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를 쪼개지 않아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다(창세기 15:10)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때로 성경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해석이 강단에서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 창세기 15장 10절도 그 중 하나다.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짐승들을 중간에서 쪼개어 놓았지만 **“새들은 나누지 아니하였더라”**는 단순한 기록을 두고, 어떤 설교자들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희생예물을 잘못 드려서 그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집트에서의 400년 종살이를 희생예물 드림의 실수에 대한 결과로 해석하며, 성도들에게 ‘예배를 정성껏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다’는 두려움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스스로 해석되며, 성경 안의 다른 말씀들과 일관되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창세기 15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왜 이런 해석이 성경적이지 않은지, 성경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세 가지 핵심 주제에 따라 살펴본다.
1. 창세기 15장은 “희생예물”이 아니라 “언약”의 장면이다
먼저, 창세기 15장은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의 희생예물 드림 장면이 아니라 언약 체결 장면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장차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며 그들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창15:5,7). 아브람은 이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
그 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짐승들을 준비하라고 명하신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해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 하시니라.” (창15:9)
이때 아브람은 짐승들을 중간에서 나누어 언약의 전통에 따라 양쪽에 두었고, 새는 쪼개지 않았다.
“아브람이 그분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취해 그것들을 중간에서 나누고 모든 조각을 서로 마주 보게 놓았으나 새들은 나누지 아니하였더라.” (창15:10)
이것은 당시 고대 중동 지역에서 언약을 맺을 때 사용되던 방식으로, 쪼갠 희생 동물들 사이로 언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면서 그 언약의 진지함을 맹세하는 의식이었다. 이를 성경은 예레미야 34장에서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또 스스로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것의 조각들 사이로 지나갈 때에 내 앞에서 맺은 언약의 말들을 이행하지 아니하고 내 언약을 범한 자들… 그들을 넘겨주리니.” (렘34:18–19)
창세기 15장의 핵심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희생예물을 잘 드렸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의 책임을 지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겠다는 주권적 선언이다. 실제로 아브람은 쪼갠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지 않았고, 하나님만이 연기 나는 화로와 타오르는 등불의 형태로 지나가셨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오르는 등불이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가니라.” (창15:17)
즉 이 언약은 조건적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맺으시고 책임지시는 언약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언약의 실패를 아브람에게 돌리는 주장을 무너뜨린다.
2. 새를 쪼개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다 – 성경이 그렇게 명하셨다
새를 쪼개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브람의 희생예물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레위기의 규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레위기 1장 17절에서 분명히 명하셨다:
“그는 그것의 날개들과 함께 그것을 찢되 둘로 나누지는 말지니라.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곧 불 위의 나무 위에서 태울지니…” (레1:17)
즉 새는 찢되,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따라서 아브람이 새를 쪼개지 않은 것은 성경적 규례를 따랐기 때문이지, 실수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정확히 순종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고 해석한다면, 이 사실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그리고 창세기 15장의 짐승들은 불로 태워 바치는 희생예물이 아니라, 언약의 희생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사체들”(창15:11), “조각들”(창15:17)이라 부르셨지, “번제”나 “예물”이라 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께 불로 바치지 않았다”는 주장은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3. 이집트 종살이는 저주가 아니라 준비된 경륜이다
또 다른 오해는 창세기 15장 13절에 나오는 400년간의 이집트 종살이를 “희생예물을 잘못 드린 벌”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의 후손에게 계속해서 복을 약속하셨다.
“이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창15:1)
“그분께서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이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셀 수 있거든 세어 보라, 하시며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씨가 그와 같으리라, 하시니라.” (창15:5)
하나님은 아브람의 씨가 번성할 것을 미리 말씀하셨고, 그들이 이집트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지만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게 될 것이며,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또한 그들이 섬길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하리니 그 뒤에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 (창15:14)
“바로 그 날에 주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노니.” (창15:18)
이 모든 것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기 위한 시간표였다. 이집트에서의 체류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훈련과 성장의 기간이었고, 후에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이루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결론 – 창세기 15장의 핵심은 “믿음의 의”와 “하나님의 언약”이다
창세기 15장은 희생예물을 잘못 드려서 저주받는 장면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람과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은혜로운 언약의 장면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롬4:3). 그 언약의 증표로 짐승들이 준비되었으며, 새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쪼개지 않았고, 희생물은 불에 태우지 않았으며, 하늘에서 불도 내리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것은 희생예물을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언약 체결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예물에서 성도는 율법적 정성을 강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복은 희생예물을 잘 드린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로마서 4:3)
오늘날에도 우리는 불필요한 종교적 행위에 얽매여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단순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살아 있는 희생예물이며, 그 믿음을 따라 사는 자가 진정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다.
2025-05-27 14:19:45 | 관리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창세기 1:24)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 질문은 세상 사람들이 고대부터 즐겨 묻던,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대표적인 수수께끼이다. 논리학에서는 이와 같은 관계를 “순환적 인과관계”라 부르며, A가 B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B가 A의 원인이 되는 형식을 말한다. 즉, 닭이 있어야 달걀이 있고, 달걀이 있어야 다시 닭이 나올 수 있으니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성경을 통해 명확히 풀린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다가가지 못하는 창조의 기원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 곧 창세기에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에 대해 정확하고 권위 있게 답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순서와 방식을 기록한 창세기를 살펴보면, 이 문제는 전혀 어렵지 않다.
1. 하나님께서 “조류”인 닭을 먼저 창조하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다섯째 날에 물고기들과 함께 날짐승들, 곧 **조류(fowl)**들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한다. 닭은 생물학적으로도 조류이며, 성경의 분류 체계에서도 분명한 날짐승으로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은 생명 있는 창조물을 풍성히 내며 공중에는 궁창의 얼굴 위에 날아다니는 날짐승이 있게 하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큰 바다짐승들과 물들이 풍성히 낸 모든 생명 있는 움직이는 창조물과 날개 있는 모든 날짐승을 그것의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이 좋았더라.” (창세기 1:20–21, 흠정역)
여기서 “날짐승(fowl)”은 영어 성경(KJV)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깃털과 날개가 있고 하늘을 나는 동물들, 즉 조류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다. 닭은 현대 과학에서나 고대 생태계에서나 일관되게 조류로 분류되며, 성경의 언어와 개념에 있어서도 “날짐승”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달걀을 먼저 만드시지 않으셨다. 달걀은 보호 없이는 부화되지 못하고 생명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번식이 가능한 완전한 상태의 닭, 곧 조류를 그 종류대로 먼저 창조하셨고, 그 후 이들이 달걀을 낳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창조의 순서이며, 자연의 질서다.
2. 식물 창조의 원리도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식물도 씨앗부터 자라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미 열매 맺고 씨를 가진 식물들을 먼저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11~12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종류대로 열매 맺는 나무, 곧 그 속에 씨가 있는 열매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땅이 풀과 씨 맺는 채소를 그것의 종류대로 내고 나무는 그 속에 씨가 있는 열매를 그것의 종류대로 내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11–12)
이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씨앗을 뿌려 자라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고 씨를 품은 채로 즉시 사용 가능한 나무를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느니라”(창2:16)고 말씀하셨다. 만일 아담 앞에 열매가 아직 맺히지 않은 어린 묘목들만 있었다면, 그는 당장 무엇을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식물들도 처음부터 열매를 가진 완전한 형태였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이 원리는 동물 창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은 생물들을 완성된 형태, 곧 기능을 갖춘 상태로 창조하셨다. 닭은 조류이며 날짐승이고, 그 닭이 달걀을 낳게 되는 것이다. 달걀이 생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미의 보호와 부화 환경이 필요한데,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할 수 있는 완전한 생태계 구조를 갖추어 창조하셨다.
3. 하나님의 분류법 – 성경은 날짐승이라는 용어를 명확히 정의한다
성경에서 “날짐승”은 단지 하늘을 나는 조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가진 조류 전체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닭은 날지 못하더라도 조류이며, 따라서 날짐승에 포함된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부정한 날짐승들의 목록을 주시며, 다양한 조류의 종류를 제시하신다. 이는 닭과 같은 조류도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날짐승으로 간주됨을 보여준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육체는 종류마다 다르다”고 말하면서, “한 종류는 사람의 육체요, 다른 것은 짐승의 육체요, 또 다른 것은 물고기의 육체요, 또 다른 것은 새의 육체라”고 한다(고전15:39). 여기서 새는 조류이며, 날짐승이다. 닭은 분명히 여기에 속한다.
성경은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 새의 육체를 명확히 구분한다. 이 분류는 창세기에서의 창조 순서와도 일치한다. 날짐승, 곧 조류는 하나님께서 다섯째 날에 물고기와 함께 창조하신 생물이며, 닭 역시 그 날에 창조된 날짐승으로 보아야 한다.
4. 결론 – 조류인 닭이 먼저다. 달걀이 아니다.
성경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인간의 논리적 수수께끼에 대해 명백하게 답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닭을 창조하셨다. 그것도 달걀이 아닌, 번식할 수 있는 완전한 형태의 조류, 곧 날짐승으로 창조하셨다.
달걀은 어미 닭의 보호 없이 스스로 부화할 수 없고, 생명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생명이 자립하여 존재할 수 있도록 완전한 질서와 구조를 갖춘 세계를 창조하셨다. 생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적으로 닭이 먼저다.
닭은 날짐승이다. 그리고 날짐승은 창세기 1장 21절에 따라 하나님께서 다섯째 날에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이 문제로 혼란스러울 필요가 없다.
“닭이 먼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2025-05-27 14:14:37 | 관리자
할례가 유아세례의 기원인가? – 성경적으로 본 분명한 차이
들어가는 말
교회 안에서는 종종 유아세례가 구약시대의 할례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이는 대체신학 혹은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비롯된 해석으로, 구약의 육적 언약을 신약의 영적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성경을 바르게 나누고(딤후 2:15)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별하면, 할례와 유아세례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제도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본 글에서는 창세기 17장 12절을 중심으로 할례의 본래 의미와 배경, 그것이 왜 유아세례의 기원이 될 수 없는지를 성경적·의학적·신학적으로 고찰한다.
