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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9:10에 나오는 구절로 9절에 있는 현재 곧 이때와 대비되는 때를 뜻한다. 참고로 여기 나오는 reformation이라는 단어는 중세암흑시대를 벗어나게 해 준 종교개혁(Reformation)과 같은 단어이다.  
2009-06-06 02:56:09 | 관리자
숫염소들인가, 마귀들인가?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레위기 17장 7절을 흠정역 성경과 개역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흠정역: 또 그들이 전에 마귀들을 따라 음행의 길로 갔으나 다시는 그 마귀들에게 희생물을 드리지 말지니 이것은 그들의 대대로 그들에게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 하라.  개역: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숫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흠정역은 마귀들이라고 번역하였고 개역은 숫염소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과연 어느 것이 더 잘 맞을까요?   다음은 히브리어 학자인 김경래 교수(전주 대학교)의 글입니다.   레위기 17:7에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숫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라는 지시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 ‘숫염소’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낱말(‘쎄이림’ = ‘싸이르’의 복수형)은 문자적으로 ‘숫염소’를 뜻한다. ‘음란히 섬긴다’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묘사로서 무수히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에 ‘숫염소들’을 음란히 섬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레17:7의 ‘싸이르’는 단순히 동물로서의 ‘수염소’가 아니라 우상 내지는 귀신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은 ‘싸이르’ 숭배를 이집트에서부터 배워온 듯 하다. ‘싸이르’는 일반적으로 황량한 지역에서 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13:21; 34:14).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거하는 동안 이미 그들은 ‘싸이르’를 섬기기 시작하였다(수24:14; 겔20:7; 23:3, 8, 19, 21, 27). 후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된 여로보암 역시 숫염소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스스로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대하11:15). 숫염소, 마귀 둘 다 틀린 번역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숫염소라고 하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마귀라고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컬트 세상에서 잘 알려진 대로 마귀들의 왕 루시퍼의 상징은 두 뿔이 달린 염소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들 역시 비슷한 상징으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2009-06-04 11:08:10 | 관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접 기도 복음이 아니다 ● 정동수 요즘 심각하게 느끼는 일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는 것입니다. 사영리 책자를 읽고 간단히 설명한 뒤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가르치는 곳이 많습니다. 설교를 들은 뒤 손을 들고 나오면 목사가 기도해 주겠다고 하는 데도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람 순수한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지요. 그런데 복음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면 너무 쉽게 Easy believism에 빠져서 또 압력에 견디지 못해 영접 기도를 하게 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러나 손을 들든지 안 들든지, 영접 기도를 하든지 안 하든지 이미 마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갔으면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드러나는 외적 행동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다, 안 믿는다 판단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손을 들라고 하고 앞으로 나오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위선자(혹은 가짜) 그리스도인을 양산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일단 교회나 집회에서 손든 사람의 수를 세면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저도 한때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몰랐기 때문이고 또 순순한 의도로 그렇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폴 워셔 목사의 글입니다.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기독교가 이 세상과 친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이 세상을 향한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세상에게 기독교를 받아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무엇을 해야 될까요? 이렇게 많은 사람앞에 말할 기회가 오직 한번 뿐일 때 제가 하던 것을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는 벌써 복음이 무엇인지 압니다. 아니요, 모릅니다. 당신이 아는 것은 그저 사영리와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할 5가지의 사실들 뿐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있지도 않는데도 그저 다른 사람들의 결심을 도와주는 것과 그들이 구원받았음을 확인시켜주는 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저 설교들과 신앙고백하는 법 그리고 교회성장등을 가르치는 것만 보아도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일을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이에게 다가가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우리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천국가길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그가 그렇다라고 진지하게 대답을 하며 기도하면, 우리는 그를 진정으로 거듭난 자라 일컫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방법의 전도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이단사상보다 더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은 정작 변하지도 않으면서, 그들 자신을 거듭난 기독교인이라 일컬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젠 그저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간단한 결정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렇다"라고 하면 무슨 뜻입니까? 그 대답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탄에게 물어보십시오. 사탄도 그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그것도 죄인중에 죄인으로 말이죠. 질문은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가 아니라, 복음을 깊이 들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일하셔서 그동안 사랑해 왔던 죄악을 이젠 진심으로 싫어하냐라는 것입니다. 질문은 "천국가고 싶습니까?"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천국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하나님이 없길 원하죠. "당신은 천국가기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할 것이 아닙니다. 질문은 복음이 당신에게 전해진 이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주권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역사하심을 통해 그동안 싫고 무시해왔던 하나님을 이젠 당신이 간절히 원하며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으로 받아드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라고 기도하시겠습니까?"라는 기도에 대해 그를 뒷받침 해 주는 성경구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성경에선 그를 영접하라고 했는데요?"라고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성경이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단지 사영리에 나오는 기도를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말씀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저 그를 당신 인생의 악세서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생명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속에서 당신의 인생을 더 좋게 만드는 분이 아니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삶이 되십니다. 그가 당신의 삶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누가 자신의 마음속에 와달라고 나에게 기도할 것인가?" 대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 절대 잊지 마십시오. 신약과 구약을 통틀어 회개는 삶의 열매에 의해 증거가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구원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결심을 더 의지한 채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구원받았습니까?" "네" "어떻게 아시죠?" "3년전에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거든요" "정말로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이 했습니까? 구원의 증거, 회개의 증거, 믿음의 증거는 변화되었고 변화하고 있는 삶입니다. 예전에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였는지 어떻게 아냐고요? 그 이유는 오늘도 그 회개를 지속해서 해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 믿을 수 있냐고요? 왜냐하면 오늘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것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성화를 통해 그는 당신의 인생을 바꾸셨을 뿐만아니라 지속해서 당신의 인생을 바꾸십니다. 오늘날 선포되는 복음은 많이 흐려졌습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설교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시고 계십니다. 이 복음은 많은 메시지 중에 하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메시지이며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이 복음이 오늘날 교회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서점에 가 보십시오. 200년 전, 또는 300년 전만 하더라도 기독교 서적들은 대부분 복음에 대해서였습니다. 스펄전이나 청교도나 에드워즈가 쓴 책들은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하면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복음을 설교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진실된 회심인가? 어떻게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난 것을 알 수 있을까? 오늘 주위에 있는 서점에 가 보셔서, 그러한 복음에 대해 기록된 책들을 찾아보십시요.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책들은 "어떻게하면...열가지 순서들"뿐일 것입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모르고, 진정한 회심을 모르고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신, 그러한 것들을 예배속에서 어떠한 미디어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제작된 찬양방식이나 하나님보다도 더 원하는 우리의 좋은 인생을 원하기에 우리가 듣길 원하는 설교만을 전하는 화려한 연설자들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잃었기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회복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남자, 여자 그리고 자녀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저 꾸밈없는 순전한 복음말입니다.
