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교회를 통해서 얻는 구원
로마 카톨릭 주의에서는 오직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은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구원의 보편적 보조 수단인 그리스도의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 방법의 모든 충족에 도달할 수 있다.’(일치교령 3항)[제1편 p.316 #816].
여기에서 카톨릭 교리의 공식적인 입장을 담고 있는 자료가 대담하고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바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카톨릭 교회는 더 이상 그러한 교리를 믿지 않습니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리 문답서의 입장은 명백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 공의회는 성서와 성전(聖傳)에 의거하여 나그네길에 있는 이 교회가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카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알면서도 이 교회에 들어오기를 거부하거나 끝까지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교회헌장 14항)[제1편 p.328 # 846].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다음에 반복되는 진술을 보십시오.
교회 안에 풍부한 ‘구원의 방법’(일치교령 3항)들이 위탁되었다. 이러한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교회헌장 48항)된다[제1편 P.320 #824].
교회 안에는 머리와 결합된 그리스도의 몸이 완전하게 존속한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모든 방법을’(선교교령 6항) 그분에게서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제1편 p.323 #830].
이 주제에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들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결코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교회 - 피조물인 사람들의 모임 - 를 통해야만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둘째, 사실상 수백 군데의 성경 구절은 구원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쾌히 주시는 선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니라(롬6:23).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이름이나 혹은 어떤 단체도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니라(행4:12).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서 온 인류의 죄에 대한 충분하고도 완전한 값을 지불하셨으며 어느 누구라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자신에게 직접 나올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으며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반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복된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나니(요6:47).
이외에도 요1:12, 요3:18; 요3:16, 요6:40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요20:31에서 우리는 복음이 기록된 이유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오직 이것들을 기록함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베풀기 위해 결코 교회를 사용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영생의 선물은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하여 모든 대언자들도 증언하되,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들의 사면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10:43).
성경에 의하면, 죄에서 구원 받는 것 즉 구속(救贖)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지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롬3:24).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홀로 영생의 선물을 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엡1:7)
다시 한번 우리는 구원의 필요 충분 조건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롬1:16).
성경의 많은 부분이 이 주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정하셨음이라(살전5:9).
예수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구원이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이루어짐을 보여 주셨습니다. 결코 교회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 곁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가 외쳤습니다.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눅23:42).
그 죽어 가는 죄인이 그렇게 말했을 때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피조물의 모임인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요3:17).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롬5:9).
만일 구원이 오직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우리의 영원할 운명이 걸린 문제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성경을 통해 우리를 고의적으로 속이셨다는 말입니까? 카톨릭 교회가 초대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베드로가 성경 기록에서 공개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직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15:11).
결 론
비록 카톨릭 주의가 구원은 오직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누구를 믿을지 결정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전통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둘 다라고 말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서로가 상대방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요일4:9).
기억하십시오. 언젠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서서, 여러분이 내린 결정에 대하여 그분께 그 이유를 설명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전통을 따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시겠습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으니 곧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너희가 행하는 바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이라(막7:8).
2009-07-03 11:30:31 | 관리자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누가 최종 권위입니까?
구체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리들에 관한 검토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누가 과연 최종 권위가 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첫 번째로 중대한 모순에 직면하게 됩니다. 비록 카톨릭 주의가 세 개의 최종 권위가 있다고 가르친다고 해도 성경은 오직 성경 하나만이 유일 무이한 최종 권위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1994년판 「카톨릭 교회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성전(聖傳)과 성서와 교회의 교도권은 하느님의 가장 현명하신 계획에 의하여 어느 하나가 없으면 바른 것이 성립될 수 없고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또한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한 성령의 작용 아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기여하도록 상호간에 연관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음은 명백한 일이다(계시헌장 10항)[제1편 p.45 #95].
이 구절에 따르면 성경과 교회의 거룩한 전통 여러 시대를 통해서 전수된 가르침인 성전과 교도권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증된 해석을 부여하는 작업이 그 중요성에 있어서 모두 동등하다고 합니다(#82 참조). 카톨릭 교리에 따르면 교회의 전통과 교도권은 기록된 성경말씀 만큼이나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됩니다.
성서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전(聖傳)이란 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부탁하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후계자들에게 온전히 전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진리의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 설교로 충실히 보존하고 설명하며 널리 전파하도록 한 것이다[제1편 p.41 #81].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개의 새로 다른 ‘최종 권위들’이 서로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답합니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유전적 해석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다(계시헌장 10항). 즉 로마 주교인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를 이루는 주교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제1편 42 #85].
교리 문답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책무는 교회에 맡겨져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교회가 오직 로마 카톨릭 교회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교리 문답서 전체를 통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들이 ‘교회’라고 말할 때는 언제나 유일무이한 로마 카톨릭 교회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성서 주석자들의 임무는 이 같은 규칙을 따라 성서의 뜻을 더 깊이 깨닫고 설명하여 예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연구를 통해 교회의 판단이 성숙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서 주석의 방법에 관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판단에 속하므로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직무를 수행한다(계시헌장 12항)[제1편 p.51 #119].
