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의 둘째 아들.
그는 자기의 다른 세 형제와 함께 제사장 직분을 맡기 위해 구분되었으나(출28:1) 자기 형 나답과 함께 번제 헌물 제단에서 영속해서 타는 불로 향을 태우지 않고 보통 쓰는 불로 향을 태우다가 주님께로부터 나온 불에 의해 소멸되었다(레10:1-2; 16:12; 민16:46). 바로 이 사건 이후에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섬길 때에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 주어진 것으로 보아 그들은 술 취한 채 이런 죄를 짓고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거룩히 구별한 제단에서 불을 붙인 향 이외의 것으로 하나님께 경배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경고이다(히10:10-14).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그분께서 정하신 규례를 무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 가를 규정하시는 지혜로우신 하나님과 상관해야 하며 그분께서 친히 규정한 것을 요구하시고 그렇지 않을 경우 심판하신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009-07-10 01:43:21 | 관리자
유다 왕 르호보암의 아내(대하11:18). 여기서 ‘엘리압의 딸’이라는 말은 다윗의 형 엘리압의 후손을 의미한다.
2009-07-10 01:42:49 | 관리자
침례 참조.
2009-07-10 01:41:46 | 관리자
사해의 남동부로 들어가는 시내나 그 시내가 있던 골짜기(민21:12; 신2:13-14).
이곳은 모압의 남쪽 경계로 사렛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출애굽 참조.
2009-07-10 01:41:24 | 관리자
하만의 아내.
그녀는 하만처럼 거만하였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종 모르드개를 달려고 준비한 교수대에 자기 남편과 열 아들이 달려 죽는 것을 보아야 했다(에5:10-14; 6:13; 7:10; 9:13).
2009-07-10 01:40:59 | 관리자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자마자 레겜멜렉과 다른 이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장들에게 금식을 해야 하는가를 물어 본 사람(슥7:2).
2009-07-10 01:40:35 | 관리자
I. 르우엘의 아들, 에서의 손자(창36:13, 17).II. 유다와 다말의 아들(창38:30; 마1:3).III. 시므온의 아들, 세라 족속의 창시자(민26:13). 그는 창46:10에서 소할로 언급되었다.IV. 아사 왕 시대에 큰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침공한 이디오피아 왕(대하14:9-13).
2009-07-10 01:40:09 | 관리자
아셀의 딸. 그녀는 이집트로 내려간 사람들의 명단에 세 번 등장한다(창46:17; 민26:46; 대상7:30).
2009-07-10 01:39:38 | 관리자
경륜 참조.
2009-07-10 01:39:10 | 관리자
이 말은 보통 자손, 혈통 등의 뜻을 가질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역사 혹은 계보 등을 뜻하기도 한다. 창5:1의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책’은 아담의 창조와 그의 후손의 역사에 대한 책이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창2:4의 ‘하늘들과 땅의 세대들’은 하늘들과 땅의 창조 역사를 말한다. 또한 마1:1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은 그리스도의 계보와 그에게서 난 후손과 그분의 삶의 역사에 대한 책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첫 사람 아담의 세대에 대한 책이고 신약은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의 세대 즉 그분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한 책이다.
“한 씨가 그분을 섬기리니 주께서 그것을 한 세대로 여기시리라. 그들이 와서 앞으로 태어날 한 백성에게 그분의 의를 밝히 드러내되 그분께서 이것을 행하셨음을 드러내리로다”(시22:30-31).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널리 알리는 씨는 곧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며 성경은 주님께서 그 씨를 단 한 세대로 여긴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세대’란 그리스도로 인해 태어난 자들을 가리키며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형제이고 손자, 증손자 등이 없으므로 당연히 다 한 세대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가 다 선정된 세대라고 말한다(벧전2:9). 시14:5; 24:6; 73:15; 78:6, 8; 102:18; 112:2; 사53:8; 렘7:29; 마23:36; 24:34; 막13:30; 눅21:32; 행8:33 등의 세대도 거의 같은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현 세대’는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하며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것이 성취되리라.”(마24:34)는 말씀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다 죽기 전에 모든 일이 성취됨을 뜻한다. “이 패역한 세대로부터 너희 자신을 구원하라.”(행2:40)는 말씀은 패역한 사람들을 향한 진노로부터 피하라는 뜻이다. 세대가 얼마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그것을 정확히 구분 짓는 것은 매우 힘들다.
2009-07-10 01:38:46 | 관리자
바울의 친구로 경건한 율법사.
바울은 말년에 니코폴리스에서 디도에게 글을 쓰면서 그와 아볼로를 부지런히 도와 여행하게 하라고 했다(딛3:13).
2009-07-10 01:38:16 | 관리자
데살로니가의 제자. 그는 바울의 여행에서 함께 하였다(행20:4).
2009-07-10 01:37:47 | 관리자
놋과 은 등으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창4:22).
세공업자 혹은 대장장이는 문명 발전에 필수적이며 특별히 전쟁을 할 때에는 그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였다(삿5:8; 삼상13:19-22; 왕하24:14). 한편 신약에는 은과 구리 세공업자가 나온다(행19:24; 딤후4:14).
2009-07-10 01:37:20 | 관리자
I. 가나안 족속으로 세겜 마을의 통치자.
그는 야곱의 딸 디나를 유인하여 욕을 보였으며 후에 디나의 오라비 레위와 시므온 등에 의해 자기 마을 사람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창34:1-31).