2009-06-04 10:32:22 | 관리자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 사망을 접하면서 며칠 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런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의 시대 정신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대언자라면 어떻게 이런 일을 보았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힘들게 한 주를 보냈는데 오늘 우연히 한동대학교 학생의 글을 읽고 여기에 바른 그리스도인과 애국자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 세상의 관점에서 문제들을 보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바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특히 청년들이) 곳곳에서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목사들이 바른 것을 바르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라는 타이틀을 부끄럽게 만든 이 글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韓東大 총학생회 성명서   왜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 校內 분향소 설치를 반대하는가?(한동대 홈페이지에서 퍼옴) 저는 분향소 설치를 분명히 반대합니다!  28일 한동대에 故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저희 총학생회는 분명히 반대 입장을 표했고 학교에서도 허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이 분향소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 우선 유감을 표합니다.   저와 총학생회가 분향소 설치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저와 많은 학우들은 전직 국가원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해 ‘국가적’ 비극으로 보고, 지난 월요일부터 3일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셋째날인 지난 수요일, 하루 이상 금식한 100여 명의 학우들이 비전광장에 함께 모여 오늘 우리 나라가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애통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며 그 뜻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대학으로 자타가 말하는 한동대 총학생회장으로서, 무엇보다 목회자의 아들로서 이 국가적 사태 앞에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매우 큰 논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악담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값진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주신 제 부모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정직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제 신앙 양심으로써 분명히 표명하는 것은, 한동대 내 故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 설치는 옳지 않습니다.   1.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관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대학입니다. 이곳 거룩한 하나님의 대학에서 이 사실은 결코 가볍게 취급할 것이 아닙니다. 많은 국민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국가적 위신을 크게 실추시킨 그분의 명예롭지 못한 방식의 죽음에 대해 어떤 미사여구로도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2. 이념적 성향의 분향소 설치는 결코 옳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대통령은 아니고, 오직 노무현 대통령만은 분향소를 설치해서 추모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일정한 이념성향 때문일 것입니다. 건국의 위업을 달성한 분도 거부되고, 가난을 극복하도록 한 분도 거부되며, 그밖에 그 어떤 치적을 가진 대통령도 거부되겠지만 오직 그분만은 ‘추모하여 마땅할 만큼 위대하다’는 논리가 이념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에, 꼭 그분의 잘못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이 부끄러워하며 회개해야 할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어 우리 주님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아프칸에서의 의롭고 아름다운 순교는 파렴치한 기독교 신자들의 철부지짓처럼 치부되었으며, 북한과 김정일에 대해 오판하여 끝없는 유화정책으로 김정일을 달래는 것만이 북한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알려졌습니다. 탈북자들은 유리방랑하면서 냉대를 당했고, 북한의 인권문제는 부당하게 금기시되었습니다.   지금의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이 현 정권의 강경한 대북 태도의 소산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주장이 아닙니까? 공중파 방송에서 무당과 귀신부름이 드라마로 오락으로 정당화되었고, 성적 타락과 높은 이혼율, 저출산과 가족의 해체, 자살율의 급증과 우울증의 확산.   오늘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이 비극은 어떤 한 자연인의 자살이 아니라 우리의 지도자였고 대한민국의 상징이었던 분의 비극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나라의 비극입니다. 이때야 말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국가적’ 차원의 죄악을 점검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장 겸허하게 노무현 대통령을 보내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죽은 자 앞에 제단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의 향을 올려야 할 때입니다. 겸손하게 무릎꿇고 청년, 지식인,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로 돌아오도록 하나님께 새로운 축복을 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이 글에 연서하는 학우들 역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이 나라의 슬픔을 함께 애도합니다. 주님, 오셔서 진노의 잔을 거두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옵소서.   한동대학교 14대 총학생회장 박총명    박수근 경영경제학부 김문정 생명과학부 이미선 GEA 정서륜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남윤성 생명과학부 이태훈 GEA 박정은 국제어문학부 노민지 생명과학부 조은주 GEA 이종원 국제어문학부 오현교 생명과학부 하임숙 GEA 최다은 국제어문학부 신명환 생명과학부 윤영훈 GEA 김성아 국제어문학부 정민주 생명과학연구소 김유진 글로벌리더십(GLS) 박현성 국제어문학부 김미선 생활관 간사 김형진 GLS 성선제 국제어문학부 최은경 상담심리학부 한진식 GLS 송영호 기계제어학부 김은총 상담심리학부 황민혜 GLS 허준석 기계제어학부 김아영 전산전자공학부 김세정 GLS 최병철 법학부 주충성 전산전자공학부 이예은 GLS 송수연 산업디자인학부 신민용 글로벌에디슨(GEA) 김정훈 GLS
2009-06-03 22:33:25 | 관리자
  십일조와 그리스도인   ● 김재근(전주 소망침례교회 목사)   말라기 3장 7절부터 12절까지 보겠습니다.   7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심지어 너희 조상들의 날들로부터 너희가 내 규례들을 버리고 떠나 그것들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돌아가리이까? 하였도다.   8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내 것을 강도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주의 것을 강도질하였나이까? 하나니 너희가 십일조와 헌물에서 강도질하였느니라.   9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으니 이는 너희 곧 이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기 때문이라.   10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먹어 삼키는 자를 꾸짖으리니 그가 너희 땅의 열매를 멸하지 못하리라. 또 너희 포도나무가 때가 이르기 전에 자기 열매를 밭에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니   12 너희가 심히 기쁜 땅이 되므로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복 받은 자라 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여러분은 십일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제까지 십일조를 드렸습니까?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렸다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습니까? 십일조를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십일조와는 무관하게 살았습니까? 또는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죄책감 속에 살았습니까? 십일조 때문에 늘 꺼림직 하게 살았습니까?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교인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십일조를 철저히 했더니, 물질축복 받았다는 간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서 십일조뿐만 아니라 돈 문제에 있어서도 충분한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십일조에 대한 전통적 개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말라기 3장 본문에 근거한 십일조 설교를 한두 번쯤 들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 로마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 심지어는 근본주의 침례교회들조차도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라고 설교하며 ‘압박’할 때면 언제나 말라기 3장을 인용합니다.   본문은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다면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있어서의 수입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8절]. 엄청나게 무서운 말씀이죠. 하나님 말씀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나니 [9절]. 왜?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먹어 삼키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꾸짖을 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1절].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온전히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라도 그 십일조를 취해 가신다. 예를 들자면, 교통사고가 난다든지, 질병에 걸린다든지, 입원을 한다든지, 분실한다든지, 무슨 재난을 당한다든지 한다.’ 우리는 이렇게 그동안 배워왔고, 이렇게 알고 있으며, 이렇게 설교를 들어 왔습니다.   또 10절 말씀에 따르면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물질적인 축복은 기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일조를 바쳐서, 나를 시험해봐라.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면, 내가 너희에게 가득 채워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안하십니까?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나를 시험해 봐라!!   그러니까 말라기 3장 10절의 하나님 말씀을 믿는 교인들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다른 면에는 신앙생활은 모두 엉망인데도 십일조만 철저히 하면, 물질적인 축복이 쏟아지는 줄 알고서 그러한 복 받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그러니까 물질축복 받고자하는 성도들은 사정이 어떻든지 간에 먼저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회, 심지어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에서도 십일조에 관한 의견은 일치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르칩니다. 십일조에 대한 현대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여타 죄에 대해서는 오래참고 인내하시지만, 십일조를 안 하는 죄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징계하시고 보응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비슷한 간증을 많이 들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안했더니 우환(憂患)이 닥쳤다.’ 또 하나님께서 다른 선행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으시지만,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크게 보상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가르침에 세뇌된 교인들은 다른 사람이 아프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역시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않더니만, 그렇게 되는구나.’ 라고 쉽게 단정 짓습니다. ‘십일조를 온전하게 안 하더니만! 쯧쯧.’ 하며 철저하게 수입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교인들은 자기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책망합니다. (어라, 저 집사는 왜 저럴까?) 기회만 있으면 이야기를 하지요. (어, O 집사, 이리 와보라고. 십분의 일을 떼서 반드시 드려야 해.)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은 자신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고, 또한 자신의 모든 소유에서 철저히 십일조를 드린 사실을 하나님께 상기시켜드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 나는 내 소유의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시죠? ‘하나님, 축복하실 때 좀 감안하세요!’   성경에 따라서 십일조 문제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은 채 무조건 강조한다면 교회를 운영하는 데에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돈! 좋잖아요. 교회로 돈 많이 가져오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십일조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정확한 진리를 제시하며 가르치지 않는다면, 현실적인 도움은 있을지언정 각 성도들의 영적 삶에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은 과연 십일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율법이다   성경 앞에서는 이제까지 내가 뭐라고 생각하고, 뭐라고 믿었고, 뭐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던지 간에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대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입니다. 오늘날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이건 안하는 사람이건 수많은 교인들이, 십일조를 강조하건 강조하지 않건 대부분의 목사들이 차분하게 십일조 문제에 대해서 성경을 찾아가며 공부할만한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인과 목사는 그냥 어디서 배우고 들은 대로 가르칩니다.     십일조(tithe)라는 용어와 십일조에 대한 설명 및 그 내용과 원칙은 기본적으로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십일조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에는 8번만 나옵니다. 32번은 구약에 있습니다(창14:20; 레27:30-32; 민18:24,26,28; 신12:6,11,17;14:22-23,28;26:12; 대하31:5-6,12; 느10:37-38; 12:44; 13:5,12; 암4:4; 말3:8,10).   