따라서 이 교리 문답서는 단 하나의 최종 권위는 성경이 아니라 카톨릭 교회가 현재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지으며 그 이유는 교회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인증(認證)된 해석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에 동의할까요?
만일 성경, 전통,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 이 모두가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가르침에 동의하는 내용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카톨릭 주의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에서는 성경 안에서 자신의 기록된 말씀은 언제나 완전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단련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이 말씀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주의 말씀은 처음부터 진실하시오니 주의 의로우신 모든 판단은 영원히 지속되리이다(시119:160).
성경은 기록된 성경말씀만이 유일한 최종 권위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록된 말씀에 함부로 손을 대는 행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엄중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 버리면 하나님께서 생명 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몫을 빼 버리시리라(계22:18-19).
사도 바울은 성경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반대되는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충고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 이는 이 같은 자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배만 섬기며 좋은 말과 빼어난 말솜씨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속이기 때문이니라(롬16:17-18).
사도 바울은 참 신자들을 향해서 권고하기를, 기록된 성경말씀에 역행하는 교리를 가르치는 자는 어떤 자든지 피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또한 이러한 거짓된 가르침을 믿는 자들의 결말에 대해서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선포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그리고는 그 말을 곧바로 반복합니다.
우리가 전에 말한 것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아들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선포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9).
따라서 카톨릭 교회의 교리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모순이 될 때 성경 말씀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잠언 기자도 마찬가지로 감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하는 자들에게 엄히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 너는 그분의 말씀들에 더하지 말지니 이는 그분께서 너를 책망하실 터인즉 네가 거짓말쟁이로 드러날까 염려함이라(잠30:5-6).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고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이 한 번 기록되었고 영원히 고정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오 주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정착되었사오며(시119:89).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 이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기 때문이라.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지속되나니 복음으로 너희에게 선포한 말씀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원래 그대로 완전하므로 변경될 수 없습니다.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시키고(시19:7).
카톨릭 주의는 오직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만이 성경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난 것이 없나니 이는 대언이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아 말하였음이라(벧후1:20-2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그들의 교리를 취하기를 원하십니까? 사제들로부터인가요, 아니면 성경으로부터인가요?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바울은 여기에서 교도권이나 교회의 전통을 암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 구절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린아이때부터 네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딤후3:15).
바울이 이 말씀들을 기록할 당시에는 아직 카톨릭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카톨릭 주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버리셨습니까?
이 성경구절들과 기타 다른 수많은 성경구절들이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더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권위를 어느 누구에게도 부여하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록하셨던 그 상태로서 완전하고 완벽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답변해야 할 첫번째 질문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자신이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교황과 카톨릭 교회에게 자신의 말씀을 변경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심으로써 이러한 성경의 금지 명령들을 모두 다 스스로 어기셨을까요?
바리새인들(종교적 위선자들)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우리 주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을 공공연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으니 곧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너희가 행하는 바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이라(막7:7-8).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는 것에 반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지만 사람의 전통은 그들을 영원한 파멸로 이끈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이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종교가 규정한 모든 관례를 준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어라 말씀하셨는지 보십시오.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여, 어찌 너희가 지옥의 정죄를 피하겠느냐?(마23:33).
어째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위반하느냐고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그들에게 응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또한 어찌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느냐?(마15:3).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전통보다 성경을 높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하고 있느니라(마22:29).
하나님의 변함 없는 말씀은 언제나 최종 권위로 존재해 왔지만 사람들의 전통은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조심하라. 이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골2:8).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 최종 권위인지를 알았습니다.
베레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탐구하므로(행17:11).
베레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전해들은 것들이 과연 진리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최종 권위 곧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달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3-24).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림은 너희가 우리에게서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들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느니라(살전2:13).
바울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을 때, 그것은 결코 카톨릭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카톨릭 주의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 론
하나님은 결코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말3:6). 왜냐하면 그분은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역시 변하시지 않습니다(히13:8). 왜냐하면 그분도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이 계속해서 변해야만 한단 말입니까?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을 읽을 때 여러분은 여러분이 믿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최종 권위인가를 결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입니까, 아니면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입니까?
우리가 조사할 모든 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카톨릭 주의의 가르침이 완전히 반대인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여러분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서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전통 편에 서시겠습니까?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주의 사항:
기록된 말씀인 성경만이 홀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언급하는 경우에는 예외 없이 카톨릭 교회의 전통이나 교도권이 아니라 오직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의미함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어다(롬3:4).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단련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이 말씀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2009-07-03 11:25:53 | 관리자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저자 서문
최근 들어 로마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양 진영의 다수가 상대 진영을 자신들의 형제요 자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들어 보지도, 상상해 보지도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이 기독교 텔레비전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여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일치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라디오 방송국에서 로마 카톨릭 프로그램을 내보냅니다.
