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만 형제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 유의지와 자유 분방한 창의적 사고의 관점에서 성경 번역의 '오류'와 성경 번역의 '차이'를 명쾌하게 지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귀한 시간 할애해서 모두에게 유익한 좋은 글을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내용 중) "교리가 달라서 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다고 하고 공연한 번역 시비를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2015-04-27 14:35:57 | 한원규
1.불필요한 반복은 피한다
2.정확성이 훼손되지 않은 범위내에서 읽힘성을 최대한 살린다
3.문체는 의미전달에 적합한 형태를 취한다
는 원칙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유익한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4-27 00:05:39 | 박선규
성경에 대한 권위를 유지해가는 것도 우리의 믿음의 선택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것을 형제님의 글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좋은 글을 남겨주셔서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감사해요~~^^
2015-04-27 00:03:33 | 김상진
형제님의 선한 열정이 담뿍 담긴 글을 저는 이제야 귀가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
먼저 형제님! 여러 가지로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시간을 내고 노력을 더 하여
글을 잘 정리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흠정역 성경이 어느 특정인의 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그럴듯한 대의명분으로 포장해도 결국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소모적인 논란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에 의해 번역된 성경이라 해도 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을
한국인이 모국어로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 증거로 흠정역 성경은 가장 신실하고 정확하며 건전한 번역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안다면 설혹 부족함과 아쉬움이 보여도
서로 힘을 합하여 보완하고 더 온전하게 만들어가면
마지막 때 우리는 이 은혜의 열매로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사색당파의 싸움이 끝내 조선을 침몰시켰듯이
끊임없는 소모적 논쟁의 길로 나아가느냐
사람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길로 나아가느냐는
오로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최상만 형제님의 지혜와 용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전염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앞으로도 귀한 글 기대합니다.
2015-04-26 23:57:06 | 김대용
킹 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우리 말로 바르게 번역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 처럼 성경을 바르게 변호하는 신실한 성경 지킴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최상만 형제님! 앞으로도 좋은 글을 계속 써 주시길 바랍니다.
샬롬
2015-04-26 20:41:22 | 차대식
주일 아침 시간에 좋은 글을 접했습니다.
형식적 일치를 유지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우리 말 어법에 맞춘 번역은 힘든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흠정역 성경은 세심한 주의가 기울여 졌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부드러운 마음과 선한 마음을 갖고 가이오와 같이 진리의 동료 조력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5-04-26 07:42:16 | 조양교
영어성경을 우리 나라말로 번역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흠정역이 엄청난 수고의 결과가 그대로 반영됩니다. 흠정역의 좋은 부분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쎄시봉 팀중에 한 장로님이 열심히 전도해도 믿지 않고 있는 송창식 씨의 노래 가사로 흠정역의 번역이 좋다고 설명한다는 것이 오히려 흠정역을 안좋게 만드는것 같네요. 차라리 신실하게 믿고 있는 시인이나 가수의 노래가사로 적용하심이 더 좋았을듯 합니다. 제가 아는 분이 있습니다. 별세 하셨지만 월간 현대시조(새시대시조)에 오랫동안 편집장으로 수고하셨고 많은 수상까지 하신분입니다. 고 선정주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의 시는 주로 고난에 대한 시인데 시적 표현이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장로교 목사이었고, 개역성경을 보신분입니다. 과거 제가 흠정역 성경도 알려드렸었습니다.) 참고하시면 우리 나라말의 의미를 더 이해하기가 쉬울것 같아서 글을 남깁니다.
2015-04-26 00:07:39 | 김경완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멋지지 않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라는 표현은 과거의 어떤 한 때를 언급하는 것이지만, 위와 같이 ‘하시니라’로 표현하면 시간의 경계를 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따라서 저는 ‘하시니라’가 ‘하셨느니라’보다 훨씬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사실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고,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들에서 사용된 과거형 시제로도 충분히 확인이 됩니다. 저는 이와 같이 현재형과 과거형을 교차 사용한 훌륭한 문체가 “흠정역 성경 문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위의 기행문 (2) 다음에 인용한 송창식의 노래 ‘토함산’의 가사에서도 “해를 안고 앉았어라”,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라고 특유의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송창식 특유의 문체로 토함산 가요의 맛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겠습니다.
(1) 흠정역 번역
(2) 과거형 준수 번역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시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더라.
(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2) 땅은 형태가 없었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느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셨으되, 빛이 있으라, 하셨으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셨더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셨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셨으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느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었더라.
(6) ¶ [하나님]께서 이르셨으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셨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셨고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셨으니 그대로 되었느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느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었더라.
자, (2) 번처럼 고쳐 놓고 읽어 보니까 어떠십니까? (1) 번처럼 번역한 것을 읽으시고 시제가 과거로 생각이 안 되어서 불편하십니까? 앞서 마태복음 3장과 똑 같은 원리로 실제로는 과거이지만 현재형을 사용하여 창조의 장엄함을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 (1) 번 번역이 더 자연스럽고 수준 높은 번역이 아닙니까? 마태복음과 같은 신약 성경 기록이나 다른 구약 성경 기록에서 이처럼 시제를 섞어 쓴 것을 가지고는 문제삼지 않고 유독 창세기 1장 첫 부분에서 시제를 문제삼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과거 사실을 기술하거나 번역할 때, 과거 사실인 것이 자명한 문맥에서 모든 동사들을 과거형으로 고집함으로써 글의 질을 저하시키고 읽음성을 훼손시키기 보다는 필요한 경우에는 현재형 동사를 쓰더라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고 봅니다. 과거형 동사로 충실하게 번역하면 마치 배우는 학생이 작문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수준 높은 글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러한 성경 기록을 학생 수준의 번역으로 읽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학생 수준의 번역 성경을 그래도 원하신다면 별도로 그렇게 번역하셔서 원하시는 분들은 그것을 보셔야겠지요. 여호와의 증인들이 신세계역 성경을 만들고, 가톨릭이 가톨릭 성경을 만들듯이 교리가 달라서 받아들일 수 없는 번역이라고 한다면 말릴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의 교리에 맞는 성경으로 번역하는 수밖에요.
그러나, 성경 번역에 임하는 사람이 명확한 교리적 주관이 없이 단지 영어 실력과 한국어 실력만 있으면 성경 번역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사기 11장에서 입다의 딸이 자신의 처녀 생활로 인해 애곡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의 처녀로 죽음을 애곡했다고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면 ‘오역’ 또는 ‘흐지부지역’이 될 수 밖에 없는 사태가 생기니까요. 따라서, 교리가 달라서 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다고 하고 공연한 번역 시비를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현재의 번역이 더 이상 손댈 것이 없는 최상의 번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무랄 데 별로 없이 아주 잘 된 번역이며, 이보다 더 좋은 번역이 지금으로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보다 더 잘 가꾸고 다듬어 나가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도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도 주셨다는 생각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흠정역 성경을 받아 들이고 아끼게 되기를 바라고, 아울러 한국 교회에서도 기존의 개역(개정) 성경을 버리고 흠정역 성경으로 돌아서게 되었으면 합니다.
바른 성경 불모지에서 수십 년 동안 바른 말씀이 없어 목말라 하던 저에게 하나님께서 드디어 제대로 된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주셔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5-15 18:19:26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5-04-25 23:06:30 | 최상만
2015년 3월에도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최우수 성경으로 선정되었네요.
월간 베스트 1위, 주간 베스트 1위가 다 우리 성경입니다.
성도님들의 사랑과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http://lifebook.co.kr/final/bibles/bible_best.asp
2015-04-04 15:01:13 | 관리자
참고로 흠정역 성경에는 복수의 경우 같은 말인데도 '들'을 붙인 경우도 있고 안 붙인 경우도 있습니다. 위에서 든 예처럼 '모든 사람', '모든 사람들'이 다 쓰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읽힘성 등을 고려한 번역자의 의도가 있음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꼭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으로 해야겠다는 의견이 우세하면 추후에 그렇게 교정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요점은 이런 것이 번역의 오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연약한 성도들을 요동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샬롬
2015-03-31 13:07:35 | 관리자
다음 글도 참고하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동전 찾기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3925
2015-03-31 00:04:26 | 관리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단위를 잘못 표기한 오류가 있지 않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몇 개월 전에 어떤 분이 한 형제를 만나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누가복음 19장 13절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흠정역: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십 므나를 건네주며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올 때까지 관리하라, 하니라.
KJB: And he called his ten servants, and delivered them ten pounds, and said unto them, Occupy till I come.
그분의 질문 요지는 “왜 KJB는 여기에서 므나를 파운드(pound)로 표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복음서에서 KJB는 달란트, 드라크마 등을 영국 단위로 표기했으니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므로 오류가 있는 성경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제게 보내면서 그 형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고 하기에, 저도 참는 데 지쳐서 그런 쓸데없는 질문에는 답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니 이제는 단위를 가지고 오류 시비를 거는 분들이 있네요.