1. “남자”인가 “사내아이”인가 – 정확한 본문 해석의 중요성
창세기 17장 1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명령하신다.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대대로 남자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고 번역하였으나, 킹제임스 성경(KJV)과 흠정역은 “every man child”, 즉 “모든 사내아이”로 번역하고 있다. 단순히 생물학적 남성을 뜻하는 “남자”가 아니라, 특정 시기(태어난 지 8일)에 해당하는 남자아이, 즉 “갓난 사내아이”가 그 대상임을 정확히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번역상의 차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성경의 정확한 해석과 적용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창세기 17장 전체의 문맥은 하나님께서 태어난 모든 사내아이에게 언약의 표시로 할례를 명하신 것이지, 일반적인 성인 남성이나 자란 남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 규례가 아니다. 실제로 처음 할례를 명하신 날에는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남자들이 즉시 할례를 받았지만(창 17:23), 이후로는 태어난 사내아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
이처럼 “사내아이”라는 정확한 표현은 할례의 대상과 시점을 분명히 규정하며, 성경 본문을 충실히 반영한다. 따라서 “남자”라는 모호한 번역은 원문적 의미와 언약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
2. 왜 태어난 지 여드레째 할례를 받는가? – 창조주의 섭리
하나님께서 왜 사내아이가 태어난 지 정확히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도록 하셨는가에 대해, 우리는 과학적인 설명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확인할 수 있다.
신생아는 태어난 직후 혈액 응고 능력이 미약한 상태다. 이는 비타민 K의 부족과 관련이 있다. 비타민 K는 혈액 속에서 출혈을 멎게 하는 응고 단백질인 프로트롬빈(prothrombin)의 생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신생아는 이 비타민을 충분히 축적할 시간이나 공급원이 부족하다. 출생 직후 신생아의 프로트롬빈 수치는 성인의 약 30%에 불과하지만, 이후 빠르게 증가하여 생후 8일째에 성인의 110%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시점이 지나면 다시 안정적으로 성인의 정상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는 놀라운 사실이다. 인간의 의학이 밝혀낸 이 생리적 현상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천 년 전 언약의 규례를 통해 정확히 지적하신 것이다. 태어난 지 여드레째는 피가 가장 잘 응고되어 수술이나 상처에 대한 회복이 가장 안전한 시기이며, 이 날에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신 것은 창조주의 정확한 생리학적 지식을 반영한 명령임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적 설계이며, 인간 생명의 구조와 회복을 꿰뚫고 계신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입증한다.
3. 할례는 신약의 유아세례로 이어지는가?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이와 같은 구약의 할례가 신약 교회 시대에 시행되는 유아세례의 기원이 되는가?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명확히 말한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의 씨, 곧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민족적 언약의 증표였다. 이는 신약시대 교회 성도들이 구원받기 위해 받아야 하는 의식이 아니며, 실제로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신학 체계(특히 대체신학 또는 언약신학)에서는 “신약의 교회가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주장하며, 할례의 신학적 개념이 유아세례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정체성을 혼동하고 있으며,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못한 결과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씨를 택하셨다는 것은 그들이 메시아를 낳는 도구가 되며, 하나님의 계시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민족적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지, 그들 모두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육신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모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롬 4:11-12, 갈 3:29 참조).
4. 침례는 할례가 아니다 – 그 본질적 차이
성경이 가르치는 침례는 할례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의 증표로서 태어난 사내아이에게 자동적으로 행해지는 육적인 표징이다. 반면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가 자기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영적인 상징 행위다.
신약 성경에서 침례는 항상 믿음의 고백 이후에 이루어진다. 사도행전 8장 37절은 침례에 있어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함을 명확히 보여준다: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매 내시가 응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고는” (행 8:37, 흠정역)
이 구절은 킹제임스 성경에는 명확히 들어 있으나, 개역성경을 포함한 현대 역본에서는 이 중요한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 이는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 유아세례나 세례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결과이며, 본질적으로 복음의 핵심을 훼손하는 심각한 변개다.
5. 유아세례는 비성경적 의식이다
유아세례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이 제도는 종교 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의 유습을 따라 일부 개신교 교단에서도 시행되고 있지만, 성경은 구원받은 믿음의 고백이 없는 자에게 침례를 주라고 명한 적이 없다.
유아는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고백을 할 수 없으며, 부모의 신앙이 아이에게 전가되지도 않는다. 유아세례를 통하여 “이 아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다”, “마귀가 손대지 못한다”는 식의 주장은 모두 비성경적이며 미신적이다. 이는 행위나 의식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중생세례 교리로 이어지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단적 교리이다.
결론 – 성경은 침례와 할례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성경을 바르게 나누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교회는 교회이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육적 씨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언약이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영적 공동체다. 따라서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민족적 언약의 표시이고,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했음을 고백하는 신약의 은혜의 표징이다.
할례는 할례요, 침례는 침례다. 둘은 같은 것이 아니며, 서로 연결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기 위해 구약의 할례를 끌어오는 시도는 교회와 이스라엘을 혼동한 잘못된 성경 해석의 결과다. 성경은 오직 믿음을 가진 자가 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성경 말씀에 따라 믿음의 고백 이후에 침례를 받아야 하며, 인간의 전통이나 종교 의식에 근거한 유아세례와 같은 비성경적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
2025-05-27 14:08:21 | 관리자
창세기 6장 3절, "120년"의 의미는 인간 수명 제한인가, 심판의 유예기간인가?
창세기 6장 3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아니하리니 이는 그도 육체이기 때문이라. 그럼에도 그의 날들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흠정역)
이 구절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하신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훨씬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해 왔으며, 그중에서도 두 가지 주된 견해가 있다. 첫째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한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께서 심판(홍수)을 내리시기 전까지 인류에게 주신 유예 기간이라는 것이다.
인간 수명 제한설의 한계
일부 해석자들은 이 구절을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문제점이 존재한다.
첫째, 성경의 기록은 이 해석과 명백히 충돌한다. 창세기 이후 등장하는 인물들 중 많은 이들이 120세를 훨씬 초과하는 수명을 살았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175세(창 25:7), 이삭은 180세(창 35:28), 야곱은 147세(창 47:28), 아론은 123세(민 33:39), 여호야다 제사장은 무려 130세(대하 24:15)를 살았다.
둘째, 시편 90편 10절에서는 일반적인 인간의 수명을 칠십 내지 팔십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이는 인간 수명이 120년으로 고정되었다는 주장이 성경 전체의 흐름과 맞지 않음을 보여준다.
셋째,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확정하셨다면 그 이후의 인류 역사에 120세가 넘는 사람이 존재해서는 안 되며, 성경이 이를 그대로 기록했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성과 일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유예 기간으로서의 해석
매튜 헨리와 앨버트 반즈를 비롯한 복수의 보수적인 주석가들은 이 120년을 인간 수명의 제한이 아닌, 심판의 유예 기간으로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곧 홍수 심판을 내리실 예정이었지만, 그 전에 120년이라는 유예 기간을 두셨고, 그 시간 동안 노아는 방주를 준비하며 의를 선포했다(벧후 2:5 참조).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더욱 성경적이다:
베드로후서 3:20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준비하는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셨다"고 증언한다.
창세기 6장 5절 이후의 문맥은 곧바로 인간의 죄악이 극에 달한 상황과 이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 계획(홍수)을 설명한다.
따라서 창세기 6장 3절의 "그의 날들은 120년이 되리라"는 말씀은 당시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곧 회개의 시간이었다는 것이 문맥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가장 자연스럽고 일관된 해석이다.
잘못된 교리의 위험성
창 6:3을 인간 수명 제한 구절로 오해할 때 발생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일부 이단 교리나 신비주의적 귀신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성락교회(베뢰아) 계열에서는 인간의 수명이 120년인데, 제 명을 못 채우고 죽으면 남은 기간 동안 귀신으로 떠돈다고 가르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성경과 모순된다: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누가복음 16:22-23: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는 죽은 후 곧바로 영혼이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10:29: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사람의 죽음조차 하나님의 뜻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잘못된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며, 죽은 자의 영이 이 세상을 떠돈다는 비성경적인 무속신앙과 접합될 위험이 있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후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은 천국으로, 악인은 지옥으로 간다고 명확히 가르친다.
결론: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의 균형
창세기 6장 3절의 "120년"은 인간의 수명을 제한한 말씀이 아니라, 죄악이 넘치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극진한 인내와 긍휼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에 대해 즉시 심판을 내리시기보다는 120년의 회개 기회를 주셨고, 노아는 그 시간 동안 방주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였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서, 오늘날 우리 역시 죄악된 세상을 향한 경고와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헛되이 여기지 말아야 함을 교훈한다.
2025-05-27 14:03:52 | 관리자
역청인가, 진흙인가? – 창세기 11장 3절의 번역 문제와 바벨탑 건축의 실제
창세기 11장 3절은 바벨탑 사건을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어떤 재료로 탑을 쌓았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성경 번역본에 따라 상당히 상이하게 해석되며, 이것이 단순한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이해와 해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번역의 오류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1. 킹제임스 성경과 개역성경의 차이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And they said one to another, Go to, let us make brick, and burn them throughly. And they had brick for stone, and slime had they for morter." (Gen. 11:3)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번역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옮긴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는 돌 대신 벽돌을 취하고 회반죽 대신 진흙을 취한 뒤”
개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다르게 번역한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가장 핵심적인 차이점은 ‘slime’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를 ‘진흙’ 혹은 ‘끈적한 점토성 접착제’로 보고 있으며, 개역성경은 ‘역청(pitch)’ 즉 방수성 아스팔트로 해석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어휘 해석의 차이를 넘어, 본문의 건축 기술과 문맥 이해에 심각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2. 'Slime'의 원어적 의미와 문맥적 해석
히브리어 원어에서 slime에 해당하는 단어는 ‘חֵמָר (chemar)’로, 끈적한 점성을 가진 점토성 진흙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pitch(역청)을 나타내는 단어 ‘זֶפֶת (zepheth)’와 구분되어 사용된다. 즉, slime과 pitch는 서로 다른 물질이다.
출애굽기 2장 3절은 이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본문이다.
