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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약6508개
  솔로몬과 여로보암 시대의 대언자, 역사 기록자(왕상11:29; 대하9:29). 그는 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솔로몬에게 말을 전하고(왕상6:11) 또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에게 말을 전한 것으로 생각된다(왕상11:11). 그는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이 유다에서 떨어져나갈 것과 그의 집이 세워질 것과 또 그가 몰락할 것에 대해 예언을 했다(왕상14:1-14).    
2009-07-18 12:38:17 | 관리자
  아히둡의 아들. 그는 사울의 통치 때 대제사장이었으며(삼상14:3) 사울이 죽인 아히멜렉 즉 그의 뒤를 이은 대제사장의 형제였을 것이다(삼상22:9).    
2009-07-18 12:37:49 | 관리자
  I. 아히둡의 아들이며 아히야의 형제. 그는 아히야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 직분을 승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사람들은 이 이름들이 동일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가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때에 성막은 아히멜렉이 거하던 놉에 있었으며 거기서 여러 제사장이 섬기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사울로부터 피신한 다윗에게 보여 주는 빵과 골리앗의 칼을 주었고 에돔 사람 도엑이 이 사실을 알리자 사울은 그것이 반역 행위라고 단정 짓고 도엑으로 하여금 아히멜렉과 그의 제사장 85명을 살해하게 하였다(삼상22:1-23). 이 범죄는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왕좌와 호의를 빼앗아 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사악한 것이었다. II. 아비멜렉이라고도 불린 인물(대상18:16). 아마도 그는 아비아달이었을 것이다(대상24:3, 6, 31). 아비아달 참조.    
2009-07-18 12:37:19 | 관리자
  사독의 아들. 그는 솔로몬 시대에 대제사장이 되었고 다윗의 통치 때에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과 그의 조언자들의 계략들을 드러내었으며(삼하17:15-21) 압살롬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다윗에게 전달했다(삼하18:1-33).    
2009-07-18 12:36:40 | 관리자
  I. 엘리의 손자. 그는 비느하스의 아들이었으며 엘리가 죽자 전쟁에서 죽은 자기 아버지 비느하스를 대신해서 대제사장이 되었다(삼상4:11). II. 아마랴의 아들, 사독의 아버지(삼하8:17; 대상6:8).    
2009-07-18 12:34:23 | 관리자
  길로의 원주민. 그는 원래 다윗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으나 압살롬의 반역 때에 그에게 동조하여 다윗을 괴롭게 만든 원수가 되었다. 그는 압살롬이 자기의 계략을 버리고 후새의 말을 듣자 반역의 끝이 어떨지 미리 내다보고 고향으로 돌아가 목을 매어 죽었다(삼하15:12; 17:1-29; 시55:12-14). 그는 또한 밧세바의 조부인 것으로 보인다(삼하23:34; 비교 삼하11:3).    
2009-07-18 12:33:41 | 관리자
  I. 아히마아스의 딸로서 사울의 아내(삼상14:50). II. 예스르엘 출신 여인으로 다윗의 아내. 그녀는 암논의 어머니였고 시글락에서 아말렉 족속에게 포로로 끌려갔다가 후에 다윗에 의해 구출되어 그와 함께 헤브론에 들어갔다(삼상30:5; 삼하2:2; 3:2).    
2009-07-18 12:33:06 | 관리자
  성전에서 율법 책이 발견되었을 때 요시야 왕이 여대언자 훌다에게 보내어 율법 책의 말씀들에 대하여 여쭈어 보게 한 사람(왕하22:12). 후에 그는 예레미야 대언자의 친구가 되었다(렘26:24; 39:14).    
2009-07-18 12:32:27 | 관리자
  배신한 예루살렘(유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이름(겔23:4, 11). 배신한 사마리아(이스라엘)는 아홀라로 표현되었으며 이 둘은 행음으로 인해 심판받았다(겔23:36-49).    
2009-07-18 12:31:59 | 관리자
  에스겔 대언자가 선택한 두개의 상징적인 이름(겔23:4). 이것들은 유다와 사마리아 왕국을 나타냈으며 이집트에서 나온 두 자매를 뜻했고 아홀라는 사마리아를, 아홀리바는 예루살렘을 상징했다. 이 비유는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2009-07-18 12:31:32 | 관리자
  I. 주전 918년경에 자기 아버지 오므리를 이어 왕이 된 이스라엘의 여섯 번째 왕. 그는 22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의 아내는 두로의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었는데 그녀는 야망이 크고 열정적으로 우상을 숭배했으며 이로 인해 바알과 작은 숲 숭배가 이스라엘에 퍼지게 되었다. 아합은 사마리아에 바알의 집을 세우고 바알의 형상들과 작은 숲을 세웠으며 그 결과 우상숭배와 사악함이 두려울 정도로 만연하게 되었다. 사실 아합은 그 전의 모든 왕보다 주의 분노를 더 일으켰다. 이러한 배도의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3년의 기근과 가뭄으로 그 땅에 저주를 내렸고 갈멜 산에서 하늘에서 불을 보냄으로 바알의 대언자 450명을 죽이셨다. 그 뒤 6년이 지나서 시리아의 벤하닷 왕이 큰 군대와 함께 이스라엘을 침공했으나 크게 참패를 당하였고 1년 뒤에 아합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아합이 그를 살려 주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경고와 섭리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계속해서 죄를 지었으며 무죄한 나봇을 살해한 후에도 죄악을 저지르고 가증한 우상숭배를 계속하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어 그와 그의 씨에게 저주를 선포하셨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낮추자 이러한 심판은 잠시 연기되었다. 그 뒤 그는 유다의 여호사밧과 함께 라못길르앗으로 가서 시리아 사람들로부터 그 도시를 회복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싸움에서 패배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사마리아의 못에서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다(왕상16-22). II. 바빌론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혹한 거짓 대언자. 그는 이 일로 인해 예레미야의 책망을 받았다(렘29:21-22).    