II.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 놓인 가나안의 중부 도시.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곳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처음 나오는데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 여기에서 처음으로 제단을 세우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 지역을 소유하게 되었다(창12:6; 33:18-19; 35:4). 야곱은 이 근처에 밭을 사서 자기 아들 요셉에게 주었고 요셉은 거기에 묻혔다(창48:22; 수24:32). 가나안 정복 이후에 이곳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배정되어 레위 사람들의 도시로 도피 도시가 되었고 지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수20:7; 21:21; 24:1, 25; 삿9:1-57). 르호보암은 여기에서 열 지파가 반역하는 기회를 주었다(왕상12:1-33). 이 근처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으며 바로 거기에서 우리 주님은 사마리아의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다(요4:5; 참조 행8:25; 9:31; 15:3).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를 멸망시킨 뒤에 세겜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수도가 되었다. 사마리아 사람 참조. 세겜의 골짜기는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북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나아가며 너비는 500미터 정도 된다. 그러므로 이 두 산은 서로를 향해 메아리를 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였다(신27:11-14; 삿9:7).
2009-07-10 01:36:54 | 관리자
세겔은 원래 무게였으며 금이나 은을 다는 데 사용하였다.
“아브라함이 상인들이 널리 쓰는 돈으로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니라”(창23:16). 이런 경우에 히브리말에서 세겔은 생략되곤 하였으며(창20:16; 37:28) 영어에서는 piece라는 말을 첨가하고 이탤릭체로 표시하였다.
거룩한 세겔(출30:13)과 왕의 무게에 따른 세겔(삼하14:26)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겔이라는 명칭을 가진 동전은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마카비 시대에 나왔으며 아마도 마26:15에 나오는 은전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2009-07-10 01:36:16 | 관리자
구원받은 성도는 즉시 칭의를 얻으며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성화의 과정이 시작되는데 성화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우선 성화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이미 완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의 신분이 그리스도의 신분과 같기 때문이다(히3:1; 10:10-14; 고전1:30). 믿는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 구별된 것처럼 구별된 자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죄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그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신분적으로 완전하지만 매일의 삶에서 부딪히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은혜 안에서 자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도 존재하며 그 결과 신자는 점차로 자신의 더러운 본성에서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의 왕좌 앞에서 점도 없이 큰 기쁨과 함께 서게 된다. 이러한 점진적 성화는 죄를 고백함으로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자유로운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서 이루어진다(요14:26; 17:17; 고후3:18; 7:1; 엡4:24; 살전4:3-4; 5:23; 살후2:13; 히12:10; 벧전1:2; 요일1:7-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대적하지 말고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부활한 이후에 그의 상태마저 완전히 성화될 것이다. 즉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신분에서뿐 아니라 실제 삶 자체가 완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거룩함, 성별, 분리 참조.
2009-07-10 01:35:45 | 관리자
이 단어의 일반적인 뜻은 너무 명백하다. 그런데 이 단어는 특별히 주님의 예언과 약속이 정확한 때에 정확한 장소에서 이루어질 때 쓰였다(수23:14; 마2:17; 8:17; 12:17). 신약성경에는 이런 일이 많았고 그래서 사람들의 목적이 다르고 그들이 그 일을 수행하면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요19:24, 28, 36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킨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줄 몰랐다. 또한 “이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라는 표현은 이 말이 적용된 일이 원래의 예언 구절을 직접적으로 혹은 부가적으로 성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호세아 대언자의 말씀 즉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호11:1)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불러낸 것을 뜻하지만 부가적으로 마태는 마2:15에서 이집트에 내려간 예수님에게 그것을 적용하면서 “이것을 성취하려 함이더라.”라는 표현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런 구절은 성경에 여럿 있다(시109:8; 사6:9; 61:1-3; 마13:14; 눅4:18-21; 행1:16, 20).
2009-07-10 01:35:00 | 관리자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성인들의 신화 : 프란시스와 어거스틴
성자가 아닌 성도
사탄이 로마 종교를 이용하여 성취한 가장 악독한 일 중 하나는 기독교의 성도 말살이다. 먼저 ‘성자’ 혹은 ‘성인’(Saint)이란 단어로 회칠 당한 ‘성도’(Saint)란 단어를 생각해 보자. 종교는 금욕주의, 고행 등을 통해 도를 닦음으로써 자기 구속을 시도한다. 로마 종교의 성자들의 전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성자 개념이란 결국 모두가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중심주의와 남이 엄두도 못 낼 일들을 해 낸 인간 자랑인 것이다. 사탄은 로마 종교를 통해 수많은 인간 성자(?)들을 양산해 놓고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흐리게 해 왔다. 그들은 구원의 초점을 하나님의 아들에게서부터 인간들에게 두려고 온갖 술수를 꾸며 왔다.
살아 있는 죄인인 교황이 성자 추대식이라는 기이한 의식을 통해 죽은 죄인들을 성자로 대량 생산하는 것을 보고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기이히 여기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마지막 나팔불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감히 죄인인 한 인간이 버젓이 행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로마 교황청은 지금까지 2천 명이 넘는 성자들을 생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베트남 성자를 추대해 주지 않는다고 로마 교황청에 항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너무 많은 성자를 만들지 않았나 하고 자책하는 로마 교황청의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날조된 성자들
한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승려)이었다가 진리를 찾아 로마 종교를 떠난 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다시 살아난 중」(The Monk Who Lived Again)이란 책을 펴낸 몬타노 박사는 카톨릭 도미니칸파 소속의 유능한 작가였다. 그는 어느 날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포레스(Porres, 1579-1639)의 전기를 쓰라는 명령을 시달 받았다. 그리하여 남미 페루의 도미니칸파 소속의 포레스를 성자로 추대하기 위한 로마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전기를 써야만 했으나 한번도 그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결국 얼마 되지도 않는 자료를 갖고 성자 추대에 필수적인 기적에 관한 자료를 보완해야만 했던 몬타노 박사는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포레스의 전기를 꾸며 로마 교황청에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포레스는 1962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성자로 추대되었다. 순전히 몬타노 박사에 의해 조작된 이 성자는 오늘날 페루의 사회 정의 구현의 수호 성인이 되어 있고 이 날조된 성자는「브리태니커 백과사전」안에 버젓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Porres, San Martin de 란 참조 바람).
