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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장 6절,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의 의미   안녕하세요? 한 분이 빌립보서 2장 6절에 대해 물으셔서 간단히 답을 적습니다. 질문의 핵심은 6절 후반부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6절 Who, being in the form of God, thought it not robbery to be equal with God: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킹제임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즉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가지고 계시므로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강탈해서 자기 것으로 취할 필요가 없으셨음을 보여 줍니다.   즉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동하다는 것이 원래부터 자기 것이므로 강제로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존 길의 주석: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강탈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분께서 아버지와 동일한 형상, 본성, 본질을 갖고 있었다면, 그분은 있는 그대로 아버자와 동등해야 합니다. 그분에게는 영원함, 전지함, 전능함, 무소부재함, 불변함, 자존하심과 같은 완전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에게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참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만유의 하나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이름이 있습니다. 여호와, 영광의 주, 동일한 창조와 섭리의 업적이 그분에게 돌아가고 동일한 예배와 경의와 영광이 그분에게 주어집니다. 매튜 헨리 주석: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강도 행위)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 일이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침해하거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30). 단순한 인간이나 단순한 창조물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거나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공언하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강탈(강도 행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십일조와 헌금에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의 권리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말 3:8).    그분께서 하나님의 형체로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말입니다. 7-8절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어 종의 형체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5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생각을 품고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낮추라고 이야기합니다.   천천히 5-8절을 읽어 보기 바랍니다.   5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으라.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니라. 6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강도 행위)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곧 십자가로 인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느니라. NIV도 킹제임스 성경과 거의 비슷한 생각을 보여 줍니다. NIV 6절 Who, being in very nature God,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grasped, NIV 직역: 그분은 하나님의 본성 바로 그 자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자기 손으로 움켜쥐려 하지 않았으나 NIV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므로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자기 힘으로 움켜쥐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강탈이라고 했으면 더 확실하였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미국 사람들은 NIV의 뜻이 KJV와 비슷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 번역은 뜻이 애매모호하거나 오히려 반대로 해석될 가능성이 큽니다.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것은 명백한 오역으로 보입니다. 개역성경은 NIV의 to be grasped를 취할 것으로 번역하면서 무엇인가 번역이 꼬여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보여 줍니다. 여하튼 6절은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8절은 영어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8절 And being found in fashion as a man,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unto death, even the death of the cross. 끝부분을 직역하면 십자가의 죽음이 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느니라. 우리말 직역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가 잘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    이런데 사용된 of는 ‘..으로 인하여’의 뜻입니다. He died of cancer. 그는 암으로 죽었다. 그러므로 8절은 이런 of를 살려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곧 십자가로 인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것이 우리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기초임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2023-09-11 13:35:33 | 관리자
예레미야 30장 8절, 인칭 대명사의 변화 구약성경, 특히 이사야서, 예레미야 등의 대언서에는 한 문장에서 갑지가 인칭 대명사가 바뀌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예레미야 30장 7-8절을 보겠습니다. 7 Alas! for that day is great, so that none is like it: it is even the time of Jacob's trouble, but he shall be saved out of it. 8 For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saith the LORD of hosts, that I will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and will burst thy bonds, and strangers shall no more serve themselves of him 7 슬프도다! 그 날이 커서 어떤 날도 그것과 같지 아니하니 그날은 곧 야곱의 고난의 때니라. 그러나 그가 그 고난에서 구원을 받으리라. 8 군대들의 주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의 멍에를 꺾어 버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니 타국인들이 다시는 그를 종으로 삼아 자기들을 섬기게 하지 못할 것이요, 7절에서 그는 이스라엘(야곱)입니다. 8절 초반부 즉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의 멍에를 꺾어 버리고'에서 네 목의 '너'는 이스라엘이고 그는 야곱의 고난의 때(7절)에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적그리스도로 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렘30-31은 7년 환난기의 유대인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8절 후반부 즉 '타국인들이 다시는 그를 종으로 삼아 자기들을 섬기게 하지 못할 것이요'의 그는 다시 이스라엘입니다. 이렇게 인칭 대명사가 바뀌면 혼동을 줄까 염려해서 개역성경은 뒤의 그를 너로 바꾸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버리며 네 줄을 끊으리니 이방인이 다시는 너를 부리지 못할 것이며  물론 원어는 너가 아니라 그입니다. 이렇게 인칭 대명사의 변화가 갑자기 생기는 구절이 대언서에 많으므로 조심해서 문맥에 따라 잘 읽어야 합니다. 샬롬    
2023-09-07 22:19:45 | 관리자
예레미야 29장 1-3절 배경지식   안녕하세요? 오늘은 매튜 헨리의 주석과 함께 예레미야 29장 1-3절의 배경을 잠시 설명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2절에는 괄호와 함께 After로 시작되는 문장이 있습니다. 왜 After가 나오며 어떤 일이 After로 표현된 사건 다음에 일어났는지 보려고 합니다.  2절에는 주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앞뒤 문맥을 보고 이해해야 합니다. 원래 정상적인 문장이라면 It is after.....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It is는 무엇일까요? 1 Now these are the words of the letter that Jeremiah the prophet sent from Jerusalem unto the residue of the elders which were carried away captives, and to the priests, and to the prophets, and to all the people whom Nebuchadnezzar had carried away captive from Jerusalem to Babylon; 2 (After that Jeconiah the king, and the queen, and the eunuchs, the princes of Judah and Jerusalem, and the carpenters, and the smiths, were departed from Jerusalem;) 3 By the hand of Elasah the son of Shaphan, and Gemariah the son of Hilkiah, (whom Zedekiah king of Judah sent unto Babylon to Nebuchadnezzar king of Babylon) saying, 매튜 헨리 주석(렘29:1-7)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바벨론 포로들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을 듣게 됩니다.    먼저 2절은 왕하24:8-16에 기록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여고니야(여호야긴)는 3개월을 통치한 뒤 포로가 되었고 그의 어머니 왕후와 그의 집안의 시종들(여기서는 내시들이라 불림)과 당시에 가장 활동적이었던 유다와 예루살렘의 많은 고관들이 함께 포로가 되었습니다. 목수들과 대장장이들도 마찬가지로 강압적인 요구를 받아 항복했고 그 결과 도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도시를 요새화하거나 전쟁 무기를 마련할 적절한 손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복종으로 느부갓네살이 진정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오만한 정복자 느부갓네살은 아합 당시 벤하닷처럼 그들의 양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1절은 2절이 있은 뒤에 일어난 다른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2절의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에 다시 와서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대언자들과 백성 중 더 많은 사람들 즉 자기 생각에 합당한 자들, 또 자기 병사들이 손을 뻗어 바벨론으로 데려갈 수 있는 자들을 또다시 포로로 데려갑니다.    이 포로들은 매우 우울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땅에 남아 있는 나머지 형제들과 구별되어 마치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본토에 남겨진 형제들을 부러워할 이유도 없음을 확신시켜 줍니다. 1.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마찬가지로 진실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널리 흩어져 있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는 적절한 방법이었습니다. 2. 우리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적절한 위로와 건전한 조언이 담긴 경건한 편지를 써서 하나님을 섬기고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기록된 것은 남아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예레미야의 이 편지는 여호야긴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시드기야 왕이 느부갓네살에게 보낸 사신들의 손에 의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사람들에게 보내졌는데, 아마도 이들은 그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에게 복종을 다시 약속하거나 그와 평화 조약을 맺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사자들을 통해 이 메시지를 보내기로 결정했고, 그것에 영예를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의 포로들의 상황은 더욱 우울해졌고 그들은 자기들이 두고 온 친구와 친척들의 소식을 거의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메시지는 서로 헤어진 사람들에게 만족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런 것을 기억하면서 1-4절을 읽으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고 특히 2절의 내용이 1절 이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과 함께 성경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2절의 It is는 '이렇게 끌려간 일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4절   1 한편 포로로 끌려간 장로들 중에서 남은 자들과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고 간 제사장들과 대언자들과 온 백성에게 대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편지의 말들은 이러하니라. 2 (이렇게 끌려간 일은 여고니야 왕과 왕비와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통치자들과 목수들과 대장장이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뒤에 있었으며) 3 (이 편지는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빌론에 있는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보낸)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의 손에 맡겨진 것이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4 나 군대들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하므로 포로로 끌려간 모든 자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2023-09-07 17:21:40 | 관리자
안녕하세요?   잠1:32는 다음과 같습니다.   For the turning away of the simple shall slay them, and the prosperity of fools shall destroy them.    이는 단순한 자들의 돌이켜 떠나감이 그들을 죽일 것이며 어리석은 자들의 번영이 그들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이라.   turning away는 무슨 뜻일가요?   단순한 자들은 어디에서 돌이켜 떠나갈까요?    그들은 지혜, 진리, 복음, 하나님, 그리스도, 생명에서 돌이켜 떠나갑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turning away는 여기서 이런 뜻을 가집니다.   카톨릭, 공동 번역 등은 배반, 등을 돌림 등으로 비슷하게 번역하였고 개역은 퇴보로 잘못 번역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23-09-06 10:32:08 | 관리자
창세기 29장 5절, 나홀의 아들: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 안녕하세요? 우리는 대개 son, daughter는 아들, 딸로만 이해하지만 영어(원어) 성경에서 son, daughter는 종종 손자, 손녀, 자손 등을 의미합니다.   1. 아들, 손자   창세기 29장 5절은 한 예를 보여 줍니다. And he said unto them, Know ye Laban the son of Nahor? And they said, We know him.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느냐? 하니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하매 우리가 알듯이 나홀에게는 8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창22:20-22). 20 이 일들 뒤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보라, 밀가도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아이들을 낳았다, 하니라. 21 그(나홀)의 맏아들은 후스요, 그(후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무엘과 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인데 라반은 브두엘의 아들입니다. 창22:23, 브두엘이 리브가를 낳았더라. 밀가가 이 여덟 명을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에게 낳았으며 리브가는 라반의 누이였습니다. 창25: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취하였는데 그녀는 밧단아람의 시리아 사람 브두엘의 딸이요, 시리아 사람 라반의 누이더라. 그러므로 창세기 29장 5절의 라반은 나홀의 손자이지 아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풍습은 가문에서 뛰어난 자를 대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브두엘보다는 그의 아들 라반이 유명하였으므로 성경은 그를 나홀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개역성경, 바른 성경 등은 나홀의 손자라고 하고 카톨릭, 공동 번역 등은 흠정역처럼 나홀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느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의 문제이므로 아들로 해도 되고 손자로 해도 됩니다. 손자로 한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왕하9:2). And when thou comest thither, look out there Jehu the son of Jehoshaphat the son of Nimshi, and go in, and make him arise up from among his brethren, and carry him to an inner chamber; 네가 거기에 다다르거든 거기서 님시의 손자요, 여호사밧의 아들인 예후를 찾아보고 들어가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그를 일어나게 한 뒤 안에 있는 방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이 경우는 아들(son), 아들(son)이 두 번 나오므로 하나는 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손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딸, 손녀   왕하8:26에는 아달랴가 나옵니다. Two and twenty years old was Ahaziah when he began to reign; and he reigned one year in Jerusalem. And his mother's name was Athaliah, the daughter of Omri king of Israel. 아하시야는 통치하기 시작할 때에 이십이 세였으며 그는 예루살렘에서 일 년 동안 통치하였더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이며 그녀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더라. 영어(원어)로 보면 아달랴는 오므리의 딸(the daughter of Omri king of Israel)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달랴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의 딸임을 알기에 오므리의 손녀로 이를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므리의 딸로 번역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daughter에 딸, 손녀 등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알려진 인물을 오므리의 딸로 번역하면, 이런 뜻을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문젯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므리의 손녀로 번역하였습니다.   3. 자손   마1:1에는 예수님에 대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The book of the generation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 이런 경우 아들은 자손, 후손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영한사전을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son [sʌn] n.   ① 아들, 자식; 사위, 의붓아들; 수양아들, 양자(adopted ~). ⟨OPP.⟩ dɑughter. ② (보통 pl.) (남자) 자손《of》 ┈┈• the ~s of Abraham 유대인. ③ …나라 사람, …사람《of》; (학교 등의) 일원, 자제; 당원; 계승자《of》; (특정 직업의) 종사자《of》 ┈┈• a ~ of toil 노동자 ┈┈• a faithful ~ of England 충성스러운 영국 사람 ┈┈• a ~ of Mars 〔the Muses〕 군인〔시인〕. ④ 《호칭》 자네, 젊은이, 군 ┈┈• Listen, ~. 이봐 젊은이 ┈┈• old ~ 자네《친근한 호칭》.   †daugh·ter [dɔ́ːtǝr] n.   ① 딸. ⟨OPP.⟩ son. ② 여자 자손《of》 ┈┈• a ~ of Eve 이브의 후예. ③ 며느리, 의붓딸. ④ 파생된 것; 소산(所產) ┈┈• a ~ language of Latin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 ┈┈• a ~ of civilization 문명의 소산.
