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을 걱정하는 지체들에게
요즘 옥성호 형제가 한국의 비뚤어진 기독교를 향해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맹공격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이런 일은 늘 있어 왔습니다. 최근에 옥 형제는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책의 내용은 지금까지 저희 근본주의 성도들이 주장해 왔던 것인데 우리는 워낙 수가 적고 괴상한 사람들로 분류되어 주류들이 우리 말에 신경을 안 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이 책을 내니 그들도 참으로 난감한가 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맹공격이 쏟아지고 있고 이에 옥 형제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서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의 입장을 그대로 속시원하게 대변하고 있다고 제 아내가 알려줘서 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옥 형제를 통해서 근본주의 신앙을 일깨우고 나중에는 킹제임스 성경까지 알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옥 형제가 칼빈주의의 틀 밖으로 나와서 더 넓은 성경의 지식으로 나가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부흥과 개혁사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게시판도 활성화 되어 있고 너무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자주 가셔서 보고 격려도 하고 킹제임스 성경도 소개하고 알리기 바랍니다.
분열을 걱정하는 지체들에게
옥성호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게시판에 서로 반대되는 의견들이 첨예히 대립되는 것이 문제라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옥성호라는 평범한 사람이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을 쓰고 또 ‘방언’에 대한 책을 써야 할 정도로 우리가 너무도 멀리 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수 있도록 얼마 전 제가 모 신문사 기자에게 보낸 이메일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2.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던 여러 가지 잘못된 신앙에 대한 직격탄을 날렸다는 점에서 수많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반면 직설적인 화법을 통해 조엘 오스틴, 빌 하이벨스, 릭 워렌 등 미국 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들을 실명 비판한 사실과 좀 더 명쾌한 신학적 시도가 부재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저자로서 자신의 책을 평한다면 어떻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또 책을 펴내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면?
좀 더 깊은 신학적 접근에 대해서는 저보다 공부 많이 한 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할 때 많은 분들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구도자 예배’나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 속에 있는 신학보다는 제 책 속의 신학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조엘 오스틴의 책들 속에 무슨 ‘신학’이 있습니까? 그 친구 스스로가 자기는 신학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분들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무신학’ 또는 ‘얄팍함’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전혀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 분들이 유명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제 책에 대해서는 평범한 직장인이 썼다는 점 때문에 말씀하신 그런 ‘비판 내지 아쉬움’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명한 분들이 내는 책들을 향해서 ‘더 큰 기대’를 가지고 더 많이 요구해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유명한 분들의 책들을 향해 좀 더 엄중한 잣대를 가지고 제대로 검증해왔더라면 아마도 ‘부족한 기독교’와 같은 책이 애초에 이 세상에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경찰이 못 잡은 강도를 시민이 잡았더니 경찰이 나타나서 시민에게 ‘강도 잡는 법’에 대해서 훈계를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제 책을 스스로 평가할 때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더 폭넓은 자료들을 공부하고 썼으면 더 좋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솔직히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간증집’으로 넘치는 한국 기독교 출판계에 나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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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번에 나온 책과 관련해 바라는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옥성호씨, 저는 당신이 고전 13장에서 말한 ’온전한 것‘에 대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이런 근거로 볼 때 그 온전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책의 내용을 놓고 성경을 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살펴보는 논쟁입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것이 많겠지요. 그러나 그런 토론을 통해서 이곳에 방문하시는 많은 분들의 지식을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우리 모두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저는 ‘방언을 반대하는 옥성호는 성령을 방해하는 자이다’라는 말보다.....“왜 사랑이 없어요? 왜 당신은 기독교 안에 분열을 조장하시나요?”라는 말이 더 듣기 힘듭니다. 아니 이런 말을 들으면 더 화가 납니다. (물론 이 경우도 '더 안타깝습니다’라고 쓰는 것이 더 안전하겠지요....)
교회 안의 이런 식의 만연한 태도가 한국 교회를 오늘날 이 상황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부기’를 통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강조했듯이...
크고 성공하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천국 체험으로 가득 채운 황당무계한 책을 번역한 조용기 목사님에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왜 한국 교회를 성경 외에 천국에 대한 다른 계시를 들이밀며 분열을 조장하냐고 공개적으로 질문한 사람이 지금까지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은 성공했으니까요. 성공은 진리이고 선이니까요.
분별이 정죄가 아니듯이 사랑도 무조건적인 용납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좋은게 좋은거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심부기’에서 썼듯이 나에게 진짜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내세우며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무관심입니다. 아니....사람마다 다른 기질상 느끼는 ‘불편함’일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고 분열이 무엇입니까?
돌팔이 의사가 우연히 몇 명 병을 고친 후 소문이 나서 병원에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듭니다. 그 돌팔이 의사의 정체를 아는 한 사람이 나타나서 병원에 앉아있는 환자들에게 외칩니다.
“이 사람 엉터리 의사에요.”
그러자 누가 벌떡 일어납니다.
“환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해서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왜 우리에게 혼동을 가져다줍니까? 환자들에게는 특히 ‘심리적 절대 안정’이 필요한 걸 모릅니까?”
마틴 루터가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무엇일까요? 사랑이 없는 ‘분열주의자’라는 딱지입니다. 카톨릭(원래 catholic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 일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으로 하나 되어 잘 나가던 교회를 아예 완전히 산산조각 분열내지 않았습니까?
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누구나 인정하는 하나님의 종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협력하지 않고 영국 교회 내에 분열과 갈등을 유발시켰습니까? 아니, 어떻게 사람이 완전합니까? 빌리 그래함이라고 약점이 없겠습니까? 몇 가지 맘에 안 드는 점들은 눈 좀 감고 넘어가면 어디가 탈이 납니까? 교계를 초월해 모두가 하나되어 빌리 그래함을 선두로 ‘복음’이라는 깃발 아래 뭉치는 영국 교회에 왜 혼자 잘났다고 반대를 해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었습니까?
왜 존 맥아더 목사는 그토록 ‘극단적’인 책들을 계속 씀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습니까? 왜 교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라는 이름만 들어도 ‘빼도 박도 못할 근본주의자’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합니까? 가끔씩 나오는 래리 킹 쑈 같은 곳에서 좀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꼭 그렇게 고집스럽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주변 사람들의 냉소와 조소를 받아야 합니까? 그럴 거면 왜 TV에 나와서 기독교 망신을 시킵니까?
왜 다른 사람은 몰라도.....우리 예수님까지 유대인들이 오랜 기간 지켜온 각종 율법들을 고의적으로 파괴함으로 사람들에게 혼란을 야기시켰습니까?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제자들은 일을 하면서 ‘거룩한 안식일’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갖고 있었던 당시의 교계에 일대 분열을 일으키셨습니까?
도대체 사랑은 무엇이고 분열은 무엇입니까?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요?
요즘 우리의 분위기는 어떤지 아십니까?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 목사님이요? 물론 하는 소리는 다 틀리지요. 성경의 ‘성’자도 몰라요. 그런데 말이에요. 참 저 분 말씀하시는 거 보면 정말 사랑이 넘쳐요. 저 표정 한번 보세요. 눈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잖아요? 저런 표정이 하루 이틀에 생기는게 아니거든요. 저는 저 분 얼굴만 봐도 은혜를 받아요. 설교 필요 없어요. 그냥 얼굴만 봐도 되요. 내 평생 저 분 설교에서 딴 사람에 대해서 비판하는걸 못 들었어요. 참...대단해요. 다 사랑으로 용납해요. 얼마 전에는 이단들까지도 사랑으로 다 받아들였데요. 정말 은혜스러워요.”
and
"저 분 말이 뭐 일리는 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 분 목소리가 왜 저래요? 표정을 꼭 저렇게 딱딱하게 해야되요? 좀 웃으면 안되나? 말은 일리가 있는데 영 은혜가 안되요. 사랑이 많이 부족해 보여요. 안타깝네요. 기독교는 누가 뭐래도 ‘사랑의 종교’ 아니에요?“
이게 사랑입니까? 이게 일치입니가?
