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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성상들 교리 문답서는 모든 카톨릭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나 혹은 마리아 및 기타 다른 사람들의 성상이나 성화들을 공경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당과 집에 있는 성화상은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고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사업에 관한 성화상을 우리가 소중히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흠숭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와 천사와 성인들의 성화상을 소중히 하면서 그분들을 공경한다[제2편 p.448 #1192]. 성상들이 무슨 의도로 만들어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셨을 때 두 번째 명령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5). 하나님께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위하여 쌓은 제단 곁에 어떤 나무로든지 작은 숲을 심지 말며 너를 위하여 어떤 형상도 세우지 말지니 주 네 하나님께서 그것을 미워하시느니라(신16:21-22). 성경은 어떠한 형태의 조각된 상이든지 그것을 만들거나 소유하는 사람은 부패한 사람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주께서 호렙에서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모습도 보지 못하였으니 그런즉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두렵건대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너희를 위해 새긴 우상 곧 어떤 형상의 모습이든지,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든지,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모습이든지, 공중에 나는 어떤 날짐승의 모습이든지, 땅 위에 기어다니는 어떤 것의 모습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물고기의 모습이든지 만들까 하노라(신4:15-18).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이는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맺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네 주 네 하나님께서 금하신 새긴 형상이나 어떤 것의 모습을 만들까 염려함이라(신4:23).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사람들이 새긴 형상에 경배드리는 것을 명백히 금하는데 사실 이러한 행위는 카톨릭 교회에서 늘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것들입니다. 교황이 마리아 상 앞에서 절하는 모습을 보실 때마다 여러분은 이러한 성경 말씀에 관해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는 나 곧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4-5).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우상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하시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은 무엇이며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은 무엇이냐? 그러나 내가 말하건대 이방인들이 희생물로 드리는 것은 마귀들에게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19-20). 모든 우상의 배후에는 글자 그대로 마귀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마귀와 교제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상(우상)의 사용을 금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너희는 우상들에게로 돌이키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부어 만든 신들을 만들지 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레19:4).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혐오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제 너희에게 쓰는 것은 만일 형제라 일컬음 받는 자가 음행하는 자이거나 탐욕을 부리는 자이거나 우상 숭배하는 자이거나 욕설하는 자이거나 술 취하는 자이거나 강탈하는 자이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하는 것이라(고전5:11). 너희가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을 일삼는 자나 부정한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결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서 아무 상속도 받지 못하리라(엡5:5).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다음 구절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아무도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 위에 임하기 때문이니(엡5:6). 카톨릭 교회가 당신을 헛된 말로 속이고 있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그것을 판단하십시오. 이러한 교리의 기원은 무엇일까요? 카톨릭 주의는 이러한 교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양 가장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우리 교부들의 가르침과 카톨릭 교회의 전승에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확실하고도 명확하게 결정한다. 그림으로 그려졌거나 모자이크로 만들어졌거나 또는 다른 적절한 재료로 만들어진 유서 깊고 거룩한 그림들과 귀중하고 생명을 다시 주는 십자가상은 하느님의 성당과 제기들과 제의에, 벽과 화판에, 그리고 집안과 거리에 모셔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나, 천주의 지극히 거룩하신 모친이신 동정 마리아의 성화상이나 거룩한 천사들과 모든 성인들의 성화상도 마찬가지이다(제2차 니케아공의회)[제2편 p.438 #1161]. 이러한 교리는 교부들과 카톨릭 교회의 전승(전통)으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카톨릭 주의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러한 교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도록 거룩하게 영감 받았다고 믿도록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시편 기자가 이 주제에 관해 우리에게 조금 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교도들의 우상들은 금과 은이요,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그것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도 우상들과 같으며 우상들을 신뢰하는 자들도 다 그와 같도다(시135:15-18). 다시 말해 우상은 벙어리요 귀머거리이기 때문에 우상을 만들거나 그것들을 신뢰하는 자들은 모두 지각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강력한 경고인 것입니다. 결    론 카톨릭 교회는 '성상들(우상들)이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여러분의 신앙을 일깨우고 고양시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들의 사용을 엄격하게 금합니다. 누구에게 순종하시겠습니까?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우상들이나 새긴 형상을 만들지 말고 서 있는 형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돌로 된 형상을 세우고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이는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레26:1).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으니 곧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너희가 행하는 바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이라(막7:8).
