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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분석하셨네요. 개혁주의 교사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심판석은 모릅니다. 오직 흰왕좌(백보좌) 심판만 알고 있으므로 구원받았어도 이긴자들만 휴거되고 나머지는 흰왕좌 심판에서 심판받는다 합니다. kjb 1611 우리말 흠정역성경과는 너무 다르니 신학의 방향도 다르다고 봅니다.
2016-09-01 16:10:52 | 최재영
안녕하세요 ^^ 환난 전 휴거를 연구 중 제가 알게 된 진리를 나누고자 글 올립니다. 모쪼록 형제/자매님들께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거의 대부분 개신교에서는 교회 시대가 끝이 나며 심판이 두 번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대부분 흰왕좌(백보좌) 심판 한 가지만 알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카톨릭 소수사본에 근거한 개역성경에는 "그리스도" 단어가 여러군데서 "하나님" 혹은 "주" 로 잘못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주(LORD/Lord) 이시며 아들도 주(LORD/Lord)이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는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독립적인 인격체 이시지만 두분이 하나이시라는(요 10:30, 요일 5:7) 삼위일체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심판이 두 번 이라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철장권세를 (계 19:15)가지고 성경 기록대로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통치를 하시는데요.천 년이 다 차면 구원 못 받은 불신자들은 부활하여 둘째 사망 (마귀와 함께 영존하는 불 호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천년왕국 끝에 흰 왕좌 심판(백보좌) 에서는 예수님께서 앉으신 자리는 " a great white throne" 입니다.말 그대로 왕이 좌정하시는 자리인 "왕좌"입니다.   (계 20:11, 킹흠정) 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계 20:11, KJV) And I saw a great white throne, and him that sat on it, from whose face the earth and the heaven fled away; and there was found no place for them.   하지만 신약 교회 서신서들 다른 곳에서 심판석을 말씀하실 때는 "왕좌" (throne) 라는 단어가 아닌 "자리" (seat)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고후 5:10, 킹흠정)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고후 5:10절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 은 "judgement seat of Christ"입니다.계 20:11절은 "흰 왕좌" a great white throne입니다.   왜 고후 5:10절에서는 "왕좌"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요?물론 원문 성경도 왕좌(뜨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로마서를 보시겠습니다.   (롬 14:10, 킹흠정)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리라.   여기도 "그리스도의 심판석"인데요.개역 성경은 "그리스도" 단어가 "하나님" 로 바뀌어 있습니다.   (롬 14:10, 개역)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그리스도 와 하나님이 같은가요? 삼위일체의 개념을 이해하신다면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이시지만 서로 다른 분이라는 건 아실 것입니다.   신약 교회 서신서에서 "우리"는 구원 받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롬 14:10 절과 고후 15:10절에서는 "왕좌"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고 "자리"(seat)라는 단어입니다.분명 심판석인데 왜 왕좌(throne)가 아닌 자리(seat)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을까요?   교회는 한 처녀이며 신부이며 (고후 11:2) 예수님은 신랑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는 신부를 맞으러 오시기 때문에 "왕" 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신랑으로 신부를 맞이하며 구원받은 후에 행위대로 상급을 주시기 위한 심판 입으로 "judgement seat of Christ"입니다.   하지만 천년왕국 끝에 심판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는 자리가 아닌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그리고 심판주로서 "왕좌"에 앉아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은 두 번 입니다.   "judgement seat of Christ" "a great white throne judgement"   seat 과 throne, 이 두 가지 단어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개역성경엔 환난 전 휴거를 모르게끔 다른 곳에도  "그리스도" 단어를 여러 군데 "하나님" 혹은 "주" 로 잘못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후 2:2, 킹흠정) 너희는 영으로나 말로나 혹은 우리에게서 왔다는 편지로나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 (살후 2:2, 개역)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구약에서 "주의 날" 과 신약에서 "주의 날" 은 같은 날입니다.(문맥에 따라 하루도 되고 천 년도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날"은 다릅니다.   (벧후 3:8, 킹흠정)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대하여 무지한 자가 되지 말라.   또한 개역성경엔 벧후 3:8절에서 "무지한 자가 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는 아들이신 예수님이시며, 아들 예수님(신랑)께서는 (신부) 교회 하고만 상관이 있으십니다.   (Geneva 살후 2:2)  That ye be not suddenly mooued from your minde, nor troubled neither by spirit, nor by worde, nor by letter, as it were from vs, as though the day of Christ were at hand. (KJV-1611 살후 2:2 )  That yee bee not soone shaken in minde, or bee troubled, neither by spirit, nor by word, nor by letter, as from vs, as that the day of Christ is at hand,   칼뱅주의 모체가 되는 제네바 성경도 KJV와 거의 일치 합니다.오늘날 대부분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개역본은 제네바 성경하고도 충돌하는곳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좌(throne)에 앉으실 때와 예수님께서 자리(seat)에 앉으실 때는 분명 심판의 성격이 다른것입니다.   심판은 두 번이며 교회는 예수님께서 왕좌에 앉으셔서 하시는 흰 왕좌 심판 (great white throne judgement) 하고는 무관합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2016-08-31 21:09:23 | 김종설
안녕하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모든 성도 분들 안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좋은 글 하나를 읽어서 이를 나누고자 합니다...   (설거지로 섬겨도 주님과 성도들을 생각하며 다 헹군 그릇의 물 한 방울까지 수건으로 닦는 분들이 계십니다. CD와 책자들을 포장해도 주님과 성도들을 생각하며 꼼꼼하게 마무리 짓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기의 모든 영광 중에 있던 솔로몬마저 초라하게 만드는 백합 한 송이를 현미경으로 감상하면, 이것이 얼마나 섬세하게 창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섬세하고 배려 있는 섬김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아래의 글을 읽다가 사랑침례교회의 미디어선교 사역이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목사들에게 책을 보내주는 것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기쁨 중의 하나였다. 그 사랑스런 영혼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일에 쏟고 있다. 당신은 그녀의 책들과 서실(書室), 소포를 부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2주에 한 번씩 책을 가득 싣고 가는 마차들을 보아야만 한다. 어떤 때는 책 기금이 우리 집에서 가장 활발히 움직인다. 그녀는 매일 머리와 마음을 그곳에만 쏟는다. 책을 받아보는 독자는 그 책을 선사하는 일에 관련된 책의 관리 업무에 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해야겠다. ㅡ그 사랑스런 관리자는 자신의 목록에 2,000명 이상의 이름을 갖고 있으며 첫날부터 지금까지 각 사람이 받은 모든 책들을 알고 있다. 이 작업은 대충 뒤섞여있는 것이 아니고 시계처럼 정확하게 짜여있으며, 모든 수령자에게 기쁨을 선사하고 불필요한 요구로서 그들을 괴롭히지 않고자 하는 따뜻한 열정으로 수행되고 있다."                                                                                                                                                스펄전, 1892                                                                          (신앙인물 찰스 스펄전, 아놀드 A. 델리모어 저, 김동진 역, 두란노) 
2016-07-28 11:06:55 | 장윤석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7 저도 깜빡 속았네요^^ 어쩐지 영감과 보존에 대해 잘 정리 했다고 생각했더니..... 목사님의 글을 그대로 옮겼네요. 제 블로그에도 올려 놓은 귀한 자료인데 정말 깜빡 속았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답글을 달아준 분이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허광무 형제님^^ 다시한번 더 기억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6-07-14 23:35:53 | 이명석