신약성경에는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누가복음 18:12에서 세 번 나오고, 나머지 다섯 번은 전부 히브리서 7장에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중에서 어느 구절도 그리스도인에게 십일조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십일조는 교리적으로는 이 시대에 주님을 섬기고 있는 교회의 신자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에 십일조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그 외의 위대한 사도들이 신약성도들에게 헌금에 대한 말할 때, 왜 십일조라는 단어를 쓰도록 허락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사도들은 헌금의 의무를 설명하면서 아무도 ‘십일조’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한 번이라도 기록했으면 간단했을 텐데.   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교회 시대에 아무 효력 없는 구약의 율법을 되살리는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드는 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진리라고 해서 아무런 구분 없이, 시대의 구분도 없이 아무렇게나 가져다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그대로 하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건 이단이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진리라고해서 아무것이나 가져다가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와 바른 영적 사귐을 맺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는 거짓 교사가 됩니다. 이 시대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이단들의 가르침은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이 방언(성경의 방언은 전부 외국어)을 하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것이 잘못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방언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방언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의 시대는 지금과 맞지 않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증인들이 왕국 복음을 전하고 다니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단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국 복음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단입니까? 지금 이 시대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해서 적용을 잘못한 것입니다. 신유(神癒)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틀린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자신은 사도 직분을 계승 받았다고 한다면 우린 그를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직분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잘못됐지요? 그 사람들이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가져다가 창고에 넣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창고! ‘스토어하우스’(storehouse)입니다. 창고! 창고는 어디 있습니까? 십일조를 쌓아놓는 창고는 어디 있습니까? 창고는 구약시대 성전에 딸린 건물이었습니다. 봉헌한 물건들을 성전에 딸린 창고에 쌓았습니다. 느헤미야 10장 38절을 보기 바랍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취할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이 레위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우리 하나님의 집의 방들로 가져다가 보고 집에 둘지니.   지금은 돈을 은행에 보관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행이라는 단어도 모르셔서 십일조를 창고에 두라고 하셨겠습니까? 성경에는 ‘은행’이란 단어가 분명히 나옵니다. 누가복음 19장 23절!   성경대로 하면 십일조는 창고에 쌓아야 합니다. 교회마다 창고를 마련해서 거기에 갖다 넣어야 합니다. 은행이 아닙니다. 예배당도 아닙니다. 창고에 넣으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곡식이나 가축들을 모아서 보관하는 창고가 아닙니다. 사실 그대로 말해 봅시다.   많은 부작용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십일조를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는 교회의 수입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솔직하게 시인하셨습니다. ‘아! 그 사람이 십일조를 내야지 교회가 운영되는데 왜 안 낼까!’     돈 있는 교인이 십일조를 내야지만 교회가 운영될 수 있다는 단순한 계산에서 또 성경에 십일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십일조를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또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도 있고, ‘복을 쏟아 부어 주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구절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십일조를 독려하기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물론 교회는 운영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운영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 돈은 교인들의 손에 의해서 충족됩니다. 그런데 목회자에게는 교회 운영을 걱정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 무리를 목양하라고 사람을 세우실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그 설교자에게 혼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하라고 일꾼들을 세우시지 교회의 운영을 걱정하라고 세우시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는 반드시 잘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운영은 주님과 올바른 사귐을 갖고 있는 성도들의 성실한 ‘헌금’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마음에는 없는데 억지로 하거나, 율법에 근거해서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지만 물질축복을 받는다고 강조해서 교회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사람은 기뻐할지언정 하나님은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는 목회자로서 나에게 맡겨진 사명에 대해서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교회 운영이요? 이 교회는 여러분들의 교회니까, 교회 운영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좀 걱정해 주십시오. 나는 교회 운영에 대해서 걱정하는 목사가 아니라, 맡겨진 영혼들에 대해서 먼저 걱정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사역에 있어서 목적이 왜곡되면 신자들이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일과 교회에서 헌금을 모으는 일이 주님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에서가 아니라 “무서움과 두려움! 또 이렇게 안하면 우환(憂患)이 닥칠 것 같은 마음! 더욱이 말라기 3장을 보니까 십일조 떼먹은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정말 무섭다. 또 십일조 해야지 물질축복을 받는다 하니까” 하는 동기에 의해서 되기가 십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라기 3장의 내용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볼 때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았을 때 당장은 이익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영적 삶에는 별로 유익을 끼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손상을 끼칩니다.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는데 정말 기쁨과 자원함과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것과 이것을 안 드리면 사업이 망할 것 같고 교통사고가 날 것 같고, 병에 걸릴 것 같고, 그러한 마음에서 드리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만큼 엄청납니다.        십일조와 할례의 근거는 동일하다   십일조를 반드시 해야 할 의무사항으로 강요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한다든지, 유대인들의 모든 명절 즉 유월절이나 장막절을 지키라 한다든지, 아니면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든지, 부정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다든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다는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일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신약교리로 가르치는 교회나 목사들의 주장 가운데 하나는 이렇습니다. ‘아, 이건 율법이 아니다! 물론 율법에도 있지만 모세의 율법 이전에 은혜의 시대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야곱을 통해서 우리가 이 십일조를 배운 거다. 율법 시대 이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율법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도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도 모세의 율법과 상관없이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반드시 드려야 한다. 그래서 율법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도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려야만 한다.’   정말 그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같은 이유로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행했듯이 율법 이후 시대인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 남성들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에 할례를 받았습니다(창세기 17장 24절). 율법 이전에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반드시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할례도 받아야합니다. 십일조도 드리면서, 율법 이전에 받은 할례도 다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안디옥 교회의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사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신자들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가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사도행전 15장 10절) 그들은 자신들도 메질 못하고 조상들도 지질 못했던 멍에를 새롭게 복음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부담시키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자, 보세요.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같은 시대에 같은 사람이 두 가지를 행했는데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하고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안 해도 된다는 그러한 원칙은 누가 정한 것입니까?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할례도 받고 십일조도 했는데 십일조는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해야 되고 할례는 하면 안 되고 그런 원칙은 도대체 누가 가르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175년을 살았습니다. 175년을 사는 동안에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창세기 14장에 딱 한 번 있습니다. 175년 동안에 단 한 번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통해서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십일조 생활을 착실하게 했기 때문에 물질 축복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가지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물론 십일조를 강조하는 모든 목사들이 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각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을 걱정하고 주님과의 올바른 사귐에 대해서 걱정하기 때문에 착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라고 강조하는 목사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드리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십일조 자체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강조함으로 신자들에게 의무 조항으로 놓는 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성경을 충실하고 정직하게 연구하지 않은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개 그냥 들은 내용, 책에서 읽은 내용,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죠.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불법인 경우도 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서 어떤 100m 선수가 죽을 힘을 다해 가지고 9초 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실격일 수 있습니다. 실격인 경우에는 금메달을 못 땁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의 트랙으로 왔다 갔다 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죽을 힘을 다해서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법일 수가 있습니다.     구약시대 성도의 십일조 생활   구약 성도들은 어떻게 십일조 생활을 했을까요? 십일조에 대한 기록 대부분은 모세의 율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과 야곱은 자발적 의지에 따라서 한 번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들에게는 십일조가 강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자유의사가 아니라 의무사항입니다. 율법 하에서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반드시!! 안 하면 큰일 납니다. 레위기 27장 30절 말씀을 보십시다.   땅의 모든 십일조 곧 땅의 씨나 나무 열매의 십일조는 주의 것이니 그것은 주께 거룩하니라.   의무사항으로써의 십일조는 성막을 관리하며 레위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국가적으로 정해진 세금과 같습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신정(神政)국가에서 살았습니다. 대통령이나 왕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곧 헌법(憲法)입니다. 모세의 율법아래에서 십일조는 오늘날 국민의 의무조항인 세금(稅金)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거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고 십일조를 삼키는 자가 되는 것이며 저주를 받는 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십일조는 한 가지 종류만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십일조는 몇 종류가 있습니다. 