2023-09-05 14:27:36 | 관리자
요한복음 4장 24절, '신령과 진정'이 아니라 '영과 진리'이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장신대 교수를 역임한 나채운 박사님의 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성경 번역과 관련해서 많은 것을 보여 주는 매우 좋은 글입니다.   나채운 박사님은 1932년 경북 성주 출생으로 고려대학교에서 법학을,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학을 공부하고(문학 석사),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과 벨더빌트대학교 및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여, 신학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노스웨스트기독교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분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수,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대한성서공회에서 성서 번역, 개정 위원으로, 한국찬송가공회에서 가사 전문 위원으로 일하고, 우리말 주기도문 사도신경 개정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최현배의 우리말본에 심취하여 후에 대한성서공회와 한국찬송가공회에서 성경의 번역·개정과 새 찬송가 개발에 다년간 참여하여 공적을 남겼고, 개정된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혼자서 개정을 하여 전 한국 교회가 사용하도록 그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700쪽이 넘는 <우리말 성경연구>(기독교문사, 1994, 절판)는 우리말 성경의 역사와 오류 등을 다루고 있는 심히 귀한 책입니다.   원글 출처: 0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 영과 진리로 예배 (요4:24) 0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 영과 진리로 예배 (요4:24) 개역--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개정--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개역 본문의 "신령과 진정"이 개정판에서 "영과 진리"로 바뀐 것이다. 이 원문은 en pneumati kai aletheiai로서, 우리말의 "신령과 진정"(神靈과 眞情)은 합당하지 않고 "영과 진리"(靈과 眞理)가 바른 번역이다(영어 성경에서는 예외 없이 in spirit and in truth).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의 잘못된 예배관을 시정해 주는 말씀으로서,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의문적(儀文的)이고 형식적이고 물질적인 제사를 부정하고 경계하는 것이며,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뜻은 아니다(그러므로, 영어로 쓰면 대문자 S로 쓰지 않는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이방인들(사마리아인 같은)의 거짓 신에 대립되는 참 신에 대한 예배를 뜻하는 것이다. 즉 예배할 장소와 예배할 때와 예배할 대상을 바로 알아서 참된, 진정(眞正)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여기 '진정'은 한자어(국한문 성경에서)로 '眞正'이 아니고 '眞情'이니 더더구나 안 된다.  진정(眞正): 거짓이 없이 참으로. 진정(眞情): 참되고 애틋한 정이나 마음 이 본문은 목회자들이 많이 인용하고, 또 설교의 본문으로 삼는 중요한 구절인데도, 대다수의 설교자들이 개역성경 본문의 번역이 잘못되어 있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설교해 온 것이 사실이다 (주석서에서도 성경 본문의 번역의 잘못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 이제 설교자는 더 이상 지금까지의 개역성경을 쓰지 말고, 개정판을 씀으로써 우선 본문에서부터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 열심을 내면 다 되는가? 우리가 열심을 다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실까? 개역성경은 그렇다고 한다.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우리말 큰사전은 ‘신령’이란 ‘신기하고 영묘한 것’이고 ‘진정’(眞情)이란 ‘참되고 애틋한 정이나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기하게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애틋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신다는 말인가?  많은 교인들이 이런 구절에 은혜를 받고 열성으로 지성을 다해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기독교는 “지성이면 감천이다.”를 모토로 하는 샤머니즘이 아니다.  인격 대 인격이 만나는 관계가 복음의 핵심이요 전부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이 영으로(즉 성령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통해) 그리고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 흠정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KJV: God is a Spirit: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개역성경을 따라 너무나도 단순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간의 열심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영어 전치사 in의 용례 이 구절의 in spirit and in truth의 in을 ‘안에서’로 번역하면 졸역이 된다. 영어 전치사 in은 물론 ‘...안에서’가 가장 주된 뜻이다. 그러나 in에는 이 외에도 여러 종류의 용례가 있다. 영한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용례가 나온다. †in [in; (prep.로서는 때때로) 약 ən] prep. ① ⦗장소⦘ a) ⦗위치⦘ …의 속에〔의〕; …속〔안〕에서, …에 있어서, …에, …에서(⇨AT 1 a ⟨NOTE⟩) ┈┈• in Korea 한국에서 ┈┈• have a stick in one’s hand 손에 단장을 들고 있다 b) 《구어》 ⦗운동·동작의 방향⦘ …속〔안〕에〔으로〕; …쪽에 〔으로, 에서〕(≒into) ┈┈• in the east 동(東)쪽으로 c) (탈것 따위)에 타고 ┈┈• in a car 차를 타고, 차에 ┈┈• get in 〔《미국》 on〕 a car 차를 타다. d) ⦗관사 없이 장소의 기능을 나타냄⦘ …에(서); …하고 ┈┈• in school 재학 중에; 학내에서 ┈┈• in class 수업 중에 ② a) ⦗상태⦘ …한 상태로〔에〕, …하여 ┈┈• in ruins 폐허가 되어서 ┈┈• in good health 건강하게 ┈┈• in good order 정돈되어 ┈┈• in debt 빚을 지고 ③ a) ⦗행위·활동·종사⦘ …하여〔하고〕, …에 종사하고 ┈┈• in search of truth 진실을 찾아 ┈┈• be in business 장사를〔사업을〕 하고 있다 b) ⦗소속·직업⦘ …에 소속하여, …(을) 하고, …에 참가하여 ┈┈• in society 사교계에 ┈┈• hold a seat in the cabinet 내각에 참여하다 ④ ⦗착용·포장⦘ …을 입고〔몸에 걸치고〕, …을 신고〔쓰고〕(wearing); …에 싸서 ┈┈• in uniform 제복을 입고 ⑤ ⦗때·시간⦘ a) ⦗기간⦘ …동안〔중〕에, …에, …때에(⇨AT 2 ⟨NOTE⟩) ┈┈• in the morning〔afternoon, evening〕오전〔오후, 저녁〕에 ┈┈• in March 3월에 b) ⦗경과⦘ (지금부터) …후에, …지나면, …지나서 ┈┈• in a week 1주일이면〔지나서〕《주로 미래에 쓰임; 《미국 구어》에서는 종종 within과 같은 뜻으로도 사용됨》(⟨cf.⟩ ago) ⑥ a) ⦗전체와의 관계를 나타내어⦘ …중(에서) ┈┈• the highest mountain in the world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山) b) ⦗비율·정도·단위⦘ …당, …로, 매(每) …에 ―로 ┈┈• be sold in dozen 다스(단위)로 팔리다 ┈┈• packed in tens 열 개씩 포장을 하여(서) ⑦ ⦗제한·관련⦘ a) ⦗범위⦘ …의 범위 내에, …안에 ┈┈• in 〔out of〕 (one’s) sight 시야 안〔밖〕에 ┈┈• in one’s power 세력 범위에; 능력이 미치는 한의 b) ⦗수량·성질·능력·분야의 한정⦘ …점에서는, …에 있어서; …을 〔이〕 ┈┈• ten feet in length 〔height, depth, width〕길이〔높이, 깊이, 너비〕가 10피트 ┈┈• seven in number 수(數)가 일곱 ┈┈• vary in size 〔color〕 크기가 〔색깔이〕 각기 다른 d) ⦗특정 부위⦘ …의, …에 관해 ┈┈• a wound in the head 머리의 부상 ⑨ ⦗동격 관계⦘ …이라는 ┈┈• In him I have a true friend. 나에게는 그이 같은 진정한 벗이 있다 ┈┈• You have done us a great favor in encouraging us. 격려해 주심으로써 큰 힘이 돼 주셨습니다. ⑩ ⦗수단·재료·도구 따위⦘ …로, …로써, …로 만든 ┈┈• speak in English 영어로 말하다 ┈┈• a statue (done) in bronze 청동상 ┈┈• It was done in wood. 그것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⑪ ⦗방법·형식⦘ …(으)로, …하게 ┈┈• in this way 이(런) 방법으로, 이와 같이 ┈┈• in like manner 똑같이 ┈┈• in secret 몰래, 가만히(secretly) ┈┈• in a loud voice 큰 소리로 ⑫ ⦗배치·형상·순서 따위⦘ …을 이루어, …이 되어 ┈┈• in rows 줄을 지어, 몇 줄이고 ┈┈• in alphabetical order 알파벳 순으로 ⑬ a) ⦗이유·동기⦘ …때문에, …(이유)로 ┈┈• cry out in alarm 놀라서 소리 지르다 ┈┈• rejoice in one’s recovery 회복을 기뻐하다. b) ⦗목적을 나타내어⦘ …을 목적으로, …을 위해 ┈┈• in self-defense 자기 방어를 위해 ┈┈• say in conclusion 최후로 한마디 하다 c) …로서(의) ┈┈• in return for his present 그의 선물에 대한 답례로 ┈┈• She said nothing in reply. 그녀는 아무 대답도 안했다. d) ⦗조건⦘ …이므로, (만일) …한 경우에는 ┈┈• in the circumstances 그런 사정이므로 ┈┈• in this case (만일) 이런 경우에는. ⑭ ⦗in doing의 형식으로⦘ …한 점에서, …하므로, …하면서 ┈┈• The proposal is acceptable in being practicable. 그 제안은 실행이 가능한 점에서 수락할 수 있다 ┈┈• in so saying 그렇게 말하며. ⑮ ⦗행위의 대상⦘ …에 관해, …을 ┈┈• believe in God 하느님의 존재를 믿다 ┈┈• persist in one’s belief 끝까지 자기 신념을 관철하다. 성경에는 특별히 in이 ⑦ b) 즉 ‘…점(면)에서는, …에 있어서’의 용례가 많이 나오고 ⑩ ⦗수단·재료·도구 따위⦘ ‘…로, …로써, …로 만든’의 용례가 많이 나온다. in spirit and in truth의 in은 ⑩ ⦗수단·재료·도구 따위⦘의 용례로서 ‘영과 진리로’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고전6:20의 in도 같은 용례이다. For ye are bought with a price: therefore glorify God in your body, and in your spirit, which are God's.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반면에 벧전3:18의 in은 ...면에서, 점에서의 in의 용례이다. But grow in grace, and in the knowledge of our Lord and Saviour Jesus Christ. To him be glory both now and for ever. Amen. 오직 은혜 면에서 성장하고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면에서 성장하라. 그분께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은혜 면에서 성장하고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면에서 성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23-09-04 21:21:29 | 관리자
스가랴서 14장 분석: 아마겟돈 전쟁, 양과 염소 민족 심판 스가랴서 14장은 7년 환난기 끝의 아마겟돈 전쟁과 예수님의 올리브 산 재림, 양과 염소 민족들의 심판 그리고 천년왕국을 보여 줍니다. 스가랴서 14장은 인류 역사의 이 부분을 성경에서 가장 잘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스가랴서는 요한계시록, 에스겔서, 다니엘서 등과 짝을 이루며 말세의 일들을 가장 잘 보여 줍니다. 특히 스가랴서 12-14장은 이 기간에 이스라엘에 이루어질 일들을 잘 보여 줍니다. 스가랴서, 말라기, 다니엘, 에스겔서 등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교회를 여기에 대입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입니다. 이런 말씀들의 대상은 100%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4장, 요한계시록을 읽으며 신약 시대에 주어진 말씀들과 구약 시대의 이런 말씀을 잘 조화시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림 1은 미래 일들의 개요를 보여 줍니다.     그림 2는 마태복음 24-25장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림 3은 이방인들의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75일은 다니엘서 12장의 1260일 이후의 75일을 말합니다.   그림 4 다니엘서 12장의 75일을 보기 바랍니다.    이제 스가랴서 14장을 이 그림들과 조화시켜 보겠습니다. 말세 일들의 순서는 신구약 모두 종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교회의 환난 전 휴거 2. 7년 환난기(환난기 성도들, 144,000명의 유대인, 이들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이미 휴거되어 이 땅에 없다) 3. 예수님의 올리브 산 지상 재림(아마겟돈 전쟁) 4. 민족들 심판(양과 염소 민족 심판) 5. 천년왕국 통치 6. 1,000년이 지난 뒤 새 하늘과 새 땅(다가올 영원) 스가랴서 14장 분해 1. 슥14:1-3은 아마겟돈 전쟁을 말합니다.   2. 슥14:4-5은 올리브 산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올리브 산과 관련해서는 사도행전 1장 9-12절을 보기 바랍니다. 3. 슥14:6-8은 재림의 때의 현상들을 보여 줍니다. 8절과 관련해서는 에스겔서 47장과 요엘 3장을 보기 바랍니다.  4. 슥14:9는 천년 왕국의 주님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서 48장 35절을 보기 바랍니다. 5. 슥14:10-11은 지형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이사야서 40장 1-5절을 보기 바랍니다. 6. 슥14:12-15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7. 슥14:16은 재림 후 이루어질 이방인들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의 양과 염소 민족들 심판을 보기 바랍니다. 요엘서 3장도 동일한 것을 보여 줍니다.   특히 14장 16절의 '예루살렘을 대적하러 왔던 모든 민족들 중에서 남아 있는 모든 자'는 이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8. 슥14:17-19는 양과 염소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천년 왕국에서 주님께 예배드리며 장막절을 지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서 66장을 같이 보기 바랍니다. 9. 슥14:20-21은 천년왕국에서 주님의 집이 거룩할 것임을 보여 줍니다. 거기에는 다시는 가나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이야기하면 팔레스타인 땅의 이교도 거주민들 중 한 사람도 주의 집에 더는 들어오지 못함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창9:25-26의 성취가 될 것입니다.   샬롬   패스터
2023-08-29 19:42:02 | 관리자