2009-07-09 14:32:24 | 관리자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과연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돕기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카톨릭 교리에 따르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죽은 이들과의 일치.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의 이 같은 교류를 명백히 인식한 지상 여정의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초기부터 대단한 신심으로 ’죽은 이들을 기억하였다‘, ’죽은 이들이 죄의 사함을 받도록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은 장하고도 경건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교회헌장 50항). 그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그들을 도울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들의 전구(intercession)를 효과 있게 할 수도 있다[제1편 p.364 #958]. 여기서 세 가지 진술이 성경과 모순됩니다. 하나씩 살펴볼까요? 1. 죽은 이들이 죄의 사함을 받도록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은 장하고도 경건한 생각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장하지도 경건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치고 죽은 자를 위해서 그들의 죄가 용서되도록 기도한 예는 단 한번도 없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사람들의 전통일 뿐입니다. 2.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들이 죄에서 해방되도록 도울 수 있다. 여기 하나의 전통 위에 세워진 또 하나의 전통이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이러한 진술이 참된 것이라고 암시조차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대로 사람들이 구원받으려면 죽기 전에 그들의 죄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합니다. 3. 그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우리를 위한 그들의 전구(intercession, 중보)를 효과 있게 할 수도 있다. 블록을 쌓듯이 그들은 아무런 성경적 기초도 없이 전통 위에 전통을 얹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 가능한 지경에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그들의 전구(중보)를 효과 있게 할 수도 있다. 이제 명백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째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많은 중재자들이 필요한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도록 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과연 우주의 창조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신다는 말입니까? 이 무슨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훼손시키는 태도입니까? 카톨릭 주의의 입장은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대로 설득할 수 있는 그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방관자로 예수님을 묘사함으로써 우리의 주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을 내게 주셨느니라(마28:18). 여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또 다른 묘사가 있습니다. 그분(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휘하사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시고 하늘의 처소들에서 자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모든 정사와 권능과 강력과 통치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음을 받을 모든 이름보다 훨씬 뛰어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그분의 발 아래 두시고 그분을 교회에게 주사 모든 것 위에 머리가 되게 하셨느니라(엡1:20-22). 주 예수님을 권위와 능력이 부족한 영적 무기력자로 격하시키려는 카톨릭 주의의 입장은 성경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친애하는 카톨릭 친구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임무를 혼자서도 잘 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나니 그 까닭은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라(히7:25). 여러분이 사랑하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부디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이 모두 인간이 만든 종교적 규정이라는 점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에게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으셨을 뿐더러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약속하신 적도 없습니다. 제가 젊어서 카톨릭 신자였을 때 늘 저는 어쨌거나 이 모든 종교 규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성경을 읽고 확인해 보십시오. 카톨릭 교리 문답서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사람들의 전통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들 이제 여러분께서는 예수님께서 또 한 번 심각하게 좌천을 당하게 된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오른편에 계시던 유일하고 신성한 중재자의 위치로부터 쫓겨나 죽은 인간들의 무리 속으로 내몰렸고 결국 많은 중재자 중 하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 카톨릭 종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계속해서 이러한 못된 짓을 하는 걸까요? 결    론 다시 한 번 여러분은 몇 가지 중요한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사람들의 전통인 것을 알면서도 죽은 이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격하시키는 교리를 고수함으로써 교회의 전통을 드높이겠습니까?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사람이 만든 전통을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시겠습니까?   이것들이 바로 여러분께서 결정하셔야 할 것들입니다. 결정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15:9).
2009-07-09 14:27:39 | 관리자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 교리 문답서는 신자들로 하여금 선행으로 인해 교회가 성인(saints)으로 선포한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하늘나라에 간 증인들 특별히 교회가 ‘성인’으로 인정하는 이들은 그들의 모범적인 삶과 전해 오는 그들의 글 그리고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 오늘도 살아 있는 기도의 전통에 참여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상에 남아 있는 이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준다. 그들은 주님의 ‘기쁨’에 동참함으로써 ‘많은 일을’ 맡게 되었다. 그들의 전구는 하느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그들의 봉사 중 가장 고귀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온 세상을 위해 간구해 주도록 그들에게 기도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한다[제4편 p.914-915 #2683]. 이번 장에서는 먼저 ‘성인’(saint)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카톨릭 주의는 성인이란 살아 있을 때 행한 선행들로 인해서 죽은 후에 성인으로 공포된 ‘엄선된 소수의 사람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신자들을 시성(諡聖, canonize)함으로써 즉 그 신자들이 영웅적으로 덕행의 길을 닦고 하느님의 은총에 충실히 살았음을 장엄하게 선언함으로써 교회 안에 강력히 작용하는 성령의 힘을 인정하고 그 신자들을 다른 신자들에게 모범과 전구자로 세워 줌으로써 그들의 희망을 북돋아 준다(교회헌장 40;48-51항)[제1편 p.322 #828].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성인(saint) 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모든 성인들(성도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성도(saints)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롬1:7). 많은 다른 성경 구절도 똑같은 진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saints) 가운데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이방인들 가운데 선포하게 하시고(엡3:8). 아담으로부터 일곱번째 사람인 에녹도 이들에 대하여 대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 성도(saints)와 함께 오시나니(유14).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것은 성도들(saints)을 완전하게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엡4:11-12). 이 외에도 행9:13, 32, 41; 26:10; 롬8:27, 12:13, 15:25, 15:26, 15:31, 16:15; 고전6:1; 고후1:1; 엡 1:1과 기타 신약성경의 많은 구절을 참조해 보십시오. 왜 이러한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것일까요? 간략하게 말해서 이들이 꾸며낸 각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톨릭 주의는 ‘성인’(성도)에 대한 성경의 정의를 던져버리고는 새로운 것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런 다음에 신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비성경적인 ‘성인들’(성자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도를 듣고 응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데 왜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기도해야만 하는가? 성인들(성자들)이 중재자라고요? 카톨릭 주의는 소위 성인들(성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를 중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재자 곧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이에서 벗어나 딴 소리를 하는 것은 사람이 만든 전통일 뿐입니다. 성인들에 관한 흥미 있는 내용이 교리 문답서에 있습니다. 