그런데....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부정하시겠습니까?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한 가지 덧붙이지요. 다수는 또는 주류는 여유를 가지고 상대를 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소수는 그럴 여유가 없답니다. “민노당 주장이 일리는 있는데 너무 과격해...” 우리가 얼마나 자주 듣는 말입니까? 소수는 웃으며 상대를 배려하고 포용하며 ‘긍정적’으로 폼을 잡을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이 외침은 소수입니다. 아니, 극히 소수입니다. 소수는 외치고 또 외쳐도 들릴까 말까입니다.
저는 분열을 걱정하는 분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분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지는 부부가 밖에서는 다정한 채 서로 바라보고 웃는 것이 사랑이고 연합입니까? 곪아 터진 관계를 터뜨리려니 우리가 잉꼬 부부인줄 알았던 이웃들이 충격받을까봐 계속 친한채 하고 사는 것이 사랑이고 연합입니까? 이게 정상적인 부부입니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부부사이의 관계입니까? 이웃에 대한 체면입니까?
물론 이 세상에 100% 맞는 이론은 없을 것입니다. 옳다는 주장 속에도 반드시 나름의 문제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에 대해서는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 내에 만연한 ‘사랑과 연합 구호’ 때문에 나날이 실종되어가는 말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누군가는 ‘분열’을 조장하고 ‘갈등’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갈등과 분열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재건과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겉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일치....아니 ‘무관심’이야 말로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제가 아는 한 이 게시판에 오시는 분들은 다른 어떤 게시판들에 방문하는 사람들보다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신 분들입니다. 그 누구도 옥성호라 ‘이렇다’라고 한다고 ‘이렇다’라고 생각할 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저...이런 글 쓰는 거 또 이런 싸움 하는거 재미없습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지만 저도 ‘싸우는 거’ 안 좋아합니다. 괴롭습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는 더더욱 아니고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상황에 있습니다. 일개 집사가 나서서 이런 소리를 하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나마 한국에서 책을 많이 읽고 가장 깨어 있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갓피플에서도 ‘하늘의 언어’의 내용에 대해 수백 명이 ‘할렐루야!!!’를 외치는 상황입니다. 불이 나서 집이 타들어가는 이 상황이 안 보이십니까?
지금이 5백 년 전 종교개혁의 시기 카톨릭보다 우리 개신교가 더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그 때보다 말씀이 더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데이빗 웰즈의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흥’이 아닌 ‘개혁’입니다. 그리고 개혁이 ‘혁명’이 아닌 이상 그 안에는 반드시 갈등과 고통과 눈물이 따릅니다. ‘사랑과 일치’라는 이름으로 그 고통을 거부하자는 주장에 저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진짜 사랑은 진리로 하나 될 때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009-05-13 15:57:17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12): 사도행전의 체험은 지금도 있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 ‘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12: 사도행전의 체험들이 교회 시대에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앞에 나온 내용에 대개 들어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방언과 기적과 치유의 은사가 실제 행해졌던 때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은사들은 표적의 성격을 지니며 하나님의 새 메시지 곧 신약을 전하는 자가 진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신약 성경이 완성되자 표적의 은사들은 그 소임을 다했고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그 동료들이 보여 주었던 기적의 은사들은 교회 시대의 일반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도기의 것을 가지고 현재의 교리로 삼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다룹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 시대에 태어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바로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 비로소 신약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한편 사도행전은 유대인들의 교회에서 이방인들의 교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였던 모세의 법을 성취하시고 끝내셨습니다. 또 그것 대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두셨고 이 복음이 교회 가운데서 역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물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처음 세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구약의 성전 예배 등을 행했고 사도행전의 뒷부분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하나님께 정결례를 드리는 등 율법에 따른 관행들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다시 말해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방식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자동차에서 기어를 바꾸셨는데 백성들은 그 속도에 따라가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에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새로운 운행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일시적이나마 자신을 특별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여러 가지 은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과도기 역사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교회 시대 전체의 청사진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도 시대의 교회와 똑같은 모습의 교회를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첫째,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들이 서신서에 나타난 역사들과 늘 같지는 않다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가령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은 죄지은 자를 쳐서 죽이심으로 즉각적인 교회의 징계를 보여 주셨습니다(행 5:1-11). 그러나 서신서에서 하나님은 지역 교회가 죄지은 자를 겸손하게 기도하며 징계하라고 말합니다(고전5:1-5; 고후2:5-11; 갈6:2; 살후3:6-14, 15; 딛3:10-11). 오늘날의 지역 교회는 앞에 나온 두 가지 경우처럼 차이가 있을 때에는 과도기의 사도행전의 예가 아니라 모든 것이 확정되고 이방인 교회를 향하여 주신 에베소서를 따라야 합니다.
둘째로 사도행전이 오늘날 교회의 청사진이 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방식대로 일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은사주의자들은 성령 침례의 교리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둘째 축복이라는 의견을 지지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강림이 늦어진 경우가 사도행전 2장과 8장에 등장합니다. 2장의 경우는 위에서 계속 설명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믿은 지 몇 년 후에 성령침례를 받은 이유는 그들이 성령 침례와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기 전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8장의 사마리아인들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올 때까지는 이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이미 믿는 유대인들과 믿는 이방인들의 두 부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에 따라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순서로 전파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기록을 보면 성령님의 나타나심 즉 방언이나 표적으로 나타나심이 매번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행전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구원받은 후에 방언 등과 함께 임하는 두 번째 축복 즉 성령 침례에 대해 일관적인 사례를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 침례를 구원의 일부 즉 구원받는 즉시 신자의 몸을 가득히 채우시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는 성령의 역사로 보는 에베소서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또한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의지하여 성령을 ‘기다리는’ 교리를 지지하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2, 8, 10, 19장 중 오직 2장만이 믿는 자들이 성령을 기다린 사건을 싣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제자들은 성령님을 간청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실 때를 단순히 기다렸습니다(행1:4, 5, 8). 서신서에는 성령을 받는 것, 심지어 성령을 기다리는 것에 대한 지침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방인 교회를 향한 이 시대의 우리의 지침서는 서신서입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과도기에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서신서는 교회 시대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교리와 실천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 신약 성경 전체를 주의 깊게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신서에서 말한 것과 같은 지역 교회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엡3:20). 이 위대한 부활의 권능(엡1:19-21)은 기적 같은 일을 해 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엡3:21).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순종하고 기도하며 움직일 때 하나님이 이 같은 일을 행하시지 사도행전에 나오는 기적의 은사를 구할 때 행하시지 않음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2009-05-13 15:53:44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11): 성령침례의 증거는 무엇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11: 신약 시대에 방언이 성령 침례를 보여 주는 표적이 아니라면 성령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이 흔히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면 보통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릅니다. “그럼 방언의 은사를 받으셨겠네요?” 두 번째 질문은 방언의 은사가 성령 침례를 보여 주는 확실한 표적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 침례를 받았다면 그는 방언을 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고린도전서만 보아도 반박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살펴볼 때 고린도 교회는 방언의 전문가들만 모인 곳 같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의 은사가 그 어떤 다른 교제보다 더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이 그렇게 널린 퍼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방언의 근본 목적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새로운 메시지가 참된 것임을 증명하는 데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유대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목격했고 이를 통해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가 참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고넬료와 그의 집안사람들에게도 임하여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구원하신다는 인상을 유대인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자신들과 같이 대하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같은 방언의 목적을 고린도전서 14장 2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니” 바로 전 구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다른 언어들과 다른 입술들을 가진 사람들을 써서 이 백성(유대인)에게 말하리라.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불신), 주가 말하노라.”
