나 오용하거나 자기 주장에 끌어다 붙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오늘날 성령 모독죄를 오용하는 대표적 예   오늘날 일부 신비주의나 오순절, 신사도 운동 계열의 교회에서는 “자신들이 하는 비성경적인 행위들”―예를 들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입신, 랄랄라 방언, 진동 현상 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거나 성경적으로 지적하면, 즉시 “성령 훼방죄를 범했다”는 말로 상대를 위협하거나 정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성경이 말하는 성령 모독죄의 의미와 전혀 다릅니다. 성경 말씀은 정확하게 문맥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자신의 주장이나 경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끌어다가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행위입니다. 성령 모독죄란 무엇인가? (복음서 문맥에 따른 정의) 마태복음 12:31-32, 마가복음 3:28-30, 누가복음 12:10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을 대적하여 신성모독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3장 30절은 이 죄가 어떤 상황에서 적용된 것인지 분명히 설명해 줍니다.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부정한 영에 사로잡혔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막 3:30, 흠정역)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기적을 행하신 것을 마귀의 힘, 곧 바알세붑의 권세로 했다고 고의적으로 비방한 자들에게 적용된 것이 바로 이 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마귀의 역사로 몰았고, 성령의 권능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고의적이고 완고하게 하나님을 모독했던 것입니다. 이 죄는 지금도 적용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은 이 성령 모독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직접 모독하는 이 죄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마귀의 역사로 비난한 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계시며, 우리는 그분의 지상 사역을 직접 목격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누군가가 어떤 은사를 부정한다고 해서 “성령 훼방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은 말씀의 문맥을 무시한 오류이며, 성경을 오용하는 심각한 잘못입니다. 오직 오늘날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유일한 죄   오늘날 시대에 하나님께서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거부하는 죄” 단 하나뿐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복음의 은혜를 끝까지 거절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에게는 영원한 정죄 외에는 길이 없다.” (갈 1:8-9 요약) 결론: 성경은 성경의 문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 말씀은 자신의 신비 체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끌어다가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말씀을 임의로 왜곡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사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해 당시 문맥과 대상, 적용 범위를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모독죄”는 오늘날 누군가가 은사를 부정했다고 해서 함부로 적용할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적용은 자기 주장에 성경을 끼워 맞추는 위험한 오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모든 죄를 자백하고 돌이킬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용서하신다는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이 글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무분별한 오용으로부터 성도들이 지켜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5-05-14 10:33:42 | 관리자
말라기서 3장 10절 – “온전한 십일조”인가 “모든 십일조”인가? 구약 시대 대언자 말라기가 기록한 말라기서 3장 10절은 십일조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히 "정확히 모든 수입의 10분의 1을 드려야 복을 받는다"는 조건적 교리가 아니라 이 말씀의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직하게 모든 종류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경고와 회복의 약속입니다. 특히 이 구절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번역의 차이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1. ‘온전한 십일조’가 아닌 ‘모든 십일조’가 정확한 번역이다 말라기서 3장 10절은 개역성경에서는 “온전한 십일조”로 번역되었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과 킹제임스 흠정역에서는 **“모든 십일조(all the tithes)”**로 번역됩니다. 이는 원어 히브리어 “콜(כָּל)”의 의미가 **“전체,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 “땅의 모든 짐승”, “모든 채소”에서 쓰인 바로 그 단어입니다. 하지만 개역성경에서 "온전한"이라고 오역한 결과, 오늘날까지도 "조금이라도 빼먹지 않고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이자·장학금·부동산 차익까지 포함해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비성경적 교리가 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세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1. 매년 주님께 드리는 10%(신14:22) 2. 매년 가족들끼리 즐겁게 먹는 10%(신14:23-27) 3. 3년마다 10%를 드리는 것(신14:28; 26:12) 느헤미야는 귀환한 유다 백성이 반드시 모든 십일조를 보고에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바르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느헤미야기 13:10-13절 10 또 백성이 레위 사람들의 몫을 그들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을 내가 알게 되었으니 이는 일을 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 때문이더라. 11 그때에 내가 치리자들과 다투며 이르기를, 어찌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집을 내버려두었느냐? 하고 그들을 함께 모아 그들의 처소에 세웠더니 12 그때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즙과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보고들에 두므로 13 내가 제사장 셀레미야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들 중에서 브다야를 보고들을 맡을 재무관으로 삼고 또 맛다니야의 손자요, 삭굴의 아들인 하난을 그들 다음가는 자로 삼았으니 이는 그들이 신실한 자들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더라. 그들의 직무는 자기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었더라. 핵심 정리: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십분의 일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드려야 할 모든 종류의 십일조를 착복하지 말고 성실히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2. ‘시험하라’는 말은 유혹이 아닌 검증의 의미 흔히 다수의 목사들이 개역성경의 말라기서 3장 10절을 인용하며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이 복 주시나 안 주시나 시험해보라”고 설교하지만 말라기 3:10에서 **“시험하라”**는 말은 **tempt(유혹하다)**가 아니라 **prove(검증하다, 입증하다)**입니다.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복을 주시는 신실한 분인지 회개와 순종의 행위를 통해 확인해 보라는 뜻입니다. Matthew Poole의 주석: Matthew Poole's Commentary  And prove Me now herewith, in or by this thing - God pledges Himself to His creatures, in a way in which they themselves can verify. "If you will obey, I will supply all your needs; if not, I will continue your dearth." By whatever laws God orders the material creation, He gave them a test, of the completion of which they themselves could judge, of which they themselves must have judged. They had been afflicted with years of want. God promises them years of plenty, on a condition which He names. What would men think now, if anyone had, in God's name, promised that such or such a disease, which injured our crops or our cattle, should come at once to an end, if any one of God's laws should be kept? We should have been held as finatics, and rightly, for we had no commission of God. God authenticates those by whom He speaks; He promises, who alone can perform.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그들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약속하신다. 순종하면 공급이 있고, 거절하면 결핍이 따른다. 하나님은 시험당하실 분이 아니라 스스로 그 약속을 입증하시는 분이다.” 핵심 정리: 말라기서 3장 10절의 “시험”은 도전하거나 의심하라는 뜻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을 따름으로써 그분의 신심하심을 검증해 보라는 요청입니다. 3. 신약 시대에도 십일조는 명령일까?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레위 지파와 제사장 제도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심으로써 제사장 제도 자체가 폐지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구약의 십일조 역시 신약 시대 교회 성도들의 강제 의무가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신약시대 헌금의 원리는 고린도후서 9:7에 있습니다. “각 사람이 마음속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오늘날 신약 성도는 억지로 구약의 신정국가 하의 조세 개념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드려야 하며 이를 위해 금액의 비율보다 동기와 믿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이 완성되었고(마 5:17), 더 이상 제사장도, 레위인도 필요 없습니다.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도 마찬가지로 폐지되었습니다. 신약 성도는 헌금을 억지로, 율법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고후 9:7). 물론 모든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는 더 이상 구약의 율법 아래 있는 성도에게 적용되는 명령이 아닙니다. 다만 구약보다 나은 신약 시대에 사는 성도들은 주님의 일을 위해 적어도 10%는 하나님께 드린다는 자세로 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십일조는 더 이상 신약 성경의 명령이 아니지만, 십자가 은혜 아래 사는 우리는 구약 성도들보다 더 넉넉하게 드릴 책임과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의 은혜가 그들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결론: 정확한 번역이 올바른 교리를 이끈다 말라기서 3 장10절은 단순히 "십일조를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넘어서,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지적하고, 그들에게 모든 종류의 십일조를 바르게 드림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개역성경의 **“온전한”**은 원어에 맞지 않으며 **“모든”**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시험하라”**는 “검증하라”, **“입증하라”**는 의미입니다.
