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repent, repented 에 대하여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돌이기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실 때와
민23:19
God is not a man, that he should lie; neither the son of man, that he should repent : hath he said, and shall he not do it? or hath he spoken, and shall he not make it good?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은즉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
주님이 슬퍼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기록으로 주신 단어도
창6:6
And it repented the LORD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at his heart.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 또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고
성경 단어 'repent'를 단어 번역시
한글 선택에 대한 성경적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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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16:27:20 | 김원광
긴 내용이지만 신실한 성도님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글이네요. 십분일은 하나님께서 보신 인간 탐욕의 마지노선인 것 같아요. 성도들로 하여금 십일조 이상의 자원된 헌신으로 가도록 격려하셔야지 십일조 하는 사람을 성경에 대해 무지한 사람으로 폄훼하는 연구는 그만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009-10-31 15:24:47 | 손경문
제가 올린 글을 통해 이렇게 논의를 하면서 서로 교제할 수 있어서 감사할뿐입니다.
큰 줄기에서는 다들 같은 생각이신데 세부적인 부분에서 약간의 바라보는 시각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댓글을 통해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모두 말씀안에서 승리하시는 삶 되세요. 감사합니다.
2009-10-24 09:26:43 | 김학준
김원광님께 감사드립니다. 수고스러우실 텐데도 님의 마음이 잘 전달되는 말씀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먼저 기본을 갖추는 사람이 되어야 함에 통감합니다. 그리고 님께서 축복해 주신 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늘 순종하기를 소원합니다. 샬롬~~
2009-10-24 08:53:00 | 이재연
댓글과 답글,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저나 형제자매님들 각자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그 다음, 그다음.....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도 중요하지만 다음, 다음도 골고루면 좋을 것 같은 데.......
오고간 글 속에서 서로의 신앙관을 볼 수 있는
유익한 기회된 것 같습니다.
각자가 하나님이 거하고 계신 합당한 거처로서
우리가 섬기는 아름다운 교회(하나님의 집)를 세워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09-10-24 08:39:06 | 김원광
네 저도 체험을 얘기하자면 작은 체험부터 일생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체험이 있습니다.체험을 굳이 무시하거나 불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 체험이 말씀이신 예수님을 나타내기에는 너무나 개인적이기에 굳이 체험위주의 간증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체험이라면 나의 허물이 자꾸만 드러나고 벗겨져야한다는 것이기도 하지요.그리고 이번여행길에 밥죤스대학에서 어떤 여학생을 만났습니다.그곳에서 공부하고 졸업을 할 예정인데 한국에 오면 친구들에게 이 학교에서 배워서 익힌 성경적인 영향을 끼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더니 자기 학교는 성령을 부인하는데 어떻게 이런 학교에서 좋은 영향을 받냐는 것이었습니다..갑자기 예상치 않은 대답에 의아했는데 말인즉은 조용기목사를 좋아하지 않는 교회라는 것입니다.이 어린 학생처럼 성경적인 실행을 하면 성령을 부인한다는 단정도 극단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너무 짧은 시간이라 긴 얘기를 못했지만 왜 그 여학생은 말씀과 성령을 이분화했는지 안타깝지요.김**형제의 도둑고양이 일화를 입력해 놔야겠습니다.^*^
2009-10-24 07:56:25 | 정혜미
대부분의 내용은 댓글을 쓰신 다른 성도님들에 대한 저의 믿는 바를 쓴거고요.
제가 보기에는 이재연님의 체험에 대한 댓글은 균형잡힌 성도의 모습에 가까울 겁니다.
이재연님께서 말씀하신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에 대한 의견이었는데요.
제가 믿는 바를 크게 두가지로 말하자면요,
아시듯이
첫째로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시려면 바른 성경을 많이 읽고 알아야하고요.
둘째로 글자가 중요하지만 의미(영의사역자)를 놓치고 글자(율법자구의 사역자)에만 묶이면
사람을 찌르려고 칼을 차고 있는 강도와 다를 것이 없답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2000년전에 이땅에 오셨을 때
구약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들을 질책하셨던 것을 기억하시겠지요.
너희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들이면서 그것도 모르느냐고 하셨지요.
그들은 문자로만 알았지 그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지요.
예를 들면 십계명같은거죠.
예수님은 하나님을사랑하고, 네이웃을 사랑하라 이라는 말씀으로
의미를 함축하셨던 것처럼 요.
