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구분된 거룩한 장소.
성소는 종종 성전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며(시73:17; 히9:1) 향 제단과 금 등잔대와 보여 주는 빵을 둔 성소(Holy place)를 가리키기도 하고(대하26:18; 히9:2) 어떤 때는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곳 즉 언약궤가 있고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가는 지성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성소는 광야에서 세운 성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레4:6). 성막과 성전 참조. 땅의 성전 혹은 성소는 하늘의 것의 상징이며(시102:19; 히9:1, 24) 도피하는 사람이 성전을 피난처로 삼을 때에는 하나님이 성소라 불리기도 한다(사8:14; 겔11:16).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의 추격을 받는 죄인이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그분이기 때문이다.
2009-07-05 01:18:36 | 관리자
거룩히 구별하다, 성화 참조.
2009-07-05 01:18:09 | 관리자
고대에 도시나 성채의 성벽을 부수기 위해 사용된 장치로서 공성퇴라 불리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100명 이상이 공성퇴의 탑 밑에서 일하고 활 쏘는 자들이 탑의 위에서 성 안의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겔4:2; 21:22).
2009-07-05 01:17:47 | 관리자
이것은 보통 장막을 가리키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가 세운 특별 장막을 뜻한다.
이곳은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던 곳이었으며 이와 관련된 하나님의 지시 사항과 이것을 수행한 내용은 출25:1-40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보통 회중의 성막 혹은 증언의 성막이라 불렸다. 성막 선도 참조(56).
성막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는 각각 30, 10, 10큐빗이었고(출26:15-30; 36:20-30) 입구는 네 종류의 덮개로 덮인 채 동쪽에 있었다. 성막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서 동쪽의 삼분의 이는 성소 그리고 서쪽의 삼분의 일은 지성소로 쓰였는데 이 두 곳에는 창문이 없었으므로 성소에서 섬기려면 등잔불이 있어야 했다. 성막의 뜰에는 번제 헌물 제단과 물두멍이 있었고 제단은 뜰의 문과 성막의 문 사이에 있었으며(출40:6, 29) 물두멍은 번제 헌물 제단과 성막의 문 사이에 있었다(출38:8). 바로 이 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헌물과 기도를 드렸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성소에는(히9:6) 향 제단과 진열하는 빵을 두는 상과 금 등잔대가 있었다. 향 제단은 성소의 중앙에 휘장 앞에 있었으며(출30:6-10; 40:26-27) 여기에서 아침저녁으로 향을 태웠다. 제사장의 오른편 즉 북쪽에는 보여 주는 빵이 있었고(출26:35; 40:22-23) 남쪽에는 금 등잔대가 있었다(출25:31-39). 대제사장만 1년에 한 차례 들어가는 지성소에는 그룹들과 긍휼의 자리로 덮인 언약궤가 있었다(히9:7).
성막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뒤 둘째 해 첫째 달 첫째 날에 세워졌고(출40:17)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움직여야 했으므로 분해해서 쉽게 조립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성막의 이동에 따라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함께 옮겨 다녔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움직인 횟수만큼 성막도 레위 사람들에 의해 옮겨졌고(민4:1-49) 그들이 진을 친 곳에 다시 조립되어 세워졌다.
가나안 정복 때에 성막은 길갈에 있었으며(수4:19; 10:43) 정복이 끝난 후에 여러 해 동안 실로에 있었다(수18:1; 삼상1:3). 삼하6:17과 대상15:1은 다윗이 기럇여아림에 오래 머물다가 오벳에돔의 집에 머물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들여오려고 한 장소를 정하고 거기에 성막을 세웠다고 말한다(대상13:6, 14; 참조 삼하6:11-12). 한편 대상21:29는 모세의 성막이 그 당시에 기브온에 있었다고 말하므로 언약궤와 성막은 이미 오랫동안 따로 있었을지도 모른다. 솔로몬의 때에도 성막은 여전히 기브온에 있었으며(대하1:3, 13) 아마도 이것이 성막에 대한 마지막 언급일 것이다. 왜냐하면 성전 안으로 궤와 함께 들어온 성막은(대하5:5) 오랫동안 시온에서 궤를 보관해 온 장막이었기 때문이다(대하1:4; 5:2).
