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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먼저 사해사본과 킹제임스흠정역과는 무슨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2.그리고 동영상강의를 보니깐 낙원이랑 천국 그리고 음부랑 지옥이 같다고 하시던데 궁금합니다. 제가 알기론 지옥(Hell)이고 원어로 Gehenna이며 또한 불못(the lake of fire) 계20:14 에서 비신자가 죽으면 음부로 가고 이것이 첫째사망, 그리고 둘째사망으로 영원한 지옥으로간다.이렇게 알고있습니다 또한 음부는 영어로 Abyss이고 헬라어로 Abussos, Hades라고 하고 구약에서는 sheol 이라고 하고 한국말로 무저갱(The bottomless pit)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음부가 임시대기장소라하면 지옥은 영원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크리스챤들이 죽으면 먼저 낙원으로 가있다가 예수님의 지상재림이후 천년왕국을 지난후 최후 심판을 거치고 비신자는 영원한 지옥으로 그리고 크리스챤들은 새하는 새땅 새 예루살렘인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음부에도 두개의 방 학설이 있다고 하던데요..헷갈립니다.   3.조현주 장로의 성경100독 세미나는 이단인가요?저희집에 집중력과 속견법이라는 책이있는데 좀 이상해서요 4.아미선교회의 황용현 목사님의 강의를 우연히 들었습니다. 위에 내용은 그분이 설교하신거인데 이분은 진보인가고 보수인가요? 그분은 캐나다 토론토 텐데일 신학대학원과 미국 시카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미전도족속복음화를 위해서 선교중심으로 하고 계신데 여기에서는 너무 성경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제가 아직 신앙이 부족해서인지 질문같지 않은 질문일수있습니다, 그래도 성실한 답변바랍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7: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9 09:23:36 | 허주현
흥미로운 영상입니다. 진화론의 거두인 도킨스가 진화의 증거를 묻는 질문에 한참을 고민합니다. 마지막에 뭐라고 하는것 같은데 영어 울렁증이 있는 저로서는 잘 모르겟구요 출처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튼 진화론진영의 선두에 서 있는 도킨스 조차 즉각적으로 대답할 진화의 증거가 없다는 것이 참 흥미롭네요^^   http://tvpot.daum.net/my/ClipView.do?ownerid=gQ5ptBmBE1Q0&clipid=8205839&lu=v_title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6: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8 06:28:45 | 박종철
오래전에 킹제임스 성경을 구입해 보고있는 사람인데 인터넷에서 아래와 글을 발견해서 올려봅니다/ 아랫글이 사실이라면 킹제임스 성경의 기반이 된다는 공인본문은 무흠하다는 주장과 달리 참 혼란스럽네요. 만약에 하나님이 에라스무스에게 성경의 순수한 보존이라는 사명을 지우게 하셨다면 저렇게 요한계시록 마지막장이 떨어진 불완전한 사본을 갖고 번역하게 만드셨겠냐는 겁니다. 그것도 수천개나 되는 비잔틴 사본중에 수백개를 검토한게 아니고 고작 대여섯개의 소문자 사본을 바탕으로 번역을 했다고 하는데.....   '순수한 보존&번역'이라는 킹제임스 성경측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건 Textus Receptus가  매우 중요한 유산 중의 하나고. 영어흠정역도 훌륭한 번역이라고 하지만 절대 무흠한 번역이 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설득력있는 답변 좀 구합니다.     ========================================== 박 창 환                                             (전 장신대교수, 신약학)                                               1. 이 글의 목적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사랑한다. 아니 참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존중하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어느 성경이 성경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곤란해진다. 많은 신자의 경우 성경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성경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대개 번역된 성경에 불과하다. 가령 한국 크리스천의 경우라면, 오늘 흔히 교회 강단에서 읽고, 널리 보급되어 있는 개역 한글판(대한성서공회 1961년판)을 성경이라고 말한다. 다른 나라의 크리스천들은 또 그들이 흔히 읽고 사용하는 번역 성경을 성경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통계에 의하면 성경은 2,000여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그 번역들은 조금씩은 내용이 다르고 의미도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그렇게 다른 것은 성경을 번역한 언어가 다르고, 번역자들이 다르고, 번역된 시대와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일 큰 원인은 번역 대본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 성경을 대본으로 삼는 경우라든가, 독일어나, 불어나, 라틴어 성경을 대본으로 하고 번역하는 등의 중역(重譯)의 경우에도 많은 차이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가령 원어 성경을 대본으로 하고 번역하는 경우일지라도, 원어 성경의 종류가 하도 많아서 그 많은 상이한 원문 성경을 대본으로 한 번역 성경들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존귀한 것으로 믿기에, 힘이 닿는 데까지 그것의 원본에 가까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것을 대본으로 해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최고 학자들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나타난 구약 원문 성경이 바로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슈투트가르텐시아(Biblia Hebraica Stuttgartencia 제4판 1990)이며, 신약 원문 성경이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의 신약성경 그리스어(NOVUM TESTAMENTUM GRAECE 27판, 1993. 이하 NTG로)와 독일성서공회(Deutsche Bibelgesellschaft)와 연합성서공회(United Bible Societies. 이하 UBS로)가 출간한 그리스어 신약성경(The Greek New Testament 제4판, 1993. 이하 GNT로)이다.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는 이러한 최첨단의 비평판(批評版) 성경을 대본으로 해서 성경을 번역했고, 또 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위에서 말한 가장 정확한 원문 성경을 대본으로 해서 번역한 것이 표준새번역(1993)이다.    이제 범위를 신약 성경으로 제한하여 생각해 보자. 위에서 언급한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의 NTG나 UBS의 GNT라는 결정적 비평판 성경이 나오기까지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활자인쇄술이 발명(A.D. 1450)되기 이전의 필사본 시대와 그 이후의 인쇄본 시대로 구분된다(인쇄본 시대에도 손으로 쓴 사본들이 몇 개 있다. 예컨대 소문자 사본 1884, 2318).    신약 성경 원본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으며(구약의 경우도 같다), 사본만 해도 5,500여 개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도 같지를 않다. 인쇄술이 발명된 이래,, 몇몇 사람이 후기의 몇 개의 사본을 비교하면서 자기 나름의 신약 원어 성경을 인쇄 출판한 것들이 수십 종류 남아 있다. 그 후에 헌신적인 학자들이 여러 곳에서 사본들을 발굴 혹은 발견하여 비교 연구하면서, 또 많은 비평판 신약 성경을 내놓은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과 역사 속에, 17세기 초의 인쇄업자였던 엘제비어(Elzevir) 형제가 신약 원어 성경을 출판하면서 초판을 1624년에 내었고, 이어 제2판을 1633년에 내었다. 그 때 그 제2판을 선전하면서 자기들이 낸 신약 성경은 "모두가 수락하는 책"(textum …… ab omnibus receptum)이라고 광고를 내었고, 그 때부터 그 신약 성경을 '텍스투스 레셉투스(Textus Receptu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 앞에 나온 것이나 그 후에 나온 여러 인쇄본 성경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82년에 [새흠정역성서](The New King James Version)와 The Greek New Testament according to the Majority Text가 트리니티 성서공회(Trinitarian Bible Society)에 의해서 출판됨으로써, 스크라이브너(F. H. A. Scrivener)의 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 according to the text followed in the Authorized Version(Cambridge, 1881)이 새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게 됐고, 이렇게 텍스투스 레셉투스(Textus Receptus)가 재판(再版)되면서, 미국을 위시하여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그것들을 대본으로 하여 새로운 번역(1990년에 [새 성경]이 출판됨)을 시도하였고, 소위 '말씀보존학회'라는 단체가 주동이 되어 대대적으로 기존 성경 번역본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번역 대본인 [새흠정역 성서]와, 그것의 신약 성경 대본인 텍스투스 레셉투스(Textus Receptus)와, 그것이 속해 있는 비잔틴 전통의 본문(그들은 그것을 '다수본문Majority Text'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이 유일한 영감된 번역이요, 또 본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외의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하는 사례가 생겼다. 그래서 필자는 '텍스투스 레셉투스'의 정체를 밝혀서 그것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게 할 뿐 아니라, 신약 원문 성경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얻어보려는 것이다.                                   2. 텍스투스 레셉투스(Textus Receptus)의 의미  '텍스투스 레셉투스'라는 말은 라틴(Latin)어 술어이다. '텍스투스'(textus)는 원래 망(網 web)을 의미하고, 따라서 직물(織物), 구조물(構造物)을 기리킨다. 거기서부터 파생되어 생각이 얽히고 짜여 있는 글을 가리키게 됐다. '레셉투스'(receptus)는 레시삐오(recipio)라는 동사의 수동분사로서 '받아진' '수락된' '용납된'(accepted, received)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그 두 단어를 합하면 '공인된 글'(Received Text)이라는 말이 될 것이고 좀더 풀어서 '공인된 본문'이란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텍스투스 레셉투스(Textus Receptus)라는 술어의 유래  '텍스투스 레셉투스'라는 말은 누구나 쓸 수 있는 평범한 보통명사지만 그것이 지금은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어 특정 문헌을 지칭하는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미 1번 항목에서 언급한 대로 신약 원문 성경 인쇄본들이 1514년 이래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160여 종류 발행되는 과정에 있어서, 라이덴(Leiden)의 기업적 두뇌를 가진 인쇄업자 보나벤투라 엘제비어(Bonaventure Elzevir)와 아브라함 엘제비어(Abraham Elzevir)라는 두 형제가 베자(Beza)의 인쇄본(1565)을 거의 닮은 인쇄본을 1624년에 출판했고, 1633에 둘째 판을 내면서 그 서문에다가 그 책을 자랑하는 글을 아래와 같이 넣었다. "Textum ergo habes, nunc ab omnibus receptum: in quo nihl immutatum aut corruptum damus."(Therefore you [dear reader] now have the text received by all, in which we give nothing changed or corrupted = 그러므로 귀하 [친애하는 독자]는 이제 모두에 의해서 수락된 성경을 가지게 ?습니다. 