따라서 고린도 교회에 방언이 널리 행해진 것은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표적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독특하게 그리고 널리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아마도 성경 시대에 고린도 교회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목이 대상이 된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고린도에서, 그것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처음 시작했습니다(행18:1-3). 바울은 관례대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먼저 말씀을 선포했습니다(행18:4). 실라와 디모데가 곧 바울과 합류했고 고린도의 유대인들에 대한 특별한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행18:5). 그런데 마침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복음 선포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났고, 사도들과 믿는 무리들은 회당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행18:6). 이제 그들은 복음 전도의 초점을 이방인들에게 맞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때 세워진 고린도 교회는 유대인들의 회당 바로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모였습니다(행18:7). 따라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분명히 고린도 교회를 눈여겨보았을 것입니다. 교회 모임이 바로 자기네 옆집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회당장 그리스보가 자기의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었습니다(행18:8). 이에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네들의 지도자가 변절하여 교회로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리스보의 뒤를 이은 차기 회당장이 어떻게 하든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교회로 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 자체를 금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소스데네가 그리스보의 자리를 이을 자로 뽑혔습니다(행18:17). 물론 성경은 소스데네가 복음의 확산을 막으려는 본연의 책임을 어떻게 수행했는지에 대해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최종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서신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우리 형제 소스데네는…”
하나님은 또 한 명의 유대인 회당장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는 유대인들의 회당 바로 옆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특별한 부담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교회 모임은 바로 회당 옆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의 지체들 중에는 전직 유대인 회당장이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 교회를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조치로서 이 교회에 방언의 은사, 즉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표적으로 작용할 은사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린도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9-30절에서 일곱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 중 하나가 “모두 타언어(방언)들로 말하겠느냐?”입니다. 어쨌든 일곱 가지 질문에 대한 공통된 답은 “아니다”입니다. 모든 고린도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지 않은 이유는, 방언이 하나의 은사이고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은사들을 나누어주시기 때문입니다(고전12:11). 모든 은사를 다 갖춘 성도는 없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다 방언의 은사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 모두가 받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 침례입니다. 우리는 다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에 들어왔습니다(고전12:13). 앞에 나온 두 가지 사실이 모두 동일한 장에서 가르쳐지고 있음에 유의하십시오. 성경은 이 신약 시대에 방언의 은사가 성령 침례를 보여 주는 확실한 표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성령 침례는 모든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받았으나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2009-05-13 15:51:25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10): 지금도 특별계시가 있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10: 당신은 성경이 완성되었으므로 오늘날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이고 특별한 계시가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입증해 보이겠습니까?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오순절주의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오순절주의는 성경에 나오는 대언 - 즉 직접 말씀을 받아 대신 전하는 것 - 의 은사와 대언자가 오늘날에도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의 대언자는 본래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때론 그 메시지가 미래의 있을 일을 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포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대언자는 하나님께 직통 계시를 받아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9-30절은 대언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보여 줍니다.
“대언자들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판단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 계시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할지니.”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차례대로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직접 계시를 주신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신약 성경이 완성되면서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 알리고 싶은 모든 일을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현재 주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즉 주님은 기록된 말씀에 빛을 비추사 우리가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적용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런 우리의 입장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신약 성경의 끝 부분에 친히 추신을 다셨다면 일은 간단해질 것입니다. 가령 “이로써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직접적인 계시는 끝이 났다”라든지 아니면 단순히 ‘끝’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주님은 간접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은 참으로 놀라운 구절입니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1-2)
이 말씀은 마지막 날들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가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신 두 가지 방법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때에 주님께서는 한 방식을 쓰셨고 이 마지막 날들에는 또 다른 방법을 쓰십니다. 먼저 주님은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지나간 때에 주님께서 개별적으로 계시와 영감된 기록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때마다 하나씩 계시하셨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계시들은 단편적이고 불완전했습니다(물론 전체로는 완전함). 이 구절의 그리스어 어순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나간 때에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셨으나 지금 마지막 날들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방식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나간(in the past)’에 쓰인 그리스어는 ‘낡은’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래되었음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그리스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적으로 오래되었다’ 혹은 ‘오래 지속되었다’는 뜻을 지닙니다. 예를 들어 포드사의 썬더버드 자동차는 시간적으로 오래된 모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쓰인 단어는 ‘사용하기에 오래되었다’, 즉 ‘낡았다’, ‘닳았다’, ‘바꿀 때가 되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가령 경찰차나 택시가 낡은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히브리서 1장 1-2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조금씩 계시를 주셨던 기간이 다른 기간 - 계시의 수여 방식이 전혀 다른 기간 - 으로 바뀌려 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대언자를 통하지 않습니다. 만유의 상속자요, 세상들을 만드신 분, 하나님 자신의 정확한 형상이신 그분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월등한 분이 월등한 계시를 가져오십니다. 풍부함과 완전함에 있어 월등한 계시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계시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분이 사람에게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져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할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가르침을 친히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약속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셨고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미처 제자들이 받지 못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완성하셨습니다(요16:12-15). 역사를 보면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70년 내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기록은 사도들과 그들의 측근들이 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격이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메시지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부수적으로 두 가지 사항을 더할까 합니다. 계시록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의 마지막 장이 되기에 적합합니다. 계시록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영원 세계를 꿰뚫고 있습니다. 계시록을 읽다 보면 “이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의 결론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마지막 일들의 책(계시록)의 결론 부분을 주목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이 책의 말씀에 그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먼저는 성경 전체가 아닌 계시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위대한 성경전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이 책이 마지막 계시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2000년 역사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추가적인 계시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고 그렇게 믿지도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 자체가 성경이 완성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2009-05-13 15:46:09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9): 지금도 병고침의 은사가 있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9: 왜 병 고침의 은사가 오늘날에는 맞지 않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가 건강한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모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탈 없이 잘 지내도록 몇몇 사람에게 치유(병 고침)의 은사를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을 공부해 보면 건강이 나쁜 것이 때로는 어느 특정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고후12:7-10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예).