지상 여정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치가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인들과의 일치’(our communion with the saints)가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주는 것이니[제1편 p.363 #957]. 카톨릭 교회에 따르면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보다 가까이 인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러한 교리 역시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나 예수님께서 전혀 가르친 바 없는 또 하나의 사람들의 전통인 것입니다. 사실 이처럼 죽은 자들과 접촉하는 행습은 접신술에 가까운 것으로 위험 천만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와 비슷한 행위를 강력히 정죄했습니다(신명기 18:10-12을 보십시오). 결    론 여러분이 대답해야만 하는 끈질긴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째서 카톨릭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살아 계시고 능력이 막강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하나님 대신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도록 만드는 것일까요? 이러한 사람들의 전통이 사실이 아니라면 당신이 ‘성인들’에게 드리는 모든 기도는 쓸모 없이 지껄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하지만 당신이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당신은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놀라운 약속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2009-07-09 14:24:08 | 관리자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연옥 카톨릭 주의는 죽음 이후에 일부 사람들은 연옥이라 불리는 장소로 가서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좀더 정화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나라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기 위해 죽은 후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제1편 p.389 #1030]. 교회는 선택된 이들이 거치는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르는데…[제1편 p.389 #1031]. 과연 이 위험한 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까요, 아니면 또 하나의 사람들의 전통일까요? 여기 정확히 카톨릭 교리 문답서로부터 나온 대답이 있습니다. 교회는 연옥에 관한 신앙 교리를 특히 피렌체 공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확정하였다…[제1편 p.389 #1031]. 사람들이 이러한 이단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 내세에 관한 정보를 어디에서 얻었는가를 물어 보는 것이 과연 부당한 일입니까? 로마 카톨릭 신자 여러분, 만약 여러분께서 연옥에 있다고 믿는 여러분의 사랑하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면 그들이 그곳에 있다고 말해 준 분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일단의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주의 제자들 중 어떤 이는 세상 여정에 남아 있고 어떤 이는 죽어 단련을 받고 어떤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뵈오며’ 영광을 누리고 있다(교회헌장 49항)[제1편 p.362 #954]. 여러분이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이 교리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은 성경이 전혀 그러한 장소가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죽은 후에 좀더 정화를 거치는 것이 천국 가는 데 필요하다고 지적하지도 않습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니라(롬6:23).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나니(롬5:18).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직하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영원한 생명을 제시하시고는 나중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당신이 고통을 당하도록 하신다는 말입니까? 더욱이 그분이 성경 말씀 안에서 거짓말을 하신다는 말입니까?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성경대로 믿는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은 좀더 정화되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에 의해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롬5:9).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롬3:24). 사도 바울도 이러한 관점을 분명히 해두었습니다. 전에는 너희 가운데 이 같은 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이제는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김을 받고 거룩히 구별되어 의롭게 되었느니라(고전6:1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정화된 것입니다. 이는 그리하였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세상 끝에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음이니라(히9:26).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죄값을 지불하고 사셨으므로 구원받기 위해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그 값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모든 양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게 하셨나니(행20:28). 결    론 이 문제에 관해서 성경이 이토록 분명한데 어째서 카톨릭 교회는 신실한 신자들을 설득해서 그들의 사랑하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고 미사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돈을 바치도록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스스로 대답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최소한 연옥이라는 교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부화되어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 곧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2009-07-09 14:20:33 | 관리자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미사 교리 문답서를 그대로 믿는다면 천주교 미사를 행할 때마다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현재화되고 우리의 대속 사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십자가 제단 위에서 한 번 당신 자신을 피 흘려 바치신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미사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이 희생 제사에 피흘림 없이 계시고 제헌되신다(트리엔트 공의회)[제2편 p.502 #1367]. 성찬례를 거행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파스카(Passover, 유월절)를 기억하며 이 파스카는 현재화된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희생 제사는 항상 현실적인 것으로 존속한다. 우리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신 십자가의 제사가 제단에서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사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제2편 p.501 #1364]. 그러나 성경은 대속 사역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단 한번에 완성된 행위임을 계시해 줍니다. 이는 그리하였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세상 끝에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음이니라(히9:26).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모든 사람을 위해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히10:10).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셨을 때 그 단 한 번의 행위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영원한 대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대속을 얻으셨느니라(히9:12). 성경은 이러한 희생 제사를 날마다 드려야 할 필요가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저 대제사장들과 같이 먼저 자기 자신의 죄들로 인하여 날마다 희생물을 드리고 그 다음에 백성의 죄들로 인하여 희생물을 드릴 필요가 없으시니 이는 그분께서 자신을 드리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행하셨기 때문이요(히7:27). 이럼에도 불구하고 교리 문답서의 입장은 완고합니다. 이 신비가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사업이 이루어지고’…(교회 헌장 3항)[제2편 p.517 #1405].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역시 단호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 한번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헌물로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 문제와 상관없이 두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히9:28).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하여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히10:12).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사람들의 구원을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끝내셨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영광을 받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서 카톨릭 교회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다고 교리 문답서는 주장하는데 사실 이 같은 주장은 갈보리에서 성취하신 일로 인해 주 예수님께서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예를 그분으로부터 도적질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한번에 영원히 모든 것을 끝내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희생으로서 신성한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단 한번 일어났으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희생 제사와 성찬례 즉 미사라는 희생 제사는 유일하고 동일한 제사이다[제2편 p.502 #1367]. 