우리는 본문에다 변경되거나 잘못된 것을 결코 넣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엘제비어(Elzevir) 형제가 자기들의 책을 많이 팔기 위하여 상술적(商術的)으로 사용한 말 Textum. . .Receptum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그 텍스트 계통의 인쇄본이 100여 종류가 출판되는 동안, 그 인쇄본들을 "유일한 참 본문"(the only true text) 또는 "표준 성경"(Standard text)이라는 의미로 수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물론 원본 신약 성경이 아니고, 많은 신약 성경 인쇄본 중의 하나를 가리킨 것이며, 1881년 전까지의 구라파의 많은 번역 성경의 대본으로 사용된 텍스트 계통을 통털어 '텍스투스 레셉투스'라 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과연 실질적으로 얼마나 원본에 충실하며, 과연 "유일한 참 본문"이라는 이름을 가질 만한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인쇄업자라면 누구나 자기가 출판하는 책이 많이 팔리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온갖 그럴 듯한 선전을 하기 마련이다. 1633년에 엘제비어 형제가 제2판 신약 원문 성경을 출판하면서 그것이 많이 팔리기 위해서 거창하게 쓴 선전문의 일부를 마치 하나님이 주신 명사(名詞)인 양 받아들여 온 많은 사람들의 처사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맹랑하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선전에 현혹되고 있기에 '텍스투스 레셉투스'의 정체를 밝혀 그들의 꼬임에서 풀려 나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많은 성경들 중, 유독 [영어흠정역]만을 유일 무이의 영감된 번역이라고 고집하고, 그 전과 후에 번역들은 하나 같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서, 오늘까지 하나님의 많은 충성된 종들이 이룩한 공로와 노고를 무효화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행되고 있기에, 어째서 [영어흠정역]만이 가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인과 미국인 중, 일부 광신자들의 제국주의적 우월감과, 그들을 맹종하는 사대주의(事大主義)적 신자들의 어리석음이 [영어흠정역]과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우상화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대다수 신자들의 정상적 사고와 판단을 정죄하고 있기에, 정견(定見)을 밝히고, 극단주의자들의 편견과 오해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4. 텍스투스 레셉투스(Textus Receptus)라는 성경이 생겨나기까지의 역사                           4.1. 신약 성경 원본 기록과 그 보존 과정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은 여러 사람의 글이 모인 것으로, 그 여러 글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 저자들은 각기 교양과 신앙 경력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영감을 통하여 각기 성경을 쓸 때, 특정 장소와 시간에,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종이(파피루스 papyrus)와 붓과 잉크를 가지고 썼다. 그들이 글을 쓸 때, 그 글이 성경의 일부분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며, 또 그들이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며, 종이나 붓이나 잉크는 값이 비싸고 귀한 것이어서, 특별한 각오와 결심이 없이는 글을 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즉 더 비싼 가죽 종이(皮紙 parchment, vellum)를 용지로 사용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또 그렇게 영구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만큼 귀중한 글을 쓴다는 의식도 없었기에, 그 당시 보통 얻을 수 있는 용지인 파피루스(papyrus =paper)를 사용했던 것이다.    파피루스라는 종이는 애굽 나일 강 가나 습지(濕地)에서 많이 자라는 파피루스라는 식물(植物)의 내피를, 펴서, 가로 한 겹 세로 한 겹 놓고, 눌러서 말린 것으로, 그 지대의 사람들이 고대로부터 흔히 사용하던 필기 용지였다. 긴 글을 쓸 때에는 보통 일 척(一 尺) 평방 가량의 것을 몇 개라도 이어서 긴 두루마리를 만들어, 거기에 쓰고, 그것을 두루마리로 말아서 수신인(受信人)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코이네(koine=?????) 헬라어라는 평범하고도 통속적인 사람의 말로 기록된 동시에, 그 시대의 가장 평범한 필기 용지인 파피루스라는 종이에 기록됐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파피루스는 이른바 초지(草紙)여서, 그리고 한국이 자랑하는 한지(韓紙)와 같이 견고하고 지구성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쉽게 끊어지고 꺽어지고 부스러지기가 쉬웠다.    가령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를 써서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냈을 때의 일을 상상해 보자. 그 편지는 매 주일마다, 아니 매일 그 교회 회원들에게 읽혀졌을 것이고, 따라서 오래지 않아 그 편지는 때가 묻거나, 부러지거나, 끊어지거나 해서, 그것을 새 용지에 옮겨 써야 할 처지가 됐을 것이다. 그것을 옮겨 쓰는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정성을 다해서, 원본과 차이가 없는 것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헬라어 문자가 대문자들만 있었고, 띄어쓰기라는 제도가 없었다. 그리고 활자판이 아니고 손으로 쓰는 것이어서 같은 글자라도 모양이 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옮겨 쓰는 사람이 원본을 100% 그대로 옮겨 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이 연약한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아무 손상도 받지 않고 그 원본이 고스란히 오늘까지 보존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원본을 그대로 보존하시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데살로니가 교회에 사도 바울의 편지가 왔다는 소문을 들은 빌립보 교회는 데살로니가에 온 바울의 편지를 읽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그 편지를 베껴오도록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또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소간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단계에서만 보더라도 원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필사본이 다르고, 빌립보 교회가 만든 필사본이 또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신약 성경 27권의 글이 우선은 파피루스에 기록되었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의 필사본이 만들어져야만 했고, 원본들은 얼마 안 가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원본의 대를 잇는 파피루스 필사본들이 점점 많아져서, 각 교회에서 원본 대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신약 성경의 파피루스 필사본들이 신약 성경의 일부분 또는 몇 책이 함께 필사(筆寫)되어(어떤 것은 복음서만, 어떤 것은 바울서신만, 어떤 것은 사도행전만, 어떤 것은 계시록만, 어떤 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같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역시 그 용지의 나약성과 보존 기술의 취약성 때문에, 아깝게도 거의 대부분이 자취를 감추었다. 필사본 중 가장 낡은 것이 2세기 상반기(A.D. 125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위 P52가 있고, 오늘까지 발견된 98개의 파피루스 사본들 중에는, 제2세기의 것이 한두 개(P90 ,P98) 더 있고, 나머지는 제3세기로부터 제8세기 어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많은 교회가 이렇게 파피루스 사본을 성경으로 읽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수명이 길지 않기 때문에 계속 필사본이 만들어지면서 낡은 것은 자연히 사라져간 것이다.    현존하는 90여 개의 신약 성경 파피루스 사본들이 내용에 있어서 꼭 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다소간의 차이와 불일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곧 필사자인 인간들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간의 실수와 때로는 고의적 변개(變改)로 인해서 성경은 초창기부터 원본과는 조금 다른 모양으로(비록 사소한 것이지만)전달되어 온 것이다.                            4.2. 대문자 사본(Uncials)과 소문자 사본(Minuscules)    성경의 귀중성을 깨닫는 교회들은 파피루스 사본들의 나약함과 지구성이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지구성이 있고 견고한 가죽 종이로 파피루스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제4세기부터는 가죽으로 된 용지를 사용하여 성경을 필사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파피루스 사본을 사용하는 것보다 몇 배의 지구성과 편리함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문자 사본의 수가 300개나 되니, 그 수효로 보아서도 98개에 불과하는 파피루스 신약 사본보다 훨씬 지구성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문자 사본은 용지의 값이 비싸기 때문에 좀체로 그것을 만들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대문자를 가지고 썼기 때문에 단위 지면에 기재되는 내용이 비교적 적으므로 비경제적이었다. 이것이 지금 남아 있는 대문자 사본의 수가 적은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떤 교회에서는 계속 파피루스 사본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에서는(아마도 부유한 교회) 대문자 가죽 사본을 사용하였다. 결국 두 가지 종류의 사본이 공존하는 시대가 제 7세기 내지 제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교회의 수가 점점 늘고, 성경을 필요로 하는 교회나 수도원이나 개인들이 급격히 많아졌기 때문에, 소문자와 필기체가 고안되었고, 가죽 종이를 사용하되, 많은 내용을 빠른 시간에 필사하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그 시대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1450년에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즉 제9세기 이래 15세기 중엽까지, 많은 소문자 사본이 만들어졌고, 특이 교회가 많은 지방에서는 많은 소문자 사본들이 필사되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그 지방이 가지고 있던 사본들이 대거 필사(筆寫)되어, 비슷한 종류의 사본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2,800여 개의 소문자 사본들은 제9세기 이후의 것들로서, 원본으로부터 따진다면 몇 십대 후손인 사본들을 필사한 것들이며, 서로 상당한 차이를 나타낼 뿐 아니라, 고대 사본들과 비교한다면 많은 변개(變改)가 있음을 볼 수 있다.                               4.3. 성경일표(聖經日課表 Lectionaries)    기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 있어서, 예배의식도 발전하였고, 성경을 균형 있게 봉독하기 위하여, 성경의 여러 부분을 매일 또는 매 주일로 나누어 읽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하루하루 읽어야 할 성경 부분들을 일별(日別)로, 또는 주일별(主日別)로 나누어 기록한 것을 "성경일과표"(聖經日課表 Lectionary)라고 한다. 예컨대 대강절(待降節 Advent) 첫 주일에 사2:1-5; 시122; 롬13:11-14; 마24:36-44를 읽기로 하고 그것들을 한 종이에 모아서 필사본을 만든다. 이런 일과표가 역시 사본의 일종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과표도 약 2,000개가 남아 있어서 원문 비평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것들도 역시 그 각자가 필사되던 시대와 장소에 있던 사본들을 전사(轉寫)한 것으로서, 그것들의 대본(臺本)의 경향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으며, 필사 과정에 또 다른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4.4. 교부들의 인용구    많은 교부(church fathers 敎父)들이 글을 쓰면서 자기들이 볼 수 있었거나,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사본의 내용을 인용한 것들이 있다. 비록 짤막한 인용일지라도 그들의 인용은 역시 그가 사용한 사본의 필사본으로서, 본문 비평가들이 원본을 찾아가는 과정에 일조(一助)가 될 수 있다. 