“She took for him an ark of bulrushes, and daubed it with slime and with pitch.” (KJV)
이 구절에서 모세의 어머니는 갈대 궤를 만들고, 그 겉에 slime과 pitch를 둘 다 칠했다고 되어 있다. 만일 slime이 pitch와 같은 물질이라면, 이처럼 중복해서 사용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slime은 진흙성 접착제, pitch는 방수 재료로 용도가 구분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고고학적·건축학적 관점: 왜 진흙이어야 하는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즉 바벨탑이 건설된 시날 평야(현재의 바빌로니아 지역)는 돌이 거의 없는 광대한 평야지대였다. 대신 점토질 흙이 풍부하여, 이 지역 사람들은 초창기부터 벽돌을 만들어 구워 건축에 사용하였다.
건축 재료로서 벽돌은 단단하고 일정한 모양을 가지기 때문에 탑처럼 높은 구조물을 만들기 적합했으나, 벽돌과 벽돌 사이를 접착시키기 위해서는 물리적 접합성이 있는 재료, 즉 회반죽 또는 진흙 성분의 모르타르가 필요하다. 오늘날에도 시멘트 모르타르가 이런 용도로 사용된다.
반면 역청(pitch)은 방수성과 내화성은 있으나, 벽돌을 접착하기 위한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고온에서 녹아 흐르기 쉽고, 응고되면 오히려 단단하게 굳지 않고 점성만 남아 접착제로서의 성능이 떨어진다.
노아의 방주(창 6:14)나 모세의 갈대 궤(출 2:3)에 사용된 역청은 건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물과 습기로부터 보호하는 방수 목적이 분명하다. 바벨탑이 방수 목적의 배였던 것도 아니고, 강물에 띄우는 궤도 아니기 때문에, slime을 pitch로 번역하는 것은 전혀 문맥에 맞지 않는 선택이다.
4. 창세기 14장 10절: 또 하나의 증거
창세기 14장 10절은 slime에 대한 번역 오류를 더 확실히 보여준다:
“And the vale of Siddim was full of slimepits.” (KJV)
흠정역: “싯딤 골짜기에는 진흙 구덩이가 많았으므로…”
개역성경은 여기서도 “역청 구덩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전투 중에 도망치던 병사들이 발이 빠져 움직일 수 없었던 곳은 역청 덩어리가 굳어 있는 바위산이 아니라 끈적하고 질퍽한 진흙 구덩이일 것이다. 전장의 상황과 병사들의 이동을 감안할 때 slimepit은 점착성 진흙 구덩이로 해석하는 것이 당연하다.
5. 번역 오류가 남긴 오해와 교훈
개역성경이 바벨탑 건축에 사용된 재료를 “진흙 대신 역청”이라고 번역한 것은, 성경의 문맥과 고고학적 실증, 언어학적 분석에 모두 어긋나는 중대한 오역이다. 이로 인해 성도들은 바벨탑이 마치 노아의 방주나 모세의 갈대 궤처럼 방수 재료로 만들어졌다고 오해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돌 대신 벽돌, 회반죽 대신 진흙(slime)을 사용하여 더 높은 구조물을 쌓으려 했던 인간의 교만과 자력 구원의 시도가 담긴 사건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며, 하늘에 닿는 탑을 세워 하나님을 무시하려 했다. 그런 교만의 상징인 건축물에 ‘방수’는 전혀 무관한 요소다.
결론
‘slime’은 ‘역청(pitch)’이 아니라 진흙 혹은 회반죽(mortar)에 가까운 개념이다.
‘pitch’는 성경에서 따로 구별되는 단어로 사용되며, 방수와 내화 목적의 재료이다.
고고학적·건축학적 문맥에서도 바벨탑은 진흙 접착제를 사용한 벽돌 건축이었지, 역청으로 만든 방수 구조물이 아니었다.
번역자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단어의 의미와 문맥을 충실히 반영해야 하며, 이를 오역할 경우 신학적 의미의 왜곡과 교리적 혼동을 초래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늘에 이르려는 인간의 시도를 분쇄하신 사건으로 바벨탑을 기록하였다. 그들의 재료 선택조차도 인간의 교만과 자기 의에 대한 상징이었으며,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인간적 수단으로 쌓아 올린 구조물은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긴다.
2025-05-27 13:56:46 | 관리자
아브라함은 장남이 아니며, 조카 롯과의 나이 차이도 거의 없었다 –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택의 원리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아브라함이 데라의 장남이라는 생각이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창세기 11장 26절에서는 “데라는 칠십 년을 살며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어지는 27절에서도 세 아들의 이름이 동일한 순서로 반복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브람이 맏아들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문맥과 연대 기록을 따라가 보면 아브람은 분명히 데라의 장남이 아니다.
1. 아브라함은 데라가 130세 되었을 때 낳은 아들이다
창세기 11장 32절에 따르면, 데라는 205세까지 살았다. 그리고 사도행전 7장 4절은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가 죽은 뒤에야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옮겨졌다고 말한다. 창세기 12장 4절에서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였다고 말하므로, 이 세 구절을 종합하면 아브람은 데라가 130세 되었을 때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
즉, 205세(데라 사망 연도) - 75세(아브람 당시 나이) = 130세(데라가 아브람을 낳은 나이)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1장 26절에서 언급된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라는 구절은, 세 아들을 동시에 낳았다는 말이 아니라 70세 이후에 이 세 아들을 차례로 낳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유사한 표현 방식은 창세기 5장 32절에서도 볼 수 있다. “노아는 오백 세였으며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그러나 이 세 아들이 모두 오백 세 때 동시에 태어난 것은 아니며, 가장 먼저 태어난 아들이 누구였는지는 그 이후 구절들을 통해 유추해야 한다.
그렇다면 데라가 70세 때 낳은 아들은 누구일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인물은 세 번째로 언급된 하란이다. 왜냐하면 하란은 성경에서 갈대아 우르에서 자기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창 11:28), 이미 자녀들(롯, 밀가, 이스가)을 둔 상태였다. 즉, 상당한 연령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아브람은 75세가 될 때까지 자녀가 없었고(창 11:30), 이삭을 100세 때에야 낳았다. 이런 흐름을 보면 하란은 아브람보다 최소 60살 이상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2. 아브라함과 롯의 나이 차이는 거의 없다
아브람이 태어난 것은 데라의 나이 130세일 때였고, 하란이 데라의 70세 무렵에 태어났다고 본다면, 하란과 아브람은 약 60세의 나이 차이가 난다. 성경은 하란이 이미 성년이 되어 우르에서 죽었으며, 그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아브람의 조카 롯이다.
그렇다면 롯이 태어난 시점은 언제일까? 정확한 연대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아버지 하란이 약 60세 안팎일 때 롯을 낳았다면, 롯과 아브람은 거의 비슷한 연배일 수밖에 없다. 하란이 아브람보다 60세 이상 연상이고, 하란이 60세 무렵에 롯을 낳았다면, 아브람과 롯은 나이 차이가 많아야 10살 이내, 혹은 동갑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성경에서는 아브람이 롯을 ‘조카’로서 돌보며 동행하고 인도하는 위치에 서 있지만, 단지 ‘연장자’로서가 아니라 영적 권위자요 믿음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이다. 단순히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역할 분담이었다. 이것은 가족 내 연장자-연하자의 일반 구조와는 다른, 성경적 지도 체계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3. 밀가와 나홀의 결혼이 가능했던 이유
하란의 딸 밀가가 하란의 동생 나홀과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창 11:29). 삼촌과 여조카의 결혼은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족장 시대의 문화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점은, 하란과 나홀 사이의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혼이 가능한 구조였다는 것이다.
만약 하란이 장남이고 나홀이 차남이라면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10년 내외일 수 있고, 밀가가 하란의 마지막 자녀라면 나홀과 나이 차이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밀가와 나홀의 혼인은 연대적으로도 무리가 없는 결혼이었고, 아브람과 롯의 나이 차이가 작았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 성경은 장남보다 차남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준다
장자(장남)에 대한 기대와 중요성은 구약 시대부터 중대한 문화적 전통이었고, 성경은 장자의 권리와 책임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장남이 아니라 둘째 혹은 어린 자를 통해 더 자주, 더 크고 결정적인 일들을 이루셨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첫 사람 아담이 아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 구속이 이루어짐 (고전 15:45–47)
가인과 아벨: 장남 가인 대신 둘째 아벨이 하나님께 열납됨
에서와 야곱: 에서가 장자였지만 야곱이 축복과 약속을 받음
므낫세와 에브라임: 요셉의 장남 므낫세보다 차남 에브라임이 앞섬 (창 48:19)
르우벤 대신 유다와 요셉이 족장으로 우선권을 받음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혈통이나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아브람이 장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부르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이 사실은 사람의 전통과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결론
아브라함은 데라의 장남이 아니며, 오히려 막내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택하셨고,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다. 조카 롯과도 나이 차이가 거의 없었던 사실은, 성경의 족보가 단순한 출생 순서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따라 배치된 역사적-신학적 질서임을 보여 준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누구의 아들인가, 몇 번째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지금 내가 어떤 믿음의 응답을 하며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장남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반응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2025-05-27 13:50:42 | 관리자
노아의 사망과 아브라함의 출생
아브라함은 노아의 사망 2년 후에 태어났다 – 연대기적 정리와 신학적 시사점
창세기에는 아담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족장들의 연대가 상당히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노아 이후 자손들의 연대를 '노아의 나이'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아브라함이 노아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더불어 우리는 흔히 오해하듯 아브라함이 데라의 장남이 아니라는 사실도 성경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래에서 이 연대적 흐름을 따라 정리해 보자.
1. 노아의 홍수와 이후 자손들의 탄생 시점
성경에 따르면, 노아의 나이 600세에 홍수가 시작되었다.
“땅 위에 물들의 홍수가 있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더라.” (창 7:6)
홍수가 끝난 후 2년이 지나, 노아의 아들 셈이 100세가 되었을 때 아르박삿을 낳았다.
“셈은 백 세였으며 홍수 뒤 이 년이 지났을 때 아르박삿을 낳았고" (창 11:10)
따라서 아르박삿이 태어난 해는 노아의 나이 602세였고, 이후 아르박삿의 후손들의 출생 연대를 연속적으로 더해 가면 다음과 같은 순서가 된다.