영어 문장의 도치 사례: 디모데전서 6장 5절   안녕하세요? 지금 우리는 글을 쓰면서 무언가를 강조하려면 따옴표를 쓰든지, 컬러로 마크하든지, 밑줄을 긋든지 합니다. 그러나 1611년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마침표, 물음표, 콤마 등의 간단한 문장 부호 외에는 강조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부호들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어떤 것을 강조할 때는 문장의 도치나 괄호가 사용됩니다. 오늘은 강조를 위해 문장이 도치된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조를 위해 괄호가 사용된 예는 고린도후서 5장 7절을 보기 바랍니다. 고후5:7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 문장의 도치 사례 디모데전서 6장 5절 디모데전서 6장 5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6:5 Perverse disputings of men of corrupt minds, and destitute of the truth, supposing that gain is godliness: from such withdraw thyself. 이 구절의 중간에 보면 gain is godliness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godliness는 하나님처럼 사는 것,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 하나님을 따르는 것 등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 문장을 “이득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번역하면 뜻을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전에는 우리도 그렇게 번역하였으나 뜻이 통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영어 단어에는 피상적인 뜻이 있고 깊이 들여다보아야만 아는 뜻이 있습니다. 영한사전에 가서 gain을 찾아보면 그냥 이득 혹은 이익이라는 피상적인 뜻만 나옵니다. 그런데 영어 Oxford 사전을 보면 gain에는 이런 피상적인 뜻뿐만 아니라 ‘이득의 원천’(원인)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3.3 A source of gain 즉 영국 사람들이 gain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에는 단순히 이득이라는 피상적인 뜻으로도 이해하지만 이득을 늘리는 수단, 방법, 원천, 근거 등의 의미로도 이해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이득의 원천 혹은 이득을 늘리는 방법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도 이해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말답게 이 문장을 번역하려면 도치된 문장을 원상으로 돌려서 번역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이득(혹은 이득의 원천)이라고 번역됩니다. 이러면 뜻이 확 들어옵니다. 이 말은 번영 신학, 기복 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의 구호, 즉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부자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번영 신학, 기복 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에게서 멀리 떠나라고 이야기합니다.   6:5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오순절 은사주의자들, 번영 신학 기복 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 그리스어를 염두에 두고 번역한 개역 성경은 경건(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이익의 방도(혹은 수단)로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gain is godliness라는 문장이 도치 문장이라는 것은 바로 그다음 구절이 증명해 줍니다.     6:6 But godliness with contentment is great gain.   이 구절에는 godliness with contentment is great gain이라는 평범한 문장, 즉 도치가 없는 문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6장 5절과 동일한 구조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당연히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합니다. 6:6 그러나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니 따라서 딤전6:5와 6:6은 같은 형식의 문장인데 하나는 도치가 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도치가 없이 평범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 gain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신약 성경에서 딤전 6장 5절과 6절에만 나오고 뜻은 이득 혹은 이득의 원천, 이득을 늘리는 길(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딤전6:5의 도치문을 도치하지 않고 번역한 것은 우리말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고 그래야 5절과 6절과 같이 동일한 형태로 번역이 됩니다. 이러면 누구라도 쉽게 딤전6:5-6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어 단어에 피상적인 뜻이 있고 깊이 들여다보아야만 아는 뜻이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를 하나 더 예로 들겠습니다. 정죄인가, 정죄의 근거인가? 요3:19에는 condemna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And this is the condemnation, that light is come into the world, and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because their deeds were evil. 단순하게 영한사전에 가서 condemnation을 찾으면 그 뜻이 정죄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 등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대로 읽으면 정죄란 그들이 빛보다는 어두움을 사랑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하면 말이 꼬이고 앞뒤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가서 condemnation을 찾으면 세 번째 뜻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3.3 The ground or reason for condemning. 정죄의 근거 혹은 이유  즉 이런 경우의 condemnation은 그냥 정죄가 아니라 정죄의 근거 혹은 이유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흠정역은 그렇게 번역하였습니다. 흠정역: 정죄의 근거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들이 악하므로 빛보다 오히려 어둠을 사랑한 것이니라. 다시 말해 그들이 빛이 아니라 어두음을 사랑한 것이 정죄의 근거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은 원어나 영어의 문제가 아니라 영어의 한 단어가 피상적인 뜻이 있고 은밀히 숨겨져 있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다만 성경 번역이 이렇게 미묘하므로 20세기 영한사전만 가지고 번역하면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2023-08-29 14:22:39 | 관리자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는가?(디모데전서 2장 15절)  최근에 어떤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개역성경 딤전2:15에 따르면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러면 여자들이 아기를 낳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아기를 낳지 못한 여자들이나 낳을 수 없는 남자들은 구원받지 못합니까?"   이것을 설명하려면 11절부터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11 여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잠잠히 배울지니라. 12 더욱이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여자는 잠잠히 있을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어지고 그 뒤에 이브가 지어졌으며 14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법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라. 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안에 거하면 그녀가 수태와 해산을 거칠 때에 구원을 받으리라. 이 부분은 남자와 여자의 권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둘 다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지만 권위 행사 측면에서는 동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나오는 구원을 설명하자면 과연 여자가 어디에서 구원받는 것인지를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save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대개 죄와 심판과 사망에서 구원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좀 더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구원받는 것인지를 표현하려면 save 다음에 from이라는 단어가 나와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장 2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라, 하니라.   And she shall bring forth a son, and thou shalt call his name JESUS: for he shall savehis people from their sins. 그런데 딤전2:15에는 여자가 어디에서 구원받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문제가 생깁니다. 하지만 앞뒤 문맥을 보면 어디에서 구원받는 것인지 판단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여자가 아이를 낳음으로 죄나 혹은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는 없음을 알기에 일단 여기의 구원은 그런 구원이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야먄 구원받는다면 남자들이나 아이를 낳지 못한 여자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13-14절을 보면 이브는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서 범법하였습니다. 그 뒤에 15절이 나옵니다. 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안에 거하면 그녀가 수태와 해산을 거칠 때에 구원을 받으리라.   Notwithstanding she shall be saved in childbearing, if they continue in faith and charity and holiness with sobriety. 여기서 영어 in childbearing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집니다. childbearing은 우리말로 ‘아이를 지난다’인데 이것은 수태와 해산 그리고 심지어 교육과 훈련까지를 다 포함하는 포괄적인 말입니다. 여기의 in은 수단의 의미도 있고 기간의 의미도 있습니다. 수단의 의미로 in을 해석하면 ‘수태와 해산을 통해’(개역성경의 해산함으로)가 될 것이고 기간의 의미로 in을 해석하면 ‘수태와 해산의 기간에’로 볼 수 있습니다. 흠정역 마제스티 에디션은 in을 후자의 의미로 보고 ‘그녀가 수태와 해산을 거칠 때에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5절은 그들(3인칭 복수(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음, 1. 성경적 정의에 따른 선한 여인들을 가리키거나, 2. 남편과 아내, 즉 부부를 가리킴))이 사랑하고 거룩함 가운데 거하면 그녀가(1. 그런 선한 여인이나, 2. 아내가) 수태와 해산을 거칠 때에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 범법하는 것에서) 구원받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자에게 가장 힘든 시기는 수태와 해산하는 시기(그 이후의 양육 시기도 마찬가지)이고 이때(childbearing 하는 때)가 마귀의 공격을 받아 이브처럼 실족하기가 가장 쉬운 때입니다(피터 럭크만 등의 주석). 또는 여자의 범법으로 인해 여자가 남자의 권위 하에 놓이게 되고 해산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데(창3:16) 이런 범법의 결과로부터 구원받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존 길 등의 주석).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고통과 수태를 크게 늘리리니 네가 고통 속에서 자식들을 낳을 것이며 또 너의 열망이 네 남편에게 있겠고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며(창3:16) 딤전2:11-14은 창3:16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주석입니다. 여러 주석들이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Bible Hub 주석 다만 이 구절이 사람의 구원, 즉 죄에서 벗어나 영원히 하나님과 사는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만 분명히 하고 문맥을 잘 보고 각 사람이 이해하는 대로 해석해도 됩니다. 우리는 마제스티 에디션처럼 해석하고 그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샬롬   패스터
2023-08-15 11:53:09 | 관리자
영존하는 파멸의 의미(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 살후1:6-9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8-9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8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며 9 그때에 그들은 주의 얼굴 앞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에서 떠나 영존하는 파멸로 형벌을 받으리라. 9 Who shall be punished with everlasting destruction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from the glory of his power; 여기서 영존하는 파멸(everlasting destruction)은 무슨 뜻일까요? 불신자는 영원히 소멸되어 사라지므로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며(영혼 소멸설) 이런 분들은 살후1:9의 영존하는 파멸이 그런 것을 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영존하다’라는 말은 무언가가 영원토록 지속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서는 그런 자들에 대한 파멸이 영원토록 지속된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영구히 소멸되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곧바로 형벌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들에 대한 고통이 멈추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9 그때에 그들은 주의 얼굴 앞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에서 떠나 영존하는 파멸로 형벌을 받으리라. 여기의 파멸은 성경 말씀 자체가 그 뜻을 가르쳐 줍니다. 9절을 보면 그들은 주의 얼굴 앞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에서 떠나 영존하는 파멸로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파멸의 뜻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무궁토록 떠나는 것입니다. 마25:41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에 그(재림하시는 그리스도)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르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 사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파멸의 의미입니다. 파멸은 우리말로는 '망가진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건강을 잃으면 건강이 망가진 것입니다. 톱의 날이 부러지면 톱이 망가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서 보듯이 망가졌다고 해서 건강이나 톱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옥 불 속에 영원히 들어가는 자들도 사람으로서의 제 기능을 못하며 영원무궁토록 망가지게 됩니다.  마10:28도 이런 의미입니다. 몸은 죽여도 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혼과 몸을 둘 다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 And fear not them which kill the body, but are not able to kill the soul: but rather fear him which is able to destroy both soul and body in hell. 이 구절에는 파멸(destruction)의 동사형인 destroy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불신자의 혼과 몸을 둘 다 지옥에서 영원토록 망가뜨릴 수 있는 분이므로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영혼 소멸설(soul annihilation)을 주장하는 분들이 이런 구절들을 제시하면 이 글로 잘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 물론 가장 좋은 주석은 다음에서 언제든지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Bible Hub 주석    
