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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여섯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사제께서 캘리포니아를 떠나 아일랜드로 가신다는 소식과 함께 제 서신을 받았음을 알리는 다정한 편지를 받고 감사를 드립니다. 편지를 읽고 저는 사제께서 제가 보낸 편지의 많은 내용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또 동시에 천주교의 가르침과 정반대가 되는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한 것에 대해 그리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우리가 성경과 전통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점에서 다른지 보여 드리고자 이렇게 글을 드립니다. 전에 제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사제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셨으며 저는 그때에 우리가 너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공통분모가 없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사제께서는 성경과 전통이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란 물론 천주교가 인정한 전통을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만이 믿음과 윤리에 관한 유일한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계시요, 그 자체가 진리이므로 신자들이 진심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성경에 복종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그들의 삶의 모든 면에서 그들을 지도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전통을 다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전통이 확실한 근거 위에 세워졌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존재한 다양한 의견들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분명하지 못했던 성경의 표현들(결코 성경의 교리들이 아님)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누구도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주의 날’이 한 주의 첫째 날 즉 일요일이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후 1-2세기경의 교부들이 만장일치로 그렇게 가르쳤고 그 이후로 어느 곳에서나(일부 파당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믿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지금 저는 더 이상 거기 나오는 주의 날이 일요일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도들의 뒤를 이었던 사람들이, 과거에 성경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혼자 힘으로만 성경을 읽으려고 하는 몇몇 현대의 논쟁자들보다 ‘주의 날’이라는 용어가 쓰인 용례를 더 잘 이해했을 것이라는 점을 시인합니다. 기독교는 세기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계시의 종교가 아니며 과거로부터 내려온 유산 즉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고 초기의 말씀 선포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입증된 유산으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초대 기독교의 화려한 전통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전통이 하나님의 계시와 직접 마찰을 빚을 때에 저는 그것을 배격하며 오직 성경만을 믿습니다. 전통은 어려운 단어나 구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의 교리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전통은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속박할 수 있는 그런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가 전통을 가지고 사람의 양심을 속박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명령’을 교리로 가르치며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가 되게 하는 위험’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성경과 전통을 동등한 수준에 놓은 사람들이 끝에는 성경보다 전통을 더 위에 올려놓는 것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 천주교가 일반 백성이 성경을 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주시해 볼 때 바로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 천주교가 펼쳐온 정책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누군가가 성경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번역해야 할 책’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천주교는 이런 중요한 책이 보통 천주교에서 평신도라 불리는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읽힐 수 있도록 준비되는 것을 보고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이것 또한 성경보다 전통을 중시하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에 관한 한 천주교는 아직도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에 천주교 사제가 필리핀에서 성경을 소각한 사건이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야만스런 행동이며 20세기 문명 시대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신앙의 행위입니까! 사실 우리는 성경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잘못된 번역을 반대합니다. 이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입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인해 자극을 받은 천주교가 오류투성이 역본, 수세기 동안 한 번도 오류들을 수정하지 않은 역본을 널리 배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런 성경을 불태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리 잘못된 역본이라 하더라도 어두움 속에 갇힌 영혼에게 빛을 비추어 줄 만한 하나님의 진리를 충분히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번은 제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들에게 「두에랭스성경」(Douay and Rheims Bible)을 건네준 적이 있는데 그로 인해 천주교 사제들이 제게 화를 냈습니다. 이 성경에는 분명히 로마 교황의 출판 승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들은 그 성경을 읽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몇몇 이유 때문에 천주교는 참으로 성경을 두려워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사제께서는 “성서 공회들이 그토록 많은 성경을 만들어 배포함으로써 도대체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답변하겠습니다. “영적인 일에서나 이 세상일에서나 그 유익은 이루 다 셀 수 없습니다. 입으로 말할 수도 없으며 펜으로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그 유익은 대단합니다.” 환한 태양이 빛을 발해 박쥐나 해충을 물리치듯이 성경은 어디에서나 야만과 독재를 몰아내고 문명과 자유를 가져다주었으며 선구자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성경을 자유롭게 읽도록 허용하고 장려하는 곳에서는 성경이 미신과 무지를 몰아내었습니다. 영적인 유익에 관한 한 성경이 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에게 안겨 준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복을 감히 어떻게 말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위에 떠다니던 성경책이 한 일본 귀족에게 구원과 거룩함을 가져다주었고 그로 인해 일본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출입을 통제 당하던 천주교 선교사들이 오늘날 그 나라에서 평화롭게 선교 활동을 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성경 덕택입니다. 저는 주석이나 해석이 없는 단순한 성경만을 읽고서도 아주 추한 죄인들이 구원자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받은 사례를 많이 제시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한 번도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는 곳에서도 이런 일이 생깁니다. 국내나 국외의 선교 보고서에는 단지 성경만을 읽고 개종까지 하게 사례들 즉 거의 기적에 가까운 사례들이 가득합니다. 한국에 나간 장로교 선교부의 언더우드 박사는 동방의 고요한 나라의 한 마을에서 두세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한두 서신서만을 읽고서도 이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온 사례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거기에는 아직 성경 전체가 발간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안의 이 적은 분량의 책들이 산골 마을까지 들어가 사람들을 구원했습니다. 사실 많은 선교사들이 어떤 나라에 들어가기도 전에 모든 기반이 닦여 있고 영혼들이 깨어 있는 것을 경험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천주교가 미워하는 성경 보급자들이 이미 거기 먼저 들어가서 성경을 팔고 복음서 같은 성경의 일부 책자를 원하는 자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구원의 길을 바르게 보여 줍니다. 이 복된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전통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유서 깊다할지라도 신뢰할 수 없으며 사람의 혼을 속입니다. 성경과 전통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만든 등불과 태양 빛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성경의 교리 중에서 사람의 전통이 제거하려고 하거나 애매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은 교리가 어디 있습니까? 또한 성경이 가르치는 것보다 사람의 전통이 더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교리가 어디 있습니까? 아마도 사제께서는 제가 위에서 언급한 ‘주의 날’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단지 신빙성 있는 전통이 성경의 가르침을 단지 확증해 줄 뿐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위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크리스천의 교리가 아니라 ‘주의 날’이라는 용어의 용례와 의미였습니다. 