웹서핑을 하다 우연히 킹제임스 흠정역에 대한 좋은 글을 발견하여 올려 봄니다. 질문. 성경 요한1서5장7절에 보면"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분은 하나이니라  " 라는 구절이 있는데 어떤 성경은 이 구절이 있고어떤 성경은 이 구절이 없는데 왜 그렇지요 ? 답. 작성자 비공개   안녕하세요? 저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 신학을 하고 교회 개척과 신대원 준비를 하고 있는 전도사 입니다.교단과 신학 교파를 따지려고 하는 것은 아니므로 거두 절미하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질문자님께서 아주 정확하고 날카롭게 질문을 잘 해 주셨습니다. [안그래도 질문하신 그 성경 구절이 오랬동안 많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혼란을 야기 시키려는 마귀의 계략이기 때문 입니다.]   신학을 공부 하면서... 때로는 성경의 권위를 믿지 않거나, 마귀가 변개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 수 없게 만든 성경들이 있다고 해도 고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신학공부를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의 주장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실수가 있었겠지, 진짜 원본이 언젠가는 발견이 될꺼야. 지금도 그것들을 많은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찾고 있어."...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 입니다.   요즘 차량에 거의 기본으로 장착하고 다니는 '네비게이션'이 믿을 수 없는 회사의 제품 이라면... 어떻게 그 것을 믿고 낫선 길을 찾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손에 들려진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져 거룩한 사람들을 통하여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결국 하나님의 뜻 보다는 '내가 믿고싶은데로 믿는 믿음'이 되어 버리는 것 입니다.   조금 길지만 아래의 글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영감과 보존: 원본, 사본, 역본의 관계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All script-x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성경대로 믿는 신자라면 누구나 성경의 영감을 믿을 것입니다. 영감이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을 문자들을 써서 단어들로 기록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리스말로 영감(inspiration)은 ‘숨을 불어 내어 쉬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감’은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내어 쉬셨음’을 뜻합니다. 영어 ‘inspiration’에서 중간에 있는 ‘spir’는 영을 뜻하는 ‘spirit’에서 나왔습니다. 또 앞의 ‘in’은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감은 ‘하나님의 영이(숨이) 들어갔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에 숨을(혹은 영을) 불어 넣으셨을까요? 그분은 ‘모든 성경 기록’에 그리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완전한 성경 기록의 모든 단어에 자신의 숨을 불어 내심으로써 그 단어들이 살아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이것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단어)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히4:12-13).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단어)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영감 과정이 과거에 몇 차례 있었느냐, 또 지금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감이 과거에 한 차례만 있었을까요? 여러 차례 있었을까요?   즉, 원본의 단어들만 단 한 차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을까요? 아니면 사본의 단어들도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을까요? 혹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나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어떤가요? 그것들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을까요?   이 영감 과정이 과거에만 있었을까요? 아니면 현재에도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여러 사람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일단 분명한 것은 딤후3:16에 나오는 영감이 자필원본의 단어들을 기록할 때에 사용된 영감이라는 점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히브리말(약간의 아람어)로, 신약성경은 그리스말로 나왔습니다. 그 단어들을 인간 기록자들이 기록하였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벧후1:20-21). 분명히 처음에 원본 성경 기록들이 주어질 때 영어나 우리말로 단어들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단 한 차례 자필원본의 단어들만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습니다(기록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을 보존하십니다. 이렇게 치밀하게 완벽하게 보존되면 그 성경은 사본이든 역본이든 자필원본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며 하나님의 숨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읽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이해하지 않거나 잘 표현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잘 아는 영어와 한국어를 가지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입에서 영어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나와서 인간 기록자가 완벽하게 기록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필 원본: I am a boy.   자, 시간이 지나면서 ‘I am a boy.’가 담긴 자필 원본이 해어져서 어쩔 수 없이 사본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어떤 사람이 이것을 정확하게 다른 사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본: I am a boy(필사자와 필체는 다르지만 네 단어는 정확하게 같음).   자필 원본의 ‘I am a boy.’는 딤전3:16의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그 이후에 자필 원본의 모든 단어를 정확하게 그대로 옮겨놓은 사본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보존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다만 둘이 정확히 일치하므로 원본과 사본은 동일한 효력을 가지며  하나님의 숨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과거의 유대인들은 피땀흘려가며 구약의 히브리 성경을 처음의 원본과 동일하게 기록하였습니다.   1960년, 밀러(H. S. Miller)가 지은 「일반 성경 입문」(General Biblical Introduction)에는 유대인들이 구약시대 회당에 있던 두루마리들을 복사하면서 지킨 여덟 가지 준수 사항이 있습니다.   (1) 양피지는 정결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되 오직 유대인만이 만들 수 있으며 정결한 짐승으로부터 만든 끈으로 묶어야만 한다.   (2) 두루마리의 각 난에는 48줄에서 60줄이 들어가야만 한다.   (3) 잉크는 반드시 검은 색이어야만 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제조해야만 한다.   (4) 어떤 단어나 글자도 머리로 외워 적어서는 안 된다. 서기관은 반드시 자기 앞에 정통 복사본을 놓고 기록하기 전에 먼저 각 단어를 큰소리로 읽고 발음해야 한다.   (5)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기 전에 그는 반드시 두려운 마음으로 펜을 닦아야만 하며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을 적기 전에는 그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온 몸을 씻어야만 한다. 이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 주(主) 즉 전체가 대문자로 된 ‘LORD’로 번역되었는데 따라서 그는 필사 과정에서 수도 없이 많이 몸을 씻어야만 했다.   (6) 글자의 형태, 글자와 단어 사이의 간격, 펜을 사용하는 방법, 양피지 색깔 등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한 규례들이 있었다.   (7) 두루마리를 수정하려면 그것이 완성된 후 30일이 지나기 전에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두루마리는 무효가 된다.   또한 한 장에 단 한 개의 실수라도 있으면 그 장은 버려야만 했으며 전체 필사본에서 세 개의 실수가 발견되면 전체를 버려야만 했다. 다시 말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다 기록했는데 그중에 단 세 개의 실수가 나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창세기부터 필사해야 한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에 어느 정도 신중을 기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필사하는 말씀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들임을 믿었으며 따라서 이런 철저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들을 완전하게 보존해 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본문에서 빼거나 본문에다 첨가하거나 본문을 바꾸거나 하는 NIV, NASB, NKJV 등의 현대 역본 기록관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런 치밀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완전하게 보존해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친히 읽으신 말씀이 자필 원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럼없이 성경이라고 부르셨다.   (8) 그들은 글자와 단어 수를 세었으며, 만일 글자가 삭제 혹은 첨가되었거나 다른 글자와 붙어 있으면 필사한 사본 전체를 버렸다.   이 같은 규칙들을 소개한 뒤 밀러는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이런 규칙들이 좀 부조리하거나 너무 극단적인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은 유대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거룩하게 여겼는지 잘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읽으셨던 성경, 즉 처음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신 성경을 지금 이 시간에 우리 손 안에 가지고 있다고 확신해도 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자신이 읽은 성경 말씀이 비록 자필 원본의 말씀이 아니고 필사본의 말씀이었지만 그것을 100%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시며 기록된 필사본에 권위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단 한 번도 우리 주님은 사본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손에 있는 필사본 두루마리가 곧 원본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every word)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분명히 위 구절 안에 있는 구약성경 말씀은 주전 1500년경에 모세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록된바’(it is written)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을 보면, 모세의 자필 원본이 아니고 모세로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약 1500년 동안 필사되어 보존된 성경(사본)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원본만 옳았다면 ‘it was written’으로 과거 시제로 기록되었어야 합니다. 참고로 여기의 현재형은 예수님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을 뜻하는 현재형입니다.   또한 ‘모든 말씀’(every word)이란 것은 말 그대로 모든 말씀이(단어가) 보존되지 않은 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손 안에 들어 있는 필사본 성경이 자필 원본과 똑같음을 증명해 주셨으며 그 필사본에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려면 이 외에도 다른 구절들을 참고하기 바랍니다(마5:17-18; 눅24:27; 눅24:44 등). 자, 그러면 번역본은 어떨까요? 자필 원본을 그대로 동일하게 베껴 쓴 사본의 ‘I am a boy.’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번역본: 나는 소년입니다(참고로 우리말은 존칭이 있으므로 ‘나는 소년이다’, ‘저는 소년입니다’도 다 맞는 번역임).   하나님의 입에서는 분명히 처음에 ‘I am a boy.’가 나왔고 인간 기록자는 그것을 원본에 기록하였으며 이 네 단어는 사본에 그대로 정확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이 보존된 사본에서 정확하게 ‘나는 소년입니다.’라는 역본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 역본도 최초에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원본과 동일한 효력을 지닐까요? 물론입니다. 정확하게 번역된 역본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100% 살아서 숨 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역본의 단어들 역시 사람을 살리며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 신약성경이 완성된 뒤로 실제로 이방 사람들을 구원한 것은 다 역본이었습니다. 즉 AD 100년 이후에는 원본이나 사본의 시대가 아니라 역본의 시대가 왔습니다. 그리고 역본들을 통해 이방인들이 구원받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손에 들린 성경(역본)에 하나님의 숨이 없다면 그것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번역 성경의 단어들이 딤후3:16의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영감은 단 한 차례 자필 원본이 기록될 때만 하나님이 사용하신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자필 원본의 단어들만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원본이 정확하게 필사되었고 그 필사본에서 지금의 역본이 정확하게 나왔으면, 지금의 역본에도 하나님의 모든 단어가 동일한 효력을 갖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자, 이제 원본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비교해 봅시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모든 단어는 원본을 정확하게 보존한 사본의 원어들에서 나왔습니다. 신약 성경의 경우 이러한 사본에는 성경 기록 필사본, 성경 기록을 담고 있는 성구집 등이 포함됩니다. 물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사본의 모든 단어를 가능하면 1 대 1 대응이 되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심지어 원어의 문장의 구조 까 지도 영어로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당연히 언어의 차이로 인해 무언가를 첨가해야만 합니다. 번역을 해 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이것을 잘 압니다.   예를 들어 다시 딤후3:16을 보도록 합시다. All script-x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is]가 이탤릭체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자들이 번역을 위해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is]가 없어도 말이 되지만, 영어에서는 [is]가 없으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역자들이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역자들은 정직하게 이것을 이탤릭체로 표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이것은 원래 원본에 없었으나 번역을 위해 첨가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두 개의 [is]를 제외하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원본(사본)을 있는 그대로 영어의 구조 안에서 가능한 한 1 대 1 대응이 되게 정확하게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형식적 일치’ 번역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번역되었기에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온전히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해서 이 성경을 들고 “이것은 하나님의 ‘오류가 없는 완전한 말씀’입니다.”라고 외칩니다.   세상에 수많은 성경이 있지만 이런 식으로 거의 완벽한 형식적 일치를 보이는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611년 이래로 이 성경에 복을 주셔서 이 세상 모든 교회와 신학교의 교리, 신앙신조 등을 정리하며 5대양 6대주에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성경을 쓰셨습니다. 온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여러 나라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수백 개 나라 성경의 번역 대본으로, 표준 잣대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우수성을 너무 과장한 나머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원본에서 향상된 계시’ 혹은 ‘원본보다 더 좋은 계시’ 혹은 ‘영감을 받은 성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원본보다 더 좋은 역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향상된 계시’가 아닙니다. 이것은 완전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들(단어들)을 형식적 일치를 통해 정확하게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옮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향상된 계시’나 ‘영감을 받은’ 성경이 아니고 ‘정확하게 보존된 성경’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원본이 아니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 권위라고 부를까요? 다음의 예를 보겠습니다. 향상된 계시’의 한 예로 행12:4를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가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군사가 넷씩인 네 소대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것은 이스터가 지난 뒤에 그를 백성에게로 끌어내려 함이더라(행12:4). And when he had apprehended him, he put [him] in prison, and delivered [him] to four quaternions of soldiers to keep him; intending after Easter to bring him forth to the people.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다른 성경들은 여기의 ‘이스터’를 유월절로 번역하였습니다. 