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순서와 내용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섭리, 사람들을 위한 계획들을 선명하게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제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신앙인은 교사가 되건, 기술자가 되건, 과학자가 되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음에 한국에 돌아가면 함께 교제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습니다.
2012-03-21 02:34:24 | 김문수
저도 지금까지 수많은 이단들을 만나봤습니다. 그 때마다 저를 지켜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단순무식하리만치 꼭 붙잡고 있었던 "성경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어리던 그 시절엔 아마 확신이라기보다는 제가 처음에 잡은 것을 놓지 않으려는 고집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님도 비교적 젊은 시절에 "신앙 자주 국방"을 달성하셨군요.
이단교리에 대한 비판,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른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라는데 공감합니다. 가끔 아들들과 컴퓨터로 Age of War 라는 플래쉬 게임(원시시대부터 중세, 현대, 첨단과학시대까지)을 하는데 저는 상대 기지 공격하러 가지 않고, 무기와 기지 업그레이드만 합니다. 일정 단계만 넘어서면 적군들이 공격하러 와서 우리 기지 앞에서 다 쓰러지고, 장거리 레이저 무기에 의해 적 기지 파괴되고 게임 종료.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굳이 이단 교리와 싸우지 않더라도 우리 믿음만 성경의 진리 위에 확고하게 세우고 자기 자신을 꾸준히 업그레이드하면 언제나 승리하는 자주 국방 태세가 준비되리라 생각합니다.
2012-03-21 02:25:49 | 김문수
억울한 일 혹은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취할 자세와 태도에 대해서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구나 손해보고 살기는 싫은 것이 일반인의 자연스러운 감정이기에 억울한 심정을 쉽게 다스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럴 때에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떠올려 봅니다. 거기에 가면 공평하게 판단을 내려주실 주님이 계시니까요.
2012-03-21 01:53:51 | 김문수
#1516 에 관련 글이 올려져 있습니다.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2012-03-21 01:13:02 | 김정훈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문득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용 책자를 써보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이왕이면 깨달음 뿐만 아니라 그 깨달음을 전달 하시는 문체에서도 '튜닝 끝에 순정'이 나타나는 느낌이 전달되었으면 금상첨화일 것 같구요~ 글 군데 군데에 직설적인 표현이 섞임으로 구어체 처럼 친근감있고 술술 읽히는 것은 장점으로 남겨도 좋지만, 그럼에도 글 전체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약간의 톤 다운을 하여도 오히려 형제님이 의도한 내용을 살리는 쪽으로 작용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왠지 앞으로도 형제님의 글은 빠뜨리지 않고 읽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제가 조금 주제넘게 깊이 참견하였습니다.^^
2012-03-21 00:57:53 | 김정훈
형제님...교회에선 그저 묵묵히 앉아 있는 모습만 보는데 이렇게 글을 올려 주시니 홈피의 필요 충분 조건이 채워지네요. 감사합니다...
2012-03-20 23:31:51 | 오혜미
용묵형제님...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특히 위의 빨간 문장 "내가 지옥에 가면 갔지~~" 에서는 웃음도 나왔어요..
솔직히 형제의 글을 처음 대했을 땐 독설과 같은 문체로 느껴져서 불편했는데 지금은 많이 순화 된 면도 있겠지만 내가 독해졌는지 너무 후련할 때가 있어요..^*^
이 글을 올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 모르는데 공부하는 중에도 이런 묵상과 회상의 시간을 갖었다는 것이 참 훌륭하네요.
늘 생각하는 거지만 형제의 정신연령은 본인나이의 두배만큼 살아온 사람의 포스가 느껴지지요.^^
2012-03-20 23:23:44 | 오혜미
형제님 글을 통해 견문이 많이 넓혀지네요 항상 첫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성경에서 그 첫단추는 창세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창조는 믿지 못하는데 예수님은 믿는다는 거짓말쟁이가 너무 많은 요즘세태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2012-03-20 23:18:23 | 송재근
창세기 2장은 1장의 부연 설명이라고 이해하면 하나도 어려울 게 없지요.
또한, 식물을 먼저 만들고 나서 해와 달이 등장하는 것도 일반적인 진화론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부분입니다.
둘째 날의 궁창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존재하지만,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문자적인 6일 창조라는 큰 틀은 의심의 여지 없이 사실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2-03-20 23:01:58 | 김용묵
“바로 그런때에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억울함을 조금은 풀 수 있지...”
크리스천과 불신자를 가르는 중요한 대목이지요..!
글 감사합니다.
2012-03-20 22:49:23 | 김용묵
1. 기독교에는 왜 이리 이단이 많은가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 출석을 꺼리는 불신자들이 내세우는 구실 중 하나로는 “기독교계엔 왜 이리도 골치 아프게 이단들이 많냐(그러니 너희 교회는 이단이 아닌 줄 내가 어떻게 확신하고 가겠냐)”가 있다.