그렇듯이 우리도 성경을 읽어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를 생각하며 읽어서
그분을 뜻과 말씀으로 의도하시는 마음을 알아간다면
그분의 뜻과 벗어난 극단적인 모습의 신앙생활을 피하며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방법이라고 제가 믿는 것은
이재연님께서 듣고 읽은 성경말씀들 중 빼앗기지 않고 지켜 마음에 남겨둔 하나님의 말씀을
이재연님의 생활속에서 성령님께서는 이재연님 생각에 하나님의말씀이 떠오르도록 하셔서
선한 사역에 참여하시도록 알려주시는 겁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각자의 선택이겠지요.
주님께 순종해서 그분의 기쁨되시는 이재연님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2009-10-23 22:55:33 | 김원광
김원광님께서 제게 말씀해 주시고 교제를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언뜻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ㅠㅠ 각 문장들은 의미를 알겠는데 전체적으로 제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어떤 방향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네요. 혹 수고스럽더라도 다시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샬롬~~
2009-10-23 20:20:35 | 이재연
위 글들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말씀이 있네요
(마13:29) 그가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가라지를 모으다가 그것들과 함께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위 두 분의 글을 읽으면 너무 극단적 근본주의 책을 많이 접하신 신앙같습니다.
성경은 기록된 말씀을 믿는 믿음이 더 확실하다고는 하셨지,
그렇다고 경험과 체험을 부정적으로는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성경을 검색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어떠하심을 알아가게 하는 통로 역할로
우리 성도 각자의 삶(생활신앙, 간증하듯이) 속에서 경험과 체험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다 알 수는 없습니다만
각자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심을 알고 알아가는 만큼 생활속에서
그분과의 교제(경험과 체험)가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오순절이나 은사주의와 같은 신앙관은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갖고 있는 선한 것까지도 모두 뽑아 버리는 것을
하나님도 원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에게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재연님!~
구약성경을 들고 그렇게 많이 연구했던 많은 유대지도자들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분들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기에 앞서 문자(율법자구의 사역자)에 머무르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신약성도인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마음으로 성경 문자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보세요.
성령님도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벗어나지 않고 성경적으로 일하시는 분인 것은 아시죠!
(딤후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2009-10-23 13:25:52 | 김원광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체험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겁니다.
이를 통해서 죄가 미워지는 체험, 주의 말씀이 사랑스러워지는 체험,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겪지요
그 외의 다른 체험의 중요도는 아주 낮고 어떤 것들은 저급에 속한다고 할수있겠습니다.
즉, 그 외의 체험들이 부수적으로 나타날수도 있겠지만 결코 메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상기 언급된 중요한 체험들은 너무나도 가볍게 여기게 되고 그 자리에
정체를 정확히 밝힐수 없는 금이빨체험, 병고침, 방언과 기적체험들이 들어가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2009-10-23 12:57:41 | 김학준
무엇을 체험하고 추구하는지가 중요한 명제이지만 흔히 들리거나 거론되는 체험이야기에서는 도저히 성령님의 활동이라고 생각이 되지 않는데 정상적이고 인격적인 정신과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립고 또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좀 더 적극적인 교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2009-10-23 12:02:01 | 정혜미
체험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체험만을 추구해서도 안 되지만 체험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뭔가가 과도하게 엇나가면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측도 과도하게 엇나가는 경향이 항상 있어 왔습니다. 순복음 계열이나 오순절 계열처럼 과도하게 체험을 강조하면 보수주의측에서는 과도하게 체험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성경말씀과 체험 모두 성경말씀에서 가르치신 바와 같이 또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09-10-23 08:34:14 | 이재연
아멘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귀한글 감사드립니다.
2009-10-22 11:10:27 | 송재근
오늘날 기독교의 마약같은 고질적인 문제의 큰 원인은그리스도인들이 체험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뜨거운 체험, 뭔가 보고 강렬한 느낌을 얻고 싶은 체험 .주님을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듣고환상과 예언, 입신, 방언등으로 체험해서 영적인 우월성도 얻고 스스로 체험으로 믿음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이신앙의 타락과 교회의 타락을 가져온 것이다.