루터 성경 같이 바른 본문에서 나온 성경들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전 세계 성경 중에 유일하게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 이것을 ‘이스터’라고 바르게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우수하므로 이 성경은 원본을 뛰어넘으며 그래서 ‘향상된 계시’라고 주장하거나 영어 성경의 단어들도 딤후3:16의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다는 ‘이중 영감설’을 펴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의 대표적인 사람이 피터 럭크맨(Peter Ruckman)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향상된 계시’이거나 이중 영감을 받으려면, 원본에 없던 무언인가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있어야만 합니다.   자, 그러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이스터’라고 번역한 그리스말이 원어에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것이 없는데 영어 성경이 그것을 번역해서 집어넣었다면 그것은 첨가이고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스터’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파스카’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말 파스카는 명절의 경우 크게 둘을 뜻합니다. 하나는 유월절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터’(이교도들의 부활절 축제)입니다. 파스카는 Oxford English Dictionary에도 정확하게 이 두 개의 명절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파스카는 이 둘 중 하나로 번역될 수 있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행12장의 때가 이미 무교절 기간이라 유월절은 지났으므로 무교절 다음에 오는 이교도들의 부활절인 ‘이스터’로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어 없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향상된 계시’나 딤후3:16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성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가 100% 보존된 바른 사본의 단어들을 정확하게 번역한 성경입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처음에 원본이 주어졌을 때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진리가 살아서 숨 쉬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단어 중 원어들을 담은 사본에서 나오지 않은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향상된 계시나 이중 영감을 받은 성경이 아닙니다.   전도서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선포자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흠정역: 내가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노니,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전1:14).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것이 헛되어 영을 괴롭게 한다.”(vexation of spirit)고 전도서에서 무려 10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역성경, NIV를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 역본은 이것을 전적으로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역: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영을 괴롭게 하는 것’과 ‘바람을 잡는 것’(grasping of the wind)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영’ 혹은 ‘바람’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루아흐’입니다. 이 경우 킹제임스 성경이나 개역성경의 대본이 된 원어 성경의 원어가 동일하므로 이 같은 차이가 생긴 데 대해 원어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성경 번역자가 같은 단어를 문맥에 따라 어떻게 번역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전도서의 문맥상 어느 번역이 맞을까요? 우리는 전도서 기자가 말하려는 요점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번역한 대로,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어 우리의 영을 괴롭게 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결국 전도서 기자는 마무리를 하면서 12장 13절에서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즉, 이 모든 것이 영의 문제지 결코 뜬구름 잡는 것 같이 바람을 붙잡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번역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 주는 번역이라고 믿으며 이런 의미에서 킹제임스 성경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이것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향상된 계시’임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까? 아닙니다. 다만 킹제임스 성경이 원어를 정확하게 번역했음을 보여 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결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원본보다 낫다는 주장을 펴서는 안 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원본의 모든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해서 하나님의 단어들을 이방인들의 공통 언어로 보존한 성경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향상된 계시’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반드시 다음의 글을 읽고 진술을 수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반대편 진영에서 무식하다고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https://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312   이처럼 우리는 원어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원본이 최종 권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시간에 우리가 원본의 모든 단어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들이 바르게 번역되지 않으면 최종 권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파스카’, ‘루아흐’, ‘하데스’ 등의 원어들은 다 여러 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의도대로 번역되지 않으면 원어들만으로는 최종적인 표준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섭리(providence)라는 돌보심을 통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을 인도하셔서 각각의 원어 단어가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영어로 번역하게 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본의 모든 단어들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번역되어야만 맞는다고 믿습니다.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를 택하셔서 지난 400년 동안 하나님이 하신 일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현대 역본들의 역자들은 원본의 원어들의 뜻을 이 세상 문학가나 철학자의 글을 통해 전달하려고 합니다. 원어 사전들의 저자들 가운데는 불신자가 많으며, 심지어 쎄이어(J. H. Thayer) 같은 이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언어는 성경의 언어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지금의 번역본 시대에 하나님의 원어 단어들을 100% 정확하게 옮긴 보존된 성경입니다.   그러면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어떨까요?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1 대 1 대응이 되게 형식적 일치를 유지하면서 정직하게 번역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모든 교리와 특징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말 흠정역 성경에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다고 당연히 주장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딤후3:17의 진리가 흠정역 성경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7).   한편 ‘I am a boy.’를 ‘나는 소년입니다.’로 하지 않고 ‘나는 아이입니다.’로 하면 반만 맞습니다. 아이에는 남자아이, 여자아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1 대 1 대응을 시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나는 한 소년입니다.’로 하면 우스운 번역이 됩니다. 한국 사람은 아무도 이런 말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을 펴는 이들은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earth’(창1:1)라는 말씀을 ‘그 시작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고 번역하고는 이 외의 다른 번역은 다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만용입니다.   ‘In the beginning’은 관용구로서 ‘처음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그 처음(시작) 안에서’로 번역하는 것은 영어와 우리말을 망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머릿속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영감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향상된 계시’이므로 그 안에 있는 정관사, 부정관사를 번역할 때 수용 언어(한국어)의 용례를 무시하고 단어 대 단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향상된 계시’가 아니며, 이중 영감을 받은 성경이 아닙니다. 원본의 모든 단어들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대로 형식적 일치를 취하면서 정확하게 번역하여 그대로 보존한 성경, 이것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처음에 원본이 주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100% 그대로 살아 있는 성경입니다. 결코 100%를 넘을 수는 없습니다.   원본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비유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분을 알며 또 보았느니라, 하시니라. 8 빌립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그리하면 우리에게 족하겠나이다, 하니 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내가 스스로 하지 아니하느니라. 오직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 곧 그분께서 그 일들을 행하시느니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 그렇게 못하겠거든 그 일들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7-11).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빌립은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그러자 우리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비록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인격체이지만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 행동, 생각이 아버지 하나님과 100%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알지 않은 아버지 하나님은 다 거짓이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우리는 원본과 킹제임스 성경으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원본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혹은 원본이 우월하다고 하거나 그런 주장에 세뇌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을 통해 보거나 아는 아버지만이 참 하나님이듯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보는 원어의 뜻만이 옳은 뜻입니다. 이 외에는 다른 데서 옳은 뜻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아버지보다 우월하지 못합니다. 요10:30에서 아들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듯이 원본과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온전히 전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원본의 원어들을 정확하게 번역한 ‘완전한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을 본문으로 해서 지난 400년간 수백 개의 성경이 번역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바른 교리를 깨달으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배도의 때에 마귀가 세상 무대에 등장해서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는 변개된 성경의 등장이 필수 요건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귀라 해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의 변개일 것입니다. 마귀는 과거에 이집트에서부터 이 사악한 일을 주도하였고 주후 200년을 넘기면서 그 일은 카톨릭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역본들은 한결같이 카톨릭 교회의 사본들만을 번역의 대본으로 쓰고 있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6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감과 보존, 원본과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바른 개념을 정립하여 다른 성도들에게 비방의 빌미를 주지 않으면서 지혜롭게 바른 성경을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성경 신자들을 많이 불러주시고 이들로 하여금 바른 교회를 세우게 하셔서 많은 혼들을 수확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최초에 출생 신고를 하면 구청이나 기타 관공소 등에 가서 신고를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직원이 서류에 기록한 내용들은 세월이 흘러 계속 수많은 기록들이 쌓이면서 보존과 보관에 한계점이 옵니다.[관공서의 이전등] 그러면 예전에는 그것들을 일일이 사진으 찍어서 필름에 담았습니다. 기술은 계속 발전했고, 그 다음에는 스캔을 하여 하드 디스크에 저장을 합니다. 그렇다고 기록한 내용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다만, 최초에 기록한 원본이 아닌 내용은 그대로인 '사본' 인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오해 합니다.]   질문자님께서는 남들이 쉽게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부분을 소흘이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잘 지적해 주셨네요. 이런일을 게기로 네이버 지식인이 더욱더 올바르고 풍요로운 지식의 장 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지적하신 성경 구절을 개역개정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으로 비교 해 보겠습니다.   [개역개정]요일 5:6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킹제임스 흠정역]요일 5:6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로 오셨느니라.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이는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개역개정]요일 5:7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킹제임스 흠정역]요일 5:7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아래의 말씀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말씀들을 영원토록 지키시겠다고 확증하시는 구절들입니다.   [킹제임스 흠정역]시 12:6{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시 12:7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 119:89(라메드) 오 {주}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정착되었사오며   마 24:35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딤후 3:16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질문자님의 삶에 늘 함께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태그리스트• #바른성경• #영감과• #보존 바른 성경과 신학적 근거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1&docId=227497859&sp=1&sort=0&sid=nFYgxp1di8fO6j2CxSCq4w%3D%3D&rank=2&pid=SGeu7wpySDGssb%2FzRS0sssssssC-337301&search_sort=0&qb=a2VlcGJpYmxl&spq=0&section=kin&enc=utf8    
2016-07-12 10:48:05 | 허광무
네~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가끔 오시는 날이 장날인 경우가 있습니다.^^ 다음을 참조하세요. *가다라(Gadara, 개더러)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20 거라사(Gerasa, 게라사)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1055 *게르게스 사람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1301 감사합니다.
2016-07-09 11:12:35 | 김대용
마태 8장 28정의 게르게스, 막 5장 1절의 가다라, 개역 성경의 거라사, 이곳이 동일한 지역인가요?, 다른 지역 인가요? 만약 동일한 지역이라면 지명이 왜 다른건지요?
2016-07-08 10:10:40 | 양경수
귀한 글을 읽는 내내 잔잔한 이해와 설득 그리고 큰 돌봄을 받게 된 점 감사를 드립니다. 굳이 이런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현실 종교적인 상황들이 너무 당황스럽고 안타깝다 못해 슬퍼집니다.. 실제 기독교 사회전반에 걸친 여러 문제들이 어찌 작다하겠습니까 만은 이를 뛰어 넘어서라도 개역성경과 킹제임스성경의 태생과 연원에 입각한 그 차별성의 진실성만큼은 이미 밝혀진 대로 학습되고 알려져서 바르게 읽혀지는 게 주님의 섭리라고 믿습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더욱 겸손히 지혜와 역량을 집중하여 저희 교회가 이 엄중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긍휼의 은혜를 베풀어주시옵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에게서 물러나고 그들을 내버려 두라. 이 계획이나 이 일이 사람들에게서 났으면 없어지리라. 39 그러나 만일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났으면 너희가 그것을 무너뜨리지 못하겠고 도리어 너희가 [하나님]과 싸우는 자로 드러날까 염려하노라, 하매 40 그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게 명령한 뒤 그들을 놓아주니라. 41 ¶ 그들은 자기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해 수치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서와 모든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니라.