이런 쓸데없는 질문에 매번 답변을 해야 하나 싶지만, 한편으로 목사는 오래 참고 가르쳐야 하기에 결국 간단히 답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것에는 정답이 없으므로 제가 생각하는 바를 적습니다.
영어 위키 백과에 가서 pound를 치면 무게 단위인 파운드의 유래가 나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Pound_(mass)
영어 단어 파운드는 로마 단어 즉 라틴어 ‘libra’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영어에서 파운드를 표기할 때는 ‘lb’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로마 사람들의 단위는 그리스 사람들의 단위에서 나왔습니다. 다음 기사의 첫째 줄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http://en.wikipedia.org/wiki/Ancient_Roman_units_of_measurement
그러면 영어 파운드와 라틴어 리브라에 해당하는 그리스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므나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단위를 보여 주는 다음 기사에서 무게(weight) 부분을 보기 바랍니다.
http://en.wikipedia.org/wiki/Ancient_Greek_units_of_measurement
므나는 100드라크마이고 표준에 따라 431-630그램입니다.영국에서 1파운드는 약 450그램입니다.
그러므로 1611년 당시의 영어 성경 번역자들은 므나에서 리브라로, 그리고 리브라에서 파운드로 무게, 혹은 화폐 단위의 이름이 바뀌었기에 보통의 영국 사람들을 위해 므나를 그대로 파운드로 번역하였습니다. 즉 영국의 문화는 많은 면에서 그리스, 로마(라틴) 문화의 연장선에 있어서 심지어 화폐/무게도 이름만 바뀌었지 내용은 같습니다. 사실 파운드 자체는 지금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단위를 접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번역을 할 때 원어를 그대로 살려서 화폐 파운드의 경우 므나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교사가 므나의 무게 혹은 가치를 가르쳐 주면 됩니다.
한편 요한복음 19장 39절의 경우 같은 파운드라 해도 무게를 나타내는 경우는 '근'이라고 하였는데 이 경우, 원어는 리트라(litra)이고 파운드 무게와 같습니다.
흠정역: 또 처음에 예수님께 밤에 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알로에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오니라.
KJB: And there came also Nicodemus, which at the first came to Jesus by night, and brought a mixture of myrrh and aloes, about an hundred pound [weight].
NIV 등을 포함한 모든 메이저 영어 성경이 100 파운드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근은 채소의 경우 375그램, 고기의 경우 600그램이므로 영어 파운드를 이와 비슷한 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단위는 성경의 오류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름 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Jesus’를 예수라고 표기합니다. 그런데 영어를 조금 안다고 하는 분은 꼭 ‘예수스’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다 님 자를 붙이면 ‘예수스님’(잘못 읽으면 예수 스님)이 되지요. 참으로 난감합니다. 이런 분들은 성령님도 성숨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Paris’를 우리는 파리 혹은 빠리라고 하고, 미국 사람들은 패리스라고 합니다.
‘Thomas’를 우리는 도마라고 하고, 미국 사람들은 토머스라고 합니다. 토머스 에디슨 아시지요?
그러면 ‘스’를 붙이고 안 붙이고가 오류의 유무를 결정합니까?
결코 아닙니다.
갈렙(Calep)은 여분네(Jephunneh)의 아들입니다.그런데 이름이 틀렸다고 ‘칼렙’, ‘예푼네’로 쓴 성경도 있습니다(표지에는 킹제임스라는 단어가 붙어 있음).
‘예푼네’가 ‘여편네’로 들리지 않습니까?
‘예푼네’가 정말로 맞나요? 끝의 h는 어디로 갔나요? Jesus의 s는 어디로 갔나요?
누구보다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은 자신들의 기준에도 미달입니다.
단위나 이름 같은 문제로 양심이 연약한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면 안 됩니다.
파운드라고 하든 므나라고 하든 근이라고 하든,우리나라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하든 미국 사람이 지이저스라고 하든 하나님은 다 같은 것으로 여기십니다.
그분은 각 나라 문화와 언어의 특수성을 반영해야 하는 단위나 이름 표기 문제로 성경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성경 안의 단어들이 있는 그대로 가능한 일대일 대응이 되게, 정직하게 수용 언어로 번역되면 그 성경을 인정하십니다.
흠정역 성경은 바로 그런 성경입니다. 제가 오늘 이 글을 쓴 것은 이런 무익한 질문을 통해 성경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려는 사람을 설득하려 함이 아닙니다. 이런 분은 이미 믿지 않기로 마음에 굳게 작정하였으므로 이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것을 가져옵니다. 마치 여호와의 증인들과 비슷합니다. 이런 불신의 악순환은 끝이 없습니다. 다만 이런 문제를 접하고 고민하는 그 형제를 위로하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늘의 큰 평강이 넘쳐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3-28 16:24:37 | 관리자
흠정역 성경은 복수도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면서요?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비방하면 안 됩니다.
몇 달 전에 어떤 분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진영의 한 목사님이 흠정역 성경이 복수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인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를 든 것이 요한복음 1장 12절이었습니다.
흠정역: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KJV: But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power to become th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영어로 보면 ‘the sons of God’이 복수인데 왜 흠정역은 ‘하나님의 아들’로 단수 처리했느냐는 것이 질문의 핵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번역자가 이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번역할까요?
우리말은 특별히 접미사 '-들' 등을 사용해 복수를 부각하지 않아도 의미상 복수가 되면 복수로 쓰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교양 있는 표현이 될 때가 많습니다.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할 때 어떻게 말합니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입니까? 아니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들’입니까?
이 경우 영어식 문법에 맞게 복수를 써야 한다고 ‘여러분들’이라 하면 자연스럽지 못한 번역 투의 문장이 되며 연설이 조잡해집니다.
우리말은 특히 ‘모든’, ‘여러’ 등과 같이 수 개념의 형용사가 앞에 붙으면 뒤에 오는 명사는 복수라도 대개 단수로 표현합니다.
모든 국민, 모든 사람, 여러 사람, 꽃 세 송이, 네 마리 개 등
물론 이런 데서 영어처럼 하려고 ‘들’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국민들, 모든 사람들, 여러 사람들, 꽃 세 송이들, 네 마리 개들 등
그리해도 ‘모든 국민들’, ‘모든 사람들’, ‘여러 사람들’처럼 어떤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고 ‘꽃 세 송이들, 네 마리 개들’처럼 전혀 자연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번역자는 앞뒤 문맥과 특히 읽힘성을 보고 판단하여 복수의 경우 ‘-들’을 넣을 수도 있고 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번역한 뒤 많이 읽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대화를 봅시다.
아들: “아버지, 저기 있는 꽃들은 다 뭐예요?”아버지: “그것들은 다 장미란다.”(They are all roses).
아버지의 대답이 “그것들은 다 장미들이란다.”로 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다 장미란다.”가 훨씬 더 우리말처럼 느껴집니다. 즉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에 굳이 '-들'을 넣으면 번역 투의 부자연스러운 표현이 됩니다.
이전에는 이런 것에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영어가 보편화하다 보니 복수 등에 신경 쓰는 사례가 날이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그것들은 다 장미란다.”로 하는 경우 장미는 물론 단수이고 영어로는 복수인 ‘roses’이므로 단편적으로 비교하면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다수는 “그것들은 다 장미란다.”라고 말하거나 써도 장미가 복수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즉, '-들'을 생략하는 것이 우리말로서는 더 자연스럽고 교양 있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장미를 단수로 표현해도 앞에 ‘그것들’과 ‘다’가 모두 여러 개를 표현하므로 그 말을 복수로 듣거나 읽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몇몇 분 중에 그래도 '-들'을 붙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여러 번역자가 번역 작업에서 우리말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적절하지 못하게 '-들'을 사용한 책과 글이 이미 세상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은 1장 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흠정역: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우리 주님은 성도들에게 다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 경우 ‘아들들’이라 해도 문제가 없지만 단수 아들로 하는 것이 우리말에서는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부분을 영어와 비교하고는 기계적으로 복수 처리하려 하면 교양 있는 우리말 번역이 아닌 번역 투의 조악한 번역이 됩니다.
영어에는 ‘children of Israel’이 640여 회 나옵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성경들은 이것을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원래대로 하자면 ‘이스라엘의 자손들’ 혹은 ‘이스라엘의 아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즉 야곱의 후손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에서는 일단 ‘의’를 빼도 문제가 없습니다.
또한 ‘자손’이라고 해도 그 자체가 집합 명사로 복수로 이해하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매번 ‘이스라엘 자손들’이라고 하면 오히려 성경의 자연스러운 읽힘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막혀 독자가 수월하게 읽지 못한다는 겁니다.
분명하게 야곱의 자손들이 아니라 그의 12 아들을 표현할 때는 '이스라엘의 아이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의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말로는 ‘이스라엘 자손’이라 해도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는 좋은 짐승입니다.”의 경우에 어떤 특정한 개, 즉 개를 단수로 본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Dogs are good animal.”로 해야 합니다. 우리말이 단수라고 ‘A dog'이라고 하면 촌스러운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sons, children 등의 복수는 앞뒤 문맥을 보고 아들들이나 아들, 자손들이나 아이들이나 자손 등으로 자연스럽게 번역하면 됩니다.