2009-07-05 01:16:35 | 관리자
성령님이 신자 속에 들어와 거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이 같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 둘은 매우 다르다. 성령 침례에 대한 구절은 신약에서 11번 나온다(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11:16; 롬6:1-7; 고전12:13; 갈3:26-28; 엡4:5; 골2:12). 이 중 다섯 번은 성령 침례를 미래 시제로 다루고 있는데 이는 성령 침례가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편 과거 시제도 있는데(행11:16) 이것은 오순절을 되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그 날 이루신 성령 침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머지 다섯 번은 서신서에 있으며 모두 성령 침례의 본질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신약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I. 침례는 ‘담그다’는 뜻을 가지며 ‘하나의 사물을 다른 데로 옮겨놓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성령 침례는 이런 일이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 침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어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를 성령님 안으로 푹 잠기게 하신다. 여기서도 침례라는 단어가 쓰이며 이는 곧 그를 성령님의 세계로 옮김을 의미한다.
둘째, 성령님께서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푹 잠기게 하신다. 이것은 곧 그를 그분의 교회라는 세계로 옮긴다는 말이다(요1:33; 고전12:13).
II. 성경은 성령 침례가 성도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일어나는 경험의 일부라고 가르친다.
성령 침례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고 거듭날 때 일어난다. 따라서 성령 침례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필수불가결의 관계에 있는데(갈3) 그것은 곧 성도가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침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에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III.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 침례를 받았다고 가르친다.
성령 침례가 구원받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 침례를 받은 것이다. 성경도 성도들이 다 한 성령을 통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한다(고전12:13). 즉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기에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지 못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따라서 성령 침례를 받지 못한 신자는 있을 수 없다.
IV. 성경에는 성령 침례를 추구하라는 명령이 없고 심지어 그 같은 것에 대한 암시조차도 발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미 성령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 침례가 구원받는 순간 이루어지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복된 소유이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굳이 이것을 따로 추구할 필요가 없다. 성령님, 성령 충만 참조.
2009-07-05 01:15:39 | 관리자
신자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서 그리스도의 일을 실행하기 위해 애를 쓰며 육신을 죽이는 상태.
이것은 신약성경에 15번 등장한다(눅1:15, 41, 67; 4:1; 행2:4; 4:8, 31; 6:3, 5; 7:55; 9:17; 11:24; 13:9, 52; 엡5:18). 이 중에서 14구절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어떤 개인이나 모임이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에베소서 말씀에서만 성령 충만이 명령으로 나와 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이 말씀은 충만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준다.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의 통치하에 있다’ 혹은 ‘무엇에 의해 지배당하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진리는 술에 취하는 것(술에 지배당하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한 것(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비교한 데서 알 수 있다.
또 이 말씀은 성령 충만이 언제 일어나는지 말해 주고 있다. 여기서 “충만하라.”는 단어는 현재 시제로서 현재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를 다시 쓰자면 “계속 충만하라.”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믿는 이들이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시제라고 해서 성령 충만이 한 번 이루어지면 영원히 지속되거나 혹은 살면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유지되어야 하며 잃어버릴 수도 있고 그때는 회복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은 누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다. “성령 충만하라.”는 명령은 모든 믿는 이에게 적용된다. 이 명령은 특정 소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 모두에게 적용된다. 성령 충만의 명령은 개인적인 성격을 지닌다. 주님께 순종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도 있지만 주님께 불순종하여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롬6:13; 12:1) 성령의 권능 안에서 걸을 때(갈5:16) 얻을 수 있다.