옛날엔 본인도 이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없어서 무척 낙담하고 시험에 든 적에 있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온갖 물의를 빚는 이단들이 기독교의 이미지를 실추하고 복음 전파에 큰 해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이, 그런 사람들하고 우리는 다르다. 기독교인들이 다 그러는 건 아니다”라고만 항변하는 건 너무 나약하고 궁색해 보였다. 이에 반해 전세계적으로 잘 통합된 단일 조직을 갖추고 있는 천주교가 일면 부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먼 훗날 성경을 통해 알게 되면서 본인은 사고방식이 바뀌었고 이런 열등감이 사라졌다. 성경의 조명이 없이 종교적인 열심과 육신의 깡만 있었다면, 본인은 과거 시대엔 분명 교황이나 종교 재판소 관원 같은 사람이 됐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기독교에다 세상 권력을 접목시키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이단들을 잡아 족치는 일에 열심을 냈을 것이다.
답부터 먼저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런 조무래기 이단들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으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신약 기독교계의 이단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고전 11:19 같은 뜻밖의 구절이며, 대처법은 딛 3:10 정도가 고작이다. 마치 조화가 아닌 생화 주변에만 진딧물이 들끓듯, 인간의 혼이 달린 영적 전쟁터의 입구는 ‘당연히’ 냄새 나고 지저분하고 험한 꼴이 많이 보일 수밖에 없다.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그리고 그 꼴 보기 싫다고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마다한다면, 마다한 사람만 손해이다!
기독교에만 유독 이단이 많은 건 역설적으로 기독교만 진리이기 때문이다. 불신자가 언뜻 보기엔 이건 비논리적인 아전인수 자기도취 정신승리법 같은 주장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나, 진짜로 그것 때문이다. 왜 전세계의 신흥 종교 교주들 중에 부처나 공자, 마호메트를 자처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예수님, 그리스도를 자처하거나 대체한다는 부류는 넘쳐나는 걸까?
우리끼리 통하는 비유를 동원하자면 이렇다. 왜 전세계의 성경들은 NIV나 NRSV 같은 역본을 대체하지 않고 오로지 KJV하고만 자신을 비교하며, KJV만을 극복과 타도, 대체의 대상으로 삼는 걸까? 그런 맥락인 것이다.
작정을 하고 특정 이단들을 겨냥해서 그들을 회심시킬 목적으로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글이라도 쓰려는 게 아니라면, 단순히 자기 믿음만을 방어하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이단들에 대해서 공부하려 애쓸 필요 없다.
일례로, 한국의 기성 교계에서는 신천지 때문에 교회들이 워낙 큰 피해를 입다 보니, 신천지 출신의 위장 신자들을 가려내는 매뉴얼을 게시판에다 붙여 놓고 성도들을 별도로 교육시킬 정도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신자들이 성경대로만 잘 대처하면 이단들은 아무도 힘을 안 보태 주니 제풀에 지쳐 없어지게 돼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교회의 에러 복원 알고리즘인 것이다. 저런 수준 낮은 매뉴얼 따위는 몰라도 되며, 물리력, 행정력, 폭력 같은 것도 하나도 필요하지 않다.
이런 교리의 바람은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더욱 거세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돌아다니면서 방황하고, 어쩌다 혹세무민하는 이단 교리에 훅 가 버리기도 한다.그런 와중에 이 킵바이블이라든지 청지기 같은 사이트를 찾은 분이라면 일단 웰컴이다. 잘 찾아왔으며, 방향을 바르게 잡았으니 안심해도 된다.
아마도 성경과 교리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을 것이며, 어쩌면 자극적이고 센세이셔널한 특정 주제에 대해서 이 진영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도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이트들은 무료로 차려 놓은 자료라는 뷔페 밥상은 아주 풍부하지만, 여러분에게 일일이 떠먹여 주고 서빙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법적 의무도 없다!)
그래서, 그런 분들께 당부하는 점은,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간단히라도 자신의 연령대와 신앙 배경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 건 필수이고, 또 스스로 관련 자료를 검색해 봤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질문도 가능한 한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손으로 작문하면서 올릴 것을 권한다.
특히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사이트에서 긴 글을 달랑 복사-붙이기만 해 놓고(혹은 링크만), 반박해 달라는 식의 성의 없는 글은 어느 사이트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다. 그건 완전 비매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분야이든 고수는 태어날 때부터 고수 딱지를 달고 태어나는 게 결코 아니다. 묵묵히 꾸준히 공부를 하면서 실력이 붙고 노하우가 저절로 생길 뿐이다. 이와 관련된 본인의 작은 경험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본인은 영적으로 어리던 시절에 다음과 같은 이단 교리들을 대면한 적이 있었다.
2. 나의 이단 퇴치 사례
(1)먼 옛날, 2000년 말의 일이다. 고등학생 신분이 끝나가던 시절에 본인은 <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 (둘로스 데우)라는 책을 아주 우연히 접했다. 이 책이 나온 게 2000년 여름이니, 출간된 지 몇 달쯤 뒤의 일이다.그땐 내가 비록 킹 제임스 성경까지는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기독교는 상식적으로 죽고 나면 하늘 아니면 지옥으로 끝인 걸로 알고 있는데 전생과 윤회가 웬 말이냐 싶었다.