독자 여러분!
이제 한국어와 영어의 차이 그리고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와 반대로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 차이를 잘 이해해야 좋은 번역이 된다는 점을 이해하셨습니까?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들은 바로 이런 점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아들들’로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아쉬움과 불만을 토로하면 결국 성도들의 성경 신뢰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말 등 명백하고 단순한 것에 대한 교양이 부족해 설익은 주장이나 가르침을 양산하거나 그것에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말 용법을 잘 이해하면서 이런 주장을 지속해서 하는 분이 있다면 그분의 의도가 순수한지 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말에서는 복수를 쓰면 자연스럽지 않지만 교리적으로 꼭 써야만 하는 경우 저희는 우리말의 자연스러움을 포기하고 모두 복수 처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하늘들’(heavens)과 ‘죄들’(sins)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런 단어들은 교리적으로 반드시 단복수 구분이 되어야 하므로 자연스럽지 않아도 복수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고민을 별로 해 본 적이 없는 분들이나, 혹은 한국어의 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성도들 앞에서 자기자랑을 하기 위해 흠정역 성경이 단수와 복수도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 결국 킹제임스 성경의 위상이 약화되며, 자신의 목회와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특히 목사나 교사는 이런 일을 하면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되며 성경 사역에 큰 방해가 됩니다.
흠정역 성경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부디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먼저 제게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이메일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3-28 15:15:45 | 관리자
흠정역 성경은 시제도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면서요?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문제를 제기하려거든 먼저 사실관계부터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고 있는 흠정역 성경을 비판하면 그것은 성경 신자들을 특히 연약한 신자들을 넘어뜨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흠정역 성경을 보는 분들 가운데 시제를 문제로 삼아 혼란을 일으키는 분이 더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1-4절을 보겠습니다.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시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더라.
이런 분들은 1절의 ‘창조하시니라’, 2절의 ‘움직이시니라’, 그리고 5절의 ‘부르시니라’가 영어로는 ‘created’, ‘moved’, ‘called’로 시제가 과거로 되어 있는데 왜 흠정역은 이것들을 현재로 번역했느냐고 꼬투리를 잡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것으로 흠정역 성경의 번역을 비난하는 분들은 한국말을 쓰는 성경 신자 중에 자기만 독보적으로 영어를 잘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런 설익은 주장에 미혹되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우, 번역의 의도와 사실을 잘 알고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위의 세 단어를 현재로 표현하려면 각각 ‘창조하시느니라’, ‘움직이시느니라’, ‘부르시느니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흠정역은 각각 ‘창조하시니라’, ‘움직이시니라’, ‘부르시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다르지요?
왜 그럴까요?
흠정역 성경은 ‘하느니라’체라는 고어체의 예스러운 표현을 수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문체를 웅장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면으로만 보자면 개역성경은 뛰어난 번역입니다. 우리말의 웅장한 표현을 성경에 잘 녹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을 현대인에게 익숙한 문체로 바꾸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얼마나 조잡하고 가볍게 읽힐까요?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다.
물론 시중에는 이미 이런 식의 번역으로 출간된 성경이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이 당장 읽기에는 친숙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심과 장중한 경륜으로써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바로 그 놀라운 성경 기록의 격이 현저하게 낮아집니다. 더불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 불가한 최고의 경전이라는 성경의 독보적 위상과 가치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번역은 일단 현대인에게 친숙하고 또 어법상 틀린 번역은 아니겠지만, 성경 번역으로는 합당하다 할 수 없습니다. 존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초등학교 아이들이 읽는 창작 동화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이제 독자 스스로 두 번역을 비교하며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과거 시제를 잘 살려야겠다고 다음과 같이 번역하면 어떨까요?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더라.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더라…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더라.
이렇게 모든 구절을 ‘하셨더라’로 해 놓으면 웅장하게 선언하는 분위기가 전혀 살아나지 않고 그 표현이 조잡해집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독자께서 스스로 읽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서는 예스러운 표현인 ‘하느니라’체를 도입하여 웅장하게 선언하는 표현기법을 써야 합니다. 개역성경은 이런 것을 잘 표현하였고 개역개정을 내면서도 이런 부분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다음은 개역개정 위원회의 번역 원칙입니다.
개역 성경의 옛 문체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하다’체를 사용하여 현대화하지 않고, ‘하느니라’체를 그대로 사용하여 고어체를 유지하였다. 이것은 아직도 경전의 권위를 고어체 활용과 연관시키는 독자들의 취향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1-4절에서 보듯이 ‘하시니라’ ‘좋았더라’ 등의 표현을 ‘하셨다’ ‘좋았다’ 등으로 고치지 않았다. http://www.bskorea.or.kr/kbs_gae/change/change2.htmlhttp://pcouncil.net/jboard/?code=ilban-aa002&id=1781&p=detail&page=48(번역의 원칙만 참조하기 바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아직도 경전의 권위를 고어체 활용과 연관시키는 독자들의 취향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의 뜻은 현재 평균적인 교양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현시대에 쓰고 있는 말이 아닌 지금 실생활에서 쓰고 있지 않은 예스러운 고어체의 글에서 경전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느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흠정역 성경 창세기 1장 1절은 과거를 현재로 오역한 것이 아니라 ‘하느니라’체로 과거의 사건을 웅장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즉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고어체로 유려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굳이 이 부분을 집요하게 따지는 이유는 1장 1절은 오래전에 마친 일이고, 2절부터는 재창조임이 나타나게 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면서도 흠정역 성경은 3, 4, 5절 끝에는 ‘빛이 있었고’, ‘좋았더라’, ‘첫째 날이더라.’라는 말로 과거 시제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조합을 거쳐서 성경이 웅장한 경전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입다의 이야기를 하나 더 예로 들겠습니다.
사사기 11장 34-40절을 읽으시면서 각 절의 어미 처리를 유심히 보시면 ‘하느니라’와 ‘하였더라’가 조합으로 나옴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9절의 ‘돌아오니라’와 ‘아니하니라’는 현재 시제가 아니라 고어체로 과거 시제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현재로 표현하려면 ‘돌아오느니라’와 ‘아니하느니라’가 되어야 합니다.
34 ¶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작은북을 잡고 춤추며 나아와 그를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아이로 그녀 외에는 그에게 아들딸이 없었더라. 35 그가 그녀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네가 나를 심히 참담하게 하였으며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도다. 내가 {주}를 향해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매 36 그녀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주}를 향해 입을 여셨을진대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주}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원수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37 그녀가 또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나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고 39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그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풍습이 되어 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일 년에 나흘씩 애곡하였더라.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지적한 뒤 줄을 긋고는 흠정역이 오역이라고 주장하면서 역자가 번역 과정에서 시제도 못 맞추었다거나 혹은 무언가를 주장하기 위해 억지로 시제를 고쳤다고 한다면, 그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단언컨대 저는 흠정역 성경에서 제가 알면서 고의적으로 시제 등을 고친 곳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미처 알지 못한 채 시제 등이 잘못 표기될 수는 있습니다. 그런 데를 발견하시면 언제라도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이메일을 보내 주십시오.
이런 고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분들이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마치 제가 성경을 의도적으로 오역한 것으로 개인 블로그 등에 발표하면 결국 킹제임스 성경 자체의 위상이 약화됩니다. 특히 목사나 교사가 이런 일을 하면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되며 성경 사역에 큰 방해가 됩니다.
더불어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한국말을 쓰는 한국 사람에게 목회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려면 한국어와 영어 중에 어느 언어를 우선해서 잘 이해하고 구사해야 할까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한국어입니다. 물론 목회자나 성경 교사가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입니다. 아직도 많은 자료와 좋은 책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못합니다. 또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는 것도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먼저 한국어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깊고 품위 있게 구사할 줄 알아야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신장이 크지 않은, 즉 다리가 길지 않아 큰 보폭으로 움직일 수 없는 육상 선수와 한쪽 다리만 비정상적으로 긴 육상 선수가 있다면 실제 경기에서 누가 더 유리할까요? 물어볼 것도 없이 비록 짧지만, 정상적인 다리를 지니고 있는 선수입니다. 이처럼 영어에 관해서는 비교적 정통하지만 정작 한국어에 대한 교양과 이해가 부족하면 앞서 소개한 것처럼 설익은 문제를 제기하고 어설픈 주장을 하게도 됩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영어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랑하면서도 한편으로 우리말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면 우리말로 된 흠정역 성경과 기타 자료들만 충실하게 공부하고 연구한 그리스도인보다 어느 부분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끝으로 독자 여러분!
흠정역 성경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거든 아직 양심이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먼저 제게 이메일 등을 통해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지체들을 위한 이러한 배려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을 잘 헤아려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3-28 14:26:01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사도 바울의 서신서 뒷부분에 있는 추신이 성경 말씀이냐고 물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6장 18절 뒤에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로마에서 써서 보내다.”라는 추신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추신은 성경 말씀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앞에 있는 제목 즉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신”도 마찬가지로 성경이 아닙니다.