끝으로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성령 침례는 단 한 번 일어나지만 성령 충만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다. 성령 침례는 거듭나는 순간에 일어나며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일어난다. 모든 신자는 항상 성령 침례를 받은 상태에 있지만 성령 충만은 믿는 자가 순종하는 때에 이루어진다. 성령 침례는 명령이 아니지만 성령 충만은 명령이다. 성령 침례는 믿는 자의 신분과 관련이 있고 성령 충만은 믿는 자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성령 침례는 사람을 그리스도안으로 옮기는 것이고 성령 충만은 사람의 행동을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는 것이다. 성령님, 성령 침례, 침례 참조.
2009-07-05 01:14:46 | 관리자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인격체.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과 본질에서, 능력에서, 존재 면에서 동등하며 아버지나 아들에게서 발출된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보내진 경우에 한해서 아버지에게서 나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제자들에게 보내어졌다(요14:26; 15:26). 이분은 아버지의 영이며(마10:20; 고전2:11) 또 그리스도의 영이다(갈4:6; 빌1:19).
성령님이 하나님의 영향력이나 힘이 아니고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은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분은 스스로 행동을 하고 생각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인격체이시다. 이분이 인격체가 아니라면 기뻐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수 없으며 또 말씀하거나 위로하거나 중보하거나 자신의 선물(은사)들을 나누어 줄 수 없다. 물론 그리스말이나 영어에서 이분은 남성을 가리키는 he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님께서 신성을 지닌 인격체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하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다른 두 분과 함께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으로부터 증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조의 사역에서(창1:2; 시33:6; 104:30) 그분이 함께 하셨다. 성령님은 또한 침례를 주는 방식에서도 다른 두 인격체와 함께 찬송을 받으시며(마28:19) 사도 바울의 축복 기도에서도 다른 두 분과 함께 나타나고(고후13:14) 이름을 받으시고(고후3:17) 하나님의 특성들을 행하고 보여 주신다(롬8:14; 고전2:10; 6:19; 히9:14). 물론 그분이 하나님이므로 그분께 기도드릴 수도 있으며(계1:4-5) 그분께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고(행5:3-4; 엡4:30) 그분께 신성 모독을 범하면 용서받을 수 없다(마12:31). 성령 모독 죄 참조.성령님의 일은 신성을 띠고 있다. 그분은 옛날부터 성경 기록자들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을 기록하게 하였고 여러 사람들에게 기적의 선물(은사)들을 나누어 주었다. 교회 시대에 그분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사람들의 마음에 적용시키며 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요16:8-9)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들을 보여 주며 조명을 주사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요3:5; 엡2:1). 성령님은 교회의 위로자이시며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과 함께 증언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하고 그들을 인도하며 성화시킨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이며 따라서 반드시 성령의 증거가 그 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살아 있는 사과나무가 반드시 사과를 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고후13:5). 성령이 있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갈급함: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만을 드러내며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요15:26; 16:14-15; 고전12:3). 그러므로 성령이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적 인물로 가장 매력적인 존재가 되며 그래서 그분을 알기 위해 성경을 탐구하려는 열망이 생긴다(요5:39-40).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성경 읽기와 탐구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갈급함; 성령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갈5:22-23). 성령의 열매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인격이라 할 수 있으므로 성령이 있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 주변 환경과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에 변화를 보인다. 그러므로 역경과 시험이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열매를 보아 성령 충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성령은 결코 우리를 제어하지 않으며 다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어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부단히 자기 성찰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삶이 매우 필요하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갈급함: 성령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도록 자신을 내어 놓으며 사람들을 섬기려 한다. 성령의 선물(은사)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선물은 섬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졌다(벧전4:10; 고전12:7). 그러므로 성도의 생활은 선물(은사) 중심이 아니라 섬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의 선물이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성령님을 표현하면서 그분께서 외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강조할 때는 the Holy Ghost로, 내적으로 일하시는 것을 강조할 때는 the Spirit으로 구분하여 표기하므로 한글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서도 the Holy Ghost는 성령님으로 the Spirit은 성령으로 구분하여 표기했다. 성령 침례, 성령 충만 참조.