2023-08-15 11:00:00 | 관리자
데살로니가후서 1장 5절의 그것(which)의 의미 살후1:4-5를 보겠습니다. 4 그러므로 너희가 겪고 있는 너희의 모든 핍박과 환난 속에서 드러난 너희의 인내와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들에서 친히 너희를 자랑하노라. 5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명백한 증표이니 이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한 자로 여겨지게 하려 함이라. 그 왕국을 위해 너희도 고난을 당하고 있느니라. 4 So that we ourselves glory in you in the churches of God for your patience and faith in all your persecutions and tribulations that ye endure: 5 Which is a manifest token of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that ye may be counted worthy of the kingdom of God, for which ye also suffer: 영어 성경을 보면 5절의 which is는 이탤릭체로 되어 있습니다(역자들이 추가함).   5절의 그것(which is)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명백한 증표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대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악인들을 심판해 주시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은 4절의 앞부분 전체(영어로는 후반부 전체)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명백한 증표로 보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증표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의 활력과 성장이 아니라 그들이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핍박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표시였습니다.  그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한 자로 여겨지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 왕국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바울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표로 보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고난을 당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1:27-30도 동일한 것을 말합니다. 27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하라. 이것은 내가 가서 너희를 보든지 떠나 있든지 너희에 대한 일들 곧 너희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복음의 믿음을 위해 한마음으로 함께 싸우며 28 어떤 일에도 너희의 대적들로 인해 무서워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내가 듣고자 함이라. 그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명백한 증표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표인데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29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도 그분을 위하여 너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라. 30 너희가 내 안에서 보았고 지금도 내 안에 있다고 듣고 있는 그 동일한 싸움이 너희에게도 있느니라.    17-18세기의 성경적인 주석은 다음에서 언제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이트의 주석은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보물 창고입니다.   Bible Hub 주석 사이트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나 악한 사람들과 유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딤후3:12-13). 샬롬 패스터
2023-08-15 07:53:10 | 관리자
집사들과 연로한 여자들은 약간의 술(포도주)은 먹어도 되나? 디모데전서 3장 8절, 디도서 2장 3절 디모데전서 3장에 기록된 지역 교회의 감독(목사 혹은 장로)과 집사의 자격에 관한 바울의 지시는 음주 및 금주에 관해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감독은 "자신을 술에 내주지 말아야 하며"(딤전3:3) 집사는 "자신을 많은 술에 내주지 말아야 합니다"(딤전3:8).  감독: 자신을 술에 내주지 말아야 하며, Not given to wine 집사: 자신을 많은 술에 내주지 말아야 하며, Not given to much wine 그러면 목사들은 철저히 금주해야 하지만 집사들은 약간의 술을 먹어도 될까요? 딤전3:3절의 ‘자기를 술에 내주지 아니하며’라는 문구는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me paroinos)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포도주 옆에 가지 아니함 혹은 술자리에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Vine, 1966, p. 146; Robertson, 1934, p. 613).  이 문구는 목사들에게 금주를 명령하고 있으며 심지어 술을 먹는 사람과 함께 어울리거나 술을 먹는 장소에 가지도 말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사들에게 금주를 요구하는 것은 같은 요구 목록에 사용된 다른 용어들과 일치합니다. 1. 네팔리온(nepalion, 딤전3:2):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원래 술 취하지 않은 상태를 뜻함)과 “포도주를 절제하는 것”(Perschbacher, 1990, p. 284) 2. 소프로나(sophrona, 딛1:8): “맑은 정신을 갖는 것”(Perschbacher, p. 400), “정신 상태가 맑은 것”(Moulton and Milligan, 1930, p. 622), “자제하는 것”(Arndt and Gingrich, 1957, p.810).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역시 술 취하지 않는 데서 생깁니다. 목사들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술을 삼가야 하며 그것을 사용하는 장소에 가지도 말고 술 마시는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8절에서 이 점에 대해 집사의 자격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된 네 단어, 즉 ‘me oino pollo prosechontas’는 문자 그대로 "아니다, 술(포도주), 많은, 사로잡히다"로 번역됩니다(참조, Perschbacher, p. 352; Spain, 1970, p. 64).  여기 사용된 “많은”(much)이라는 말은 집사들이 적당한 양의 포도주를 마셔도 좋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성경의 언어 사용과 그것의 의미를 보여 주는 사례들을 몇 개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전도서 7장 17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지나치게 사악하게 되지도 말고 어리석게 되지도 말라. 네가 어찌하여 네 때가 오기도 전에 죽으려 하느냐? 솔로몬은 "지나치게 사악한 자가 되지 말라."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으면 적당히 사악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 다음 구가 보여 주듯이 지나치게 사악하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4절을 보겠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이 너희가 자기들과 함께 달음질하여 동일하게 과도한 방탕에 이르지 아니함을 이상히 여기며 너희를 비방하나(벧전4:4) 베드로는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과도한 방탕”에 가담하지 않는 이유를 이교도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 이 말을 하면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온건한 방탕에 이르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하였을까요? 사실 이런 구절들의 말은 과도한 방종이나 탐욕에 의한 행동이 적은 양이나 적은 정도면 허용된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으면서도 과도한 방종이나 탐욕이 정죄에 이르는 죄라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따라서 이렇게 표현된 성경 말씀들을 읽으면서, 과도하면 불법인 것이 적당하면 합법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간통 같은 행위를 적당히 행하는 것이 합법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의 간통 행위는 불법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이 구절은 감독과 집사에 대한 자격을 규정한 디모데전서 3장을 문맥에서 잘 읽음으로써 이해될 수 있습니다. 즉 감독의 자격 중 하나인 금주는 동일하게 집사에게도 적용됩니다. 감독의 자격이 나열된 이후에 집사의 자격을 나열하는 3장 8절이 ‘이와 같이’라는 말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많은 술에 내주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고(딤전3:8) 그러므로 ‘자기를 많은 술에 내주지 아니하며’는 ‘자기를 적은 술에는 내주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레10:9에서 모세 율법은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섬길 때에 절대로 술을 먹으면 안 된다고 규정합니다. 너나 너와 함께하는 네 아들들이 회중의 성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이것은 너희가 죽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그것은 너희 대대로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레10:9). 그 목적은 10-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0 그러면 너희가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아니한 것,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 사이에 구별을 두고 11 이로써 주가 모세의 손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한 모든 법규들을 그들에게 가르칠 수 있으리라. 즉 하나님의 직무를 맡은 사람이 술에 취하면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감독과 집사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 즉 영적 제사장들이 약간의 술은 먹어도 된다고 기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반즈 주석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여기서 사도가 이 주제를 언급하는 방식은 그가 어떤 의미에서든 교회의 직무 수행자들이 술을 마셔도 좋다는 것을 장려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을 우리에게 공정하게 알려 준다”(1977, p. 144). 다음 글에서 보듯이 전체 성경은 술을 금하고 있습니다.  포도주, 새 포도즙 1 포도주, 새 포도즙 2 집사들 중에는 장로가 되려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어떻게 집사들이 적당하게 술을 마실 수 있었을까요? 그러므로 집사가 적당히 술을 마시는 것은 성경의 규정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A. 집사의 아내들은 술을 먹으면 안 됩니다(딤전3:11).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지 아니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는 술 취하지 말라는 것과 동일한 말입니다. B. 연로한 남자들 역시 술에 취하면 안 됩니다. 연로한 남자들이 맑은 정신을 가지며 신중하고 절제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 면에서 건전하게 하고(딛2:2) ‘맑은 정신을 가지며’는 술 취하지 말라는 것과 동일한 말입니다. C. 연로한 여자들은 술에 취하면 안 됩니다. 연로한 여자들도 그와 같이 거룩함에 합당하게 처신하도록 하며 거짓으로 비난하지 말고 자기를 많은 술에 내주지 말며 선한 것들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게 하라(딛2:3). 딛2:3의 ‘자기를 많은 술에 내주지 말며’ 역시 연로한 여자들이 적당히 술을 마시면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연로한 남자나 연로한 여자 모두 술을 마시지 말고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합니다. 결론 그러므로 이런 형태의 말 즉 ‘자기를 많은 술에 내주지 말며’는 ‘느슨한 형태의 말’(loose form of speech) 사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은 집사들도, 연로한 여자들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참고 문헌 1   참고 문헌 2
2023-08-14 15:05:48 | 관리자