흠정역 성경에는 성경 66권 각 책의 설명이 간단히 들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기록 시기가 주후 55년경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이런 모든 것들도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은 갈라디아서 1장 1절부터 6장 18절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 부록으로 사람들(번역자들)이 첨가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따라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제목과 추신이 있다고 해도 그것들은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분의 의문점은 갈라디아서의 기록 시기가 주후 55년경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추신에 따라서 그 이전에 바울이 이미 로마에 간 적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록 시기와 추신은 사람들의 첨가물이므로 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은 다만 참조용으로만 보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기록 시기의 경우 초기, 중기, 후기 기록설이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역시 아무도 정확한 시기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추신, 제목 등은 1611년 판 영어 성경 그대로를 번역한 것이고 66권 각 책 앞의 요약 설명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치 지도 등을 넣은 것처럼 저희가 정리해 넣은 것입니다.
이 점에 유의해서 흠정역 성경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2015-03-20 14:25:19 | 관리자
2015년 1월에도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최우수 성경으로 선정되었네요.
1,3, 4위가 다 우리 성경입니다.
http://lifebook.co.kr/final/bibles/bible_best.asp
2015-02-25 16:20:59 | 관리자
안녕하세요?
며칠 전에 한 분이 창세기 1장 1절을 왜 "태초"로 번역하지 않고 "처음"으로 번역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성경 번역의 철학에 대한 것으로 중요한 이슈이기에 잠시 설명하려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번역은 해석과는 다릅니다.번역은 가능한 한 개인의 편견과 사견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자세로 성경 본문의 단어들(예를 들어 beginning)을 수용 언어의 중립적인 단어들(예를 들어 처음)로 옮겨야 합니다.또한 가능하면 성경 본문의 다른 구절에 기록된 같은 단어는 번역되는 언어에서도 모두 같은 단어로 옮기는 통일성과 일관성을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그래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beginning이라는 단어가 총 106회 나옵니다.중고등학교 학생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중립적인 우리말로 beginning을 번역하면 ‘처음’과 ‘시작’ 이 될 수 있고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거의 다 그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앞뒤 문맥상 시간이 처음 시작된 때를 나타내므로 사실 태초(太初)라는 단어를 써도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같은 문구인 ‘In the beginning’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앞뒤 문맥상 절대 태초로 번역될 수 없습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개역성경처럼 이런 구절을 태초라고 번역하면 하늘과 땅이 창조되기 전, 즉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1절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 역시 "처음"이라는 중립적인 말로 옮겨야 독자가 성경의 앞뒤 문맥을 보고 스스로 판단해서 "처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르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번역자는 해석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번역자는 가능한 한 자기의 해석이 들어가지 않도록 착실하게 번역하여야 합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바로 이런 철학을 가지고 가능한 한 축자 번역이 되게, 영어 킹제임스 성경 본문의 같은 말은 가능한 한 우리말에서도 같은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개역성경은 창세기 1장 1절의 하늘과 땅을 천지로 번역하였습니다.이것은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성경을 성경으로 공부하기에는 심히 부족합니다.
heaven, earth 등의 단어가 성경의 각 구절마다 천, 지, 하늘, 땅 등으로 달리 번역되면 이 단어들의 성경적 용례를 살펴볼 수 없게 됩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일관성이 있게 heaven은 하늘로, earth는 땅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누가 하늘의 위치, 개수 등을 알고 싶으면 성경 단어 찾기로 가서 "하늘"이라고 치면 됩니다.
그러면 하늘과 관련된 모든 구절이 나오므로 독자 스스로 하늘의 개수, 위치, 그 안의 존재들 등을 타인의 도움 없이 즉 신학적 편견 없이 성경이 알려주는 그대로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고 기록된 그대로를 믿는 자들을 우리는 보통 성경 신자라고 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성경 신자가 계속해서 배출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단어들을 중립적인 단어로 가능한 한 초지일관 동일하게 번역한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바로 그런 성경입니다.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또한 바로 그런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kingdom, king은 다 왕국, 왕으로 일관성있게 번역하였습니다.반면에 개역성경, 한글킹제임스 성경 등은 나라, 왕, 임금 등으로 다채롭게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kingdom of heaven을 하늘의 왕국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반면에 개역성경, 한글킹제임스 성경 등은 천국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kingdom of God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반면에 개역성경, 한글킹제임스 성경 등은 하나님의 나라로 번역하였습니다.
개역성경, 한글킹제임스 성경 식으로 중요한 단어인 kingdom을 마음대로 번역하면 땅에 이루어지는 왕국(하늘의 왕국)이 천국이 되어 성경의 본래 의미를 가리게 됩니다. 더구나 이 경우에는 아예 반대가 되고 맙니다.
kingdom of heaven은 단2:44에 예언된 대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는 왕국이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닙니다.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 그 왕국은 다른 백성에게 남겨지지 아니하며 이 모든 왕국들을 산산조각 내어 소멸시키고 영원히 서리이다.
개역성경 등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는 Son of man을 인자로 번역하였습니다.반면에 신성을 나타내는 Son of God은 하나님의 아들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이 둘을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 일관되게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예수님의 신성이 나타나듯이, 사람이라는 누구나 쉽고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들어가야 예수님의 인성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렇게 해야 적어도 중고등학교 학생 이상의 교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성경 번역에 관한 확고한 철학 없이 번역된 성경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우리말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이런 철학을 살려 번역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바른 교리를 세우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갈수록 악해져만 가고 미혹이 판치는 세상에서 바로 이런 성경을 손에 쥐어야 비로소 성경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샬롬
패스터
2015-02-25 16:16:16 | 관리자
안녕하세요?
미국 뉴저지 중앙침례교회의 이황로 목사님께서 킹제임스 성경 관련 참고 문헌 목록을 여러 목사님들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독자들을 위해 공개하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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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목사님들께,
성경론에서 총체적 축자영감과 섭리보존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입장과 믿음도 있습니다.
여러 목사님들과 교제하면서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 참고문헌을 부탁하시곤 하였습니다.
더 많은 책들과 자료들이 있지만 여기 보내드리는 것은 단지 제가 소유하고 있는 자료들입니다. 더 좋은 책들, 또 반대입장에 있는 책들도 물론 있으니, 그 판단과 선택은 각자 목사님들께서 하시고 시간 절약을 위해서 몇 가지 서적과 웹사이트를 찾아보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목사님께서 아시는 좋은 책자들과 정보들도 소개해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명품 가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은 명품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명품이 아닌데 짝퉁 가방을 가지고 있으면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이슈는 이제 단지 손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해서 태양이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목회자 각자 시간과 마음을 내어서 그 반대 입장에 분명히 서든가 아니면 과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한 가지로 기록하게 하시고, 오늘날까지도 보존하셨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답을 제시해야 합니다.
하여튼 시간이 걸리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보내드립니다.
새해에 건강하시고 사역에 두루 열매가 맺히는 귀한 목사님들이 되시도록 기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이황로 올림. Hwangro Lee, Pastor Central Baptist Church 201.981.1967.900 Madison Ave, Paterson, NJ 07501. Sunday Service557 Blvd., Hasbrouck Hts, NJ 07604. Evening Serviceswww.centralkbc.com
2015-02-12 12:48:33 | 관리자
안녕하세요?
지난 몇 달 동안 종종 주변의 몇몇 형제/자매님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갑자기 이상한 이메일을 받았다고 하며 혹시 제가 그것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메일의 제목은 ‘킹제임스 성경에 관한 불편한 진실’로 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비방 글들의 링크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이메일을 무차별 살포하는 분은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특히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대해 매우 분개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적어 놓은 비방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미 지난 400년 동안 영어 세상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던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허무맹랑한 이야기일지라도 막상 이런 이야기를 처음 접하면 당혹스러워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 오늘은 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올리려고 합니다.
그 글을 적은 분인지 아니면 그분의 추종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전에는 자정이 넘은 시각에 동일한 글을 킵바이블 사이트에 올렸기에 관리자 형제가 즉시 삭제하였습니다. 관리자들이 신경을 쓰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는 야심한 시간을 이용해 짧은 순간 게재되었던 글임에도 그 글을 읽고 놀란 마음에 어찌 된 일이냐고 질문의 메일을 보낸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수천 군데 심각한 오류가 있어서 많은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현대 역본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시비를 걸지 않으면서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그 저의가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뿐인 귀중한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하는 데 허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에 오늘은 매우 안타까운 심정으로 글을 씁니다.
이들이 차라리 현대/자유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아예 틀렸고 인간 저자들이 임의대로 쓴 기록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면 차라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께서 원어로 성경을 보존해 주셨다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온 시간과 에너지를 오직 킹제임스 성경을 공격하는 데만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메일과 카톡 등을 통해 ‘킹제임스 성경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글을 무차별적으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이들의 헛된 주장에 넘어가서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존해주신 성경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거나 잃어버리는 연약한 지체들이 있어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간단히 글을 씁니다.