성령 모독 죄(Blasphemy against the Holy Ghost) 이것은 보통 ‘성령 훼방 죄’로 알려져 있으며 은사주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비성경적인 선물(은사)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성경에 없는 것이라고 지적하면 그들은 대개 ‘성령 훼방 죄’를 운운하며 진리를 보여 주는 성도들을 저주하려 하지만 실제로 성령 모독죄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마12:31-32; 막3:28; 눅12:10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분이 베푸시는 기적들이 마귀들의 통치자 바알세붑의 힘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 사람들에게 성령 모독죄가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죄는 땅에 계시던 예수님과 관련된 죄이며 현 시대 사람들은 이런 죄를 지을 수 없다. 현 시대에서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는 하나도 없으며 누구든지 무슨 죄라도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모두 용서해 주신다. 신성모독 참조.
2009-07-05 01:14:09 | 관리자
원래 이 말은 성인 즉 거룩한 사람을 뜻하며 하늘이나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혹은 친구를 뜻한다(신33:2).
이 말은 구약시대의 경건한 유대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으나(시16:3; 34:9) 대개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말로 사도 바울에 의해 사용되었다(롬1:7; 8:27; 12:13; 15:25, 31; 16:2). 다시 말해 성경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성도 즉 성인이라고 부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부패하기 시작했고 결국 천주교는 스스로 성인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을 성인으로 만들어 신자들이 그들에게 기도하고 그들의 은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가르치는 가증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
2009-07-05 01:13:20 | 관리자
율법의 말씀들을 담은 작은 양피지 두루마리.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마와 왼팔에 착용하였는데 이것은 “그것을 네 손 위의 표적과 네 눈 사이의 기념물로 삼으라.”(출13:9, 16)는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생긴 결과이다. 이마에 착용하는 것은 표(Frontlets)를 참고하기 바란다. 팔에 매는 것 역시 양피지 두루마리였으며 그들은 이것을 둘둘 말아 검은색 소가죽 통에 넣고 이런 가죽 성구함을 왼손의 팔이 접히는 부분에 묶어서 착용하였다. 성구함은 그리스말로 보존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귀들로부터 보존되는 것도 뜻해서 일종의 부적 같은 역할도 하였다. 이것은 구약시대 말기에 도입되었으며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경건과 지혜의 표시로 시장에서 이런 성구함을 차고 다니는 것을 책망하셨다(마23:5). 오히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내가 주께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숨겼나이다”(시119:11).
2009-07-05 01:11:58 | 관리자
성경 본문은 여러 사람이 다양한 자료(필사본)를 모아 재구성한 ‘히브리어 구약성경이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의미한다.
‘본문’이라는 말은 어떤 종류의 문서든지 그 문서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을 지칭하며 ‘그리스어 본문’이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그리스어로 편집한 신약성경을 의미한다. 신구약 성경 본문은 계열에 따라 각각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님께서 한 본문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두 종류의 본문이 생긴 것은 각각의 본문을 지지하는 그룹이 다르기 때문인데 그 두 그룹은 기독교회 혹은 종교개혁그룹과 로마 카톨릭 교회이다. 사본 참조.
I. 대개 구약성경은 마소라 사본에서 번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마소라 사본에도 두 종류가 있다.
KJV의 구약 본문은 ‘전통 마소라 히브리어 본문’인 반면에 NIV, NASB 같은 현대 역본들의 구약 본문은 키텔이 지은 ‘BIBLIA HEBRAICA Kittel’(BHK) 혹은 ‘BIBLIA HEBRAICA Stutt- gartensia’(BHS) 이다. 또한 현대 역본들은 이 외에도 사해사본, 사마리아 모세 오경, 본문을 수정하는 데 사용된 고대 성경 기록관들의 전통, 본문 여백에 있는 여러 종류의 다른 본문, 70인역,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등을 사용하여 본문을 만들었다.