교부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장소와 시대를 반영하며, 그 지대에 유포됐던 사본들의 성격을 보여주거나 암시해 줄 수 있다. 교부들은 자기가 가진 사본을 자기의 글에 인용하면서 실수로 잘못 전사할 수도 있고, 고의로 수정하는 일도 있었다.                                          4.5. 고대 역본들(Ancient Versions)    성경이 처음에는 원어로 유포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신자들의 모국어 또는 상용어(常用語)로 번역되는 일이 생겼다. 구약 성경이 기원전 3세기부터 애굽의 알렉잔드리아의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기원전 6세기부터 구약 성경이 아람어로 옮겨져 타르굼(Targum)이 생긴 것도 그 예이다.    기독교가 로마 사회 전역에 퍼져 나가면서, 자연히 성경이 각 지방의 언어로 번역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선은 선교사들이 각 지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즉 그들에게 복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코이네 헬라어보다도, 더 친숙하고, 더 알아듣기 쉬운 지방말로 성경을 옮겼던 것이다.    우선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시리아(Syria)에서 시리아어 번역이 시도되었고, 다음은 라틴어, 그리고 이집트의 콥틱어로 번역되었다. 그 뒤를 이어 고트(Gothic)역, 아르메니아역(Armenian), 죠지아역(Georgian), 에티오피아역(Ethiopic), 고대 슬라브역(The Old Slavonic), 아라비아역(Arabic) 등이 줄줄이 나타났다.    이런 고대 역본들은 역시 그 번역이 이루어진 시대와 장소에서 얻을 수 있었던 사본들을 대본으로 해서 번역된 것이므로, 그 역본들을 검토하면 그 배후에 있는 사본들의 성격과 경향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고대 역본들은 원본을 찾아가는 노력에 많은 도움을 준다.                                      4.6. 신약 성경 사본들의 지방적 경향    기독교가 지중해 연안 각 지방으로 번져 나갈 때, 자연히 신약 성경도 사본이 되어 각 지방에서 읽혀졌다. 교회가 왕성하여 기독교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성경의 수요(需要)도 늘었을 것이고, 따라서 사본을 만드는 일도 활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 발전사(發展史)를 개관할 때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북 아프리카(칼테지), 로마, 마게도니아(콘스탄티노플), 소아시아(에베소)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대별(大別)할 수 있으며, 교회 활동이 그런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고 뚜렷한 특색을 가지고 발전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 지방에서 만들어져 사용되던 사본들도 자연히 그 지방에 어울리는 성격을 지니게 됐다고 보인다.    초창기부터 원본 성경에 대한 태도와 마음가짐이 지방마다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되는 것은 필사자들이 다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필사자의 실수나 고의적 변개에 의해서, 사본들이 예외없이 원본과는 차이가 있는 것들이 됐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5,500여 개의 신약 사본들이 어느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소위 다수 본문(Majority Text)이라고 해서 절대 다수의 신약 사본이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지지한다고 하지만, 그 다수를 점하고 있는 비잔틴 계통의 사본들도 서로 어느 하나도 꼭 같지를 않은 것이 사실이어서, 어느 하나는 원본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필사한 사본은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조금씩은 다 원본에서부터 이탈되고 달라졌다고 말해야 양심적이다.    다만 그 많은 사본들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며, 경향에 있어서 서로 유사한 것들을 분류해 볼 수 있다는 것이 본문 비평가들의 결론이다.    최근의 결론을 소개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약 사본의 본문형태(text-type)가 네 가지로 크게 나누인다는 것이다. (1)애굽 형(알렉잔드리아 형), (2)서방 형(Western)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3)(전부터 일컬어) 가이사랴 형이라고 하는 것, (4)비잔틴 형(Byzantine) 등이다.    엘돈 제이 엡(Eldon Jay Epp)은 다른 기호를 가지고 그것들을 나타낸다. 즉 (1)A-텍스트("수락된" "accepted"= Byzantine), (2)B-텍스트(Codex B =P75 -B, 혹은 이집트 형), (3)C-텍스트(B와 D 중간 =P45 -Codex W(종전의 가이사랴 형), (4)D-텍스트(Codex D, 혹은 서방 형"western")로 분류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A-텍스트(Byzantine)는 제4세기부터 나타난 것으로, 그것을 지지하는 고대 파피루스 사본이나 대문자 사본이 하나도 없다. 즉 제4세기 이전에 필사된 파피루스나 대문자 사본 중 A-텍스트를 뒷받침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다른 세 타입의 텍스트들(B, C, D 텍스트)은 A.D. 200년 경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파피루스 사본들이 그것들을 지지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1) 거의 초기부터 신약 성경 사본이 지방에 따라서 특이한 경향성을 가지게 되었고, 대별하면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2) 그리고 B, C, D 형의 본문이 A형의 본문보다 먼저 생겨난 것이라는 것, 즉 A 형의 본문은 연대적으로 가장 뒤에 형성된 것임을 말해 준다.    그 네 가지 형의 본문들 중 어느 하나, 즉 A형은, 일부 무비판적인 맹신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원본으로부터 조금도 변개된 것이 없이 순정(純正)하게 남아 있다고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모두가 다 원본에서 이탈했고, 그 변개의 도수가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가장 변개가 심한가, 그리고 변개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원본에 가까운 본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주요한 일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성경의 원본을 보존하실 능력도 가지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원본들을 남겨두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일부 맹신자들이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당신의 말씀을 무흠하게 보존하셨을 것이고, 비잔틴 텍스트(Byzantine Text, Majority Text)가 바로 그것이라고 억지를 쓴다. 아무런 근거나 증거도 없는 거짓말을 가지고 많은 순진한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 사본은 필사자들의 각별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원본으로부터 다소간의 변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5,500여 개의 신약 사본들이 하나도 예외가 없이 다 서로 다르며, 따라서 원본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런 대로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이 어느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사본 형성 과정    하나님의 말씀의 귀중성을 느끼는 필사자들이기에, 일부러 어떤 부분을 빼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실수로 빠뜨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대개의 경우는 필사자가 설명을 붙이거나, 의견을 붙이거나 해서 점점 길어지고 늘어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그래서 원문 비평의 가장 초보적 원칙은 "짧은 읽기(reading)가 긴 읽기보다 우수하다"이다. 그리고 난해한 부분은 필사자나 독자가 알기 쉽게 풀이하여 바꾸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읽기가 쉬운 읽기보다 우수하다"는 원칙을 적용하게 된다.    그리고 사본은 그 대 수(代 數)가 늘수록 점점 더 원본으로부터 멀어지고 변개가 늘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사본의 연대를 무시할 수 없다. 즉 오래된 사본일수록 가치가 더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비평 원칙들을 적용하며 검토한 결과 알렉산드리아 형, 즉 애굽 형(Neutral text, ?, B, Sahidic, Boharic 등)의 본문이 가장 권위가 있다는 것이 정평이다. Western text와 Caesarean text도 나름대로 특색을 가지면서 상당한 변개와 첨가를 가지고 있지만, 제4세기 이후에 생겨난 비잔틴 텍스트(Byzantine text)는 가장 많은 변개와 첨가를 가지고 있어서, 최악의 사본군(寫本群)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4.7. 인쇄본(印刷本) 시대    문예부흥(renaissance)으로 인해서 눈을 뜨게 된 구라파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원어로 읽으려는 열심이 생겼다.    1450년 독일인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활자 인쇄술을 발명함으로써, 성경의 사본 시대는 거의 막이 내리고, 인쇄된 성경을 만들려는 경쟁이 생겼으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인쇄된 성경을 손쉽게 구하여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중세기 기독교가 라틴역 불가타(Vulgata)를 공인된 성경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헬라어 신약 사본은 특수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문예부흥의 바람이 불고, 인쇄술이 발명됨으로 인해서, 원어 성경 인쇄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스페인의 주교 히메네스(Francisco Ximenes de Cisneros, 1437-1517)의 창안으로 이루어진 소위 [여러 번역 대조성서](Complutensian Polyglot)라는 방대한 대조(對照) 성경의 제5권에, 신약 성경 헬라어 원문이 실렸다. 그것이 1514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레오(Leo) 10세 교황의 재가를 얻은 것은 1520년 이후이며,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1522년까지는 그것이 세상에 공개되지를 않았었다.    '대조성서'(Polyglot) 속에 실린 신약 헬라어 성경이, 어떤 사본들을 배경으로 가진 것인지를 확실히 알 도리가 없다. 히메네스(Ximenes)가 레오(Leo) 10세 교황에게 그 성경을 봉헌하면서,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사본들을 얻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밝히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로 헬라어 사본들로 말하자면 각하의 덕택이 큽니다. 각하께서 사도 도서관(Apostolic Library)에 있는 구약과 신약의 매우 오래된 사본(Codex)들을 보내주셨으니 말입니다. 이 작업에 있어서 그 사본들이 우리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히메네스(Ximenes)는 로마에 있던 사본들을 이용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 사본들이 어떤 것인지, 몇 개나 되는지, 어떤 성격의 것인지 등을 알 수 없다. [여러번역대조](Complutensian) 헬라어 본문이 인쇄본으로서는 제일 먼저 된 것이지만, 1522년까지는 그것이 세상에 발표되지 못했었고, 그 틈을 타서 에라스무스(Erasmus) 헬라어 성경이 먼저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됐다.    스위스 바젤의 유명한 출판업자였던 요한 프로벤(Johann Froben)이 스페인에서 진행 중인 Polyglot Bible 소식을 듣자, 그것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자기가 선수(先手)를 쳐서 신약 성경 헬라어 인쇄본을 출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1514년 8월에 그 곳을 방문 중이던 화란의 유명한 학자요 휴머니스트였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를 설득시켰다.    