우리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치유의 은사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치시는 일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치유의 은사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신체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도들, 그리고 사도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소수만이 이런 능력을 지녔습니다. 이들은 온갖 종류의 병자들에게 나아가 병자들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치료하였습니다. 심지어 몸 전체를 완전히 고치기도 했습니다(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
사실 치유의 은사는 하나님에게 온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은사는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자가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기적적인 능력의 일부입니다(히2:3-4). 그렇습니다. 치유 받은 자는 고통과 불편함을 면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은사도 다른 기적들처럼 성경 역사의 어느 특정한 때에 일어난 표적이었습니다. 치유하는 자(healer)가 땅에 걸어 다닌 시간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극히 짧았습니다. 심지어 그때에도 하나님을 믿는 참 신자들이 병이 났을 때 찾아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치유의 은사를 가진 자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즉, 그 당시에도 치유의 은사를 받은 자가 매우 드물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형제요, 동역자요, 동료 군사인’ 에바브라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빌2:25-27). 바울은 선교 여행 때 자기와 동행한 드로비모를 고치지 못하고 아픈 채로 밀레도에 남겨 두었습니다(딤후4:20). 바울은 자기의 후계자 디모데를 고칠 수 없었고 대신 일반적인 처방을 디모데에게 권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의 병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고후12:7-10).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먼저 이런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적절한 약을 사용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원하는 것과는 달리 부정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치유의 은사가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사람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지 결코 그리스도인들의 건강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나 다른 성도들이 처한 상황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본이 됩니다. 즉, 아프면 기도하고 의학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야고보서 5장 14절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아픈 그리스도인이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부탁하고 처방으로 기름을 부을 것을 가르칩니다. 이때 기름을 바르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하나의 의학적인 처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기름을 바른다는 의미로 쓰인 그리스어가 ‘크리오’(chrio) - 즉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 받은 자’에서 나온 단어로 거룩한 기름 부음을 뜻함 - 가 아니라 ‘알레이파오’(aleipho) - 즉 몸을 문지르는 것 - 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치유의 은사를 바라야 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만일 치유의 은사가 교회 시대에도 계속 된다면 야고보서 5장 14절 말씀은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이 확실하게 고침을 받는 것은 실로 내세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롬8:23).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몸을 구속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께서 영화로운 몸을 주셔서 죄가 육체에 미치는 영향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날 치유를 잘한다고 크게 소문이 난 소위 크리스천 치유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치유사들이 고친다는 질환들은 실제 병이기는 하지만 대개는 마음에서 생긴 것이거나 외적인 영양에 의해 악화된 것입니다. 희생자들은 단지 생각을 달리함으로써 - 가령 치유함을 받았으므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 상태가 완화되는 체험을 합니다. 몇몇 질환은 순전히 상상에서 나온 것인데 이런 것들은 생각만 바꾸면 얼마든지 ‘치료’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치유 사례를 연구해 보면 증상은 완화되었으나 실제 상태는 그대로인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치유사가 귀머거리나 복합골절 환자나 선천성 기형아를 고친다거나 죽은 자를 일으킨 경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만이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것입니다.
설사 오늘날 능력의 치유사가 나타난다 해도 우리는 그런 치유사를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으로 자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마귀의 심령술에 빠졌다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악한 세력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경도 분명히 사탄이 대환난 기간 동안 그러한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살후2:9-10; 계13:11-15). 마귀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나타낼 수 있기에 이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고후11:14-15).
치유는 표적의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자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자 치유의 은사는 곧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대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예나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보더라도 치유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관행이 아닙니다. 사도행전과 에베소서를 비교해 보더라도 치유의 은사는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시대에는 모든 질병에 대해 기도와 의학적인 처방을 의지해야 하며 이것만이 병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뜨거운 기도에 응답하사 자신의 뜻 안에서 기적적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으며 지금도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런 은사를 받아 손만 대면 병을 낫게 하는 사람은 이 시대에 없습니다.
2009-05-13 15:43:58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8): 기적의 은사는 있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8: 왜 기적의 은사가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기적을 행하실 수 없다거나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는 얘기가 절대로 아님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단지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기적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기적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 자신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또 행하십니다. 더 확실히 말씀드리자면, 이 시대에는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치리하기 위해 정상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양식 혹은 법칙을 갖고 계십니다. 이러한 양식은 너무도 질서 정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흔히 자연의 법칙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특별한 방법으로도 움직이십니다. 이렇듯 변칙적인 운행 방식을 보통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말하자면 기적이란 흔치 않은 하나님의 역사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적이 흔히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 아니라 일상사가 될 테니까요. 지구가 일정한 각도로 회전하여 태양이 매일 아침 떠오른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성경은 태양과 지구 사이의 도는 과정을 기적으로 분류하진 않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역사에 세 가지 커다란 기적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기적은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는 율법이 주어질 때로부터 시작되어 약 1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난 것은 엘리야와 초기 대언자(선지자) 시대였습니다. 구약 성경의 상당 부분이 이때 주어졌는데 이 기간은 약 1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마지막 기적의 기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와 사도들의 활동하던 때에 일어납니다. 이때가 바로 신약 성경이 주어진 시기이고 약 7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어셔의 연대기(Usher's dates)에 따르면 성경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약 6000년임을 보여 주며,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략 이 같은 역사가 옳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발생한 시기는 그 중 5% 정도인 320년에 불과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33년간의 지상 생애 동안에 단 3년 동안만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인데 이는 그분의 전체 생애의 9%에 불과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적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상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코 성경은 이런 기대에 부응하지 않습니다.
위의 내용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것은 곧 사도 시대에 주어진 기적의 은사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지속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 같은 주장에 타당성이 없음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적의 본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일시적인 목적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기적을 말할 때 쓰인 세 단어가 이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먼저 기적은 ‘능력 있는 일들’로 불리는데 이는 행위 뒤에 숨겨진 권능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때론 기적이 ‘이적’(wonders) 즉 ‘놀라운 일’이라 불리는데 이때에는 기적을 목격한 자들의 반응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뿐만 아니라 기적은 ‘표적’(signs)으로도 불립니다. 이는 기적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임을 보여 주고자 함을 강조하기 위해 즉 기적의 첫째 목적을 강조할 때 쓰였습니다. 만일 기적이 능력 있는 일이나 이적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항상 하나님의 일꾼과 말씀의 참됨을 보여 주는 표적입니다. 앞에 언급된 기적들이 많이 나타난 시기가 성경 말씀을 주신 시기와 비슷한 시기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은 나의 대변인이니 그들의 말을 들으라. 내가 표적으로 그들의 말을 확증해 주지 않느냐?”
신약 성경은 특히 기적을 표적으로 봅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과 10장 37-38절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된 권위를 실제 자기가 행한 기적의 권능을 이용하여 입증하려 했습니다(고후12:11-12).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진실성을 확신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을 목격한 증인들이 기적으로 자신들의 증거가 참된 것임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히2:3-4).
기적의 취지가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신뢰를 갖도록 하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의 계시가 중단될 때 기적의 은사도 그쳤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적의 은사는 초세기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오늘날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교회가 육신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적이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거두어들이신 것으로 봅니다. 우리의 논거는 기적의 목적에 따른 것입니다. 더욱이 신약 성경은 우리가 기적의 은사를 추구하거나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 시대에서 지속되는 현상으로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특정 개인에게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2009-05-13 15:41:31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7): 마귀 쫓는 것은 성경적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7: 당신이 마귀들을 내쫓을 수 없다면 어떻게 마귀들을 다룹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들을 강력히 그리고 단호하게 내쫓으셨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귀를 내쫓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엑소시스트’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마귀와 활동과 엑소시즘(逐邪, 마귀 쫓아내는 일)이 세인들의 관심을 끈 적도 있었습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탄과 마귀들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며 공중 권세 잡은 자요, 세상의 통치자라고 믿습니다. 또한 다른 타락한 천사들 곧 성경에서 종종 마귀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있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사탄의 일을 도우며 선한 천사들의 역사를 방해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려 함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정 ‘우리가 혈과 육을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하여 싸운다는 것’을 믿습니다(엡6:12).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강력한 악의 세력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들을 내쫓아야 할까요? 아니면 마귀를 쫓는 일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이 선포한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 초대 교회에만 주어진 일시적인 표적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마귀를 다루어야 하는가에 관한 지침 사항이 교회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주어졌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지침의 중심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신약 성경에는 우리가 마귀를 쫓아야 한다는 명령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일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어떤 이가 잘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체험해야지 사도들의 체험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마귀를 쫓는 것과 관련하여 사도들이 가르친 바는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6장은 신약 성경에서 영적인 전쟁을 다루는 구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과연 마귀를 쫓아내는 것(축사)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오히려 이 말씀은 마귀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방어용 갑옷과 사탄과 마귀들을 패주시킬 공격용 무기를 자세히 열거하고 있습니다.