그 책에 담긴 주장 중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 원래 기독교는 초창기 시절부터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후 n세기경에 무슨 공회를 거치면서 이 교리가 부당하게 삭제되었다. (가톨릭이 전생과 윤회를 부정해 줬구나! 세상에!)- 오늘날 전세계 사람들이 국가별로 처한 환경은 그야말로 들쭉날쭉이고 불공평하기 그지없는데, 인생이 겨우 1회로 끝이라면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없다. 각 사람들은 환생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환경을 경험한다.- 욥 3:11-26은 자신의 전생에 대한 회상이다.-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의 환생이다. (마 11:14)
글쓴이가 누구인지, 한국 교계에서 어떤 평판이 있는 사람인지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나중에 다른 저서들을 보아하니 글쓴이는 사고방식이 정말 이상하고 이단끼가 농후한 사람이긴 하다. 그 책은 끝부분으로 가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명제 자체를 공격하는 듯했다.
본인은 사람이나 소속 교단에 대한 편견을 일체 배제하고, 주장과 교리만을 오로지 성경적으로 스스로 비평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비평을 할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성경 지식이 부족했다. 어린아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는데, 인생이 어떻고 죽음이 어떻고 하는 교리를 어찌 논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나의 선택은? 성급하게 굴지 않고 ‘보류’ 판정을 내렸다.마치 불치병 환자를 미래에 의료 기술이 개발될 때를 염두에 두고 냉동 창고에 보관해 두듯, 본인은 그 책을 내 머릿속 냉동 창고에다 집어넣었다.
그 후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되고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수많은 글과 설교를 접하면서 2003~2004년 사이에 ‘서서히’ 솔루션이 나왔다. 책의 저자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얼마나 잘못 알고 있으며, 전생· 환생하고는 아무 관계 없이 내세나 부활 문맥인 구절을 어떻게 이상한 교리에다 갖다 붙이고 있었는지 디버깅이 가능해졌다. 이 사건은 본인이 가장 긴 시간을 두고 혼자 힘으로 이단 교리를 교리 증명을 통해 퇴치해 낸 첫 사례가 되었다.
(2)2000~2001년 사이엔 천주교 교리도 접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개신교 형제들을 위한 천주교 이야기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어떤 개신교 신자가 아주 자상하고 박학다식한 신부와 대담을 하면서 천주교의 교리에 감화되고, 천주교가 기독교계의 큰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로 개종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변명과 해명이 굉장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는 면죄부가 아니고 다른 개념인데 개신교 쪽에서 악의적으로 천주교를 중상모략하고 있다거나, 마리아 상에다 경의를 표하는 건 국기에 대한 경례하고 다를 게 없다는 식. 막 6:3에 대해서도, 원어를 들이대면서 실제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아니라 사촌이고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다고 둘러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는, 개신교가 태생상 지닌 약점과, 그들이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비성경적인 천주교 관행을 빌미로 개신교도 결국은 천주교가 큰집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니,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 진짜 교회사를 알기 전까지는 이들의 주장을 도저히 완벽하게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히 아니다 싶었는데 킹 제임스 성경이 나중에 들어오니 얼마나 반가웠나 모른다.
거기서는 고전 3:15 ‘불에 의해 구원받는 것’은 연옥을 거쳐서 구원받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써 놨었다! (아예 대놓고 ‘불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이라는 묘사가 들어간 성경 역본도 있다)특히 본인의 심기를 자극했던 건, 옛날에 영국에서 위클리프라는 어느 악당이 갱을 만들어서 이단 교리가 들어간 잘못된 성경을 퍼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회가 나서서 이를 저지했다는 답변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바뀌었다.
(3)여호와의 증인이야 일단 군대 문제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정서적으로 맹렬한 반감이 형성되어 있으며, 교계에서도 거의 무조건적인 거부와 배척의 대상이 돼 있다. 포교하는 모습이 좀 지적이고 논리적인 구석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얘들이 성경을 변개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본인은 거부 모드로 들어갔다. 아직 KJV를 모르던 시절이어서 NIV를 레퍼런스로 삼았지만, 그런 변개된 역본과 비교해 봐도 이들의 신세계역 성경은 워낙 저질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KJV 덕분에 요일 5:7과 ‘독생하신 아들’(요 1:18) 같은 아킬레스건까지 알려지면서 여호와의 증인은 완전히 확인 사살을 당했다. 게임 끝.
(4)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게 성경적으로 맞다고 주장하는 전단지를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었다. 아마 안식교의 주장이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 성경적인 근거가 있었고, 그때 본인은 지금과 같은 주일과 안식일의 차이라든가 신· 구약 바르게 나누기라는 개념이 없었다. 십계명의 다른 아홉 계명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아무 문제 없이 적용 가능한 생활 지침인데 제4 계명은 그럼 뭔지 정말 궁금했고 마음에 걸렸다.
이것은 나중에 출 31:17을 통해 완전히 결론이 났다. 성경 역본 문제가 해결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십일조 문제와 거의 같은 차원에서 해결됐다. 주일 예배는 그냥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요일에서 유래된 신약 성도들의 전통일 뿐이다.