아르박삿: 노아 602세 때
살라: 노아 637세
에벨: 노아 667세
벨렉: 노아 701세
르우: 노아 731세
스룩: 노아 763세
나홀: 노아 793세
데라: 노아 822세
데라의 첫 아들: 노아 892세
아브라함: 노아 952세
이 계산대로라면 아브라함은 노아의 사망 연도보다 2년 뒤인 노아력 기준 952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노아가 950세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아의 전 생애는 구백오십 년이었고 그가 죽으니라.” (창 9:29)
즉, 아브라함은 노아가 죽은 지 정확히 2년 후에 세상에 태어난 인물인 셈이다.
2. 아브라함은 데라의 장남이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흔히 성도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창세기 11장 26절에는 “데라는 칠십 년을 살며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만 읽으면 아브라함이 데라의 70세 때 태어난 장남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선, 데라는 205세까지 살았다.
“데라의 생애는 이백오 년이었고 데라가 하란에서 죽으니라.” (창 11:32)
사도행전 7장 4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데라가 죽은 후에야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그분께서 그를 거기에서 지금 너희가 거하고 있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행 7:4)
또한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는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4)
따라서 데라가 죽은 해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75세를 빼면, 아브라함의 출생 연대는 데라가 130세였을 때로 계산된다.
데라 사망 시점 = 노아력 1027년
아브라함의 나이 = 75세
→ 아브라함의 출생 = 1027 - 75 = 노아 952세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데라는 노아 나이 822세에 태어났고, 데라가 처음 아들을 낳은 것은 노아 나이 892세였다. 따라서 데라가 장남을 낳은 지 60년 후에 아브라함이 태어난 셈이다.
즉, 데라는 70세 이후에 아브람, 나홀, 하란을 낳았지만, 그 순서가 나열된 순서이지 출생 순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때로 장자의 이름이 아닌, 믿음의 계보나 하나님의 선택을 따라 중요 인물의 이름을 먼저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가인보다 아벨, 에서보다 야곱, 므낫세보다 에브라임, 그리고 첫 아담보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예다.
아브라함도 그러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로서 데라의 장남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장자의 위치를 부여받은 인물이다.
3. 정리
아브라함은 노아가 죽은 후 2년이 지난 시점인 노아력 952년에 태어났다(BC1996년).
데라는 노아 나이 822세에 태어났고, 첫 아들은 노아 나이 892세에 낳았으며, 아브라함은 그보다 60년 후인 노아력 952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데라의 첫 아들이 아니며, 성경에서도 장남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는 언제나 장남이 아니라 '두 번째'인 경우가 많다. 이는 인간의 전통이나 우선순위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보여 주는 구속사의 흐름과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은 노아와 같은 시대를 살지는 않았고, 노아가 죽은 직후 태어난 인물이며, 데라의 장남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사실은 성경의 족보를 단순히 혈통의 기록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의 흐름으로 읽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 준다.
2025-05-27 13:46:56 | 관리자
창세기 2장 7절: "생령인가, 살아 있는 혼인가?"
서론 – 혼(soul)을 ‘생명’ 또는 ‘생령’으로 번역하면 왜 문제가 되는가?
창세기 2장 7절은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말해 주는 구절로서, 인간론과 구원론의 기초를 놓는 가장 중요한 말씀 중 하나이다.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이 구절은 "호흡하는 혼(living soul)"이라는 의미를 가진 "네페쉬 하야"(נפש חיה)로 끝난다. 하지만 개역성경은 이를 "생령"으로 옮겼고, 일부 현대 번역본은 더 나아가 "생명이 되었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이러한 번역은 단어 하나 차이처럼 보이지만, 성경의 인간 이해, 구원론, 그리고 성육신의 교리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치명적인 오역이다.
히브리어 '네페쉬'는 호흡하는 생명체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에서 파생되었고, "혼(soul)"으로 가장 흔히 번역된다. 구약 전체를 통틀어 네페쉬는 짐승, 사람, 심지어 시체까지 살아 있거나 한때 살아 있었던 생명체 전체를 가리킨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이를 '영'으로 해석해 ‘생령’이라 번역했으며, 이는 혼과 영을 뒤섞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처럼 혼과 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번역은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기록된 아담과 예수님의 비교에서도 명백하게 오류로 드러난다.
창세기 2:7의 원문과 그 구조
히브리어 원문에서 창 2:7은 매우 구조적으로 짜여 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네샤마)을 그의 코에 불어넣으셨고, 그 결과 사람은 ‘네페쉬 하야’, 즉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혼’은 여기서 감정과 지성과 의지를 갖춘 전인격적 존재로서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짐승에게도 사용된다. 바다의 생물이나 공중의 새도 '네페쉬 하야'로 불리며, 이는 네페쉬가 결코 '영적인 존재' 또는 '불멸의 혼령'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영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단어는 따로 있으며 그것은 ‘루아흐’이다.
혼(soul)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성경은 혼이 살아 있는 인격체 자체임을 명백히 증언한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7장 37절에서는 바울과 함께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276혼"이라 불린다. 이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숫자를 셀 수 있는 사람들이다. 또 시편 107편 18절에서는 혼이 음식을 싫어하고 죽음에 가까이 이른다고 한다. 이는 혼이 단순한 정신이 아니라 감정과 생리 기능까지 가진 인격체임을 보여 준다.
혼은 빵을 먹고, 두려워하며, 침례를 받고, 구원을 얻는다. 따라서 혼을 단순한 ‘영적 기능’이나 ‘의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성경은 혼과 영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언급한다. 이사야 57장 16절에서는 "이는 영과 또 내가 만든 혼들이 내 앞에서 쇠할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하며, 분명히 혼과 영을 서로 다른 실체로 구분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 명확한 구분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창세기 2장 7절을 인용하여 신약에서 재확인하는 말씀이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살아 있는 혼’은 헬라어로 프쉬케(ψυχή), ‘살려 주는 영’은 프뉴마(πνεῦμα)이다.
개역성경은 이 절에서 프쉬케를 '산 영'이라고 번역함으로써 혼과 영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 원문에서 프쉬케는 언제나 혼을 뜻하고, 프뉴마는 영을 뜻한다. 둘을 동일하게 번역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된 대조를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께서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시고 말씀하셨는데, 인간 번역자가 이를 마음대로 섞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생명, 생령’이라는 표현의 또 다른 문제점
창세기 2:7을 ‘생령이 되었다’로 번역할 경우, 혼이 아닌 어떤 ‘기능’이나 ‘에너지 상태’로 해석될 위험이 생긴다. 이로 인해 사람은 단지 호흡하는 유기체로 축소되며, 성경이 말하는 ‘혼’이라는 전인격적 존재 개념이 사라진다.
예를 들어 민수기 19장 13절에서는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그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이니라.'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혼은 사람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혼(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한다. 수 10:28에서는 여호수아가 한 도시 안의 모든 혼을 칼로 멸했다고 한다. 만약 전인격적 존재를 가리키는 사람의 혼이, 생명이나 생령처럼 추상적이거나 비물질적 존재라면, 어떻게 칼로 그것을 죽일 수 있겠는가?
"몸은 죽여도 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혼과 몸을 둘 다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마 10:28)
이 말씀은 둘째 사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베레아 이단의 잘못된 교리의 뿌리
한국 교회 안에 광범위하게 퍼진 이단인 베레아(성락교회)는 창세기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을 구별하여, 창 1장의 사람은 ‘영이 없는 짐승 인간’이고 창 2장의 아담이야말로 최초의 ‘영을 가진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설은 바로 창 2:7을 “생명이 되었다”거나 “산 영이 되었다”고 번역하는 데서 출발한다.
즉, 창세기 1장의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체였고, 창 2장에서 비로소 ‘영이 들어가서’ 영적 인간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두 단계로 창조하지 않았다. 창 2:7은 ‘혼’을 지닌 인격적 인간의 창조이며, 이는 단회적이고 완전한 창조 사건이다. 이러한 이단 교리는 귀신론과 점술, 내적 치유라는 이름의 미신적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교회를 혼란케 하고 있다.
예수님의 증언과의 충돌
누가복음 24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영은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아담이 ‘산 영’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담에게는 살과 뼈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2장 21~23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기록한다. 이는 아담에게 살과 뼈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영’이 아니라 ‘혼’이라는 해석이 맞다는 증거이다.
결론 – 혼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성경의 언어적, 문맥적, 신학적 흐름을 종합하면, 창세기 2장 7절은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라고 번역해야 옳다. 개역성경의 “생령”, “생명”은 문맥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교리적 오류를 낳으며, 이단적 주장에 악용될 소지가 크다.
혼은 단지 감정이나 의식이 아니라, 전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창 2:7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지으신 몸에 하나님의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인격체, 곧 혼이 되게 하셨다는 의미다.
성경의 단어 하나, 표현 하나가 교리와 신앙의 기초를 이룬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혼’을 혼이라 부르고, ‘영’을 영이라 부르는 성경적인 언어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이를 바르게 나누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7, 킹제임스 흠정역)
2025-05-27 13:39:26 | 관리자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의 오역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은 성경 전체의 결말부에서 주시는 복 있는 자들에 대한 선언으로, 누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누가 생명나무에 이를 수 있는지를 밝히는 핵심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명확히 말하며,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생명나무와 거룩한 도성에 이르는 권세의 조건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표현을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로 바꾸어, 문맥상 어색하고 신학적으로 혼란스러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Revelation 22:14(KJV):
“Blessed are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 that they may have right to the tree of life, and may enter in through the gates into the city.”
흠정역: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것은 그들이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소유하게 하며 그 문들을 지나 그 도시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그 결과로 생명나무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권리를 소유한다.
→ 문맥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명령을 지킴 = 천국의 권리"라는 구조가 자연스럽습니다.