상당한 보수를 약속받은 에라스무스는 1515년 6월에 다시 바젤에 가서, 인쇄소의 조판을 위하여 신약 성경 사본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신약 성경 전체를 포함한 사본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몇 개의 부분적인 사본들을 참고하며, 나름대로의 수정을 가하여 인쇄소에 넘겼다.    메츠거(Bruce M. Metzger) 박사의 말에 의하면, 에라스무스가 이용한 사본은 바젤 대학 도서관에 있는, 별로 신빙성이 없는 두 개의 사본들이었는데, 하나는 복음서 사본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과 서신 사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다 12세기의 것들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그 밖의 두세 개의 사본들과 비교하면서 교정을 했다는 것이다.    계시록의 경우는, 그가 입수한 사본이 12세기 것 하나뿐이었고, 자기 친구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 사본은 마지막 한 장이 떨어져 나가, 여섯 절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라틴 불가타 성경을 대본으로 해서, 그 부분을 역(逆)으로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그가 번역한 부분은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헬라어 사본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잘못된 번역이 소위 '텍스투스 레셉투스'에는 오늘까지도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그 마지막 부분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부분도 역시 불가타를 대본으로 해서 수정을 가하였다. 그것이 인쇄에 붙여진 지 불과 일 년도 못 되어, 1516년 3월 1일에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수 백 개의 오식(誤植)이 발견될 수밖에 없고, 많은 사람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였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성경은 많이 팔렸고, 그 제2판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독일어 번역의 대본으로 사용되었다. 에라스무스는 초판(1516), 제2판 (1519), 제3판(1522)에 이어 제4판을 1927년에 냈는데, 그것은 히메네스의 성경이 공식으로 소개된 뒤의 일이었다.    에라스무스는 학자답게 자기 것과 히메네스의 것을 비교하여, 다시 약 90여 곳을 수정하여 제4판을 낸 것이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제5판이 제4판과 대동소이하게 출판되었다. 그것이 1555년이었다.    결국 에라스무스 성경은 5~6개의 소문자 사본을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메츠거의 평가에 의하면 비평적 가치에 있어서는 [여러번역대조](Complutensian) 신약 성경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에라스무스 성경은 비공식적으로 베니스(Venice),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바젤(Basle), 파리(Paris) 등지(地)에서 30여 종류나 출판되었다. 에라스무스 헬라어 신약 성경이 출판된 후에 뒤를 이어서 많은 것들이 나왔지만, 결국 그것들은 다 에라스무스의 것을 몇 군데 고친 것뿐, 근본적으로는 이 저열(低劣)한 형태의 헬라어 성경을 재생한 것에 불과하다.    그 후에 그것이 어떻게 '텍스투스 레셉투스'(공인 성경)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불란서 파리의 유명한 출판업자 스테파누스(Robert Estienne, 라틴식으로는 Stephanus)가 파리에서 세 번(1546, 1549, 1550), 제네바에서 한 번(1551)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의 초판과 둘째 판의 본문은 히메네스(Ximenes)의 것과 에라스무스의 것을 혼합한 것이고, 제 3판은 에라스무스의 제4판과 5판의 본문을 밀접하게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 제3판은 매 쪽 난 외에 14개의 다른 사본들과 히메네스 성경의 읽기(reading)를 소개하고 있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스테파누스의 제3판은 많은 사람에 의해서, 특히 영국에서, 헬라어 성경의 표준 본문으로 인정되었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친구이며 그의 후계자였던 성경학자 테오도르 베자(Theodore de Beze, 1519-1605)가 1565년에서 1604년 사이에, 적어도 아홉 판의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제10판이 1611에 출판되었다. 그는 보다 양질인 베자 사본(Codex Beza)과 클라로몬타나 사본(Codex Claromontanus)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에 대하여 주(註)에다 언급했을 뿐, 본문을 수정하는 데는 사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가 출판한 헬라어 본문은 스테파누스의 제4판(1551)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가 손을 대지 않은 것은 그 때까지 공인된 것으로 받아온 전통적 본문과 그것들이 너무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중요한 역할은, 그가 출판한 헬라어 성경들이 보편화되어, 마침내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고착(固着)시키는 방향타(舵)의 역할을 했다는 일이다.    1611년의 [영어흠정역] 번역자들이 1588-9년과 1598년의 베자 성경을 대본으로 사용했으니, 베자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1624년에 라이덴의 야심적 인쇄업자 형제 보나벤투라 엘제비어(Bonaventure Elzevir)와 아브라함 엘제비어(Abraham Elzevir)가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했는데, 그것의 본문은 주로 베자의 1565년 판을 취한 것이었다. 그후 1633년에 제2판을 찍으면서 그 서문에다가 자랑삼아 "이것은 이제 모든 사람에 의해서 수락된 본문" 즉 Textus Receptus라는 말을 적었다.    이렇게 해서 스테파누스, 베자, 엘제비어가 출판한 여러 판의 헬라어 본문이 신약 성경의 "유일한 참 본문"(the only true text)이라는 칭호를 가지게 되었고, 그 뒤에 나온 판들이 그것을 맹목적으로 답습하였다. 그리고 [영어흠정역]을 위시하여 구라파의 주요 개신교 번역들이 1881년까지 그것을 대본으로 삼은 것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에 대해서 너무도 미신적인 존경을 바치는 나머지, 그것을 비평하거나 수정하는 일이, 마치 신성모독이나 되는 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5. 비평판 헬라어 신약 성경의 출현    불과 5, 6개의 변질된 후기 소문자 사본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약 400년 동안 횡포를 부리고 있는 동안, 여러 곳에서 여러 학자들을 통하여 많은 귀중한 사본들이 발견되었고, 사본들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밀(John Mill, 1707), 벤틀리(Richard Bentley, 1720), 벵겔(J.A. Bengel, 1734), 웨스타인(J.J. Wettstein, 1751-1720), 그리스바하(J.J. Griesbach, 1775-1807) 등의 기초 공작을 거쳐서, 본격적으로 과학적인 본문 비평을 시작한 사람은 락흐만(Karl Lachmann, 1831)이었다. 티셴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가 시내 산 사본을 발견한 이래 1841-72에 여덟 판의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하였고, 트레글러스(S. P Tregelles)가 1857~72에 역시 그의 헬라어 성경을 내었으며, 웨스트코트(B.F.Westcott)와 호르트(F.J.A.Hort)가 합작하여 1881~82에 The Greek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이라는 성경을 출판함으로써, 확실히 텍스투스 레셉투스 시대의 종언을 가져왔다.    그 이후에 신약 성경 본문 비평학은 확고부동한 고지를 점령하였고, 거의 완벽하다고 할 만한 비평판 원어 신약 성경이 출현하였다.                                    6. 본문 비평학적 견지에서 본 텍스투스 레셉투스    1)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그것을 맹종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절대 다수 사본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5,500여 개의 사본이 하나도 같지 않으며, 비슷한 것이 많은 것 뿐이어서, 유독 그것만이 영감됐다거나, 그것만이 배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2)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아주 후기에 만들어진 소문자 사본 5, 6개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비잔틴 형의 본문이다.  비잔틴 형의 본문은 4세기 이후부터 유행한 것이며, 2세기, 3세기의 파피루스나 대문자 사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즉 인위적인 많은 변개(變改)가 발견되는 소위 훼손된(corrupted) 본문이다.    3)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에라스무스가 라틴 불가타를 역(逆)으로 번역한 부분(계시록 마지막 6절)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임의로 불가타와 비교하면서 수정한 부분들이 많다.    4)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4세기 이래 필사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잡다한 설명구나 해석을 첨가하여 팽창하고 길어진 본문이다. 1551년 로버트 스테파누스라는 출판업자가, 자기 출판사에서 나온 성경이 잘 팔리게 하기 위하여 절 구분을 하였는데, 확대되고 늘어난 본문을 절로 나누어, 절 수를 매겼기 때문에, 원래는 없던 본문에도 절 수가 붙게 되었다.  비평판 성경은 원본을 찾으려는 노력의 결실이기 때문에, 자연히 내용이 짧고 따라서 스테파누스의 절 구분과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5) 권위 있는 고대 사본들이나 현대의 비평판 성경들이 텍스투스 레셉투스의 본문에서 어떤 부분을 삭제하거나 변개한 것이 아니고, 반대로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원래는 짧던 본문에다가 사람들의 말을 첨가함으로써, 성경을 흐리게 하였다. 물론 보다 명백히 하려고 선의로 첨가했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흠을 낸 셈이다.    6) [영어흠정역]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그것의 권위와 무오성을 주장하는 나머지, 그것의 대본이었던 텍스투스 레셉투스도 권위가 있고 유일한 가치가 있다고 강변한다.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기도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누가 번역했든지, 그 나름의 가치가 있고 귀한 것이다. 번역자의 실력에 따라 번역의 질적 차이가 없을 수 없지만, 아무리 잘된 번역도 100% 정확할 수는 없는 법이어서, 어느 하나만이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어째서 하필 영어로 번역된 흠정역만이 완전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런 생각은 영국인이나 미국인 일부와 사대주의적 사고를 가진 일부 사람들의 제국주의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흠정역의 대본인 텍스투스 레셉투스만이 정확무오하다는 연역적 판단은 매우 졸렬하고, 사실과는 천리 만리 동떨어진 것이다.    7)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다수본문(Majority Text)이라고 하며, 절대 다수 사본의 지지를 받으니 권위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가 양적으로 많이 성장하고 많은 사본을 필요로 하는 지방에서, 자유분방한 교회 지도자들이 많은 사견(私見)을 사본에 넣으며 필사했을 경우, 그 지방에는 원본과는 크게 상거가 있는 확대된 본문이 대거 유포될 수 있다. 이런 경로를 거쳐서 확대된 본문을 가진 사본들이 오늘날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사본의 진위를, 수(數)를 가지고 측정하는 것은 이미 진부한 방법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수를 따진다면, 예수님을 죽이자고 한 악한 무리의 수가 진리 자체이신 한 분 예수의 몇 백 배가 아니었던가! 진리는 수가 적어도 진리이다. 