기독교 서점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 관해 호의적으로 쓰고 있는 다양한 책자의 자료들을 팔고 있습니다.
진정 양 진영이 하나로 통합된 것일까요? 이제는 그들 모두가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나요? 이제 둘 다 완전히 일치하는 기본 교리를 붙들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아내기 위해서 저는 1994년에 출판된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에 대해 철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에 저는 위에 언급한 책을 사용했습니다.
첫째, 이 문답서는 모든 로마 카톨릭 교리에 대한 공인된 원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책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실제로 가르치고 있는 바를 다 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 1994년에 출판된 이 책은 400년 만에 처음으로 새롭게 출판된 천주교 교리 문답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300년 전에 가르쳐진 교리가 아니라 지금 이 시간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대하고 있음을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37개에 달하는 주요한 로마 카톨릭 교리들을 검토하게 될 것입니다. 그 후 여러분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스스로 판단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책에서 저의 사적인 견해나 철학을 찾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은 단지 진정한 로마 카톨릭 교리들이 무엇이며 이 교리들에 대해 성경은 무어라 말씀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편견 없이 서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책은 결코 누구를 비난하거나 정죄하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의 유일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로마 카톨릭 교리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삶을 마친 후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기 위해 서게 될 그때를 잘 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 날에 누군가가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시는 것을 듣게 될 것을 생각하면 저는 몹시 가슴이 아픕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마7:23)
하지만 성경은 주님께서 수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바로 이 말씀을 선언하실 것이라고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신다면 여러분이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분명히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여기 소개된 로마 카톨릭 주의의 교리들을 공부해 보시면 여러분은 자신 있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글을 읽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속에 그분의 진리를 밝히 드러내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부하며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역사를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권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를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2009-07-03 11:19:21 | 관리자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역자 서문
1960년대 초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회를 열어 종교 통합을 위한 발판을 구축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테레사 수녀의 발언으로 잘 요약될 수 있습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럿이듯 구원의 길 역시 여럿이다.
이 같은 사상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남의 종교를 존중해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몇 년 전부터는 사월초파일에 천주교회가 종을 치고 석가 탄생을 축하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성탄절에는 불교도들이 성탄 찬송을 불러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일간지들도 천주교의 추기경이나 불교의 주지는 참으로 아량이 많은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 이제는 소위 프로테스탄트 신학교 교수라는 사람이 우리 기독교인들도 석가탄신일을 축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독자께서 우리와 우리 자녀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염려하신다면 부디 매주 일요일 일간지의 종교란을 유심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종교 통합 혹은 종교다원주의를 부르짖고 있지 않습니까?
이 땅에 있는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럿 있을 수 있으나 이 땅에 속하지 않은 하늘나라에 가는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자신이 구원에 이르는 여러 가지 길 중에 하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같이 진리를 저버리고 ‘사랑, 일치, 평화, 통합’ 등을 부르짖는 종교 지도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늑대에게 양을 넘겨주는 사악한 자들입니다.
역자는 지난 1982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에서 공부를 하며 교수 생활을 했습니다. 1985년은 우리 가족의 삶을 크게 바꿔 놓은 해였습니다. 감리교 장로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종교적 열심을 갖고 교회 일을 했지만 참으로 진리가 가져다주는 기쁨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여 구원은 받았지만 종교에 매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벨기에에서 사역하시는 구영재 선교사님 - 지금은 캐나다에서 사역하심 - 께서 우리 교회에 오셔서 ‘종교와 복음’ 의 차이점에 대해 밝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까지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한 것은 ‘종교와 복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매우 열심히 종교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분께서는 ‘종교와 복음’에 관해서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를 들면서 설명하셨는데 그 순간 참으로 저는 큰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스스로 천주교의 유래와 본질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기원이 고대 바빌론 신비 종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천주교와 기독교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계사와 기독교회사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편에 유리하도록 미화되고 변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의 경우를 보면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이때에 정부와 타협을 한 자들만이 공공연하게 예배 처소를 짓고 밖으로 나와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지하 교회에 머무르거나 순교를 당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100년 혹은 200년이 지난 다음 북한의 교회사를 저술하는 사람은 자연히 배도한 사람들의 자료만을 갖게 될 것이며 배도한 교회의 교회사를 공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료에 근거한 교회사는 참된 교회사가 될 수 없으며 오직 참된 교회사는 하늘의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사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700년 동안 천주교는 이 세상과 짝하며 세계의 정치 및 종교를 주도하려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사 시간에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결코 기독교인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예루살렘을 차지하여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진 천주교 교황이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기독교가 온 세상에 전파될 때부터 크리스천들은 순교하는 삶을 택할지언정 자기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이단으로 내몰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은 “기독교는 천주교에서 나왔다.”는 주장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 역시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이 주장하는 바로서 천주교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주교는 주후 313년에 생겼는데 그렇다면 그 전에는 기독교가 없었다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마리아를 숭배하고 교황을 따른 천주교인이었단 말입니까?