매년 내는 십일조가 있고, 또 삼년마다 한 번씩 내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먼저는 레위 지파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드리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두 구절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민수기 18장 24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십일조 곧 그들이 주께 거제 헌물로 드리는 것을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 상속하게 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상속 재산을 갖지 못하리라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이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럼 그걸 누가 갖습니까? 레위 사람들이 갖습니다. 레위 사람들! 그들은 상속받은 땅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이 십일조로 드린 것을 가지고 먹고살았습니다. 또 한 구절 보겠습니다. 신명기 14장 22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네 씨의 소출에서 반드시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당시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짓고 일 년에 한 번 수확을 하면 십일조는 어떻게 했을까요? 반드시 드립니다. 일 년에 한 번씩 해마다 십일조를 드립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이게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가 있고 삼년마다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28절을 보세요. 신명기 14장 28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삼년이 끝날 때마다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   자, 그러면 삼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용도가 다릅니다.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 고아, 과부들을 돌보기 위한 십일조가 3년에 한 번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6장 12절을 보면 ‘the year of tithing’ 즉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정해져 있습니다. 삼년에 한 번씩.   아모스서 4장 4절에도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들,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한 십일조입니다.     개역성경에서 왜곡된 십일조   그런데 십일조를 많이 거둬드리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아모스서 4장 4절에 삼년 뒤에 십일조를 가져오라는 말씀을 읽고는 깜짝 놀랍니다. ‘어, 십일조를 삼 년 뒤에 내라고! 이거 말도 안 돼!’ 그 다음에 그들이 어떻게 했을 까요? 성경을 뜯어 고쳤습니다. 개역성경이 뭐라고 뜯어 고쳤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삼일마다 십일조를 내라고 성경을 뜯어고쳤습니다. 사람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불결하게 손질을 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현금(現金)으로 드릴 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출의 십일조를 드릴 때 그것은 레위 사람, 나그네, 고아, 과부들에게 주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를 한 사람이 일 년 동안 드려야할 전체 양은 대략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23%입니다(가축의 십일조, 매년 소출의 십일조, 삼년마다 드리는 십일조 등). 만약에 당신이 성경에서 정한 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려한다면 수입의 23%를 드려야 됩니다. 무지에 의해서든 불신에 의해서든 자신이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잘 해 주시고 물질 축복을 해 주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바리새인들에게 성경은 그들이 지금 십일조에 관해서 착각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내 수입의 철저하게 1/10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23%를 내야지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또한 구약의 십일조는 대부분 곡식과 가축입니다. 유대인들은 소산과 소출에서 십 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십일조 드릴 것을 따로 분리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건지는 것은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린다. 이 가축들은 십일조다.’ 이렇게 따로 분리해 놨는데 이것들을 팔게 될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이 경우 십일조로 정해 놓았던 곡식이나 가축을 돈으로 바꿨더라도 당연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27장 31절을 보면 이런 경우에는 원금에다가 5분의 1을더하여 십일조로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하에서의 십일조는 대부분 곡식과 가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금으로 바꿔서 드릴 경우도 있었습니다. 현금으로 바꿔서 드릴 경우에는 10분의 1 즉 10%가 아니라 12%입니다. 왜냐하면 5분의 1을 더하도록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금으로 십일조를 드릴 때는 12%를 드려야 합니다.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제가 오늘 정답을 드리겠습니다. 수입의 12%가 철저한 십일조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입의 10분의 1로 십일조를 드리고 있는 신자가 자신이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물질 축복 하셨다고 한다면 성경과 어긋난 주장입니다. 철저한 십일조는 10%가 아니라 12%입니다. 현금(現金)일 경우에는 12%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의식   십일조를 받는 사람도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7장 5절을 보겠습니다.   진실로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다시 읽어봅시다.   진실로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하는 명령을 받았으나   모세의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입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십일조를 반드시 드려해야 할 의무 조항으로 여긴다면 동일한 이유에서 할례나 안식일이나 유월절이나 장막절이나 짐승 희생제 등도 지켜야 합니다. 또 십일조를 받은 뒤에는 의식이 뒤따라옵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으면 거제헌물(Heave offering)이라고 해서 그 십일조 헌물을 하나님께 높이 들어 올려서 바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민수기 18장 24절). 지금은 그런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돈 밝히는 목사들이 십일조 봉투를 높이 들고서 공개적으로 이름 부르며 기도하는 의식에도 나름대로의 성경적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누구 집사님 십일조 헌물 하셨습니다.’ 정말 구약에서 레위 사람들이 시행했던 거제 헌물과 똑같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분명히 가르쳐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이 현재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수입의 12%를 드립니까? 아니면 23%를 드립니까? 당신의 수입에서 정확하게 10%를 정말 드릴 수 있습니까?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것의 십일조는 어떻습니까? 은행에 돈을 맡겼더니 이자가 붙었습니다. 그 이자의 십일조는 어떻게 하십니까? 친구로부터 생일 선물을 받았는데 십일조는 하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이익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누가 감히 나는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도 응답을 해 주실 것이며 물질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돈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그것은 투자(投資)일 뿐입니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투자 말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투자했으니까 나에게 10배로 돌려 주십시오!’ -사실 이것이 순복음 교회의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므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초등원리로 되돌아가서 다시 율법에게 종노릇을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을 노예로 전락하게 만듭니다. 신앙의 자유와 기쁨을 빼앗아가고 의무와 규범만을 남깁니다. 여러분이 십일조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정말 자유와 기쁨을 줍니까? 아니면 의무와 규범만 남았습니까? 십일조라는 주제가 여러분을 율법의 종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모든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나   그 율법의 요구사항이 명절에 대한 것이든, 유월절이든, 장막절이든, 십계명을 지키라는 요구이든, 짐승 희생물을 바치라는 요구이든,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라는 요구이든,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의 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 시켰습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많은 성도가 자기 소유의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말은 거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소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몽땅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을 봅시다.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과 영,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소유물의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모든 율법의 요구사항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에 대해서 ‘반드시’라고 요구할 자격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본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소유였지만 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유대인들에게 요구한 세금을 강요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놀라운 사역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드리는 헌금이 올바르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에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은 성도에게 ‘반드시’ 십일조의 법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권한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참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말라기 3장에 근거한 십일조,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십일조, 신앙의 자유가 없이 규범으로만 존재하는 십일조, 이런 것은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드리는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면 어떤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야호 해방이다. 해방! 십일조 안 해도 되는구나. 속 시원하다.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쳤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진리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물론 십일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이 설교가 의미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하면서도 십일조라는 법에 얽매여서 돈 문제에서 자유로움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 문제에 대해서 자유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자유로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 조문인 십일조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조상들도 감당하지 못했고 우리도 감당하지 못하는 불필요한 멍에를 다른 성도들에게 지우지 않아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자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는데 그 자유를 얽어매는 속박의 멍에를 감히 누가 성도에게 얹어 놓는단 말입니까?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신정국가에 살던 유대인에게 정해진 세금(稅金)입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약에 십일조란 단어가 8번 나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아브라함의 십일조, 레위 사람들이 받았던 십일조를 합쳐서 5번,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 3번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십일조는 전부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이 드렸던 십일조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누가복음 18장 12절 -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신약 성도의 드림은 율법에 의해 규정된 강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안 하면 재앙이나 우환이 닥친다.’ 이런 말은 애들 장난보다도 못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것을 떼먹고, 하나님 것을 강도질하고도 여러분이 멀쩡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는 이런 식으로 성도들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의 드림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과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드림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하는가?   고린도후서 9장 7절을 봅시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성경을 정확하게 읽읍시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율법은 마지못해서라도 하게 하지만, 복음은 자진해서만 하게 합니다.   ‘나는 10분의 1로 정했어요.’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나는 10분의 2로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저... 