2009-07-18 12:31:05 | 관리자
  I.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왕상22:51; 왕하1:1-18). 그는 자기 아버지와 함께 또 홀로 2년 동안 통치했으며 자기 아버지의 불경건을 따라 바알과 아스다롯에게 경배했는데 이런 것은 다 그의 어머니 이세벨이 이스라엘에 들여온 것이다. 그의 통치 때에 모압 사람들이 반역을 일으켰다. 그는 여호사밧과 함께 홍해에서 사업을 하려 했으나 그의 경건치 못한 행위로 인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자기 집의 다락방 격자창에서 떨어진 뒤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신에게 자기가 회복될 수 있을지 물었으며 이때에 엘리야는 그의 사자들에게 그가 속히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그 뒤 그가 보낸 50명의 부대가 두 번이나 죽은 뒤에 아하시야에게 직접 그 사실을 통고하였다. II. 여호람과 아달랴의 아들인 유다 왕 여호아하스 혹은 아사랴. 그는 주전 881년경에 자기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왕하8:25; 대하21:17; 22:6). 왕위에 오를 때에 그는 22세였으며 예루살렘에서 1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는 자기의 어머니로 인해 아합의 집을 따라 악하게 행하였으며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있다가 예후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2009-07-18 12:30:31 | 관리자
  요담의 아들로 유다의 열두 번째 왕. 그는 20세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통치하였다(왕하16:1-20). 그는 우상숭배와 참 하나님을 경멸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대언의 말씀을 주셨지만(사7:1-25) 그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불 속을 지나 우상들에게 이르게 했고 예루살렘에 시리아의 신들을 가져왔으며 시리아 식으로 성전을 바꾸고 그것을 폐쇄시키기도 했다. 주님의 도움을 버린 그는 결국 베가와 르신과의 전쟁에서 고통을 당하였고 에돔 사람들은 그를 버리고 반역했으며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경계를 위협했다. 그는 고통 중에서 점점 더 하나님을 멀리 했으며 아시리아의 불 왕에게 원조를 구했고 이 일로 인하여 불에게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디그랏빌레셀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는 점점 더 우상숭배를 강화하였고 36세에 아무 존경도 받지 못한 채 죽어서 자기 조상 왕들의 무덤에 들어가는 것조차 거절당하는 수치를 겪었다(대하28:1-27).    
2009-07-18 12:29:56 | 관리자
  성경에 나오는 메대와 페르시아의 여러 왕의 공통적인 호칭.   I. 메대 사람 다리오의 아버지(단9:1).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호칭이 고레스의 조부인 아스티아게스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고레스, 다리오 1세 참조. II. 고레스의 아들로서 그의 뒤를 이은 왕(스4:6). 아마 이것은 주전 529년부터 7년 반 동안 통치한 캄비세스를 가리킬 것이다. III. 에스더의 남편. 아마도 이 사람은 크세륵세스를 가리킬 것이다. 주석가들은 여러 의견을 내고 있으며 이 이름이 페르시아의 여러 왕을 가리킨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들은 모두 그들의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단지 크세륵세스만 예외이다. 에스더 참조.    
2009-07-18 12:29:23 | 관리자
  갈대아의 도시.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이 도시의 이름을 딴 아하바 강의 둑에서 모여 에스라의 지휘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했다(스8:15, 21, 31).    
2009-07-18 12:28:22 | 관리자
  아피우스 클라디우스가 세운 아피우스 시의 시장. ‘세 여관’은 로마에 16킬로미터 정도 더 가까운 마을이다(행28:15). 사도 바울의 로마 이송 지도 참조(44).    
2009-07-18 12:27:57 | 관리자
  서구 문명의 발생지이며 고전 문명의 지적, 예술적 사상이 유래된 곳. 에게해 지도 참조(41).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아티카 지방의 중심지였다. 고대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아티카 지방 전역을 포함한 도시국가(폴리스)를 아테네라 불렀으며 고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 중에서도 아테네는 특히 유력한 폴리스였다. 살라미스 해전 후에 아테네는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를 설득하여 델로스 동맹을 체결하고 그 맹주가 되었다. 주전 478년 델로스 동맹의 체결 이후부터 주전 431년의 펠로폰네소스전쟁의 개시까지가 아테네의 황금시대였으며 이때에 이곳의 민주정치가 확고해지고 경제적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문화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이곳은 그리스의 학문 및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여러 나라로부터 학자와 예술가가 모여들었다. 아테네는 무엇보다도 고대의 신전과 공공건물들로 유명하다. 그 중 이 도시의 수호 여신인 아테나를 위해 세운 직사각형의 원주식 신전인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의 도리아 양식 건축물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파르테논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에는 원래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신전이었던 에렉테움과 아크로폴리스의 벽을 통해 입구가 이어지는 프로필라이아 신전도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기슭 남쪽에는 헤로데스 극장과 디오니시우스 극장이 있고 북서쪽에는 고대 장터였던 아고라가 있다.                              아테네의 아클로폴리스   아테네는 고대 문명의 꽃이었으며 이곳의 철학 학파들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였고 화가와 조각가, 건축가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동시에 우상숭배 역시 이 도시가 어느 도시보다도 앞섰다. 사도 바울은 주후 52년경에 이곳을 방문하여 그리스도와 부활을 성공적으로 선포하였다(행17:15-34). 아레오바고 참조.    
2009-07-18 12:27:07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