현대 역본의 왜곡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NIV:
“Blessed are those who wash their robes, that they may have the right to the tree of life…”
여기서 문제점: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며, 문맥상 부자연스러움
→ 앞뒤 문맥에서 옷을 빠는 개념은 등장하지 않음
→ 갑작스럽게 등장함으로써, 독자에게 이해의 혼란과 연결성 단절을 초래
"명령을 행하는 자들"과 "옷을 빠는 자들"은 신학적 개념이 전혀 다름
명령을 지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거룩한 삶
옷을 빠는 자: 상징적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문맥과 맞지 않음
영적 책임의 강조가 약화됨
→ “명령을 행한다.”라는 것은 순종, 헌신, 믿음의 행위를 포함하는 강한 표현이지만 “옷을 빠는 것”은 단순히 정결함을 상징하는 상징적 이미지일 뿐, 윤리적 책임이나 순종의 구체성이 결여됨
2. 사본 증거 분석
킹제임스 성경(KJV), 흠정역, 루터 독일역 등은 헬라어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을 따릅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μακάριοι οἱ ποιοῦντες τὰς ἐντολὰς αὐτοῦ
→ 직역: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반면,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 알렉산드리아계)에서는 이 구절이 다음과 같이 바뀌어 있습니다:
μακάριοι οἱ πλύνοντες τὰς στολὰς αὐτῶν
→ 직역: “그들의 옷을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
두 표현의 그리스어는 모양이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입니다:
헬라어 / 의미 / 사용된 사본
ποιεῖν τὰς ἐντολὰς / 명령을 행하다 / 다수 사본, KJV
πλύνειν τὰς στολὰς / 옷을 빨다 / 소수 사본, 현대 역본
→ 이 오기(variant)는 사본 필사 중의 시각적 혼동이나, 의도적 수정의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3. 문맥적 흐름과 구조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은 22장 전체의 요약과 결론적 권면의 일부로, 바로 앞 22:11–12에서 “의롭게 행하라, 거룩히 되라, 보상이 있다”라는 경고가 이어짐
그러므로 22:14에서도 거룩한 삶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강조되어야 문맥이 일관됨
갑자기 "옷을 빠는 자들"이 등장하면, 앞뒤 흐름이 끊어지고 신학적 권면이 약화됨
4. 결론
요한계시록 22:14은 누가 천국과 생명나무에 이를 자격이 있는가를 말씀하는 매우 결정적인 구절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의 정확한 헬라어 표현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번역하며, 성도의 순종, 믿음의 행위, 거룩한 삶이 영원한 생명과 직결됨을 명확히 가르칩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소수 사본의 오류를 따라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여, 문맥적 논리와 신학적 강도를 크게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핵심 요약
올바른 번역: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는 자들” → 다수 사본 기반, 신학적 일관성 유지
잘못된 번역: “옷을 빠는 자들” → 소수 사본에 근거한 오역, 문맥 단절, 의미 약화
킹제임스 성경은 여기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보존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도성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만 열려 있는 것입니다.
2025-05-24 19:38:08 | 관리자
요한계시록 22장 19절 생명책 변개
요한계시록 22장 19절은 성경 전체의 마지막 경고로, 하나님의 계시를 변개하거나 삭제하려는 자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완전성과 절대성, 더하거나 빼지 말 것을 최종적으로 경고하신 것이며, 그 경고의 무게는 그 사람의 ‘생명책’에서의 제거, 곧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단절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경고의 핵심을 “생명책(book of life)”에서 그 사람의 몫을 제거하신다고 명확하게 번역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 사람의 '부분'까지 철저히 빼신다고 선언합니다.
반면에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생명책”을 “생명나무”로 바꾸고, 경고의 내용 전체를 보다 모호하고 상징적인 것으로 약화시킵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Revelation 22:19(KJV):
“… God shall take away his part out of the book of life, and out of the holy city, and from the things which are written in this book.”
흠정역:
“…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여기서 세 가지 제거가 분명히 언급됩니다:
생명책(Book of life) → 구원 자체의 상실
거룩한 도시(성 새 예루살렘) → 천국의 영광에 대한 참여 박탈
이 책에 기록된 것들 → 성경이 약속하는 복들로부터의 완전한 배제
→ 즉, 이 구절은 성경을 고의로 삭제, 변개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며, 영원한 생명, 천국, 복의 유업에서 완전히 제외된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현대 역본의 왜곡 – 개역, NIV, 천주교 성경 등
개역성경:
“…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NIV:
“… God will take away from him his share in the tree of life and in the holy city…”
주요 문제점:
생명책 → 생명나무로 바꿈
→ 구원의 기록(생명책)이 아니라, 단지 상징적 은혜의 이미지인 생명나무로 바뀜
→ 이로 인해 실제적인 구원 상실이 아니라 “은혜에서의 손해”처럼 느껴지는 오해를 유발
그의 몫을 제거함 → 참여함을 제거함
→ “his part”라는 말은 그 사람에게 이미 주어진 영원한 생명의 자리를 빼앗는 의미
→ 그러나 “참여함을 제거한다”라는 표현은 이미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접근 기회 박탈처럼 약화됨
세 번째 경고 생략
→ KJV에는 “이 책에 기록된 것들”에서 제거된다고 경고함
→ 그러나 현대 역본은 이 구절을 완전히 생략하거나 축소 번역함으로써 성경 전체의 복과 약속에서 배제된다는 경고가 사라짐
2.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 흠정역, 루터 독일역 등은 헬라어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을 기반으로 하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ἐκ τῆς βίβλου τῆς ζωῆς – “생명책에서”
ἐκ τῆς πόλεως τῆς ἁγίας – “거룩한 도시에서”
τῶν γεγραμμένων ἐν τῷ βιβλίῳ τούτῳ – “이 책에 기록된 것들에서”
그러나 소수 사본(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은
“τῆς βίβλου τῆς ζωῆς(생명책)”을 “τοῦ ξύλου τῆς ζωῆς(생명나무)”로 바꾸고 있으며, 일부 사본에서는 세 번째 경고 항목(책에 기록된 것들) 자체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 이로 인해 NIV, 개역성경,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라 이 구절의 경고의 날카로움을 약화시킨 것입니다.
3. 결론
요한계시록 22:19은 성경의 마지막 장, 마지막 경고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단어 하나라도 임의로 추가하거나 삭제하려는 자들에게 내리는 무서운 선언으로,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제거됨”, 곧 영원한 생명에서의 제거를 경고합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엄중한 경고를 정확하고도 날카롭게 보존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구원의 상실, 천국의 상실, 성경의 모든 복에서의 완전한 배제를 포함합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소수 사본을 따르며 “생명책”을 “생명나무”로 바꾸고, 경고를 상징적, 희석된 표현으로 약화시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결론 요약
성경을 의도적으로 삭제·변개하는 자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제거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 진리를 신학적·문맥적으로 완전하게 보존합니다.
현대 역본은 이 경고를 생명나무, 참여, 상징적 손해 등으로 약화시키며 복음의 심판을 희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하나라도 더하거나 빼는 자를 결코 생명책에 두지 않으십니다.
이 경고는 변개자를 향한 구속 없는 심판 선언이며, 킹제임스 성경만이 그것을 온전히 전하고 있습니다.
2025-05-24 19:30:57 | 관리자
요한계시록 20장 12절 "하나님" 대체
요한계시록 20장 12절은 최후의 심판 장면을 묘사하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엄중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심판의 대상이 단순히 보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명확히 표현함으로써, 최후 심판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생략하고, 단지 “그 보좌 앞”이라고만 번역하여, 심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흐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Revelation 20:12(KJV):
“And I saw the dead, small and great, stand before God; and the books were opened…”
흠정역: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펼쳐져 있고…”
여기서 “stand before God(하나님 앞에 서 있다)”이라는 말은 단지 위치 묘사가 아니라, 심판의 주체가 누구인지—하나님 Himself—임을 강조하는 신학적으로 결정적인 표현입니다.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NIV:
“The dead were standing before the throne…”
이 번역에서는 “God(하나님)”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으며, 심판의 자리가 단순한 장소(보좌)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 이로 인해 심판의 주체가 모호해지고, 성경 전체가 강조하는 “하나님 앞에 선다”라는 심판의 본질이 훼손됩니다.
→ “보좌”만 언급되면 그 보좌에 누가 앉아 계신지, 누구의 권위인지 흐려짐
2. 신학적 손상
심판의 권위 약화
→ 성경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14:10 “…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리라.”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3. 복음의 메시지 약화
→ 성경은 끊임없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선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것이 바로 구원의 필요성과 복음의 시작점임
→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는 사실이 두려움과 경외를 일으키는 핵심 진리인데, 이 점이 생략되면 최후의 심판이 ‘개념적’이 되고 감각이 약화됨
4. 사본 증거
KJV 및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은 헬라어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ἔστησαν ἐνώπιον τοῦ Θεοῦ
→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
반면,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 알렉산드리아계)에서는 “τοῦ Θεοῦ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빠져 있음
→ 따라서 단지 “보좌 앞에 서 있었다”라는 불완전한 표현만 남게 됩니다.
→ 이로 인해 NIV, 개역성경,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소수 사본을 반영하여 “하나님”을 삭제하였고, 결과적으로 심판의 주체와 장엄함을 흐리는 잘못된 번역이 된 것입니다.
5. 결론
요한계시록 20장 12절은 인류 최후의 운명이 결정되는 백보좌 심판의 장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다.”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두려움, 복음의 긴급함을 일깨우는 신학적 핵심 선언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구절을 정확한 사본과 교리의 일관성에 따라 보존하면서, 하나님의 주권, 공의, 심판의 실재를 온전히 드러냅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소수 사본을 따라 “하나님”이라는 심판의 주체를 생략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의 무게를 약화시키고, 독자들에게 심판을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보존한 본문임을 명백히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서”라는 말씀은, 이 구절의 핵심이자 결코 생략되어서는 안 될 본질적인 표현입니다.
2025-05-24 19:27:07 | 관리자
요한계시록 20장 9절 "하나님" 삭제
요한계시록 20장 9절은 천년 왕국이 끝난 후, 사탄이 민족들을 미혹하여 하나님 백성을 포위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의 불을 내려 그들을 멸하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 중요한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불이 단순히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from God out of heaven) 내려왔다고 명확히 기록하여, 이 심판이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 개입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중요한 표현인 “하나님으로부터(from God)”를 생략하여, 누가 불을 내렸는지 불분명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는 계시의 핵심 메시지를 흐리게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Revelation 20:9(KJV):
“… and fire came down from God out of heaven, and devoured them.”
흠정역:
“… 불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켰고”
이 표현은 단순한 지리적 방향(“하늘에서”)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불을 내려 심판하셨다.”라는 신적 기원을 강조합니다.