아니 수가 하나뿐이라도 진리는 진리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다수본문(Majority text)의 지지를 받으니 권위가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8) 비잔틴본문(Byzantine text, Majority text) 지지파의 거장으로 Dean Burgon, Z. C. Hodges 그리고 Farstad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들도 다수본문(Majority Text)과 텍스투스 레셉투스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특히 Burgon은 다수본문(Majority Text)의 신판(新版)을 내려는 희망을 가졌던 사람인데, 그의 조사에 의하면 마태복음에서만도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다수본문(Majority Text)과 150개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비례로 나간다면 신약 성경 전체에서는 그 둘의 차이가 엄청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수본문(Majority Text)과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정확하고 믿을 만하고 그것들만이 하나님이 특별히 보존하신 본문이라고 주장하는가 말이다.    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제1장, 제8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헬라어로 된 신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감동하신 것이며, 그의 각별한 돌보심과 섭리에 의하여 순수하게 보전된 것이며 따라서 믿을 만하다. 그래서 모든 종교 논쟁에 있어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그것에다 호소하는 것이다.(필자의 사역)    이 교리를 만들 때(17세기 중반)에는 물론 텍스투스 레셉투스밖에 없었다. 그 후에 많은 사본들이 발견되고, 본문 비평학이 발달하여, 원본에 보다 가까운 본문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그런데 오늘의 텍스투스 레셉투스 지지자들이, 그 교리를 앞세워 가며 텍스투스 레셉투스만이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時代錯誤)가 아닌가.    사람이 만든 교리가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세 교회의 과오를 답습하는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영감된 귀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무흠하게 보존되었으면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 사항이다. 그러나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바로 그 무흠한 성경이라고 말하는 것은 누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성경 어디에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유일무오한 성경이라고 했는가 말이다.    10) [하나님은 오직 한 성서를 쓰셨다(God Wrote Only One Bible)]라는 책을 쓴 레이(Jasper James Ray)는 162개의 시험 구절을 선발하여, 현대 비평판 헬라어 성경들과 현대 영어 성경 번역들을 비판하였다. 즉 그가 택한 162구절에 있어서 현대 성경들이 텍스투스 레셉투스나 영어흠정역과 다르다는 것을 지적했다. 즉 그가 택한 구절들이 현대 성경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것들이 나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택한 162구절 중 31개에 있어서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다수본문(Majority text)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 말은 결국, 어느 하나가 배타적으로 권위가 있거나 믿을 만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아닌가.    11)카슨(D. A. Carson) 교수의 말을 귀담아 들을 만하다.  비잔틴 형 본문이 텍스투스 레셉투스와 꼭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중요한 사실을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잊어버린다.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겨우 몇 개의, 비교적 늦은 시대의 사본들을 기초로 한 것이다. 즉 비잔틴 전승을 나타내는 사본들이 수천 개에 달하는데 비하면, (너무 소수의 사본을 근거로 했다는 말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비잔틴 전승의 사본들을 근거로 했다는 것과, 그 자체를 포함하는 보다 광범한 전승과 퍽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물론 사실이지만, 그 광범한 증거들이 텍스투스 레셉투스 자체의 전승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역시 사실이다. 또한 한 본문 전승 안에 있는 가장 친근한 사본들끼리도, 한 장(章 chapter)에 평균 여섯 개 내지 열 개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만큼 사본들은 어느 것을 막론하고 서로 다르고, 따라서 어느 하나만을 지적하여 그것만은 무흠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변개가 많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독 텍스투스 레셉투스만 홀로 권위가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12) 텍스투스 레셉투스와 영어흠정역의 권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변개될 수 없다"는 명제의 말씀들(고후2:17; 마13:25; 계22:19; 신4:2; 잠30:6; 요10:35; 눅16:17 등등)을 근거로 해서, 그들이 지지하는 성경은 무흠하다고 주장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5,500여 개의 사본이 하나도 같지 않고 다 다른데, 그리고 텍스투스 레셉투스도 역시 그 중의 하나인데, 어떻게 그들의 논리가 성립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불변한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역부족과 연약함 때문에, 성경의 원본을 보관하지 못했고, 또 사본을 완전하게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어서,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들이 하나 같이 불완전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귀중성을 느끼기에 일점 일획이라도 잘못되기를 원치 않는다. 사실 성경 사본들은 세속적 고(古) 문헌들에 비교하면 월등하게 정확도가 높다. 아무리 변개가 심한 사본일지라도, 교리를 바꾸게 할만큼 심하게 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본문 비평학자들의 정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하나님의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이 드디어 글자로 표현되었는데, 사람의 언어는 모두 그 구조가 다를 뿐 아니라 불완전하여, 여러 방언으로 기록되고 번역되는 과정에서, 결코 서로 완전히 일치하거나 완전히 정확할 수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충성스러운 종들을 통하여 당신의 사상=말씀이 여러 사본과 번역들 속에 기본적으로 변함없이 보존되도록 해주신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고, 보다 더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 계속 원본을 찾아가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기독교회의 매우 중요한 유산 중의 하나이다. 영어흠정역도 훌륭한 번역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원본이나, 절대 무흠한 번역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고도서 Nestle-Aland, Novum Testamentum Graece, 27판,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93. The Greek New Testament, 4판, Deutsche Bibelgesellschaft and United Bible Societies. 1993. Bruce Manning Metzge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Oxford University Press. 1964. -----------,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A Companion Volume to the United Bible Societies' Greek Testament(third edition). London:United Bible Societies,1971. Eldon Jay Epp, Ancient Texts and Versions of the New Testament, 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 VIII. Abingdon Press. Nashville. p.1-9. Harold P. Scanlin, The Majority Text Debate: Recent Development. The Bible Translator, Vol.36. No.1. p.136-140. D. A. Carson, The King James Version Debate, a Plea for Realism.. Grand Rapids, Michigan: Baker,1979. Jasper James Ray, God Wrote Only One Bible. Eugene, Ore:Eye Opener, 1980. 이송오,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성경만을 쓰셨다.] 말씀보존학회, 1991. 김재근, [훼손당한 성경], 말씀보존학회(Word of God Preservation Society),1994. Berry Burton, Let's Weigh the Evidence, 정동수 역. 안디오크 출판사,1994. Sir Frederic Kenyon, Our Bible and The Ancient Manuscripts, Harper & Row,1965. -----------, The Story of the Bible, A Popular Account of How it Came to Us. London, John Murray, 1955.    출처:에스라하우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7: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7 16:18:35 | 이영수
(질문)창세기 49장 6절 말씀의 끝부분에 "그들이 분노 중에 사람을 죽이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벽을 파내려 갔도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벽을 파내려갔다는 말씀의 뜻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개역에서는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라고 되어있는데 비교 설명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8:3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7 15:10:36 | 양경수
인간과 매우 흡사한 얼굴을 한 새끼양이 터키에서 죽은 채로 태어났답니다. 비타민 A가 부족하면 이런 현상이 있을 수 있다는데..과연 비타민 A의 부족으로 이런 인간의 얼굴을 닮은 돌연변이가 태어날 수 있는건지... 짐 바브웨에서도 이런 유사한 일이 있었고.. 당시 관리는 인간과 암염소의 부적절한 관계로 태어났다는 얘기를 했다는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괴한 생명체들..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진행되고 있을 인간복제의 실패작들은 아닐까요. 과거 노아시대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천사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한 결과물들은 아닐까요 얼마전 지방중고등부 학생들에게 UFO와 천사에 관한 진실을 살짝 맛만 보여줬었는데.. 이런 기사를 보니 생각이 남달라지는군요.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003186728&code=41191111&cp=nv1[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6: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6 18:31:46 | 박종철