이들은 한동안 원어를 가지고 사람들을 선동하더니 요즘 들어서는 주로 킹제임스 성경의 난외주와 대소문자를 가지고 성도들을 홀리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대부분의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는 한 단어가 여러 개의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자는 앞뒤 문맥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그 여러 개 뜻 가운데서 가장 합당한 하나를 정해 성경을 번역하게 됩니다.
또한 성경에 쓰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는 원래 대소문자 구별이 없습니다. 위클리프 이후 킹제임스 성경에 이르기까지 약 230년 동안 영어 성경의 번역자들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어에서 같은 영(그리스어의 경우 프뉴마)이라도 하나님의 영으로 확실히 판단되는 데는 대문자 Spirit으로, 하나님의 영이나 혹은 다른 영으로 두어도 문제가 없는 데는 소문자 spirit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문맥에 따라 독자가 판단해서 이해하면 됩니다.
오늘은 이런 사람들이 사용하는 난외주와 대소문자 비방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려 합니다.
1. 난외주
과거에 영어 성경이 나올 때에는 번역하면서 특정 단어나 절에 대해 번역자들 간에 만장일치로 깔끔하게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 경우 난외주에 소수의 의견을 표기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난외주가 가장 많았던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 바로 전에 나온 제네바 성경이었습니다. 제네바 성경 안에는 칼빈의 개혁주의(장로교) 사상이 너무 많이 들어갔기에 제임스 왕은 성경을 새로 번역하라고 명령하면서 특별히 난외주를 최소화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11년에 출간된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평균 한 페이지에 5-6개 정도의 난외주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판단해서 알아야 할 것은 난외주란 소수의 다른 견해가 있었다는 정황을 정직하게 알리는 것이 목적일 뿐 난외주 자체가 본문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20세기 최고의 본문 비평 학자로 알려진 에드워드 F. 힐즈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번역자들이 킹제임스 성경에 첨가한 난외주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고를 섭리[돌보심]로 인도하셨음을 보여 준다. 스크리브너(1884)는 외경이 포함된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에 8,422개의 난외주가 있었다고 말한다. 스크리브너는 구약성경의 난외주들 가운데 4,111개는 히브리어나 아람어 원문에 좀 더 문자적인 의미를 제공해 주며 2,156개는 달리 번역할 수 있는 예들이고 67개는 이문들이라고 말한다. 또한 신약성경의 난외주들 가운데 112개는 그리스어의 문자적 번역을 제공해 주며 582개는 달리 번역할 수 있는 예들이고 37개는 이문들이다. 이러한 난외주들은 번역자들이 그들의 사고 과정 속에서, 모든 가능성을 가늠하면서 자기들이 보기에 가장 최상의 것으로 보이는 번역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를 받았음을 보여 준다. <킹제임스 성경 변호 213쪽>
<킹제임스 성경 변호 무료 PDF>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13&page=5
이분은 곧 번역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 살펴보았음을 난외주에 표기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겸손함을 보시고 섭리 즉 돌보심으로 그들이 본문의 단어들 - 난외주가 아니라 - 을 선택하는 것을 인도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겸손함에 대해 힐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난외주들이 보여 주듯이,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자신들의 작품인 그 성경을 완전한 것 혹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다만 그 성경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들을 신뢰할 만하게 재현한 것으로 여겼으며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도 그것을 그렇게 추천했다. (214쪽)
그리고 힐즈는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주는 글>의 마지막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이미 서문의 분량을 초과하지 않았다면 다른 많은 것들을 온유한 독자인 당신에게 경고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확실히 세울 수 있는 하나님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에게 당신을 맡기는 일만 남았다. 그분은 우리의 눈에서 비늘을, 우리의 마음에서 베일을 벗기신다. 또 우리가 자신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우리의 지혜를 열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넓히시며 참으로 우리의 성정을 고치신다. 그 결과 우리는 금과 은보다 더 그것[말씀]을 사랑할 수 있으며 참으로 끝까지 그것을 사랑할 수 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안으로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분께서 우리 앞에 자신의 말씀을 놓으실 때에 그것을 읽는 것, 그분께서 자신의 손을 뻗으시고 부르실 때에 ‘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는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 [바로] 그것은 복된 일이며 우리를 결국 영존하는 복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알고 그분을 섬기도록 주님께서 돌보심과 내적 의식으로 우리 안에서 일하실 것을 구한다. 이로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는 그분께 인정을 받을 것이다. 성령님과 더불어 그분께 모든 찬양과 감사가 있기를 원한다. 아멘."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주는 글>
난외주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1611년 초판 발행 이후에 킹제임스 성경이 정착되면서 난외주들은 성경 자체에서 곧 사라졌다는 겁니다.
외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경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역사를 보여 주는 역사서로 부록으로 추가되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를 가장 크게 미워하던 사람들이 만든 제네바 성경에도 외경이 들어 있었지만 후에는 난외주와 함께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외경이나 난외주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것은 킹제임스 성경 본문이지 난외주나 외경이 아닙니다.
바로 그 성경 본문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 거기 담긴 복음을 듣고 확신하는 사람을 구원시키고 성화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시고 사용하시는 것은 킹제임스 성경의 본문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준 글’이나 ‘제임스 왕에게 바친 헌정문’이나 난외주나 외경이나 금박 표지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철저하게 인간들의 산물일 뿐입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의 본문!
하나님은 바로 이 성경 본문을 영감으로 주시고 섭리로 보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1611년의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순수한 이 본문을 정확하게 일대일 대응이 되게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번역하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보존하였습니다.
바로 그 킹제임스 성경 본문을 사용해서 지난 400여 년 동안 복음이 선포되고 성경의 모든 교리가 확립되었습니다. 난외주나 외경 심지어 원본이 아닙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이 반포된 지 400년이 이미 지난 이 시점에서 난외주가 본문보다 옳다고 주장하며 교묘하게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또 그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는 분들이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6 이러한 부류 중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가 미련한 여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여자들은 죄들로 눌려 있고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7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 8 그런데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이들도 진리를 거역하나니 이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니라. 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하리니 이는 저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난 것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라(딤후3:6-9).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결국은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터인데 그때 가서 후회하면 너무 늦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수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들은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 복사본(팩시밀리)을 하나 구한 뒤 거기에 기록된 난외주만 열심히 찾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며 이슈를 만들 만한 단어가 나오면 손뼉을 치면서 킹제임스 성경이 틀리고 난외주가 맞는다고 소리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성경의 본문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 과연 성경 신자일까요?
이런 예 중 유명한 것이 바로 이사야서 14장 12절의 루시퍼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은 분명히 에스겔서 28장의 ‘타락한 그룹’이 루시퍼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난외주에는 ‘daystar’ 즉 샛별(계명성)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접할 때는 “과거에 이 단어를 샛별로 본 사람들도 있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그 이상의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봐라, 루시퍼가 아니라 샛별이 맞다”고 주장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단 한 번도 ‘샛별’을 본문으로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1611년 이후로 지금까지 산 사람들의 수를 생각해 볼 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적어도 100억 권 정도 인쇄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그 100억 권에 무어라 되어 있습니까? 루시퍼지요.
바로 이 본문을 가지고 1611년 이후의 모든 신학교가 세워지고 신학 서적들이 저술되었습니다. 즉 교리가 세워졌습니다. 이런 역사적 증거와 현실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1611년 킹제임스 성경 본문에 기록된 루시퍼가 아니라 난외주의 샛별이 맞는다고 주장하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과연 성경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호하게 일하신 적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신약 성경 사본들은 공개적으로 여러 대륙의 거의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보급되었습니다. 반면에 모든 현대 역본들의 모체가 되는 천주교회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바티칸 도서관과 동방 정교회 수도원에 고이 간직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예수님 승천 후 1850년이 지난 시점에 이 둘이 공개되면서 이것들이 참으로 진실한 사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그 이전의 1850년 동안 성도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도 없이 믿음 생활을 했단 말인가요?
성경을 보존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시12:6-7) 부인하는 현대 역본 역자들의 이런 주장과 난외주를 가지고 본문을 대체하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거의 동일한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의 순수한 본문이 보편적으로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보급되고 유통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의 난외주, 외경 그리고 천주교 소수 사본 등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2. 대문자/소문자 spirit/Spirit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해서 공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몇 구절에서는 Spirit/spirit이 여전히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1:12(ACTS 11:12). “And the spirit bade me go with them, nothing doubting. Moreover these six brethren accompanied me, and we entered into the man’s house.”여기의 소문자 spirit은 1611년과 1769년 판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8(ACTS 11:28). “And there stood up one of them named Agabus, and signified by the spirit that there should be great dearth throughout all the world: which came to pass in the days of Claudius Caesar.” 여기의 소문자 spirit은 1611년, 1638년 그리고 1769년 판에 있습니다.