∙천주교는 구교이고 기독교는 신교라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까?
오직 한국에서만 이렇게 구분되고 있는데 결국 이 같은 구분은 천주교가 기독교의 모체라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개신교(改新敎)라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예수교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는 '개신'을 믿는 것인가요?
이제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같은 속임수로부터 용기 있게 뛰쳐나와야 하며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부르든지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주교와 기독교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리교에서 장로교로 가면 교회를 바꾸었다고 하지만 천주교에서 감리교 또는 장로교로 오면 '개종'(改宗)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개종'은 말 그대로 '종교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의 요람이 결코 천주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백성으로 부르신 유대인들이 세운 유대교라는 사실입니다. 주후 33년에 시작된 기독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좁은 길이었고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 길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이 수없이 많은 성도들을 죽였지만 계속해서 기독교가 흥왕하는 것을 보고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교를 국가의 공인 종교로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려 했습니다. 이런 목적 하에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었고 이때 세상과 짝하고 정권과 결탁한 무리들이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 사상까지도 포용하며 천주교를 만들어 기독교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기독교에서 나간 것이지 결코 기독교가 천주교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후에도 천주교는 복음대로 믿고 그대로 살고자 하는 많은 무리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종교 재판 등을 통해 수없이 죽였습니다. 유아 세례를 부인하고 예수님처럼 물에 잠기는 침례가 맞다고 주장한 침례교도들을 죽였으며 미사에서 사제가 주는 빵 조각이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며 진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크리스천들을 수없이 죽였습니다.
그러다 16세기 초반에 천주교 사제였던 루터가 복음을 깨닫고 다시 기독교로 돌아오는 일이 생겼습니다. 물론 루터 이전에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좁은 길을 걸어온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른 교회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는 독자는 「새 교회사」(규장문화사刊)와 「순례하는 교회」(전도출판사刊)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 신들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불러 내사 유대인들의 조상이 되게 하셨으며, 유대교를 신봉하며 열심을 내어 크리스천들을 잡아죽이던 바울을 회심시켜 온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하게 하셨고, 천주교 사제로 지내던 루터를 회심시켜 그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로마의 교황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니 이 어찌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21세기에 들어선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반대하는 이들이 모두 연합하여 ‘뉴에이지 시대’ 즉 ‘새 시대’의 도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내거는 슬로건은 '평화와 일치'입니다. 이런 슬로건 하에서 이들은 전 세계의 종교, 문화, 교육, 정치 등을 통합하여 인간들에 의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하고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성경은 분명히 적그리스도가 다스리게 될 뉴에이지 즉 새시대가 ‘평화’의 이름으로 도래할 것과 그 때의 징조로 기독교회에서 배교하는 일이 있을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가 또 자기의 정책을 통하여 자기 손에서 속임수가 형통하게 하고 마음 속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며 평화를 빌미로 많은 사람을 멸할 것이요, 또 일어서서 통치자들의 통치자를 대적할 것이나 그가 손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무너지리라.(단8:25)
또 사람들이 평화와 안전을 말할 그때에 아이 밴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같이 갑작스런 파멸이 그들 위에 임하기 때문이니 그들이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라(살후2:3)
온 세상이 진리를 내버리고 ‘평화와 안전’을 이야기하는 이때야말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던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1994년에 미국의 타임지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를 베스트 셀러의 하나로 선정했습니다. 이 책은 교황 바오로 2세가 공인한 책으로 현재 로마 카톨릭 교회가 믿는 바를 있는 그대로 모두 보여 주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에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라는 제목으로 3권으로 나누어 출판했습니다(색인 등을 제외하고 총 981쪽이며 성바오로 서점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음).
이 교리 문답서가 나오자 미국의 존스(Rick Jones)는 「로마 카톨릭 주의를 이해하자」(Understanding Roman Catholicism)라는 책을 저술하여 천주교 교리 문답서와 성경이 기본적인 교리에서부터 상호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미국 Chick 출판사, 1995년).