원어에 대한 지식은 성경의 여러 구절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는 데 도움을 주지만 성경의 교리에는 아무 것도 기여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신자들이 사용했던 성경 용어의 용례를 잘 아는 것이 때로는 새로 유행하는 잘못된 개념들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저의 취지는 결코 밝은 태양 빛을 보여 주기 위해 등불을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며 단지 사람의 이성에 의해 어둡게 된 캄캄한 구석의 일부를 밝히는 데에는 심지어 그 미약한 등불도 유익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성경의 최종 권위를 인정하면서 전통들을 하나씩 하나씩 성경에 비추어 판단하고 만일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교회 쓰레기통에 폐기 처분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이 결코 늘어날 수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감히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천주교 사제가 1년 동안 오직 성경만을 읽되 매일 같이 기도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경만을 읽으면서 자기가 배운 것 중에서 성경과 일치한지 않는 것은 다 거부하기로 결심한다면 12달이 지난 후에 그는 수많은 전통적 우화들을 폐기 처분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큰 복과 깨달음을 경험하였으므로 그 이후에도 오직 성경만을 주 연구 대상으로 삼을 것이며 또 완전한 날이 이를 때까지 점점 더 밝게 빛나는 의인들의 길 속에서 화평과 경건함 가운데서 걷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는 1년 동안의 성경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받았으므로 자기가 폐기 처분한 사람의 전통과 교회의 교리들을 결코 동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 때 자기가 경시했던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호흡이 있으며 빛과 진리의 말씀이 가득 들어 있는 거대한 하늘의 양식 창고 속에서 자기의 모든 영적인 필요가 충족될 수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오 친애하는 사제님, 부디 확신을 갖고 제가 무책임한 열성분자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로서 말하는 것인지 스스로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관한 책들을 읽는 것과 성경에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교리들에 관한 지침서들을 읽는 것은 결코 성경 그 자체를 읽는 것과 견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귀를 틀어막은 사람을 어찌 건방진 사람이라 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사제께서는 사도 바울이 교회의 타락에 대해 경고하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한 엄중한 권면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아노니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행20:29-30). 이 같이 경고한 후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어디에다 위탁하였습니까? 전통의 권위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공회의 결정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의견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친애하는 사제님, 다음의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읽으시고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 유업을 주리라(32절).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도는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명백한 교훈을 무시하였으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성경 말씀을 연구하지 않고 오히려 오류투성이며 수도 없이 번복된 전통과 교회와 공회를 따라갔으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만 굳게 붙드는 제가 잘못하고 있습니까? 이제부터 사제께서도 이렇게 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사제님을 위해 진심으로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당신의 신실한 벗   해리 아이언사이드 드림 추신 - 저는 사제께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며 그래서 사제께서 더 이상 서신 교환을 원치 않으시면 다시 편지를 보내지 않겠습니다.
2009-05-13 16:18:40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다섯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지난번 편지의 결론 부분에서 사제께서는 비록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성경에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결국 영생은 기독교의 여정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킨 사람에게 주는 보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쓰셨습니다. 이 점을 보여 주는 적절한 예로서 사제께서는 주인의 명령을 끝까지 잘 지킨 자에게 주인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고 칭찬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제께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것을 크게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결코 서로를 혼합시킬 수 없는 진리의 두 선(線)이 확연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 중 한 가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다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왕좌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시며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값으로 친히 사신 구원 즉 우리가 값없이 얻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로써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의로우시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엄청난 이 칭의의 복에 관해서 성경은 사람의 행위와 사람의 공로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사람의 행위와 공로는 이처럼 엄청난 구속(救贖)을 얻는 데 필요한 속죄 값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이것들은 구원받은 뒤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이 엄청난 선물을 유지하는 데도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 선물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수고하셔서 친히 이루어 놓으신 구원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지할 수 있는 구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앞부분에서 제시한 것보다 더 명쾌한 설명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제께서 성경을 펴서 로마서 3장 1절부터 5장 11절에 이르는 이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를 주의 깊게 생각하면서 읽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로마서의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완전히 길을 잃었음을 발견하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들로 인한 화목 제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공의를 분명히 드러내셨음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것에 더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이것에서 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전한 사역이요 완성된 사역으로 이미 끝이 난 사역입니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이미 끝난 일에 무엇인가를 더하려는 시도는 결국 그것을 망치고 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끝내 놓으신 일에는 사람의 어떤 공로도 필요가 없습니다. 고행도 필요 없고 성자나 천사의 중보도 필요 없으며 의식이나 예식도 물론 필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의롭게 만든 일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유효합니다.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버나드)가 죽는 순간에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은혜의 선물 때문이었습니다. 사제께서는 아마도 틀림없이 그가 죽으면서 남긴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예수시여, 당신의 상처만이 내가 내세울 공로입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그분의 공로 위에 서 있네. 나는 더 이상 안전한 기반을 알지 못하네. 임마누엘의 땅 영광이 거하는 곳이라도 그분보다 안전하지는 못하리. 이것은 행위와 상관없는 의(義)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와 상관이 없는 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 4-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이것이 바로 로마서 4장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일에서 우리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기여를 한다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빚더미 속에 넣어 두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구원은 은혜에서 나지 않고 모든 신자가 선한 일을 했으므로 이로 인해 각 신자에게 빚을 지신 하나님께서 어쩔 수없이 그 빚을 갚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실 이 성경 말씀은 이런 의미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 한 순간이라도 이런 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공로도 없으며 사람의 의(義)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누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공로는 오직 영광스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단 번에 성취하신 사역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로는 행하는 데서 의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은 선물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공로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행하고 믿는 자에게 이런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 어떤 종류의 행위도 완전히 제외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이 큰 선물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에베소서 2장에서도 똑같습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 또한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6절). 우리는 결코 이 두 원리를 혼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 구원받든지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 구원받든지 둘 중 하나로만 구원받습니다. 