(5)다른 대부분의 이단 교리들은 pre-KJV era 때 접한 것들이고 KJV 진영 내부에서 완전히 격파에 성공한 반면, 딱 하나 KJV 진영 내부에서 접한 유일한 이단 교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 대환란 통과 교리이다. 다른 진영이나 교계는 종말론이 더 엉망이고 전천년 재림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저런 문제로 논쟁을 할 배경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환란 통과를 주장하는 진영에서도 자기 ‘나름대로’는 온갖 교회사 자료와 성경 구절을 제시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본인은 이 문제는 더 쓸데없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신앙 논리와 상식 수준에서 결론을 내려 버렸다. 내가 보기엔 이건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를 부정하는 짓이고, 자기 십자가가 뭔지 몰라서 남이 지는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겠다는 아주 엉뚱한 발상이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3. 이단 판별을 넘어서 더 큰 목표를 추구해야
본인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던 2004~2005년경에는 지금과 같은 교리 체계가 거의 완성되었다. 교회 대환란 논쟁을 끝으로 본인은 지금까지 무슨 이단 교리 때문에 갈팡질팡 고민하거나 싸운 적이 없다. 신앙 논리, 기독교 변증, 교리 노선에 관한 한은 완전에 가까운 ‘신앙 자주 국방’을 달성했다.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가 가져다 준 영적 유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예전에는 물증 없이 그저 심증만으로 힘겹게 방어해야 했던 이단 교리들을 총체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근간이 마련되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내가 그나마 남에게 자신 있게 간증할 수 있는 건, 나는 KJV를 모르던 아주 먼 옛날부터 기독교의 근간은 성경이고 성경은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이 위조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관념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떤 교리가 다른 교리와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지는지, 또 궁극적으로는 결국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창조· 구원· 성화· 부활· 재림 신앙을 지지하고 상식적으로 건전한 방향으로 끝나는지를 늘 검증했다. 이렇게 하면 이단에 빠질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겨우 이단 교리 가려내고 논쟁이나 하려고 KJV 성경 공부를 하는 건 문제의 본질을 잘못 짚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건 마치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목적이 오로지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것만큼이나 영적으로 굉장히 수준이 낮은 생각이다. 그건 당연한 기본 중의 기본 필수 아이템이고, 이미 따 놓은 당상이다!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의 비교 잣대는 이단들도 아니요, 같은 진영 안의 다른 성도도 아니요, 예수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초등학생 중에도 일부 머리가 좋은 애는 한자와 영단어를 줄줄 외우고 수학 미적분을 풀 수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초등학생이 알아서 남을 나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줄 알고, 부모가 때려서 양육을 하지 않아도 되는 ‘영적 영재’가 존재한 적은 없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나는 10대 때 죄와 심판, 이신칭의 구원을 이해했으며 구원의 확신을 느꼈다. 20대 초중반의 나이로 KJV가 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인지를 완전히 이해했으며 이단 교리의 자체 필터링 기술까지 갖췄다. 하지만 그런 교리 공부의 중심에는 ‘나’와 ‘개인적인 지적 만족’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이 내 정신 연령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기가 막힐 때는, 쓰는 글에 육두문자도 막 들어가고 글에 남에 대한 배려라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 딱히 증오나 피해의식, 악이 받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성령 충만한 사랑의 의분도 아니었다.
“남이야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든 말든, 무슨 생각을 하든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내 할 말만 한다. 글 내용을 알아듣고 동지가 될 사람만 여기 알아서 붙어라” 정도의 생각이었다. 내가 당장 열불이 나 있는데 억지로 감정을 죽이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위선과 가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따금씩은 키보드 배틀이 붙었고, 검색 엔진에서 내 이름을 치면 천주교 사이트에서 내 욕을 해 놓은 게 뜰 정도로 악명(?)도 떨쳤다.
겁도 없이 이런 무모한 생각으로 수 년간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여러 글을 올렸는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지금까지 내 홈페이지와 내 글을 통해 자기 구원을 재정립하고,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되고 진리에 눈을 뜬 분들이 몇몇 생기긴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모세가 격분한 나머지 바위에게 말로 안 하고 바위를 막대기로 쳤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백성들에게 물을 내려 주신 그런 모습인 것 같다.
뭐, 그 시절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어서, 그런 열정과 패기(?) 덕분에 그때 ‘가~끔은’ 지금 생각해도 내가 옛날에 이런 글을 썼던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잘 쓴 글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상당히 쑥스럽다.
본인은 크리스천의 삶의 목표와 성화, 최종 완전체에 대한 개념이 아주 최근에야 정립되기 시작했다. 말이 안 통한다고 옳다구나 교제를 끊고 짤라 버리는 게 아니라, 가능한 한 세상과 화평을 유지하면서 사람들 마음밭을 갈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나의 신앙관을 심으려면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어울리며 성경을 총체적으로 믿고 행하는 모습이라는 관념이 생겼다. 교회에서 청년부 회장을 맡아 보면서 그럴 필요를 더욱 느끼게 됐다.
나의 말과 행실로 인해서 필요 이상의 반감을 느낀 나머지, 이를 갈면서 “내가 지옥에 가면 갔지, 저놈 말은 절대로 안 듣는다”, “저 작자가 믿는 걸 믿느니 차라리 교황, 우리 신부님 말씀을 듣겠다” 이러는 사람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복음을 전하려면 결국은 눈높이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 맞춰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 말씀의 수위 자체에다가 물을 타라는 소리도 절대 아니다. 둘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그토록 굳게 붙들고 있는 단번 속죄, 킹 제임스 성경, 구원의 영원한 보장, 환란 전 휴거 체계를 만든 분께서 크리스천들을 바로 하늘로 안 데려가고 남겨 놓은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상대방의 믿음을 세워 주고 남을 나보다 더 배려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세상을 상대로 스스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기독교회의 reproduction(믿음의 전수와 재생산)과 error-correction(외부로부터의 이단 교리와, 교회 내부의 불화 등에 대처) 전략은 응당 이를 염두에 두고 수립되어 있다.