신사도운동, 이머징교회, 각종 신비주의,. 영성운동이 활개를 치면서 교회를 막장으로 몰고가는 것이체험의 우상을 섬긴 결과다
목사들은 어디서 이상한 은사를 배워와서 교회에서 선지자 노룻하고, 사도노룻하고, 예언자 행세해서 권위를 높히고 헌금을 더 많이 울겨내고, 스스로 하나님 행세를 해가며 목회를 해야 주변에서 대단한 목사로 추켜세워준다
모두가 체험의 우상에 빠진 것이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를 읽어보면 그많은 체험을 한 사도바울이나 베드로, 야고보 등 예수님의 직계제자들인 이들은 체험을 해볼만큼 해보았는데도자신의 체험에 대해 그렇게 언급하지 않고다루지도 않는다
오늘날 같은 목사들같으면 아마도 위성방송, 모든 언론매체 불러다 종합운동장에서자신이 체험한 내용으로 멋지게 쇼하고, 안수하고, 난리 부르스를 추었을텐데사도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독교는 명제적인 진리를 우선하고 그것으로 믿음을 관리하며 믿음을 세우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오늘날 처럼 체험을 우상으로 섬기는 시대가 과거 기독교역사에서 있었던가 !!!!!
로마천주교같은 우상숭배집단들이나 지금도 성유물숭배하면서 온갓 사이비. 사기치는 것을개신교가 그대로 흉내내면서 영적인 바벨론을 만들고 영적인 오물통으로 만드는 것이다,
지금 여기저기 세미나, 집회, 교회들이 하는 다양한 예배, 기도회가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그분의 뜻을 순종하는 것을 내버리고오직 온갓 사이비 체험을 통해자신의 신앙을 확인하려는 것이바로 병들고, 타락하고, 비성경적인 신앙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정통 기독교는 철저하게 성경의 말씀/계시 의존적 신앙이다.
이것이 가장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을 만들고참된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는 길이다.
그런데 20세기 초반부터 사이비 오순절 운동이 전세계 교회를 쓰나미처럼 휩쓸어오늘날 교회를 이지경으로 만든 것이다.
오순절은 사이비이며, 비성경적이고, 더러운 누룩이다교회를 오염시키고 타락하게 하며 로마천주교와 연합을 하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오늘날 개신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려면 오순절 신앙/신학을 버리는 것부터 해야 한다
그것을 끝까지 끌어안고 가다가는 교회는 더더욱 영적인 타락의 수렁에서 벗어날수가 없다독사를 품에 안고 자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이사실을 목사들과 신학생들이 먼저 깨달아 올바른 성경/교리를 가르치는 데 전념하라지금의 교회가 속히 성경의 자리에 다시 정착하는 것이교회개혁과 부흥의 첫걸음이다.
오인용목사 청교도개혁주의 도서보급선교회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20:33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0-22 08:53:18 | 김학준
오순절 은사 운동 바로 알기 책을 펴내면서 간단히 동영상을 올립니다.
오순절 은사 운동 바로 알기 동영상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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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4 09:01:58 | 관리자
가톨릭의 신비적 영성에 중독 된 한국교회 한국교회에 침투한 ‘가톨릭 영성’의 문제와 위험 김성건 논설위원/서원대 교수 지성사적으로 보아, 미국의 히피 그룹을 위시해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 기성의 이데올로기와 체제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반(反)문화운동이 잇달아 격렬하게 전개된 것은 지난 196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세계적 수준에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대표한 거대 관료 조직으로서 가톨릭교회는 자연스럽게 안팎의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세계의 보편적 교회를 표방하는 가톨릭교회로서는 그 같은 비판적인 저항의 시대 조류에 어쩔 수 없이 부응해 모종의 신학적 대타협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가톨릭교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3년간에 걸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해 타종교에 대한 종전의 권위주의적, 배타적 태도를 바꾸어 종교 간에 대화를 앞장서서 추구하는 에큐메니즘(ecumenism, 초교파주의)의 선봉에 서는 등 이른바 종교다원주의 쪽으로 일대 신학적 전환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교리)과 개신교회의 가르침 양자 사이에 종래 존재했던 뚜렷한 간격이 시간이 흐르며 점차 흐려지게 됐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경우는 지난 18세기 말 조선에서 포교가 처음 시작된 이래 수많은 종교적 희생자 곧, 순교자를 내는 등 줄곧 강하게 이단시하고 금지했던 유교적 조상제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이제는 한국의 전통문화의 한 부분으로 돌연 인정되는 일이 벌어졌다. 역사적으로 보아, 지난 1세기에 오순절 성령운동의 결과로 초대 교회가 출현한 이후 기독교가 핍박을 받던 중 3세기에 들어와서 로마 제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 국교로 공인됐다. 그렇지만 그 당시 가톨릭교회는 초대교회의 전통보다는 오히려 그 주위에 있었던 이방 종교들의 주술적 요소를 상당 부분 수용한 전통이 오늘까지도 면면히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1960년대의 히피문화로 대표되는 반문화 운동을 배경으로 지난 1980년대에 출현한 ‘탈근대’, ‘다원주의’, ‘개인주의’, ‘감성’ 등으로 표상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흐름과 비교적 최근인 1990년대에 나타난 세계화와 정보화의 영향 아래 세계 종교들 중에서도 기독교 전반 특히 한국 개신교 내에서 약 10년 전부터 ‘제도 종교’와 구별되는 주관적 ‘경험’에 바탕을 둔 이른바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관심이 갑작스럽게 크게 고조됐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특별히 끄는 측면은 바로 2006년 말 오늘에 이르러서는 본질적으로 다분히 주술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가톨릭 영성’이 16세기 말 당시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등 각종 주술 타파를 목표로 이루어진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자처하는 보수적인 한국 개신교회에 마저도 조금씩 미묘하게 침투해 이제는 사실상 거의 지배하게 된 새롭고도 자못 흥미 있는 현상이다. 