→ 이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과 일맥상통합니다. 예를 들어 엘리야 때 불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왔던 것처럼, 직접적 하나님의 심판의 징표로 등장합니다(예: 레 10:2, 왕하 1:10, 시 11:6).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 NIV 등
개역성경:
“…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NIV:
“… fire came down from heaven and devoured them.”
여기서 “from God”(하나님으로부터)라는 핵심 구절이 완전히 생략되었습니다.
→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의미의 손상]
누가 심판의 주체인지 불분명해짐
→ 불이 "하늘에서" 왔다는 표현만으로는 자연적 재앙인지, 천사인지, 하나님인지 명확하지 않음
→ “하나님으로부터”라는 표현이 있을 때만 심판의 주체가 분명히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드러남
[구약적 배경 및 신학적 일관성 훼손]
→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불로 직접 심판하셨다는 수많은 예가 있음
창 19:24 (소돔과 고모라): “주께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쏟으사”
레 10:2, 민 16:35, 왕상 18:38 등
→ “from God”이 생략되면, 이러한 구약과의 연결성과 신학적 연속성이 손상
[계시의 극적 결론에서 하나님의 주권 약화]
→ 요한계시록 20장은 최종적 심판을 그리는 장면
→ 여기서 불의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임을 명확히 할 때만이 주님의 절대 주권과 공의로운 종결이 드러남
2. 사본 증거
KJV 및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Majority Text)에는 헬라어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καὶ κατέβη πῦρ ἀπὸ τοῦ Θεοῦ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 직역: “불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
그러나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 알렉산드리아 계열)에서는 “ἀπὸ τοῦ Θεοῦ (from God)”가 누락되어 있음.
→ 결과적으로 NIV, 개역성경,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반영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를 생략한 것입니다.
3. 결론
요한계시록 20장 9절은 단순한 불의 강하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직접 불을 내려 악을 완전히 심판하시는 최종적 행동을 묘사합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정의의 실행을 상징하며,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라는 구절은 신학적으로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의 정확한 본문을 따라 이 표현을 충실하게 보존하며, 본문의 신학적 중심성과 문맥적 논리를 온전히 전달합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소수 사본을 따라 “하나님으로부터”를 생략하여, 하나님의 직접 개입과 심판의 주체성을 흐리고,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와 계시의 명확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 또한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한 성경임을 분명하게 입증하는 예입니다.
불은 단지 하늘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2025-05-24 19:23:41 | 관리자
요한계시록 16장 17절 "하늘" 삭제
요한계시록 16장 17절은 마지막 재앙이 쏟아지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하며, 하나님의 왕좌로부터 나오는 최종 선언—“다 이루어졌도다(It is done)”—라는 큰 음성이 들리는 장면입니다.
이 중요한 구절 중 “어디에서” 이 음성이 나는가는 문맥 이해와 신학적 해석에 있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Revelation 16:17(KJV):
“… and there came a great voice out of the temple of heaven, from the throne, saying, It is done.”
흠정역:
“… 큰 음성이 하늘의 성전에서 왕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다 이루어졌도다, 하더라.”
“Temple of heaven(하늘의 성전)”이라는 표현은 지상의 성전이 아닌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를 분명히 지칭합니다.
→ 이는 요한계시록 전체 문맥과 맞물려, 심판의 권위가 하나님 자신의 초월적 보좌로부터 나옴을 강조하는 결정적인 구절입니다.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NIV:
“… a loud voice came out of the temple, from the throne…”
여기서는 “하늘의(of heaven)”라는 말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습니다.
→ 그 결과, 독자 입장에서는 성전이 지상의 성전인지, 하늘의 성전인지 명확하지 않게 됩니다.
2. 문맥상 손상 요소
요한계시록 전체 흐름과의 단절
→ 계 11:19, 계 15:5–8, 계 16:1 등에서는 반복적으로 “하늘의 성전”이라는 표현이 등장함.
예:
계 11:19: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계 15:5: “하늘에 있는 증언의 성전이 열리고”
→ 그런데 16:17에서 하늘의 성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번역하면 일관성이 파괴됨.
3. 하나님의 절대 권위와 분리
→ 이 음성은 사람이나 천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 성전에 좌정하신 하나님 자신의 왕좌로부터 나오는 최종적 선언입니다.
→ “하늘의 성전”을 생략하면 그 권위의 초월성이 불분명해짐
4. 지상 성전과 혼동 위험
→ 계 11장에서는 지상 성전이 언급되며, 그와 하늘 성전은 구별되어 나옵니다.
→ “성전”이라는 말만 쓰면 지상 성전으로 오해할 수 있음
5. 사본 증거
KJV 및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ἐκ τοῦ ναοῦ τοῦ ἐν τῷ οὐρανῷ
→ 직역: “하늘에 있는 그 성전에서(from the temple which is in heaven)”
반면,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τοῦ ἐν τῷ οὐρανῷ (in heaven)” 구절이 생략되어 단순히 “ἐκ τοῦ ναοῦ (성전에서)”로 축소되어 있습니다.
→ 이로 인해 NIV, 개역성경, 천주교 성경 등은 소수 사본을 따라 “하늘의”라는 핵심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성경의 구조와 의미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6. 결론
요한계시록 16장 17절은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이 임하는 장면으로, 그 선언이 “하늘의 성전, 곧 하나님의 왕좌로부터 나온다.”라는 사실은 이 심판이 절대적이고 최종적이며, 하나님 자신의 주권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중요한 문장을 다수 사본의 원문에 따라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 전체의 구조적 일관성과 신학적 깊이를 충실하게 반영합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소수 사본을 따라 "하늘의"라는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명확한 위치 정보와 신학적 메시지를 흐릿하게 만들고, 성도들이 오해할 여지를 남기게 했습니다.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한 성경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대표적 예입니다.
그 음성은 단지 성전이 아니라 “하늘의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2025-05-24 17:58:27 | 관리자
요한계시록 6장 1절, 3절, 5절, 7절 "보라" 삭제
요한계시록 6장 1절, 3절, 5절, 7절은 어린 양께서 일곱 봉인 중 처음 네 개를 하나씩 떼실 때마다 등장하는 네 생물의 외침을 기록한 매우 상징적이고 중요한 장면입니다.
이 네 생물은 각각 한 봉인이 떼어질 때마다 천상의 음성으로 "와서 보라(Come and see)"라고 외치며, 요한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직접 보고 기록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말씀을 모든 구절에서 “Come and see(와서 보라)”로 번역하고 있지만,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네 번 모두 “Come(오라)”만 기록하여 “보라”라는 중요한 명령어를 모두 생략했습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 정확하게 네 번 등장
장절 / KJV 번역 및 핵심 구절
계 6:1 / "Come and see." / 와서 보고
계 6:3 / "Come and see." / 와서 보고
계 6:5 / "Come and see." / 와서 보고
계 6:7 / "Come and see." / 와서 보고
예:
“And I saw when the Lamb opened one of the seals… and I heard, as it were the noise of thunder, one of the four beasts saying, Come and see.” (계 6:1)
현대 역본(개역, NIV, ESV 등) – 네 번 모두 “보라”를 생략
장절 / 개역/NIV 번역 및 생략된 내용
계 6:1 / “오라” (Come) / “보라” 누락
계 6:3 / “오라” (Come) / “보라” 누락
계 6:5 / “오라” (Come) / “보라” 누락
계 6:7 / “오라” (Come) / “보라” 누락
이로 인해, 단순히 “오라”라고 말하는 초대만 있고, 요한이 무엇을 보고 기록하도록 명령받는 핵심 요소인 “보라”가 사라진 것입니다.
2. 의미의 손상
요한의 사도적 직무 약화
→ “와서 보라”라는 말씀은 단지 요한에게 다가오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의 비전을 보고 계시를 기록하라는 명령입니다.
“보라”를 생략하면 요한이 무엇을 보고 기록하고 있는지 독자에게 명확하지 않게 됩니다.
3. 계시의 구조적 통일성 파괴
→ 요한계시록 1:11, 1:19 등에서 “네가 본 것들을 기록하라”라는 반복적인 명령이 주어짐.
→ 그런데 정작 “보라”가 누락되면, 계시 기록의 전체적 구조가 붕괴됨
4. 복음적 상징성 축소
→ “Come and see”는 요한복음 1:39, 1:46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에서도 반복되는 표현으로, 주께 나아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하는 복음적 초대의 표현임.
→ 이 상징성이 사라짐으로써 본문의 신학적 깊이 약화
5. 사본 증거 분석
KJV와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에는 네 구절 모두 헬라어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ἔρχου καὶ ἴδε – "Come and see"
(에르쿠 카이 이데 – “오라, 그리고 보라”)
그러나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은 일부 구절 혹은 전체에서 “ἴδε(보라)”를 생략하여 “ἔρχου(오라)”만 남아 있습니다.
NIV, 개역성경, ES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이 소수 사본을 따른 결과로 4번 모두 “보라”를 생략하게 되었습니다.
6. 결론
요한계시록 6:1, 3, 5, 7절에서의 “와서 보라(Come and see)”는 단순한 초대 이상의 의미를 가진 천상의 명령으로,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계시의 장면을 직접 보고 증언하도록 촉구하는 말씀이며, 독자에게는 하늘의 심판과 진리를 직시하라는 복음적 명령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표현을 모두 온전히 보존함으로써, 본문의 구조적 일관성, 신학적 중요성, 계시적 심각성을 충실하게 전달합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소수 사본을 따라 4구절 모두에서 “보라”를 생략함으로써, 성경 본문의 의미와 깊이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 또한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한 참된 성경임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계시를 받는 자는 단지 오는 것이 아니라, 와서 보고 기록해야 합니다. “Come and see.”