사탄은 모조품 로마 종교의 당위성을 주장해 왔고 인류를 속이기 위해 벨기에의 ‘제수이트들’ - 예수회 사제들 - 인 볼란디스트파를 동원하여 17-20세기에 이르는 약 3백년이란 세월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 성자들의 이야기를 집대성한「악타 쌍토룸」(Acta Sanctourum)을 편찬하였다. 전 유럽에서 일어난 제수이트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은 벨기에의 앤트워프, 브뤼셀 등지에서 계속되었고 오늘날 이 책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순교사로 읽혀지고 있다. 사실 현 시대 기독교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인용하는 로마 카톨릭 종교 성자들의 전기란 거의 모두가 이 책에서 유래된 것이다.
볼란디스트파의 우두머리였던 델레하예는 그의 저서「성자들의 전설」(The Legends of the Saints)에서 성자들에 관한 전설과 참된 전기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시인하였다. 또 다른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학자인 아트워트는「성자 사전」(The Dictionary of Saints)에서 “초기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된 많은 것 중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많은 부분이 순전히 가공된 이야기이며 나머지는 전설과 전기의 배합물이다.”라고 시인하였다.
프란시스의 신화
이탈리아의 종교사에서 앗시시의 프란시스만큼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그의 삶은 매우 겸손했고 단순했으므로 카톨릭 교인들과 프로테스탄트들 모두 그에게 매혹되었다. 확실히 그는 그 당시에 보기 드문 수도승이었다. 빛나는 갑옷을 자랑하는 기사들의 전성기에 또 카톨릭 교회가 세속화의 절정기에 다다랐던 시기에 이 보잘것 없는 수도승은 가난과 단순한 삶과 어떤 신비적인 것을 가르치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격동의 시기에 프란시스는 가난을 외치며 단순한 삶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매우 유명해졌다.
이런 말을 하면 그의 명예가 훼손될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이 모든 것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간에, 프란시스 자신이 계획한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큰 욕망과 야망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그런 욕망을 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참으로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다. 젊어서부터 그는 유명한 기사가 되려 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따라서 자기 아들에게 이탈리아 사람의 품위에 걸맞은 매우 섬세한 옷과 멋있는 갑옷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은 비록 그가 젊어서는 난폭했지만 후일에 유명한 사람이 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언젠가 이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볼 것이오.
성 보나벤튜어에 따르면 앗시시에는 아주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마치 예언자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프란시스를 만날 때마다 자기 망토를 벗어 프란시스의 발 밑에 펼쳐 놓고 프란시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렇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나는 후대에 그가 전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을 것임을 확신한다.
사실 이와 같은 일들은 쉽게 사람들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 영구히 자리를 잡곤 한다. 실제로 프란시스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은 그가 언제나 모든 것에서 앞서기를 원했다고 기록한다. 프란시스의 전기 작가인 엥글레베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프란시스의 야망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옷을 재거나 자기 돈으로 먹여 살린 무리들과 함께 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프란시스로부터 기대했던 것보다는 덜 영적인 것을 기대했다. 그는 프란시스가 귀족의 대열에 낄 것을 바랐다. 사실 영광스럽게 이러한 것을 성취하는 길은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1201년에 페루지아는 앗시시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이 전쟁은 거의 10년이나 지속되었다. 1201년 11월에 프란시스는 폰테산 지오바니 전쟁에서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포로로 잡혀 페루지아에서 다른 기사들과 더불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매우 즐겁게 생활을 했고 그래서 그의 동료 중 하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니, 도대체 당신 미쳤소? 우리가 이렇게 감옥살이를 하는데 농담이나 하고 어찌된 일입니까?”
그런데 프란시스의 대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 앞에 펼쳐질 미래를 생각해 보고 언젠가 온 세상이 나를 숭배할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슬퍼하려야 슬퍼할 수가 없군요.”
그가 감옥에서 풀려난 뒤 교황청과 아플리아 지방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 프란시스는 이때야말로 자신이 기사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기 아버지의 돈으로 산 멋있는 갑옷을 입고 그와 그의 종자는 교황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로마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떠나기 바로 전날 밤에 그는 매우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 꿈은 프란시스가 야망을 이루는 것을 도와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그 날 밤에 프란시스가 회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셀라노의 토마스는 최소한 그때부터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 꿈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의 옷감 파는 가게가 멋있는 무기와 안장 등으로 가득 찬 궁전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고 또 방에 앉아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매우 아름다운 신부를 보게 되었다. 프란시스가 영문을 몰라 놀라자 어떤 목소리가 들리면서 그 아름다운 여인과 군인들이 모두 다 그를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프란시스는 아마도 이 꿈이 전쟁에서 자신이 승리할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어두움 같은 것이 그를 덮으면서 그가 내린 해석이 틀렸음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 다음날 그가 스폴레토에서 꿈을 꾸었는데 그 음성이 다시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프란시스, 도대체 이 모습을 하고 어디에 가고 있느냐?”