본인은 성경에 입각하여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통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을 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내 영리를 위해서나 내 감정 분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남을 생각해서 독자가 영적으로 잘 되고 딤전 2:4처럼 되길 원해서 그런 주장을 한 것이라는 게 독자들에게 ‘오해 없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남들로부터 당장 동의는 못 얻더라도 “저 녀석 정말 믿는 구석이 있구나” 하는 인정은 받을 수 있을 것이고, 혼의 회심률도 옛날보다는 더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도 이단들을 폭로하고 교리 분석하는 것도 결국은 궁극적으로 이렇게 되려고, 예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게 아니던가. 마치 튜닝의 끝은 순정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이곳에 오는 다른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본인이 오랜 시행 착오를 겪은 끝에 얻은 진리를 이렇게 공유하길 원하며, 우리 모두 질문을 올리든 간증이나 칼럼을 올리든, 그 큰 목표를 잊지 말고 온라인 공간에서 교제할 것을 감히 권해 본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0 22:33:24 | 김용묵
아멘..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2-03-20 19:06:14 | 김광명
형제님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형제님 글의 입장이 다소 모호한 면이 있어 진의를 이해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어떤 사안이 중요한가 아닌가는 받아 들이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신앙생할의 단계도 처음에는 보통 '구원론'이 최고의 관심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론', '교회론' 등으로 관심의 주제가 확대되거나 달라져 갑니다. 형제님의 경우에는 형제님 만의 관심의 경로가 있었겠지요.
언급하신 종말론을 주로 다루는 카페들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일정 부분 저의 생각과 겹치는 부분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그런 사이트들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분명히 성경을 근거로 시대적 움직임과 함께 단지 저의 견해를 정리한 것 뿐입니다. 그리고 이번 글에서는 단지 어떤 형태의 '표'가 그것이 훗날 짐승의 표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되어져 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 뿐이구요.
따라서 형제님의 입장은 형제님 자신을 위해서 매우 적절한 단계에서 머무르게 되었을 수 있다고 사료되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교리와 믿음의 길에 유익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힘이 분산되어 소모되고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모르는 어떤 이들은 이런 것을 과장되게 표현하거나 자신의 교세 확장을 위하여 이용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과는 별도로 말씀을 제대로 알고자 하며 소위 '정상적인 (?)'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도 이런 지식은 필요합니다.
더 이상의 긴 얘기는 이 자리에서 하기에는 합당치 않다고 판단이 듭니다. 하지만 형제님의 글 말미를 통해 제가 느끼는 것은.. 형제님께서도 분명 '표'의 되어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2012-03-20 17:19:50 | 김정훈
격려의 답글에 감사 드립니다.
2012-03-20 16:58:46 | 김정훈
생각하고 돌아 보게 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2-03-20 16:08:13 | 김정훈
성경을 처음부터 읽고자 하여 책을 폈을 때 제일 먼저 대하는 말씀이 창세기다. 그런데 현대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부분이 또한 창세기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부분이 사실(fact)로 믿어지면 이어지는 성경의 다른 모든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이는데 있어 큰 어려움이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분이 온 우주만물을 만드셨음을 믿는 자라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이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기록된바 그대로 믿겨지느냐 하는 것은 올바르고 흔들림 없는 신앙의 기초가 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 안의 모든 생물과, 그리고 인간을 어떤 순서와 과정으로 창조하시는지 창세기 1장과 2장의 기록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하나님께서는 1장 1절의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모든 우주에 필요한 구성 물질 즉, 공간(하늘)과 시간(처음에), 그리고 땅(물질)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창조하다의 히브리어 동사 ‘bara’는 무에서 유의 창조를 가리키는 특별한 단어로서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지구는 아직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로 있었는데, 성령 하나님께서 물 위에서 움직이시며 그 모습을 만드셨다 (2절). 이때 ‘움직이다’로 표현된 히브리어 ‘rachaph’는 예레미야 23장 9절에서는 ‘떨리며’로, 신명기 32장 11절에서는 ‘너풀거리며’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과학적 식견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마치 어떤 에너지가 전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흥미로운 표현이다. 상상해 보라. 마치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성령 하나님께서 지구를 품고 그 안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힘을 넣으시며 지구를 빚고 있는 장엄한 창조의 모습을!
이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는데, 이 빛은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보는 태양 빛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성질로서의 빛 그 자체를 말한다.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은 물론이고 전자기 스펙트럼 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이지 않는 영역의 빛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그 빛은 우주의 일정 공간을 차지하며 지구를 향하여 비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 부분 빛이 닿지 않는 공간에는 어둠이 같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빛을 중심으로 지구를 한 바퀴 자전시키심으로, 빛이 오는 방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저녁이 되며 아침을 오게 하시고, 지구에는 첫째 날이 오게 된다(5절). 이 부분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은, 여기서 창조된 빛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을 의미하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이 되는 우스꽝스런 결과를 낳고 말기 때문이다. 또한 넷째 날 나오게 될 태양이 없는데 어떻게 지구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저녁과 아침은 어떤 형태이든 빛을 향하여 지구가 한 바퀴 스스로 도는 자전을 하면 생기는 것이지 반드시 태양이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중에 넷째 날 이후 태양이 생길 때 지구는 이제 태양 주위로 도는 공전을 하게 될 것이다.