이러한 발언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임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종의 종교적 의식을 수행하는 사제가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스러운 죽음에 어떤 기여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 모독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톨릭 교회의 종교 의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연관시키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카톨릭 교회는 대속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아무런 역할도 한 것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런 영예도 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카톨릭 주의는 강제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아 카톨릭 교회와 나누어 가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    론 독자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전통 중에서 어느 쪽을 신뢰할지 신중히 결정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리심을 받으사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2009-07-09 14:17:02 | 관리자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거룩히 구별된 곳으로 그분께만 경배 드리는 건물. 이곳은 말 그대로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인데 우상이 있는 이교도들의 신전과는 달리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지성소에서 그룹들 사이에 거하신다. 다윗은 자신이 주님을 위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을 것을 요청하였으나 하나님은 나단 대언자를 통해 그가 아니라 그의 아들 솔로몬이 그것을 지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이에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을 위해 많은 물자를 예비하였다. 성전을 세울 장소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이었다(창22:2, 14; 대하3:1). 성전의 모델은 성막과 거의 비슷하며 단지 외형만 커졌고 그 안의 기구들도 거의 비슷하다. 성전을 짓는 데 7년 6개월이 걸렸으며 봉헌식을 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대하5:1-14; 6:1-42; 7:1-22). 성전 자체는 주랑과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되어 그리 크지 않았으며 주변의 뜰과 방이 있는 지역이 넓었다. 성경에서 성전이라는 말은 지성소가 있는 건물만을 뜻하지 않고 종종 뜰을 포함한 전체 성전 구역을 의미한다. 솔로몬의 성전 선도 참조(57). 성전의 크기에 대해서는 열왕기상 6장과 역대기하 3-4장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솔로몬의 성전은 처음 33년 동안만 아름다움을 유지하였고 이집트의 시삭 왕이 이곳을 약탈한 뒤부터(왕상14:25-26; 대하12:9) 하사엘, 디글랏빌레셀, 산헤립 등이 더럽혔고(왕하12:1-21; 16:1-20; 18:1-37) 마침내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완전히 파괴시켰다. 그래서 첫 성전은 424년 3개월 8일 만에 땅에서 사라졌고 그 뒤 52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은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스룹바벨과 유대인들이 두 번째 성전의 기초를 놓았고(스1:1-4; 2:1; 3:8-10) 그 뒤 이방인들의 많은 방해를 받으면서 성전 공사가 진행되어 21년이 지난 뒤 완공되었다(스6:15-16). 이 성전의 크기는 이전 것과 같았으나 겉모습은 이전 것보다 떨어져서 처음 성전을 본 사람들은 초라한 모습의 새 성전을 보고 슬퍼하였다(학2:3). 하지만 주님은 이 집의 영광이 처음 것보다 크리라고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학2:9). 이 성전에는 언약궤, 긍휼의 자리, 눈에 보이는 영광, 제단의 거룩한 불, 우림과 둠밈, 대언의 영 등이 없었다. 주전 168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대제는 매일 드리는 성전 희생 제사를 금하고 제단에 돼지 피를 드림으로써 이 성전을 더럽혔고 근 3년 동안 주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유다 마카비는 주전 165년에 다시 경배를 부활시키고 성전을 새롭게 봉헌하였다. 헤롯은 자신의 통치 제1년인 주전 37년에 두 명을 빼고 산헤드린의 모든 회원을 죽였으며 이것을 속죄하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고 미화하기로 하였다. 그는 2년 동안 자재를 모은 뒤 스룹바벨의 성전을 허물고 46년에 걸쳐 다시 지었다. 이렇게 완공된 성전에 주님이 들어가셨으므로 학2:9; 말3:1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헤롯의 성전은 대리석으로 건축되어 빼어난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자랑하였다(막13:1; 눅21:5). 그러나 그 당시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여겨지던 성전은 우리 주님의 예언대로 주후 70년에 로마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막13:2). 헤롯의 성전 선도 참조(57). 왕들의 시대에는 레위 사람들이 항상 성전을 지켰다(대상26:1-32; 대하23:19). 로마의 통치 때에는 성전과 붙은 안토니아의 성채 안에 로마 사람들의 수비대가 있었다(요18:12; 행4:1; 5:26; 21:31-40). 경건한 유대인들은 언제나 성전을 향해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성전을 사랑하였다(시84:1-12). 그런데 어떤 이들은 헛된 열심에 빠져 위선과 우상숭배로 성전을 자랑하였으며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성전을 향해 신성모독 죄를 범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마26:61; 27:40; 요2:19-20; 행6:13; 21:27-30). 한편 신약시대의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신자의 몸이며(고전3:16-17; 6:19; 고후6:16) 신약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장소는 결코 성전이 아니다. 교회가 의식화되어 천주교처럼 변하면서 목사가 제사장(사제)처럼 행세하고 예배당이 성전이 되는 구약 체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우리 주님이 미워하시는 일이다. 니골라당 참조.    
2009-07-05 01:19:19 | 관리자
  하나님께 구분된 거룩한 장소. 성소는 종종 성전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며(시73:17; 히9:1) 향 제단과 금 등잔대와 보여 주는 빵을 둔 성소(Holy place)를 가리키기도 하고(대하26:18; 히9:2) 어떤 때는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곳 즉 언약궤가 있고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가는 지성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성소는 광야에서 세운 성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레4:6). 성막과 성전 참조. 땅의 성전 혹은 성소는 하늘의 것의 상징이며(시102:19; 히9:1, 24) 도피하는 사람이 성전을 피난처로 삼을 때에는 하나님이 성소라 불리기도 한다(사8:14; 겔11:16).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의 추격을 받는 죄인이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그분이기 때문이다.    
2009-07-05 01:18:36 | 관리자
  고대에 도시나 성채의 성벽을 부수기 위해 사용된 장치로서 공성퇴라 불리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100명 이상이 공성퇴의 탑 밑에서 일하고 활 쏘는 자들이 탑의 위에서 성 안의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겔4:2; 21:22).      
2009-07-05 01:17:47 | 관리자
  이것은 보통 장막을 가리키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가 세운 특별 장막을 뜻한다. 이곳은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던 곳이었으며 이와 관련된 하나님의 지시 사항과 이것을 수행한 내용은 출25:1-40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보통 회중의 성막 혹은 증언의 성막이라 불렸다. 성막 선도 참조(56).   성막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는 각각 30, 10, 10큐빗이었고(출26:15-30; 36:20-30) 입구는 네 종류의 덮개로 덮인 채 동쪽에 있었다. 성막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서 동쪽의 삼분의 이는 성소 그리고 서쪽의 삼분의 일은 지성소로 쓰였는데 이 두 곳에는 창문이 없었으므로 성소에서 섬기려면 등잔불이 있어야 했다. 성막의 뜰에는 번제 헌물 제단과 물두멍이 있었고 제단은 뜰의 문과 성막의 문 사이에 있었으며(출40:6, 29) 물두멍은 번제 헌물 제단과 성막의 문 사이에 있었다(출38:8). 바로 이 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헌물과 기도를 드렸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성소에는(히9:6) 향 제단과 진열하는 빵을 두는 상과 금 등잔대가 있었다. 향 제단은 성소의 중앙에 휘장 앞에 있었으며(출30:6-10; 40:26-27) 여기에서 아침저녁으로 향을 태웠다. 제사장의 오른편 즉 북쪽에는 보여 주는 빵이 있었고(출26:35; 40:22-23) 남쪽에는 금 등잔대가 있었다(출25:31-39). 대제사장만 1년에 한 차례 들어가는 지성소에는 그룹들과 긍휼의 자리로 덮인 언약궤가 있었다(히9:7). 성막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뒤 둘째 해 첫째 달 첫째 날에 세워졌고(출40:17)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움직여야 했으므로 분해해서 쉽게 조립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성막의 이동에 따라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함께 옮겨 다녔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움직인 횟수만큼 성막도 레위 사람들에 의해 옮겨졌고(민4:1-49) 그들이 진을 친 곳에 다시 조립되어 세워졌다. 가나안 정복 때에 성막은 길갈에 있었으며(수4:19; 10:43) 정복이 끝난 후에 여러 해 동안 실로에 있었다(수18:1; 삼상1:3). 삼하6:17과 대상15:1은 다윗이 기럇여아림에 오래 머물다가 오벳에돔의 집에 머물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들여오려고 한 장소를 정하고 거기에 성막을 세웠다고 말한다(대상13:6, 14; 참조 삼하6:11-12). 한편 대상21:29는 모세의 성막이 그 당시에 기브온에 있었다고 말하므로 언약궤와 성막은 이미 오랫동안 따로 있었을지도 모른다. 솔로몬의 때에도 성막은 여전히 기브온에 있었으며(대하1:3, 13) 아마도 이것이 성막에 대한 마지막 언급일 것이다. 왜냐하면 성전 안으로 궤와 함께 들어온 성막은(대하5:5) 오랫동안 시온에서 궤를 보관해 온 장막이었기 때문이다(대하1:4; 5:2).    