나는 20분의 1로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나는 30분의 2로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니까요.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십일조를 안 드리면 우환이 생길 거야, 우리 애가 아플 거야.’ 이런 헌금은 마지못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정말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고귀한 사역, 그 놀라운 일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께 고마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아무도 강요해서도 안 되고 강요를 받아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입니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돈에 대해서도 자유를 누려야 됩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러분 이제까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돈 문제에 대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워야 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십일조를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자유함 속에서 자발적으로 드릴 것을 촉구합니다. 신약성경은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할지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10분의 1이 될 수도 있고, 20분의 1이 될 수도 있고, 10분의 2가 될 수도 있고, 5분의 1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각자가 믿음에 따라서 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한대로 자발적이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구약의 율법을 따라서 10분의 1을 최소 수준으로 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인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10분의 1을 나의 최소 수준으로 정합니다. 그건 내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나처럼 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자기가 구약의 율법에 따라 10분의 1을 철저하게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성도들에게는 더 드리기를 원하실 수도 있고, 어떤 성도들에게는 덜 드리기를 원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십일조가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고 예는 될 수 있지만 모두에게 적용해서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 조문에서 이미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는데,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침해한단 말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얼마를 드릴지는 전적으로 자신과 주님과의 문제입니다. 혹시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거든 기도하세요. ‘주님, 나의 삶이 이렇고, 나의 수입이 이렇고, 나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얼마만큼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반드시 정답을 알려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 돈에 대해서조차도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자   바울 서신에서 성도들이 범할 많은 죄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고 훈계하고 권고하고 꾸짖고 있지만 십일조 안 한 것에 대해서 한 번도 꾸짖은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네가 십일조 떼먹었으니 너는 저주받았다!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고도 네가 멀쩡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차원이 다릅니다. 누군가 십일조를 명령으로 가르치며 ‘반드시’라는 조항으로 가르친다면 초대교회에 있었던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물질을 드림은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앙의 자유 안에서 결정될 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유지하거나 성별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좋다. 내가 모세의 율법대로 철저하게 난 23%를 드리겠다.’ 이렇게 율법에서 규정한 대로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너는 특별대우다, 너는 보너스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은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   모세의 율법조항인 십일조를 꼭 드려야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고,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율법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십일조라는 한 항목만 행합니까? 율법을 다 실행해야 합니다. 신자가 할례를 받거나 율법의 어떤 조항을 지킴으로 믿음을 내세우려는 의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다 인간적 수고를 더해 보려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일입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 때 할례가 논란의 핵심이 되었듯이 오늘날 십일조가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음을 알았다면 아마 성경을 바꿔서 기록했을 것 같습니다.   보라 나 바울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십일조를 드리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시리라. 내가 십일조를 행하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   어떻습니까? 느낌이 팍 옵니까? 초대교회 때 할례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아브라함의 할례를 예로 들어서 정당화하려고 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파들은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들어서 정당화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할례가 무효화 됐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십일조가 무효된 것을 알지 못한단 말입니까? 또한 구약에서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은 오늘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장 직분으로 바뀌었습니다.   단지 10분의 1만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 딱 떼어드리면 나머진 땡입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됩니까? 신약성도의 드림은 각자의 재량권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과의 영적인 사귐 가운데서 결정될 문제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몇 퍼세트를 드리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10분의 1만 거룩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드림에 동기는 사랑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강제적인 법조항이 없습니다. 내가 우리 교회 사역하면서 한 번도 십일조에 대해서 반드시라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모금을 해서 가난한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도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을 봅시다.   그런데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에 때문에 움직여서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운영을 걱정한다는 핑계로 구약성경의 율법조문을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은 당장은 유익이 있을지 모르나 각 사람이 주님과 올바른 사귐 속에서 건전하게 영적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돈에 대해서, 십일조에 대해서는 율법에 끌려 다니고, 무척 부담스럽게 노예생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 율법 아래로 다시 그리스도인들을 끌고 가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정말 성경의 본을 따라 스스로 10분의 1을 정해서 열심히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십일조라는 그 조문, 율법조문의 오용(誤用)이 얼마나 잘못된 적용이고, 비 성경적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충실하게 하면 뭔가 하나님을 향한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뭔가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함에 이르렀으니 오직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   여러분에겐 복음 안에서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사랑으로 서로 섬기시길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을 봅시다.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느니라.   사랑을 우리가 행함으로 모든 율법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든 율법의 요구와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성취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며 섬기겠습니까? 어떻게 사랑하며 살겠습니까? 사랑이신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므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삶, 돈에 대해서도, 십일조에 대해서도 주께서 가르치신 본에 따라 사랑의 동기에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모세의 율법으로 되돌아가 자유를 잃어버리고서 부담스러운 속박에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십일조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2009-06-03 20:14:38 | 관리자
사무엘은 레위 지파 사람인가요? 성경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무엘기상 1장 1절의 말씀을 개역성경이나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성경에 오류가 생기고 마찰이 생깁니다. 개역(개정):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표준새번역: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숩의 자손 엘가나라는 사람이, 에브라임의 산간지방에 있는 라마다임에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여로함이고, 할아버지는 엘리후이고, 그 윗대는 도후이고, 그 윗대는 숩이다. 킹제임스 흠정역: 이제 에브라임 산의 라마다임소빔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엘가나더라. 그는 에브랏 사람으로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사대 손이더라. 사무엘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므로 반드시 레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개역(개정)성경 등은 그를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이렇게 성경에 모순이 생기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김경래 교수(전주대학교)의 글입니다. 이분의 분석을 읽으면 킹제임스 성경은 옳고 다른 성경은 틀리다는 것을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어느 지파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에 일반적으로 독자는 사무엘상 1:1에 근거하여 ‘에브라임 지파’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무엘상 1:1에서 이 책의 저자는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를 ‘에프라티’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말 표준새번역은 이를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숩의 자손 엘가나라는 사람)’으로 번역함으로써 엘가나와 사무엘 부자(父子)를 에브라임 지파 사람으로 규명하고 있다. 개역 성경과 공동 번역에서는 이를 ‘에브라임 사람’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러한 번역 역시 표준 새번역과 똑같은 효력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어 ‘에프라티’는 구약 성경에 모두 합하여 다섯 번 출현한다. 먼저 길르앗 사람들과 에브라임 지파의 싸움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사사기 12:5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의 집안 배경을 기술하고 있는 열왕기상11:26에서 이 낱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열 두 지파의 하나인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다는 의미로 ‘에브라임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조상 엘리멜렉을 소개하는 사무엘상 17:12과 룻기 1:2에서 이 동일한 히브리어 낱말은 ‘에브랏 사람’, 즉 ‘베들레헴이라고도 불리는 에브랏 마을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두 구절에서는 모두 보다 큰 지명 내지 지파 이름인 ‘유다’와 그리고 ‘에브랏’의 다른 이름인 ‘베들레헴’과 (창세기 35:16-19; 48:7; 룻기 4:11 참조) 더불어 ‘유다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사무엘상 1:1에서 히브리어 낱말 ‘에프라티’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앞서 언급한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라는 문구와는 달리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낱말은 베들레헴의 별칭인 ‘에브랏’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사무엘상 1:1의 ‘에프라티’는 ‘에브랏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참고로 사무엘의 아버지가 살았다는 ‘라마다임소빔’은 유일하게 사무엘상 1:1에만 출현한다.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다임소빔’은 사무엘상 나머지 전체에 걸쳐서 나오는 ‘라마’와 동일 명칭이다 (1:19; 2:11; 7:17; 8:4; 15:34; 16:13; 19:18, 22; 25:1; 28:3). 단순히 산봉우리와 같은 ‘높은 곳’을 가리키는 ‘라마’라는 지명은 이스라엘에 흔한 이름으로서, 구약 성경에 기록한 바에 따라 대략 다섯 곳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각기 베냐민 지파에 속한 한 성읍 (여호수아 18:25; 사사기 19:13; 열왕기상 15:17, 21, 22; 역대하 16:1, 5, 6; 에스라 2:26; 느헤미야 7:30; 11:33; 이사야 10:29; 예레미야 31:15; 40:1; 호세아5:8), 에브라임 산지의 한 성읍 (사사기 4:5), 납달리 지파에 속한 한 성읍 (여호수아 19:36), 아셀 지파에 속한 한 성읍 (여호수아 19:29), 길르앗의 한 성읍 (열왕기하 8:29; 역대하 22:6) 들이다. 사무엘상에 언급된 ‘라마’는 모두 위의 다섯 곳 중에서 ‘에브라임 산지의 한 성읍’을 가리킨다. 