2025-05-13 17:23:46 | 관리자
말라기서 2장 13-15절 하나님의 법칙: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해야 한다. 이혼은 안 된다. 이혼은 아내를 배신하는 것이다. 13 너희가 눈물과 울음과 부르짖음으로 주의 제단을 덮으면서 다시 이런 일을 행하였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다시는 헌물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너희 손에서 선한 뜻으로 받지도 아니하시느니라. 14  그럼에도 너희는 말하기를, 어찌된 까닭이니이까? 하는도다. 그 까닭은 주께서 너와 네가 젊을 때 취한 아내 사이의 증인이 되셨기 때문이라. 네가 그녀를 대적하여 배신하였으나 그녀는 여전히 네 짝이요 네 언약의 아내니라. 15 그분께는 영의 여분이 있었지만 그분께서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을 따르는 씨를 구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너희 영을 조심하고 아무도 어려서 취한 아내를 대적하여 배신하지 말지니라. 16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나는 아내 버리는 것을 미워하노라. 사람이 자기 옷으로 폭력을 덮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영을 조심하여 배신하지 말라. 군대들의 주가 말하노라, 하시느니라. 영의 여분이 있다는 말:  말라기 2장 14–15절: '영의 여분'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결혼 설계 말라기 2장은 하나님의 결혼 제도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특히 14–15절은 하나님께서 왜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을 결혼의 단위로 정하셨는지에 대한 신적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처럼 번역이 모호하면 이 구절의 깊은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번역 "15 그분께는 영의 여분이 있었지만 그분께서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을 따르는 씨를 구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너희 영을 조심하고 아무도 어려서 취한 아내를 대적하여 배신하지 말지니라." (말라기 2:15, 흠정역) 이 구절에서 핵심은 "영의 여분"(residue of the spirit)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단지 한 여인만을 주셨지만, 그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심 속에서 의도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정하신 것입니다. Matthew Poole의 해석 매튜 풀(Matthew Poole)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능력으로 숨을 불어 넣어 더 많은 남자와 여자를 지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이는 그분의 지혜와 거룩하심 때문이며, 결혼은 본래부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세대를 이루는 것으로 설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씨,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부모의 본을 따라 자라는 자녀들을 원하셨다. 이는 일부일처제 안에서만 가능하다. John Gill의 해석 존 길(John Gill)은 "영의 여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숨을 부여하는 자이시며, 원하셨다면 아담을 위해 더 많은 여자를 지을 수 있었고 그 여자들에게도 다 생명의 영(spirit)을 주실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에게 단지 한 여인만을 주셨고, 그분의 뜻에 따라 단일 부부 구조를 정하신 것이다. 개역성경은 왜 이해가 어려운가? 개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여기서 “유여하다”는 단어는 현대 독자들에게 그 의미가 모호하며, 하나님의 전능성과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또한 이어지는 구절의 논리도 흐려집니다. 이처럼 명확한 주제를 담고 있는 본문이 모호한 번역으로 인해 흐릿해지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정확한 번역이 중요한가? 성경은 한 단어, 한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교리를 전달합니다. 같은 단어는 같은 의미로, 일관되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residue of the spirit”(영의 여분)이라는 표현은 단지 언어적 장식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부일처제를 택하신 근본적 신학적 근거를 보여 줍니다. 또한 이 구절은 말라기 2장 전체 문맥에서 이혼에 대한 경고와도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내를 버리는 것을 미워하노라.”(2:16)고 분명히 선언하셨으며, 젊은 아내를 배신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윤리적 요청이 아니라, 창세기의 창조 질서와 직결된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일부일처제를 통해 경건한 씨를 구하신다 말라기 2장 14–15절은 단순한 윤리 강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결혼 설계와 다음 세대를 위한 거룩한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서 취한 아내를 대적하여 배신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그 이유로 “하나님을 따르는 씨”를 얻기 위함이라고 밝히십니다. 이 중요한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정확한 성경 번역이 필요합니다. 킹제임스 흠정역은 원어의 의미를 그대로 살려 이 진리를 드러내 주지만, 개역성경은 표현의 모호함으로 그 의미를 흐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선, 바르게 번역된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2025-05-13 10:13:08 | 관리자
창세기 38장, 유다와 다말 사건의 오해   창세가에는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의 음행 사건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말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시아버지인 유다와 간음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악한 일을 저질렀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돌려주신 것이지 다말이 ‘아, 내가 메시아를 내야 되겠구나. 그러기 위해 시아버지와 음행의 결혼을 해야 되겠다.’라고 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런 성경 해석은 이단들이 범하는 오류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결혼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한 마귀의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악한 일들 속에서도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악을 행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돌려 주셨지, 그들이 행한 악한 일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유다와 다말 사건, 하나님의 뜻인가 인간의 죄악인가? 창세기 38장에는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벌어진 부도덕한 사건입니다. 다말은 창녀로 가장하여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를 맺고 쌍둥이를 낳게 되며, 그 중 한 아들인 베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마 1:3). 이 이야기를 두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다말은 메시아의 계보를 이으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유다와 의도적으로 간음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1. 죄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다말이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내시기 위한 계획을 인지하고 의도적으로 유다와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단지 시댁으로부터 의무를 이행받지 못한 상황에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 한 것입니다. 유다는 아들 셋 중 첫째와 둘째가 죽자 셋째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고, 다말은 자신이 후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유다를 이용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다말의 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다의 책임 회피와 부정직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유다 자신도 “그녀가 나보다 더 의로웠도다.”(창 38:26)라고 말했지, 그녀가 거룩하게 행동했다고 칭찬하지는 않았습니다. 2. 하나님은 죄를 통해서도 선을 이루실 수 있으나, 죄 자체를 정당화하시지 않는다 유다와 다말의 음행은 분명한 죄이며, 하나님의 결혼 질서를 어긴 행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런 타락한 인간의 역사 속에서도 자신의 구속 계획을 흔들림 없이 이뤄 가십니다.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태어난 베레스는 이후 다윗 왕의 조상이 되었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다는 사실이, 악을 행할 정당성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선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악을 행하자, 하고 말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처럼 우리가 중상모략으로 비방을 받으며 이처럼 어떤 자들은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확언하니) 그들이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로마서 3:8, 킹제임스 흠정역 이 구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선을 위해서라면 악을 행해도 괜찮다”라는 생각은 성경이 정죄하는 사탄적 사고방식입니다. 3. 죄는 죄로 심판받고,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대로 찬양받는다 유다와 다말의 사건은 마귀가 가정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려 했던 일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안에서도 자신의 섭리를 따라 선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두 가지를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첫째, 죄는 정당화될 수 없다. 다말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절망적인 선택이었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실수 가운데서도 자신의 구속 계획을 반드시 이루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입니다. 4. 결론: 말씀은 죄를 숨기지 않고 죄를 결코 미화하지 않는다   성경은 위선적이지 않습니다. 유다의 타락, 다말의 음행을 있는 그대로 기록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죄를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과 순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죄는 반드시 회개와 용서를 통해 해결되어야 하며,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2025-05-12 18:02:31 | 관리자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이유는 정당했는가? – 마태복음 5장 22절과 "까닭 없이"의 중요성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며,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22, 개역성경)   이 구절만을 놓고 보면, 형제에게 분노하거나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심판과 지옥에 처하게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의 문맥과 예수님의 실제 행동을 비교해 보면 도리어 의문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사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강하게 책망하시고, 심지어는 **‘어리석은 자들’, ‘눈먼 자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질책하시는 장면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마 23:17, 눅 11:40 등). 