네 위장을 위해 포도즙을 조금 쓰라: 디모데전서 5장 23절   알코올성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옹호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은 디모데전서의 한 구절을 지지 구절로 사용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더 이상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잦은 병을 위해 포도즙을 조금 쓰라.”(딤전5:23)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네 위장을 위해 ‘wine을 조금’ 쓰라고 지시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울이 이 구절에서 사회적 교제를 위해 음주를 해도 좋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더 이상 물만 마시지 말고 - 중동 지방을 여행한 사람이라면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물을 얻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을 알고 있다. - 네 위장과 잦은 병을 위해 포도즙을 조금 쓰라."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바울이 어떤 종류의 wine에 대해 말했든(발효된 포도주든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이든), 그가 디모데에게 조언한 목적이 그의 위장병 때문이라는 것은 지극히 명백합니다. wine에 대한 바울의 조언은 사회적 사교로 인한 기쁨이 아니라 약으로서의 사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종류의 wine을 추천했을까요? 사도는 우리에게 잠23:3, 29-31 등이 말하는 포도주를 적당히 사용하라고 말했을까요?  “너는 포도주가 붉거나 잔에서 제 빛깔을 내거나 스스로 똑바로 움직일 때에 그것을 바라보지 말라.”(잠23:31)  “재난이 누구에게 있느냐? 슬픔이 누구에게 있느냐? 다툼이 누구에게 있느냐? 재잘거림이 누구에게 있느냐? 까닭 없는 상처가 누구에게 있느냐? 붉은 눈이 누구에게 있느냐? 오랫동안 포도주에 머무는 자들에게 있고 섞은 포도주를 구하러 다니는 자들에게 있느니라.”(잠23:29-30) 포도주(술)는 조롱하게 하는 것이며(잠20:1) 뱀같이 물고 독사같이 쏘며 낯선 여자들을 바라보게 하고 비뚤어진 일들을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잠23:32-33). 그는 절대로 포도주를 쓰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wine이라는 단어는 알코올이 든 발효 포도주와 발효되지 않은 포도 주스를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이사야서 65장 8절에 따르면 새 포도즙은 포도송이에서 발견되며 그 안에는 복이 있습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포도송이에서 새 포도즙이 발견되었으므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을 멸하지 말라. 그것 안에 복이 있느니라, 하는 것같이 나도 내 종들을 위해 그와 같이 행하여 그들을 다 멸하지는 아니하리라(사65:8). 새 포도즙은 분명히 발효되지 않은 '갓 짜낸 포도 주스'입니다. 주의 만찬에 사용된 wine을 가리키며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9). 여기서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은 새 포도즙을 말합니다. 누룩으로 인한 발효는 죄의 표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피를 나타내는 주의 만찬의 wine은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이어야 합니다(미국의 다수의 침례교회들은 주의 만찬에서 포도주가 아니라 포도 주스를 사용함).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의 위장을 위해 wine, 즉 포도즙을 조금 사용하라고 권면합니다. 발효되지 않은 포도 주스에는 몸에 좋은 특성이 있습니다. 참으로 갓 짜낸 새 포도즙에는 복이 있습니다. 성경은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서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조언은 분명히 '정신을 차리라'(be sober)고 말하는데 여기에 사용된 ‘sober’라는 말은 술 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당신이 술 취해서 빈틈을 보이고 제정신이 아닐 때 사탄은 당신을 유혹하고 속일 수 있습니다. 최신 연구는 포도주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동일한 혜택을 포도 주스에서도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보라색 포도 주스는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플라보노이드라고 불리는 동일한 강력한 질병 퇴치 항산화제를 함유하고 있어서 심장병 예방에 도움을 줍니다. 포도 주스의 플라보노이드는 포도주의 플라보노이드와 마찬가지로 소위 나쁜 콜레스테롤 LDL 또는 동맥벽에 플라크 형성을 유발하는 저밀도 지단백질의 산화를 방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포도주에서 발견되는 알코올이 실제로 사람에게 해롭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위스콘신 대학교 연구원인 폴츠 박사(John Folts, Ph.D)는 "포도 주스를 사용하면 알코올에 취할 염려 없이 충분히 마실 수 있어서 이런 혜택들을 누릴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알코올이 든 포도주는 포도 주스처럼 혈관 내막의 세포 기능을 개선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알코올은 실제로 혈관 조직에 손상을 줄 수 있는 활성 산소, 불안정한 산소 분자를 생성하여 적포도주 항산화제가 제공할 수 있는 이점을 약화시킵니다. '포도 주스'(grape juice)라는 단어는 1896년 웹스터 사전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고대 문헌에서 와인은 발효된 포도주와 발효되지 않은 포도 주스의 이중 의미를 가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wine이라고 불렀던 달콤한 포도 음료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것은 보통의 포도주처럼 취하게 만들지 않으므로 포도주의 효과가 없다.” 카토(Marcus Cato)는 "아직도 포도에 매달려 있는 와인(즉 포도즙)"에 대해 묘사합니다. wine은 발효되거나 발효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본문에서 히브리어 야인 또는 그리스어 오이노스의 의미를 항상 명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wine'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발효된 포도주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습니다. 신중한 성경 연구생으로서 우리는 문맥을 잘 보고 그것이 포도주인지 포도즙인지 바르게 판단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다만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함이지만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술(포도주)을 사용하면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과 정반대로 우리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종종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분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이 절도 있는 알코올 사용을 지지한다는 일반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금주의 표준을 세우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포도주(술) 대신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의를 구하고 아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술(포도주) 취하지 말라. 그것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할지니라.”(엡5:19) “그러나 모든 것의 끝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벧전 4:7) 여기서도 ‘정신을 차리고’(be sober)는 술 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 본 글의 출처 Wine For Thy Stomach's Sake 와인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성경의 와인
2023-08-14 11:26:33 | 관리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사도행전 2장 38절 등에서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가?    결코 아니다! 신약 성경의 전체 주제는 사람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2:8-9).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도다(롬5:1). 그런데 성경에는 마치 행위(특별히 물 침례나 세례)가 있어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구절이 몇 군데 있습니다. 1. 마가복음 16장 16절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그냥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믿는 것과 구원 사이에 침례를 받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물 침례가 되겠지요.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걸려 넘어져서 앞의 ‘믿고’를 읽지 않거나 신경을 쓰지 않고는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이 구절의 뒤에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침례를 받고 안 받고’가 후반부에는 빠져 있습니다. 분명히 마가복음 16장 16절에는 물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믿고”가 들어 있습니다.    이 구절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믿음, ② 침례, ③ 구원 성경 전체와 이곳의 요점은 ① 믿음, 이 하나가 ② 침례와 ③ 구원의 근거이지 ① 믿음과 ② 침례, 이 두 개가 ③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이후에 침례를 받는 것과 구원이 뒤따라옵니다. 이런 구절을 접할 때 우리는 통합적으로 성경을 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당연히 구원을 받고 구원에 대한 증언으로 물 침례도 받을 것입니다. 한편 이것은 마태복음 28장 19-20절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민족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물 침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사람이 물 침례 받으면 구원을 받을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가르침을 받아 믿음을 갖게 되어 구원받은 사람들만 침례를 받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마16:16, 마28:19-20에 함축되어 들어 있습니다. 2. 사도행전 22장 16절 바울과 관련된 구절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나니야의 말입니다. 이제 네가 왜 주저하느냐? 주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 침례를 받고 네 죄들을 씻어 버리라, 하더라(행22:16). 여기도 뒷부분만 보면 침례를 받아 죄들을 씻는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라는 주요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부르면 그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믿음과 회개가 다 들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이 구절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② 침례, ③ 죄들의 사면 성경 전체와 이곳의 요점은 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이 하나가 ② 침례와 ③ 죄들의 사면의 근거이지 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② 침례, 이 두 개가 ③ 죄들의 사면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이후에 침례와 죄들의 사면이 있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침례를 받는 것 이 두 가지를 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이런 구절들을 대하면서 신약 성경의 구원관이라는 차원에서 전체 문맥에 맞게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3. 사도행전 2장 38절 이와 관련해서 사도행전 2장 3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Then Peter said unto them, Repent, and be baptized every one of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for the remission of sins, and ye sha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Ghost. 여기도 자세히 보지 않고 대충 보면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침례교회의 여러 선한 목사님들 중 어떤 분들은 왜 이렇게 번역해서 물 침례를 통해 구원받는 것처럼 만들었느냐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여기도 세 가지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이 구절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회개, ② 침례, ③ 죄들의 사면 실제로 그리스어 구조를 보면 “회개하라”가 주동사로 되어 있고 “침례를 받아"라는 보조 동사로 되어 있으므로 죄들의 사면이 “회개하라”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두 구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① 회개(물론 믿음이 동반된), 이 하나가 ② 침례와 ③ 죄들의 사면의 근거이지 ① 회개와 ② 침례, 이 두 개가 ③ 죄들의 사면의 근거가 아닙니다. 즉 회개하고 나서 그 뒤에 침례와 죄들의 사면이 뒤따라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회개 + 물 침례’가 죄들의 사면의 근거가 아닙니다. 이런 구절들을 대하면서 신약 성경의 구원관이라는 차원에서 전체 문맥에 맞게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 행2:38을 오역이라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죄들의 사면으로 인해(죄들의 사면 때문에)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얼핏 보면 이것이 침례교 교리에 맞는 것 같지만 그리스 말이나 영어의 구조와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for the remission of sins’라는 구는 신약 성경에 총 5회 나오며 동일한 그리스어 ‘에이스’(eis)가 ‘for’로 번역된 4구절, 즉 마26:28; 막1:4; 눅3:3; 행2:38을 보면 여기의 ‘for’가 모든 곳에서 동일하게 ‘위하여’의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어와 원어를 무시하면서 침례교 교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입니다. 대개 피터 럭크만과 그의 추종자들(대개는 킹제임스 성경의 이중 영감을 믿는 사람들)이 ‘죄들의 사면으로 인해’라고 번역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그런 식으로 번역하려면 다음처럼 해야 더 정직한 것입니다. 죄들의 사면으로 인해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러나 이렇게 하면 구원 교리가 깨지므로 안 됩니다.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죄들의 사면이 있다고 하면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죄들의 사면으로 인하여'로 하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죄들의 사면으로 인하여'로 하려고 예수님을 슬쩍 집어넣어 해석합니다.   그러나 38절에는 '너희 각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므로 여기에 예수님을 넣으면 안 됩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즉 ① 회개, ② 침례, ③ 죄들의 사면, 이 세 가지는 모두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① 회개, ② 침례만 개개인에게 해당되고 ③ 죄들의 사면은 예수님이 하신 것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들을 대할 때 가장 좋은 선택지는 그리스어, 영어 등에 있는 것처럼, 지금 흠정역 마제스티 번역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번역하고 이런 구절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을 가지고 물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누가 주장하면 잘 설명해 주고 그래도 믿지 않으면 그런 분에게서 조용히 물러나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오해될 수 있는 성경의 증거 세 가지를 보여 주어도 안 믿기로 작정한다면 그 이상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특정 교리나 교파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문맥에 벗어나게 번역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알면서도 그리하면 그것에 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대적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노라(고후13:9). 샬롬 패스터