요일 5:8(1 JOHN 5:8). “And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1611년 판에는 대문자 Spirit으로 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다음에 나오는 Water와 Blood도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1638년과 1769년 판에는 이것이 소문자 spirit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spirit)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spirit/Spirit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적 존재(a spirit being), 사람의 영, 성령님, 정신 등
2. 성경에서는 소문자 spirit이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사례들이 있다(출31:3; 욥27:3; 고전2:12).
3. 소문자 spirit은 성령님의 일을 묘사할 때도 쓰인다. 예를 들어 동일한 말씀이 요엘서 2장 28에는 소문자로(pour out my spirit), 사도행전 2장 17절에는 대문자로(pour out of my Spirit)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여러 판에서 행11:12, 행11:28, 요일5:8에 소문자 spirit이 쓰인 것은 앞뒤 문맥으로 살펴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물론 이런 부분에서 누군가가 대문자 Spirit이 쓰여야 합당하다고 주장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영이 하는 일은 다시 태어난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공동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이런 구절들에서 spirit/Spirit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므로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최종 권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 단어 프뉴마는 대문자 소문자 구별이 없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프뉴마를 있는 그대로 ‘스피릿’(대문자든 소문자든)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어의 영감/보존에도 문제가 없으며 번역되면서도 보존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영어 성경의 역자들은 영어 단어 스피릿에 그리스 단어에 없는 대소문자의 구별이 있으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신실하게 대소문자 spirit/Spirit을 구분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 인쇄술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식자공이 일일이 모든 단어의 알파벳(성경 전체를 보면 수십만 개 혹은 수백만 개)을 찾아서 조판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 조판공들은 대소문자 spirit/Spirit에서 실수를 하였습니다.
조판공의 이런 실수 예는 여럿 있습니다.
이 중에 유명한 것은 사악한 성경(Wicked Bible)으로 알려진 1631년 판입니다. 이 판에서는 출20:14 말씀 즉 “너는 간음하지 말라”가 “너는 간음하라”로 되어 있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Wicked_Bible
즉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라고 조판해야 하는데 꼼꼼함을 요하는 작업 때문에 몸이 매우 피곤했던 식자공은 그만 여기서 중간의 ‘not’을 넣지 못했고 결국 그 성경은 “너는 간음하라”라고 명령하는 ‘사악한 성경’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성경의 대부분은 즉시 회수되어 폐기되었고 몇 개만 희귀본으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초판의 이런 실수 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keepbible.com/KJB2/View/2Vl
그래도 spirit/Spirit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분들은 리플링거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http://www.ourkjv.com/KJB.pdf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 구절에서는 spirit/Spirit에서 선택의 자유를 독자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앞뒤 문맥을 보고 독자가 결정하면 될 일이지 성경의 보존이나 최종권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끝으로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 성경에서 스펠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1611년의 초판을 참고하려 합니다.
그러나 1611년 초판에는 식자공의 이런 실수가 여럿 있습니다.
그러므로 1611년 초판이 최종적인 권위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요일5:8의 경우 1611년 초판에는 대문자 Spirit으로 되어 있고 동시에 그다음에 나오는 Water와 Blood도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Water와 Blood도 신성을 가진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로마체가 쓰이지 않았고 고딕체가 쓰였습니다. 고딕체의 경우 이런 사례에서는 종종 같은 구절에서 몇 단어를 연거푸 대문자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독일어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요일5:8에서 반드시 대문자 Spirit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그다음의 Water와 Blood도 대문자로 써야 합니다. 그러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결론을 드립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서너 군데는 spirit/Spirit이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감/보존/번역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 역자들은 최선을 다해 신실하게 번역하였으나 식자공의 실수로 이런 데가 있습니다. 이런 식자 문제들은 역자들이 살아 있던 시대에 대부분 곧바로 교정되었으나 역자들이 죽은 이후에도 처리되지 않은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서너 군데의 spirit/Spirit이 이 경우입니다.
그래서 철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옥스퍼드 판과 케임브리지 판이 나왔고 지금 존재하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둘 중의 하나를 쓰고 있습니다. 다만 토마스 넬슨 출판사 판은 자기들 마음대로 킹제임스 성경의 여러 단어를 임의로 수정하였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판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리플링거의 글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www.ourkjv.com/KJB.pdf
(*) 참고로 리플링거의 글은 매우 훌륭하지만 100% 옳지는 않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안내해 드린 것입니다.
저희가 처음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초판을 낼 때에는 영어 성경 파일 자체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특히 이탤릭체를 살린 파일을 찾기는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미국 Bible For Today의 웨이트 박사님이 주신 영어 파일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여러 소스를 알게 되었고 2011년에 400주년 기념판을 출간할 때에는 Pure Cambridge Text로 알려진 영어 본문을 사용하였습니다.
www.bibleprotector.com
물론 앞으로도 저희는 영어 본문의 경우 Pure Cambridge Text를 사용할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번역의 초기 세대들이 어쩔 수 없이 함께 감당해야 하는 짐입니다. “왜 처음부터 pure text를 쓰지 않았느냐?”고 질책해도 소용이 없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 논쟁만 불거지게 됩니다.
영어 성경도 1611년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기까지 약 230년의 담금질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런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혹시 본문, 번역 등에 의문이 있으면 대안과 함께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이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메일의 내용은 제안이어야지 독단적인 주장은 수용할 수 없습니다. 본문 난외주, 대소문자, 외경, 이역 등을 가지고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확신을 깨뜨리려는 사람들을 조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강한 확신 속에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의 어리석음과 답답함(자기들이 보기에)을 깨뜨리기 위해 ‘킹제임스 성경의 불편한 진실’ 같은 글을 쓰는 분들은 부디 앞으로는 그 귀중한 시간을 올바른 데 투자해서 ‘개역(개정판) 성경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글을 써서 수백만 성도들을 살리는 데 매진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값진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제발 눈을 열어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오류로 인해 고생하며 종교 시스템의 포로가 되어있는 신자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20여 년의 역사를 통해 킹제임스 성경 사역이 거의 다 완성된 시점에 뒷북을 치며 나타나 이미 킹제임스 성경의 한국어 번역사(史)가 증명한 일에 시비를 거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못할 일입니다. 더욱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는 우리가 펴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쓰고 있다니 이 얼마나 기막힌 아이러니입니까?
세상에는 다 때와 순서가 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고속도로가 자기 마음에 안 드니 내가 바로 옆에 새롭게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사람은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미 건설된 고속도로에 결함이 있다면 지혜를 모아 보수하고 다듬어 더 완성도 높은 도로가 되도록 하면 됩니다. 이렇게 이미 놓인 고속도로를 마음껏 이용해 상품을 나르고 이동하며 사업을 일구는 사람이 굳이 바로 옆에 길을 다시 만들겠다는 어리석은 고집쟁이를 한참이나 앞서가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금은 킹제임스 성경을 새로 번역할 때가 아니라 함께 지혜를 모아 이미 나와 굳건히 자리 잡은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잘 다듬고 최선을 다해 복음을 선포해서 죽어가는 혼들을 구원해야 할 때입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2015년에도 우리 주 예수님의 큰 평강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영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개정 신화>에서 저자인 리건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http://keepbible.com/KJB2/View/2Vl
여러분은 이제 확신을 가져도 된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손에 있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결코 ‘개정된 것’이 아니라 ‘정화된 것’이다.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이 성경이 우리를 위해 ‘영어로 보존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의 정확성에 대한 권위는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의 초판 인쇄본에 있지도 않고 제임스 1세의 인품에 놓여 있지도 않으며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 문학의 뛰어난 업적에 있지도 않고 심지어 그리스어 「공인본문」에 있지도 않다. 영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KJV)이라는 절대 무오한 말씀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겠다고 하신 약속과 그분의 능력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에 그분의 말씀이 있다.
‘킹제임스 성경의 불편한 진실’ 같은 글로 혹세무민하는 동일한 사람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다음에 있으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1. 원어를 과도하게 의지하면 안 되는 이유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9
2.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 이야기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464
3. 딱정벌레 이야기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1985
4. 스크리브너의 TR 이야기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22
5. 영감과 보존: 원본, 사본, 역본의 관계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7
2015-01-07 18:08:10 | 관리자
안녕하세요?
지난 몇 달 동안 종종 주변의 몇몇 형제/자매님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갑자기 이상한 이메일을 받았다고 하며 혹시 제가 그것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메일의 제목은 ‘킹제임스 성경에 관한 불편한 진실’로 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비방 글들의 링크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이메일을 무차별 살포하는 분은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특히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대해 매우 분개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적어 놓은 비방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미 지난 400년 동안 영어 세상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던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허무맹랑한 이야기일지라도 막상 이런 이야기를 처음 접하면 당혹스러워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 오늘은 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올리려고 합니다.