물론 성경은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에 대해 조금도 의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사제께서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강조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신실하게 지킬 것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과 또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사 지키고 따르라고 하신 지침들에 순종할 때에 마지막 날에 이에 대한 보상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모든 성경 구절이 영혼 구원의 문제와 상관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심판석에 앉아서 보상을 주실 자들의 행동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제께서도 확인해 보시면 이 점을 금방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심판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은혜로 영생을 소유하고 모든 죄로부터 떠나 의롭게 된 이후에 그들의 몸에서 이룬 행위들에 따라 그들을 판단하고 보상을 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련한 처지의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순간 그는 본성과 행위로 인해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영원히 불탈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로 은혜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고 그 순간 영생을 소유합니다. 저 큰 대적자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고소한다 해도 그 모든 고소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무한한 효능에 의해 무효가 되기 때문에 그는 단번에 영원토록 구원받습니다. 전도서 3장 14절을 보면 이와 같습니다. “내가 알거니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영원하리라. 그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그것에서 무엇을 뺄 수 없나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두려워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며 따라서 그것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그러나 이같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그에 부응하는 생활을 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는 이제 무한한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으므로 주님께 복종해야 하며 말씀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성령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의 길을 따라 걸어서는 안 되며 더욱이 자기 자신이나 혹은 자기와 같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대로 살아서도 안 됩니다. 이제 상태가 바뀌었으므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것처럼 것을 책임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것처럼 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우리가 그분 앞에 함께 모일 때에 여기 이 땅에서 그분을 섬긴 것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됩니다. 보상과 그에 따른 관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은 다 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제께서는 사도 바울의 말을 예로 들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딤후4:7-8).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심판석에 앉아서 자신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실 그 날을 바라보며 그때에 거기에 자신을 위해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제께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 일이 자기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해당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여기서 관은 이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여기의 관(Crown)은 왕들이 쓰는 관(Diadem)이 아니라 경기의 승리자들에게 주는 월계관을 가리킵니다. 결국 우리는 주 예수를 믿을 때 이미 획득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시는 것을 우리가 얻기 위해 수고합니다. 사제께서 베드로전서와 야고보서 2장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들도 결코 이 사실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드러난 은혜를 나타내야 하며 성령의 열매를 밝히 드러내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믿음 고백이 거짓 고백이 아니라 참 고백임을 분명히 보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진리에 동의를 표하지 않고 하나님의 증거를 마음속에 받아들여 우리 속에 그 증거를 소유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자녀의 믿음은 선한 행위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육체의 소욕대로 행하는 자는 속이는 자이거나 속임을 당한 자입니다. 참된 믿음은 항상 열매를 맺으며 특별히 선행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롭게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도 야고보는 이같이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드릴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2:21-22). 사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는 노인이었으며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무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그는 장차 자기에게 씨를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에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때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그 뒤 여러 해가 지나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의 출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소년이 되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를 제단 위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메시아가 이삭을 통해 오리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망설이지 않고 주님의 목소리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일으켜 세우실 줄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래서 사실은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모형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에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그 행위를 가치 있게 만든 것은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행위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소유했던 믿음이 산 믿음임을 보여 준 증거였습니다. 이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모든 신자는 자기 행위로 자기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보통 ‘신실한 말’(faithful saying)이라 불리는 다음의 두 성경 구절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디모데전서 1장 15절 말씀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밀이로다.”이며 다른 하나는 디도서 3장 8절로서 “이 말은 신실한 밀이로다. 원하건대 너는 확고하게 이것들을 단언(斷言)하라. 그 목적은 하나님을 믿은 자들이 조심하여 선한 행위를 지속하게 하려 함이니 이것들은 선하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입니다. 이 두 구절은 진리의 양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무궁토록 그분에게 모든 찬양과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한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부지런히 선한 행위를 이루어야 한다고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선한 행위로 인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다 같은 정도의 영적 기쁨을 맛보지는 않습니다. 그 왕국에서 우리의 위치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께 헌신했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즉 구원받은 자들도 보상에 관한 한 서로 다른 등급의 보상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도 동일한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어떤 자들은 많이 맞으며 어떤 자들은 적게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될 것이며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에서 쫓겨나 바깥의 어두운 곳에 즉 불 호수에서 영원토록 거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낸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지만 그들이 받는 형벌의 정도는 그들의 죄의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자들도 그들의 유일하신 구원자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영원히 하늘나라에 거할 것이나 그 영원한 왕국에서 어떤 기쁨을 누리고 어떤 보상을 받느냐 하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그리스도께 헌신했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사실 이 같은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므로 과연 누가 이와 달리 생각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따라서 저는 사제께서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실 것을 다시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우리가 함께 살펴본 성경 구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고 과연 이것이야말로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진 그 믿음인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제 편지가 사제님을 괴롭게 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제께서 보내 주신 편지는 너무 길었기 때문에 한 편지에서 길게 답변을 적기보다는 한 주제만을 다루는 것이 훨씬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글을 드립니다. 사실 저는 사제께서 제기한 문제 중 하나라도 가볍게 대하고 싶지 않으며 사제께서 제게 보낸 답변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저는 사제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고 싶지 않으며 단도직입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2009-05-13 16:15:25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네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이번에 저는 중재(Mediatorship)와 변호(Advocacy)라는 주제에 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성경의 명백한 말씀보다 더 단순하고 명료한 것은 없습니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증언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딤전2:5). 