이제 사무엘상 1:1의 ‘에프라티’가 ‘에브라임 사람’을 뜻한다고 단정내리기 전에 사무엘의 족보를 추적하여 그의 출신 지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사무엘상 1:1에서는 엘가나의 조상을 여로함, 엘리후, 도후, 숩 의 순서로 거슬러 올라가며 소개하고 있다. 역대상 6장에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또 나타난다. 역대상 1-9장은 이스라엘의 족보를 다루고 있는데, 그중에서 6장은 레위 지파의 족보이다. 레위에게는 게르손과 그핫 (=고핫)과 므라리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역대상 6:1). 이 세 아들중 아론과 모세의 조상도 되는 (출애굽기 6:18-20 참조) 그핫의 후손 가운데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있다 (역대상 6:28, 33, 34). 역대상 6:34-38에서 사무엘의 조상은 엘가나, 여로함, 엘리엘, 도아, 숩, 엘가나, 마핫, 아마새, 엘가나, 요엘, 아사랴, 스바냐, 다핫, 앗실, 에비아삽, 고라, 이스할, 그핫, 레위, 이스라엘의 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소개되고 있다. 한편 6:25-27절에서 사무엘의 조상은 엘가나, 여로함, 엘리압, 나핫, 소배, 엘가나의 이름 순으로 열거되고 있다. 이제 사무엘에서 숩 (또는, ‘소배’)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친 이 집안 계승자들의 이름을 표를 통하여 비교해 보기로 하자. 이름 표기상 비록 근소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결국 같은 집안의 족보임이 분명하다. 이뿐만 아니라 사무엘에게 요엘과 아비야 두 아들이 있다는 기록에 있어서도 사무엘상 8:1-2과 역대상 6장 (28, 33절)은 서로 일치한다. 참고로 ‘다윗이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여,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울 때까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한’ 레위 사람들 중의 하나인 헤만은 사무엘의 손자요, 요엘의 아들이었다 (역대상 6:31-34). 이상의 족보 고찰을 통하여 사무엘은 레위 지파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역대상 6:66에 의하면, 레위 지파의 한 가문으로서 사무엘이 속한 ‘그핫 자손의 몇 족속은 에브라임 지파 중에서 성을 얻어 영지를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수아 21:4-5, 20 참조). 이 사실은 사무엘의 부친 엘가나가 레위인으로서 왜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살았는지 설명해 준다. 이런 점에서 사무엘상 1:1의 ‘에프라티’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 (표준 새번역 참조) 이라는 뜻이 아니요, 단순히 ‘에브라임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런 결론을 바탕으로 필자는 사무엘상 1:1에 대하여 “에프라임 산지 라마타임 쪼핌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엘카나인데, 그는 에프라임 지역 주민으로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토후의 증손이요 쭈프의 현손이었다”라는 새로운 번역문을 권하고 싶다. 정직한 히브리어 학자가 권하는 번역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입니다. 정직하게 성경을 대하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원문을 보존해 주시고 바르게 번역하도록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본문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2009-06-01 17:15:30 | 관리자
양 떼 혹은 양과 염소 떼? ● 정동수 킹제임스 성경에 보면 영어 flock이 111회 나옵니다. 성경에 익숙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예수님이 양떼를 언급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flock이 당연히 양 떼를 가리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영어 flock은 양, 염소, 집오리, 새 등의 떼를 가리킵니다(네이버 사전). 특히 성경에서는 flock이 양과 염소 떼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레위기 1장 2절 같은 경우 반드시 양과 염소 떼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Speak unto the children of Israel, and say unto them, If any man of you bring an offering unto the Lord, ye shall bring your offering of the cattle, even of the herd, and of the flock.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 중에 누가 {주}께 헌물을 가져오려거든 너희는 가축에서 곧 소 떼나 양과 염소 떼에서 너희 헌물을 가져올지니라. 이런 곳을 양떼라고 번역하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은 김경래 교수(전주 대학교)가 이 문제에 대해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이 글을 보면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얼마나 정확하게 번역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 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 המהב )과 ‘새’( ףוע )로 나뉜다. 가축 중에는 ‘소’( רקב )와 ‘양떼’( ןאצ , ‘쬰’)가 가능한데 (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 (1:3, 10). ןאצ (‘쬰’) 중에는 다시 ‘양 ( םיבשׂק )과 염소 ( םיזע )’가 가능하다(1:10). 이런 분류는 레위기 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위기 1:2, 10; 3:6; 5:6 등의 ‘쬰’( ןאצ )은1:10; 3:7의 ‘케쎄브’ ( בשׂק )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ןא (쬰)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그 말씀」 1995년 10월호에 실린 필자의 “신약성경 번역상의 몇 가지 문제점”, 145-151 참조). 한편 השׂ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ןאצ (‘쬰’)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ןאצ 은 השׂ 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브리어 ‘쬰’ ( ןאצ )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역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쬰’ ( (ןאצ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 ( בשׂק )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애굽기 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השׂ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 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 (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השׂ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 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 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영어 flock은 히브리말의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으나 우리말에서는 이런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 유의하여 영어 성경을 보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2009-06-01 16:21:35 | 관리자
  입다의 딸은 번제물로 죽었을까요?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입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딸을 죽게 하면서까지 서원을 지키는 인물이 입다라고 배웠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사기 11장 37-39절을 봅시다.   개역: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흠정역: 또 그녀가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나를 위해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나의 처녀 생활로 인해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해 애곡한 뒤   두 달이 끝날 때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왔으므로 그가 전에 자기가 서원한 그 서원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개역성경은 히브리말에도 없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마음대로 집어넣었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다가 처녀 딸을 죽여 번제 헌물로 바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앞뒤 문맥상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39절 끝에 입다의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녀는 평생 처녀로 지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전주대학교의 김경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사사기 11:37-40에 대한 한글 개역 성경과 공동 번역 및 표준 새번역 등의 번역문은 번역과정에서 역자가 나름대로의 특정한 해석을 본문에 가미시켜 번역함으로써 원문의 의도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를 담게 된 대표적인 예이다. 필자는 이 주제를 이미 「그 말씀」 1995년 7월호 (195-200쪽)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우리말 번역본들의 부당성만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사사기 11:37-40에서 우리말 개역과 표준 새번역 공히 입다의 딸이 죽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해석적 입장을 번역문에까지 반영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본문 중에 입다의 딸이 죽는다는 표현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고대 역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개역에서는 “죽다”라는 단어를 조그만 글자로 삽입시킨 것이다. 그러나 표준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이런 식의 구분도 없이 아예 입다의 딸이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 이 단어를 번역본문 안에 그대로 반영시켰다.   입다가 서원대로 자기 딸을 죽여서 번제로 바쳤을 거라는 해석은 우리 한글 번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초대 교회 이후 많은 기독교 주석가들은 그만두더라도,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 역시 사사기 11장의 내용을 재기술하면서 입다의 딸이 이때 죽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유대 고대사 5권 7장).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한글 번역문에서 히브리어 원문에도 없는 ‘죽는다’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삽입시키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한글 성경은 이 구절들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사사기 11장을 통하여 볼 때, 어쩌면 입다의 딸이 이때 번제물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서원을 이루고자 평생 처녀로 보냈을 가능성도 크다. 성경을 번역할 경우 아무리 그럴듯한 해석이라도 함부로 본문에 그 내용을 삽입시켜서는 안 된다.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습니다.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009-05-30 15:10:44 | 관리자
마태복음 24장의 이 세대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 정동수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올리브 산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징조들과 - 즉 전 세계적인 전쟁, 기근, 질병, 지진, 그리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의 싹이 남 등 - 자신이 권능으로 영광스럽게 이 땅에 재림하기 전에 있을 사건들 즉 7년 환난기에 벌어지는 무서운 사건들을 말씀하신 뒤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약속을 하셨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성취되리라.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4-35). 여기 이 놀라운 예언 속에는 ‘이 세대’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특별한 징조들이 이루어지는 세대를 의미하며 바로 ‘이 세대’가 다 지나가기 전에 예수님께서 영광의 왕으로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세대를 이스라엘의 독립과 관련된 한 세대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1948년에 독립했고 한 세대는 20-40년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앞뒤 문맥상 이 세대는 24장의 무서운 일들이 이루어지는 세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2009-05-30 14:51:39 | 관리자
창세기 1-11장의 난해 구절 성경의 미스테리   ● 김경래 [김경래 교수는 총신대와 이스라엘 Institute of Holy Land Studies(M.A.)를 졸업하고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사본학으로 박사학위( Ph.D.)를 받았다. 지금은 전주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글은 1996년 7월호 월간 그 말씀(p.190-196)에 실린 것이다. 창세기를 비유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이 교수님의 글은 그렇지 않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특히 다음의 문제를 잘 다루셨다.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 우리 성경대로 믿는 이들은 분명히 이것이 천사라고 믿는다.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면 「UFO는 있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창세기 2장의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구절: 이것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개역성경만이 범한 오역이며 킹 제임스 성경은 이를 정확하게 "살아 있는 혼"으로 번역했다. 이 구절로 인해 "영이 있는 사람"이 있고 "영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소위 베뢰아의 거짓 교리가 등장했고, 많은 이들이 그 안에 빠져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 노아의 대홍수: 진화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노아의 대홍수는 전세계를 덮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셈과 야벳의 나이 관계; 많은 이들이 셈을 장자라고 생각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야벳을 장자로 규정짓고 있다. 여러 가지 크리스천 소설 -진짜 이야기가 아니고 소설이니 가짜임-을 지어 교계에서 유명하게된 분이 있는데 그분은 늘 장자 이론을 써서 글을 전개하지만, 사실 성경은 모두 두 번째 사람들에 의한 새 역사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 성경의 처음부터 자세히 보기 바란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므낫세와 에브라임, 사울과 다윗, 첫째 아담과 나중 아담(예수님) 등등. 그래서 우리도 모두 두 번 태어나야만 한다. 