필자는 종교를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종교사회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평소에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은 복음주의 신앙은 마땅히 가톨릭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돼야 한다고 믿는 한 사람의 개신교 신자로서 최근에 한국 교회에 침투한 ‘가톨릭 영성’의 문제와 이것의 위험을 제대로 밝히는 일이야말로 현재 침체 상태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의 이노베이션을 위해 여러모로 매우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과제라고 본다. 오늘날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로마 가톨릭 스타일의 영성’ 혹은 달리 말해서 ‘종교개혁 이전의 영성’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영성은 많은 경우 이방 종교들로부터 차용된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의례적인 기도 혹은 지루한 되풀이 기도, 영창, 곧 시편 따위의 글귀를 단조롭게 읊는 일,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명상(meditation), 집중기도(centering prayer), 곧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며 단순히 안식을 취하는 명상적 행위 등이다. 그래서 약 120년 전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이래 현재까지도 미국의 문화적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 진영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북미의 주요 신학교중 거의 가장 대표적 기관인 초교파적 풀러신학교의 ‘영성’ 코스 관련 주요 필독 도서 목록에는 물론 한국의 대표적 신학교들의 각종 ‘영성’ 과목의 경우도 저자의 상당수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토마스 아 켐퍼스(Thomas A. Kempis) 등 로마 가톨릭 신자인 것을 새삼 주목할 수 있다. 한편, 금년 여름 한국을 잠시 방문해 연일 개최한 집회를 통해 국내의 수많은 성도들에게 대단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미국 남가주 소재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데, 이 릭 워렌 목사 역시 명상, 집중기도 및 여타 가톨릭의 이교도적 영성 형태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로마 가톨릭 저자들의 주장을 자신의 저작이나 설교에서 빈번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체적 예로서, <목적이 이끄는 교회>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워렌 목사는 존 메인(John Main)을 인용하고 있는데, 메인은 베네딕트 수도사로서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수도원의 지도자들,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 같은 우리들 속에 남아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또한 워렌 목사는 북미 기독교계에서 현재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사람으로서 최근 한국을 방문해 당시 국내 기독교계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커다란 주목을 받은 바도 있는 <영적 훈련과 성장>과 <기도>의 저자인 퀘이커 출신의 신비주의자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가 강조하는 ‘명상’을 실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 시대의 영성신학자를 대표하는 목사로 이미 잘 알려진 포스터가 창시한 이른바 ‘레노바레’(Renovare) 운동은 오늘날 미국의 유명한 윌로우크릭 교회를 위시해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명상의 각종 테크닉에 바탕을 둔 레노바레 운동은 본래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퀘이커 전통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진보적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초교파주의(ecumenism)의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운동이다. 주지하듯이 교파 간 일치와 연합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즘은 기본적으로 교리(doctrine)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전략을 갖고 있다. 이로써, 필자는 오늘날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종교적(가톨릭) 신비주의’와 ‘성서적 영성’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는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교회 내의 ‘신비주의의 발전’과 ‘성령운동의 번성’ 양자 사이에 매우 흥미 있는 관련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순절 성령운동(Pentecostalism)과 카리스마 운동들은 놀랍게도 많은 측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속에서 발전한 신비주의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는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인 존 윔버(John Wimber) 같은 이가 그의 책 <파워 이반젤리즘(Power Evangelism)>에서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를 아무런 문제없이 추천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로마 가톨릭 진영 속에서 수용되고 있는 관점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카리스마적 부흥을 위한 예언자적 충동(자극)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성령세례’ 경험, 비전(환상), 내적 목소리, 황홀감과 엑스터시, 진위가 의심스러운 예언하기, 모종의 힘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각종 방언 따위 같은 카리스마 운동과 오순절 성령운동의 주요한 표현들은 전적으로 로마 가톨릭 신비주의와 일치한다. 