역자들은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이 천주교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현 상황을 심히 안타깝게 생각하던 중 금번에 존스의 책을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성경을 모르고 교회가 하라는 대로 하면 구원받을 줄 알고 교회에 충성하는 천주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천주교 교리 문답서가 서로 얼마나 모순되는가를 보여 주어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록으로 실은 글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천주교와 관련된 소책자 및 팜플렛 등을 번역한 것입니다. 글마다 그 출처를 밝혀 놓았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서를 대하는 독자들께서는 역자들을 천주교에 대한 편견과 무조건적인 증오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께 역자들은 다음과 같이 묻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간구하며 상아로 만든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을 보고 사람이 만든 우상은 대답을 줄 수가 없다고 말한다면…
과연 이것이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겨우 열여섯 살 난 소녀가 고해 성사 창구에 가서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에게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유혹 받은 것 등을 말해야만 하는 것을 보고 이 모든 것을 주 예수님께 아뢰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과연 이것이 그녀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한 여인이 죽은 자기 남편이 연옥에서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를 위해 미사를 드리며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갖다 바치는 것을 보고 연옥이란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과연 이것이 그녀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십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금과 세마포로 치장한 교황을 신뢰하며 천국의 열쇠를 받고자 하는 것을 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사람을 신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과연 이것이 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시려고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독사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과연 이것이 그들을 미워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이방 신비 종교를 믿는 철학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너무나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을 때…
과연 이것이 그들을 미워한 것입니까?
역자들은 결코 천주교인을 미워하거나 실상을 잘 모른 채 종교 통합 운동 등에 빠져 들어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고 가는 인본주의 종교 체제의 진상만을 보여 드리려 합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우리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인격적으로 훌륭한 천주교인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대로 우리를 심판하시지 않고 우리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스스로 보내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각자 개인의 구원자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알게 모르게 종교 통합주의를 주도하며 사람들을 마귀의 제물로 만드는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악한 제도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하는 자들을 향해 설교의 왕자요, 은혜의 복음을 전파했던 스펄전 목사는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주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수6:26)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 카톨릭 교회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 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그리고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처럼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죄악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사려 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 때에 로마 교회가 저지른 죄악의 진상을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우리는 보다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만 한다.
로마 교회에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 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마귀는 거위 깃털 펜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성령님의 축복으로 쓰여진 책들이 마귀의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
본서에서 사용한 성경은「권위역본」(Authorized Version)으로 알려진「킹제임스 흠정역 성경」(도서출판 ‘그리스도 예수안에’, 2001년 8월 출간)임을 밝힙니다. 이 성경을 택한 이유는 초대 교회부터 좁은 길을 걸어간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안디옥 교회가 전해 준 ‘다수 사본’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틴데일, 루터, 칼빈, 웨슬리, 무디, 스펄전 등 과거 믿음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킹제임스 성경」 혹은 ‘다수 사본’에서 번역한 성경만을 사용했으며 사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출간된 성경의 대다수가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이 성경의 위력에 눌려 꼼짝 못하던 천주교는 드디어 성경 자체를 변개시키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로 나온 역본들이 NIV, NASB, Living Bible 등이며 이러한 현대 역본들은 다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의 카톨릭 ‘소수 사본’에 근거를 둔 카톨릭 성경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전해 준 성경을 버리고 카톨릭 성경인 현대 역본들을 취하게 되면서부터 카톨릭 교리가 틀렸다는 것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보다 상세히 알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역자 추천 참고 도서 목록에 있는 성경 관련 자료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2002년 8월에 이 책의 출간을 흔쾌히 다시 허락해 준 미국 칙 출판사의 존스 형제에게 특별히 감사를 드리고(2002년 8월) 복음의 빛으로 눈을 돌리게 해주신 구영재 선교사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신 육신의 부모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또한 도서출판 두루마리의 깊은 배려에 감사를 드리며 주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등불을 밝히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소수의 형제 자매들 위에 예수님의 평강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2009-07-03 11:16:53 | 관리자
2009년은 다윈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이 세상에 미친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큽니다. 그런데 그의 이론을 반박하는 책 - 다윈도 모르는 진화론 - 이 나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줍니다. 그는 영국의 과학 전문 기자/작가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객관성을 가지고 진화론의 문제를 잘 파헤쳐 놓았습니다. 이 책이 성도 여러분과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음은 Yes24의 평입니다. 참조하세요.
과학계를 지배해 온 신성불가침의 이데올로기, 진화론
“우리는 어디에서 왔어요?”, “지구는 몇 살인가요?”, “나비와 코끼리의 조상이 진짜로 같아요?” 호기심이 가득한 우리의 질문에 진화론 신봉자들은 무려 ‘46억 년’ 전에 지구가 형성되었고, ‘38억 년’ 전에 원시 바다에서 지구상의 생명체가 탄생했으며, 무작위적인 유전자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 과정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했다고 근엄하게 알려준다. 현대 지질학의 주춧돌이자 현재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진화론은 종(種)의 기원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진화를 설명하는 가장 합리적인 이론으로서 무적의 위세를 떨치고 있다.
진화론에 커다란 구멍이 있다면?