2009-07-05 01:16:35 | 관리자
  성령님이 신자 속에 들어와 거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이 같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 둘은 매우 다르다. 성령 침례에 대한 구절은 신약에서 11번 나온다(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11:16; 롬6:1-7; 고전12:13; 갈3:26-28; 엡4:5; 골2:12). 이 중 다섯 번은 성령 침례를 미래 시제로 다루고 있는데 이는 성령 침례가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편 과거 시제도 있는데(행11:16) 이것은 오순절을 되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그 날 이루신 성령 침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머지 다섯 번은 서신서에 있으며 모두 성령 침례의 본질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신약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I. 침례는 ‘담그다’는 뜻을 가지며 ‘하나의 사물을 다른 데로 옮겨놓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성령 침례는 이런 일이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 침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어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를 성령님 안으로 푹 잠기게 하신다. 여기서도 침례라는 단어가 쓰이며 이는 곧 그를 성령님의 세계로 옮김을 의미한다. 둘째, 성령님께서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푹 잠기게 하신다. 이것은 곧 그를 그분의 교회라는 세계로 옮긴다는 말이다(요1:33; 고전12:13). II. 성경은 성령 침례가 성도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일어나는 경험의 일부라고 가르친다. 성령 침례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고 거듭날 때 일어난다. 따라서 성령 침례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필수불가결의 관계에 있는데(갈3) 그것은 곧 성도가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침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에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III.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 침례를 받았다고 가르친다. 성령 침례가 구원받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 침례를 받은 것이다. 성경도 성도들이 다 한 성령을 통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한다(고전12:13). 즉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기에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지 못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따라서 성령 침례를 받지 못한 신자는 있을 수 없다. IV. 성경에는 성령 침례를 추구하라는 명령이 없고 심지어 그 같은 것에 대한 암시조차도 발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미 성령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 침례가 구원받는 순간 이루어지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복된 소유이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굳이 이것을 따로 추구할 필요가 없다. 성령님, 성령 충만 참조.    
2009-07-05 01:15:39 | 관리자
  신자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서 그리스도의 일을 실행하기 위해 애를 쓰며 육신을 죽이는 상태. 이것은 신약성경에 15번 등장한다(눅1:15, 41, 67; 4:1; 행2:4; 4:8, 31; 6:3, 5; 7:55; 9:17; 11:24; 13:9, 52; 엡5:18). 이 중에서 14구절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어떤 개인이나 모임이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에베소서 말씀에서만 성령 충만이 명령으로 나와 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이 말씀은 충만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준다.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의 통치하에 있다’ 혹은 ‘무엇에 의해 지배당하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진리는 술에 취하는 것(술에 지배당하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한 것(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비교한 데서 알 수 있다. 또 이 말씀은 성령 충만이 언제 일어나는지 말해 주고 있다. 여기서 “충만하라.”는 단어는 현재 시제로서 현재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를 다시 쓰자면 “계속 충만하라.”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믿는 이들이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시제라고 해서 성령 충만이 한 번 이루어지면 영원히 지속되거나 혹은 살면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유지되어야 하며 잃어버릴 수도 있고 그때는 회복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은 누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다. “성령 충만하라.”는 명령은 모든 믿는 이에게 적용된다. 이 명령은 특정 소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 모두에게 적용된다. 성령 충만의 명령은 개인적인 성격을 지닌다. 주님께 순종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도 있지만 주님께 불순종하여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롬6:13; 12:1) 성령의 권능 안에서 걸을 때(갈5:16) 얻을 수 있다. 끝으로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성령 침례는 단 한 번 일어나지만 성령 충만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다. 성령 침례는 거듭나는 순간에 일어나며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일어난다. 모든 신자는 항상 성령 침례를 받은 상태에 있지만 성령 충만은 믿는 자가 순종하는 때에 이루어진다. 성령 침례는 명령이 아니지만 성령 충만은 명령이다. 성령 침례는 믿는 자의 신분과 관련이 있고 성령 충만은 믿는 자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성령 침례는 사람을 그리스도안으로 옮기는 것이고 성령 충만은 사람의 행동을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는 것이다. 성령님, 성령 침례, 침례 참조.    