2023-08-12 13:44:22 |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늘은 영어와 원어의 차이 그리고 이로 인한 단수 복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며칠 전에 외국에 사시는 한 분이 디도서 1장 1절 번역에 대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진리를 인정함에 따라   Paul, a servant of God, and an apostle of Jesus Christ, according to the faith of God's elect, and the acknowledging of the truth which is after godliness;   질문의 핵심은 the faith of God's elect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습니다.   God’s elect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단수)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복수)이냐?   이분은 James Knox 목사님의 설교를 듣곤 하며 최근에는 그분이 소개한 다른 미국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이분은 the faith of God's elect의 elect가 단수이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하면서 그분의 설교가 맞는 것 같다고 하며 질문하였습니다.   즉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갈2:20과 매칭이 되게).   사실 영어로는 elect라는 단어가 단수인지 복수인지 구분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 공인 본문을 사용하는 슈퍼바이블에 가서 원어 분해를 보았습니다.   elect: 1588  ejklektov"   eklektos  {ek-lek-tos'} 1586에서 유래;‘뽑힌’, (함축적으로)‘마음에 드는’, 택함을 받은, 선출된 <막 13:20>형. chosen; 남성 복수   즉 elect라는 말은 남성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택하신 자들이 되어야 맞습니다.   이런 데가 히브리서 12장 23절에도 있습니다.   총회와 하늘에 기록된 처음 난 자들의 교회와 모든 것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   To the general assembly and church of the firstborn, which are written in heaven, and to God the Judge of all, and to the spirits of just men made perfect,   저 역시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하는 어떤 목사님이 이 구절의 the firstborn을 처음난 자들(복수)이 아니라 처음난 자(단수)로 보아야 하며 처음난 자 혹은 처음난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역시 슈퍼바이블의 공인 본문을 가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firsrborn: 4416  prwtotovko"   prototokos  {pro-tot-ok'-os} 4413과 5088의 대체어에서 유래; 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먼저 태어남’(일반적으로 먕사로서), 처음난 <롬 8:29; 골 1:15>형. firstborn; 남성 복수   이 단어 역시 남성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2011년 400주년 기념판과 2021년 마제스티 에디션은 단복수에 관한 이런 점에서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영어로 볼 때 단수 복수가 애매모호한 단어들을 모두 원어로 가서 확인하여 원어가 단수면 단수, 복수면 복수로 표기하였습니다.   영어는 원어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단수 복수를 구분하기 어렵다고 해도 영어 번역은 완벽합니다. 그렇게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나 미국 독자들이 영어만 가지고 단복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강해를 하면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을 가지고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2011년 400주년 기념판: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Forasmuch then as the children are partakers of flesh and blood, he also himself likewise took part of the same; that through death he might destroy him that had the power of death, that is, the devil;   여기에는 살과 피가 나옵니다. 그런데 영어 중간에 the same이 나옵니다. 이것을 400주년 기념판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단수로 번역하였습니다.      원어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he same: 846  aujtov"   autos {ow-tos'} 불변사 au<아무>【아마 일정한 ‘방향없는’바람의 개념으로  109의 어간과 유사】(‘뒤편’)에서 유래;(재귀대명사)‘자신’, 3인칭(홀로 혹은 1438과 합성어로)으로 사용, 역시 기타 인칭(본래적 의미로는 인칭대명사와 함께)으로 사용, 848과 비교 <마 3:11;눅 3:23;행 10:26>대. self, him, it, her, the same; a)강조적 용법  ;자신(self) b)인칭대명사의 3인칭 ;그, 그녀, 그것c)한정적인 용법 ;동일한, 바로 그 (the same), 중성 복수   즉 여기의 the same은 중성 복수로서 살과 피 두 개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복수로 표현하였습니다.   마제스티 에디션: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친히 같은 것들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베드로전서 3장 1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400주년: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단수)로서 불의한 자(단수)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려 하심이라.   For Christ also hath once suffered for sins, the just for the unjust, that he might bring us to God, being put to death in the flesh, but quickened by the Spirit:   영어로만 보면 the just, the unjust가 단수인지 복수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원어로는 분명하게 전자는 남성 단수, 후자는 남성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마제스티: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해 한 번 고난받으사 의로운 자(단수)로서 불의한 자들(복수)을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성령에 의해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가려 하심이라.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보다는 ‘성령에 의해’가 더 뜻이 명확해서 그렇게 고쳤습니다.   이번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이런 식으로 the에 형용사가 붙어 있는 명사들을(시편 잠언 등 시가서에 매우 많음, the wise, the rich, the poor, the wicked 등등) 일일이 확인하여 가능한 한 단수와 복수를 구분해서 표현하였습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보기에 영어로 단수와 복수 구분이 어려워도 영어 번역은 완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어만 보고 번역하거나 설교하다 보면 단수와 복수로 인한 혼동이 생길 수 있으므로 원어의 도움을 받아야 이런 부분을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가능하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제스티 에디션은 가능한 한 단수 복수를 명확하게 표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가 풍성히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패스터     
2023-08-05 17:30:26 | 관리자
불콩들로 만든 죽과 팥죽: 어이없는 표준킹제임스의 난센스 불콩들로 만든 죽이라?   성경에는 lentiles라는 말이 총 4회 나옵니다. 창25:34, 삼하17:28, 삼하23:11, 겔4:9 창25:34 Then Jacob gave Esau bread and pottage of lentiles; and he did eat and drink, and rose up, and went his way: thus Esau despised his birthright. 표준: 그때 야곱이 빵과 불콩들로 만든 죽을 에서에게 주었더니, 그가 먹고 마신 다음에 일어나서 자기 길을 갔더라. 이와 같이 에서가 자기 장자권을 멸시하였더라. 혹시 여러분 가운데 불콩들로 만든 죽이 무엇인지 아는 분 있습니까? 흠정역: 이에 야곱이 빵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그가 먹고 마신 뒤 일어나 자기 길로 갔더라. 이같이 에서는 자기의 장자권을 업신여겼더라.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려면 개역이나 흠정역, 한킹처럼 한국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말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창25:30이 말해 줍니다.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지쳤으니 원하건대 바로 그 붉은 죽을 내가 먹게 하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 하였더라. And Esau said to Jacob, Feed me, I pray thee, with that same red pottage; for I am faint: therefore was his name called Edom. 창세기 2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에돔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배경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즉 에돔 혹은 에서라는 이름이 나오면 붉은색이 연상되어야 합니다. 창25:25    처음에 나온 자(에서)는 붉고 온몸이 털옷 같아서 그들이 그의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자, 불콩들로 만든 죽을 통해 붉은색을 연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말 팥죽은 당연히 붉은색을 연상시킵니다. 표킹 번역자는 창세기 25장 34절에 나오는 lentiles는 콩이고 팥은 콩이 아니라는 뉘앙스로 설명합니다. 그럴까요? 사전으로 팥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팥: 콩과의 한해살이풀.  성경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lentiles는 콩과 식물이고 붉은색을 띠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콩이냐, 팥이냐가 주제가 아니라 붉은 색의 콩과 식물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팥입니다. 영어 사전에 가서 lentiles를 살펴보면 렌틸콩 혹은 렌즈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표킹 번역자는 이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렌틸콩을 한 번만이라도 검색해 보면 렌틸콩, 즉 렌즈콩은 색깔이 붉은 것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렌틸콩: lentils 렌틸콩은 색상에 따라 크게 노란색, 붉은색, 초록색, 갈색, 검은색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생산지에 따라서 얼룩이나 반점이 생기는 등 조금씩 다른 색깔의 품종이 전해지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에서 널리 심고 있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서반구에서는 거의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표킹 번역자는 대다수 한국 사람들이 알지도 듣지도 못하는 불콩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콩의 하나로 알려진 불콩이 붉은색을 띤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 불콩이라는 말을 여기서 처음 들어 봤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사전에 가서 팥에 해당하는 말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팥: 스트롱 5742 아다쉬 `adash {aw-dawsh'} 창 25:34 불확실한 뜻을 가진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렌즈) 콩’:렌즈콩, 팥   원문은 ‘불확실한 뜻을 가진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이 말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불확실한 뜻을 가진 어근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Old Latin Vulgate에는 이것이 lentis라고 옮겨져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보고 있는 수정체, 즉 '눈, 렌즈'에서 나온 어원입니다. 왜 이렇게 되어 있을까요? 콩이 렌즈처럼 동그랗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구 라틴 벌게이트'에서 보존되어 온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lentis라는 어근을 기초로 lentiles라는 단어를 넣게 된 것입니다. 즉 렌틸콩이라서 넣은 것이 아니라 어근을 따라 영문으로 옮겨 놓은 것을, 표킹 번역자는 lentiles라는 영문만 보고 지금 시대의 그냥 불콩(렌틸콩)이라고 번역을 했으니 이 얼마나 황당합니까? 창세기 25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의 색이 붉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콩 종류로 만든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의 팥이 여기에 해당하는 가장 적합한 말입니다.   여기서 표킹 번역자의 난센스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팥들로 만든 죽, 혹은 팥들로 만든 빙수라고 말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다 팥죽, 팥빙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팥죽, 팥빙수에는 팥이 하나만 들어 있을까요? 그래서 굳이 불콩을 쓰려고 하면 불콩죽이라고 해야지 ‘불콩들로 만든 죽’이라고 하면 이미 해설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굳이 번역자는 불콩들로 만든 죽이라고 했을까요?   영 킹제임스 성경이 lentiles라고 복수로 했기 때문입니다. 표킹 번역자는 킹제임스 성경의 이중 영감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어 그대로 복수로 해야 한다고 저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중간에 있는 만든은 영어 어디에 있습니까? 당연히 없지요. 번역자가 그냥 슬그머니 넣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난센스라고 부릅니다.  헛된 말장난으로 성도들을 유혹하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로마서 16장 17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 18 그런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 배를 섬기며 좋은 말과 빼어난 말솜씨로 단순한 자들의 마음을 속이느니라.