다윈의 이론은 자연 선택과 짝 지워진 무작위적인 유전자 돌연변이가 38억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생물종을 변화시켰다는 개념에 의존한다. 그러나 실제 증거는 자연 선택을 통한 유전자의 변화가 극히 제한적임을 드러낸다. 현대의 지구 연대 측정법은 지구의 나이가 생각보다 어림을, 따라서 단세포 유기체로부터 복잡한 생명체가 진화할 시간이 충분치 않음을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다윈의 이론처럼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진화했다면 그 사실을 입증할 화석 자료는 왜 발견되지 않는 걸까? 기린의 목이 점차적으로 길어졌다면, 왜 짧은 목의 기린 화석과 중간 목의 기린 화석, 긴 목의 기린 화석을 찾아볼 수 없는 걸까?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한 진화론의 딜레마
2009년은 다윈 탄생 200주년이자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 되는 해로, 이를 기념하는 갖가지 과학 행사가 열리고 관련 도서가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정황적 증거만을 내세울 뿐 여전히 우리에게 객관적 증거를 보여주지 못한다. 이미 반세기도 전에 졸리 주커만(Solly Zuckermann)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우리의 조상이 아닌, 단지 멸종된 유인원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지느러미를 이용해 걸어 다니다가 육지로 뛰어올라 육상 생물의 형태로 진화했다고 알려졌던 물고기, 실러캔스 또한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발견되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이 외에도 진화론을 반박하는 수없이 많은 과학적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진화론자들은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과학적 연구 결과를 무시하거나 은폐하려 한다. 연구집 출간을 방해하거나, 연구 자금을 받지 못하게 훼방하는 방식을 사용해서 말이다.
10여 년의 연구 끝에 밝혀낸 진화론 신화의 허상
진화론을 하나의 신앙처럼 바라보는 과학계의 편중된 시선을 우려한 저자 리처드 밀턴이 직접 진화론 연구에 뛰어들었다. 과학 전문기자 출신의 그는 객관적인 시선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진화론이 낡은 정황 증거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취약한 이론임을 보여준다. 10여 년에 걸친 자료 수집 끝에 탄생한 《다윈도 모르는 진화론》을 읽어나가다 보면 일종의 신화가 된 진화론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예스24 제공]
저자의 말:
우선 나는 진화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정황 증거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를 유발하는 메커니즘이 자연 선택과 결합한 우연한 돌연변이라는 신다윈주의자(neo-Darwinist)들의 주장에는 어떠한 뚜렷한 증거가 없음을 지적한다. 두 번째로, 나는 지구의 나이가 겨우 수천 년 정도라고 믿는 게 아니라, 지금 인정받고 있는 연대 측정 방법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현재의 연대 측정 방법은 단지 다윈주의자들이 그들의 이론을 성립시키기 위해 수십억 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방사성 연대 측정법은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로선 지구의 나이가 실제로 몇 살인지 확실히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 '다윈도 모르는 진화론' 들어가며 중에서
2009-07-02 11:44:47 | 관리자
아래 글은 오인용목사님께서 쓰신 글 입니다. 공유하고자 올려드립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고 들을때 그것이 옳은 것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할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특히 영적인 ,종교적인 면에서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 이유는 한번 선택하면 거의 일생을 가기 떄문이다,( 영원까지 결국에는 가는 것이다)교회를 선택하고, 신앙을 선택하고, 믿음을 선택할때 그것이 성경적인지 아니면 비성경적인지를 알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무지하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육적인 선택은 탁월하다,
자신의 육체를 위해서는 돈과 노력과 정성을 드린다, 그래서 좋은 옷과 자동차, 집과 땅,음식등을 선택하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대부분이 어리석고, 미련하다,
정말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설교,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믿음과 신학 , 교회를 진지하게 ,진리에 근거해서 선택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이것도 육적인 선택기준으로 해버리니 영적인 재앙을 당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크고, 화려하고, 편한하고, 부담없고, 즐겁고, 유쾌하고, 흥미가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진리에 의한 판단이나 선택보다는 자신의 육적인 만족을 위한 선택으로 기준을 삼는 것이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교인들의 영혼과 삶에 진정 유익하고, 진리로 이끄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때 수많은 영적인 방랑자와 방황자들이 생기며 영적인 체념속에 사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자신이 순례하는 지상의 기간을 제대로 영적인 돌봄과 인도를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늘 일깨워줘야 하는 것이다,
분별력의 기준은 오직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말씀을 옳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분별력의 기초다, 그런 책들과 강의,.말씀 가르침, 교훈을 들어야 분별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냥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진리와 거짓을 알기위한 치열한 삶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목회자들 (목사와 전도사 등 )분별력에 있어서 점점 크게 밑으로 하향하고 있다
한순간의 효과를 바라고 결과를 바라는 그런 게으르고 ,미련한 목자들이기 넘쳐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육적인 만족과 기대, 성취, 목표를 이루는 것이지(교회성장 , 교회건축, 선교와 전도의 성장 )
진리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진리는 각자 자기가 옳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던의 영향)
분별력일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우상과 미혹의 길을 가던가
제발 성경을 어디로 보는가? 눈으로 지성으로 보는가?아니면 엉덩이나 발로 보는가?