성전에서는 매매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시며 분노하신 일도 있었습니다(마 21:12). 이처럼 실제 예수님의 행적은 마치 산상수훈의 원칙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 번역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가 빠졌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킹제임스 흠정역이 보여 주는 정확한 번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까닭 없이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고...” (마태복음 5:22, 킹제임스 흠정역)   여기서 보듯이 킹제임스 성경은 “without a cause”(헬라어 εἰκῇ, ‘까닭 없이’)라는 핵심 표현을 분명히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정당한 이유 없이 분노하는 것이 문제이지, 모든 분노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꾸짖으셨을 때, 그것은 거룩한 의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수호하시기 위해 행동하신 것이지, 감정적으로 폭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을 받는다”와 “심판의 위험에 처한다”는 다르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행위의 결과를 단정하는 표현과 그렇지 않은 표현의 차이입니다. 개역성경: “심판을 받게 되고”, “지옥에 들어가게 되리라” 흠정역: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고”,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   이처럼 **‘위험에 처한다’(in danger of)**는 원문 표현은 단정이 아닌 경고입니다. 개역성경은 이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결과를 확정짓는 듯한 뉘앙스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책하신 것은 단지 ‘화를 내신 것’이 아니라, 죄를 책망하신 의로운 분노였습니다. 그분 안에는 어떤 죄도 없으며, 그분의 말씀과 행동은 모두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죄들을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는데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요일 3:5,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정합성과 번역의 신중함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까닭 없이”라는 단어가 생략되면, 성경 전체의 정합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 자신이 책망하신 일이 모순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포함한 킹제임스 성경을 기준으로 보면, 성경은 앞뒤가 정확히 들어맞으며 하나의 완전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러나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나이다’ 하는 말씀이 성취되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5:25, 킹제임스 흠정역)   결론: 바른 성경 번역은 예수님의 완전성을 지킨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며, 성경 말씀에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나 번역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가 빠지면 신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까닭 없이'라는 단어가 생략된 상태에서 이 구절을 해석하면, 예수님도 죄인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정확한 번역, 보존된 말씀은 이런 혼란을 막아 줍니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에 충실하게 번역되었습니다. 말씀은 온전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을 변개하지 않고, 정확히 전달받고 믿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시편 12:6, 킹제임스 흠정역)
2025-05-12 15:22:15 | 관리자
영인가, 심령인가? 마태복음 5장 3절 같은 단어, 다른 번역? – '영(Spirit)'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성경의 뜻이 달라진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말씀이며, 단어 하나하나에는 명확한 의미와 교리적 무게가 담겨 있다. 그런데 번역 과정에서 동일한 원어 단어를 서로 다르게 옮기면, 성경의 의미가 흐려지거나 왜곡될 수 있다. 영어 성경에 등장하는 'Spirit' 영어 성경에서 **‘spirit’**이라는 단어는 단수로 505회, 복수로 46회 사용된다. 신약성경의 경우 이는 대부분 그리스어 pneuma를 번역한 것으로, 신약 성경에서 ‘영’을 의미한다. 성경적으로 이 ‘영’은 인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영, 혼, 몸—중 하나로서, 특히 하나님을 인식하고 교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살전 5:23). 그러나 ‘심령’으로 번역된 50개 절 개역성경과 개역개정 등은 여러 곳에서 ‘spirit’을 정확하게 ‘영’으로 번역했지만, 문제는 무려 **50개 절 이상에서 ‘spirit’을 ‘심령’**으로 바꾸어 번역했다는 점이다. 국어사전에서도 명확히 구분되는 두 단어 영: 사람의 몸에 있으면서 몸을 거느리고 정신을 다스리는 비물질적인 것. (죽어도 남는 존재) 심령: 정신의 근원이 되는 의식의 본바탕, 혹은 마음의 주체 즉, **‘심령’은 ‘정신적 개념’**에 가깝고, ‘영’은 성경적 존재론에 해당하는 실체적 개념이다. 성경의 ‘영’은 단지 심리적인 상태나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영적인 것을 인식하는 기능이다(요 4:24, 롬 8:16). 번역의 차이로 인한 신학적 왜곡 디모데후서 4장 22절을 보자. 개역: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흠정역(KJV):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영과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는 영역은 단순한 ‘감정’이나 ‘마음’이 아니라, 인간의 **영(spirit)**이다. 이것은 성령님이 일하시는 핵심 공간이며, 단어 하나의 차이가 하나님의 임재의 위치를 왜곡할 수 있다. 산상수훈에서의 대표적 예 마태복음 5장 3절은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이다. KJV 흠정역: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개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공동번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영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하고 겸손히 나아가는 태도이다. 그런데 이를 ‘심령’이나 ‘마음’으로 바꾸면, 단지 기분이나 심리 상태처럼 들리게 되어, 예수님의 참된 의도를 흐리게 만든다. 일관된 번역이 왜 중요한가? 성경을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단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번역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는 성경 내에서 ‘영’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 성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배워갈 수 있다. 만약 '영'을 ‘심령’, ‘마음’, ‘정신’ 등으로 상황에 따라 제각기 번역하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 체계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번역자의 심리적 해석에 종속되는 일이 벌어진다. 결론: 영은 ‘영’이다 – 번역은 정확하고 일관되어야 한다 ‘영’은 성경적 존재이며, 하나님의 영과 교제할 수 있는 영적 기관이다. 이 단어를 ‘심령’이나 ‘마음’으로 바꾸면, 성경의 교리가 흐려지고,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사역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성경 번역은 단순히 의미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손상하지 않는 정확성과 일관성이 요구되는 신성한 작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왜곡되어선 안 되며, 단어 하나로도 신학과 믿음이 달라질 수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2025-05-10 22:07:39 | 관리자
성령 침례는 불 침례가 아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 – 성경적으로 명확히 구분해야 할 두 침례의 차이 오늘날 일부 교회나 집회에서는 “불 받아야 한다!”는 구호가 유행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성경적으로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령 침례와 불 침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며, 심지어 그 결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침례의 개념부터 마태복음 3장, 오순절 사건,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불의 상징까지 함께 살펴본다. 1. 성경적 침례는 ‘잠기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침례로 번역된 헬라어는 ‘밥티조(baptizo)’이며 이는 ‘담그다’, ‘잠기다’는 뜻이다. 단순히 물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물속에 들어가는 행위를 말한다. 요한복음 3:23 – 침례는 많은 물이 있어야 가능하다. 사도행전 8:36–39 – 침례는 ‘물 속으로’ 내려갔다가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세례(灑禮, 뿌리는 행위)**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2. 마태복음 3:11–12 – 성령과 불 침례는 서로 다른 것이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 (마태복음 3:11, 흠정역) 이 구절은 흔히 오해된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 침례’와 ‘불 침례’를 하나의 축복된 경험으로 보지만, 문맥은 전혀 다르게 말한다. 3:11 – 예수님은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성령 침례와 불 침례를 주신다. 3:12 – 알곡은 곳간에, 껍질(믿지 않는 자)은 꺼지지 않는 불로 태워진다. 문맥을 보면 성령 침례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불 침례는 심판받을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 둘은 절대 동일하지 않다. 3. 오순절 사건(행 2장)은 불 침례가 아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할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각 사람 위에 나타났다. 이것은 실제 불이 내려온 것이 아니라 불을 닮은 시각적 현상이다. 행 2:3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이라고 하였으며, 성경 어디에도 이 날 그들이 불에 잠겼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성령 강림의 표적이지, 불 침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4. 불은 대부분 심판과 저주의 상징이다 성경 전체에서 ‘불(fire)’은 500회 이상 언급되며, 대다수가 하나님의 심판, 저주, 멸망과 관련되어 있다. 창세기 19:24 –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히브리서 12:29 –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요한계시록 20:15 – 불못에 던져지는 영혼들 따라서 마태복음 3장의 불 침례는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상징한다. 5. 침례는 항상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침례란 단어는 일관되게 어떤 매개체(물, 성령, 불) 안에 완전히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물 침례: 구원의 상징 성령 침례: 몸 된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고전 12:13) 불 침례: 꺼지지 않는 지옥 불 속에 던져지는 것(마 3:12) 성경은 불 침례가 긍정적인 체험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에게 내리는 영원한 심판임을 명백하게 말한다. 결론 – "불 받아야 한다"는 외침은 위험한 오해다 많은 이들이 성령 충만을 강조하다 보니 “불 받자!”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불 침례는 절대 성령 충만의 상징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불 침례는 저주, 심판, 지옥과 연결된다. 따라서 믿는 성도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올바로 분별하고, 성령 침례를 사모하되 불 침례를 사모해서는 안 된다. 성령 침례와 불 침례는 하늘과 지옥처럼 다르다.