KJV의 히브리어 본문과 현대 역본들의 히브리어 본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1516-1517년에 유대인 랍비들이 출간한 구약성경은 ‘다니엘 봄베르그판’ 혹은 ‘제1 랍비 성경’이라고 부른다. 그 이후에 1524-1525년에 제2판이 출간되었는데 벤 카임이 이를 편집하였다 해서 이 본문을 ‘벤 카임 마소라 본문’이라 하며 또한 이 본문은 ‘제2 대(大) 랍비 성경’이라고도 불린다. ‘벤 카임 마소라 본문’은 출간된 후 400여 년이 지나도록 표준 마소라 본문으로 인정받아 왔으며 KJV 역자들은 바로 이 ‘벤 카임 마소라 본문’을 구약성경의 본문으로 사용했다.
위템베르크 성서 공회는 1937년 과거에 키텔이 편집한 BHK 제3판에서 KJV의 ‘벤 카임 마소라 본문’을 ‘벤 아세르 마소라 본문’으로 바꾸어 버렸다. 사실 1906년과 1912년에 키텔이 출간한 제1판과 제2판에서는 ‘벤 카임 마소라 본문’이 사용되었는데 1937년에 출간한 제3판에서는 레닌그라드 사본에 기초한 ‘벤 아세르 마소라 본문’으로 갑자기 구약성경의 출처가 바뀌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구약성경 전체 중 20,000~30,000 군데의 변개가 이루어졌다. 레닌그라드 사본은 주후 100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KJV의 기초가 된 ‘전통 마소라 본문’과는 매우 다르다. 그 이후 1967년과 1977년에 독일 슈트트가르트에서 키텔의 BHK를 개정한 BHS가 출간되었는데 이 마소라 성경 역시 레닌그라드 사본에 기초한 ‘벤 아세르 마소라 본문’을 사용한 것이다.
II. KJV 신약성경의 근간이 된 본문은 그리스어 ‘공인본문’이다.
‘공인본문’은 누가 이것을 공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의 ‘공인본문’(公認本文)이 아니고 누구나 이를 공통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의 ‘공인본문’(共認本文)이며 그래서 이것은 ‘수용본문’(收容本文)이라고도 불린다. ‘공인본문’은 KJV 신약성경 번역의 토대가 되었으며 특히 1598년에 출간된 베자의 제5판이 사용되었다. ‘공인본문’의 특징은 우선 신약 교회가 거의 1900 년간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해 왔다는 것이며 그 내용이 변화가 없이 한결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은 다수 사본에 근거했기에 ‘다수 본문’이라고 하며, 가장 널리 사용되었기에 ‘보편적 본문’이라고도 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서방본문’과 대비되어 ‘비잔틴 (혹은 동방) 본문’이라고 하며, 루터와 칼빈 등의 종교 개혁자들이 한결같이 이 본문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종교개혁본문’이라고도 한다.
KJV 신약성경 번역에 사용된 그리스어 본문은 상당수의 서로 다른 편집자들에 의해 조합되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들로는 에라스무스, 베자, 스테파누스와 엘제비어 형제, 아브라함과 보나벤쳐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에라스무스는 다섯 판에 걸쳐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간했다. 1516년의 제1판에 이어, 1519년에는 마틴 루터가 그의 역사적이고 매우 중요한 독일어 번역판에 사용했던 제2판이 나왔다. 그 뒤 그의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판은 1522년, 1527년 그리고 1535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에라스무스의 작품은 매우 훌륭했고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모범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스테파누스는 1546년, 1549년, 1550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1551년에 모두 네 판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간했다. 베자도 1565년, 1582년, 1588년, 그리고 1598년에 걸쳐 여러 판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간했다.
KJV 역자들은 1598년의 베자 성경과 1550년과 1551년의 스테파누스 성경을 주요한 출전으로 사용했다. 1611년에 KJV가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엘제비어 형제가 1624년, 1633년, 그리고 1641년에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간했는데 이들은 에라스무스의 표준을 따랐던 베자의 판을 충실히 따라가며 본문을 편집했다.