신약교회사에서도 분별력을 잃어버린 세대가 얼마나 많았는가?
오늘 이시대의 교회는 전 교회역사상 중세시대 이후로가장 크게 분별력을 잃은 세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얼마나 분별력을 가지고목회를 하고 , 신학을 공부하고,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지?
진지하게 묻기를 바란다,
교회안에서 설쳐대는 미혹의 영들이 이리저리 떠도는 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오인용 목사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7:1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6-23 14:39:19 | 김학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큰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주의 크기를 보여 주는 블로그를 소개합니다.
http://blog.daum.net/anstjd66/16142632
지구의 상대적인 크기를 보려면 다음의 블로그를 보기 바랍니다.
http://kr.blog.yahoo.com/usblife/1546
이 거대한 우주를 설계하여 창조하신 분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손 안에 이 거개한 우주가 놓여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샬롬.
2009-06-20 15:37:18 | 관리자
너무 감사합니다.
2009-06-15 16:27:47 | 김광식
가나안에서 태어난 레위의 세 아들 중 막내.
그는 레위 사람들 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다(창46:11; 출6:16; 민3:17; 대상6:1). 광야에서 생활할 때 므라리 가족은 성막의 구조물을 맡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지고 가서 세우는 일을 했으며(민4:29-33; 7:8) 가나안 정복 이후에 그들에게는 요르단 너머에 열두 도시가 배정되었다(수21:7, 34-40).
2009-06-15 00:25:49 | 관리자
에녹의 아들.
그는 라멕의 아버지였으며 969세를 살아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 가장 오래 살았고 홍수가 생기기 바로 전에 죽었다(창5:21-22, 27). 노아의 대홍수 이전에는 궁창 위의 물 층이 있어서 해로운 자외선을 차단하였으며 그 결과 사람의 수명이 길고 또 짐승이나 사람의 크기도 컸다. 또한 온 세상이 온화해서 심지어 극지방도 열대성 기후를 나타내서 심지어 매머드 같은 짐승도 극지방에 살았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 사람의 수명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여 노아는 950세, 살라는 433세, 벨렉은 239세, 아브라함은 175세, 모세는 120세, 다윗은 70세를 살았고 그 이후로 평균 수명이 70-80세가 되었다(시90:10).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천년왕국 때에는 다시 수명이 증가하여 100세에 죽은 사람을 아이라고 부르는 일이 발생한다(사65:20). 천년왕국 참조.
2009-06-15 00:25:19 | 관리자
아브라함과 그두라의 아들(창25:2). 그는 자기 형제 미디안과 함께 아라비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2009-06-15 00:24:44 | 관리자
I. 요셉의 장자.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후손들은 하나의 완전한 지파를 형성하고 후에 가나안 땅에서 둘로 나뉘었다. 그래서 일부는 바산 지방 즉 요르단 동쪽(북쪽)에 거하였고 다른 일부는 에브라임과 잇사갈 사이에서 요르단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에 거하였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므낫세 지파 지도 참조(19, 23). 므낫세는 야곱의 예언에 따라 재물과 권세에서 에브라임보다 훨씬 못하였다(창41:50-51; 48:1-22; 수16, 17). 지파 참조.
II.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그는 12세에 왕이 되어 55년 동안 치리하였다. 그의 우상숭배와 폭정과 잔인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의 통치 제22년에 그가 바빌론에 죄수로 끌려가게 하셨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낮추었고 이에 하나님은 아시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를 돌려보내 그가 다시 왕권을 유지하게 하셨고 그때부터 그는 자기가 행한 악을 되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기가 숭배하던 우상들과 자기가 조언을 받던 점치는 자들을 제거하고 자기 왕국의 영적/물질적 번영을 위하여 많은 것을 개혁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 방어벽을 보수하고 유다의 견고한 도시들을 강화시켰다. 그는 유다의 왕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통치하다가 평안히 죽어 예루살렘에 묻혔다(왕하21; 대하33).
III.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의 할아버지(삿18:30). 요나단 참조.
2009-06-15 00:24:07 | 관리자
이스라엘의 열여섯 번째 왕.
그는 전에 사가랴 왕의 군대 장관이었으나 디르사에 있을 때 살룸이 왕을 죽이고 사마리아로 몸을 숨겼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대적하기 위해 즉시 돌아와 그를 붙잡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10년 동안 통치하면서 폭정을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때에 아시리아의 왕 불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자 그는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부유한 사람에게서 각각 오십 세겔을 취하여 1,000달란트를 바쳤다. 그는 정상적으로 죽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브가히야는 2년 동안 통치하였다(왕하15:13-22).
2009-06-15 00:23:31 | 관리자
키프러스 사람. 그는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오래된 제자’로 불렸다(행21:16).
2009-06-15 00:23:02 | 관리자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100드라크마와 같았다(눅19:13, 16).