“저는 지금 아플리아로 가서 전쟁에 나가려고 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음성은 계속해서 말했다.
“주인과 종 중 누구에게서 네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프란시스가 대답했다. “물론 주인에게서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의지하는 주인을 따르지 않고 왜 종을 따르느냐?”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프란시스는 물어 보았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 그곳에 가면 네가 할 일을 계시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프란시스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되돌아간 것을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예전보다 더 즐거워 보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러분은 언젠가 내가 바로 내가 원하던 그 위대한 왕자가 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그가 자기 친구들에게 마지막 향연을 베풀고 앗시시의 거리를 통과하여 음악 행진을 하다가 그들로부터 좀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는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 그는 강물같이 넘쳐나는 사랑 속에 빠져들게 되어 황홀감에 젖게 되었고 꼼짝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 못한 채 그곳에 서 있었다고 토마스 사제는 기록한다
그때부터 사랑이 그의 무기가 되었으며 급기야 프란시스파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능가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진리를 사랑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지만 프란시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화를 내시며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던 자들의 의자를 뒤엎으셨지만 프란시는 모든 종류의 노여움이 죄라고 생각했고 어떤 폭력이든지 다 증오했다. 심지어 그를 흠모하는 엥글레베르트조차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용감했던 프란시스는 가난과 고난 속에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모방하려 했고 어떤 새로운 업적을 고안해 내며 사랑과 인자함에서 예수님을 능가해 보려 했으며 순교자가 되려 했고 끝내는 수난의 표적과 함께 죽고자 했다.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 사랑과 인자함에서 예수님을 능가해 보려는 것 자체가 극도의 교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프란시스는 디도서 3장 5절과는 대조적으로 선한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되려 했으며 또한 갈보리에서의 예수님의 승리를 포함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받으실 수 있는 영광을 스스로 추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글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갖고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는 모든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끝에 이렇게 적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내가 청하노니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이들은 은총으로 더불어 이 편지를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귀한 말씀으로 이 편지를 받으라.
크게 되고자 한 프란시스의 야망은 그의 회심 이후에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단지 크게 되기 위한 방법과 수단만이 달라졌던 것이다. 프란시스는 스스로 기사도에 대한 정의를 바꾸면서까지도 자신이 꿈꾸어 온 유명한 기사가 되려 했다.
회심 후 몇 년간 그는 자신을 수장으로 두고 조심스럽게 새로운 기사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깃발을 드는 자요 위대한 왕의 전령이라고 선포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원탁의 기사들이라 불렀다. 그런데 그 기사들은 각각 부인이 있어야 했으며 그의 부인은 ‘가난’이었다. 그는 바로 그것이 자기가 꿈에 본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었다. 밖에서 그는 포베렐로 즉 ‘가난한 소자’였지만 안에서는 자기의 상상 속에서 위대한 기사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프란시스의 작품 중 몇 가지를 조심스럽게 선택해서 널리 배포시켰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저 유명한 프란시스의「평화의 기도」이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러나 사실 이것은 다섯 개의 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나머지 네 절은 음악에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며 따라서 카톨릭 교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네 절을 아는 곳이 없다. 이 구절만이 유명하게 된 것은 아마도 카톨릭 교회가 그의 매력적인 이미지를 보존하기 위해 프란시스의 작품을 교묘하게 편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프란시스의 작품을 정밀하게 조사해 보면 그의 신학이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 행위 신학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프란시스에 따르면, 구원은 선한 행위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 오게 된다. 그 예로 평화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유의해 보기 바란다.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어느 누구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구원이란 종교적 행위나 도덕적 행위와 무관하게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에 의해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주려고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로마서 4장 4- 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으며 이 구절은 한 마디로 그의 교리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롬4:4-5).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신 영감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되 행위 즉 일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그리하신다. 그런데 프란시스는 저주받을 다른 복음을 전했으니 이는 그가 믿음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지만 사람의 구원이 오직 그 믿음만을 통한 것은 아니었다고 믿었고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선한 행위를 하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인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카톨릭 신앙에 매달리자.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고 신부들을 공경하되 죄인일지도 모를 그 사람들(신부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성직 때문에 그들을 공경하자. 이 신부들만이 제단 위에서 우리 주님의 가장 거룩한 몸과 피를 거룩하게 만들며 그것을 받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
이 구절의 문맥상 우리는 프란시스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 즉 미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란시스를 극구 칭찬하는 프로테스탄트 작가들은 어쩌면 한번도 그의 작품을 읽어 보지 못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다음의 글에는 미사와 신부직에 대한 프란시스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모든 죄를 신부에게 고해야만 한다. 그리고 신부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야만 하니 이는 그의 몸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란시스에 따르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공력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사를 드릴 때에 그분에게 연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력에 의해 우리 스스로를 구원시킬 것을 원하고 있으며 우리는 순수한 마음과 정결한 몸으로 그분의 몸과 그분의 피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연합된다.
심지어 프란시스는 성체 즉 빵 조각을 담고 있는 그릇들이 귀하고 거룩하므로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미사를 기념하기 위해 사용되는 거룩한 그릇들과 기타 다른 모든 것은 귀한 것으로 존중히 여겨야 한다.