사도 시대부터 근 1900 년 동안 신약 교회는 ‘공인본문’만을 사용해 왔으며 특히 1611년에 KJV가 출간된 이후에는, 비록 여러 가지 영어 성경이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360 년 동안 다른 영어 성경은 전혀 쓰이지 않았다. 또한 KJV는 온 세계로 퍼져 나가 말 그대로 전 세계의 보편적 성경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권위를 인정한 성경’이라는 인식 하에 ‘권위역본’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
기독교회의 팽창에 대해 불안을 느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소위 본문 비평이라는 도구를 도입하여 성경을 한낱 역사책처럼 취급함으로써 그 권위를 떨어뜨리려 했으며 이를 위해 허영에 들뜬 신학자들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 같은 시도는 결국 사악한 열매를 맺게 되었고 1881년에 영국 성공회에 속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라는 두 명의 학자들은 ‘공인본문’에서 무려 5,604 군데나 수정하여 소위 ‘수정본문’이라는 개악된 본문을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이들이 ‘공인본문’에서 빼거나 변개시키거나 추가한 단어들은 무려 9,970 개나 되며 이것은 신약성경 전체 본문에 나오는 140,521 개 단어의 7%를 차지하는 것이다. 웨스트코트는 영국 성공회의 주교였으며 호르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였다.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들은 강신술 등에 심취한 영성주의자들이요, 지옥이나 마귀 등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창세기 기록을 신화로 생각한 인본주의자들이었다.
1967년도까지 존재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사본의 수는 모두 5,255 개이다. 이런 사본들에는 81개의 파피루스 사본과 267개의 대문자 사본, 2,764개의 소문자 사본, 2,143개의 기도문(혹은 교독문) 등이 있다. 그런데 현존하는 사본들의 99%가 ‘공인본문’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초대교회로부터 하나님의 교회가 오직 ‘공인본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필사하여 각 지역에서 사용했음을 잘 보여 준다.
지금까지 수정된 적이 없는 ‘공인본문’과는 달리 1898년에 처음 만들어진 ‘네슬레판’은 1992년까지 무려 26번이나 판을 개정하여 평균 3.1 년마다 새로운 판이 개정되어 나왔다. 이 사실은 여러 신학자들이 자기들의 구미에 맞게 성경을 뜯어고치려 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들이 이 같은 철학을 수용한 데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주후 250-350년 사이에 초대 교회에서 지도자들의 회의가 열려 자기들이 선호하는 사본들을 모두 없애고 ‘공인본문’을 지지하는 사본들만을 간직하게 되었다는 엉뚱한 이론을 폈는데 현대 성경본문 비평학자들은 바로 이같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가 상상 속에서 꾸며 낸 헛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역사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으며 날조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로마 카톨릭 주의에 심취되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같은 영성주의자들의 이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지금은 로마 카톨릭 소수 사본에 근거를 둔, 즉 전체 사본 중 1%에 해당하는 사본에 근거를 둔 NIV, NASB 등의 현대 역본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 성도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있다. 역본, 킹제임스 성경 참조.
2009-07-05 01:11:21 | 관리자
영감을 받은 기록. 이것은 구약과 신약성경을 뜻하며 외경이나 위경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성경, 영감, 정경 참조.
2009-07-05 01:10:14 | 관리자
이 말은 원래 책을 뜻하며 특히 다른 책과의 구분을 위해 책 중의 책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성경 기록(Scriptures)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그 뜻은 단순히 ‘기록된 글’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즉 옛 상속 언약과 새 상속 언약으로 구성되어 있다(출24:7; 마26:28). 구약은 대부분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유대인들의 성경이 되었으며 다만 다니엘서와 에스라의 몇 장은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신약은 전적으로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이 말은 유대 지방과 처음에 복음이 전파된 대부분의 지역에서 통용되던 말이다. 신구약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행의 표준이요 잣대이며 특별히 신약은 우리의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교리와 교회를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처음에 수용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던 말로 성경을 주셨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배운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고 구원받기를 원함을 잘 보여 준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참조.