2009-07-05 01:14:46 | 관리자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인격체.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과 본질에서, 능력에서, 존재 면에서 동등하며 아버지나 아들에게서 발출된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보내진 경우에 한해서 아버지에게서 나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제자들에게 보내어졌다(요14:26; 15:26). 이분은 아버지의 영이며(마10:20; 고전2:11) 또 그리스도의 영이다(갈4:6; 빌1:19). 성령님이 하나님의 영향력이나 힘이 아니고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은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분은 스스로 행동을 하고 생각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인격체이시다. 이분이 인격체가 아니라면 기뻐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수 없으며 또 말씀하거나 위로하거나 중보하거나 자신의 선물(은사)들을 나누어 줄 수 없다. 물론 그리스말이나 영어에서 이분은 남성을 가리키는 he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님께서 신성을 지닌 인격체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하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다른 두 분과 함께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으로부터 증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조의 사역에서(창1:2; 시33:6; 104:30) 그분이 함께 하셨다. 성령님은 또한 침례를 주는 방식에서도 다른 두 인격체와 함께 찬송을 받으시며(마28:19) 사도 바울의 축복 기도에서도 다른 두 분과 함께 나타나고(고후13:14) 이름을 받으시고(고후3:17) 하나님의 특성들을 행하고 보여 주신다(롬8:14; 고전2:10; 6:19; 히9:14). 물론 그분이 하나님이므로 그분께 기도드릴 수도 있으며(계1:4-5) 그분께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고(행5:3-4; 엡4:30) 그분께 신성 모독을 범하면 용서받을 수 없다(마12:31). 성령 모독 죄 참조.성령님의 일은 신성을 띠고 있다. 그분은 옛날부터 성경 기록자들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을 기록하게 하였고 여러 사람들에게 기적의 선물(은사)들을 나누어 주었다. 교회 시대에 그분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사람들의 마음에 적용시키며 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요16:8-9)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들을 보여 주며 조명을 주사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요3:5; 엡2:1). 성령님은 교회의 위로자이시며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과 함께 증언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하고 그들을 인도하며 성화시킨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이며 따라서 반드시 성령의 증거가 그 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살아 있는 사과나무가 반드시 사과를 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고후13:5). 성령이 있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갈급함: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만을 드러내며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요15:26; 16:14-15; 고전12:3). 그러므로 성령이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적 인물로 가장 매력적인 존재가 되며 그래서 그분을 알기 위해 성경을 탐구하려는 열망이 생긴다(요5:39-40).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성경 읽기와 탐구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갈급함; 성령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갈5:22-23). 성령의 열매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인격이라 할 수 있으므로 성령이 있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 주변 환경과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에 변화를 보인다. 그러므로 역경과 시험이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열매를 보아 성령 충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성령은 결코 우리를 제어하지 않으며 다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어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부단히 자기 성찰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삶이 매우 필요하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갈급함: 성령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도록 자신을 내어 놓으며 사람들을 섬기려 한다. 성령의 선물(은사)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선물은 섬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졌다(벧전4:10; 고전12:7). 그러므로 성도의 생활은 선물(은사) 중심이 아니라 섬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의 선물이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성령님을 표현하면서 그분께서 외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강조할 때는 the Holy Ghost로, 내적으로 일하시는 것을 강조할 때는 the Spirit으로 구분하여 표기하므로 한글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서도 the Holy Ghost는 성령님으로 the Spirit은 성령으로 구분하여 표기했다. 성령 침례, 성령 충만 참조. 성령 모독 죄(Blasphemy against the Holy Ghost) 이것은 보통 ‘성령 훼방 죄’로 알려져 있으며 은사주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비성경적인 선물(은사)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성경에 없는 것이라고 지적하면 그들은 대개 ‘성령 훼방 죄’를 운운하며 진리를 보여 주는 성도들을 저주하려 하지만 실제로 성령 모독죄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마12:31-32; 막3:28; 눅12:10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분이 베푸시는 기적들이 마귀들의 통치자 바알세붑의 힘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 사람들에게 성령 모독죄가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죄는 땅에 계시던 예수님과 관련된 죄이며 현 시대 사람들은 이런 죄를 지을 수 없다. 현 시대에서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는 하나도 없으며 누구든지 무슨 죄라도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모두 용서해 주신다. 신성모독 참조.    
2009-07-05 01:14:09 | 관리자
  원래 이 말은 성인 즉 거룩한 사람을 뜻하며 하늘이나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혹은 친구를 뜻한다(신33:2). 이 말은 구약시대의 경건한 유대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으나(시16:3; 34:9) 대개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말로 사도 바울에 의해 사용되었다(롬1:7; 8:27; 12:13; 15:25, 31; 16:2). 다시 말해 성경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성도 즉 성인이라고 부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부패하기 시작했고 결국 천주교는 스스로 성인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을 성인으로 만들어 신자들이 그들에게 기도하고 그들의 은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가르치는 가증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    
2009-07-05 01:13:20 | 관리자
  율법의 말씀들을 담은 작은 양피지 두루마리.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마와 왼팔에 착용하였는데 이것은 “그것을 네 손 위의 표적과 네 눈 사이의 기념물로 삼으라.”(출13:9, 16)는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생긴 결과이다. 이마에 착용하는 것은 표(Frontlets)를 참고하기 바란다. 팔에 매는 것 역시 양피지 두루마리였으며 그들은 이것을 둘둘 말아 검은색 소가죽 통에 넣고 이런 가죽 성구함을 왼손의 팔이 접히는 부분에 묶어서 착용하였다. 성구함은 그리스말로 보존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귀들로부터 보존되는 것도 뜻해서 일종의 부적 같은 역할도 하였다. 이것은 구약시대 말기에 도입되었으며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경건과 지혜의 표시로 시장에서 이런 성구함을 차고 다니는 것을 책망하셨다(마23:5). 오히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내가 주께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숨겼나이다”(시119:11).      