2023-07-19 11:58:51 | 관리자
여인은 옥합을 산산조각 나게 깨뜨렸을까? 표준킹제임스의 어처구니없는 추측 오류 마가복음 14장 3절에는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기사가 있습니다. And being in Bethany in the house of Simon the leper, as he sat at meat, there came a woman having an alabaster box of ointment of spikenard very precious; and she brake the box, and poured it on his head. 그분께서 베다니에 계시면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음식 앞에 앉으셨을 때 한 여자가 매우 귀한 나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그분의 머리에 부으매 표준킹제임스는 여기의 alabaster box를 설화석고 함으로 번역해야만 하는데 다른 성경들이 이것을 옥합으로 오역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옥합은 금강석처럼 단단하여 깰 수가 없고 석고처럼 단단하지 않아야만 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 귀중한 향유를 담는 용기는 그리스어 알라바스트론(alabastron)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이집트의 테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 등지에서 생산되는 반투명 고급 대리석 알라바스터(alabaster)로 만든 호리병 모양의 고급 향수병이나 화장품 병 혹은 꽃병 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알라바스터는 푸석푸석한 석고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옥합이라고 할 때 옥은 경옥 즉 딱딱한 옥이 있고 연한 옥 즉 연옥이 있습니다. 이런 연옥은 석회석이 굳어서 만들어지는 대리석 계통의 광물이고 이런 것을 다듬으면 액체를 담을 수 있는 용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영어 KJV의 alabaster는 표킹 번역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깁스 할 때 사용하는 푸석푸석한 석고가 아니라 액체를 담을 수 있는 단단한 용기, 즉 연옥이나 부드러운 대리석 등으로 만들어진 용기입니다. 그런데 왜 표킹 번역자는 그 용기가 딱딱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마가복음 14장 3절에서 그 여인이 옥합을 깼다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 맞추기 위해 그 용기가 깁스처럼 생긴 석고여야만 여인이 깰 수 있지 대리석 용기를 어떻게 여인이 깰 수 있느냐는 것이 번역자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표킹 번역자는 상자를 깨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의 초점은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를 위해 그 여인이 그분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박스를 깨다(break the box)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표킹 번역자의 생각대로 여인이 석고 통을 부셨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석고 통이 산산조각 나면서 그 안의 향유가 다 바닥으로 쏟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인은 황급히 걸레를 달라고 해서 바닥에 쏟아진 기름의 일부를 모읍니다. 그러고 나서는 먼지와 뒤범벅이 된(유대인들은 신발을 신고 다님) 그 지저분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여러분, 마가복음 기사가 이런 것을 연상하게 합니까? 이것은 아수라장이 아닙니까?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여인이 옥합을 깨고 향유를 손에 담아서 그분의 머리에 붓고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지는 것이 연상됩니까? 자, 그러면 표킹 번역자의 착각은 무엇일까요? 많은 목사들이 그 여인이 옥합이든, 석고 통이든 들어서 바닥으로 내던져 산산조각 낸 것으로 이해하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 옥합의 나드 향유는 가격이 1년 치 봉급 정도가 되는 매우 비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향유가 새어 나가면(액체로든 기체로든) 안 되므로 이런 향유 병은 봉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만 향유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와인 병도 코르크 등으로 봉인되어 있듯이). 그러므로 상자를 깨다(break the box)는 상자를 들어서 바닥에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상자의 봉인을 떼는 것을 말합니다. 그 여인은 옥합의 봉인을 떼고 기름의 일부를 손에 담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가장 유명한 주석가 중 하나인 앨버트 반즈와 아담 클라크도 그렇게 말합니다.  반즈 여인이 박스를 부수었다: 이것은 그녀가 상자의 "봉인"을 부수어 부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 향유 상자는 종종 밀봉되거나 왁스로 고정되어 향수가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한다. 깨는 것이 불필요하고 또 초유의 비상사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상자 자체를 부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깨진 상자나 깨진 병에서 그녀는 그분의 머리에 쉽게 향유를 부을 수 없었을 것이다. [And she brake the box] This may mean no more than that she broke the "seal" of the box, so that it could be poured out. Boxes of perfumes are often sealed or made fast with wax, to prevent the perfume from escaping. It was not likely that she would break the box itself when it was unnecessary, and when the unguent, being liquid, would have been wasted; nor from a broken box or vial could she easily have "poured it" on his head. (from Barnes' Notes, Electronic Database Copyright ?1997, 2003, 2005, 2006 by Biblesoft, Inc. All rights reserved.) 클라크 오히려 그녀는 봉인을 뜯었다. - 이것은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번역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그 자체로 매우 귀중한 상자가 내용물을 꺼내기 위해 깨질 가능성은 없다. 2. 깨진 조각이 우리 주님의 머리와 여인의 손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일은 매우 부적절했을 것이다(파편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것을 고려하면). 3. 부서진 조각들에서 기름을 효과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4. 향수를 담고 있는 병을 밀랍으로 밀봉하는 것이 동방 국가들의 관습이었다. 그래서 그런 상자나 병의 내용물에 접근하기 위해 봉인을 뜯는 것 이상의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바로 그 일을 이 여자가 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봉인을 깼을 때 그녀는 액체 연고를 자기 손에 쏟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병이나 상자를 깨뜨렸다면 그녀가 그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She brake the box] Rather, she broke the seal.-This is the best translation I can give of the place; and I give it for these reasons: 1. That it is not likely that a box exceedingly precious in itself should be broken to get out its contents. 2. That the broken pieces would be very inconvenient if not injurious to the head of our Lord, and to the hands of the woman. 3. That it would not be easy effectually to separate the oil from the broken pieces. And, 4. That it was a custom in the eastern countries to seal the bottles with wax that held the perfumes; so that to come at their contents no more was necessary than to break the seal, which this woman appears to have done; and when the seal was thus broken, she had no more to do than to pour out the liquid ointment, which she could not have done had she broken the bottle.  (from Adam Clarke's Commentary, Electronic Database. Copyright ?1996, 2003, 2005, 2006 by Biblesoft, Inc. All rights reserved.) 사람을 속이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여자가 에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값비싼 향유를 그분의 머리에 부어 최상의 일을 했다는 것이고 우리 주님은 이것을 칭찬하십니다.   이런 핵심은 내던져 버리고 옥합을 바닥에 던져서 산산조각 깨는 것에 주안점을 두면 주객이 전도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치한 논쟁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딤후2:15-17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너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16 그러나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을 피하라. 그것들은 커져서 더욱더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는 것에 이르리라. 17 그들의 말은 궤양처럼 파먹을 터인데 그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2023-07-18 12:51:16 | 관리자
고린도전서 15장 29절은 몰몬교의 대리 침례(Proxy baptism)가 아니다 안녕하세요?   어떤 사람들이 고전15:29를 이용하여 흠정역 성경이 몰몬 교리를 가르친다는 거짓 주장을 편다고 하기에 간략히 글을 올립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9절은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들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고전15:29 Else what shall they do which are baptized for the dead, if the dead rise not at all? why are they then baptized for the dead? 흠정역: 그렇지 아니하여 만일 죽은 자들이 결코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죽은 자들을 대체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그렇다면 그들이 무슨 이유로 죽은 자들을 대체하여 침례를 받느냐?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 당시에 이교도들이 이미 죽은 자들을 대신해서 침례를 받는 풍습(proxy baptism)이 있었고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도 이런 풍습을 행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죽은 자들을 대체하여’라고 번역하지 않고 ‘죽은 자들을 위하여’ 혹은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라고 번역합니다.  대체와 대신도 모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는 흠정역이 몰몬 교리를 지지한다고 어리석은 주장을 폅니다.    이 글을 읽으면 대체하다가 얼마나 합당한 말인지 알 것입니다. ‘대신하여’ 혹은 ‘위하여’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않아 침례를 안 받았는데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 죽은 자를 위해 대신 침례를 받으면(대리 침례) 구원받을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바울이 이런 이단 교리를 지지하였단 말이 됩니다. 지금 바울이 고전 15장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부활, 그것도 구원받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것인데 바울이 부활 교리를 증명하려고 이런 이교도들의 사상을 인용하고 있을까요? 현재 몰몬 교도들은 이런 이교도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여 지금도 대리 침례(proxy baptism)라는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위키백과  말일 성도 교회(몰몬)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이 대리인 역할을 하며 이미 사망한 동성(남성은 남성대리인,여성은 여성대리인) 사람을 대신하여 침수 세례를 받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침례는 몰몬교 성전에서만 행해지는 교회 의식이며,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침례가 필요하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In the practice of the LDS Church, a living person, acting as proxy, is baptized by immersion on behalf of a deceased person of the same sex. Baptism for the dead is an ordinance of the church, performed only in temples, and is based on the belief that baptism is required for entry into the Kingdom of God. 우리는 결코 이런 것을 믿지 않으며 성경이나 사도 바울도 이런 것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 그런 풍습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 거의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을 대체하여 침례를 받는 것의 의미 자, 그러면 baptism for the dead는 무슨 뜻일까요? 어떤 사람의 주석이나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문맥에 의거하여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앞뒤 문맥을 보면 의미를 알 수 있으므로 30-32절을 보겠습니다. 30 또 우리가 무슨 이유로 매시간 위험 속에 서 있느냐? 31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지고 있는 기쁨 즉 너희로 인한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들의 방식대로 에베소에서 짐승들과 싸웠거든 만일 죽은 자들이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내일 우리가 죽을 터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자. 29-32절 전체는 예수님을 믿다가 순교까지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 그들이 죽기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믿을까요? 몸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9절만 따로 떼어 내어 몰몬 교리를 가르치면 안 됩니다. 29절의 이 말은 흠정역 성경이 말하듯 죽은 자들(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을 대체하여(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침례를 받는 자들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군대에서 순교자가 많이 나와도 그리스도의 군대는 계속해서 구원받은 새  성도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이런 순교의 길을 갈까요? 몸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for는 ‘대신하여’, ‘위하여’가 아니라 ‘대체하여’입니다.  표준킹제임스는 ‘대신하여’, ‘위하여’를 피하기 위해 억지로 ‘인하여’로 번역하였는데 여기의 ‘for’에는 ‘인하여’라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성경을 왜곡하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1. 스코필드 성경의 증언 죽은 자들을 대체하여 침례를 받는 사람들은 이미 죽은 신자들이 비워 둔 물리적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다. 29절의 생각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함에 따라 그들의 자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설 준비가 된 새로운 개종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주석가는 이것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방금 살해당한 동료들을 대체하여 전투에 나서는 병사들의 대열"에 비유합니다(The Works of the Rev. P. Doddridge, Vol. 9, Leeds, 1805, p. 99).  C. I. 