2025-05-24 17:54:18 | 관리자
요한계시록 2장 13절 "내가 네 행위를 알며" 삭제
요한계시록 2장 13절은 예수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보내신 메시지의 일부분으로, 그들의 처한 환경과 신앙을 평가하며 엄중한 칭찬과 경고를 함께 주시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시작 구문인 “내가 네 행위를 알며”(I know thy works)는 요한계시록 2~3장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메시지의 공통적 서두로, 각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한 주님의 전지성(omniscience)을 나타내는 핵심 표현입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KJV)에는 이 중요한 표현 “내가 네 행위를 알며”가 포함되어 있지만,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에서는 이 표현이 생략되어 본문의 구조와 신학적 강조가 크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Revelation 2:13(KJV):
“I know thy works, and where thou dwellest, even where Satan’s seat is…”
흠정역:
“내가 네 행위를 알며, 네가 어디 거하는지 아노니 그곳은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이 표현은 요한계시록 2~3장에서 모든 교회 편지에서 반복됩니다:
계 2:2 (에베소): “내가 네 행위를 안다”
계 2:9 (서머나): “내가 네 행위를 안다”
계 2:13 (버가모): “내가 네 행위를 안다”
계 2:19 (두아디라): “내가 네 행위를 안다”
계 3:1, 3:8, 3:15에서도 동일 반복
→ 즉, “내가 네 행위를 안다”라는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일곱 교회에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예수님의 ‘전지적 진단’이자 메시지의 패턴 구조입니다.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 NIV 등
개역성경: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NIV:
“I know where you live…”
이 번역에서는 “I know thy works”(내가 네 행위를 안다)라는 구절이 완전히 생략되었습니다.
→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2. 해석상 심각한 손상
요한계시록 전체 구조의 일관성 붕괴
→ 일곱 교회 메시지에서 반복되는 “내가 네 행위를 안다”라는 그리스도의 권위와 관심, 진단, 평가의 공통 출발점입니다.
→ 버가모 교회에만 이 표현이 빠지면, 본문의 구조적 통일성과 신학적 연결성이 무너집니다.
3. 예수님의 전지하심과 심판 주권의 약화
→ “네가 어디 거하는지 안다”만 남으면, 환경은 알지만 행위는 모른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음
→ 본래는 “네 행위를 알고, 네가 처한 상황도 안다”라는 두 축이 함께 있어야 주님의 전지성과 공의로운 심판이 드러남
4. 교회의 책임성과 회개 권면이 약화됨
→ “내가 네 행위를 안다”라는 말은 책임성과 경고를 포함한 무게 있는 선언인데, 이 말이 사라지면 말씀의 강도가 단순한 정보 전달 수준으로 약화
5. 사본 증거 분석
KJV 및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에는 헬라어 원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οἶδα τὰ ἔργα σου καὶ ποῦ κατοικεῖς”
→ “I know thy works and where thou dwellest”
반면, 소수 사본(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에서는 “τὰ ἔργα σου (thy works)”가 누락된 채 단순히 “I know where you live”만 남아 있습니다.
→ 따라서 NIV, 개역성경,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소수 사본을 따른 결과 이 중요한 구절을 생략한 것입니다.
6. 결론
요한계시록 2장 13절은 단순한 배경 설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버가모 교회를 향해 “네 행위를 알고 있다”는 권위 있는 평가로 시작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조는 일곱 교회 전체 메시지의 동일한 시작 방식이며, 그리스도께서 각 교회의 행위, 상태, 환경을 모두 알고 계심을 전제로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의 정확한 흐름을 따라 이 표현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으며, 본문의 일관성, 교리적 무게, 경고의 강도를 정확히 전달합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소수 사본의 생략된 형태를 반영함으로써, 본문의 논리적 구조와 신학적 중심을 흐리고, 예수님의 전지성과 심판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보존한 성경임을 강하게 입증하는 대표적 예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알며…"는 결코 삭제되어서는 안 될, 구조적이고 신학적인 필수 표현입니다.
2025-05-24 17:50:04 | 관리자
요한계시록 1장 20절 "네가 본" 삭제
요한계시록 1장 20절은 요한이 본 환상 중의 핵심 장면에 대한 해석이 처음으로 명확히 주어지는 구절로, 그는 금등잔대들과 별들에 대한 의미를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직접 듣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두 번에 걸쳐 "네가 본(that thou sawest)"이라는 표현을 삽입함으로써, 요한이 자신이 실제로 본 환상을 해석받고 있다는 문맥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표현 중 마지막 “네가 본”을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해석적 흐름과 독자의 이해 구조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Revelation 1:20(KJV):
“The mystery of the seven stars which thou sawest in my right hand, and the seven golden candlesticks.
The seven stars are the angels of the seven churches: and the seven candlesticks which thou sawest are the seven churches.”
흠정역:
“네가 본, 내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등잔대의 신비에 대해 기록하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본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
여기서 강조할 부분은 두 가지입니다:
"The seven stars which thou sawest" – 일곱 별에 대해 본 것
"The seven candlesticks which thou sawest" – 일곱 등잔대도 본 것임을 다시 강조
즉, 요한이 본 내용(환상)의 해석이라는 사실을 두 번 반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 전체에서 환상이나 비전의 해석이 나올 때 자주 쓰이는 구조이며, 해석과 환상 사이의 직접 연결 고리를 강조하는 기능을 합니다.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NIV:
“…and the seven golden lampstands. The seven stars are the angels of the seven churches, and the seven lampstands are the seven churches.”
여기서 “네가 본 which thou sawest”라는 표현은 두 번째 항목(등잔대) 앞에서 생략되어 있습니다.
→ 결과적으로 등잔대에 대한 해석이 환상에서 본 것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형태가 되어, 해석의 강도가 약화되고 문맥의 일관성이 흔들립니다.
2. 문맥적 흐름과 구조
요한계시록 1장 전체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본 환상:
→ 일곱 등잔대(1:12)
→ 일곱 별을 들고 계신 예수님(1:16, 1:20)
예수님의 해석 제공:
→ “네가 본 일곱 별… 네가 본 일곱 등잔대” (1:20, KJV)
즉, 본문에서 “네가 본”이라는 반복은 요한의 환상(1:12~16)과 그에 대한 해석(1:20) 사이의 직결된 연결 고리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현대 역본은 등잔대에 대해 “네가 본”이라는 말을 생략함으로써, 그 연결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요한의 본 것에 대한 해석이라는 문맥을 흐리고 있습니다.
3. 사본 증거
KJV 및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은 헬라어 원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καὶ αἱ λυχνίαι αἱ ἑπτὰ ἃς εἶδες – “일곱 등잔대는 네가 본 것들”
그러나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 알렉산드리아계)에서는 “ἃς εἶδες(네가 본)”이라는 표현이 등잔대 항목에서 누락되어 있습니다.
→ 따라서 NIV, 개역성경, 천주교 성경 등은 이 소수 사본을 따라 두 번째 "네가 본"을 생략한 번역을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4. 결론
요한계시록 1:20은 요한이 본 환상의 해석을 제공하는 구조에서, “네가 본”이라는 표현이 일곱 별과 일곱 등잔대 모두에 명확히 반복되어야 본문의 논리적 구조와 계시의 신빙성이 유지됩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의 일관된 흐름을 따라 두 번 모두 "which thou sawest(네가 본)"이라는 표현을 포함시켜, 요한이 본 환상의 해석임을 강조하며 문맥적 연결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로써 성경의 영감된 구조가 온전히 보존됩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라 두 번째 “네가 본”을 생략함으로써, 문맥의 흐름과 계시 구조의 명확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 또한 킹제임스 성경이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예입니다.
"네가 본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 — 반드시 있어야 할 문장입니다.
2025-05-24 17:46:28 | 관리자
요한일서 4장 19절 사랑의 대상 삭제
요한일서 4장 19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밝히는 매우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진리를 전합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사랑의 대상이 명확하게 "그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그분"이라는 사랑의 대상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본문의 의미가 모호해지고 문맥이 불완전하게 되어, 성도들이 무엇을, 누구를 사랑하는지 명확하지 않게 만들어 버립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1 John 4:19(KJV):
“We love him, because he first loved us.”
흠정역: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여기서 "We love him" —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인 사랑의 대상이 분명히 “하나님”임을 강조합니다.
→ 사랑의 대상이 명확히 주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선행적인 사랑이 우리 안에서 반응을 일으켰다는 관계의 순서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 NIV 등
개역성경: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NIV:
“We love because he first loved us.”
이 번역들에서는 "him(그분을)"이라는 사랑의 대상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습니다.
→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2. 해석상 손상되는 부분
사랑의 대상이 불분명해짐
→ "우리가 사랑한다"라는 말만 있고 누구를 사랑하는지 불명확합니다.
독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가?”, “이웃을 사랑하는 건가?”, “그냥 일반적인 사랑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3. 본문의 논리 흐름 왜곡
→ 원래 구조: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
→ 생략된 구조: “그가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한다”
→ 상호성, 방향성, 반응성 모두 모호해져서 복음적 진리를 흐림
4. 요한일서 전체 문맥과 단절
→ 요한일서 4장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대상을 생략하면 이 문맥과 단절이 생깁니다.
5. 사본 증거 분석
KJV 및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은 헬라어 본문에 “ἀγαπῶμεν αὐτόν” (agapōmen auton) –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라는 표현을 명확히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 사본(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알렉산드리아 계열)은 “αὐτόν(그분)”을 생략하고 단지 “ἀγαπῶμεν(사랑한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NIV, 개역성경, NRS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소수 사본을 반영하면서 ‘그분’이라는 사랑의 대상을 생략한 것입니다.
6. 문맥적 근거
요한일서 전체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요일 4:10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요일 4:20 – “어떤 사람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 이 흐름 속에서 요일 4:19에도 “그분을 사랑함”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있어야 자연스러운 구조입니다.
7. 결론
요한일서 4장 19절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 방향성, 반응성을 드러내는 복음의 핵심 구절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와 그에 대한 성도의 응답을 잘 보여 주는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중요한 구조를 다수 사본의 증거에 따라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으며, 본문의 논리, 문맥, 신학적 일관성을 완벽히 유지합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라 ‘그분’이라는 사랑의 대상을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고 복음 진리의 핵심을 희미하게 합니다.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한 성경인지를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25-05-24 17:42:38 | 관리자
베드로후서 2장 17절 "영원토록" 삭제
베드로후서 2장 17절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매우 강력한 언어로 묘사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영원토록(for ever)”이라는 표현을 포함시켜, 그들에게 임할 형벌의 지속성—곧 영원한 멸망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분명히 선포합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영원토록”이라는 핵심 구절을 생략하거나, 그 심판의 강도를 흐리는 식으로 축소 번역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경고가 약화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2 Peter 2:17(KJV):
“These are wells without water, clouds that are carried with a tempest; to whom the mist of darkness is reserved for ever.”