구약성경은 모두 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율법서, 대언서, 기록서 즉 거룩한 기록서로 구분하였다. 율법서는 모세오경을 뜻하며 이것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서 회당에서 1년에 한 차례씩 읽을 수 있게 했다. 대언서는 여호수아기,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구성된 역사서들 즉 ‘초기 대언서’와 다니엘을 제외한 다른 대언서들로 구성된 ‘후기 대언서’로 구성된다. 후기 대언서들은 이사야, 예레미야(애가는 포함되지 않음), 에스겔 같은 큰 대언서와 열두 개의 작은 대언서로 구성되는데 회당에서는 초기와 후기 대언서의 일부와 율법서를 읽었다. 끝으로 기록서는 그 외의 다른 책들 즉 시편, 잠언, 욥기, 아가서,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를 포함하였다. 한편 현대 성경에서는 모세오경을 포함한 역사서가 앞부분에 그리고 시가서가 중간에 그리고 대언서가 맨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서기관 에스라가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구약의 정경을 수집하고 확정지은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신약성경은 27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책은 사도들의 손으로 기록되어 후대에 한 권의 정경으로 정착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행적을 담은 복음서, 사도들의 행적을 담은 사도행전, 교회를 위한 서신서, 그리고 앞날을 보여 주는 계시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의 장절 구분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도입되었으며 장은 1240년경에, 구약의 절은 1450년경에, 그리고 신약의 절은 1551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목록, 신약성경목록 선도 참조(8-10).
처음으로 세상에 잘 알려진 영어 신약성경은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인 1370년경에 나온 위클리프 성경이다. 그 뒤 인쇄술이 발명되고 1526년에 처음으로 틴데일의 신약성경이 인쇄되어 나왔고 1535년에 커버데일은 처음으로 신구약을 포함한 성경전서를 발간하였다. 그 뒤 커버데일과 다른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매리 여왕의 압제를 피해 제네바에 거하면서 1560년에 제네바 성경을 출간하였고 그 후 1611년에 제임스 왕에 의해 일반 사람들을 위한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되어 지난 400여 년간 온 세상에 복음을 알리는 표준 성경이 되었다.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가 최고조에 이른 때에 당대의 석학 50여 명이 원어에서 충실하게 번역한 성경으로 단 한 번의 수정 없이, 단 하나의 오류 없이 당당하게 세월의 풍파를 거스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으며 문학적으로도 영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성경의 보존 선도 참조(91).
킹제임스 성경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히브리어 전통 마소라 본문과 그리스어 공인 본문을 축자적으로 완벽하게 번역하여 전 세계 공통어인 영어로 표현하여 말 그대로 모든 성경의 표준이 되었다는 데 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NIV, NASB 같은 현대 역본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이것들은 한결같이 부패된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 그리스어 비평 본문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수천 군데에 오류를 담고 있고 특히 축자적, 형식적 일치 번역이 아닌 동적 일치 번역이므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계시, 영감, 보존, 정경, 마소라, 사본, 킹제임스 성경 참조.
2009-07-05 01:09:50 | 관리자
구약성경에서 이 말은 ‘일하다’를 뜻하며 들에서(출1:14), 성막에서(출27:19), 성소에서(민7:9) 일하고 또 주님을 섬기거나(민8:11) 레위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을 뜻한다(민8:22). 신약에서 이 말은 ‘심부름 하다’를 뜻하며 종으로 섬기는 것을 표현한다. 집사라는 용어가 여기서 파생되었다. 사역자, 사역 혹은 ‘섬기다’(고후11:8; 롬15:31; 계2:19) 등이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또한 이 말은 종교적인 경의를 표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며(요16:2; 롬9:4; 12:1; 히9:1) 경배(敬拜)를 뜻하기도 한다(고후9:12; 빌2:17). 그래서 예배를 영어로 worship service라고 한다.
2009-07-05 01:09:10 | 관리자
길갈 근처의 장소. 주님의 천사가 여기에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책망하자 그들이 소리 내어 울었다(삿2:1-5).
2009-07-05 01:07:52 | 관리자
귀중한 물건을 간수하여 두는 곳.
특히 성전의 보고는 유대인들의 봉헌물이나 십일조 등을 받는 곳으로 단순한 헌금함이 아니다(막12:41; 눅21:1).