2025-05-10 10:31:25 | 관리자
미가 5:2 – 예수님은 기원이 있는가, 아니면 영원부터 계신가?   흠정역(KJV):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Micah 5:2) 개역성경: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NIV: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NIV, 개역, 가톨릭 성경 등 다수의 현대역본들은 ‘origin’, ‘근본’, ‘기원’, ‘뿌리’ 등으로 번역함으로써 예수님이 어느 한 시점에서부터 존재하게 된 창조물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을 제한된 시간 속의 존재로 격하시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심각한 왜곡이다. 하나님은 기원이 없는 ‘스스로 계신 분’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애굽기 3:14, 흠정역)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며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시작된 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런 영원자존자이시다. ‘origin’이라는 단어가 왜 위험한가? ‘origin’은 시간적 시작점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돈의 기원은 조개 껍데기다”라는 식의 표현처럼 무엇이든 ‘기원’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 속에서 생겨난 창조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창조물의 기원이시며,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존재한다: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골 1:16–17, 흠정역) 빌립보서 2:6 – 예수님의 신성을 삭제하는 번역들   흠정역: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NIV: “Who, being in very nature God,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grasped…” 개역과 NIV는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를 포기하거나, 감히 넘보지 않았던 창조물처럼 표현한다. 반면 흠정역과 KJV는 예수님이 본래부터 하나님의 형체로 계셨으며, 하나님과의 동등함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고 선언한다. 왜곡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을 기원이 있는 존재, 즉 창조물로 본 것은 초대 교회 이단자 **오리겐(Origen)**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닌 2등급 신적 존재로 격하시켰으며, 이런 사상이 천주교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NIV, NASB 등 현대역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심지어 여호와의 증인 역시 동일한 사상을 전파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닌 창조된 존재이며, 성령은 에너지다.”라는 그들의 주장은 결국 많은 현대 번역자들의 왜곡된 신학과 뿌리를 같이한다. 결론: 예수님은 ‘기원’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계셨고, 그분은 말씀이시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요 1:1, 흠정역)   그분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 모든 것보다 먼저 계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신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올바른 성경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성경, 번역을 통해 교리를 훼손하지 않는 성경은 **흠정역(KJV 계열의 성경)**이다. 예수님은 기원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시는 주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이시며…” (히브리서 1:3, 흠정역) 이 진리를 흐리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사본에 기반한 바른 성경을 사용해야 한다.
2025-05-10 09:41:48 | 관리자
임마누엘의 뜻 마태복음 1장 23절   임마누엘의 뜻을 바꾸면,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게 된다 – 원어가 같더라도, 번역이 다르면 진리가 달라진다 ‘임마누엘’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표현이다. 특히 성탄절 시즌이면 흔히 들리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 (우리와 함께), “엘”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예수님의 오심과 관련된 가장 위대한 신학 선언 중 하나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 번역 가운데 일부는 이 단어의 의미를 가볍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마태복음 1:23 – 결정적 차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개역성경) 처음 보면 큰 문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표현은 임마누엘이 누구인지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놓치고 있다. 흠정역(킹제임스 기반)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마태복음 1:23, 흠정역) 이 차이는 단순한 문장 구조의 차이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표현은, 마치 하나님께서 따로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일반적인 약속처럼 들린다. 그러나 흠정역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하면,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강력한 진술이 된다. 원어는 동일하다 – 차이는 ‘번역자’의 신학에 있다 히브리어 원어는 동일하다: עִמָּנוּ אֵל (임마누 엘) =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역성경을 포함한 많은 현대역본들은 이 표현을 마치 하나님이 곁에 계신 것처럼 약하게 번역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바로 천주교 소수 사본의 영향과,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려는 번역 방향 때문이다. 이런 번역은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핵심 근거인데, 그 뜻이 흐려지면 예수님의 신성을 뒷받침하기 어려워진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표현은 구약의 일반적인 하나님의 임재(出애굽기, 여호수아 등)와 비슷하게 들린다. 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진리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결론: 번역은 신학이다 원어가 같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같은 원어를 어떤 관점에서 번역하느냐에 따라 복음 전체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개역성경은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며, 임마누엘을 단지 하나님의 일반적인 위로 수준으로 만들고 말았다. 흠정역은 그 이름이 선언하는 바를 명확하게 번역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위대한 진리를 드러낸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 이것이 임마누엘이다. – 이것이 복음이다.