오늘날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오순절 성령운동 및 카리스마운동 추종자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가톨릭신앙과 새로운 복음주의가 기묘하게도 동일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왜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될까? ‘교리’(doctrine, 신조)와 ‘헌신/신앙심’(devotion) 사이에는 종종 긴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올바른 교리는 자연적으로 올바른 헌신/신앙심을 갖다 준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한국 개신교회는 차제에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종교적 감정주의’(religious emotionalism)를 ‘기독교 영성’과 잘못 동일시하는 오류를 더 이상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한국 교회 내에서 유명한 간증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드라마틱한 중생 체험과는 뚜렷이 모순 되는 치명적인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일으킴으로써 기독교의 공신력이 크게 추락하는 일이 종종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구굿닷컴 이영주 기자의 2006년 12월 25일자 글 ‘드라마틱한 간증의 함정’ 참조). 이는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에 대한 강단의 가르침(설교)과 기독교계 언론의 수준 양자 모두가 아직 매우 낮은 데 머물러 있다는 것을 잘 방증한다. 끝으로, 필자는 신비적 경험에 대한 우리 개신교 크리스천의 사고를 기본적으로 틀 지우는 데 중심이 될 수 있는 두 개의 성경 구절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가 나타나 있는 시편 131편과 천사숭배와 금욕주의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 있는 골로새서 2장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이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20:33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0-01 23:59:31 | 관리자
그렇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청년 사역으로 유명한 하정완 목사의 열린예배 드라마 관련 저서에 보면, 서두에서 그는 유학 중 참여한 윌로우크릭의 열린예배(구도자예배, Seeker Sensitive Service)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이런 열린예배의 시작은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만든 드라이브-인 처치, 즉 자동차 극장처럼 넓은 정원에 차를 타고 모여 스크린을 보며 예배하는 것이 그 시초였으며 이에 영향받아 그 뒤를 이은 것이 빌 하이블스와 릭 워렌 등이겠지요. 물론 계보로 본다면 로버트 슐러보다 앞서 적극적 사고방식의 주창자 노먼 빈센트 필이 있을 겁니다.
아무튼 이런 예배에서 뭔가 자극을 받고 후련해지는 느낌을 은혜로 아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시들해질 경우 더욱 자극적인 방법을 쓰는 것은 주최측이나 참여자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은사운동으로 옮아 가겠지요.
뉴에이지 아티스트 시크릿 가든의 You raise me up 같은 노래는 그 대상 You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단지 종교적 선율과 CCM 같은 가사로 크리스천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여러 찬양사역자들이 앞 다투어 자기 레퍼터리로 삼아 왔습니다. 교회에서 하면 다 좋다고 생각하는 순진하고 무지한 크리스천들은 지금도 이 노래를 찬양이나 CCM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사실을 알아도 그게 뭐 어때서? 라고 할 이들도 많습니다. 문화는 도구이며 중립적이라는, 좋게 쓰면 좋은 것이라는, 점차 팽배해지는 주관적, 상대적 관점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절대 선이나 악은 없다는 위험한 생각의 씨앗임을 그들은 모릅니다.
이런 움직임이 점점 거세지고 또 다른 형태로 변화를 거듭할 것을 알기에 안타깝지만, 제발 한국교회에 참복음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기를 바라게 됩니다. 가족이나 친구도 설득하기 어렵고,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회방향에 반하는 요주의 숙청대상(?)이 되는 현실입니다.
글이 좀 길어졌네요.^^ 아무튼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열린예배의 심각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2009-10-01 00:01:22 | 김재욱
알파코스, G12 프로그램을 도입한 한국의 수많은 교회들이 열린 예배를 하고 있다. 열린 예배의 기원은 미국이며 빈야드 운동을 하는 존 윔버의 교회와 릭 워렌의 새들백 교회, 하이블스의 윌로우크릭 교회, 조엘 오스틴의 리이크우드 교회 등 이머징 처치들로부터 시작하여 한국 교회들에 퍼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머징 처치 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열린 예배이다. 그러나 이 이머징 처치 운동이 복음주의 진영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의 영향이라는 비판이 미국에서 일고 있다. 특별히 알파코스와 G12 비전을 하는 교회들은 기존의 전통 예배를 전부 열린 예배 체제로 바꾸고 있다. 그것은 알파코스와 G12 자체가 능력 예배, 능력 찬양, 능력 전도를 강조하면서 전통 예배에서 탈피할 것을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배조차도 빈야드 교회의 예배로 바꾸라는 것이다.