흔히 크리소스톰의 글로 알려져 있는 ‘아담과 이브에 대한 설교’에 들어 있는 진술 즉 “성경 말씀과 배치가 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결코 보편적(Catholic)이라 할 수 없다.”는 말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중보라는 주제에 관한 천주교의 교리가 참으로 보편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천주교의 어거스틴은 “성경을 믿는 것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중재자는 오직 한 분뿐이며 다른 중재자는 없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만일 천주교가 이와 상반된 것을 가르친다면 천주교는 결코 거룩하고도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the Holy Catholic Apostolic Church)가 될 수 없습니다. 사제께서는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재자 즉 은혜와 구속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중재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변호자와 중재자를 많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 요셉이 매우 거룩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공로를 가지고 있으므로 특별 중재자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비록 사제께서 한 중재와 여러 명의 중재자를 구분하셨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사제께서 천주교의 교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조화시키려고 하는 의도와 목적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제께서 말씀하는 것 즉 유일한 중재자와 여러 명의 중재자를 구분하는 것이 과연 천주교 신학자들의 교리 서적이나 경건 서적에서조차도 그렇게 표현되고 있는지 사실 저는 의심이 갑니다. 천주교가 우리 주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진정한 의미에서 은혜와 구속의 중재자의 위치로 승격시킨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밑에서 제가 인용한 구절들, 즉 교황들이 허락한 기도 모음집인 「라콜타」(Raccolta) - 리틀튼이 편집하여 권위를 부여함 - 에서 인용한 기도문들을 통해 천주교가 마리아의 위치를 극도로 높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제께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이 인용문들의 권위를 인정하시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여왕이시요, 긍휼의 어머니시요, 우리의 생명이요 감미로움이요 기쁨이요 희망이신 이에게 찬양을 드릴지어다! 이브의 추방당한 자손들인 우리는 당신께 울부짖나이다. 우리는 이 눈물 골짜기에서 당신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탄식하나이다. 오 우리의 변호자시여, 당신의 긍휼의 눈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이제 우리가 추방되었사오니 당신의 태의 축복의 열매인 예수를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 오, 긍휼이 많은 분이시여, 오 사랑이시여, 오 사랑의 동정녀 마리아시여! 오 하나님의 어머니시여, 거룩한 이시여, 우리가 당신의 보호 아래로 날아가나이다. 곤궁한 중에 부르짖는 우리의 간청을 멸시하지 마시고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항상 구하여 주옵소서. 오 영광스러운 축복의 동정녀시여. 하나님의 어머니시여, 동정심 많은 마리아여…천사들과 사람들의 존경을 다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여…선으로 가득하신 분이시여, 항상 우리의 고통을 가엽게 여기는 분이시여, 부디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녹여 주옵소서…거룩한 교회가 당신 안에서 피난처를 얻게 하시오며 교회를 보호하시고 교회의 기쁜 피난처와 망대와 힘이 되어 주옵소서.…곤궁할 때에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의 위로가 되시고 시험에 빠질 때에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며 핍박을 받을 때에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위험에 처할 때에 우리의 도움이 되소서…. 친애하는 마리아의 마음이시여,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내 어머니시여, 나를 내 손안에 버려두지 마소서. 그렇게 하시면 나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나이다. 내가 오직 당신께만 매달리게 하옵소서. 나의 희망이시여,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지옥에서 구원하소서. 리구오리가 지은 「마리와의 영광」(Glories of Mary)에서 발췌한 다음의 인용문을 읽고 난 뒤에 마리아가 은혜와 구속의 중재자로 간주됨을 의심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우리의 피난처요 도움이요 은신처이시다. 고대 유대에는 여러 개의 도피성이 있어서 범죄자들이 보호받기 위해 이곳으로 도피하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같은 도피성이 많지 않으며 유일한 도피성은 오직 하나 즉 마리아뿐이다. 마리아의 탄생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대언자의 입을 통해 자신이 죄인들을 징계하려 하는데 일어나서 막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셨다. 사실 그분께서는 그런 사람을 발견하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직무는 우리의 복 받은 마리아 즉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때까지 그분의 팔을 붙들고 있는 그분이 맡아야 할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마리아에게 의지하고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빨리 응답을 받고 또 보호를 받는 길이다. 하나님께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마리아께 구하면 얻을 수 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명령에는 만물이 복종하며 심지어 하나님도 복종한다. 모든 사람의 구원은 마리아의 사랑과 보호를 받느냐에 달려 있다. 마리아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구원받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가 말만하면 그의 아들이 모든 것을 집행한다. 천주교회는 죽어 가는 자들의 입 속에 “은혜의 어머니요, 긍휼의 어머니인 마리아여, 원수에게서 나를 보호하시고 죽음의 시간에 나를 받아 주소서”라는 구절을 넣어주지 않는가? 이 말은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이 죽으면서 한 말 즉 “주 예수여 내 영을 받아 주소서!”와 얼마나 다른가? 이제 다시 「라콜타」(Raccolta)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거기서 발견되는 다음의 말보다 더 비성경적인 것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가장 거룩한 동정녀시요, 하늘의 여왕이시요, 온 우주의 여주인이시요, 영원한 아버지의 딸이시며 그분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어머니시며 성령님의 가장 사랑 받는 아내인 마리아시여, 나는 당신을 인정하며 당신을 존경하나이다! 위대하신 당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겸손히 기도하나이다. 하늘로 들어가실 때에 그토록 풍성하게 소유하셨던 하나님의 긍휼로서 부디 내게 은혜와 동정심을 베푸소서. 또 나를 취하사 당신의 가장 안전하고 신실한 보호막 아래 놓으시고 당신의 행복하고도 총애 받는 신하 중 하나로 삼으소서. 또한 나의 이름을 당신의 처녀 가슴에 새기시옵소서. 사제께서는 중보의 본보기로 성 요셉을 들고 계십니다. 그러나 요셉의 중보를 갈망하는 이들이 요셉에게 바친 「라콜타」(Raccolta) 기도들 가운데 들어 있는 다음의 두 가지 인용문을 볼 때 과연 제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의 보호자이신 자애로운 요셉이시여, 우리와 성 교회를 보호하소서. 동정녀들의 수호자요 거룩한 아버지이신 요셉이시여, ‘죄 없으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녀 중의 동정녀이신 마리아를 신실하게 보호하신 분이시여, 내가 사랑스런 두 보증인 곧 예수와 마리아를 의지하여 당신께 기도하며 간청하나이다. 나를 모든 불결함에서 보존하사 흠 없는 생각과 순결한 마음과 정결한 몸으로 항상 정조를 지키며 예수와 마리아를 섬기게 하옵소서. 아멘. 우리는 천주교의 여러 가지 경건 기도서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제쳐놓고 그분보다 다가가기 쉽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천사들과 성자들을 중재자로 내세운 예를 수도 없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20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일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오직 그분께만 간청할 수 있다.” 진리를 위해 용감하게 투쟁한 아타나시우스는 주후 370년에 삼위일체 이단 교리인 아리우스 주의를 비난하면서 아리우스 주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신격의 영광을 격하시키면서도 “주님은 가난한 자들의 피난처이시다.”라는 성경 구절의 주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을 조롱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연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 즉 아리우스 주의 추종자들이 그런 구절이 주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 아마도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 성도들이 결코 창조된 존재를 가리켜 자기들의 도움이요 피난처라고 부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 점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진리의 성경 말씀과 일치합니다. 성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지어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라(요일2:1-2). 