둘째 날은 궁창을 만드시고, 물을 둘로 나눠 궁창 위의 물과 그 아래의 물로 나누시었다(6-8절). 여기서 궁창 위의 물은 당시 지구의 환경과 훗날 이어지는 노아의 홍수 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날에는 드디어 육지가 드러나면서 식물이 만들어진다(9-13절). 이때 하나님께서는 씨앗을 땅에 뿌리어 오랜 기간 식물이 자라게 하시지 아니하시고, 말씀으로 곧바로 이미 다 자란 식물이 땅에서 나오게 하셨다 (11-12절). 식물은 본래 광합성을 할 때 태양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이때 창조된 식물은 이미 잎사귀가 무성한 장성한 식물로서 이미 그 잎사귀 안에 일정 기간 살아가는데 필요한 충분한 양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었을 것이며, 또한 첫째 날 만들어진 보다 근원적인 빛이 이미 지구를 비추고 있으므로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라는 측면에서도 굳이 태양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있어 하등의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어차피 바로 다음 날 태양을 또 만드시고, 그 태양으로 하여금 지구를 비추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시기 때문에 이제 식물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태양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한편, 진화론자들은 과일 맺는 나무의 출현을 바다의 많은 생물들이 나타나고 수백만 년이 지난 뒤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분명히 식물이 먼저라고 말함으로 진화론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흥미롭게도 넷째 날에 가서야 비로소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시는데(14-19절), 태양에서 지구가 떨어져 나왔다는 식의 진화론적 사고와는 정반대의 순서로 창조를 하시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족속들은 한결 가치 태양을 하나의 신으로 숭배하였던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태양을 하나의 피조물로써 넷째 날 만드신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제 지구를 비추는 빛의 역할은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맡아서 하게 된다.
다섯째 날이 이르러 하늘의 새들과 물속의 생물들을 창조하시는데(20-23절), 여기에서 다시 한 번 ‘bara’라는 특별 동사를 사용하신다. 히브리어에는 보통 ‘만들다(make)’혹은 ‘짓다(form)’로 번역되는 ‘asah’와 ‘yatsar’라는 동사가 따로 존재한다. 이들 단어는 ‘bara’와는 달리 이미 만들어진 어떤 것을 가지고 다만 형태와 조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시 ‘bara’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식물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무언가를 새롭게 동물을 창조하실 때 넣어 주셨음을 의미한다. 20절에 보면 성경에서 처음으로 ‘생명(life)’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 히브리어 ‘nephesh’를 번역한 말로서, 보통 우리가 ‘혼(soul)’ 또는 ‘의식(consciousness)’이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식물은 비록 ‘몸(body)’은 동물처럼 흙의 요소를 비슷하게 갖고 있지만, 성경적 기준으로 볼 때는 ‘혼’이 존재하지 않는 구별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여섯째 날이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모든 생물과 사람을 만드신다 (24-31절). 앞서 20-23절에서 동물을 만드실 때 ‘bara’가 사용되었다고 하였는데, 25절에서는 ‘asah’즉, ‘만드시니라(made)’를 사용하신다. 왜 그럴까? 앞에서 물과 공중에 거하는 동물들을 만드실 때 ‘nephesh’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거주지만 다른) 같은 종류의 동물을 만드실 때에‘asah’가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bara’가 다시 한 번 (27절), 그리고 ‘asah’와 함께 (26절) 동시에 사용 된다. 여기서 ‘asah’가 사용되었다는 말은 이미 다른 피조물에게도 존재하는 것 즉, 사람의 몸과 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27절에 사용된 ‘bara’는 그럼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제까지의 피조물에는 없고, 오직 사람에게만 주신 근본적인 새로운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더 많은 논의를 요구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러한 창조의 과정을 통해서 새삼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세밀하게 우리 사람을 위하여 공간과 그 안에 있어야 할 것들을 미리 채우시고 이제 그것들을 다스릴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없는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오직 사람에게만 주셨다는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사실이다. 할렐루야!