한국생명공학연구원(원장 이상기)은 15일 오후 3시, 연구원 내 자원동 앞 '실험동물 위령비'에서 연구목적으로 희생된 동물들을 위로하는 '실험동물 위령제'를 연다. 오늘 위령제에서는 실험동물들이 즐겨먹는 사료와 과일 등을 정성껏 제물로 차려 헌화와 분향할 예정이다.   이상기 연구원장은 "질병 치료와 예방을 위한 신약, 백신 등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직접 실험할 수 없기 때문에 실험동물을 통해 약효와 독성실험을 하고 있다"며 "명을 못다한 실험동물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위령제를 개최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연구원은 연간 마우스, 랫드, 토끼 등 3종 3만여마리를 실험용으로 사용하고 있다.(2005년 언제적 신문 기사) * * * * * * * *   명절에 조상 산소나 차례상 앞에서 꾸벅 절한다든가 (차라리 살아 계신 부모님 앞에서 큰절 올리는 건 영적으로 문제될 것 없습니다),기우제 지내고, 영화 촬영이라든가 선박 항해 같은 거사를 추진하기 전에 사람들이 한데 모여 돼지 머리 얹어다가 고사 지내는 것..   여기에 대해서 어지간한 크리스천들은 쉽게 판단을 내립니다.미신적이다, 그런 짓 전혀 할 필요 없다, 심지어는 우상숭배다 이런 식으로.   그렇다면, 저 동물 위령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인류의 질병 치료을 목적으로 신약 개발 실험용으로 죽어가는 동물들 말입니다.그거 연구하는 연구원들도, 비록 불신자이긴 하지만 일말의 동정심과 종교심은 있어서 연구소 뒤뜰에다 위령비도 세워 놓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답니다.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까지 쉽사리 미신, 우상숭배 따위로 치부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죠?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성경적으로는 저것도 앞서 든 예와 별 차이 없는 "쎄임쎄임"입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무수히 많은 동물들이 제물로 바쳐져 피를 쏟으며 처참하게 죽어 나가던 구약 시대 유대교 성전 뒤뜰에, 하나님께서 동물 위령비 세워 놓으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는지를..!   인간 때문에 동물이 불쌍하게 죽은 건 이미 아담과 이브 시절부터 있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 육체의 생명은 피, 죄사함을 위해 필요한 것은 피흘림 등등... 이 모든 성경 법칙을 시청각 교육으로 가르침과 동시에 아담 부부에게 가죽옷을 제공하기 위해 피흘려 죽은 동물이 원조입니다. 아마 그 동물도 양이었을 것입니다. (창 3:21)   동물이 안 죽었으면 사람 본인이 자기 죄 가운데에 죽어야만 했고, 죽어서 지옥 갔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제도가 잔인하네, 동물이 불쌍하네 하는 식의 투정을 부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가족처럼 키우던 어린양을 제단에 올려서 목을 따고 피를 쏟아냄으로써, 인간이 지은 죄가 이렇게 뼈아프게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걸 유대인들은 매번 눈으로 봤습니다. 남은 부위를 불에다 새까맣게 태움으로써 죄의 대가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인 지옥이 그런 곳임을 실감했습니다.   이걸 보고 잔인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데,사람이 진짜 피흘려 죽어 마땅한 걸 동물로 대신 감당하게 한 게 기독교의 전신인 유대교이지,정말 잔인한 건, 자기 자식 새끼--동물이 아닌 사람--를 인신공양으로 불에다 던지고, 처녀를 제물로 바치던 주변의 마귀 종교들이었습니다. (레 18:21, 왕하 16:3, 17:17 등)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동물들 포함)을 다스리라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미의 젖으로 그 새끼를 삶지 말라" (성경에 무려 세 번이나 나옵니다), "곡식을 밟고 있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역시 세 번) 처럼, 살아 있는 동물을 부려 쓸 때는 하나님도 인간에게 동물에 대한 배려와 보호를 명령하지만,   식용이나 헌물 등 잡아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동물을 최소한도로 죽이는 것은 성경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개 잡아서 보신탕 해 먹든, 의학 연구용으로 동물 죽이든 예외가 아니며 해충 구제는 두말할 나위도 없죠. 동물과 사람 사이에 엄연히 차별을 두고 있는 성경 말씀이 놀랍지 않습니까?   동물 속죄 헌물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9, 10장이 명쾌한 이론 설명을 해 줍니다. "동물 죽는 게 불쌍해서 위령비 세울 정도이면,예수 믿고 예수님의 죽으심이나 '주의 만찬'으로 꼬박꼬박 잘 기념하고, 죄나 짓지 말고 살아라."가 성경이 말하는 해답인 것입니다.   다만, 단순히 동물을 죽이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종, 유전자 자체를 혼잡하게 하고 제멋대로 뒤섞고 망가뜨리는 시도는 어떤 형태로든 심판과 재앙으로 인간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 짐작하셨겠지만, 저 밑에 김** 형제님의 <개념없는 인간=동물 토론회> 글에 대한 보충 설명 차원에서 제가 예전에 쓴 글을 소개합니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6: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5 22:01:39 | 김용묵
엘리가 그녀에게 이르되, 네가 어느 때까지 취하여 있으려느냐? 네게서 포도주를 치우라, 하매   15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영이 슬픈 여자이니이다.   내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다만 {주} 앞에 내 혼을 쏟아 놓았을 뿐이오니   16 당신의 여종을 벨리알의 딸로 여기지 마소서.   내가 지금까지 많은 원망과 슬픔 속에서 말하였나이다, 하매   ...............................................................................................................................................   한나는 영과 혼을 구별해서 말합니다.   영은 하나님을 향한 지각기관..즉, 안테나의 역할을 한다고 알고 있는데,   영이 슬프다고 하면 ,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슬픈 것이고,   혼을 쏟는다하면 영의 슬픔의 결과물인 자신의 마음 속의 한탄과 눈물을 쏟아낸다는것인지요.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1:4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5 08:27:49 | 백화자
누가복음 2 장 34 절..   ...........이 아이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다시 일어나게 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제 해석으로는 성전을 무너뜨렸다가 사흘만에 다시 짓는다는 말씀과 같은 것인지..   쉬운 문장인데도 감이 안 잡히네요.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2:0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3 08:37:37 | 백화자
이 설문은 애초에 구원을 KJV 교회에서 받고 여기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분에게는 해당 사항 없습니다. 기성 교회를 다니다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알게 된 초창기 시절을 떠올려 보십시오.(없음) 말고, 내가 알던 구절과 KJV 구절이 이렇게 다르다는 걸 알게 됨으로써 가장 놀랐던 성구는 무엇이었습니까?   저의 경우는 그 유명한 요일 5:7이라든가, 딤전 3:16, 요 3:36도 아닙니다.저는 그 당시는(2001~02) 아직, 성경에 그런 유명 구절이 있는 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   제가 깜짝 놀라는 체험을 한 구절은 바로 마 5:22입니다.마태복음의 산상 설교는 비교적 유명한 구절인 데다 신약 성경을 마태복음부터 읽기 시작하면 비교적 금방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저도 나름 중학교 때부터 대략의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자기 형제에게 화만 내도, 바보 멍텅구리라고만 불러도 공회에 끌려가고 불지옥에 심판을 받는다는데 얼마나 무서운 내용입니까? ‘어 그런데 예수님도 화를 내시지 않았나?’ 당연히 그렇게도 생각했습니다. 중학생의 지적 수준만으로도 말입니다.   그 당시는 뭐 어차피 주변에서는.. 성경 너무 많이 읽으면 이단 되고, 그런 건 신학자들이 공부하는 내용이니 너무 파고들 필요 없다, ‘없음’은 그냥 후대에 추가된 내용이고....어차피 각 교파마다 다 자기네 교리만 옳다고 하는데, 우리가 성경을 다 이해하고 해석해 내는 건 불가능이니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이런 식이었으니 제가 더 뭐 따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까닭 없이’가 저를 살려 줬습니다. 할렐루야! 저 말고 다른 분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예수님 명령에 순종을 안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진다니!’(요 3:36), ‘이제 신령한 젖 먹으면서 구원에 이를 때까지 한참 자라야 되는구나!’(벧전 2:2)처럼..변개된 성경 때문에 생사람을 잡을 뻔하던 기가 막힌 사연이 엄청 많습니다.행 12:4 이스터 하나만 딱 보고는 무릎을 치고 ‘그럼 그렇지, 이게 진짜 정확하고 무오한 성경이구나!’ 바로 깨달았다는 간증도 들었습니다.   김문수 형제님께서 연재하는 글을 통해 조목조목 지적하시는 것처럼, 변개된 성경엔.. 정말 ‘정신줄을 놓은’ 번역 많습니다.바른 성경을 통해.. 구원은 받았으나 성경관에 막혀 지금까지 영적 성장이 지체된 사람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부디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여러분의 knockdown 성경 구절은 무엇입니까? 간증을 들어 보고 싶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11:2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2 00:33:50 | 김용묵
그리스도께서 세운 신약 교회의 정신은 무엇인가?   1. 율법 시스템(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영적인 자유로 섬기는 것2. 전 성도 제사장직, 모두가 형제이다.3. 물질적인 성전이 아니라 신자가 성전이 된다.4. 자발적인 헌금5. 말씀만으로 충분한 교회 이런 것이 확실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내 교회’에서 멀리 있다.교회인 것 같은데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확실히 구원받았는가?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내 교회에 얼마나 가까이 근접해 있는가?
2010-01-11 17:57:18 | 관리자
듣자하니 오늘날에도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그 율법주의자들의 후예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명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하는데 십계명 중에 왜 안식일만 빼느냐..예수님도 율법을 다 성취하러 오시지 않았느냐,그 법은 네 가까이에 있고 네가 능히 지킬 수 있다고 신명기에 명시돼 있는데 왜 자꾸 불가능하다는 쪽으로만 가느냐..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참 할 말이 없습니다.   (일부만 예를 든 건데... 성경 구절들을 잇는 논리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힙니다.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충분히 생길 법도 합니다) 율법 조항이 "겉보기로 보기에" 얼마나 고차원적이고 좋은 법인지 그쪽으로만 접근하면 영락없이 율법주의로 빠지기 쉽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습니다.제대하고 민간인 된 지가 언젠데 그렇게도 군인 행세하고 싶으면 혼자 그렇게 살면 됩니다.민간인이라도 군대식으로 살면 육신의 건강에 좋으면 좋지 나쁠 것 하나도 없습니다.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아주 규칙적으로 살면서 심신 단련하고.. 생필품도 아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치약 하나만 있으면 청소 다 하고.. ^^ 누가 부르면 관등성명 "병장 ○○○!"까지 해 주고..   그런다고 해서 국가에서 군인으로 알아 주는 건 아닌 게 문제일 뿐이죠.국가에서 현역 시절처럼 총기라도 지급해 주는 것도 아니고, 집 근처에 무슨 초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제 총까지 만들어서?? -_-)   더구나 남한테 이런 소리는 더욱 하지 말아야겠습니다.민간인 된 뒤라도 군기 빼지 말고 바르게 살아야 민간인 신분이 유지되지, 어영부영 굴었다간 다시 군대로 끌려간다거나..민간인이라도 아주 심한 중죄를 지으면 경찰이 아닌 헌병이 와서 잡아간다거나.. 군사 재판에 회부된다거나..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죽을 병을 고쳐 준 의사가 너무 고마운 나머지 "환자 시절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부과됐던 행동상의 각종 제약--이것저것 먹지 말고, 매일 무슨 약 반드시 먹고, 무슨 행동 하지 말고...--과 주의사항들을 앞으로도 모두 이행하면서 살겠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와는 또 반대로, 그런 것들을 이제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을... "앞으로 술 담배에 쩔어서 살아도 되고 진짜 내 마음대로 건강 따윈 내팽개치고 살아도 된다" 와 동급으로 알아듣는 것도 말귀를 못 알아들은 멍청한 짓이지요.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도 바로 이런 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바람직하냐 안 하냐의 차원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신분의 차이이고 위상의 차이입니다.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아니라 아예 율법을 근본적으로 초월한 법 아래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덧..이 글을 쓰고 나서 느끼는 건데,율법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자기 의'는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이 갖고 있는 '자기 의'하고 아주 비슷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요즘 군대가 군대냐? 애들이 다 군기가 빠졌어. 내 때는 말이야.." 이런 식.. ㅡ,.ㅡ;;[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11:2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10 09:15:37 | 김용묵