더 이상 우리가 무슨 다른 증거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의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왕좌의 의와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유지하실 수 있게 되었으며 그래서 ‘자신도 의로우시고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의롭게 하시는 이’가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따라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중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접근할 수 있으며 그분의 마음은 땅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인자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자신의 모든 백성에게 언제나 풍성히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따른 자신의 어머니나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에게 간청할 어떤 성자나 천사 같은 중간 매개체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백성이 자신에게 중보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대제사장으로 동정심이 많은 분으로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로서 우리의 유일한 중재자가 됩시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분은 다른 어떤 중재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 유일하신 중재자이십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사제께서는 신자들이 땅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하늘의 성도들이 변호해 주는 것과 것으로 여기시면서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당신은 정말 사랑이 넘치는 그 편지의 끝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동료 신자인 당신을 위해 제가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에 나도 당신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당신의 기도와 중보를 통해 하나님 곁에서 나의 중보자와 나의 중재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당신을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성령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중재자와 변호자의 신분으로 그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한 크리스천으로서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할 뿐이며 결코 저의 개인적인 공로나 거룩함에 근거해서 응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사제께서 읽으라고 보내 주신 설교 말씀 즉 사제께서 성 요셉의 중보에 관해 설교하시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과 저의 생각이 분명히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친근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경계할 만큼 조심하셨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잘 보여 줍니다. 어떤 여인이 그분의 어머니에게 복을 빌어 달라고 소리를 질렀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바로 이 복을 원합니다. 제가 만일 천주교가 제시하는 수많은 작은 중보자들 즉 마리아와 성인과 천사들을 원하여 그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저는 영원토록 이 복을 소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추신 - 저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사역하는 어떤 선교사가 천주교 성당의 사진을 정면에서 찍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당의 정문 위에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영어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마리아에게로 오라. 그녀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마리아를 은혜와 구속의 중재자로 여긴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닙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에 기록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운 초청의 말씀을 이보다 더 무섭게 왜곡할 수 있습니까?
2009-05-13 16:12:13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세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전에 약속드린 대로 오늘 저는 매우 비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보이는 천주교의 소위 미사라는 희생 제사 제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사제께서 미사를 살아 있는 성도들과 죽은 성도들의 죄로 인해 계속해서 드리는 피 없는 제사라 주장하셨습니다. 또한 사제께서는 교회 역사를 통해서 적어도 2세기까지는 기름부음 받은 사제들에 의해 문자 그대로 제단 위에서 이 희생 제사가 드려졌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습니다. “이렇게 교회 역사의 초기에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토록 중요한 교리 즉 교회의 전 체계의 중심이 되는 이 교리에 대해 오류를 범했겠습니까? 혹은 전혀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사도가 죽은 지 채 5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진리 속에 포함될 수 없으므로 폐기시켜야 할 그런 황당한 제도를 만드실까요? 그렇다면 ‘지옥의 문들이 그것(교회)을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진리의 영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등과 같은 주님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같은 질문을 받고 사실 저는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진리의 영께서는 자신의 백성 한가운데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며 지옥의 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을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이것은 다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사도들이 생존해 있던 시기에 - 마지막 사도가 죽은 지 채 5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가 아니라 - 이미 오류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감동적인 편지의 증거를 살펴보십시오.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퍼진 이단 교리는 은혜의 언약에다 율법의 행위를 더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1세기의 이단 교리가 오늘날에는 정통 교리가 되고 말았다.”고 잘 말했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즉 갈라디아 사람들의 오류가 없는 교회 공동체가 과연 어디 있습니까? 도대체 이런 오류가 하나도 없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천주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주교회에는 다른 어떤 교회와는 달리 갈라디아 사람들의 이 오류가 세력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인 이신 칭의 교리 즉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마치 폭풍과 같이 몰아치던 종교개혁 시대에 새로이 발견된 교리처럼 간주했으며 이것을 막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또한 골로새 지방에 몰래 기어 들어온 오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골로새서 2장에는 진리로부터 떠난 세 가지 중대한 오류가 나와 있는데 이것들은 사도들이 생존해 있던 시대에 발생한 것입니다. 지금 저는 다음의 세 가지 중대한 오류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계시를 대치하려는 이성주의 철학적 경향이며, 둘째는 은혜의 진리를 대체하려고 율법 중시 경향이며, 셋째는 가장 심각한 것으로서 머리되시는 주님을 붙들지 않고 스스로 몸을 학대하고 천사들을 숭배하는 무서운 의식주의의 제도화 경향입니다. 저는 이제 사제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제께서는 이 같은 오류가 하나도 빠짐없이 현대 천주교 안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이뿐 아니라 디모데전후서도 오류들이 급속히 퍼져 나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즉 그의 생전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특기할 만한 일입니다. 다른 곳의 기독교회들이 아직 믿음을 굳게 잡고 있을 때에 가장 오래된 모임이 형성된 아시아의 교회들이 진리를 떠나 배도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 역시 이 점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의 초창기부터 많은 교회들이 주의 만찬의 상과 단순한 기념 명절을 버리고 실제로 제단을 만들어 거기서 희생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또한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적(Biblical)이라거나 사도적(Apostolic)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물론 참된 의미에서 보편적(Catholic)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세기 무렵에 제단이 주의 만찬의 상을 대체하고 미사라는 희생 제사가 주의 만찬을 대체했음을 보여 주는 신빙성 있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글을 남긴 사람들 즉 니케아 공회 이전의 교부들 가운에 어느 누구도 이 같은 인상을 우리에게 남겨 주지 않았습니다. 순교자 저스틴은 그 누구보다도 주의 날에 크리스천들이 모이는 집회에 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제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는 초대 크리스천들이 구원자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빵과 포도즙에 참여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플리니의 저 유명한 편지도 그가 살던 때에 여전히 그와 똑같은 일이 있었음을 사실로 보여 줄 뿐입니다. 플리니는 자기의 상관인 트라얀 황제에게 크리스천들에게서는 어떤 악도 찾아볼 수 없으며 신성 모독이나 범죄 행위를 발견할 수 없음을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보낸 정탐꾼들은 크리스천들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찬송을 드리며 빵과 포도즙으로 구성된 간단한 식사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기독교 초기의 이 같은 단순함에서 이탈하여 그리스도의 단번 희생 제사와 그분께서 단번에 끝내신 십자가 사역에 관한 진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주 후대의 일입니다. 이때에는 사도 바울이 엄중하게 예언한 대로 사나운 이리들이 그리스도의 양들 가운데로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고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말들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신자들을 위탁한 곳은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뿐입니다. 그는 결코 교회의 권위나 공회의 결정이나 교황의 무오류성 같은 것에다 그들을 위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서 산 자나 죽은 자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희생 제사를 지금도 드릴 수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9장과 10장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드린 희생 제사 즉 결코 반복될 수 없는 희생 제사와 율법 아래서 이스라엘이 드린 모든 희생 제사 즉 그림자에 불과한 희생 제사가 생생하게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율법 아래서 드린 예물과 희생물은 양심에 관한 한 결코 경배하는 자를 완전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희생 제사들은 단지 계속해서 죄를 생각나게 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천주교의 미사 즉 천주교 사제가 드리는 희생 제사의 경우에도 그래도 해당됩니다. 