G12는 특히 예배의 강렬성을 요구하는데 이 G12의 열린 예배에 참석하면서 본인이 느낀 몇 가지점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 열린 예배에서는 기존의 찬송가 대신 CCM을 주로 사용한다. 그 곡의 근원이 어디이든지 예수와 하나님의 이름만 붙으면 찬양 곡의 자격이 된다. 심지어는 사탄숭배자들이 퍼뜨린 곡과 뉴에이지 음악에 예수와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 만든 찬양도 있는데 이것도 묻지 않는다. CCM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가에 대하여 검증되지 않고 여과되지 않은 음악이다.
2. 열린 예배에서의 가장 주된 악기는 신디사이저와 드럼과 전자 기타이다. 전자화된 음이 예배자를 리드한다.
3. 열린 예배의 단상은 찬양 리더와 악기 연주자들에 의하여 점령된다.
4. 열린 예배에서는 악단 연주의 볼륨을 극단적으로 올려서 일차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청각적 감성적 질서를 마비시키고 소리로써 예배자를 제압한다.
5. 일단 제압된 예배자는 인도자의 감정을 흥기시키는 제스처와 열광하게 하는 멘트에 동화되며 감정의 최고조 상태에 빠진다. 인도자와 찬양 리더들은 예배자들이 동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을 하도록 유도한다.
6. 예배자는 예배자가 가지고 있는 지정의가 균형 있게 갖추어진 채 거룩한 마음으로 예배 드릴 여유도 없이 오로지 감정적 흥기 상태로만 이입되어 버리며 예배당은 열광의 도가니가 된다.
7. 예배자들이 찬양을 통하여 감정적이 되며 클라이맥스 시점이 되면 설교자는 연극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처럼 아무런 예배 의장도 갖추지 않은 복장으로 단상에 등장하여 설교를 시작한다.
8. 감정이 흥기된 예배자는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든지(별로 대수로운 말도 아닌데) 아멘 아멘하게 되어 있다.
9. 설교자는 대부분 예배자의 기분을 좋게 하는 성공주의, 기복주의, 행복추구주의 설교를 한다. 간혹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인의 희생적 삶에 대하여 설교하더라도 이 설교는 말로 그칠 뿐이며 전체적으로 보면 설교자는 예배자를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로 이끌어간다.
10. 설교자는 단상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고 단상을 휘저으며 걸어 다니며 강한 제스처까지 보이며 설교를 한다.
11. 이러한 열린 예배를 통하여 목사의 카리스마는 자동적으로 높여진다.
12. 이러한 열린 예배의 분위기가 자연적으로 온 교회의 교인에게 젖어들게 되면 수양회나 저녁 예배 등을 통하여 은사주의 사역을 실시한다. 이때 방언을 하도록 격려하고, 쓰러뜨림과 각종 표적 보임, 축사 등을 시행한다. 이렇게 하면 할수록 목사의 카리스마는 더욱 고양되며 그읜 위상은 높아지고 능력과 병 고침을 행하는 목사로 소문이 나며 군중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게 된다.
참으로 이런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받으실 것인가? 열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감정이 고양된 상황 또는 열광하는 상태를 성령의 충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예배는 의식이다. 예배는 가장 선별되고 거룩한 것을 우리의 마음에 실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이에 대한 급부로 하나님의 귀하신 말씀을 받는 자리이다.
예배에서는 찬양도 세속화되지 않은 것을 선별해야 하며 정숙한 마음과 몸가짐이 필요하고 또 감정과 이성의 조화가 깨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너무 기뻐서 춤추고 싶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의식의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날뛸 수 있단 말인가 ? 날뛰고 싶도록 기쁘지만 절제해야 한다. 통곡하며 마음을 쏟아 놓고 싶지만 절제해야 한다. 예배자가 내는 소리와 악기의 소리도 조심스럽고 경건하려고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술자리의 노래처럼 볼륨을 최고로 올려놓고 고성방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예배 처소는 하나님이 계신 자리이다. 두렵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자리이다. 그렇게 날뛰지 않아도 통곡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신다. 예배는 어떻게 하든지 정결하고 거룩한 것을 드리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외양적으로도 그렇게 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열린 예배 처소는 한마디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가 아니라 예배자가 도취되어 일방적으로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리로 변하여 버렸다. 요란한 신디사이저와 전자 기타와 드럼의 귀가 찢어질 정도의 엄청난 소리에 자극되고 조작된 감정만이 난무한다. 여기에 설교는 예배자의 비위를 맞추는 세속적 것으로 끝나버린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란 말인가?