2016-06-21 21:50:01 | 최상기
구원받은 이후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회계보고하는 그 날에 주님께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든지 이제는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할지 각자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가세!' 좋은 글 깊이 공감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2016-06-17 06:15:57 | 김상희
안녕하세요?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귀한 글 감사합니다. 동성애 반대집회를 다녀온 뒤 마지막 구절을 읽으니 가슴에 와 닿습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qt&write_id=1007 샬롬 패스터 "개역성경이든 킹제임스 성경이든 진리의 말씀으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 속한 지체요, 영원히 맺어진 영적 가족입니다. 부디 이 마지막 때 보수적이고 근본적인 한국 교회의 성도들과 작년 여름 사랑침례교회 채리티 콰이어가 부른 찬송가의 제목처럼 ‘우리 모두 함께 가세!’를 외치며 영적 전장의 전우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아끼는 관계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6-06-16 11:52:50 | 관리자
여러분은 찬송가 ‘There's Dear and Precious Book’을 기억하시나요? 1893년 보스턴에서 열린 집회가 계기가 되어 윌리엄스(M.B. Willims) 목사가 가사를 쓰고 틸만(C.D. Tillman) 목사가 곡을 붙인 찬송가 ‘There's Dear and Precious Book’의 우리말 제목이 바로 통일찬송가 234장에 수록된 ‘나의 사랑하는 책’입니다. 묘하게도 한국적인 정서가 진하게 느껴지는 이 정겨운 찬송가의 1절 가사를 옮겨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속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가사를 쓴 윌리엄스 목사님은 오래전부터 간직한 소천하신 어머니의 유품인 낡은 성경책을 모티브로 이 찬송가를 작시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은 믿음의 유산에 대한 향수가 담긴 이 사연을 접하고 어떤 분은 바울이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절절한 편지의 한 구절이 떠오르기도 했답니다. 내가 네 속에 있는 꾸밈없는 믿음을 회상하노니 그것은 먼저 네 할머니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었으며 네 속에도 있는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딤후1:5) 제가 이 찬송가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철없이 교회 행사를 쫓아다녔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입니다. 어느 무더운 날 여름성경학교 조회 시간에 다 함께 이 찬송가를 불렀는데 어린 마음에도 이 찬송가의 곡조와 가사가 어찌나 애잔하고도 정겨웠던지 그때 받은 감동이 지금까지 생생합니다. 저는 윌리엄스 목사님이 유품으로 간직한 어머니의 낡은 성경책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지금 저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책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저는 주저함 없이 곧바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누군가가 윌리엄스 목사님의 사연처럼 저의 어린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그 성경책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받은 ‘나의 사랑하는 책’은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저는 그것은 솔직하게 ‘개역성경’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불신자의 집안인 저의 집에서 유일하게 장로교회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개역성경 안에 들어있는 진리의 말씀으로 중학교 때 제 전 인생을 걸고 복음을 받아들여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영접하고 구원받았습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라면 개역성경이 저의 어린 시절 믿음의 추억이 담긴 ‘나의 사랑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출석하고 있는 사랑침례교회 성도 전체의 90%가 넘는 분들도 ‘개역성경’을 통해 구원받았고 그분들의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에는 ‘개역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개역성경으로는 구원받지 못하나요?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3&write_id=749 그러므로 사랑침례교회의 성도들 또한 윌리엄스 목사님이 간직했던 어머니의 낡은 성경책과 같이 추억이 담긴 정겨운 성경책을 말해 보라고 하면 아마도 많은 분이 ‘개역성경’을 꼽게 될 겁니다. 이렇듯 킹제임스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들은 어느 날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구친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두 한국 교회 안에서 구원받고 성장한 사람들이며 일반 교회를 출석하는 성도들의 믿음의 동료요 친구입니다. 사랑침례교회의 경우만 봐도 대다수가 기존 교계에서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하다가 오신 분들입니다. 사랑침례교회 성도들은 결코 전략적 계산으로 혹은 현실적인 이득을 챙기고 날카로운 비판을 피하고 보기 위해 일단 자세를 낮추고 ‘개역성경’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이미 입증했듯 거의 다수가 개역성경을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성경을 부인하면 저희는 일순간에 불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부인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겠습니까. 단언하건대 저희는 진심으로 개역성경으로도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한국 교회의 근본적이고 보수적인 믿음의 사람들과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저희는 개역성경에만 안주하지 않고 더 탁월하며 오류가 없고 완전하다고 확신하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우리 믿음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존중하며 이 탁월한 킹제임스 성경을 지금처럼 앞으로도 겸손하고 온유한 자세로 전파해 갈 것입니다. 성경지킴이 사이트를 오가는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작금에 저희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대해 매우 신랄하고 강도 높은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어떤 공격과 비판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에 대한 우리의 확고부동한 믿음은 앞으로 털끝만큼의 양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어려움을 계기로 저희는 우리가 믿는 믿음과 진리를 전하는 자세와 언행에 잘못된 부분은 없었는가를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온라인상에 올려진 자료 중 과도하고 부적절한 부분을 교정하는 일을 시행하였고 이미 상당 부분 마무리 지었습니다.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지금이 마지막 때요, 말세의 지말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아시아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복음이 흥왕했다고 할 수 있는 한국에서조차 이제는 갈수록 기독교인의 사회적 입지가 위축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영적 태풍이 세차게 휘몰아칩니다. 태풍이 거세게 몰아칠수록 방파제를 더 두껍게 쌓고 더욱 견고하고 강하게 지어진 집으로 피신해야 살 수 있습니다. 아기 돼지 삼 형제의 집 중에 늑대의 공격에 맨 마지막까지 견디며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준 집은 막내의 벽돌집이었습니다. 왜 하필 이 마지막 때 성경 이슈가 세상의 주목받는지를 차분하게 생각해 보시길 원합니다. 만약 우리가 사는 이때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굳건히 지켜줄 오류가 없는 완전한 성경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리의 혼돈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요즘 완전한 성경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비교적 평온했던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전개될 마지막 때를 온전히 대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흉포하게 변해가고 교회들은 점점 더 세속화의 수렁 속에 잠겨 갑니다. 이렇듯 영적 전장은 점점 치열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이럴 때 한 사람의 아군이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정말이지 요즘은 수많은 적군 사이에서 섞여 있는 소중한 아군을 잘 분별하는 피아(彼我)의 올바른 식별이 매우 중요한 때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근본적이고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은 눈에 띄게 그 수효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로마 카톨릭, 동성애, 이슬람교 등 기독교의 믿음과 교리를 위협하는 세력은 그 크기를 점점 불리고 있습니다. 