프란시스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친 것은 다음 구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제 우리는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며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관대해야만 하나니 이는 구제하는 것이 죄로부터 사람의 혼을 깨끗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금식에 관해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준수하며 과다하게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늘 피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러나 참된 금식은 삼가 죄와 나쁜 습관을 멀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삼가 죄와 나쁜 습관을 멀리하여 사랑과 긍휼을 보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프란시스는 신부에게 죄를 고하는 것과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더불어 이런 행위들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믿었다. 프란시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선한 행위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서 이미 끝내 놓으신 일을 감사하는 자들 즉 구원받은 자들의 삶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한 행위도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한 속죄 값으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에는 더러운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2장 8-10절에서 먼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적고 그 뒤에 선한 행위의 삶을 적었던 것이다.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이런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위는 은혜를 통해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작품이 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거룩한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이 점을 깨닫지 못했고 선한 행위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와 예식에 복종하는 것을 통해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마도 프란시스는 자신이 청빈 생활을 주장했으므로 그 당시 카톨릭 교회들의 물질 만능주의에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 및 권위에는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이제 이 ‘가난한 소자’는 예언된 대로 전 세계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앗시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하며 이 사실은 프란시스가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분을 버리면서까지 유명하게 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연옥의 창시자 어거스틴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고 교회가 머리가 되는 소위 ‘교회교’를 창설한 오리겐을 위시하여 초대 교부들은 교회사에서 엄청난 망언의 시를 뿌렸다. 이 열매들은 첫 정치 신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해 암브로스와 어거스틴 등을 통해 로마 교회 안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우리네 기독교회사는 성경에는 없는 ‘바울-어거스틴-루터’라는 족보까지 만들어 놓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출발했다고 말하며 이제는 ‘메시지’ 대산 ‘미사’ 곡까지 교회 안에서 연주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 철학과 성경을 통합시키려는 욕망에 불탔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이 신의 영감을 받았으므로 그 기원이 신성하며 신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그릇된 가정 하에 자신들의 해석 체계를 정립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란 죄명을 씌운 로마 교회는 오리겐이 주장한 ‘유대인들 개종, 추방, 멸종의 3단계 이론’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의로 삼아 오늘날에도 이를 시행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오리겐의 비유적 성경 해석을 취하며 참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육체에서 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송두리째 제거했고 ‘교회가 이스라엘’이라는 논증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 생긴 그리스도의 교회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인 것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국가-교회’(State-Church)를 국가 체제의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반면에 교황들은 세상 군주들을 교황권 아래 두고 다스리는 ‘교회-국가’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 지상의 평화가 유지되어야만 하며 국가가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고 오직 ‘교회-국가’만이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럽 교회의 성서로 불려진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 원제목은 「이교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도성」임 - 이라는 역사 사회 철학서는 예수님의 복음에다 키케로, 마니, 플라톤 등의 이교 사상을 혼합시킨 것으로, 카톨릭 교회가 지상에 교회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로 대치시킨 이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문자 그대로의 왕국 대신에 교회가 세상 권력을 지배하는 가시적인 교회 왕국을 건설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카톨릭 주의가 처음부터 주장해 온 ‘무천년주의’의 핵심 내용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남아 있어야 할 로마 교회가 국가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였을 때 사탄은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극적인 회심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사도 바울의 논리성에 견줄 만한 논리성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이라는 종교적 천재를 기독교회사에 출현시켰다.
사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 연구가들에 의해 실제와는 매우 다르게 미화되었다. 그는 국가 교회로 전락한 로마 교회 안에서 방황하다가 결국에는 교권에 밀착하고 말았다. 제롬, 비드 등이 ‘옛 바빌론의 딸’로 간주한 신약의 ‘로마의 멸망’을 변호하기 위해 결국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쓰게 되었고 이 책은 4세기경에 ‘교회-국가-종교’의 모든 신학적 문제에 대한 조직적인 해답까지 제공하였다.
주후 410년, ‘영원한 도성’(?)으로 간주되어 온 로마가 흔들리자 카톨릭 교회는 말로 할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되었다. 사실 「하나님의 도성」이란 표현은 오리겐과 유세비우스의 글에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유세비우스는 시편 87편 3장을 주로 공격하면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가 없다고 말했으며 성경의 예루살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하나님의 도성」은 이 같은 유세비우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옛 바빌론의 ‘도시-국가’(City-State)에 뿌리를 둔 그리스의 폴리스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지역, 종교, 법, 문화, 도덕 등 모든 것이 같아야 함을 의미했고 어거스틴의 도시 개념 또한 정치와 종교가 즉 카이사르와 그리스도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도시-국가’(City-State)였다.
어거스틴은 여러 곳에서 누누이「하나님의 도성」이 곧 카톨릭 교회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은 거룩한 교회이다(8권 24), 그의 교회인 하나님의 도성(15권 26), 하나님의 도성인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16권 2), 하나님의 도성에 대하여 즉 교회에 대하여(시편 주해 71:18), 하나님의 도성이 거룩한 교회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시편 주해 98:4).
독자께서는 부디 그가 말하는 ‘교회’란 다름 아닌 ‘카톨릭 교회’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어거스틴의 스승인 암브로스(Ambrose, 339-397)는 성골, 유물, 마리아 숭배 사상 등을 로마 교회 안에 들여 놓은 첫 교부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귀족주의적인 권위주의자였다. 그는 카톨릭 교회를 위해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로, 그는 로마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일체 배제하였고 믿음의 영역에서 주교는 기독 황제를 판단할 수가 있으나 황제는 주교를 판단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둘째로, 그는 국가는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기독교의 도덕 규범을 존중해야 하며 데살로니가에서의 반란 진압시 특별히 잔인성을 보인 데오도시우스 대제에게 교회에서 참회(고해성사)할 것을 강요하였다.