천주교에서 매일 같이 성체 성사 즉 미사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죄는 결코 제거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완전한 성막을 통하여 오셔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히9:11-12).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단 한 번 드리신 희생 제사의 효과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해 신자들의 양심은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되고 이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제께서는 이것이 천주교에서 매일 드리는 미사라는 희생 제사와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제께서는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사라는 천주교 희생 제사의 희생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갈보리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미사의 희생물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이 시간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미사라는 희생 제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위대하심과 우리가 그분께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만 드리는 희생 제사입니다. 우리가 성인들을 기억하면서 미사를 드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결코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천주교의 미사라는 희생 제사는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기 위해 성직 임명을 받은 제사장들의 사역에 의해 제단에서 드려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희생 제사를 드리는 주 제사장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사장들의 손에 의해 자기 자신을 아버지께 드립니다. 즉 빵과 포도즙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꾸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부인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주장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1-14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 또한 히브리서 9장 24-26절은 이 점에 대해 아주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만든 거룩한 처소들 곧 참된 것의 모형들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하늘 그 자체 안으로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느니라. 또 그분께서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시니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 여기서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다.”는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결코 반복될 수 없는, 단 한 번 드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영원한 효력을 이보다 더 강력하게 증언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분의 희생은 너무나도 완전하고 완벽하며 하나님께 만족을 드린 것이며 그래서 복되고 완전히 끝이 난 일이므로 그분께서 결코 되풀이해서 그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일을 다 끝마쳤다는 표시로 이제 앉아 계십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죄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하셨으므로 하늘의 전능하신 아버지의 왕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제 제 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시며 천주교의 제단이나 그 밖의 다른 제단에서 또 다시 자기 몸을 희생물로 드리기 위해 땅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러한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와 불법은 단 한 번 자기를 드리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서 영원히 용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제 이것들의 사면이 있는 곳에서는 다시는 죄로 인한 헌물이 없느니라.”(히10:1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또한 사제께서 주장하는 천주교의 미사 즉 피 없는 희생 제사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피 흘림이 없으면 사면(赦免)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이 세상의 어떤 논증으로도 이 같은 사실의 정당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드린 희생 제사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데 충분하며 따라서 더 이상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과연 저는 무엇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사제께서는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사제께서 보내 주신 편지를 다시 살펴보면서 저는 사제께서 ‘주의 만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부인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즉 저는 천주교의 성체 성사가 주의 만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고 믿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제께서는 주의 만찬이라는 말이 단지 초대 기독교인들이 교제하러 모여서 함께 나눈 공동 식사 즉 애찬을 가리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제께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주의 만찬을 오용한 것을 꾸짖은 다음에 어떻게 주의 만찬을 지켜야 할지 사도 바울이 상세히 가르쳤다는 점을 잊으신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그는 우리가 주의 상에서 축복의 잔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부서진 빵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의 상에서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은 분명히 주의 만찬입니다. 만일 사제께서 이 두 가지가 다 ‘미사라고 하는 천주교의 희생 제사’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신다면 저는 사제께서 옳다고 인정하겠습니다. 주의 만찬을 천주교의 미사와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되며 주의 상을 천주교의 제단과 혼동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는 기독교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유대주의와 이교도 주의가 묘하게 혼합된 혼합물 즉 사도들의 가르침을 왜곡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천주교의 미사에 대해서는 성경이 단 한 줄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 중대한 주제에 대한 더 이상 길게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이 아무 설득력이 없다면 제가 너무나 명백히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알려 드리려고 해도 우리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사제께서는 천주교 신학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려 하며 저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배우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편지를 맺으면서 간청하건대 부디 이 일들이 정말 그런가 날마다 성경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드리신 희생 제사가 얼마나 완전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달라고 그분께 기도하기 바랍니다. 또한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사제의 영혼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제의 영혼은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이루신 십자가의 그 영원한 사역에 무엇인가를 덧붙일 필요가 전혀 없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2009-05-13 16:07:32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두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친애하는 사제님께: 저는 이제 천주교에서 소위 평신도라 불리는 신자들에게 주의 만찬의 잔을 주지 않는 것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사제께서 하신 말씀이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킴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으며 또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와 고대 자료들이 사제의 주장과 배치된다는 점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주의 만찬의 요소인 빵과 잔 중에서 신도가 빵에만 참여할 것을 명한 법령은 1415년 6월 15일에 통과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천주교회에 교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령을 통과시킨 공회가 1415년 5월 29일에 교황 요한 23세를 폐위시켰으며 그 뒤 1417년 11월 11일에 가서야 그의 후임자가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전에는 평신도라도 빵과 잔에 다 참여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변증가들은 교황이 주의 만찬의 두 요소 즉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과 그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에 참여하라고 한 그리스도의 명령을 바꿀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사제들은 원래의 주님의 명령대로 따르게 하고 평신도들은 한 요소에만 즉 빵에만 참여하게 하도록 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콘스탄스 공회의 이 법령은 그 전에 내려온 천주교의 다른 법령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교황 레오’(Pope Leo the Great)는 마니 교도들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합당하지 못한 입으로 그리스도의 몸 - 물론 그는 지금 주의 만찬의 빵을 말합니다 - 을 받으면서도 우리를 구속한 피 - 천주교 해석에 따르면 그는 지금 잔을 가리킵니다 - 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형제들에게 이 같이 신성을 모독하는 부류의 인간들이 있음을 알리며 이들을 사제들의 권위로 성도들의 교제권에서 추방할 것을 알리노라”(그의 41번 설교에서 인용함). 한편 교황 겔라시오 1세는 교황 레오보다 더 강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마조리쿠스와 요한 감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 이것은 후에 천주교 법령집에 수록되었음 -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성스런 몸만을 먹고 거룩한 피의 잔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어떤 미신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진술했으므로 이런 자들은 성찬을 다 받든지 아니면 성찬에서 완전히 제외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하라. 