이제 창세기 2장으로 넘어 가보자. 창세기 1장은 창조의 과정을 연대기적인 방법으로 기술하고, 그 결론을 2장 3절에 이르러서 일단락을 짓고 있다. 그러면, 그 뒤에 이어지는 2장의 내용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2장에 나오는 창조의 내용은 1장과 서로 다른 창조의 기사를 후대에 와서 편집하여 합쳐 놓은 것이며, 일부 내용 중에는 1장의 내용과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나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같은 주장은 소위 ‘문서설’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문서설’이란 그 이론 자체에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옴을 인하여 사실 신앙생활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창세기 2장 4절이 뒤에 이어지는 창세기 2장 전체의 해석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를 지낸 Edward J. Young박사는 이 구절을 단호하게 표제문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4절은 앞서 1장의 창조의 내용에 대한 종결문이 아니라, 새로운 문단을 여는 표제문으로 봐야 옳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4절에서 사용된 ‘the generations’- 참고로, 영어 성경에는 4절에 위치한 이 단어가 우리말로 번역될 때는 어순에 따라 5절 중간에 ‘생성 세대’라는 말로 번역되어 위치하고 있다 -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톨레돗(toledoth)’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단어가 창세기에서만 총 열한 번에 걸쳐 사용되고 있으며, 그 때마다 새로운 문단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앞서 기술한 어떤 주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으로 범위를 좁혀 가며 기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2장 4절에서도 이 구절이 사용됨으로써 앞서 1장에서 기술한 창조의 내용을 이제 보다 자세하게 그 중의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려고 한다는 게 자명해 진다. 결국, 창세기 2장은 1장의내용을 보완하며 동시에 에덴동산으로 창조의 시선을 모아간다. 이는 또한 뒤에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3장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장에서 1장의 내용과 모순되어 보인다고 흔히들 지적하는 부분은 2장 18-19절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동물이 먼저 창조되었고(1:21-25), 그 후에 사람이 지은바 된 것으로(1:26-27) 기록되어 있는데, 2장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마치 동물이 사람보다 나중에 창조 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기록이 있음으로 (2:18-19),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해석상의 정리가 있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창세기 2장의 성격이 1장의 많은 창조 내용 중에서 특히 사람의 창조와 에덴동산의 환경을 1장에 대하여 보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면, 그 안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와 내용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배경 없이 단지 2장 19절만 따로 떼어서 읽게 된다면, 마치 아담이 먼저 있고 그리고 아담 앞에서 하나님이 동물을 만들어 나오게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맥을 잘 보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1장에서 피조물의 창조 순서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하였고, 여기서는 특별한 목적 즉, 1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아담을 위하여 합당한 조력자를 만들기 위함이었음이 밝히 드러나 있다. 결국 이미 만들어진 동물들 중에서 일부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어 이름을 짓게 하시는데, 20절에 보니까 “그러나 아담을 위해서는 그를 위한 합당한 조력자를 찾지 못하였더라.”라고 말씀하심을 보아 동물들로는 아담의 진정한 조력자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여 말하심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여자 - 즉, 이브 -의 필요성이 강조되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대로 아담을 잠재우시어 여자를 창조하시게 된다. 이때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중의 하나를 취하시어 이브를 창조 하시지만 (몸과 혼), 창세기 1장 27절의 기록처럼, 이브에게도 아담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독립적으로 주신 사실이다. 1장 2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창조하다에 히브리어 ‘bara’가 사용 됨)
그러면 2장 19절에서 아담 앞으로 나온 동물들은 어떤 종류인지 알아보자. 창세기 1장에서 창조된 모든 종류의 동물 가운데서, 단지 모든 가축, 공중의 날짐승, 그리고 들의 모든 짐승(every beast of the field) 만이 아담에게 나왔음을 알 수 있다 (2:20). 물에 사는 동물은 다 빠져 있고, 기어 다니는 동물과 땅의 짐승(beast of the earth) 또한 빠져 있다. 여기서 특별히 들(field)이란 단어는 인간의 노력이 개입되어 형성되어질 땅을 의미한다고 보여 지고, 따라서 ‘들의 모든 짐승’이란 보다 넓은 의미로서의 ‘땅의 짐승’과는 달리 아담이 앞으로 농사와 목축을 하며 살아가면서 자주 만나게 될 동물들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결국 아담에게 나온 동물은 한 마디로 이미 하나님이 지으신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아담과 근거리에서 마주치게 될 동물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한 이해가 될 것이다.
자, 이제 끝으로 하나만 더 생각을 같이 해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6일간에 걸쳐서 창조를 하셨을까? 그 분은 본래 전능하시어서 단 하루 만에도 천지를 지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닌가?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제 7일 째 되는 날 친히 안식을 하심으로(2:1-3), 우리도 하나님처럼 6일 동안 힘써 일하고 7일에는 안식하여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을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출20:8-11).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진화론적 사고에 익숙하여 창조의 각 하루를 수백만 년의 긴 연대로 인식하는 혹자들에게는 6일 창조의 내용이 상당히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가령, 하루가 수백만 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셋째 날 만들어진 식물이 여섯째 날 즉, 수백만 혹은 수천만 년 뒤에 출현하게 되는 곤충의 도움 없이 어떻게 꽃가루 수분을 할 수 있었겠는가? 6일의 노동 후 7일째 안식의 개념은 또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수천만 년을 안식하셨어야만 된다는 결론이 아닌가? 성경은 창조의 기록에 있어서 분명하고 단호하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순서를 6일 간에 걸쳐 명시하고 2장에서는 초점을 에덴동산으로 모아 3장에서 타락된 존재로서의 우리의 실체를 밝힐 준비를 한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는 인간이 상상하여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이 아니다.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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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0 15:44:11 | 김정훈
경험에 우선하는 지식이 없다고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다 안다고만 할 수 없는것이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것들이 많지요 우리가 일부러 어려움을 겪을 필요는 없지만 어려움을 당하거나 김형욱 형제님처럼 억울한 일을 겪는것이 꼭 나쁜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을 통해 이웃의 처지나 어려움이 무엇인지 그때 깨닫게 되는것들이 참 많기 때문이지요 오늘 다시한번 가족을 생각하고 이웃을 돌아보게 되는 귀한 글 감사합니다.