요즘 목회를 하면서 장례식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입관 예배, 발인 예배, 하관 예배, 장례 예배, 추모 예배 등 죽은 사람을 보내기 위한 절차성 예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들은 우리 조상들의 유교 혹은 불교 풍습을 그저 이름만 바꾼 것입니다.   "이런 것이 과연 기독교의 장례일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조만간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이 문제를 다루어서 교회의 규칙을 세우려고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므로 장례예배가 아니라 장례식이라고 해서 한 번만 예식을 행하는 것이 죽은 자와 산 자들을 위해 필요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러던 차에 전주 소망침례교회 목사인 김재근 형제가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좋은 내용이라 공유하고 싶어 올립니다. 좋은 의견이 있으면 답글도 주세요.   감사합니다.   죽음의 종교와 생명의 종교 기독교와 장례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기독교식' 장례의식이라는 것이 참 어색합니다. 조문을 가게 되면 빈소에서 어떤 의식을 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신앙은 참으로 죽음의 의식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장례식의 종교의식이 실제 죽은 자를 위한다기 보다는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하는 것이기에 '거창'할 수록 보기도 좋고 '위로'도 됩니다. 정말 죽음의 의식은 '죽은 자들'이 거행해야 제격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종교들은 죽음의 의식이 거창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잃어버린 인간의 눈으로만 보자면, 화려하고 거창한 의식속에서 조금이라도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49재를 거행하고 나니 이제 사랑하는 가족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종을 치고, 향을 피우고, 물을 뿌리고, 목탁을 두드리고, 경을 외우고..... 그렇지만 기독교에는 죽음의 의식이 없습니다. 사실 기독교식 장례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이죠. 우리 주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분이 장례식과 대면하면 언제나 죽은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생명이신 분께서 죽음의 의식을 가르치실리는 만무합니다. 기독교식 장례식을 말하자면, 죽음 앞에 슬퍼하고, 가족을 위로하고, 시신을 장사지내는 일입니다. 시퍼렇게 살아 계신 생명이신 분을 믿고 신뢰하는 신자들은 세상이 만들고 세상이 거기서 이득을 취하고 거짓 위로를 만들고 있는 '죽음의 의식'에 압도당하거나   종노릇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생명이신 분께서 속히 오셔서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죽음'에게 죽음으로 응징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11:2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09 14:37:05 | 관리자
  어제 밤 아이와 함께 요한복음 마지막 장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베드로와 함께 물고기도 잡고, 물고기를 구워먹기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 가끔 설명을 해 줍니다.   길게 하면 신경질 내니까(신경질 내는 이유 - 성경읽기를 빨리 마치기를 원하는데, 엄마가 설명을 하니까 길어짐.) 짧게 하지요.   "얘, 이건 부활체에 대한 거야." 부활체에 대한 설명을 하기도 전에    "알아요." 얼른 튀어나오는 아이의 말. 설명 필요없다는 얘기이지요.ㅋㅋ.       그런데, 우리 아이가 자기의 읽을 부분을 읽고 나서는   "잠깐..엄마, 예수님은 왜 제자들 옆에 계속 붙어계시지 도대체 어디를 가시는거예요?"   저의 대답..."글쎄..만나야하는 사람들이 많을터이니.. 이곳 저곳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았을까?"   "중요한 시기인데, 제자들 옆에만 계속 계셔야하지 않나요?"   아이는 그 때가 중요한 시기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도대체 제자들 옆에 계시면서 자꾸 가르치셔야지 어디를 다니셨는지..   저의 상상으로는  이 사람, 저 사람 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려 다니시지 않았을까..상상하는데..     혹, 아시는 분 , 또는 이 부분을 생각해 보신 분... 댓글 좀 부탁합니데이..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5 12:03: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08 13:05:07 | 백화자
20세기에 인간이 이뤄낸 위대한 과학 성과 중 하나는 원자력에 대한 지식이다.학생들이 무려 고등학교나 대학 학부 수준에서 배우는 물리 교재에 chapter가 하나 추가될 정도로, 종전의 고전 역학과는 차원이 다른 지식이 추가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은 예전에는 미처 상상도 할 수 없던 어마어마한 동력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원자력 발전은 태양에 전혀 근간을 두지 않고 에너지를 얻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20세기 이후에 시작된 찬란한 전기 문명은, 교류 전기의 실용화와 더불어 원자력 발전도 큰 일조를 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자력은 이내 핵무기라는 것을 만들었고, 국제 사회 정세를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바꿔 놓기도 했다. 예전에는 마음에 안 들면 애들처럼 서로 주먹으로나 툭탁거리고 싸우던 것이, 이제는 총을 손에 쥔 거나 마찬가지가 됐다는 소리이다.   현재까지 인류 역사상 자국민이 사는 도시에 핵무기를 맞아 본 나라는, 잘 알다시피 전세계에서 일본이 유일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맞았다. 2차 세계대전의 말기에 유럽에 독일, 이탈리아는 다 항복하고 히틀러마저 제거됐는데 아직 일본만 유일하게 개기고 있어서 저랬다. '무시무시한 폭탄'을 맞고서야 정신을 차린 일본은 왕이 직접 서면으로 연합국에 항복하고, 자기 식민지들에 대한 권리도 일체 포기한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이 정말 극적으로 끝나고, 우리나라도 일제로부터 해방된다. 아마 우리나라가 이렇게 당했으면 미국하고는 완전 철천지원수가 됐을 것이다. 방사선 피폭은 대물림까지 된다. 그 데미지의 레벨이 6 25 때 무슨 노근리 학살 같은 거하고 비교가 되나?   잘 알다시피 원폭은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상공에 먼저 떨어졌다. 의역 좀 하면 '귀여운 꼬마애'뻘 되는 길이 약 3미터, 무게 약 4톤쯤 되는 Little Boy 폭탄이 어지간한 여객기 고도와 비슷한 9.5km 상공에서 전투기로부터 투하되었다. 타이머를 걸었는지 뭐 어떻게 activate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폭탄은 한참을 추락하다가 약 550m 상공에서 그대로 펑 터졌다. 수류탄도 그렇고 폭발물은 약간 공중에서 터져야 사방팔방으로 가장 큰 파괴력이 나오는 법. 이 원폭도 일종의 공중 폭발을 일으켰다.   곧바로 눈을 보호하기 위해 가글을 착용한 당시의 전투기 승무원들은 정말 경악할 만한 광경을 목격하게 됐을 것이다.이것은 보어, 페르미, 천재 컴퓨터 과학자인 폰 노이만 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당대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일본 본토 지형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폭탄을 어디에서 투하하고 터뜨려야 가장 큰 피해가 나오는지까지 계산하여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그 첫 실험 대상으로 일본이 선택된 것이다.   눈을 상하게 할 정도의 엄청난 섬광이 비쳤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마어마한 불기둥과 무시무시한 후폭풍. 하늘이 어두워지고 그저 도미노처럼 힘없이 주저앉는 건물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순간.아마 핵실험 촬영 같은 것도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zoom 무지막지하게 당겨서, 과장 좀 보태면 천체 활동 관측하듯이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히로시마 시는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죽은 사람 시체 사진을 보니까 거의 유대인 홀로코스트 내지 관동 대지진 학살 사진 수준이었다. 물론 그 며칠 전에 미국에서는 원폭 투하를 예고하고 어서 대피하라는 경고 전단지를 살포하긴 했었다고 한다.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고방식이 "설마? 뭐 좀 위력이 큰 폭탄 떨어져 봤자, 늘 하던 대로 방공호로 대피하면 되겠지" 수준이었으며, 결국 원폭에 고스란히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예화는 기독교에서 복음 전할 때 자주 인용, 등장하기도 한다.)   나는 일본에 대해 완전 몸서리치게 증오하거나 딱히 피해 의식이 있지는 않다. 원폭 맞아서 도시 전체가 저렇게 개떡이 되고 만 것은, "꼬시다 쌤통이다 메롱"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정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봐도 정말 일본이 자기네가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   우리한테 한 짓이 얼마인데! 특히 잊어서는 안 되는 그들의 죄악 중 하나는, 관동 대지진 때 민심이 흉흉해지니까 조선인들을 폭도로 몰아서 수천, 수만 명을 다 학살하고, 그걸 일본 경찰과 정부 당국은 일부러 묵인까지 해 준 사실이다. 독립 운동 항일 투쟁을 하던 사람도 아니고 멀쩡한 민간인을! 사태가 수습된 뒤에도 이 학살극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을 진 쪽은 일본에 아무도 없었다.   외모가 비슷하니까 일부러 한국인이 발음하기 힘든 일본어 단어를 발음까지 시켜서 사람을 죽였으며, 그러다 심지어 몇몇 자국인도 오인 살해 당했다고 한다. 성경에서 사사기 12장 5~6절을 읽어볼 것. 오히려 조선인을 단원으로 고용하고 있는 야쿠자 같은 조직에서 조직원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애써 숨겨 줬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저런 죄값쯤은 좀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원폭 피해자 중에서도 조선인이 일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언급이나 진정한 반성과 사죄는 싹 회피하고, 오로지 핵폭탄을 맞아 자기네가 불쌍한 피해자인 것만 부각시키면서 동정을 호소하고 있으니, 경계해야 할 점이 아닐 수 없다. "다시는 이런 실수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일본 문화 특유의 뱅뱅 돌려 말하는 모호한 표현인데..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실수라고 생각하는 걸까?   '귀여운 꼬마애'를 실은 전투기를 조종한 사람은 폴 티베츠라는 베테랑 공군 조종사이다. 당시 3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대령이던 그는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 데 일조한 영웅으로 미국 내에서 추앙 받았으며, 나중에 원스타 준장으로까지 진급한 후 전역했다. 그리고 천수를 누리며 굉장히 오래 살다 2007년에 작고했다.