동일한 성찬물 즉 그 신비를 나누는 것은 신성 모독이기 때문이다”(Corp. Jur. Can. Decre. 3:11,12). 교황 우르반 2세가 주후 1095년에 주재한 클레몬트 공회의 선언도 이와 동일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나 조심하려는 이유 이 두 가지 이유를 제외하고는 몸과 피를 동시에 받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제단에서 성찬에 참여할 수 없노라.” 그 다음 세기인 주후 1118년에 교황 파스칼 2세는 클루니의 수도원장인 폰티우스에게 글을 쓰면서 성 키프리안(St. Cyprian)의 가르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키프리안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주의 몸과 피를 받을 때 주님께서 정하신 전통을 지키도록 하라. 사람의 제도를 추종하면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정하고 명하신 데서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주님께서 빵을 따로 주시고 포도즙을 따로 주셨으므로 이 전통을 가르치고 성 교회에서 항상 지키도록 명령하라. 빵을 삼킬 수 없는 유아나 병자를 제외하고는 이를 지키도록 하라.’” 이런 중요한 문제를 다루면서 회의를 주재하는 교황도 없었던 종교 회의에서 네 교황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뒤집을 수 있었다면  천주교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자기들의 실행과 교리가 보편적이며(Catholic) 사도적(Apostolic)이라 결코 변할 수 없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까? 사실상 천주교는 이 점에서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완전히 폐기시켰습니다. 사실 이것은 카톨릭 신자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는 것’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인들은 이 말씀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자연스레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사제가 아니면 잔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므로 이것은 일반 성도들에게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많은 논란을 일으킨 요한복음 6장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이 구절이 주의 만찬을 가리킬까요? 아니면 이것이 단지 커다란 영적 진리를 보여 주는 것일까요? 저는 후자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사제께서 제가 이 문제에 대해 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도 사제께서 이 구절에 대한 천주교의 가르침을 채택하는 일에 있어서 역시 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물론 사제께서는 아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저는 천주교회의 해석이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이 구절에 대한 천주교회의 해석보다 성경의 가르침이 더 큰 권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 이익을 구하던 유대인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수고하지 말고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항상 있는 그 양식을 위해 수고하라.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리니 그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봉인하셨느니라”(요6:27). 사실 그들은 그분께 광야에서 자기 조상들에게 만나를 베푼 모세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분께서 자기들에게도 문자 그대로 빵을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느니라. 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47-48절). 이 말을 듣고 불신에 찬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절). 이에 예수께서는 이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53-54절).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몸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것에 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구절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무엇을 행하려 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곧 주님의 몸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심으로써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우리 주님은 아직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지도 않았고 또 그분의 몸도 죽음으로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구원자로 믿고 그분께 나온 자들은 주님께서 주시고자 한 새 생명을 이미 소유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영적인 것이며 57절은 이것이 문자적 의미가 아님을 확실히 보여 줍니다. 57절에서 주님께서는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십니까? 그것은 곧 믿음으로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분 즉 아버지를 신뢰하리라.”는 말은 그분께서 이 세상에서 사시면서 늘 하시던 말씀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이것이 곧 우리가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 점을 명확하게 보여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63절에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저는 여기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아직 제정하지도 않은 주의 만찬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그분을 믿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던 영적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어떤 공회도 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폐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던 주님의 제자들은 이미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은 아직 단 한 번도 주의 만찬에 참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온 세상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분 피를 마시는 것이며 이로써 영원한 생명 즉 천주교 미사를 통해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생명을 소유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현명한 천주교 신자 중에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자기가 영원한 생명 - 결코 위조할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생명 - 을 소유할 것이라고 믿을 사람이 과연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이 미사라는 성례전도 천주교의 다른 모든 성례전과 마찬가지로 그 참여자에게 마지막 결말에 대해 확실하게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거기 참여해도 결국 장래에 대한 확신이 없으므로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느니라.”(47절)는 말씀 즉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과는 달리 확신을 갖게 됩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이제 저는 실례가 되지 않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드리려 합니다. 사제께서는 자신을 믿는 모든 자에게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이 큰 선물 즉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사제께서는 스스로 영생을 소유하셨다고 확신하십니까? 사제께서는 천주교를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봉사했으며 천주교의 명령에 복종해 왔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시간 사제께서는 죄 문제에 대해 진정으로 안식을 누리십니까? 사제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 한 번 드린 희생 제사로 인해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제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습니까? 오 친애하는 사제님, 만일 사제께서 이런 간단한 질문들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내리지 못한다면 이제 잠시 멈추어 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토록 충성을 다한 천주교회는 어찌하여 사도적 기독교를 기뻐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허락하신 확신과 평화를 주지 못하는가?” 혹시 사제께서는 지금까지 길을 헤맨 것이 아닙니까? 사제께서 책임지실 일은 아니지만 실로 사제께서 속한 천주교회는 어떤 면에서 볼 때 사도 시대의 단순한 복음을 떠나서 심각한 배도 가운데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다음 편지에서 저는 천주교 성찬식에서 미사의 성격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2009-05-13 16:04:19 | 관리자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첫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A.M.S. 사제님께: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아직까지도 사제께서 보내 주신 마지막 편지 두 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토록 오랫동안 그것들을 무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나 사정상 긴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뒤에는 아파서 병석에 누워 몇 달을 지냈고 그러다 보니 그만 제때에 답장을 쓰지 못했습니다. 사제와 다시 편지 교환을 하기에 앞서 저는 천주교의 가르침과 역사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했으며 그래서 천주교와 기독교의 양쪽을 다 공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뉴먼(Newman)과 치니키(Chiniquy)의 책; 기본(Gibbon)과 리틀데일(Littledale)의 책; 「카톨릭 백과사전」과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의 글; 교부들의 글, 니케아 공회 전․후와 중세와 현대 신학자들의 서적들 등등. 사실 저는 어떤 편견 없이 또한 사실을 잘못 표현하는 일이 없이 쟁점이 되는 문제들을 사제와 함께 살펴보기 위해 이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예전보다 한결 더 진지하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은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번의 연구를 통해서 저는 예전보다 훨씬 더 천주교 교리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천주교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 혹은 기독론 - 를 깊이 인정하는 데 대해서는 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하나님 우편으로 높임을 받으셔서 통치자와 구원자가 되신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로 두는 한 몸 즉 보편적인 교회(The Catholic Church)의 한 지체입니다. 