이런 위급한 때 적군과 아군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서로를 공격하는 자중지란의 늪에 빠져서야 어떻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더불어 우리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분들이 사용한 ‘사기’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먼저 표준국어대사전은 ‘사기’라는 단어의 정의를 아래와 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사기(詐欺) : 나쁜 꾀로 남을 속임. 풀어 말하면 일부로 지어낸 생각과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의도적으로 남을 속이는 일을 가리켜 ‘사기(詐欺)’라고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개인의 자유이며 그 양심의 자유는 당연히 침해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도하여 킹제임스 성경의 유일성을 순수하게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믿지 않으면서 이득을 취하기 위해 교묘한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것조차 양심의 자유로 존중받을 수는 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유일성을 믿는 사람들은 그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온몸과 마음을 바쳐 뜨겁게 사랑하고 싶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님들 중에는 저희의 이 믿음에 동의 못 하실 수도 있고 때로 우려의 시선을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우리는 여러분과 똑같이 개역성경에 담긴 진리의 말씀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약 어떤 분의 주장대로 킹제임스 성경의 유일성에 대한 우리의 굳건한 믿음이 기독교가 아닌 신흥 종교라면 우리들의 구원의 근간이었던 개역성경도 신흥 종교의 교도를 구원한 성경이 됩니다. 따라서 개역성경을 옹호하려는 그분도 신흥 종교에 구원을 안긴 성경을 옹호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제 그분은 개역성경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킹제임스 성경 신자가 되면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해괴한 주장을 하셔야 합니다. 이렇듯 한 가지만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다면 심각한 오류의 함정에 빠집니다. 물론 우리도 혹 그러한 불찰은 없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마 그동안 성경 이슈의 심각성으로 인한 조급함으로 오늘까지 달려오면서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의 몇몇 언행에서 다소 오해를 불러온 부분도 있었을 줄로 압니다. 반성할 점이 있다면 마땅히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앞으로 교계의 바른 충언은 얼마든지 겸허히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오해가 짙어진 만큼 더욱 한국 교회에서 타의 모범이 되고 긍정적인 사역을 풍성하게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노력도 있어야 할 겁니다. 분명한 점은 일반적인 한국 교회와 저희의 믿음에는 차이가 있으며 아직은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개역성경이든 킹제임스 성경이든 진리의 말씀으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 속한 지체요, 영원히 맺어진 영적 가족입니다. 부디 이 마지막 때 보수적이고 근본적인 한국 교회의 성도들과 작년 여름 사랑침례교회 채리티 콰이어가 부른 찬송가의 제목처럼 ‘우리 모두 함께 가세!’를 외치며 영적 전장의 전우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아끼는 관계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특송-우리 모두 함께 가세 (Charity Choir)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ccm&write_id=1090 감사합니다. 9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는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는데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 11 거기에는 그리스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바바리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게시느니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생각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입고 13 누가 누구와 다툴 일이 있거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며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속에서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그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 17 또 너희가 말이나 행위로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며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9~17)
2016-06-16 10:54:59 | 김대용
위험에 처한 사건 현장에 계셨던 형제님의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글이네요. 죽음을 생각하게되는 그 시간 터널 안의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언젠간 꼭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져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6-06-07 02:03:38 | 김상희
K형제님, 너무 오랜만에 올린 건 맘에 안 들지만... 좋은 글 감사합니다.ㅎㅎ 형제님이 요즘 특히 고생이 많은 줄 압니다. 머리를 쓰고, 활자를 다루고, 컴퓨터를 다루는 일이 은근히 피곤하죠. 저도 어제 전주 소망침례교회 성도님들과 만나 힘을 얻고 귀한 나눔을 가졌는데, 오고 가는 고속도로와 국도에서 4중추돌 등 사고를 일곱 건 정도 본 것 같습니다. 여러 번 앰뷸런스가 급히 현장으로 가는 걸 봤는데요... 항상 건강 조심하시고 안전운전 하시길 바랍니다.^^
2016-06-06 09:09:38 | 김재욱
형제님께서 겪으신 경험을 잘 정리해 적어주신 "단 하나의 날"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정말 고통스런 일 겪으셨네요. 형제님의 글을 통해 에베소서 5장 말씀 중 "그런즉 너희는 주의하여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로서 조심스럽게 걸어 시간을 되찾으라. 날들이 악하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는 말씀을 묵상하며, 이 세상에서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기 위해 더욱 값지게 살도록 노력하고자 주님의 뜻을 구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2016-06-05 00:32:36 | 박기용
벌써 삼월이 되고도 며칠이 지났다. 이제 제법 바람 끝에 봄 향기가 난다. 자동차 계기판 옆에 박힌 시계를 보니 6시 48분. 8시 정각까지 일산의 장례식장을 가야 하니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K는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아본다. 이내 힘을 받은 K의 은색 자동차가 큰 입을 넙죽 벌린 사패터널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간다. 이 터널은 길이만 약 4Km고 편도 4차로의 쌍굴 터널로 세계 최고 수준의 길이를 자랑한다. 길이도 길고 편도 4차로나 되니 자유로에 이어 수입차 폭주족들이 롤링 레이싱 게임을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 의정부 호원동에만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K는 기억한다. 북한산을 관통하는 이 터널을 공사할 당시 불교계와 국립공원 관련 시민단체들이 얼마나 극성스럽게 반대했던가. 만약 그때 그들의 논리에 정부가 굴복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마도 K는 큰 불편을 감수하고 돌아 돌아서 인천까지 출퇴근했을 거다. 당시 정부의 수장은 작고한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왜 죽음을 택했을까? 정말 그 길밖엔 없었나?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생각이 여기에 다다르자 자신도 모르게 K의 입에서 나지막이 혼잣말이 흘러나온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데…….” 무료한 마음에 라디오를 켰다.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가 뉴스를 통해 전달된다. 매번 주인공과 무대는 달라도 사람들 사는 스토리는 다 거기서 거기다. 그때 갑자기 공중파 방송이 멈추고 이상한 안내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들려온다. “터널 내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터널 내에 운전자들은 신속히 터널 밖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라. 이거 뭐야!” K는 황급히 라디오 주파수를 바꿔본다. 역시 똑같은 안내 방송이 나온다. 그때 갑자기 듬성듬성 켜져 있던 터널 천정의 형광등이 모조리 불을 밝힌다. “아이, 참~ 불났나 보네. 