셋째로, 암브로스는 교회와 국가 간의 긴밀한 결속 관계를 추구하였고 이 일이 교회에 크게 유익하리라 확신하였다. 그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절대적인 고집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로마 카톨릭 교회의 왕자였다. 로마 제국과 앞으로의 모든 황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권위와 권세를 지속시키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도나티스트파는 그들의 신학자였던 티코니우스의 지도 아래 흠 없고 순수한 교회를 동경하였다. 어거스틴도 그를 흠모하였으나 도나티스트파를 향하여는 “교회와 국가는 독립된 권력이 아니라 하나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카톨릭 공회는 콘스탄틴 대제에게 도나티스트파를 제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317년에 카톨릭 교회는 군대를 동원하여 도나티스트파를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몰수하였다. 그리고 404년에는 ‘화합 칙령’(Editct of Unity) 하에서 그들을 박해하였다.
파라(F. W. Farrar, 1831-1903)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거스틴은 처음으로 성경을 짜맞추어 ‘이스라엘이 교회’라는 해석을 이끌어낸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성경 해석 체계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결점이 있다. 그는 교회 즉 카톨릭 교회의 정설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야만 하며 어떠한 성구도 다른 어느 것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원칙이란 교권이 성경의 권위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의 권위가 나로 하여금 복음을 향하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카톨릭 교회의 권위가 지지해 주고 있는 성경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지시되어 있는 구원의 길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교회는 오류가 없으며 구원은 오직 교회에만 맡겨져 있고 따라서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류 투성이인 교회로 대치시켜 버림으로써 어거스틴은 철저하게 ‘사탄의 교회교’를 세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에게는 교회 자체가 진리의 표준이었고 따라서 교회가 복종해야만 하는 어떤 권위나 교회를 판단하는 교회 이상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교회의 책 즉 교회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요한계시록 2장 7절이 말씀해 주듯이,교회는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을 받는 피조물이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여 뜯어고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이후로 로마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변개시켜 왔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제공한 하나님의 도성의 비전을 가지고 로마 교회는 세속적인 권세를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기증서’ 등의 위조 문서를 만들어 자신들을 합법화하려 했으나 이것이 위조된 것임을 밝혀 낸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마 교회 내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1401-1464)였고 그 이후에는 발라(Lorenzo Valla, 1406-1457)가 더 정확히 그 문서의 허위성을 증명하였다.
「하나님의 도성」은 신성로마제국의 첫 황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대제의 정치 교과서가 되었다. 또한 이 책은 ‘로마의 신성로마제국을 형성하기 위해 교황 하드리안 1세를 방문한 샤를마뉴 대제 통치자는 천국의 안수를 받은 자’라고 선언하며 십자군 원정을 선동하여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해한 성 베르나(Bernard de Clairvaux, 1090-1153)를 부추겼다. 사실 카톨릭 교회의 부패로 인해 중세 때에 이미 프란시스칸파는 여우로, 도미니칸파는 늑대로 불렸고 위클리프(John Wyclife, 1330-1384)는 계속해서 갈멜파 및 어거스틴파의 만행을 폭로했다.
12세기의 오토(Otto of Freising, 1114/15-1158, 독일의 주교, 사가, 신학자)는 어거스틴의「하나님의 도성」이 로마 제국의 연장인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이론을 펼쳐나감으로써 신성 로마제국의 발전을 부채질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어거스틴의 비전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들을 첨가해서 신성로마제국을 옹호했으며 그 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합스부르크가를 역사 안에 등장시켰다. 또한 로마 교회는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belli, 1469-1527)의 굳건한 독재주의 이론을 첨가시켜 로마 카톨릭 군주들을 늘 로마의 중심으로 모이게 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Reformation)이 로마 교황청과 합스부르크가를 흔들기는 하였으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495-1556)의 반개혁과 이어서 일어난 카톨릭의 르네상스를 통해 로마 카톨릭 교회는 더욱 더 조직화되었다. 그 결과 교황의 문장(Papal Coat of Arms)이 모든 도시 및 촌락의 중요한 자리에 나붙게 되었고 로마 교황청은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 분야의 재능가들을 로마 교회로 끌어들였다.
루터의 개혁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 모두가 동등한 만인 제사장(벧전2:9-10)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반면에 옛 그리스 및 로마의 혼합된 사상에 뿌리를 둔 반개혁사상은 루터가 크게 훼손시킨 제사장/성직자 계급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을 철저하게 구분지었다. 이들은 특별한 의장, 타이틀, 행동 규범을 고안하여 성직자를 구별해야 함을 강조했고 그 결과 중세 암흑시대를 능가하는 성직자 무리가 생산되고 말았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뜻의 평신도라는 말은 ‘다른 예수’(고후11:4)로 둔갑하여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휘둘렀던 사제들에게 ‘종속된 백성’을 의미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의「고백록」을 보면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편협하고 미신적이며 거의 무당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녀는 자기 아들의 사회적 신분 유지 및 세상적 출세를 위해 이미 아들까지 낳고 동거 중인 그의 내연의 처를 지옥으로 보낼 정도의 인격을 가진 여자이며 인간 양심의 도덕법마저 무시한 종교적 잔인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 책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로마 교회의 ‘거듭남’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위로부터 임하여 인간의 질을 재창조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어거스틴의「고백록」이 들려 주듯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귀의하여 그 시스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의 제도적 의식이 마치 거듭남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어거스틴의「고백록」은 사악한 카톨릭 주의의 제도에다 고해성사라는 또 다른 굴레를 하나 더 씌워 주었다.