이 땅에서 그분을 믿는 참 신자는 모두 다 성령님의 침례를 통해 그 한 몸의 지체가 됩니다. 그러나 제가 예전보다 더 확실하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로마의 주교 즉 교황과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크게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이처럼 거짓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심각한 저주의 말씀을 선언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지상에서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는 로마의 교황이 이처럼 두려운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갈1:6-9). 마지막에 보낸 편지에서 ‘복된 성사 안에 담긴 실제적 임재야 말로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제께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 천주교인들이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복된 성찬 속에 실제로 임재합니까? 아니면 그것이 단지 상징에 불과합니까?” 이제 저는 아주 확신 있게 다음과 같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역사와 고대의 모든 기록은 사제의 주장 즉 미사에서 빵 조각이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반박합니다.” 저는 사제께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무모하신 분이라는 점에 사실 크게 놀랐습니다. 분명히 사제께서는 교부들과 역사에 대해 잘 아십니다. 특히 교부들의 글에 대해서는 저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사제께서는 니케아 공회 이전 시대의 교부들이 어디에서도 지금 사제께서 주장하시는 그런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실 천주교가 수세기 동안 그런 교리를 주장해 왔다는 것은 제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동방 교회 즉 그리스 정교회가 그런 교리를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루터도 이와 비슷한 것을 가르쳤으며 헨리 8세 이후의 일부 영국 국교회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도 천주교의 교리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가르침들은 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가르침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고대의 가르침은 최근의 이러한 가르침들이 전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제가 지금 ‘고대의 가르침’이라고 한 것은 실수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의 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권위 있는 기록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경에 기록된 ‘주의 만찬’에 관한 말씀 즉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사제 앞에 다 제시하면서 사제께서 가능한 한 니케아 공회 이후의 신학자들이 세워 놓은 이론은 잊어버리고 단지 이 말씀들만을 제대로 평가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제께서는 또한 제가 인용한 성경 말씀들이 천주교의 해석을 지지하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6장 26-2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그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의 기사도 비슷하지만 이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저는 마가복음 14장 22-25절을 인용하려 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이 다 그것을 마시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성속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하나님의 왕국에서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다시는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의 기사는 두 절(눅22:19-20) 밖에 되지 않습니다(17-18절은 주의 만찬이 제정되기 전에 있었던 유월절의 잔을 가리킵니다). 또 그분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준 내 몸이라.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그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라. 사제께서 아시다시피 성도 요한은 기독교의 어떤 명절을 제정한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관해서는 나중의 편지에서 언급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3-29절에서 주의 만찬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도 전해 준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신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그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셨느니라.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느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가 있으리로다.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야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정죄를 먹고 마시느니라. 이제 주의 만찬에서 ‘잔’에 관하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문자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상징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도록 저는 한 가지를 더 묻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이미 피를 흘리셨습니까? 아니면 아직 흘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분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니라”(This is my blood which is shed). 아직 피를 흘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미 흘렸다고 하시므로 “이것은 나의 피다.”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흘렸다.”(which is shed)는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사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께서는 잔에 담긴 액체를 가리켜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the fruit of the vine)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액체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로 변했다면 사실 우스운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논제는 마가복음 기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으며 누가복음은 이를 더 강하게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This cup is the new testament in my blood). 사제께서는 과연 그때에 주님께서 “이 잔 속에 새 언약이 담겨 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 잔을 마시면 새 언약을 마시는 것이다.”라고 문자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상징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주님께서 이 ‘잔’에 대해 상징적으로 말씀하셨음이 분명하다면 주님께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고 하실 때에 이것을 문자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주장할 논리적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을 때 이미 그분의 몸이 우리를 위해 주어져서 희생되고 부셔지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빵에 대해서도 상징적으로 말씀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많아도 한 빵이요,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그 한 빵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한 빵이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을 상징적으로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교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초기의 사도 교회들이 다 이런 것을 주장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언된 배도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런 것에 다른 어떤 의미도 첨가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혼과 신성이 하나 속에서 실제로 임재한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그로 인해 일반 성도들에게는 잔을 주지 않는 것은 스스로 실재적 임재의 교리 즉 화체설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빵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죽음에 넘겨진 그분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잔은 그리스도의 몸과는 구별된 그분의 피를 가리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직 몸과 피의 분리가 실제로 일어나기 전이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방식으로 주의 만찬을 대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경고하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고전11:28). 여기서도 이것은 여전히 빵이며 잔입니다. 빵과 잔에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빵과 잔 속에서 십자가에 달린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이제 저는 매우 심각하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제께서는 천주교의 미사를 행하면서 우리가 방금 읽은 성경 구절 속에서 드러난 주의 만찬의 아름다움과 단순함을 조금이라도 발견하신 적이 있습니까? 교회에는 평신도와는 구별된 성직자 계급 혹은 거창한 고위 계급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크리스천 형제들이 함께 모여 기독교의 단순한 명절을 지키는 것뿐이며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건하게 두려움 마음으로 기억하면서 그 빵을 먹으며 그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미사에 참여하는 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는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2009-05-13 16:01:11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