2025-05-10 09:28:10 | 관리자
기도와 금식을 지운 성경들 마가복음 9장 29절 – 천주교 소수 사본에 기반한 번역의 위험성   성경은 영적 싸움과 성도의 능력을 기도와 금식을 통해 강화하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종류는 아무것도, 기도와 금식 외에는 나올 수 없느니라.” (마가복음 9:29, 흠정역)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경들이 ‘금식’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 희석시켰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번역 실수가 아니라, 천주교 소수 사본(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의 영향을 받은 구조적 문제라는 데 있다.   주요 본문 비교 – 삭제된 금식과 기도 마가복음 13:33 흠정역: “주의하라. 깨어 기도하라. 그때가 언제인지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개역 / NIV: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기도하라’(pray)가 삭제됨 → 깨어 있음의 방향을 잃음   사도행전 10:30 흠정역: “이 시간까지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는데…” 개역 / NIV: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 금식이 삭제되어 고넬료의 경건한 행위가 약화됨   고린도전서 7:5 흠정역: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개역 / NIV: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금식’이 사라지면서 부부의 영적 훈련 목적이 반쪽으로 축소됨   고린도후서 6:5 흠정역: “깨어 있음과 금식 가운데서…” 개역 / NIV: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금식은 단순히 음식을 못 먹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자기 정욕을 누르는 영적 행위임   이 삭제의 배후: 천주교 소수 사본 이러한 ‘기도’와 ‘금식’의 연이은 삭제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개역성경과 NIV를 비롯한 현대역본들은 대부분 천주교 주도 아래 편집된 소수 사본을 따른다.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은 로마 가톨릭 교리 정립과 전례 중심의 사본 체계를 따르며 회개, 보혈, 기도, 금식과 관련된 수많은 본문을 축소 또는 삭제하였다. 이 사본들을 필사한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경고하신 위선자들과 같은 자들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없음’으로 바꾸는 죄를 범했다.   왜 금식이 중요한가? 금식은 단순한 식사 중단이 아니다. 영적 전쟁의 준비이며 기도의 집중을 위한 결단이며 자아를 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행위다. 성경 속 믿음의 사람들은 위기의 때, 결정의 때, 회개의 때마다 금식했다. 그런데 이런 강력한 영적 훈련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 바꿔버린 성경은 성도들에게서 기도의 능력, 경건의 깊이, 순종의 실천을 모두 빼앗아 간다.   결론: 기도와 금식을 지키는 성경은 하나다 **흠정역(킹제임스 성경)**은 수천 개의 **다수 사본(Majority Text)**에 근거하여 금식과 기도의 구절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개역성경, NIV, NASB, ESV 등은 천주교 소수 사본을 따라 구절 삭제, 의미 왜곡, 신앙 약화를 불러왔다. “이 종류는 아무것도, 기도와 금식 외에는 나올 수 없느니라.” (막 9:29, 흠정역) 이 말씀처럼, 기도와 금식을 부인하는 성경은 결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2025-05-08 11:04:38 | 관리자
겨자씨만큼만 믿으면 된다? – 믿음이 ‘적은 것’인가, ‘없는 것’인가의 번역 전쟁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왜 그들이 실패했는지 설명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설명을 성경마다 전혀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성경은 “믿음이 적어서”, 어떤 성경은 “믿음이 없어서”, 심지어 어떤 번역은 **“너무 작아서”**라고 한다. 그 결과, 독자들은 믿음이 조금만 있으면 된다는 오해에 빠지게 되고, 예수님의 본래 의도가 완전히 왜곡되고 만다.   마태복음 17:20 – 번역 비교 흠정역 (킹제임스 기반, 다수사본)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니라…” (마 17:20) ➤ 이 말씀의 핵심은 ‘믿음 없음’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겨자씨만큼의 믿음조차 없었다고 지적하신다.   개역성경: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 ‘믿음이 적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의도인 ‘믿음 없음’과 거리가 멀다. 이는 구원 신학과 성령의 권세 사용에 대한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   NIV: “Because you have so little faith.” ➤ NIV는 ‘너무 적은 믿음’으로 표현하며 **사이즈(크기)**의 문제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믿음 유무’**이지, 믿음의 크기가 아니다.   문맥으로 보면 분명해진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산더러 옮기라 해도 옮겼을 것이며, 너희가 못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마 17:20, 흠정역) 이 말씀은 제자들이 겨자씨만큼의 믿음도 없었다는 전제하에 나온 것이다. 믿음이 적은 게 아니라, 전혀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오역의 뿌리는? → 소수 사본의 영향 개역성경과 NIV는 모두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천주교 중심의 소수 사본(Alexandrian Text)**을 기반으로 한다. 이 사본들은 많은 경우 본문을 축소하거나 의미를 왜곡하며, 신약의 믿음, 회개, 구원, 권능, 왕국 등 핵심 교리에서 묽은 표현 또는 중립적인 어휘로 대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책망이 흐려지고, 신자의 영적 책임이 모호해지며, 복음의 힘이 약화된다.   다수 사본(흠정역, KJV)은 어떻게 다르게 말하는가? 흠정역/KJV는 다수 사본(Majority Text)을 따르며 예수님의 말씀을 단호하고 명확하게 보존한다. “Because of your unbelief.” (KJV) → *“너희가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이 정확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직접적으로 지적하셨음을 드러내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참된 믿음의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   결론: 믿음은 ‘조금’이 아니라, ‘분명히’ 있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조금 있으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겨자씨처럼 작아도 진짜 믿음이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나 아예 없는 믿음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   예수님의 요점은 명확하다: “너희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너희가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흠정역) 믿음 없는 자를 위한 주님의 말씀, 그 뜻을 바르게 전하려면 정확한 번역, 정확한 사본이 필요하다.
2025-05-08 10:59:35 | 관리자
마태복음 23:14 – 삭제된 정죄의 말씀   ● 흠정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위장하려고 길게 기도하니 그러므로 너희가 더 큰 정죄를 받으리라.” (마 23:14, 흠정역)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거짓 서기관들과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하신 강력한 책망이다. 그들은 외식과 기만으로 백성들을 속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없음)   예수님의 정죄의 말씀이 통째로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씀을 필사하던 서기관들—특히 천주교 전통의 소수사본을 기록한 자들—이 고의로 삭제한 결과이다.   말씀을 지운 자들: 천주교 소수사본의 서기관들 오늘날 개역성경, NIV, NASB, ESV 등 대부분의 현대역본들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천주교 계열의 소수 사본(Alexandrian text)**을 기반으로 한다. 이 사본들은 로마 가톨릭의 교리적 필요에 따라 정리된 사본으로, 수많은 구절이 삭제되거나 축소되어 있음 이 사본을 필사한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회 권위와 전통을 우선시했고, 불편한 진리나 자신들을 정죄하는 구절들을 ‘없음’으로 대체하였다 그 결과: 마태복음 23:14, 마가복음 15:28, 사도행전 8:37 등 복음의 핵심을 이루는 수많은 구절이 오늘날 성경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버젓이 “없음”이라는 표시가 들어가 있다   예수님께서 직접 경고하신 서기관들의 죄 예수님은 이런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하셨다. “화가 있을지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마 23장 전체, 흠정역) 예수님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며, 속으로는 말씀을 가리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독사의 자식들이요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에서 바로 이 말씀마저 지워져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심각한 경고인가?   결론: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는 것은 사본 선택에서 시작된다 ‘없음’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존재하는 한, 그 성경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 **소수 사본(바티칸, 시내 사본 등)**은 이미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서기관들의 손을 거쳐 말씀을 삭제한 불순한 기록물이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수천 개의 일치된 사본, 즉 **다수 사본(Majority Text)**을 기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 없이, 축소 없이, 왜곡 없이 보존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대언들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에서 그의 부분을 제거하시리라.” (요한계시록 22:19, 흠정역)   하나님의 말씀을 지우는 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불러올 수 있는 심각한 범죄이다.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지키시고, 보존하신다,
2025-05-08 10:51:52 | 관리자