부디 크리스천들이 소설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실에 무지하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이들이 소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우며,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현실임이 매우 안타깝다. 저자의 의도를 다 살리기 위해 성경 구절을 그대로 두었으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 덩어리(창2:6) 창세기 2장 6절에 "땅에서 '에드'가 올라와 온 지표면을 적셨다."는 기록이 있다. 히브리어 '에드'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두 차례 나온다(여기서와 욥기 36:27).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이를 '안개' 라고 번역한 반면에 표준새번역에서는 '물'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욥기 36장 27절의 경우, 개역은 역시 '안개'라고 번역하고 표준새번역은 이 낱말이 속한 문구를 '그것으로 빗방울을 만드시며'라고 번역하고 있다. 주전 3세기경에 번역된 칠십인역은 창세기 2장 6절의 '에드'를 보통 '샘'을 뜻하는 '페게'로 번역하고, 아람어 탈굼은 이를 '구름'을 뜻하는 '아네나'로 번역하고 있다. 이 낱말의 해석에 있어서 일치를 보이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혹자는 이를 '수증기' 내지는 '안개'로 보는가 하면, 혹자는 '샘' 또는 '우물'로, 그리고 어떤 이들은 고대 근동 유사 언어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지하의 물줄기'로 설명하기도 한다. 창세기 2장 6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를 해석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창세기 1장은 인간의 주소지인 지구를 중심으로 창조를 묘사하고 있는 반면, 창세기 2징은 그 초점을 인간 창조에 두고 있다. 이는 마치 전체 풍경을 촬영한 후 다시 줌을 이용하여 촬영자가 원하는 특정한 풍경을 보다 상세히 촬영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히브리 문학에서는 이러한 식의 대구적 묘사가 자주 나타나는 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2장 4절 하반절에서 일반적으로 '히늘과 땅' 대신 순서를 바꾸어 '땅과 하늘'이라고 말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아울러 창세기 2장 5-6절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말하는 바를 다른 문구를 통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2장 5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는 구절은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였다'('토후 바보후')라는 표현을 달리 또는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장 2절에서 '테홈'과 '물'('마임') 등 두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 '커다란 물의 집합체'는 2장 6절에서 우리의 관심사인 '에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온 지표면('콜프네 하아다마')라는 표현을 통해 볼 때, '에드'의 범위는 결코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만큼 땅의 일부분만 적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2장 5절에서 이미 비를 내리는 것과 식물의 생장을 연관시켜 언급하였으므로 2장 6절의 '에드'는 식물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치 않은 점은, 2장 6절의 '에드'가 둘째 날 하나님이 물을 가르기 전의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물을 가르고 난 이후에 '궁창 아래의 물'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에덴에서 발원한 강은 다만 그 안의 동산만을 적실 뿐이었다(창2:10). 그러나 2장 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에드'는 '온 지표면'을 적시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에드'라고 불린 '물체'는 반드시 커다란 규모의 것이어야만 한다. '안개'나 '수증기', 또는 단순한 '샘' 같은 것들로는 이러한 역할을 해낼 수 없다. 창세기 1장 2절의 '태홈'과 관련된 '커다란 물 덩어리' 말고는 이런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물체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개역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세기 2장 7절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 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세기 1장 20∼21절, 24절, 30절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성경은 그 곳에서 '생물'이나(1:20∼21,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세기 2장 19절, 9장 10,12,15∼16절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역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 인 우리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여타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2장7절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창6:1∼4) 창세기 6장1∼4절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 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 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 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아마도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형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방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유일하게 욥기에 또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바대로 창세기 6장 1∼4절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욥기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 22:30, 막 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20장 34∼36절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 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한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말고도 에녹서, 요세푸스 등을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세기 6장 1∼4절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베드로후서 2장 4∼5절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떄까지 지키게 하신 일'(4절)과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5절)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9∼20절의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베드로후서 2장 4절("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베드로전서 3장 19∼20절과 베드로후서 2장 4∼5절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필자의 글 "그리스도인의 고난: 베드로 전서 3:13∼22" 참조, 「설교자를 위한 성경 연구」, 1996년 5월호, 12∼22쪽에 실림).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세기 6장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창세기 6장 3절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의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히브리어의 '레올람'은 '영원히'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수명을 누려왔었다(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창세기 6장 4절의 '네피림'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할 때 더욱 쉽게 이해된다. 우리는 더 이상 이들 '타락한 천사들'이나 그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네피림'의 존재에 대하여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후자는 노아 홍수 때 이미 모두 멸망하였겠고, 전자는 신약성경의 기록대로(그리고 이사야 24:21∼22 참조) 심판 때까지 옥에 갇혀 지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필자와 견해를 같이하는 김상복 목사님의 저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도서출판 횃불에서 간행한(1993년 초판) 그의 저술「잃어버린 왕좌」는 창세기 1∼11장에 대한 강해집으로서, 창세기 6장 1∼7절에 대하여는 제16장에서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창 5:32, 6:10, 7:13, 9:18, 10:1, 대상 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성경은 창세기 5장 32절을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세기 5장 32절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 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노아가 오백 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났다. 둘째,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 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났다. 셋째, 노아가 오백 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났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났다. 히브리어 어법 상 앞의 두 가지보다는 세 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 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세기 10장 21절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둘 다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로도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세기 10장 21절의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악히 예펫 하가돌')이다. 마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첫째, '야벳의 큰 형제', 둘째, '큰 야벳의 형제'이다.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마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마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마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마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세기 11장 10절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년에는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 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창 7:9∼12),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이년'(슈나타임 악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육백 세와 육백일 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 후 두 해(노아 나이 육백이 세와 육백삼 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육백사 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백 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오백사 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세기 5장 32절("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가지 증거로서 창세기 9장24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9장20∼27절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 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창 15:16, 19∼21절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세기 9장 24절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개역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27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보았다. 노아의 세아들 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세기 9장 24절의 '작다'('하카탄')나 10장 21절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노아 집안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그렇게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의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오백 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오백사 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2009-05-30 14:26:51 | 관리자