흠정역:
“이들은 물 없는 샘이요 폭풍에 밀려다니는 구름이라. 그들을 위해 어둠의 안개가 영원토록 예비되어 있나니.”
이 구절은 거짓 교사들을 “물 없는 샘”과 “폭풍에 휩쓸리는 구름”에 비유하며, 그 결과로 “영원한 어둠의 안개”—즉 지옥 형벌이 “그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라고 말합니다.
“영원토록(for ever)”이라는 표현은 여기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구절의 핵심입니다.
→ 이 말은 그들의 심판이 일시적이거나 정화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끝없는 형벌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 NIV 등
개역성경: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NIV:
“These people are springs without water and mists driven by a storm. Blackest darkness is reserved for them.”
여기서는 “for ever(영원토록)”이라는 말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2. 해석상 손상되는 요소
심판의 지속성 삭제
→ “영원토록”이라는 표현이 없다면, 이 “어둠”이 일시적 형벌인지, 종말적 멸망인지 불명확해집니다.
→ 특히 지옥(불호수)의 영원한 형벌이라는 성경 전체의 교리에서 이 표현은 핵심적인 언어입니다(마 25:41, 계 14:11, 계 20:10).
3. 경고의 강도 약화
→ “영원토록”이라는 표현은 독자에게 도망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경고합니다.
→ 이 표현이 사라지면, 본문의 무게와 두려움의 감각이 약해지고, 거짓 교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도덕적 경계 수준으로 축소할 수 있습니다.
4. 사본 증거
KJV 및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에는 헬라어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eis ton aiōna) —“영원토록” (for ever)이라는 표현이 명확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이 구절이 “τοῦ σκότους”만 남아 있고, “εἰς τὸν αἰῶνα”는 누락되어 있습니다.
→ 이로 인해 NIV, 개역성경, 천주교 성경 등은 이 표현을 번역하지 않음으로써 본문의 형벌의 영원성이라는 교리적 무게를 의도적으로 제거하거나 무시하게 된 것입니다.
5. 성경적 일관성
이 구절은 유다서 13절과 평행 구조를 가집니다:
유다서 13절 (KJV):
“…to whom is reserved the blackness of darkness for ever.”
→ 여기서도 “for ever”는 지옥 형벌의 지속성을 명확히 밝히는 표현입니다.
→ 베드로후서 2:17과 유다서 13절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동일한 심판을 선포하고 있으며, 이 “영원토록”이라는 표현이 삭제되면 두 본문 간의 연결성도 무너집니다.
6. 결론
베드로후서 2장 17절은 거짓 교사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무게와 지속성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영원토록(for ever)”은 이들이 받을 형벌이 끝이 없는 심판, 즉 지옥 형벌임을 증언하는 핵심 단어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중대한 단어를 다수 사본의 증거에 따라 정확히 보존하고 있으며, 본문의 교리적 무게와 경고의 강도를 온전히 유지합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른 결과 이 표현을 삭제하여, 거짓 교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라는 성경의 핵심 교리를 흐리고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왜 가장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한 성경인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거짓을 가르치는 자들에게는 “어둠의 안개가 영원토록 예비되어 있나니”
2025-05-24 17:39:37 | 관리자
베드로전서 4장 1절 "우리를 위해" 삭제
베드로전서 4장 1절은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신 목적을 제시하면서,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는 실천적 권면을 전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for us)” 당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며, 복음의 핵심인 대속적 고난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중요한 표현 “for us(우리를 위해)”를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약화시킴으로써 본문의 복음적 중심 의미를 흐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일반적 혹은 모범적 고난으로만 축소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1 Peter 4:1(KJV):
“Forasmuch then as Christ hath suffered for us in the flesh, arm yourselves likewise with the same mind: for he that hath suffered in the flesh hath ceased from sin;”
흠정역:
“그런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으니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이는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가 이미 죄를 그쳤기 때문이니”
여기서 “for us(우리를 위해)”는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이 대속적이며 대표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복음 교리의 핵심입니다.
→ 즉, 그분의 고난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속을 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NIV:
“Therefore, since Christ suffered in his body, arm yourselves also with the same attitude…”
여기서는 “for us(우리를 위해)”라는 구절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2. 해석상 심각한 손상
복음의 핵심인 ‘대속 교리’가 생략됨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라는 표현은 복음 전체의 중심 메시지입니다(롬 5:8, 고후 5:21, 벧전 3:18 참조).
→ 이 부분이 생략되면,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죄를 위한 대속적 고난이 아니라 일반적인 고난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3. 신자들에게 주는 권면의 논리 구조가 약화됨
→ “그분이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셨으니, 너희도 그분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는 논리적 연결 고리가 사라집니다.
→ 바울 서신과 동일하게, 베드로도 고난의 의미를 복음적, 구속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행동을 유도하는데, 현대 역본은 그 논리를 모범론적 윤리 수준으로 축소시킵니다.
4. 문맥상 강조점 왜곡
→ 베드로전서 전체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위로와 권면이 핵심입니다.
→ 그 위로는 단순한 정신론이 아니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대표성에 근거합니다.
→ “for us”가 생략되면, 위로의 뿌리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5. 사본 증거 분석
KJV 및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에는 헬라어 “ὑπὲρ ἡμῶν” (hyper hēmōn) – ‘우리를 위하여’가 명확히 본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이 “ὑπὲρ ἡμῶν” 표현이 생략되거나 의도적으로 누락되어 있으며, NIV, 개역성경,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이 소수 사본을 반영하여 “우리를 위해”라는 핵심 복음 표현을 생략했습니다.
6. 결론
베드로전서 4장 1절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바로 “우리를 위한 대속적 고난”임을 전제로 성도들에게 권면을 주는 구절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우리를 위해(for us)”라는 복음의 핵심 교리를 정확히 보존하고 있으며, 본문의 논리 구조, 신학적 진술, 실천적 적용을 완전하게 연결해 줍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라 이 표현을 삭제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인 대속 교리를 흐리고, 신자들이 고난을 이기는 논리적 근거를 단순한 모범론 수준으로 격하시켰습니다.
이 구절 또한 킹제임스 성경이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입증하는 사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2025-05-24 17:36:15 | 관리자
히브리서 11장 37절 "시험받음" 삭제
히브리서 11장 37절은 소위 “믿음의 영웅들”이 당한 고난의 목록을 나열하면서, 믿음으로 살았던 자들이 세상에서 어떤 처참한 시련과 고통을 감내했는지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중 킹제임스 성경(KJV)은 “시험을 받기도 하고”라는 표현을 다른 고난들과 동등한 무게로 포함시키고 있으며, 이것은 신약 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믿음의 시험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허락되는 중대한 신앙의 과정임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중요한 표현을 문법적 구조 속에서 흐리거나 사실상 생략하고 있어, 본문의 메시지와 경고가 약화되고 있습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Hebrews 11:37 (KJV):
“They were stoned, they were sawn asunder, were tempted, were slain with the sword…”
흠정역: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며 시험을 받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양가죽과 염소 가죽을 입은 채 떠돌아다니고 궁핍과 고난과 고통을 당하였으니”
여기서 “were tempted”(시험을 받았다)라는 표현은 고난이 단지 육체적 핍박에 국한되지 않고, 정신적·영적 시련도 포함됨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
→ 이는 신자들이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외부적 핍박뿐 아니라 내적 시험도 겪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요소입니다.
현대 역본의 생략 혹은 축소 – 개역, NIV 등
개역성경: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여기서 “시험”이라는 단어는 포함되어 있는 듯 보이나, 원문상에서 분리된 고난 목록 중 하나로서의 “시험받음(tempted)”이 아니라, 단지 단어 나열 중에 포함된 듯한 표현으로, KJV에서와 같은 동등한 사건의 무게를 갖지 못하는 구조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NIV:
“They were put to death by stoning; they were sawed in two; they were killed by the sword…”
→ “tempted”(시험을 받았다)라는 구절이 아예 생략되어 있습니다.
2. 사본 증거 분석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 Majority Text)을 따른 것으로, 이 본문에는 헬라어 “ἐπειράσθησαν” – “they were tempted”(그들은 시험을 받았다)가 명확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 소수 사본(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알렉산드리아계)에서는 이 구절이 생략되거나 모호한 구문 안에 병합되어 나타나며, 현대 역본들은 이 소수 사본을 따라 해당 표현을 누락하거나 축소 번역했습니다.
3. 신학적 중요성
시험은 신앙의 중요한 요소
→ 성경 전체에서 시험은 믿음의 정련 과정으로 반복해서 강조됩니다(약 1:2–3, 벧전 1:7).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이 육체적 고난뿐 아니라 정신적·영적 시험도 겪었다는 진술은 매우 중요합니다.
4. 본문 구조의 완전성 유지
→ “돌로 맞음, 톱으로 잘림, 시험받음, 칼로 죽임”은 모두 대등한 사건 목록으로, "시험받음"을 제거하면 구문 구조 자체가 비정상적으로 축소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력이 약화됩니다.
5. 교리적 정당성과 균형
→ 믿음의 사람들은 칼과 불 앞에서 죽기도 했지만, 의심과 유혹과 배교의 시험 앞에서도 싸워야 했습니다.
이 부분이 사라지면, 믿음의 본질이 오로지 박해에 대한 물리적 저항처럼 오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6. 결론
히브리서 11장 37절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고난 목록에서 시험(temptation)을 분명히 포함시키며, 신앙은 단지 육체적 핍박뿐 아니라 내면의 싸움과 유혹에도 직면한다는 깊은 진리를 전달합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을 바탕으로 이 구절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으며, 믿음의 여정에 있어 내적 시련과 외적 박해가 함께 존재함을 보여 주는 신학적으로 완전한 구조를 제공합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은 소수 사본을 따르며 ‘시험’이라는 중대한 요소를 생략하거나 약화시켜, 본문의 교훈력과 적용의 깊이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 또한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고 충실히 보존한 성경임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2025-05-24 17:32:5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