마귀들을 다루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권능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악한 영들의 적수가 못됩니다. 악한 영적 존재들은 힘과 능력 면에서 사람보다 월등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권위로 마귀를 대항하거나 마귀의 유혹을 거절하려 하는 것은 마치 장난감 총으로 전함을 침몰시키려는 어린아이의 시도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도다”(요일4:4)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분에게 너무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반대로 마귀들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마귀들의 능력이 크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도 내에 머무르며 자기들의 힘을 행사하는 것도 하나님에 의해 제한을 받습니다(욥의 경우처럼). 따라서 우리는 마귀들이 하나님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이 시대의 믿는 자 모두 안에 내주하십니다. 승리하기 위해선 그분께 돌아가야 합니다.
마귀들을 다루는 두 번째 단계는 마귀들의 공격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적의 공격 계획을 미리 아는 전략가는 승리하기 위해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고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공격에 대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벧전5:8). 그리고 성경은 마귀의 공격이 간교하고 속임수로 가득하다고 말하며(엡6:11). 동시에 우리가 이런 사탄의 전략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고 말합니다(고후2:11). 그렇다면 이 같은 전략이 무엇일까요?
악한 세력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길 원하며 또한 말씀보다 이성을 우위에 놓기를 원합니다(창3장). 그들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기 위해 자연적인 질병의 고통과 죽음을 이용합니다(욥기; 히2:14). 악한 세력들은 악한 생각을 불어넣으며(요13:2) 이것을 매우 그럴듯하게 만들어 우리가 거기에 말려들도록 합니다. 그들은 또한 ‘육’(肉)을 사용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타고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떠나는 것은 우리가 죽을 때나 휴거를 받을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흔히 ‘육’이라고 부릅니다. ‘육’은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들며 마귀는 이를 이용하여 우리의 삶에 관여하려 합니다. 우리가 ‘육’에다 자신을 내어줄 때 마귀는 어느 특정한 부분에서 우리를 이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육’을 통해 사탄이 우리 안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고후2:6-11; 엡4:25-29).
주님의 군사라면 마귀가 이러한 경로로 자신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공격을 경계하며 대항할 준비를 갖출 때 우리는 성공적으로 그 공격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마귀의 영향력을 이겨내기 위한 최선의 길은 날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귀들을 다루는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대항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12절은 바로 이것을 위한 병기고입니다. 사탄과 마귀들의 거짓말에 대항하려면 하나님의 진리를 전장에 투입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를 속이는 거짓말을 간파하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탄과 마귀들은 사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무장한 채 전장에 들어가 악을 파악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사탄과 마귀는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들고 전장에 들어가 우리를 악으로 이끄는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사탄과 마귀는 의심을 심습니다. 따라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탄과 마귀의 공격은 주로 우리의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 적을 간파하고 적의 사악한 생각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 뒤에 우리는 사탄을 물리치기 위한 공격 무기인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휘두릅니다. 사탄은 우리의 결단이나 열심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도망갑니다. 물론 말씀을 기억하고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신갑주를 원활히 움직이게 하는 윤활제가 바로 기도입니다. 이상이 우리가 마귀를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2009-05-13 15:39:31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6): 방언은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6: 당신은 방언이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까?
저명한 언어학자들이 조심스럽게 연구한 결과 현재 은사주의자들이 행하고 있는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가지는 논리적인 구조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즉, 거의 항상 영문 모를 말뿐이라는 것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화자가 모르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거나 흔히 하늘의 언어, 천사의 언어라고 말하는 황홀경의 소리들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 방언(타언어)으로 말한 예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나와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의 은사는 외국어였고 고린도전서의 경우는 하늘의 언어였다고 주장합니다. 또 비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늘 사람의 언어였고 따라서 은사주의자들이 행하는 대부분의 언사(utterance)는 하나님의 은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자, 그럼 이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을 검증해 보도록 하지요.
성경에서 ‘방언’(타언어:tongues)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그리스 원어는 ‘글로싸’(glossa)이며 이것은 말 그대로 ‘사람의 입 안에 있는 혀; 사람이 구사한 언어; 특별한 지역의 사투리, 즉 방언; 이해할 수 없는 말’ 등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정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신 ‘글로싸’(glossa)가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면 각각에 해당되는 바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말한 예가 사도행전에서는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2장 4-11절의 오순절 사건인데 여기서 4절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령님을 기다린 사람들이 성령님이 임하시매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 것을 보여 줍니다. 6, 8절을 보면 이 다른 언어가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명절날 여러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사람들을 포함한 군중들이 놀란 것은 ‘각 사람마다 자기 나라의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은 물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가 태어난 곳의 언어로 듣는 것은 어찌 된 일이냐?” 바로 이 구절 다음에 그들 각 사람이 태어난 곳의 명단이 등장하며 그 각 지역은 곧 그 지역의 언어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사건은 사도행전의 나머지가 어떻게 전개될지 보여 줍니다.
두 번째는 10장 44-48절에 나오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때 일어난 기적도 사도행전 2장과 동일하게 “타언어로 말하다.”로 표현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이 단어가 사도행전 2장의 경우처럼 사람의 언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된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성령님의 선물이 ‘이방인들 위에’ 임하셨다는 언급이 있습니다(45절).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하며 그 일을 자신이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오순절 사건과 비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되 마치 처음에 우리 위에 임하신 것같이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행11:15, 17). 베드로가 우선적으로 언급한 것도 성령님이라는 인격이지 방언의 나타남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라는 분은 그분이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는 한 인간의 지각으로는 감지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나타났던 동일한 것(방언)을 보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동일한 선물을 주셨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세 번째는 사도행전 19장 1-7절입니다. 여기서 일어난 기적도 “그들이 타언어로 말하더라.”로 표현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그 말이 사도행전 2장이나 10장의 경우처럼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도 방언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실제적인 논쟁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도행전에서 나온 방언이 사람의 언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리라고 봅니다. 반면에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하늘의 언어나 혹은 천사의 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본문은 사도행전처럼 ‘분명히 이것이다’라고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방언을 인간의 언어라고 생각하고 그 본문을 읽어 보아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고 고린도전서와 사도행전의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아무래도 인간의 언어라는 결론에 더 가깝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했고 사도행전은 의사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바울과 누가는 가까운 동역자요, 친구 사이였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전도 여행 때 그와 두루 동행했습니다. 틀림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글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순서에 따르면 사도행전이 고린도전서보다 먼저 앞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도행전은 고린도전서보다 약 5년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며 거기에 바울이 이미 사용했던 방언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틀림없이 동일한 선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여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했기에 누가는 그 선물이 인간의 언어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바울은 굳이 방언의 본질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독자들이 이미 그 선물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누가가 동역자였다는 것과 바울의 기록이 우선한다는 것, 누가가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묘사할 때 바울이 쓴 것과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 등과 같은 사실들은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강력히 뒷받침해 줍니다. ‘분명한 소리’(distinct sounds, 고전14:7-11)라는 말의 개념도 14장 21절의 인용과 14장 22절의 설명을 볼 때 인간의 언어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말한 ‘사람들의 언어들과 천사들의 언어들’(tongues of men and of angels, 고전13:1)도 문장이 보여 주는 대로 하나의 가정 하에 있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자기가 ‘사람들의 언어들’(tongues of men)을 한다고 했고(14:18) 실제로 모든 지식과 믿음을 가지며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었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천사의 언어들을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언어를 학습 과정이 없이도 구사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은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알지 못하는 언어’(unknown tongue)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의 방언은 어떤 종류의 인간의 언어도 아니므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방언의 은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2009-05-13 15:31:48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5): 왜 방언을 하지 않는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데(히 13:8) 왜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방언을 하지 않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은 보통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을 항상 같은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즉, 어제(사도 시대) 하신 방식을 오늘도 그리고 영원토록 유지하신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도 시대에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면 오늘날에도 동일한 은사를 주실 것이고 이 일은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과연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변경하지 않으실 이 위대한 진리를 간과한 것일까요?