2009-06-15 00:22:37 | 관리자
므낫세 지파에게 속하고 잇사갈 지파의 경계에까지 이른 마을.
이곳은 예전에 가나안 족속들의 귀중한 도시였으며 그들은 오랫동안 여기를 점령하였다(수12:21; 17:11; 삿1:27). 이곳은 기손 근처 평야의 남서부 경계에 있었으며 그래서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서는 승리의 장소로 므깃도의 물가가 나온다(삿5:19, 21). 솔로몬의 통치 때에 이곳은 강화되었으며(왕상9:15) 바로 여기에서 아하시야가 죽었고 요시야 왕도 전쟁에서 패하여 죽임을 당하고 백성으로부터 큰 애도를 받았다(왕하9:27; 23:29; 슥12:11). 이곳은 므깃돈으로도 불린다(슥12:11).
2009-06-15 00:22:09 | 관리자
이집트 탈출 뒤에 히브리 여인들이 내놓은 놋 거울을 주조하여 만든 원형의 큰 그릇.
이것은 성막의 문과 태우는 헌물을 드리는 제단 사이에 있었으며 여기에 물을 담아서 제사장들이 몸을 씻을 수 있게 하였다(출30:18-21; 38:8; 40:7). 솔로몬 성전에서는 제사장들이 사용한 큰 물두멍 외에도 희생물을 씻기 위해 열 개의 물두멍이 마련되었다(대하4:6). 각각의 물두멍은 약 1,000리터 정도의 물을 담을 수 있었고 아름다운 지지대 위에 놓였다(왕상7:27-39). 이것들은 성전 앞에 있는 제사장들의 뜰 안에 양쪽에 각각 다섯 개씩 놓였다(왕상7:39). 성전 참조.
2009-06-15 00:21:39 | 관리자
히브리 사람들은 물고기의 이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이름이 많지 않다. 모세는 강이나 호수나 바다의 물고기 중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는 것은 먹어도 되고 다른 것은 가증하다고 말했다(레11:9-12; 신14:9-10). 나일 강에는 좋은 물고기가 많았으며(출7:18-21; 민11:5) 디베랴 바다에도 역시 물고기가 많았다(눅5:5; 요21:6-11). 유대인들은 물고기를 흔하게 먹었고(마7:10) 지중해와 요르단 강에서 물고기를 얻기도 하였다(느13:16). 그들은 낚시나 창이나 그물로 고기를 잡았다(욥41:7; 사19:8-10; 암4:2).
원래 영어의 fish는 ‘물에 사는 생물’을 뜻했으며 따라서 요나를 삼킨 고래 역시 이런 차원에서 큰 물고기였다(욘1:17). 성경에는 어부들도 자주 나오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상당수가 어부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들을 사람들을 낚는 어부로 만드셨다(마4:18-22).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당할 때 믿음 고백의 표시로 메달이나 무덤 등에 물고기를 새겼다. 왜냐하면 물고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다섯 글자가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다섯 단어의 첫 글자들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고기 상징은 이제 어느 정도 미신적인 요소를 띠게 되었다.
2009-06-15 00:21:11 | 관리자
팔레스타인에는 도시나 시골에 물 저장고가 많았다. 여기에서는 1년 중 반은 비가 오지 않았고 그래서 마르지 않는 강이나 샘이 거의 없었으므로 우기의 비를 물 저장고에 담아 두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이런 물 저장고들은 물탱크 혹은 연못 등으로 불렸으며 관개용수가 필요한 밭에 또 여행자를 위해 큰길의 여러 곳에 만들어졌다(시84:6). 그래서 큰 도시들은 돌로 큰 저수지를 만들어 겨울의 비를 모아 두었다. 베데스다, 실로암 참조.
2009-06-15 00:20:44 | 관리자
물은 종종 눈물을 뜻하며(렘9:1) 그래서 고난(시66:12), 재난(애3:54; 시69:1; 124:4-5), 핍박(시88:17), 적군(사8:7; 17:13) 등을 상징한다. 또 물은 자식이나 후손(민24:7), 구름(시104:3), 성령님의 새롭게 하는 능력(사12:3; 55:1; 요7:37-38)을 뜻하고 물을 쏟아 붓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호5:10) 두려움으로 인해 실신하는 것(시22:14)을 뜻한다. 깊은 물은 마음속의 권고나 조언(잠20:5), 지혜로운 자의 말(잠18:4)을 뜻한다. 땅에 쏟은 물은 죽음의 상징이고(삼하14:14) 물의 불안정성은 흔들리는 성격을 뜻한다(창49:4). 사람이 물로 난다는 것은 모태에서 물속에 있다가 태어날 때 물과 함께 나오는 자연적인 출생을 뜻한다(요3:5-6). 우물과 샘 참조.
물을 퍼 올리는 작업
2009-06-15 00:20:1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