미갈과 메랍 ● 정동수 일반 성경은 삼하21:8에 메랍의 다섯 아들로 되어 있는데 흠정역에는 미갈의 다섯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영어 KJB에도 미갈로 되어 있구요. 그런데 삼상18:19을 보면 사울의 큰 딸 메랍은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어졌고 삼하6:23에는 사울의 다른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하21:8에는 미갈의 다섯 아들로 기록될 수 있을까요?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삼하21:8을 개역성경과 흠정역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흠정역: 다만 왕이 아이야의 딸 리스바의 두 아들 곧 그녀가 사울에게 낳은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붙잡고 또 사울의 딸 미갈의 다섯 아들 곧 그녀가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을 위하여 키운 아들들을 붙잡아 개역: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KJV: But the king took the two sons of Rizpah the daughter of Aiah, whom she bare unto Saul, Armoni and Mephibosheth; and the five sons of Michal the daughter of Saul, whom she brought up for Adriel the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NIV: But the king took Armoni and Mephibosheth, the two sons of Aiah's daughter Rizpah, whom she had borne to Saul, together with the five sons of Saul's daughter Merab, whom she had borne to Adriel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미갈이 '낳은 아들들'이 아니라 '키운 아들들'이라고 말하며 개역성경과 NIV는 메랍이 '낳은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히브리 마소라 원문은 메랍이라고 할까요? 미갈이라고 할까요? 예수님이 생전에 보시던 전통 마소라 본문은 분명히 미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현대 역본인 NKJB조차도 미갈이라고 정직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같은 현대 역본들은 미갈은 아들들이 없으므로 히브리 기자가 메갈을 미갈이라고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고 메갈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낳은'으로 번역된 히브리말(스트롱 번호 3205)을 근거로 듭니다. 여기에 원어의 함정이 있습니다.  원어는 어느 단어든지 몇 개의 뜻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각 단어의 뜻(번역)은 문맥에 의해 결정되어야 합니다. '낳은'으로 번역된 히브리말(스트롱 번호 3205)은 대부분 '낳다'(bear, beget)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에 따라 그렇게 번역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창세기 50장 23절을 봅시다. 흠정역: [요셉이] 에브라임의 자손을 삼대까지 보았고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이들도 요셉의 무릎 위에서 자랐더라. 개역: [요셉이]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여기서도 동일한 히브리말(스트롱 번호 3205)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흠정역이나 개역 모두 '자라다', '양육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같은 히브리말(예를 들어 스트롱 번호 3205)이라도 문맥에 따라 달리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원문에 있는 대로 미갈을 그대로 두고 미갈이 키운 아들들이라고 정확히 번역하였습니다. 반면에 개역성경, NIV 등은 '낳다'는 뜻만 고집하고 그러면 앞뒤가 안 맞으므로 과감히 미갈을 메랍으로 바꾸고 서기관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주석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신학자들도 대부분 같은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하나님의 방법인지 독자께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보존하십니다. 그 말씀들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 안에 확실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완전한 성경입니다. 우리말 킹제임스 성경은 그 성경을 우리말로 최대한 정직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2009-05-30 14:08:32 | 관리자
뵈베와 여자 집사 ● 정동수 다음은 뵈베와 여자 집사에 대해 어느 분이 보내 글입니다.   로마서 16장 1절에 보시면 뵈베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영문 킹제임스 성경에선 이 뵈베가 servant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을 보시면 집사는 deacon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킹제임스 성경에선 분명히 다르게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을 보면 모두 똑같이 diakonos로 나오지 않습니까? 스트롱 성구사전을 들이대면서 여성집사는 성경에 있다고 주장하니 어떻게 반박을 못하겠더군요...... 답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을 알려 주어도 이미 마음에 그렇게 믿기로 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그 사람이 성경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사람(그리스도인 포함)의 현 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다만 성경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미국에서는 침례교회가 대세를 이루는데 거기서는 교단 차원에서 여자는 목사나 집사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오순절주의 교회 등에서도 여자 집사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자매들이 집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집사가 없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신학교나 목사 혹은 집사는 로마서 16장 1절의 뵈베를 가리킵니다. I commend unto you Phebe our sister, which is a servant of the church which is at Cenchrea:(KJV) I commend to you our sister Phoebe, a servant of the church in Cenchrea.(NIV) 영어 KJV, NKJB, NIV, NASB 등은 모두 뵈베를 servant 즉 종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NIV와 NASB는 그 옆에 각주로 여집사(deaconess)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즉 원래는 종이 맞지만 현대의 여집사 추세를 반영하여 여집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서로 상충되는 듯한 구절들이 나옵니다. 이때에 우리가 취해야 할 성경 해석 원칙은 명백한 구절을 교리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이단들과 잘못된 교리는 개인이나 교단의 역사성 혹은 이득을 위해 명백한 것들을 흐릿한 것들 뒤로 놓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자, 여기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기록자는 디모데전서라는 목회 서신에서 분명하게 목사와 집사의 자격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지역교회의 목사)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2절)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서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11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12절). 동일한 기록자 사도 바울은 분명히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구절로 인해 타격을 입지만 그래도 교단이나 개인의 생각을 버릴 수 없으므로 이들은 원어 게임장으로 달려 갑니다. 즉 딤전 3장의 집사는 원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 스트롱 번호 1249)이며 신약성경에 30회 나오고 ‘minister’, ‘serve’, ‘servant’로 번역되었습니다(마20:26; 마23:11; 롬16:1 등). 또 동사 ‘디아코네오’(스트롱 번호 1247)는 신약성경에 37회(마4:11; 마20:28; 행6:2 등) 나옵니다. 로마서 16장 1절의 뵈베는 분명히 원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 스트롱 번호 1249)입니다. 그런데 ‘디아코노스’는 딤전 3장의 집사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minister, servant로만 번역되었습니다. 디아코노스의 용례를 보기 위해 16장 바로 앞에 있는 로마서 15장 8절을 보겠습니다. Now I say that Jesus Christ was a minister of the circumcision for the truth of God, to confirm the promises made unto the fathers: 이제 내가 말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할례자들의 사역자가 되신 것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확증하려 하심이요, 여기서 minister 즉 사역자로 번역된 단어는 16장 1절의 servant와 마찬가지로 '디아코노스'입니다. 원어를 주장하는 이들의 뜻대로 하자면 이것도 deacon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할례자들의 집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번역되면 맞겠습니까? 말이 안 되지요? 이것이 바로 원어 게임의 함정입니다. 그러면 왜 같은 디아코노스를 딤전 3장에서는 집사라고 번역했을까요? 그것은 거기의 집사가 교회의 직분을 맡은 종으로서의 집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딤전 3장 12절을 종으로 바꾸어 봅시다. 종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12절). 집사 대신 종으로 바꾸면 말이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러므로 한 마디로 집사는 교회에서 종의 직무를 맡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는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도 가능하다고 믿고 교단과 개인이 그대로 실행하면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데서 성경관이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이런 말씀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하면 자유주의 쪽이고 아니하고 하면 근본주의 쪽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많은 굴곡을 겪어 왔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서려고 합니까? 집사에 대해서는 자료실의 영상 자료 내의 교회 분류에서 집사를 보기 바랍니다(강해 노트와 동영상).   첨언: 아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혹은 성경대로 함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 교회에는 여자 집사가 없다고 자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일반 교회의 여자 집사들만큼 부지런히 일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오늘날 근본주의 교회들의 문제입니다.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랑할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자기들이 우습게 여기는 일반 교회 성도들보다 더 사랑하고 더 뜨겁게 모이고 섬기는 일이 있어야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미지근하고 덜 모이고 덜 희생하는 게 근본주의 교회들의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 근본적인 교회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2009-05-29 14:14:53 | 관리자
드보라와 여자 목사   ● 정동수   다음은 드보라와 여자 목사에 대해 어느 분이 보내 글입니다.   제가 오늘 읽은 글을 쓴 저자는, 여대언자 드보라를 리더쉽과 연결시켜 말하면서, 교회나 가정에서 여자가 남자를 가리칠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속 드보라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은 드보라 시대를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삿17:6, 21:25 이렇게 평가하신다. 여대언자 드보라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다른 재판관( 옷니엘, 기드온 등등..)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드보라는 하나님이 선택한 대언자가 아니다, 그녀가 행동한 것은 "또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주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작은 숲들을 섬겼더라" 삿 3:7과  관련있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축복을 받은 여대언자이지만, 하나님께선 그녀를 대언자로 혹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대충 이런대용이였는데요,, 이 저자가 쓴 드보라에 대한 평가가 아무래도 아닌것 같아서요.. 제 생각과 너무 많이 달라서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어떤 한 글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드보라의 시대에 재판관을 대신할 남자가 없없고, 결국 하나님은 여자 드보라를 대언자로 사용하셨다, 이것을 지금시대랑 연결시킬수 있는데, 어느 한 지방에 형제,자매 기독교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 목사의 역할을 대신할 형제가 없다면, 능력부족이나, 믿음부족으로,, 그렇다면 성경믿음,지식방면으로 뛰어난 자매를 목사로 세울수 있다.   여대언자 드보라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그리고 인터넷에서 찾아본 글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한국 교회에서는 특이하게 여자 목사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침례교회가 대세를 이루는데 거기서는 교단 차원에서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대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오순절주의 교회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고 거기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여자 목사의 근거로 대는 것이 바로 사사기 4,5장에 나오는 여대언자 드보라입니다.   대언자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이다.  대언자(Prophet)의 여성형인 여대언자(Prophetess)는 성경에 8번 나옵니다(출15:20; 삿4:4; 왕하22:14; 대하34:22; 느6:14; 사8:3; 눅2:36; 계2:2).   가장 처음 나온 사람은 미리암입니다. 그리고 드보라, 훌다 등이 있고 신약성경에는 안나와 거짓 여대언자 이세벨이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드보라를 가리켜  여대언자라고 하므로 드보라는 대언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And Deborah, a prophetess, the wife of Lapidoth, she judged Israel at that time(Judg 4:4).   그러나 여자 대언자가 구약성경에 있었다는 것과 여자 목사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성경(딤전3장)은 분명하게 목사와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지역교회의 목사)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2절)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서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11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12절).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는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도 가능하다고 믿고 교단과 개인이 그대로 실행하면 그것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데서 성경관이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이런 말씀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하면 자유주의 쪽이고 아니하고 하면 근본주의 쪽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많은 굴곡을 겪어 왔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서려고 합니까?   목사에 대해서는 자료실의 영상 자료 내의 교회 분류에서 목사를 보기 바랍니다(강해 노트와 동영상).  
2009-05-29 13:30:29 | 관리자
항상 킵바이블에서 유익한 정보를 얻어가는 사람이온데 다름이 아니오라 성경에 관련한 질문이 있어서 올립니다. 로마서 16장 1절에 보시면 뵈베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영문 킹제임스 성경에선 이 뵈베가 servant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을 보시면 집사는 deacon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킹제임스 성경에선 분명히 다르게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을 보면 모두 똑같이 diakonos로 나오지 않습니까? 스트롱 성구사전을 들이대면서 여성집사는 성경에 있다고 주장하니 어떻게 반박을 못하겠더군요...... 답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7:1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5-28 21:33:06 | 변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