은사주의자들이 히브리서 13장 8절을 해석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명백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방언의 은사가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것처럼 영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방언이 그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13:8). 그 정확한 시기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지만 방언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바입니다. 성경이 분명 방언을 일시적인 것으로 말하기에 방언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는 은사주의자들이 ‘어제’를 사도 시대로만 국한한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아담이나 노아, 아브라함, 모세, 왕과 대언자(선지자)들이 살았던 시대도 될 수 있습니다. ‘어제’가 오순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거나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억측입니다. 이 구절을 방언의 은사와 연관 지으려는 사람은 자연히 ‘어제’에서 구약을 제외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 혹은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도 방언의 은사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역사를 보더라도 방언의 은사는 오순절 이전에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대답을 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어제’가 그렇게 최근에 시작되었다면 ‘영원’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겠네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에 타당성이 없는 것은 어제의 시작을 사도행전으로 보고 그 이전의 인류 역사를 빠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은사주의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봅시다. 우선 히브리서 13장 8절의 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변치 않으신다는 것을 말할 뿐이며 그분과 관련된 어떤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그분의 활동이나 역사하시는 방식조차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에 기초하여 그들은 방언의 은사도 오늘날 유효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운행 방식이 변한다는 것은 성경을 보면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은 변화 정도가 심해 다른 직무(administration)를 나타낼 때도 있습니다. 이렇듯 심각하게 차이가 나는 직무를 일컬어 우리는 보통 ‘세대’(dispensation) 혹은 ‘경륜’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오순절 이전에는 방언의 은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면서 하나님은 방언의 은사를 주셨고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운영하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이를 보아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루시는 방식이나 인간에게 요구되는 사항들이 늘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항상 동일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히브리서 13장 8절을 그 문맥에 비추어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시대의 레위의 제사장 체계보다 월등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의 제사장 체계를 바꾸셨습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히브리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버리고 유대교의 ‘레위 제사장 체계’로 되돌아갈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변화와 일관성을 모두 발견합니다. 좋은 변화는 하나님께서 옛 언약(구약) 대신에 새롭고 좋은 언약(신약)을 가져오셨다는 것이고 나쁜 변화는 유대인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일관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도라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3장 7-9절 말씀은 히브리서 전체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깊이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따르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에 끌려 다니지 말라.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함이 선한 일이요, 음식으로 할 것이 아니니 음식에 전념하는 자들에게 음식이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히 13:7-9)
7절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살아생전에 그리스도께 신실했던 그들의 이전 지도자들을 상기시켜 줍니다. 비록 이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다음 세대가 따라야 할 본을 남기고 갔습니다. 8절은 히브리인들이 항상 신실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변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선배들은 갔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계십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들도 계속 신실해야 하는 동일한 근거와 명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9절은 적용입니다. 히브리인들은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유대교로 돌아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율법과 복음을 합하려는 시도가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거짓된 교리들을 피하고 참된 은혜의 교리에 붙어 있어야 했습니다. 이 은혜가 그들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견고하게 해 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특정 음식(희생으로 성별된 음식물)을 먹는 의식이 히브리인들의 마음을 세워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경영 방식을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즉, 성전, 레위인들의 의식, 레위의 제사장 체계는 더 이상 하나님의 활동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끝내신 것을 지속하는 것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 본질, 위치는 동일합니다. 또한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불변합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변치 않으신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변치 않는다는 것이 그분의 인격과 본질에 관련된 것이지 그분의 역사와 경영 방식까지 똑같다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히브리서 13장 8절이 방언의 은사가 지속됨을 보증하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9-05-13 15:26:55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4): 방언은 성경적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4: 고린도전서 14장 39절은 분명히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는데 왜 당신은 교회에서 방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본인 스스로 방언을 하지 않고 심지어 오늘날 방언이 있다고 믿지도 않지만 교회에서 방언을 하는 것은 괜찮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그런 은사주의의 관행을 교회에서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단호한 입장 때문에 우리는 옹졸하다거나 사랑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좀 더 심각하게는 이것이 고린도전서 14장 39절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타언어(방언)들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Whether there be tongues, they shall cease)”(고전13:8). 단지 방언이 언제 그칠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히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방언이 언제 그칠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먼저 고전13:8-12를 잘 살펴보십시오. 여기에는 세 가지 임시적인 복이 나옵니다: 대언, 방언, 지식. 분명히 대언(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대신 말하는 것)도 없어지고 지식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두 동사의 성격상 - 즉 ‘없어지다’(done away)와 ‘사라지다’(vanish away) - 대언과 지식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끝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외부의 힘이란 바로 ‘완전한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 오면 대언과 지식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완전한 것’을 신약 성경의 완성으로 보기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봅니다. 만일 그 ‘완전한 것’이 신약 성경이라면 대언과 지식은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9절은 부분적으로 알고 대언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10절은 완전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것이란 틀림없이 부분적인 것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완전한 것은 지식과 대언의 완성 혹은 완성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될 것입니다.
자, 이제 또 다른 임시 복인 방언(타언어)에 대해 살펴봅시다. 방언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동사인 ‘그치다’의 성격상 우리는 방언이 앞에 나온 대언이나 지식처럼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끝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방언(타언어)이란 단어는 고린도전서 13장 9절과 그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를 볼 때 방언은 스스로 그치게 될 것이며 심지어 완전한 것이 임하므로 대언과 지식이 끝나기도 전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한 것을 신약 성경의 완성으로 이해한다면 방언은 그 이전에 그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완전한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여전히 방언이 그분의 재림 때가 아니라 재림 이전에 그칠 것이라는 사실에 봉착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1-22절은 방언이 종결된 시기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인용구인 고전14:21을 보면 외국어 방언의 표적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심판의 개념이 고린도서에도 적용된다면 방언의 은사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한 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말해 주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주후 70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진노를 부으셨으며 이때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따져 보면 방언은 주후 70년에 지식과 대언은 주후 90년에 각각의 목적을 다 이루고 그치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방언이 2세기나 그 이후의 정통 교회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압니다. 그러나 몇몇 이단들은 계속해서 방언을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나 집사의 자격에도 방언은 없습니다(딤전3장; 딛1장). 만일 방언이 교회 시대 전체에 필요한 은사였다면 분명 본을 보이며 양 무리를 이끄는 자들은 마땅히 이 은사를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방언을 주장하며 이에 대해 설교하는 목사들의 대부분이 자신은 그리하지 않거나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타언어(방언)들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 이렇게 말한 이유는 방언이 당시 고린도 사람들에게 유효했고 실제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은사를 오용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로 인해 방언 전부가 금지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이런 경고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방언은 그친 상태에 있습니다. 오늘날 방언은 과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을 향한 전도를 금하신 명령(마10:5-6) 만큼이나 교회와 무관한 사항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방언의 은사가 그쳤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그 목적 즉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한 표적이라는 목적을 거의 달성할 수 없다는 성경적인 이유에서 우리는 은사주의 관행을 우리 교회 안에서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방언을 하는 사람과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교회에 있게 되면 늘 불화가 일어납니다. 게다가 오늘날 방언은 성경이 말하는 실행의 규정을 거의 지키지 않은 채 행해지고 있습니다.
2009-05-13 15:24:20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3): 초대 교회와 성령의 역사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3: 성령 침례가 그리스도를 믿은 뒤에 일어나는 두 번째 축복이 아니라면 왜 초대 교회 사도들은 구원받은 후 몇 년 뒤에 성령을 받게 되었을까요?