그는 2002년이던가 미디어를 통해, 당시의 원폭 투하는 그저 명령에만 따른 것일 뿐 딱히 개인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회고했다.   사흘 뒤 나가사키 상공에 투하된 원폭은 원판보다 더 뚱뚱하고 위력도 좀더 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평지인 히로시마와는 달리 나가사키는 지형의 기복이 큰 편이어서 히로시마 만한 데미지는 나지 않았다.   핵무기까지 가미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세계 지성인들의 세계관, 인간관은 정말 큰 변화를 겪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아마 성선설에 대한 믿음이 크게 흔들리게 됐을 것이고, 이런 과학 기술로 이런 규모의 전쟁이 앞으로 더 터졌다간 진짜 지구가 멸망할 거라는 경각심을 갖게 됐을 것이다. 그러니 국가 위의 다른 중재 조직이라도 만들어서 세계 열강이 또다시 이런 끔찍한 전쟁에 도미노처럼 휘말리는 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명무실하던 국제 연맹도 없애고 국제 연합이라는 조직이 새로 생겼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세상에 전쟁이 없어지지는 않고 있다. 사악한 자에겐 결코 평화가 없다고 말하는 주님의 이사야서 말씀을 기억하자.   어쩌면 6 25 전쟁이 장기화되었다면, 냉전이고 나발이고 없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10년이 채 안 지나서 한반도에서 거의 세계 대전급의 피터지는 싸움이 또 벌어졌을지도 모르며, 최악의 경우 핵무기가 또 동원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맥아더 장군을 욕하고 비판하는 진영이 이런 점을 주로 들추곤 한다. 하지만 이런 진영은 그 불행의 근본 원인 제공자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언급이 없고, 저런 식의 주장을 하는 의도가 매우 불순한지라 본인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불순하다.)   사실 6 25도 1951년 하반기 이후부터는 38선 인근에서의 지겨운 엎치락뒷치락 소모전 위주였기 때문에, 미국도 필요 이상으로 소련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으며 어지간해서는 승산 없는 이 전쟁에서 적당히 손 떼고 싶었을 것이다. 이승만, 맥아더 같은 짝짜꿍이 맞는 꼴통(?)들만이 오로지 북진 통일을 고집했던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박정희 정권은 70년대 말에 우리나라도 전투기와 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했다고 선언했다. 이는 박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국방 과학 연구소 연구원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한 덕분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우리가 북한과 일본, 미국을 상대로 당당히 큰소리 치려면 우리도 핵무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비명에 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휘소 박사 같은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가지 않았다면 한국의 역사가 또 바뀔 수 있었을까? 얘기를 더 하자면 정치성 논쟁이 되므로 이 자리에서는 생략하겠다. (그런데 정작 이휘소 당사자는 오히려 유신 독재와 핵무기 개발을 강력 반대했던 걸로 유명하다. 김진명 씨의 소설에 나오는 설정은 허구이다 ^^)   아무쪼록 이 바닥으로 글을 쓰면서 또 느낀 것은, 역시 아는 것이 힘이고 냉혹한 세상에서는 힘이 최고라는 것. 어차피 강자와 약자가 둘 다 시편 20:7 말씀을 모르거나 안 믿는 상황이라면 말이다."무기를 만드는 자는 지배자가 되고 방패를 만들지 않는 자는 노예가 된다는 진리"는 돌도끼로 전쟁을 할 때부터 미사일로 전쟁을 할 때까지 인류문명이 만들어 놓은 진리이다. 과거에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서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국민들이,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이 부족해서 양국의 국력 차이가 그 정도이고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절대 아니다. 일본에 있는 동급의 저질 찌질이들하고 같이 댓글 논쟁, 사이트 DDOS 공격이나 주고받으면서 그게 애국인 줄로 착각하지는 말아야 한다.일본으로부터 받아낼 건 비용 대 효율 최대로 받아내고, 말 없이, 모방을 통해 창조를 해 내고, 실력을 쌓고 기술을 개발하고 국부를 창출하는 것이 일본을 가장 수준 높게 이기는 것이다. 일본을 그런 방법으로 이기려고 애썼던 옛날 지도자의 공도 과와 더불어 객관적으로 인정과 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나 싶다.   덧. 1. 이 글의 전반적인 논조로부터 느껴졌겠지만, 본인은 원자력 발전 찬성이고, 핵무기 개발도 그렇게 반대 안 한다. 남이 만들면 우리도 해야 된다 주의에 가깝다. -_-;; 그깟 인본주의적인 반핵 반전 운동 한다고 해서 세계 평화가 유지될 거라고 믿지 않는다.   2. 예전에 김문수 형제님의 글에서 무척 재미있는 견해를 본 적이 있고 본인 역시 이에 공감한다.'북녘'에 대해서 은근히 별로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것... 정말로 반공 교육의 영향인 것 100% 맞다. 통렬한 지적이다. ^^;; 본인은 비록 국민 교육 헌장 세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초등학교 때 반공 웅변 대회, <용감한 탈출>-_- 같은 Exodus를 연상시키는 반공 도서 정도는 접했다.   그 후 21세기가 돼서 셋째 하늘이 정말로 우주에서 북극이 향하는 그 방향의 '북쪽'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약간의 culture shock을 경험했다. 진짜다. 어렸을 때의 세뇌는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세뇌되려면 좋은 것에 세뇌돼야 한다.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 교육처럼 말이다.김 형제님의 글에 대해서 한번 댓글을 달려고 했는데 갑자기 웬 트롤이 출현해서 분위기가 영 흐려지면서, 미처 반응을 못 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11:2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08 09:59:51 | 김용묵
아주 좋은 책인데 무료배포한다는 소식입니다.   책 보기  http://mall.godpeople.com/mall/?G=9788992735070       책 제목: 짐승위에 탄 여자 (부제 : 로마카톨릭의 교회와 종말) P 426 / 13,500원저자 : DAVE HUNT, 데이브 헌트(저명한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역자: 정태윤 목사 (텍사스 달라스 침례교회) 종교 개혁의 역전제1장 짐승 위에 탄 여자제2장 믿을 수 있는 이유제3장 유월절 음모?제4장 밝혀지는 계시록제5장 비밀이라 바벨론제6장 일곱 산 위에 세워진 도시제7장 허위와 조작된 역사제8장 단절 없는 사도 계승?제9장 오류를 범하지 않는 이단들?제10장 무오성과 횡포제11장 이 반석 위에?제12장 음녀의 어미제13장 영혼을 유혹하는 자들제14장 기막힌 변신(變身)제15장 가증한 연합(聯合)들제16장 왕들을 다스리는 자제17장 순교자들의 피제18장 유대인 대학살의 배후제19장 바티칸, 나치, 그리고 유대인들제20장 세르비아인들의 학살제21장 바티칸의 렛트라인제22장 성서만이 유일한 권위라고?제23장 구원 문제제24장 "제사"로서의 미사제25장 배신당한 개혁제26장 배도와 종교통합제27장 마리아를 어떻게 볼 것인가?제28장 도래하는 새 세계질서부록 A. 연옥부록 B. 면죄부부록 C. 왕들 위에 군림한 추가 문헌들부록 D. 교황 무오설과 사도 계승설부록 E. 이단 교황들, 성경 그리고 갈릴레오부록 F. 전통에 대해서는?용어설명노트     이 책은 로마천주교가 왜 기독교가 아니며 적그리스도의 집단이고, 사악한 사탄의 종교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대단히 좋은 책입니다 미국에서도 이책은 많이 알려진 책으로 서점배포를 하지 않고 저희 BAND OF PURITANS  에서 선교도서로 보급하는 책입니다,  목회자들과 신학생 분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핵심도서입니다, 이책은 정식출판본입니다, 역자이신 정태윤 목사님께서 출판비를 후원해서 출간한 책입니다,   그런데 사악한 로마천주교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아직 모르시거나 두꺼운 책을 소화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시중에 쉽게 쓴 천주교 관련도서들이 있습니다, 그런 책들을 먼저 충분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짐승위에 탄 여자는  글자도 작고 신학적인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책을 어렵다고 하는 분들이 많아서 미리 알려드립니다,      <짐승위에 탄 여자>를 원하시는 분들은 주소와 연락처, 우편번호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등기소포로 보냅니다. (수신자 부담)    연락처가 없으면 보내지 않습니다, 반송되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신청은 저희 까페에 오셔서 댓글이나 쪽지로  남겨주시면 됩니다  한권까지는 무료로 배포합니다,   오인용 목사     BAND OF PURITANS   010-7502-6201 [출처] 카페 대문 (THE BAND OF PURITANS) | 작성자 퓨리탄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6:5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07 16:07:31 | 김재욱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이 지옥에 엄청 많이 간다!"   지난 2003년엔.. 극심한 생활고를 비관한 나머지 세 자녀부터 먼저 떨어뜨린 뒤 자기도 투신 자살한 한 주부의 이야기가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최소한 어린애는 그나마 하늘로 갔으니 다행이겠지만, 그렇게 죽은 여인은 지금 어디에 있겠습니까?과연 하나님의 판결이 불공정· 가혹· 불의한 걸까요?크리스천들은 이 사실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묵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와 권력을 마음껏 누렸던 사람들, 떵떵거고 살면서 나쁜짓 실컷 했던 사람들, 혹은 대중들로부터 아주 좋은 평판 받고 존경 받았던 유명인사나 종교인이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 간다고 말하기는 차라리 아주 쉽습니다. 그런 것을 대조하여 복음 전하는 만화 전도지 부류도 넘쳐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만큼이나.. 정말 안쓰럽고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들도 고생은 고생대로 하다가 지옥 엄청 많이 갑니다.아니 어쩌면,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지옥 가도 싸 보이는 사람이 지옥 가는 것보다 저런 경우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후자가 표본 크기부터가 전자보다 압도적으로 더 크니까요.   특히 안타까운 게 뭔지 아세요?차라리 대놓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개독안티 부류도 아니고,"그래 나는 평생 나쁜 짓 너무 많이 했는데.. 지옥에 좀 가도 싸지""나 같은 사람은 예수 믿을 자격이 부족해" / "좀 나중에 믿을게"   같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자포자기형입니다. 너무 착해서 구원도 못 받는 타입.너무 죄에 쩔어서 산 나머지, 죄의 결과 때문에 괴로움과 비참한 고통은 실컷 당할 대로 다 당하고도, 죄를 죄라고 보는 감각이 무더져 버린 것입니다.   그 마음 상태야말로 그가 과거에 평생 지은 죄를 합한 것보다 더 큰 죄라는 걸 일깨워 줘야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도 못 믿을 정도로 너무 착하고 겸손한 건지... 아니면 그 말 속에.. "그냥 난 그래도 일말의 죄를 즐기며 살래"가 몰래 숨어 있는지는 사람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마약 내지 연탄 가스에 중독되어 전신이 마비되고 죽어가고 있는데도, 뇌 조직이 녹을 때 너무 쾌감이 느껴지니까 "난 이 상태가 좋아" 이러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당신은 지금 중독 상태이고 죽어가고 있으니, 이곳에서 당장 나가서 맑은 산소 공급을 받고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걸 알리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이 지옥에 굉장히 많이 간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복음 전파에 소홀해서는 안 되고 자극을 받아야 하는 강력한 이유 중 하나임을 지난번 이은희 자매님의 간증글을 읽으면서 느꼈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11:2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06 21:05:44 | 김용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