2009-07-05 01:11:58 | 관리자
  성경 본문은 여러 사람이 다양한 자료(필사본)를 모아 재구성한 ‘히브리어 구약성경이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의미한다. ‘본문’이라는 말은 어떤 종류의 문서든지 그 문서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을 지칭하며 ‘그리스어 본문’이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그리스어로 편집한 신약성경을 의미한다. 신구약 성경 본문은 계열에 따라 각각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님께서 한 본문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두 종류의 본문이 생긴 것은 각각의 본문을 지지하는 그룹이 다르기 때문인데 그 두 그룹은 기독교회 혹은 종교개혁그룹과 로마 카톨릭 교회이다. 사본 참조. I. 대개 구약성경은 마소라 사본에서 번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마소라 사본에도 두 종류가 있다. KJV의 구약 본문은 ‘전통 마소라 히브리어 본문’인 반면에 NIV, NASB 같은 현대 역본들의 구약 본문은 키텔이 지은 ‘BIBLIA HEBRAICA Kittel’(BHK) 혹은 ‘BIBLIA HEBRAICA Stutt- gartensia’(BHS) 이다. 또한 현대 역본들은 이 외에도 사해사본, 사마리아 모세 오경, 본문을 수정하는 데 사용된 고대 성경 기록관들의 전통, 본문 여백에 있는 여러 종류의 다른 본문, 70인역,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등을 사용하여 본문을 만들었다. KJV의 히브리어 본문과 현대 역본들의 히브리어 본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1516-1517년에 유대인 랍비들이 출간한 구약성경은 ‘다니엘 봄베르그판’ 혹은 ‘제1 랍비 성경’이라고 부른다. 그 이후에 1524-1525년에 제2판이 출간되었는데 벤 카임이 이를 편집하였다 해서 이 본문을 ‘벤 카임 마소라 본문’이라 하며 또한 이 본문은 ‘제2 대(大) 랍비 성경’이라고도 불린다. ‘벤 카임 마소라 본문’은 출간된 후 400여 년이 지나도록 표준 마소라 본문으로 인정받아 왔으며 KJV 역자들은 바로 이 ‘벤 카임 마소라 본문’을 구약성경의 본문으로 사용했다. 위템베르크 성서 공회는 1937년 과거에 키텔이 편집한 BHK 제3판에서 KJV의 ‘벤 카임 마소라 본문’을 ‘벤 아세르 마소라 본문’으로 바꾸어 버렸다. 사실 1906년과 1912년에 키텔이 출간한 제1판과 제2판에서는 ‘벤 카임 마소라 본문’이 사용되었는데 1937년에 출간한 제3판에서는 레닌그라드 사본에 기초한 ‘벤 아세르 마소라 본문’으로 갑자기 구약성경의 출처가 바뀌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구약성경 전체 중 20,000~30,000 군데의 변개가 이루어졌다. 레닌그라드 사본은 주후 100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KJV의 기초가 된 ‘전통 마소라 본문’과는 매우 다르다. 그 이후 1967년과 1977년에 독일 슈트트가르트에서 키텔의 BHK를 개정한 BHS가 출간되었는데 이 마소라 성경 역시 레닌그라드 사본에 기초한 ‘벤 아세르 마소라 본문’을 사용한 것이다. II. KJV 신약성경의 근간이 된 본문은 그리스어 ‘공인본문’이다. ‘공인본문’은 누가 이것을 공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의 ‘공인본문’(公認本文)이 아니고 누구나 이를 공통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의 ‘공인본문’(共認本文)이며 그래서 이것은 ‘수용본문’(收容本文)이라고도 불린다. ‘공인본문’은 KJV 신약성경 번역의 토대가 되었으며 특히 1598년에 출간된 베자의 제5판이 사용되었다. ‘공인본문’의 특징은 우선 신약 교회가 거의 1900 년간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해 왔다는 것이며 그 내용이 변화가 없이 한결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은 다수 사본에 근거했기에 ‘다수 본문’이라고 하며, 가장 널리 사용되었기에 ‘보편적 본문’이라고도 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서방본문’과 대비되어 ‘비잔틴 (혹은 동방) 본문’이라고 하며, 루터와 칼빈 등의 종교 개혁자들이 한결같이 이 본문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종교개혁본문’이라고도 한다. KJV 신약성경 번역에 사용된 그리스어 본문은 상당수의 서로 다른 편집자들에 의해 조합되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들로는 에라스무스, 베자, 스테파누스와 엘제비어 형제, 아브라함과 보나벤쳐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에라스무스는 다섯 판에 걸쳐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간했다. 1516년의 제1판에 이어, 1519년에는 마틴 루터가 그의 역사적이고 매우 중요한 독일어 번역판에 사용했던 제2판이 나왔다. 그 뒤 그의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판은 1522년, 1527년 그리고 1535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에라스무스의 작품은 매우 훌륭했고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모범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스테파누스는 1546년, 1549년, 1550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1551년에 모두 네 판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간했다. 베자도 1565년, 1582년, 1588년, 그리고 1598년에 걸쳐 여러 판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간했다. KJV 역자들은 1598년의 베자 성경과 1550년과 1551년의 스테파누스 성경을 주요한 출전으로 사용했다. 1611년에 KJV가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엘제비어 형제가 1624년, 1633년, 그리고 1641년에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간했는데 이들은 에라스무스의 표준을 따랐던 베자의 판을 충실히 따라가며 본문을 편집했다. 사도 시대부터 근 1900 년 동안 신약 교회는 ‘공인본문’만을 사용해 왔으며 특히 1611년에 KJV가 출간된 이후에는, 비록 여러 가지 영어 성경이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360 년 동안 다른 영어 성경은 전혀 쓰이지 않았다. 또한 KJV는 온 세계로 퍼져 나가 말 그대로 전 세계의 보편적 성경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권위를 인정한 성경’이라는 인식 하에 ‘권위역본’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 기독교회의 팽창에 대해 불안을 느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소위 본문 비평이라는 도구를 도입하여 성경을 한낱 역사책처럼 취급함으로써 그 권위를 떨어뜨리려 했으며 이를 위해 허영에 들뜬 신학자들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 같은 시도는 결국 사악한 열매를 맺게 되었고 1881년에 영국 성공회에 속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라는 두 명의 학자들은 ‘공인본문’에서 무려 5,604 군데나 수정하여 소위 ‘수정본문’이라는 개악된 본문을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이들이 ‘공인본문’에서 빼거나 변개시키거나 추가한 단어들은 무려 9,970 개나 되며 이것은 신약성경 전체 본문에 나오는 140,521 개 단어의 7%를 차지하는 것이다. 웨스트코트는 영국 성공회의 주교였으며 호르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였다.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들은 강신술 등에 심취한 영성주의자들이요, 지옥이나 마귀 등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창세기 기록을 신화로 생각한 인본주의자들이었다. 1967년도까지 존재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사본의 수는 모두 5,255 개이다. 이런 사본들에는 81개의 파피루스 사본과 267개의 대문자 사본, 2,764개의 소문자 사본, 2,143개의 기도문(혹은 교독문) 등이 있다. 그런데 현존하는 사본들의 99%가 ‘공인본문’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초대교회로부터 하나님의 교회가 오직 ‘공인본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필사하여 각 지역에서 사용했음을 잘 보여 준다. 지금까지 수정된 적이 없는 ‘공인본문’과는 달리 1898년에 처음 만들어진 ‘네슬레판’은 1992년까지 무려 26번이나 판을 개정하여 평균 3.1 년마다 새로운 판이 개정되어 나왔다. 이 사실은 여러 신학자들이 자기들의 구미에 맞게 성경을 뜯어고치려 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들이 이 같은 철학을 수용한 데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주후 250-350년 사이에 초대 교회에서 지도자들의 회의가 열려 자기들이 선호하는 사본들을 모두 없애고 ‘공인본문’을 지지하는 사본들만을 간직하게 되었다는 엉뚱한 이론을 폈는데 현대 성경본문 비평학자들은 바로 이같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가 상상 속에서 꾸며 낸 헛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역사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으며 날조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로마 카톨릭 주의에 심취되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같은 영성주의자들의 이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지금은 로마 카톨릭 소수 사본에 근거를 둔, 즉 전체 사본 중 1%에 해당하는 사본에 근거를 둔 NIV, NASB 등의 현대 역본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 성도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있다. 역본, 킹제임스 성경 참조.    