어거스틴의 수도원 규칙을 보면, 그는 아비 종교를 더욱 강조하여 아비계급에 절대 복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제를 신부(神父) 즉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물론 영어권에서도 카톨릭 교회의 사제는 ‘Father’로 불린다. 그들은 베드로를 유일한 카톨릭 교회(One Catholic Church)의 통일성으로 삼고 - 참고로 제롬과 더불어 어거스틴이 만든 교황 리스트는 베드로를 첫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다 - 교회의 특성을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두기보다는 ‘통일성, 보편성, 거룩성, 전통’에 두고 있다. 3세기경에 오리겐의 ‘마리아 숭배 사상’이 암브로스에게 왔을 때 그는 ‘마리아 숭배 사상’에다 ‘성물 숭배 사상’을 더했고 어거스틴은 이 모두에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는 연옥설을 보태어 ‘연옥설의 원조’가 되고 말았다.
“죄인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1:15)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의 서신은 그의 고백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영생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 즉 예수님의 피를 통한 구원,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온 영혼으로 체험하였으며 이 체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가지라고 권고했다. 그래서 그의 짧은 서신서들 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이 무려 164회나 기록되었다.
그런데 영생의 심판자 노릇을 해 온 카톨릭 교회 안에 안주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온통 카톨릭 교회로 가득 차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 사실은 그가 복음을 모방한 거짓 종교에 빠진 채 침울하고도 우울한 종교적 위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의 종교성 테두리 안에서 끝없이 방황하였음을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다.
그는 악의 비참함을 철저히 되씹음으로써 얻게 되는 종교적 위안을 통해 회한의 자리에 머물렀다. 그는 회개를 통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자들이 누리는 기쁨을 찾지 못했고 따라서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빌3:13-14) 그 환희를 찾지 못했다.
이에 대해 하르낙(Adolf Harnack, 1851-1930) 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카이사르적이고 동시에 어거스틴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경험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혹은 이방인들의 사도였던 바울이 그토록 자상하게 설명한 은혜에 이르는 길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밖에서 어거스틴의 은총론 같은 인본주의 은총론을 들먹이고 있는 것인가? 어거스틴의 은총론이라는 것은 로마 교회의 공회 중 가장 사탄적인 공회로 알려진 트렌트 공회가 결정하고 발표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의인론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어거스틴파에 속했던 루터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와 수도원에서 수많은 현대판 모니카와 어거스틴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아직도 인간의 종교적 은총론에 갇혀 방황하고 있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성구도 인용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들이 머물고 있는 반석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성모 교회 즉 ‘거룩한 어머니 교회’ 안에 안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기에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다(딤후3:5). 비록 그들이 베드로의 무덤을 뒤적이면서 무덤에서 일어나신 ‘살아 계신 생명의 주’를 찾고 있으나 그들의 길은 결코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큰길인 것이다.
2009-07-09 15:38:05 | 관리자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자유인가 속박인가?
하나의 주제가 이 책의 각 장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져왔습니다. 그것은 카톨릭 주의와 참된 기독교 사이의 중대한 차이점입니다.
∙카톨릭 주의는 사람들을 속박 가운데로 몰고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십니다.
당신은 카톨릭 주의의 모든 교리들이 신자들을 카톨릭 교회의 속박 가운데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죄들을 정말로 용서해 줄 수 있는 참된 교리를 가진 교회가 있어야만 합니다. 당신에게는 모든 것을 올바로 가르쳐 주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계획적으로 당신은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았고 그 뒤 노자성사를 받는 임종의 순간까지 카톨릭 교회에 꼼짝없이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그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려고 죽으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피조물 자신도 썩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이를 것임이라(롬8:21).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이는 너희가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힘입어, 아바, 아버지, 라 부르짖느니라(롬8:15).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십니다. 종교는 사람들을 속박으로 끌어갑니다.
이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이들이 몰래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아 우리를 노예로 삼고자 함이로되(갈2:4).
속지 마십시오! 종교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을 속박합니다.
그들이 자유를 약속하나 정작 자기 자신은 부패의 종이 되었으니 이는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라(벧후2:19).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주실 수 있는 자유 안에 굳건히 서라고 권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유에 관해 잘 알고 있었고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그 자유를 오용하지 않도록 경고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하게 되었으니 오직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라(갈5:13).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종교의 속박 가운데서 고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주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내가 주의 훈계들을 구하므로 자유로이 걸어가겠고(시119:45).
자유하십시오!
한때 로마 카톨릭 신자였던 사람으로서 저는 이러한 속박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압니다. 젊은 시절 내내 저는 카톨릭 주의의 종교 규정과 규칙들에 대해 교육받았고 그것들에 복종하지 않으면 당하게 될 일들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제 마음 속에 영접했을 때 느꼈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자유였습니다. 속박의 사슬들이 끊어졌습니다. 저를 지배하던 속박의 세력이 제거되고 마침내 저는 해방되었습니다.
당신이 경험하게 될 일들
당신도 카톨릭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저와 똑같은 자유를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당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히2:15).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논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아이였을 때에 세상의 초등 원리 밑에서 종노릇하였느니라.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이것은 곧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대속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갈4:3-5).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서술한 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 원수가 되었느냐?(갈4:16).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저는 당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진실을 말해서 당신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어떤 분들은 틀림없이 제가 카톨릭 신자들을 미워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저는 이 책에서 카톨릭 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불못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보여 드렸습니다. 이것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저는 모든 카톨릭 신자들이 값없이 주시는 영생의 선물을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당신을 노예로 만드는 종교로부터 당신이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저는 당신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주실 수 있는 기쁨과 평안을 체험하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당신의 원수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진정 당신의 친구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진정한 원수
그렇지만 분명히 당신에게는 원수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사탄입니다. 그는 당신을 증오하기에 당신이 영원히 지옥에서 불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당신을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것을 마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의 계략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그는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낸 후에 그것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다양한 종교적인 장식들로 꾸밉니다.