‘종교심’인가, 미신인가? 사도행전 17장 22절   원어를 정확히 번역해야 바른 성경이 된다 – ‘종교심’으로 미신을 포장하는 현대역본의 왜곡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번역할 때는, 단어 하나도 원어의 뜻에 충실하게, 왜곡 없이 정확하게 옮겨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현대 성경 역본들(개역성경, NIV, NASB 등)은 원어의 의미를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된 해석을 삽입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흐리고, 교리적 오류와 종교적 혼합을 조장하고 있다.   예시: 사도행전 17장 22절 – 바울의 말이 칭찬으로 바뀌다?   ●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 기반) “너희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일에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 (사도행전 17:22) 바울은 아레오바고에 서서 우상 숭배에 빠진 아테네 사람들을 **‘superstitious’(미신적)**이라고 강하게 책망했다. 원어는 **δείσιδαιμονέστερους (deisidaimonesterous)**로, ‘대단히 미신적인’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가진 단어이며, ‘daimon’(δαιμον) = 마귀와도 어원이 연결된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한다: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이 번역은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 비판이 아니라, 마치 경건한 종교적 열심을 칭찬하는 말처럼 보인다. 이것은 본문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한 오역이다.   원어 무시 =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는 일 문제는 단순히 표현의 뉘앙스 차이가 아니다. 원어 성경에는 'religious'나 'sebomai', 'threskeia' 같은 단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개역성경은 이를 자의적으로 ‘종교심’이라는 말로 대체했다. 이런 식의 오역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우상 숭배를 미신이라 하지 않고, 종교심으로 미화 책망을 칭찬으로 둔갑 구분되어야 할 참된 경건과 거짓 종교가 혼합됨 결국 이러한 번역은 진리를 흐리는 거짓 종교적 정서를 성도들 안에 심어주고, 한국 교회의 형식적 신앙, 미신적 열심, 영적 혼합주의의 토양이 된다.   이 모든 오역의 뿌리는 ‘소수 사본’에 있다 개역성경과 현대역본(NIV, NASB, ESV 등)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천주교 소수 사본을 근거로 번역되었다. 이 사본들은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문서로, 본문 축소, 왜곡, 교리적 조정이 다수 발견된다. 신약의 수많은 구절이 생략되거나 왜곡되며, ‘회개’, ‘예수 그리스도’, ‘보혈’, ‘믿음’, ‘왕국’ 등의 표현들이 대거 삭제 또는 변경되어 있다. 즉,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본의 문제다. 잘못된 사본을 따르는 번역은, 아무리 정교해 보여도 거짓을 전하게 된다.   바른 성경은 다수 사본에 근거한 킹제임스 성경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다수 사본(Majority Text), 즉 초대 교회부터 보존되어 내려온 공인본문을 따르며 모든 원어 단어를 정확하고 일관되게 번역한다. “너희가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 (행 17:22, 흠정역) 바울의 의도는 아테네 사람들의 우상 숭배를 정면으로 지적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역본들은 이 구절을 미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증언하지 못하게 만든다.   결론: 정확한 번역은 신앙을 지키는 울타리다 원어를 무시한 번역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다. 천주교 소수 사본에 기반한 번역은 우상 숭배와 종교 혼합을 조장한다. 성경을 올바로 믿으려면, 정확한 사본, 정확한 번역, 그리고 성령의 조명 아래 있는 바른 성경, **흠정역(KJV)**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는 이시니라." (잠언 30:5, 흠정역)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번역되어야 한다.
2025-05-08 10:39:08 | 관리자
‘없음’이라는 말이 성경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 마가복음 15장 28절 – 하나님의 대언을 지워버린 소수 사본의 폐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모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며, 그분의 대언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들도 문자 그대로 성취하신다. “이로써, 그는 범법자들과 함께 계수되었도다, 하고 말하는 성경기록이 성취되었더라.” (마가복음 15:28, 흠정역) 이 구절은 이사야 53장 12절의 예언이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을 통해 정확히 성취되었음을 증언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아예 삭제하고, 대신 ‘없음’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없음’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있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표현 중 하나가 바로 본문 자체가 빠지고, 그 자리에 ‘없음’이라고 표시해 놓는 것이다. 개역성경: “(없음)” NIV, NASB 등 현대 역본: 해당 구절 자체를 생략 이런 삭제는 단순한 번역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과 그 성취를 부인하는 행위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 사본 문제 이 문제의 핵심은 바로 사본(Text)의 선택에 있다. 개역성경, NIV, NASB 등 대부분의 현대역본은 →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천주교 중심의 소수 사본을 따르고 있다. → 이 사본들에는 마가복음 15:28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 **다수 사본(Majority Text, 공인본문)**을 기반으로 하며 → 마가복음 15:28을 포함한 모든 예언 성취 구절이 정확히 보존되어 있다. 이런 삭제는 초대 교회 이후 “나쁜 서기관들”이 의도적으로 일부 본문을 제거한 결과이며, 이는 성경의 권위와 예수님의 대언 성취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왜 이 구절이 중요한가? 마가복음 15:28은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내용을 예수님의 실제 죽음 장면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구속사적 증거다. “그가 범법자들과 함께 계수되었느니라.” (이사야 53:12) 이 예언이 십자가에서 강도들과 함께 죽으신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마가는 성경으로서 분명히 증언한다. 그런데 이것이 삭제되면, 성경은 예언이 실현되지 않은 책이 되어버리고 만다.   결론: ‘없음’이 있는 성경은 좋지 않은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삭제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예언의 성취를 보여 주는 말씀은 더욱 그래야 한다. ‘없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군림하려 할 때 생긴다. ‘없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우고, 인간의 판단을 덧씌운 결과다. ‘없음’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처럼 보이게 만든다. 성경에 없어야 할 것은 ‘없음’이라는 단어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성경은? **흠정역(킹제임스 성경)**은 → 하나님의 대언과 성취를 정확히 기록한 성경이다. → 다수 사본에 근거하여 말씀의 보존을 신실하게 유지한다.   **개역성경, 현대역본들(NIV, NASB 등)**은 → 소수 사본에 따라 구절을 삭제하거나 왜곡하며 → 성경의 예언과 역사적 성취를 흐려 놓는다. “기록된바… 성경기록이 성취되었더라.” (막 15:28, 흠정역)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되었고, 성취되며, 보존된다는 영원한 진리를 선언한다.
2025-05-08 10:33:28 | 관리자
선지자인가, 대언자들인가? 마가복음 1장 2절   성경에 오류가 있는가, 없는가? – 번역과 사본의 문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흐려질 수 있는가?   성경은 단순한 고대 문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영감으로 주신 말씀이다. 따라서 그 안에는 오류나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7, 흠정역)   하지만 오늘날 많은 현대 성경 번역본들은, 사본 자체의 문제와 번역상의 부주의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마가복음 1:2–3 – 실제 사례 분석 ● 개역성경: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이 표현은 한 구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구약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 말라기 3:1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이사야 40:3 하지만 개역성경은 이 두 구절 모두를 “이사야의 글”로 묶어버림으로써 성경 안에 명백한 오류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흠정역은 정확하게 번역한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내 얼굴 앞에 보내노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흠정역은 ‘기록된 바’라는 일반적 인용 표현을 사용해 말라기와 이사야의 예언을 모두 아우르며 정확한 출처 혼동 없이 전달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오류는 없으며 오히려 예언의 정확성과 복음의 일관성이 드러난다.   문제의 원인: 천주교 소수 사본 이런 번역상의 문제는 단순한 번역자의 실수만이 아니라, 어떤 사본을 기준으로 삼았는가 하는 사본 선택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개역성경, NIV, NASB 등 현대역본들은 → 바티칸 사본, 시내(시나이) 사본 등 로마 가톨릭이 주도한 소수 사본 계열을 따름 → 본문 자체가 축약, 삭제, 문맥 왜곡된 구절이 다수 포함됨 이 사본들은 1800년 동안 교회가 써 오던 전통 본문에서 벗어나 있으며, 종종 ‘기록된 바’를 ‘이사야의 글에’로 바꾸는 등의 수정 흔적이 있다.   왜 다수사본(공인본문)을 따라야 하는가?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수 세기 동안 받아온 **다수사본(Majority Text, 공인본문)**을 기반으로 한다. 수천 개의 사본이 일치하며 초기 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했고 문맥, 교리, 단어의 정확성이 보장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요,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존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의 판단이나 학문적 이론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로 전해 내려온 다수사본에 근거한 성경을 믿고 읽어야 한다.   결론: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의 사본과 번역에는 오류가 있다 개역성경은 말라기의 말씀을 이사야의 것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이는 성경 안에 오류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성경의 신뢰성과 하나님의 진실성을 훼손할 수 있다. 그러나 흠정역은 다수사본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순 없이 정확하게 증언한다.   “기록된바…” (막 1:2, 흠정역) 이 단순한 표현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며 오류가 없다는 진리를 지켜낸다.