직진밖에 못 하는 고속도로 터널 안에서 도대체 어디로 피하라는 거야.” 퇴근길 앞을 다투던 차들이 갑자기 차례차례 속도를 줄이며 벌을 서듯 줄지어 선다. 모두 이 상황을 피하고 싶지만 피할 길이 없다. 어떤 상황이 기다릴지 모르는 앞으로, 불바다가 버티고 있을지도 모를 앞으로 무작정 전진할 방법밖에 없다. “터널 내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터널 내에 운전자들은 신속히 터널 밖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일어난 것을 인지하는 것밖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무심한 안내방송. 이런 기계적인 안내방송이 지금 무슨 도움이 될까. 절박하다면 절박한 순간 문득 K의 머릿속에 얼마 전 유튜브에서 봤던 세월호 영상이 떠오른다. 참사로 숨진 중학생들이 마지막 순간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한 미공개 동영상들이다. “내가 왜 수학여행에 와서! 난 살고 싶은데! 내가 마지막으로……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아~나 진짜 무서워요. 지금” “나에겐 꿈이 있는데!” 곧 닥칠 죽음을 직감한 중학생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절규가 마치 설익은 풋밤 같다. 그래서 채 여물지 못하고 떨어진 풋밤처럼 그 절규가 더 서글프고 처절했다. 영상에서는 그런 상황에 곧이어 20대 중후반 정도 되는 느낌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여교사거나 선박 회사의 직원이 아닌가 싶었다. “침착하세요! 얘들아 조용해!” 그리고 또다시 “침착해~!” 바닷물은 이미 아이들의 목구멍 부근까지 기어오르는데 침착하란다.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하라는 말인가? 언젠가 교통사고로 머리를 심하게 다친 사람에 관한 목격담을 들었다. 사고 현장에서 일어나 자신의 벗겨진 신발을 주우러 가다가 그만 혼절하더라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끝내 절명했다면 곧 죽음이 닥칠 것도 모르고 벗겨진 신발을 주우러 간 셈이다. 대단한 아이러니 아닌가. 죽음 앞에선 어린 중학생들에게 어른은 침착하라는 말밖엔 할 말이 없었다. 죽음을 앞둔 이에게 이러한 도덕 강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저히 신속히 이동해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인데 신속히 이동하라는 비상 안내방송도 K에겐 이처럼 무정한 메아리일 뿐이다. 이윽고 K의 자동차는 계속되는 안내방송과 함께 점점 사고 현장에 근접한다. 저만치 한 사람이 서 있다. 사고 차량 운전자로 보인다. 차들이 피해갈 수 있도록 수신호를 하고 있다. 저러다 전방 주시를 못 한 차량에 치이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하긴 지금 남 걱정할 때인가. 그 사나이의 몇십 미터 전방을 보니 마침내 활활 불타는 차량이 보인다. 맙소사, 탱크로리다! 혹시 유조차인가. 저 커다란 탱크로리 안에 기름이 가득 들어있다면 정말 큰일이다. 혹시 K의 차가 그 앞을 지나칠 때 폭발하기라도 한다면……. 짧은 순간에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영화의 한 장면으로써 자동차 폭발은 멋지겠지만, 현실에서는 참혹한 비극이다. “제발, 제발 하나님” 활활 불타오르는 탱크로리를 지나치면서 K는 연신 ‘제발 하나님’을 외쳤다. 다행히 K의 자동차가 지나칠 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때로 현실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마치 영화와 같다. 꼭 꿈같다. 그러니 정말 꿈만 같다는 말이 생긴 거다. 초등학교 2학년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실 때도 꼭 거짓이요 꿈만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동네 친구의 말을 듣고도 거짓말 말라며 그 날 숙제를 끝까지 했다. 사람은 늘 그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절대 익숙할 수 없는 삶의 결정적 순간과 마주한다. 그게 인생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불타는 탱크로리를 지나치니 이번엔 칠흑 같은 연기가 온 터널을 가득 채우고 있다. 헤드라이트를 켜도 바로 1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앞에 도대체 뭐가 있는지 모르는 또 다른 맛의 공포가 K를 반긴다. 상향등을 켜고 안개등도 켜고 비상등도 켜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거북이걸음처럼 천천히 앞으로 나간다. 하긴 빨리 가려고 해도 앞차들 덕분에 갈 수도 없다. 자동차 창문을 완전히 닫고 운전을 하기에 망정이지 만약 걸어간다면 끔찍하다. 아마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질식해서 쓰러질 거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에서 희생된 많은 사람의 심정이 깨알만큼은 이해가 간다. 마지막 순간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남긴 그들의 마음이 오죽이나 절박했을까. 드디어 저 앞에 터널의 출구가 희미하게 보인다. 이제 조금만 앞으로 나가면 이 지긋지긋한 답답함과 이별이다. 채 몇 분이 안 되는 시간이 K에겐 몇 시간처럼 느껴진다. 출구가 가까워지자 차 간 거리가 벌어지고 점점 속도가 난다. 그렇게 터널 출구에 다다르니 확연하게 뚜렷한 시야가 확보된다. K는 저도 모르게 발톱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숨을 내쉰다.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 바로 앞 양주톨게이트에 도착한다. 통행료 3천원을 집어 드는 손이 오늘따라 느슨하다. 통행료를 건네며 K는 요금수납원 아주머니에게 괜한 말을 건넨다. “휴~ 정말 오늘이 끝인 줄 알았어요.” “네 고객님?” 요금수납원은 아직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K는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키고 연이어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터널에서 큰불이 났고 연기 냄새가 여기까지 퍼졌다는 수신호인데 못 알아들었으면 어떠하리오.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K의 자동차가 풀 악셀의 동력으로 채찍 맞은 팽이처럼 쏜살같이 미끄러진다. 될 수 있는 한 화재 현장에서 빨리 그리고 더 멀리 멀어지고 싶다. 어쩌면 K에겐 지금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잠시 후 어머니에게 전화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유조차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차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어도 탱크로리가 폭발하지 않아서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1분 1초라도 평안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겠는가.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날,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이 다가온다. 그날이 오기 전에 나에게 주어지는 매일 매일을 마치 단 하나의 날처럼 살 수는 없을까.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K는 다짐한다. 마치 꿈결 같은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기 전 오늘의 하루를 마지막 하루처럼 값지게 살자. 가끔 무리한 다음 날 부정맥 때문에 뻐근해진 심장을 느끼며 일어날 때면 늘 자신을 일깨운다. 허무한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헛된 욕심에 자신의 귀한 하루를 소모하지 말자.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세워주고 바르게 이끌어주는 소중한 일들에 천금 같은 시간을 사용하자.  “그래 하루하루가 내게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단 하나의 날이야!”   4 주여, 나로 하여금 내 종말과 내 날들의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사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하소서. 5 보소서, 주께서 내 날들을 한 뼘만큼 되게 하셨사오니 내 시대가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며 참으로 모든 사람은 최선의 상태에서도 전적으로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6 분명히 모든 사람은 헛된 모습 속에서 걷나니 분명히 그들은 헛되이 소동하나이다. 그가 재물을 쌓으나 누가 그것을 거둘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였도다. 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기다리나이까?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8 나의 모든 범법에서 나를 건지시며 나로 하여금 어리석은 자의 모욕거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 (시39:4~8)   --------------   이 글은 올해 3월 5일 제가 직접 겪은 아래의 사건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터널 지나던 탱크로리 불...1시간 넘게 퇴근길 정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2&aid=0000790770 감사합니다.
2016-06-04 23:50:29 | 김대용
좋은 소식입니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세대별 교제가 가능하겠군요 좋은 공간에서 아름다운 교제와 섬김이 있기를 바랍니다. 광주지역에서 진리의 말씀이 더욱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예배당 이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16-05-28 11:37:58 | 조양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