그 글을 적은 분인지 아니면 그분의 추종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전에는 자정이 넘은 시각에 동일한 글을 킵바이블 사이트에 올렸기에 관리자 형제가 즉시 삭제하였습니다. 관리자들이 신경을 쓰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는 야심한 시간을 이용해 짧은 순간 게재되었던 글임에도 그 글을 읽고 놀란 마음에 어찌 된 일이냐고 질문의 메일을 보낸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수천 군데 심각한 오류가 있어서 많은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개역(개정판)성경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시비를 걸지 않으면서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그 저의가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뿐인 귀중한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하는 데 허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에 오늘은 매우 안타까운 심정으로 글을 씁니다.
이들이 차라리 현대/자유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아예 틀렸고 인간 저자들이 임의대로 쓴 기록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면 차라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께서 원어로 성경을 보존해 주셨다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온 시간과 에너지를 오직 킹제임스 성경을 공격하는 데만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메일과 카톡 등을 통해 ‘킹제임스 성경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글을 무차별적으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이들의 헛된 주장에 넘어가서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존해주신 성경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거나 잃어버리는 연약한 지체들이 있어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간단히 글을 씁니다.
이들은 한동안 원어를 가지고 사람들을 선동하더니 요즘 들어서는 주로 킹제임스 성경의 난외주와 대소문자를 가지고 성도들을 홀리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대부분의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는 한 단어가 여러 개의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자는 앞뒤 문맥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그 여러 개 뜻 가운데서 가장 합당한 하나를 정해 성경을 번역하게 됩니다.
또한 성경에 쓰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는 원래 대소문자 구별이 없습니다. 위클리프 이후 킹제임스 성경에 이르기까지 약 230년 동안 영어 성경의 번역자들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어에서 같은 영(그리스어의 경우 프뉴마)이라도 하나님의 영으로 확실히 판단되는 데는 대문자 Spirit으로, 하나님의 영이나 혹은 다른 영으로 두어도 문제가 없는 데는 소문자 spirit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문맥에 따라 독자가 판단해서 이해하면 됩니다.
오늘은 이런 사람들이 사용하는 난외주와 대소문자 비방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려 합니다.
1. 난외주
과거에 영어 성경이 나올 때에는 번역하면서 특정 단어나 절에 대해 번역자들 간에 만장일치로 깔끔하게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 경우 난외주에 소수의 의견을 표기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난외주가 가장 많았던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 바로 전에 나온 제네바 성경이었습니다. 제네바 성경 안에는 칼빈의 개혁주의(장로교) 사상이 너무 많이 들어갔기에 제임스 왕은 성경을 새로 번역하라고 명령하면서 특별히 난외주를 최소화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11년에 출간된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평균 한 페이지에 5-6개 정도의 난외주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판단해서 알아야 할 것은 난외주란 소수의 다른 견해가 있었다는 정황을 정직하게 알리는 것이 목적일 뿐 난외주 자체가 본문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20세기 최고의 본문 비평 학자로 알려진 에드워드 F. 힐즈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번역자들이 킹제임스 성경에 첨가한 난외주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고를 섭리[돌보심]로 인도하셨음을 보여 준다. 스크리브너(1884)는 외경이 포함된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에 8,422개의 난외주가 있었다고 말한다. 스크리브너는 구약성경의 난외주들 가운데 4,111개는 히브리어나 아람어 원문에 좀 더 문자적인 의미를 제공해 주며 2,156개는 달리 번역할 수 있는 예들이고 67개는 이문들이라고 말한다. 또한 신약성경의 난외주들 가운데 112개는 그리스어의 문자적 번역을 제공해 주며 582개는 달리 번역할 수 있는 예들이고 37개는 이문들이다. 이러한 난외주들은 번역자들이 그들의 사고 과정 속에서, 모든 가능성을 가늠하면서 자기들이 보기에 가장 최상의 것으로 보이는 번역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를 받았음을 보여 준다. <킹제임스 성경 변호 213쪽>
<킹제임스 성경 변호 무료 PDF>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13&page=5
이분은 곧 번역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 살펴보았음을 난외주에 표기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겸손함을 보시고 섭리 즉 돌보심으로 그들이 본문의 단어들 - 난외주가 아니라 - 을 선택하는 것을 인도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겸손함에 대해 힐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난외주들이 보여 주듯이,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자신들의 작품인 그 성경을 완전한 것 혹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다만 그 성경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들을 신뢰할 만하게 재현한 것으로 여겼으며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도 그것을 그렇게 추천했다. (214쪽)
그리고 힐즈는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주는 글>의 마지막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이미 서문의 분량을 초과하지 않았다면 다른 많은 것들을 온유한 독자인 당신에게 경고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확실히 세울 수 있는 하나님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에게 당신을 맡기는 일만 남았다. 그분은 우리의 눈에서 비늘을, 우리의 마음에서 베일을 벗기신다. 또 우리가 자신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우리의 지혜를 열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넓히시며 참으로 우리의 성정을 고치신다. 그 결과 우리는 금과 은보다 더 그것[말씀]을 사랑할 수 있으며 참으로 끝까지 그것을 사랑할 수 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안으로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분께서 우리 앞에 자신의 말씀을 놓으실 때에 그것을 읽는 것, 그분께서 자신의 손을 뻗으시고 부르실 때에 ‘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는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 [바로] 그것은 복된 일이며 우리를 결국 영존하는 복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알고 그분을 섬기도록 주님께서 돌보심과 내적 의식으로 우리 안에서 일하실 것을 구한다. 이로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는 그분께 인정을 받을 것이다. 성령님과 더불어 그분께 모든 찬양과 감사가 있기를 원한다. 아멘."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주는 글>
난외주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1611년 초판 발행 이후에 킹제임스 성경이 정착되면서 난외주들은 성경 자체에서 곧 사라졌다는 겁니다.
외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경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역사를 보여 주는 역사서로 부록으로 추가되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를 가장 크게 미워하던 사람들이 만든 제네바 성경에도 외경이 들어 있었지만 후에는 난외주와 함께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외경이나 난외주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것은 킹제임스 성경 본문이지 난외주나 외경이 아닙니다.
바로 그 성경 본문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 거기 담긴 복음을 듣고 확신하는 사람을 구원시키고 성화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시고 사용하시는 것은 킹제임스 성경의 본문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준 글’이나 ‘제임스 왕에게 바친 헌정문’이나 난외주나 외경이나 금박 표지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철저하게 인간들의 산물일 뿐입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의 본문!
하나님은 바로 이 성경 본문을 영감으로 주시고 섭리로 보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1611년의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순수한 이 본문을 정확하게 일대일 대응이 되게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번역하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보존하였습니다.
바로 그 킹제임스 성경 본문을 사용해서 지난 400여 년 동안 복음이 선포되고 성경의 모든 교리가 확립되었습니다. 난외주나 외경 심지어 원본이 아닙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이 반포된 지 400년이 이미 지난 이 시점에서 난외주가 본문보다 옳다고 주장하며 교묘하게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또 그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는 분들이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6 이러한 부류 중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가 미련한 여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여자들은 죄들로 눌려 있고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7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 8 그런데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이들도 진리를 거역하나니 이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니라. 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하리니 이는 저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난 것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라(딤후3:6-9).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결국은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터인데 그때 가서 후회하면 너무 늦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수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들은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 복사본(팩시밀리)을 하나 구한 뒤 거기에 기록된 난외주만 열심히 찾습니다.
http://www.honortheson.com/1611_King_James-Bible_Version-Scanned.pdf
그리고는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며 이슈를 만들 만한 단어가 나오면 손뼉을 치면서 킹제임스 성경이 틀리고 난외주가 맞는다고 소리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성경의 본문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 과연 성경 신자일까요?
이런 예 중 유명한 것이 바로 이사야서 14장 12절의 루시퍼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은 분명히 에스겔서 28장의 ‘타락한 그룹’이 루시퍼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난외주에는 ‘daystar’ 즉 샛별(계명성)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접할 때는 “과거에 이 단어를 샛별로 본 사람들도 있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그 이상의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봐라, 루시퍼가 아니라 샛별이 맞다”고 주장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단 한 번도 ‘샛별’을 본문으로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1611년 이후로 지금까지 산 사람들의 수를 생각해 볼 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적어도 100억 권 정도 인쇄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그 100억 권에 무어라 되어 있습니까? 루시퍼지요.
바로 이 본문을 가지고 1611년 이후의 모든 신학교가 세워지고 신학 서적들이 저술되었습니다. 즉 교리가 세워졌습니다. 이런 역사적 증거와 현실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1611년 킹제임스 성경 본문에 기록된 루시퍼가 아니라 난외주의 샛별이 맞는다고 주장하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과연 성경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호하게 일하신 적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신약 성경 사본들은 공개적으로 여러 대륙의 거의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보급되었습니다. 반면에 모든 현대 역본들의 모체가 되는 천주교회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바티칸 도서관과 동방 정교회 수도원에 고이 간직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예수님 승천 후 1850년이 지난 시점에 이 둘이 공개되면서 이것들이 참으로 진실한 사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그 이전의 1850년 동안 성도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도 없이 믿음 생활을 했단 말인가요?