2009-07-05 01:11:21 | 관리자
  이 말은 원래 책을 뜻하며 특히 다른 책과의 구분을 위해 책 중의 책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성경 기록(Scriptures)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그 뜻은 단순히 ‘기록된 글’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즉 옛 상속 언약과 새 상속 언약으로 구성되어 있다(출24:7; 마26:28). 구약은 대부분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유대인들의 성경이 되었으며 다만 다니엘서와 에스라의 몇 장은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신약은 전적으로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이 말은 유대 지방과 처음에 복음이 전파된 대부분의 지역에서 통용되던 말이다. 신구약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행의 표준이요 잣대이며 특별히 신약은 우리의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교리와 교회를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처음에 수용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던 말로 성경을 주셨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배운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고 구원받기를 원함을 잘 보여 준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참조. 구약성경은 모두 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율법서, 대언서, 기록서 즉 거룩한 기록서로 구분하였다. 율법서는 모세오경을 뜻하며 이것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서 회당에서 1년에 한 차례씩 읽을 수 있게 했다. 대언서는 여호수아기,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구성된 역사서들 즉 ‘초기 대언서’와 다니엘을 제외한 다른 대언서들로 구성된 ‘후기 대언서’로 구성된다. 후기 대언서들은 이사야, 예레미야(애가는 포함되지 않음), 에스겔 같은 큰 대언서와 열두 개의 작은 대언서로 구성되는데 회당에서는 초기와 후기 대언서의 일부와 율법서를 읽었다. 끝으로 기록서는 그 외의 다른 책들 즉 시편, 잠언, 욥기, 아가서,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를 포함하였다. 한편 현대 성경에서는 모세오경을 포함한 역사서가 앞부분에 그리고 시가서가 중간에 그리고 대언서가 맨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서기관 에스라가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구약의 정경을 수집하고 확정지은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신약성경은 27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책은 사도들의 손으로 기록되어 후대에 한 권의 정경으로 정착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행적을 담은 복음서, 사도들의 행적을 담은 사도행전, 교회를 위한 서신서, 그리고 앞날을 보여 주는 계시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의 장절 구분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도입되었으며 장은 1240년경에, 구약의 절은 1450년경에, 그리고 신약의 절은 1551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목록, 신약성경목록 선도 참조(8-10). 처음으로 세상에 잘 알려진 영어 신약성경은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인 1370년경에 나온 위클리프 성경이다. 그 뒤 인쇄술이 발명되고 1526년에 처음으로 틴데일의 신약성경이 인쇄되어 나왔고 1535년에 커버데일은 처음으로 신구약을 포함한 성경전서를 발간하였다. 그 뒤 커버데일과 다른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매리 여왕의 압제를 피해 제네바에 거하면서 1560년에 제네바 성경을 출간하였고 그 후 1611년에 제임스 왕에 의해 일반 사람들을 위한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되어 지난 400여 년간 온 세상에 복음을 알리는 표준 성경이 되었다.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가 최고조에 이른 때에 당대의 석학 50여 명이 원어에서 충실하게 번역한 성경으로 단 한 번의 수정 없이, 단 하나의 오류 없이 당당하게 세월의 풍파를 거스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으며 문학적으로도 영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성경의 보존 선도 참조(91). 킹제임스 성경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히브리어 전통 마소라 본문과 그리스어 공인 본문을 축자적으로 완벽하게 번역하여 전 세계 공통어인 영어로 표현하여 말 그대로 모든 성경의 표준이 되었다는 데 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NIV, NASB 같은 현대 역본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이것들은 한결같이 부패된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 그리스어 비평 본문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수천 군데에 오류를 담고 있고 특히 축자적, 형식적 일치 번역이 아닌 동적 일치 번역이므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계시, 영감, 보존, 정경, 마소라, 사본, 킹제임스 성경 참조.    
2009-07-05 01:09:50 | 관리자
  구약성경에서 이 말은 ‘일하다’를 뜻하며 들에서(출1:14), 성막에서(출27:19), 성소에서(민7:9) 일하고 또 주님을 섬기거나(민8:11) 레위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을 뜻한다(민8:22). 신약에서 이 말은 ‘심부름 하다’를 뜻하며 종으로 섬기는 것을 표현한다. 집사라는 용어가 여기서 파생되었다. 사역자, 사역 혹은 ‘섬기다’(고후11:8; 롬15:31; 계2:19) 등이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또한 이 말은 종교적인 경의를 표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며(요16:2; 롬9:4; 12:1; 히9:1) 경배(敬拜)를 뜻하기도 한다(고후9:12; 빌2:17). 그래서 예배를 영어로 worship service라고 한다.    
2009-07-05 01:09:1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