2012-03-20 10:38:34 | 송재근
김형욱 형제님의 글에 깊이 동감합니다.
세상 살다보면 힘들며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게 되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면 견딜만 하며 일어설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창조물에게 조롱받고 죽으심을 당했는데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저의 억울함은 억울함이 아니더군요.
저도 최근에 용서해야할 일이 생겼는데 억울하다는 생각에 갇혀서 직장 후배를 용서 못하고
있는데, 이제는 용서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저도 늘 가지고 있어요. 언제나 참고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려 합니다. 오늘부터....
2012-03-20 08:37:39 | 양희석
억울 -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함
제 아내가 저에게 시집와서 억울한 일이 참 많았었습니다.
그 억울한 일들을 저에게 애기했었는데 저는 그냥 '참아라'. 혹은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고?' 하고 넘겼습니다.
아마도 저의 그러한 행동이 제 아내의 억울함을 더 크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미안합니다.)
저는 살면서 그다지 억울하다는 감정/생각을 해본적이 많진 않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고등학교때, 친구가 장난치는 바람에 제가 혼이 난적이 있었죠. 그때도 억울하긴 했었는데...
회사에서 승진에 누락(누락된적이 있었나?)되어도 뭐 그다지... 빨리 승진하고 싶은생각도 없었으니까요. ㅎㅎ
(뭐 세상이 그런거지 하고 넘긴것 같기도 하고요)
억울하다... 는 감정을 정확히 깨닫은 건 작년입니다.
갑작스럽게 장인어른/장모님과 같이 살게되다보니 차가 비좁더군요.
그래서 차를 좀더 큰차로 바꾸려는데, 마음이 급하다보니 덜컥 꼼곰히 살펴보지도 않고 중고차를 사버렸습니다.
중고차 딜러만 믿고요. 그런데 중도차 딜러는 제가 파는 차만 꼼꼼히 살폈을뿐, 자신이 파는 차는 저만큼도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덜컥 중고차를 사니, 담배를 피웠는지, 차를 오래타면 가슴이 아프고. 냄새나고
문짝은 한달만에 고장나고... 이것 저것 살피니 한마디로 바가지를 쓴 겁니다.
속상하더군요. 억울합디다.
차를 탈때마다 억울한 감정이 치솟으며 내가 참 호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제 잘못인데요.
이때 제 아내의 억울함이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 잘못으로 중고차 잘못 산것도 억울한데,
잘못도 없이 부당한 대접을 받았던 아내의 심정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더군요.
참 미안합니다. 제가 무심하게 그냥 저 편하자고 억울함을 알아주지도 않고 살펴주지도 않은 제가 참 미웠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가에 달려 돌아가신것을 생각할때,
저라면 참 억울했을것 같습니다. 잘못도 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대신 죽어야 했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범죄자중의 하나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했듯이
잘못에 합당한 보응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지요. 마치 죄를 짓고 도망치는것보다 죄값을 치르니 마음이 편하다고 했던 어떤 사람의 말처럼.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하신 말씀처럼 억울해 하지 않은신듯 합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하여 우리의 죄들(과거의 죄, 앞으로 행할 죄들)을 완전히 제거하여 주심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심을 믿습니다.
세상에 억울한 일이 많을 겁니다.
억울하게 식당같은곳에서 대접받거나,
억울하게 선생님깨 혼나거나, 상사에게 혼나거나.
억울하게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내가 책임져야 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억울하게 시부모에게 당하거나
억울하게 내가 쓴 글이 오해를 받거나 곡해되거나
억울하게 비판받거나
억울하게 소명할 기회조차도 받지 못하고 당하거나
억울하게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거나
억울한 모함을 받거나 등등 얼마나 억울한 일이 많겠습니까?
혹여 여기 자유게시판에 쓰는 글들이 논쟁이 되고, 이건 아니었는데 하는 마음과 혹은 소소한 의견차이로 시각차이로
마음이 상하거나 등등해서 억울한 감정이 들 때
바로 그런때에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억울함을 조금은 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여 위로받고,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나오길 생각해봅니다.
부당한 대우를 무조건 참으라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야할때도 있지요.
그리스도인은 아마도 이 세상이 그나마 덜 부패하도록 하는 세상의 소금일겁니다.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서 그에게 대답하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을까 염려하노라.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서 그에게 대답하라.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염려하노라.
P.S 만약 제가 중고차 살때의 억울함을 못 느꼈다면, 아마도 지금도 제 아내의 억울한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감사합니다. 저에게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좀 더 이해하게 해주신 사건을 통해서 조금이나 제 아내를 이해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 이나마 알게 됨을. 그리고 제 아내가 이 글을 본다면 (아마도 볼겁니다) 제가 참 미안했었고, 지금도 미안해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02: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3-20 07:59:09 | 김형욱
좋은 글로써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희에게 깨어 있고,준비하며,분별할 수 있도록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성경 말씀을 차근 차근 짚어가며 설명을 해주셔서 이해가 쉽게 되었습니다.
형제님의 글을 통해서 평소에 연구하며,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정리하고 계신 분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또한 믿음을 세우기 위한 의문을 제기하며 형제를 위해 고민하심
은 분명 달란트일 것입니다. 샬롬!
2012-03-19 08:33:42 | 양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