성경을 보존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시12:6-7) 부인하는 현대 역본 역자들의 이런 주장과 난외주를 가지고 본문을 대체하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거의 동일한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의 순수한 본문이 보편적으로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보급되고 유통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의 난외주, 외경 그리고 천주교 소수 사본 등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2. 대문자/소문자 spirit/Spirit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해서 공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몇 구절에서는 Spirit/spirit이 여전히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1:12(ACTS 11:12). “And the spirit bade me go with them, nothing doubting. Moreover these six brethren accompanied me, and we entered into the man’s house.”여기의 소문자 spirit은 1611년과 1769년 판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8(ACTS 11:28). “And there stood up one of them named Agabus, and signified by the spirit that there should be great dearth throughout all the world: which came to pass in the days of Claudius Caesar.” 여기의 소문자 spirit은 1611년, 1638년 그리고 1769년 판에 있습니다.
요일 5:8(1 JOHN 5:8). “And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1611년 판에는 대문자 Spirit으로 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다음에 나오는 Water와 Blood도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1638년과 1769년 판에는 이것이 소문자 spirit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spirit)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spirit/Spirit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적 존재(a spirit being), 사람의 영, 성령님, 정신 등
2. 성경에서는 소문자 spirit이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사례들이 있다(출31:3; 욥27:3; 고전2:12).
3. 소문자 spirit은 성령님의 일을 묘사할 때도 쓰인다. 예를 들어 동일한 말씀이 요엘서 2장 28에는 소문자로(pour out my spirit), 사도행전 2장 17절에는 대문자로(pour out of my Spirit)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여러 판에서 행11:12, 행11:28, 요일5:8에 소문자 spirit이 쓰인 것은 앞뒤 문맥으로 살펴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물론 이런 부분에서 누군가가 대문자 Spirit이 쓰여야 합당하다고 주장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영이 하는 일은 다시 태어난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공동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이런 구절들에서 spirit/Spirit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므로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최종 권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 단어 프뉴마는 대문자 소문자 구별이 없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프뉴마를 있는 그대로 ‘스피릿’(대문자든 소문자든)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어의 영감/보존에도 문제가 없으며 번역되면서도 보존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영어 성경의 역자들은 영어 단어 스피릿에 그리스 단어에 없는 대소문자의 구별이 있으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신실하게 대소문자 spirit/Spirit을 구분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 인쇄술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식자공이 일일이 모든 단어의 알파벳(성경 전체를 보면 수십만 개 혹은 수백만 개)을 찾아서 조판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 조판공들은 대소문자 spirit/Spirit에서 실수를 하였습니다.
조판공의 이런 실수 예는 여럿 있습니다.
이 중에 유명한 것은 사악한 성경(Wicked Bible)으로 알려진 1631년 판입니다. 이 판에서는 출20:14 말씀 즉 “너는 간음하지 말라”가 “너는 간음하라”로 되어 있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Wicked_Bible
즉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라고 조판해야 하는데 꼼꼼함을 요하는 작업 때문에 몸이 매우 피곤했던 식자공은 그만 여기서 중간의 ‘not’을 넣지 못했고 결국 그 성경은 “너는 간음하라”라고 명령하는 ‘사악한 성경’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성경의 대부분은 즉시 회수되어 폐기되었고 몇 개만 희귀본으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초판의 이런 실수 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20
그래도 spirit/Spirit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분들은 리플링거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http://www.ourkjv.com/KJB.pdf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 구절에서는 spirit/Spirit에서 선택의 자유를 독자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앞뒤 문맥을 보고 독자가 결정하면 될 일이지 성경의 보존이나 최종권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끝으로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 성경에서 스펠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1611년의 초판을 참고하려 합니다.
그러나 1611년 초판에는 식자공의 이런 실수가 여럿 있습니다.
그러므로 1611년 초판이 최종적인 권위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요일5:8의 경우 1611년 초판에는 대문자 Spirit으로 되어 있고 동시에 그다음에 나오는 Water와 Blood도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Water와 Blood도 신성을 가진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로마체가 쓰이지 않았고 고딕체가 쓰였습니다. 고딕체의 경우 이런 사례에서는 종종 같은 구절에서 몇 단어를 연거푸 대문자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독일어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요일5:8에서 반드시 대문자 Spirit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그다음의 Water와 Blood도 대문자로 써야 합니다. 그러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결론을 드립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서너 군데는 spirit/Spirit이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감/보존/번역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 역자들은 최선을 다해 신실하게 번역하였으나 식자공의 실수로 이런 데가 있습니다. 이런 식자 문제들은 역자들이 살아 있던 시대에 대부분 곧바로 교정되었으나 역자들이 죽은 이후에도 처리되지 않은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서너 군데의 spirit/Spirit이 이 경우입니다.
그래서 철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옥스퍼드 판과 케임브리지 판이 나왔고 지금 존재하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둘 중의 하나를 쓰고 있습니다. 다만 토마스 넬슨 출판사 판은 자기들 마음대로 킹제임스 성경의 여러 단어를 임의로 수정하였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판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리플링거의 글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www.ourkjv.com/KJB.pdf
(*) 참고로 리플링거의 글은 매우 훌륭하지만 100% 옳지는 않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안내해 드린 것입니다.
저희가 처음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초판을 낼 때에는 영어 성경 파일 자체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특히 이탤릭체를 살린 파일을 찾기는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미국 Bible For Today의 웨이트 박사님이 주신 영어 파일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여러 소스를 알게 되었고 2011년에 400주년 기념판을 출간할 때에는 Pure Cambridge Text로 알려진 영어 본문을 사용하였습니다.
www.bibleprotector.com
물론 앞으로도 저희는 영어 본문의 경우 Pure Cambridge Text를 사용할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번역의 초기 세대들이 어쩔 수 없이 함께 감당해야 하는 짐입니다. “왜 처음부터 pure text를 쓰지 않았느냐?”고 질책해도 소용이 없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 논쟁만 불거지게 됩니다.
영어 성경도 1611년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기까지 약 230년의 담금질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런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혹시 본문, 번역 등에 의문이 있으면 대안과 함께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이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메일의 내용은 제안이어야지 독단적인 주장은 수용할 수 없습니다. 본문 난외주, 대소문자, 외경, 이역 등을 가지고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확신을 깨뜨리려는 사람들을 조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강한 확신 속에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의 어리석음과 답답함(자기들이 보기에)을 깨뜨리기 위해 ‘킹제임스 성경의 불편한 진실’ 같은 글을 쓰는 분들은 부디 앞으로는 그 귀중한 시간을 올바른 데 투자해서 ‘개역(개정판) 성경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글을 써서 수백만 성도들을 살리는 데 매진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값진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제발 눈을 열어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오류로 인해 고생하며 종교 시스템의 포로가 되어있는 신자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20여 년의 역사를 통해 킹제임스 성경 사역이 거의 다 완성된 시점에 뒷북을 치며 나타나 이미 킹제임스 성경의 한국어 번역사(史)가 증명한 일에 시비를 거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못할 일입니다. 더욱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는 우리가 펴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쓰고 있다니 이 얼마나 기막힌 아이러니입니까?
세상에는 다 때와 순서가 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고속도로가 자기 마음에 안 드니 내가 바로 옆에 새롭게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사람은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미 건설된 고속도로에 결함이 있다면 지혜를 모아 보수하고 다듬어 더 완성도 높은 도로가 되도록 하면 됩니다. 이렇게 이미 놓인 고속도로를 마음껏 이용해 상품을 나르고 이동하며 사업을 일구는 사람이 굳이 바로 옆에 길을 다시 만들겠다는 어리석은 고집쟁이를 한참이나 앞서가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금은 킹제임스 성경을 새로 번역할 때가 아니라 함께 지혜를 모아 이미 나와 굳건히 자리 잡은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잘 다듬고 최선을 다해 복음을 선포해서 죽어가는 혼들을 구원해야 할 때입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2015년에도 우리 주 예수님의 큰 평강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영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개정 신화>에서 저자인 리건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20
여러분은 이제 확신을 가져도 된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손에 있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결코 ‘개정된 것’이 아니라 ‘정화된 것’이다.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이 성경이 우리를 위해 ‘영어로 보존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의 정확성에 대한 권위는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의 초판 인쇄본에 있지도 않고 제임스 1세의 인품에 놓여 있지도 않으며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 문학의 뛰어난 업적에 있지도 않고 심지어 그리스어 「공인본문」에 있지도 않다. 영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KJV)이라는 절대 무오한 말씀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겠다고 하신 약속과 그분의 능력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에 그분의 말씀이 있다.
‘킹제임스 성경의 불편한 진실’ 같은 글로 혹세무민하는 동일한 사람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다음에 있으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1. 원어로 너스레떠는 목사들 격퇴하기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9
2.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 이야기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464
3. 딱정벌레 이야기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1985
4. 스크리브너의 TR 이야기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22
5. 영감과 보존: 원본, 사본, 역본의 관계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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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7 18:08:1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