2025-05-08 10:28:50 | 관리자
 천국은 마음속에 있는가? – 성경은 실제하는 ‘왕국’을 말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천국은 마음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듣기엔 아름답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늘의 왕국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다. 성경은 천국(heaven)이 아니라 **왕국(the kingdom)**에 대해 말하며, 그 왕국은 단지 내면의 상태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다스리시는 통치 체제요, 실제하는 장소다. 성경의 핵심 개념은 ‘왕국’이다 성경에는 ‘kingdom’이라는 단어가 342회 등장한다. 이 단어는 본래 **왕권(kingship)**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는 대체로 왕이 직접 다스리는 실제 통치 체제, 즉 왕국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존 한글 성경들(개역, 개역개정 등)은 이 중요한 단어를 ‘나라’, ‘천국’ 등으로 일관성 없이 번역함으로써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를 흐리고 말았다. 그 결과, ‘왕국’이라는 개념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용 용어처럼 되어 버렸고, 진정한 성경적 왕국의 의미는 일반 성도들에게서 사라졌다. 인본주의적 오해: “천국은 마음속에 있다”? 대표적으로 자주 오용되는 구절이 누가복음 17:20–21이다. ● 개역성경: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사람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상태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인본주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실제 장소가 아닌 ‘영적 개념’으로 축소해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너희’가 누구인지 확인해야 한다.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바리새인들, 즉 예수님께서 “독사의 세대”라고 책망하신 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왕국이 있다고 말씀하셨을 리가 없다. 바른 해석: 왕이 임했기에 왕국이 도래했다 이 구절의 바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왕국은 눈에 띄는 외형으로 시작되지 않지만, 지금 너희와 함께 있는 나(예수님)가 바로 왕이므로, 왕국의 실체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임했다는 선언이다. “그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눈에 띄게 임하지 아니하며… 보라, 하나님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0–21, 흠정역) 이때 ‘너희 안에’라는 말은 **‘너희 가운데’**라는 의미이며, 헬라어 원문에서도 in your midst, 즉 너희 중에 있음으로 해석되는 것이 맞다.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에 왕이 계셨으므로, 왕국도 이미 임해 있었던 것이다. 왕국은 실제한다 – 마음속 개념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의 왕국은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세우실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통치 체제다.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결코 멸망하지 아니할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다니엘 2:44, 흠정역) 예수님은 이 왕국을 제시하시기 위해 오셨고, 부활 후에도 제자들은 이렇게 물었다: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 다시 회복시키려 하시나이까?” (사도행전 1:6, 흠정역) 이 질문은 결코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구약 예언대로 회복될 실제 이스라엘 왕국을 기다리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결론: 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통치, 즉 왕국이다. 왕이신 예수님이 직접 오셨고, 하늘의 왕국이 실제로 임하고 또 임할 것이다. ‘천국’이라는 단어는 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성경의 본래 뜻을 흐리고 영적·개인적 해석으로 축소시킬 위험이 있다. “아버지의 왕국이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6:10, 흠정역) 이것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핵심이다.
2025-05-08 10:16:48 | 관리자
왕국인가? 천국인가? 마태복음 4장 17절   한 국가의 통치 제도는 누가 그 권력을 행사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다시 말해 백성들 개개인이 통치 권력을 행사하면 민주국이 되고 왕이 홀로 통치하면 왕국이 된다. 그러면 성경 속의 하나님의 통치 체제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처럼 여러 사람의 뜻을 물어 민주적으로 통치하실까? 아니면 홀로 주권을 행사하시며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실까? 신구약 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왕국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엡1:6, 12, 14).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개념으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도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이 “유대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물었으며(마2:2) 그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도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셨다(마4:17). 그래서 그분께서 돌아가실 때에 십자가 위의 명패에도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예수’라는 글이 붙었다(마27:37).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왕으로, 즉 그들의 메시아로 오셔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메시아 왕국을 그들에게 제시하셨으나 배척을 당하시고 결국 유대인들의 왕으로 돌아가시면서 새로운 언약, 즉 신약을 여셨다. 그러므로 왕국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마가복음 같은 경우 그 시작이 이렇게 되어 있다.   흠정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여(막1:1, 14)   유대인들에게 우리 예수님은 분명히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런 것을 무시하며 진실을 가리고 있다. 개역: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막1:14)   이렇게 왕국이 중요하므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구절을 개역성경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인데 과연 그 당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제 너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때가 되었다고 선포하신 것일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흠정역: 아버지의 왕국이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마6:10). 개역: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사실 개역성경으로는 이 구절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개역성경이 ‘나라’로 번역한 그리스어 ‘바실레이아’는 왕국이며 여기서 예수님이 의도하신 왕국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실제로 땅에 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왕국, 즉 ‘하늘의 왕국’이다(마4:17). 이 하늘의 왕국은 대언자 다니엘을 통하여 이미 오래전에 예언된 왕국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세우시는 왕국이다.   흠정역: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결코 멸망하지 아니할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 왕국은 다른 백성에게 남겨지지 아니할 것이며 도리어 이 모든 왕국들을 부수어 산산조각 내서 소멸시키고 영원히 서리이다(단2:44).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왕국을 유대인들에게 제시하셨으며 결코 우리 성도들이 죽어서 가는 천국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왕국을 의도적으로 거부했고(마23:37–39) 이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전해지게 되었다(롬11:30–31).    한편 예수님의 재림 전에 선포될 복음도 천국 복음이 아니고 바로 왕국의 이 복음이다(마24:14).   흠정역: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바로 그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으로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3–14).   위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목숨을 내걸고 주님께 헌신하는 자가 아니고 세상의 끝까지 견디는 자를 말한다. 즉 1차적으로는 유대인들 가운데 믿음으로 7년 환난기를 통과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이들은 로마서 11장 25-26절 말씀, 즉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온 뒤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성취될 때에 구원받는 자들이다.   그래서 7년 환난기에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왕국의 이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고 그 이후에 우리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땅에 강림하셔서 이 땅에 천년 왕국을 세우신다. 그러므로 선교단체나 교회 등이 마태복음 24장을 문맥에 상관없이 취해 선교사들을 많이 보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면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이것은 후천년주의에서 나온 발상이며 성경은 이런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선교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문맥에 맞지 않는 구절을 취해 내 목적에 맞도록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처음부터 이 왕국의 도래가 가장 큰 관심사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그분께 가장 먼저 왕국의 회복에 대해 물었다.   흠정역: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 다시 회복시키려 하시나이까? 하매(행1:6) 개역: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또다시 오역하여 그 의미를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런 번역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의도를 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이스라엘 대체 신학’이 주류를 이룬다. 한국 성도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늘의 왕국의 설립과 특히 천년 왕국의 도래 등에 대해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학자들로부터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어려서부터 잘못 번역된 성경을 읽고 그것으로 말씀을 공부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참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결국 성도들이 많은 구절을 ‘영적으로 비유로’ 해석한다. 성경을 – 특히 구약 성경을 – 읽으면서 그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하나님의 치리가 이루어지는 사실로 대하지 않고 다 나하고 상관이 있는 ‘영적 QT 재료’로만 사용하기에 우리 한국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심오한 신학이 형성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왕국을 세우려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무엇보다 이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원대한 계획 안에 사람의 구속이 들어 있고 마귀의 파멸이 들어 있다. 결코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계획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존 한글 성경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경에서 왕국으로 번역된 ‘kingdom’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모두 342회 나오며 이것은 원래 왕권(kingship)을 의미했으나 후에는 주로 왕이 다스리는 통치 체제, 즉 왕국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런 중요한 단어를 ‘나라’나 ‘천국’ 등으로 일관성 없게 번역했으므로 기존 성경들로는 성경의 핵심 주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핵심 주제를 보여 주는 이 단어는 단지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용 용어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2025-05-08 10:11:05 | 관리자