은사주의자들은 보통 성령 침례가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한 순간에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즉, 성령 침례는 그 후에 - 기간이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음 -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늦추어진 성령 침례를 소위 ‘두 번째 축복’(second blessing)이라고 부르며 이것이야말로 영생의 축복에 버금갈 만큼 놀라운 영적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질문에 나온 사도들의 예는 소위 ‘두 번째 축복’으로서의 성령 침례를 증명해 준다고 알려진 것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도들은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구원받았고 심지어 그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령님의 침례를 경험한 것은 사도행전 2장에 이르러서입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분명히 많은 이들은 우리 역시 이러한 사도들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추론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오순절을 전후하여 하나님의 치리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순절이 교회가 탄생한 날이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 세대의 시작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날에 믿는 자들을 향한 성령님의 사역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의 활동은 이미 지상에 있었고 성령님은 심지어 창세기 1장 2절의 창조 사역에도 계셨습니다. 구약에서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고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 각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몇몇 사람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성령님의 내주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또 영속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령 침례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 세대만이 가지는 독특한 것이며 바로 오순절에 이런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내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 세대에서 성령님은 장막을 만드는 자나 재판관, 대언자(선지자), 왕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임하셨습니다. 이때 성령님의 내주는 단순히 그들의 구원을 보여 준다기보다 그들이 맡은 직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상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이가 맡은바 소임을 마치지 못하거나 불순종으로 인해 자격을 박탈당하면 자연히 성령님도 그를 떠나가셨습니다.
가령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봅시다. 처음에 그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성령님께서는 사울 안에 거하셨습니다(삼상10:1-6).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자 주님의 영께서는 그를 떠났습니다(삼상16:14). 이 때문에 다윗도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범한 후에 주님께서 자신의 영을 거두어가지 마시도록 부르짖었던 것입니다(시51:11). 다윗의 기도는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두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기도는 적절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 믿는 모든 자 안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 거하시기 때문입니다(롬8:9).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동안에도 성령님은 활동하고 계셨지만 아직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요7:3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 직전에 성령의 사역이 곧 바뀌게 되리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때까지만 해도 제자들과 함께 혹은 그들 가운데 계셨던 성령님께서 곧 제자들 안에 임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7). 주님은 자신의 죽음과 매장 그리고 부활이 있은 뒤 승천하실 때에 성령을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6:7-14).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행11:15, 17). 이 사건을 시작으로 성령님께서 모든 신자 안에 영구히 거하게 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성령 침례를 생각해 봅시다. 성령께서 침례를 주신다고 했을 때 그것은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고전12:13). 그리스도의 몸은 보편적 교회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엡1:22-23). 교회는 오순절에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개개인을 교회 안으로 옮기는 일도 교회가 존재한 후에야 시작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결국 성령 침례는 오순절 이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승천하실 때 성령 침례를 미래의 사건으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십시오(행1장). 오순절이 오기 10일 전만 해도 성령 침례는 현실이 아닌 하나의 예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 침례를 받은 것은 그들이 구원받은 후 몇 년이(혹은 최소한 몇 달이) 지난 후의 일인데 이는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 침례가 없었고 사도들은 오순절 이전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 시대에 태어나신 것처럼 율법 시대에 구원을 받았습니다(갈4:4). 그런데 그들이 구원받은 후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성령 침례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령 침례는 사도들에게 ‘두 번째 축복’으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성령 침례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는 순간에 주어지는 복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체험은 독특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두 세대 사이의 과도기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예를 우리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2009-05-13 15:22:00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2):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은 다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질문 2: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은사주의에서는 보통 이 둘을 서로 번갈아 가며 사용하며 이 둘이 성령님의 단일한 사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기 때문에 은사주의자들은 늘 그 차이를 묻습니다.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을 공부해 보면 이 둘이 단순히 구분되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각각을 살펴보고 나중에 둘을 비교해 보면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것입니다.
성령 침례에 대한 구절은 신약에서 11번 나옵니다(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11:16; 롬6:1-7; 고전12:13; 갈3:26-28; 엡4:5; 골2:12). 이 중의 다섯 구절은 예언의 말씀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와 있습니다. 이 다섯 구절 모두 성령 침례를 미래 시제로 다루고 있으며 이는 성령 침례가 당시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임을 보여 줍니다. 과거 시제도 있는데(행11:16) 이 말씀은 오순절 사건을 되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그 날 이루신 성령 침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다섯 구절은 서신서에 있으며 모두 성령 침례의 본질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약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무엇이 성령침례인가? ‘침례’(밥티스마)라는 단어는 원래부터 ‘잠그다’ 혹은 ‘담그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하나의 사물을 다른 데로 옮겨놓다’는 의미가 있지요. 성령 침례는 이 일이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침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어납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를 성령님 안으로 푹 잠기게(baptize) 하십니다. 여기서도 침례라는 단어가 쓰이며 이는 곧 그를 성령님의 세계로 옮기심을 의미합니다. 둘째, 성령님께서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푹 잠기게(baptize) 하십니다. 즉, 그를 보편적 교회라는 새로운 세계로 옮기신다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을 보여 주는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1장 33절과 고린도전서 12장 13절입니다. 비교해 보십시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고 하신 분 바로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성령이 내려와 누구 위에 머무는 것을 네가 보거든 바로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이니라, 하셨기에”(요1:33)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고전 12:13)
2. 언제 성령 침례가 일어났는가? 성경은 성령 침례가 성도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일어나는 경험의 일부라고 가르칩니다. 성령 침례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고 거듭날 때 일어납니다. 따라서 성령 침례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불가결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 같은 관계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내용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침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에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3. 누가 성령 침례를 받는가?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 침례를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성령 침례가 구원받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 침례를 받았습니다. 성경도 이를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고전12:13). 즉,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그는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지 못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입니다. 따라서 성령 침례를 받지 못한 신자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에 있던 몇몇 그리스도인들의 육적인 모습이 공공연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성령 침례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4. 성령 침례를 사모해야 하는가? 성경에는 성령 침례를 추구하라는 명령도 없고 심지어 그 같은 언질조차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 왜 이리 조용한 한 걸까요?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미 성령 침례를 받은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침례가 구원받는 순간 이루어지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복된 소유가 된다면 굳이 그것을 따로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성령 충만은 신약에서 15번 등장합니다(눅1:15, 41, 67; 4:1; 행 2:4; 4:8, 31; 6:3, 5; 7:55; 9:17; 11:24; 13:9, 52; 엡5:18). 이 중의 14구절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나오는데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어떤 개인이나 모임이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말씀에서만 성령 충만이 명령으로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성령 충만을 가장 잘 말해 주는 구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이 말씀은 충만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충만하게 되는 것은 ‘무엇의 통치하에 있다’ 혹은 ‘무엇에 의해 지배당하다’는 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술에 취하는 것(술에 지배당하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비교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말씀은 성령 충만이 언제 일어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충만하라’는 단어는 현재 시제입니다. 즉, 현재에 진행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다시 쓰자면 ‘계속해서 충만하라’가 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믿는 이들이 계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시제라고 해서 성령 충만이 한 번 이루어지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살면서 자동적으로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유지되어야 하지만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그때는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셋째, 이 말씀은 누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명령은 모든 믿는 이에게 적용됩니다. ‘충만하라’는 명령은 ‘술 취하지 말라’는 명령처럼 복수를 향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의 명령은 특정 소수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그러나 실제 이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또 모두 동시에 충만하게 되지도 못합니다. 성령 충만의 명령은 개인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도 있지만 주님께 불순종하여 충만하게 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롬6:13; 12:1) 성령의 권능 안에서 걸을 때(갈5:16) 얻을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의 차이점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성령 침례는 단 한 번 일어납니다. 성령 충만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령 침례는 거듭나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항상 성령 침례를 받은 상태에 있지만 성령 충만은 믿는 자가 순종하는 때에 이루어집니다. 성령 침례는 명령이 아닌데 이는 하나님께서 맡으신 책임이기 때문이고, 성령 침례는 명령인데 이는 믿는 이가 따라야 할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침례는 믿는 자의 신분과 관련이 있고 성령 충만은 믿는 자의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 침례는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것이고 성령 충만은 사람의 행동을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2009-05-13 15:19:04 | 관리자
은사주의 질문(1): 병고침이 속죄의 일부인가?