스코필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의역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없다면 왜 삶을 위험에 빠뜨리고 이 삶의 혜택을 상실합니까?” (The Scofield Study Bible III, NKJV,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 1,593). Those baptized for the dead are those who are taking the physical place left vacant by believers who have already died. The idea of 1 Corinthians 15:29 is that, as Christians are martyred, their places are continually being filled by new converts, ready to take a stand for Christ. One commentator likens this to “ranks of soldiers that advance to the combat in the room of their companions who have just been slain in their sight” (The Works of the Rev. P. Doddridge, Vol. 9, Leeds, 1805, p. 99). C. I. Scofield paraphrased the verse this way: “Of what value is it for one to trust Christ and be baptized in the ranks left vacant by the believing dead, if there is no resurrection for believers? Why place life in jeopardy and forfeit the benefits of this life, if there is no life after death?” (The Scofield Study Bible III, NKJV,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 1,593). 2. Biblical Illustrator라는 세계 최대 고전 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신학 박사 P. J. Gloag, D.D.)   고린도전서 15장 29절 주석 I. 구절의 연결   이것은 20절과 연결되어 있다. 21-28절은 중간 구절이고 괄호에 해당된다. 바울은 부활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허무함에 대해 말했다(19, 20절). 그런 다음 ‘첫 열매’라는 단어가 시사하듯 부활의 순서에 대해 설명한 후에 그는 자기의 주장을 재개한다. "그렇지 아니하여"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죽은 자들을 대체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이 구절은 앞의 구절들(21-28)과 분리되어 있는 반면에 뒤따르는 구절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30절).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을 믿는 우리의 인내하는 고난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II. 사도의 생각 1. 그의 주요 주장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파생된 것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이다." 따라서 "너희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 가운데 있다"고 증언하면서 "우리가 거짓 증인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증거요 보증이다. 2. 부활이 없다면 죽은 신자들은 멸절되었고(18절) 그들의 기독교는 고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인간 실존의 비참함을 증가시켰을 뿐이다(19절). 그러나 이것은 인정할 수 없는 결과이다(20절). 3. 이와 유사하게 사도는 부활이 없다면 믿는 자들의 모든 시련(고통과 고난)이 헛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관행이 아니라 에피쿠로스의 관행이 더 합리적이다(30-33절). 이제 이 29절 본문은 바로 이것에 대한 논증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을 대체하는 침례는 신자들의 고난과 연결되어야 한다. III. 따라서 29절 본문은 죽은 자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한 침례를 의미한다. 1. 사도는 다른 기독교인들을 계승하는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여 준다. 죽음으로 그들의 행렬(대열)이 줄어들었을 때 다른 사람들(새로운 신자들)이 그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급히 들어왔다.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왜 그들이 그렇게 하겠는가? 왜 그들은 믿음을 위해 이와 같은 고난을 자진하여 감수하는 것인가? 이러한 해석은 다음과 잘 일치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고귀한 생각을 주는 것인가? 새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전에 침례 받은 자들이 싸우다가 죽자 그들의 대열의 뚫린 틈을 메워 가며  "대열을 채우고 동료들이 쓰러진 전투에서 싸운다. 이것은 박해의 시대에 듣던 말 즉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을 중명해 준다.  2. 이 해석은 우리에게 침례의 본질에 대한 놀라운 견해를 제공한다. 그것은 침례 받은 산 자들(새로 믿은 자들)과 침례 받은 뒤 죽은 자들(순교한 자들)을 연합시킨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큰 군대에 입대하는 의식이다. 그것은 교회의 영속성을 보장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지니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계승을 교회에 제공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봉사에 대한 엄숙한 헌신이며, 우리의 선조들이 수행했던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하며,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보상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게 한다.   얼마나 대단한 말인가?   헛된 말로 속이는 자들을 조심하고 피해야 한다.   로마서 17장 17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 18 그런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 배를 섬기며 좋은 말과 빼어난 말솜씨로 단순한 자들의 마음을 속이느니라. Baptism for the dead: -- I. THE CONNECTION OF THE PASSAGE. It is connected with ver. 20, the intervening verses being a parenthesis. Paul has been speaking of the vanity of the Christian life apart from the resurrection (vers. 19, 20), and then after a digression on the order of the resurrection, suggested by the word "first-fruits," he resumes his argument. "Else," if Christ be not risen, "what shall they do that are baptized for the dead?" But whilst the passage is thus disconnected from what precedes, it is directly connected with what follows (ver. 30). If Christ be not risen, what is the use of our enduring sufferings for our faith in Him? II. THE APOSTLE'S TRAIN OF THOUGHT. 1. His chief argument is that derived from the resurrection of Christ. "If there be no resurrection of the dead, then is not Christ risen," consequently "your faith is vain, ye are yet in your sins," and in testifying to it "we are found false witnesses." But we have the most convincing proofs, from numerous and unquestionable witnesses, of Christ's resurrection, which is a proof and pledge of ours. 2. If there be no resurrection, then dead believers are annihilated (ver. 18), and their Christianity, as it is inseparably connected with suffering, has augmented the misery of human existence (ver. 19). But this is a consequence that cannot be admitted (ver. 20). 3. And analogous to this the apostle argues that if there be no resurrection, all the trials of believers are useless; not the practice of the Christians, but that of the Epicureans, is reasonable (vers. 30-33). Now it is evident that it is to this argument that the text belongs; therefore, baptism for the dead must be connected with the sufferings of believers. III. The text therefore means BAPTISM TO FILL THE PLACE OF THE DEAD.   1. The apostle represents one set of Christians succeeding another: when their ranks were thinned by death others rushed in to supply their place. But why so if there be no resurrection? Why do they voluntarily submit to like suffering for their faith? Such an interpretation agrees well with what follows. And what a noble idea does this give of Christians. They fill up the ranks and fight in the battle in which their companions have fallen. And what a touching scene it must have been in times of persecution to see the baptized, like soldiers, occupying the breach which death had made in their ranks, thus verifying the observation that "the blood of the martyrs is the seed of the Church." 2. This interpretation gives us a striking view of the nature of baptism. It unites the baptized living with the baptized dead; it is the ceremony for our enrolment into the great army of the living God; it ensures the perpetuity of the Church, and supplies it with a constant succession of those who bear the name of Jesus; it is a solemn consecration to the service of Christ, and imposes upon us the duties which our predecessors performed, and enables us to look forward to those rewards which they now enjoy. P.J. Glagg, D.D. (from The Biblical Illustrator Copyright ?2002, 2003, 2006 Ages Software, Inc. and Biblesoft, Inc.)
2023-07-18 11:30:39 | 관리자
host를 천체, 군사들, 만군으로 마음대로 번역한 표준킹제임스의 표준 오류 또 하나    창세기 1장이 끝난 뒤 2장 1절에는 처음 6일 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창2:1 Thus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host of them. 흠정역: 이같이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니라. 옥스퍼드 사전에 가서 host를 보면 이 단어의 뜻이 군대임을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고 히브리어 사전으로 보면 스트롱 번호 6635 'tsaba'는 전쟁을 위해 조직된 무리 즉 근대를 뜻합니다. 출12:41을 보면 host가 군대임을 모든 역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흠정역: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때에 바로 그날 주의 모든 군대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왔으므로 And it came to pass at the end of the four hundred and thirty years, even the selfsame day it came to pass, that all the hosts of the LORD went out from the land of Egypt. 개역: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표킹:주의 모든 군사들 한킹: 주의 모든 군대 결론 스트롱 번호 6635의 host 혹은 hosts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다 군대들을 뜻합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런데 흠정역을 제외한 다른 성경들은 창2:1을 다 다른 식으로 번역합니다.   흠정역: 이같이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니라. 개역: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한킹: 그리하여 하늘들과 땅이 완성되었고 하늘들의 군상들도 그러하니라. 표킹: 이와 같이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천체가 완성되었더라. 창2:1의 ‘all the host of them’의 ‘그것들’(them)은 하늘들과 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host는 천체들이나 군상들이 아니고 하늘들과 땅에 창조된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말합니다.    성경은 그것들을 군대라고 부릅니다. 삼상1:3에 처음 등장하는 LORD of hosts는 ‘군대들의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사바오쓰’(Jehovah Sabaoth)는 ‘군대들의 주’(The LORD of hosts)입니다. 기존 개역성경에서는 이를 ‘만군의 여호와’로 표현하였는데 사실 만군이 무엇이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이 말의 ‘군대들’에는 하늘의 군대인 천사들과 일월성신 군대, 즉 천체들과 땅의 군대들과 심지어 메뚜기, 까마귀, 메추라기, 자벌레 같은 창조물 군대도 모두 포함됩니다(창2:1).    주님께서는 이 모든 군대를 치리하며 조절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신약과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군대의 대장이십니다(삼하6:2; 시24:10; 롬9:29; 약5:4).   Gill 주석 and all the host them, of the heavens and the earth(그것들의 모든 군대는 하늘들과 땅의 모든 군대를 말한다.); the host of heavens are the sun, moon, and stars(하나님의 군대에는 해, 달, 별들 등이 있다), often so called in Scripture, and also the angels; see Luke 2:13 wherefore this may be considered as a proof of their creation within the above space of time, probably on the first day, though the Jews commonly say on the second; for if all the host of heaven were made at this time, and angels are at least a part of that host, then they must be then made, or otherwise all the host of heaven were not then and there made, as here affirmed: and the host of the earth, or terraqueous globe(땅의 군대에는 식물, 채소, 나무, 날짐승, 물고기, 짐승, 사람이 있다), are the plants, herbs, and trees, the fowls, fishes, animals, and man; and these are like hosts or armies, very numerous, and at the command of God, and are marshalled and kept in order by him; even some of the smallest of creatures are his army, which are at his beck, and he can make use of to the annoyance of others, as particularly the locusts are called, Joel 2:11. https://biblehub.com/commentaries/genesis/2-1.htm 대다수 주석가들도 비슷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표킹처럼 host를 천체, 군사들, 만군 등으로 번역하면 안 됩니다. 특히 창2:1의 그것들은 땅과 하늘들을 가리키므로 그것들의 천체라고 하면 땅도 천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됩니다.   또는 군상으로 해도 안 됩니다. 군상:  떼를 지어 모여 있는 많은 사람.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려면 스트롱 번호 6635에서 나온 host를 처음부터 끝끼지 군대로 번역해야 합니다.   샬롬   패스터  
2023-07-17 15:34:3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