계시록 1장 18절 등 아멘 20여 회 삭제     성경에서 "아멘"은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의미로, 기도나 찬양의 끝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동의를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현대 역본들, 특히 개역성경과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는 이 "아멘"이 여러 구절에서 삭제되거나 생략되어 있습니다. 아멘의 삭제 사례 1. 요한계시록 1장 18절 흠정역: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 개역성경: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NIV: "I am the Living One; I was dead, and now look, I am alive for ever and ever! And I hold the keys of death and Hades."  여기서 "아멘"이 삭제되어, 예수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 약화되었습니다. 2. 요한일서 5장 21절 흠정역: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들을 멀리하라. 아멘." 개역성경: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NIV: "Dear children, keep yourselves from idols."    여기서도 "아멘"이 생략되어, 권면의 마무리에서 신앙적 확신이 줄어들었습니다. 아멘의 전체 사용 현황 성경 전체에서 "아멘"은 약 78회 등장합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 중 20회 이상을 생략하여 약 50여 회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NIV와 같은 현대 역본들도 유사한 경향을 보이며, 이는 성경의 원래 메시지와 독자의 신앙적 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결론   "아멘"은 단순한 종결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자의 확신과 동의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성경 번역에서 "아멘"의 생략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정확하고 충실한 번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025-05-07 11:15:16 | 관리자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이 ‘없음’? – 출애굽기 32:11의 누락된 하나님의 영광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4:35, 흠정역) 그러나 현대 성경들에는 ‘없음’이라는 단어로 대체된 구절이 여러 곳에 존재하며, 구약에서도 중요한 표현이 번역에서 누락된 사례가 반복된다. 출애굽기 32장 11절이 대표적인 예다. 출애굽기 32:11 비교 흠정역 (KJV 기반):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신 주의 백성…” 개역성경: “…여호와여 어찌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개역성경은 이 구절에서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라는 핵심 표현을 누락시켰다. 그 결과,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1. 주체가 불분명해진다 흠정역은 “주께서”라고 분명히 언급함으로써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개역은 그 주어를 생략하여, 누가 이스라엘을 인도해 냈는지 문맥상 흐릿하게 만든다. 문장에서 주체가 빠지면 메시지의 명확성이 사라진다. 2.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가려진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루어진 역사다. 이 표현은 단지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증언하는 핵심 구절로 여러 차례 반복된다. 구체적 증언 예시: “주의 큰 권능으로 친히…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시며” (신 4:37) “주의 강한 손으로… 너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셨나니” (출 13:9) “주의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와 표적들과 이적들로…” (신 26:8) “주의 크신 위엄으로 구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신 9:26)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행위와 그 능력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따라서 그것을 번역에서 누락하거나 삭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다. “번역 실수”인가, “의도적 삭제”인가? 이 구절에 대해 변호하려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번역상의 실수다.” “고대 어떤 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NIV, NASB,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심지어 개역개정에서도 이 구절은 **‘큰 권능과 강한 손’**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다. 오직 개역성경에만 해당 표현이 누락되어 있다. 개역개정조차 그 오류를 인정하고 고쳤다.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출 32:11, 개역개정) 이는 개역성경이 원래의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한 번역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결론: 하나님의 말씀은 삭제되어서는 안 된다 ‘개역’이란 말은 ‘고친 번역’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손대어 고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개입 없이도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신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에는 하나님의 큰 권능과 강한 손이 여전히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단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는 진리의 말씀이다.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신…” (출애굽기 32:11, 흠정역) 이것이 ‘없음’이 없는 성경,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 바른 성경, 그리고 그분의 권능을 온전히 증언하는 성경이다.
2025-05-07 11:01:38 | 관리자
‘고아’인가, ‘아버지 없는 아이’인가? – 하나님의 긍휼을 좁혀 버린 번역의 문제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풍성하시며, 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 특별히 과부나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은 구약 성경 곳곳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너희는 과부나 아버지 없는 아이를 괴롭히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2:22, 흠정역) 하지만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고아’라는 말은 익숙하고도 그럴듯해 보이지만, 문제는 그 뜻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는 데 있다. 국어사전은 고아를 “부모 모두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의지할 곳이 없는 아이”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어머니가 살아 있어도 아버지를 잃은 아이는 고아로 보지 않는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없는 아이”**라고 하심으로써, 아버지 한 사람만 없어도 보호받아야 하는 약자로 인정하신다.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하나님의 긍휼은 세상의 기준보다 더 넓고, 더 세밀하며, 더 따뜻하다. 흠정역은 그 긍휼의 범위를 그대로 살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도 하나님의 보호 대상임을 증언한다. 그러나 개역성경을 비롯한 NIV, NASB,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등은 ‘고아’라는 단어로 제한함으로써 그 따뜻한 긍휼의 손길을 좁혀 놓고 말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단 한 구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 전체에는 “아버지 없는 자”라는 표현이 50군데 넘게 나오는데, 대부분의 현대역본들은 이를 똑같이 ‘고아’로 번역하고 있다. 그 결과,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아이들이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의 대상이 아님처럼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바로 사본의 문제 때문이다.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은 로마 카톨릭의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소수 사본 계열을 따르며 번역되었다. 이 사본들은 본문을 축소하거나 표현을 단순화시켜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왜곡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다수 사본(Majority Text), 즉 초대 교회와 전통 교회들이 수 세기 동안 사용해 온 공인본문을 기반으로 번역되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긍휼과 정의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으며, 아버지만 없는 아이조차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배려의 대상임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고아’와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표현의 차이에서조차 하나님의 성품과 긍휼의 깊이를 분명히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결코 기준을 좁히시는 분이 아니시며, 오히려 더 많은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주는 고통받는 자의 힘이시며, 고아들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니이다.” (시편 68:5, 흠정역)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분의 긍휼을 온전히 증언하는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긍휼의 폭을 좁히는 성경이 아니라, 그 긍휼을 세밀하게 밝혀주는 바른 성경이다.
2025-05-07 10:54:4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