그 다음에, 그는 그 종교 체제의 신도들이 지켜야만 하는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체계화시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러한 종교 규정들을 준수하느라 너무 바빠서 결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종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증오하면서도 그분께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 되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요14:6). 따라서 사탄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계략은 수세기에 걸쳐서 큰 효력을 발휘해 오고 있습니다. 사탄을 과소 평가하지 마십시오. 그는 속임수에 뛰어난 존재입니다(계12:9).
마귀가 더 이상 당신을 속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가 바로 당신의 실제 원수이며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종교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 예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그분께서는 당신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복을 주셔서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구원을 경험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네 행로들을 지도하시리라(잠3:5-6).
2009-07-09 15:25:49 | 관리자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
● 하나님의 청원
저는 조금 전에 당신이 예수님을 당신의 마음속에 모셔들이고 영적으로 거듭나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당신이 취해야 할 첫 번째 행동 중의 하나는 카톨릭 교회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또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많은 로마 카톨릭 신자들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노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이 여전히 카톨릭 교회에 남아 있기를 원하신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거짓되고 우상 숭배를 하는 종교 안에 있으면서 자신을 경배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성경 말씀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그분께서는 그들이 그곳에 머물러 있지 말고 밖으로 뛰쳐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다른 많은 성경 구절들이 똑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고후6:14).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시겠습니까?
만일 누가 이 서신으로 전하는 우리의 말에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주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살후3:14).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자기가 카톨릭 교회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지만 비록 그것이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당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결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며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명령과 법규를 행할지니라(신27:10).
우리가 당신을 주 우리 하나님께 보내오니 그분의 목소리가 좋든지 나쁘든지 우리가 그 목소리에 순종하리이다.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면 잘되리이다, 하니라(렘42:6).
순종이 중요합니까, 희생이 중요합니까?
가끔 카톨릭 신자들 중에서는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희생하고 있노라고 하면서 그 교회에 남아 있고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희생보다 당신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어째서 사람들은 그곳으로부터 나오기를 원치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그분의 분명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카톨릭 교회를 떠나기를 거부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한 이유가 있습니다.
1. 구원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 교회를 떠나기 원하신다는 것을 그들이 정말로 모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2.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음속으로 구원에 대한 소망을 여전히 카톨릭 교회 안에 두고 있으므로 그 교회를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당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과연 정말로 개종한 것일까요?
어떤 젊은 카톨릭 신자와 대화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는 기꺼이 자신이 잃어버린 영혼이라는 것과 예수님을 구원자로 신뢰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기도했고 예수님께서 자기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도록 간청했습니다. 그것까지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그에게 카톨릭 교회를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춤하더니 대뜸 “오, 저는 결단코 카톨릭 교회를 떠날 수가 없어요!”하고 말했습니다.
“왜 안 되죠?” 저는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카톨릭 교회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는 것과 그 교회가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젊은이가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간에 그는 영생에 대한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께 둔 것이 아니라 카톨릭 교회에게 두었던 것입니다.
그 젊은이처럼 오늘날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자신들이 거듭났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의 전통을 신뢰한 자들은 심판 날에 몹시 실망하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사람을 신뢰하며 육체를 자기 무기로 삼고 마음이 주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렘17:5).
만약 당신이 카톨릭 주의로부터 나오기를 거부하는 카톨릭 신자라면 최선의 경우에 당신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일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서 속은 채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하라(엡5:11).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말씀을 부정하는 그 체제로부터 속히 떠나야만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카톨릭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카톨릭 교회는 구원이 오직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을 그들의 신도들에게 주입시켜 왔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다른 종교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죽을 죄에 해당된다고 배웠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결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나님의 말씀은 확신을 줍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두려움의 영이 아니요,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기 때문이라(딤후1:7).
당신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떠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 거짓된 교회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으려면 카톨릭 교회와 관련된 것들 - 예를 들어 성상들, 묵주, 교리 문답서, 기도서 등과 같은 것들 - 을 당신의 집에서 모두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상 숭배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가증히 여기십니다.
그런즉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전10:14).
사도 바울은 우상 숭배를 행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말했습니다(갈5:19-21 참조). 이러한 우상 숭배 도구들을 처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태우는 것입니다(행19:19 참조).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을 설득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카톨릭 교회를 떠나지 않으려는 또 다른 이유는 그 교회에 여전히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삶 속에서 그분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그분께 불순종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카톨릭 교회로부터 나오라고 명령하셨다면 그분께 순종하셔야 합니다.
개종한 사제
몇 년 전에 자신의 교회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 한 카톨릭 사제가 예수님께 기도하여 자기 안에 들어오셔서 자기를 구원해 주시도록 요청했습니다. 그 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해서 카톨릭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그는 매 주일 아침이면 자신의 옛 교회로 차를 몰고 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곤 했습니다. 그러면 미사가 끝나고 전에 그의 교구 교인이었던 사람들이 걸어 나오다가 그를 알아보고는 하나같이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신부님, 저희는 신부님이 교회를 떠나셨다고 들었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예, 사실 제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제가 떠났던 것입니다. 차 안에 들어가서 제가 모든 것을 설명드리지요.”
그런 방법으로 그는 전에 자기 교구 교인이었던 사람들의 절반 이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결 론
자, 이제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나는 그분께 순종할 것인가?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너희 자신을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딸이 되리라. 전능자 주가 말하노라, 하셨느니라(고후6:17).
2009-07-09 15:22:47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