이런 열린 예배를 하면 당장 성도들이 꼬이고 교회는 성장할 지 모른다. 겉으로는 교회의 분위기가 정열적이고 생동감 있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연극의 연출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같이 얼마든지 그렇게 보이도록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 모인 성도들은 복음의 정수를 맛보지 못한 채 늘 영적 갈증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할 것이고 더 강한 열광과 은사주의를 찾아 방황하게 될 것이다.
한국 교회들은 지금 시급히, 너무도 시급히 이 열린 예배의 정체에 대하여 논하고 성도들을 오도하는 잘못된 행태를 시정해야 한다.
2009-09-30 21:02:21 | 관리자
열심히 읽었습니다.그런데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좀 더 분발해서 주위에 잠들어 있거나 무덤덤한 영혼들을 깨울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이 글은 확실한 분별을 잘 표현했으므로 프린트해서 전단지처럼 나누어주고 싶습니다.
2009-09-29 03:06:56 | 정혜미
가톨릭의 신비적 영성에 중독 된 한국교회 한국교회에 침투한 ‘가톨릭 영성’의 문제와 위험 김성건 논설위원/서원대 교수 지성사적으로 보아, 미국의 히피 그룹을 위시해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 기성의 이데올로기와 체제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반(反)문화운동이 잇달아 격렬하게 전개된 것은 지난 196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세계적 수준에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대표한 거대 관료 조직으로서 가톨릭교회는 자연스럽게 안팎의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세계의 보편적 교회를 표방하는 가톨릭교회로서는 그 같은 비판적인 저항의 시대 조류에 어쩔 수 없이 부응해 모종의 신학적 대타협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가톨릭교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3년간에 걸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해 타종교에 대한 종전의 권위주의적, 배타적 태도를 바꾸어 종교 간에 대화를 앞장서서 추구하는 에큐메니즘(ecumenism, 초교파주의)의 선봉에 서는 등 이른바 종교다원주의 쪽으로 일대 신학적 전환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교리)과 개신교회의 가르침 양자 사이에 종래 존재했던 뚜렷한 간격이 시간이 흐르며 점차 흐려지게 됐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경우는 지난 18세기 말 조선에서 포교가 처음 시작된 이래 수많은 종교적 희생자 곧, 순교자를 내는 등 줄곧 강하게 이단시하고 금지했던 유교적 조상제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이제는 한국의 전통문화의 한 부분으로 돌연 인정되는 일이 벌어졌다. 역사적으로 보아, 지난 1세기에 오순절 성령운동의 결과로 초대 교회가 출현한 이후 기독교가 핍박을 받던 중 3세기에 들어와서 로마 제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 국교로 공인됐다. 그렇지만 그 당시 가톨릭교회는 초대교회의 전통보다는 오히려 그 주위에 있었던 이방 종교들의 주술적 요소를 상당 부분 수용한 전통이 오늘까지도 면면히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1960년대의 히피문화로 대표되는 반문화 운동을 배경으로 지난 1980년대에 출현한 ‘탈근대’, ‘다원주의’, ‘개인주의’, ‘감성’ 등으로 표상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흐름과 비교적 최근인 1990년대에 나타난 세계화와 정보화의 영향 아래 세계 종교들 중에서도 기독교 전반 특히 한국 개신교 내에서 약 10년 전부터 ‘제도 종교’와 구별되는 주관적 ‘경험’에 바탕을 둔 이른바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관심이 갑작스럽게 크게 고조됐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특별히 끄는 측면은 바로 2006년 말 오늘에 이르러서는 본질적으로 다분히 주술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가톨릭 영성’이 16세기 말 당시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등 각종 주술 타파를 목표로 이루어진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자처하는 보수적인 한국 개신교회에 마저도 조금씩 미묘하게 침투해 이제는 사실상 거의 지배하게 된 새롭고도 자못 흥미 있는 현상이다. 필자는 종교를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종교사회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평소에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은 복음주의 신앙은 마땅히 가톨릭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돼야 한다고 믿는 한 사람의 개신교 신자로서 최근에 한국 교회에 침투한 ‘가톨릭 영성’의 문제와 이것의 위험을 제대로 밝히는 일이야말로 현재 침체 상태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의 이노베이션을 위해 여러모로 매우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과제라고 본다. 오늘날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로마 가톨릭 스타일의 영성’ 혹은 달리 말해서 ‘종교개혁 이전의 영성’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영성은 많은 경우 이방 종교들로부터 차용된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의례적인 기도 혹은 지루한 되풀이 기도, 영창, 곧 시편 따위의 글귀를 단조롭게 읊는 일,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명상(meditation), 집중기도(centering prayer), 곧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며 단순히 안식을 취하는 명상적 행위 등이다. 그래서 약 120년 전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이래 현재까지도 미국의 문화적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 진영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북미의 주요 신학교중 거의 가장 대표적 기관인 초교파적 풀러신학교의 ‘영성’ 코스 관련 주요 필독 도서 목록에는 물론 한국의 대표적 신학교들의 각종 ‘영성’ 과목의 경우도 저자의 상당수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토마스 아 켐퍼스(Thomas A. Kempis) 등 로마 가톨릭 신자인 것을 새삼 주목할 수 있다. 