2009-07-05 01:07:26 | 관리자
병들어 약한 것.
2009-07-05 01:07:03 | 관리자
병 고침 즉 치유의 선물(은사)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치는 일은 다르다.
치유의 선물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신체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한 것을 뜻한다. 신약시대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도들, 그리고 사도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소수만이 이런 능력을 지녔으며 그들은 온갖 종류의 병자들에게 나아가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그들을 치료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치유의 선물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따라서 거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다. 이 선물은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자가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기적적인 능력의 일부이다(히2:3-4). 그러나 치유의 선물도 다른 기적들처럼 성경 역사의 어느 특정한 때에 일어난 표적이었으며 이런 때에도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병이 났을 경우 찾아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치유의 선물(은사)을 소유한 자는 거의 없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치유의 선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역이 마무리될 무렵 성경이 완성되면서 자기의 형제요 동역자요 동료 군사인 에바브로디도를 고칠 수 없었으며(빌2:25-27) 또 선교 여행 때 자기와 동행한 드로비모를 고치지 못하고 아픈 채 밀레도에 남겨 두었다(딤후4:20). 바울은 자기의 후계자 디모데를 고칠 수 없었고 대신 일반적인 처방을 디모데에게 권했다(딤전5:23). 심지어 바울은 자신도 고칠 수 없었다(고후12:7-10).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적절한 약을 사용했다.
바울이나 다른 성도들이 처한 상황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본이 된다. 즉 아프면 기도하고 의학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약5:14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병든 그리스도인이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부탁하고 처방으로 기름을 바를 것을 가르친다. 이때 기름을 바르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의학적인 처방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기름을 바른 것은 치료를 위해 몸을 문지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또한 성도들이 치유의 선물(은사)을 바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몸이 확실하게 고쳐지는 것은 내세의 약속이다(롬8:23). 그때에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몸을 구속하실 것이고 우리는 영화로운 몸을 입고 죄가 육체에 미치는 영향에서 벗어날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사탄이 말세에 여러 기적으로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라고 말하는데(살후2:9-10) 마귀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나타낼 수 있기에 이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고후11:14-15).
치유의 선물은 표적의 선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자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일이 끝나자 치유의 선물은 곧 사라지게 되었다. 바울의 예나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보더라도 치유의 선물은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관행이 아니다. 사도행전과 에베소서를 비교해 보더라도 치유의 선물은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교회 시대에는 모든 질병에 대해 기도와 의학적인 처방을 의지해야 하며 이것만이 병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자세이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의 뜨거운 기도에 응답하사 자신의 뜻 안에서 기적적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으며 지금도 고치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특별히 그런 선물(은사)을 받아 병자에게 손만 대면 병을 낫게 하는 사람은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적, 선물, 타언어 참조.
2009-07-05 01:06:34 | 관리자
성경은 두 종류의 병거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왕이나 장군 혹은 귀인들이 타던 수레이고(창41:43) 다른 하나는 전쟁에서 적군의 한가운데로 파고들면서 바퀴의 뾰족한 부분이나 병거에 달린 갈고리 등으로 적군을 무찌르는 데 사용된 무장 수레이다. 그래서 ‘철 병거’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호수아가 메롬 물가에서 무찌른 가나안 족속들은 기병과 병거들을 가지고 있었고(수11:4; 삿1:19) 또 야빈 왕의 장군 시스라는 900대의 철 병거를 소유했다(삿4:3).
2009-07-05 01:05:31 | 관리자
계5:8; 15:7; 16:1-17에 나오는 병(甁)은 그리스어 ‘피알레’에서 나온 말로 위가 열리고 목이 길며 좁아서 액체를 한 곳에 집중해서 부을 수 있는 그릇을 뜻한다. 그러나 정확한 형태가 묘사되지 않았으므로 어떤 이들은 이것을 호리병, 플라스크 형태 혹은 대접으로 추정한다.
2009-07-05 01:05:06 | 관리자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가리키며 눅9:31에 1회 사용되었다.
2009-07-05 01:04:4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