한편, 금년 여름 한국을 잠시 방문해 연일 개최한 집회를 통해 국내의 수많은 성도들에게 대단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미국 남가주 소재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데, 이 릭 워렌 목사 역시 명상, 집중기도 및 여타 가톨릭의 이교도적 영성 형태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로마 가톨릭 저자들의 주장을 자신의 저작이나 설교에서 빈번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체적 예로서, <목적이 이끄는 교회>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워렌 목사는 존 메인(John Main)을 인용하고 있는데, 메인은 베네딕트 수도사로서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수도원의 지도자들,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 같은 우리들 속에 남아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또한 워렌 목사는 북미 기독교계에서 현재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사람으로서 최근 한국을 방문해 당시 국내 기독교계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커다란 주목을 받은 바도 있는 <영적 훈련과 성장>과 <기도>의 저자인 퀘이커 출신의 신비주의자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가 강조하는 ‘명상’을 실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 시대의 영성신학자를 대표하는 목사로 이미 잘 알려진 포스터가 창시한 이른바 ‘레노바레’(Renovare) 운동은 오늘날 미국의 유명한 윌로우크릭 교회를 위시해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명상의 각종 테크닉에 바탕을 둔 레노바레 운동은 본래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퀘이커 전통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진보적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초교파주의(ecumenism)의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운동이다. 주지하듯이 교파 간 일치와 연합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즘은 기본적으로 교리(doctrine)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전략을 갖고 있다. 이로써, 필자는 오늘날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종교적(가톨릭) 신비주의’와 ‘성서적 영성’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는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교회 내의 ‘신비주의의 발전’과 ‘성령운동의 번성’ 양자 사이에 매우 흥미 있는 관련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순절 성령운동(Pentecostalism)과 카리스마 운동들은 놀랍게도 많은 측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속에서 발전한 신비주의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는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인 존 윔버(John Wimber) 같은 이가 그의 책 <파워 이반젤리즘(Power Evangelism)>에서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를 아무런 문제없이 추천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로마 가톨릭 진영 속에서 수용되고 있는 관점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카리스마적 부흥을 위한 예언자적 충동(자극)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성령세례’ 경험, 비전(환상), 내적 목소리, 황홀감과 엑스터시, 진위가 의심스러운 예언하기, 모종의 힘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각종 방언 따위 같은 카리스마 운동과 오순절 성령운동의 주요한 표현들은 전적으로 로마 가톨릭 신비주의와 일치한다. 오늘날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오순절 성령운동 및 카리스마운동 추종자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가톨릭신앙과 새로운 복음주의가 기묘하게도 동일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왜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될까? ‘교리’(doctrine, 신조)와 ‘헌신/신앙심’(devotion) 사이에는 종종 긴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올바른 교리는 자연적으로 올바른 헌신/신앙심을 갖다 준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한국 개신교회는 차제에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종교적 감정주의’(religious emotionalism)를 ‘기독교 영성’과 잘못 동일시하는 오류를 더 이상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한국 교회 내에서 유명한 간증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드라마틱한 중생 체험과는 뚜렷이 모순 되는 치명적인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일으킴으로써 기독교의 공신력이 크게 추락하는 일이 종종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구굿닷컴 이영주 기자의 2006년 12월 25일자 글 ‘드라마틱한 간증의 함정’ 참조). 이는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에 대한 강단의 가르침(설교)과 기독교계 언론의 수준 양자 모두가 아직 매우 낮은 데 머물러 있다는 것을 잘 방증한다. 끝으로, 필자는 신비적 경험에 대한 우리 개신교 크리스천의 사고를 기본적으로 틀 지우는 데 중심이 될 수 있는 두 개의 성경 구절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가 나타나 있는 시편 131편과 천사숭배와 금욕주의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 있는 골로새서 2장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이다.
2009-09-28 13:15:4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