● 데이빗 가우어
이 글은‘비은사주의 크리스천이 은사주의에 대해 묻는 12가지 질문’에 대해 가우어(David M. Gower)가 답변한 것으로 미국 ‘Regular Baptist Press’에서 나온 소책자를 저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질문이란 것이 재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물론 답을 안다면). 그래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벧전3:15)는 말씀은 매우 고무적이며 또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여기서 소망이라 함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포함합니다(골1:23).
우리는 성경적인 ‘칭의의 교리’를 가져야 합니다. 물론 이 명령은 직접적으로 교회의 목사나 집사 혹은 교회 학교 교사들에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영접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종이나 아내나 남편들에게 주는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 8절과 그 이후의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합니다.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는 지침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든 지체는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목사를 구실로 삼아 이러한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물론 목사는 목양 사역의 일부로서 각종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합니다. 누구든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유롭게 목사를 찾아가서 물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본인이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목사만 찾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는 데 필요한 연습을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곁에 성경을 잘 아는 목사가 있다고 해서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은 어떤 부인이 논쟁이 되는 교리 하나를 갖고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때에 그 목사는 그 교리에 대해 근본주의자들이 제시한 몇 가지 견해를 정리해 놓은 건전한 책 한 권을 추천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여러 견해가 아닙니다. 그냥 정답을 말해 주세요. 그럼 믿겠어요!” 이러한 부인의 태도는 신약 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레아 사람들의 칭찬할 만한 태도와 비교됩니다. 사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조차도 성경을 통해 비추어 보고 상고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과 요한1서 2장 27절 말씀은 멋진 균형을 이룹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그러나 너희가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 속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 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이 진리요 거짓이 아닌즉 그것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할지니라.”(요일2:27)
하나님은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어 믿는 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인 제사장인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믿는 이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그들의 마음을 비추어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일 년 전보다 우리 믿음에 대해 더 잘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매우 어려운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런 질문 중 몇몇은 성경을 잘 알고 성경대로 가르친다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종종 은사 운동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집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을 믿으며 다른 표적 은사들(기적을 행함, 병 고침 등)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것들을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960년 캘리포니아주의 밴누이스(Van Nuys)에서 시작된 이 은사 운동은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최근의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 그리스도인들의 19% 가량(2900만 명)이 자신을 은사주의자 혹은 오순절주의자로 여기고 있다고 하니 이것은 가히 놀랄 만한 성장입니다. 그리고 이 조사에 따르면 이런 은사주의자들의 21%가 뱁티스트(침례교도)라고 합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주요 프로테스탄트 진영뿐 아니라 카톨릭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초교파 운동입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교리 설명이 없고 사람들이 표적이나 이적을 중심으로 모이며 각 사람이 믿는 바(정통이든 비정통이든)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공식적인 회원 명부도 없습니다. 단지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기도하고 같이 공부하며 그러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것들을 찾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기존에 다니던 교회(근본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교회 등)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신들과 같은 체험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자, 여기 몇몇 은사주의자들 특히 성경을 믿는 교회 출신의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 성경대로 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은사주의자들이 비은사주의자들에게 묻는 열두 가지 질문을 다루고자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는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질문1: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속죄의 한 부분인 병 고침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도전적인 성격의 질문입니다. 비은사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채찍에 맞아야겠군요.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채찍은 분명히 그분의 죽음과 실제 처형 중에 당하신 채찍질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고침을 받도록 채찍을 맞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의 결론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처럼 고침을 가져왔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건강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베드로전서 2장 24절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여기에 나오는 ‘고침’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신체의 치유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것이 성령님께서 육체적인 치료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냐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단서가 여기 있습니다.
1. 성경 전체에서 ‘고침’(healing)이란 단어는 여러 종류의 고침을 나타내는 데 쓰였습니다. 이 말은 주로 육체적인 치유를 나타내었지만 상심한 마음을 달래는 데도 쓰였고(눅4:18) 마귀의 억압을 제거한다는 뜻으로도 쓰였으며(행10:38) 또 죄악된 행실을 버리거나(히12:13)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구할 때에도 ‘고침’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런 의미에 대한 또 다른 단서는 벧전2:24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여러분이 잘 아시는 ‘stick’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단어의 뜻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문맥에서 빗자루, 성냥개비 혹은 접착제 같은 단어가 함께 나온다면 아마 이 단어의 뜻을 문맥을 통해 미루어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의 ‘고침’이라는 단어의 뜻도 이런 식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벧전2:24 전체 내용이나 또 전후의 문맥에 육체적인 치료를 연상하게 할 만한 단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죄가 여러 번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 고침이 영적인 치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체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독자 여러분)는 죄를 짓지 않으신(2:22-23)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2:21). 이러한 높은 수준의 행실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죄들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24). 우리는 습관적인 죄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더 이상 잃어버린(구원받지 못한) 양처럼 방황하지 않고 우리 영혼의 목자에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2:25).
이처럼 여기서의 ‘고침’(healing)은 영적인 치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기의 고침을 단순히 육체적인 치료로 본다면 글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게 됩니다.
3. 베드로전서 2장 24절의 마지막 구 즉 “그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와 25절 말씀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명한 예언의 말씀인 이사야서 53장 5-6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으므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에 나오는 고침은 분명히 영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범법과 불법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적대 관계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죄의 치유는 환자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이사야서 1장). 대언자 이사야가 다룬 환자인 이스라엘 민족은 죄 많고 불법에 싸여 있으며 주님께서 버리신 악인들로 가득합니다(1:4). 하나님은 이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더 많이 맞으려 하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려 하는도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으며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멍든 것과 곪은 종기뿐이거늘 그것들을 꿰매고 싸매고 향유를 발라 아픔을 달래지 못하였도다.”(사1:5-6).
이 환자의 병세가 신체의 부위별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이 구절은 영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의사, 그것도 영적인 의사로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 주님을 꾸짖자 주님은 자신이 왕진을 나온 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왕진을 나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입니다(마9:10-30). 정확한 때에 위대한 의사께서 영적인 치료의 일을 마치시고 갈보리 언덕으로 오르시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즉, 손수 내리신 처방에 필요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누구나 죄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2009-05-13 15:14:19 | 관리자
제24장 교회분별
저는 지금부터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는 교회를 네 종류의 교회로 분류하여 여러분의 교회 분별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네 종류의 교회 중 한 종류 교회만이 참 교회 곧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이 세상에는 세속주의적 교회들이 있습니다. 세속주의적 교회는 말이 교회이지 실상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 교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성격을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됨과 무오류성을 부정하고, 유대인들의 문학 작품 정도로 여기며, 유대인 도덕 교과서 정도로 여깁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기적도 부정합니다. 이들은 소위 고등비평주의, 과학주의, 인문주의를 생명처럼 여기는 신 신학, 자유주의 신학, 해방주의 신학 등 사신 신학, 사회 복음주의 신학 등을 내세우며 결국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서슴없이 주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부정합니다. 곧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 예수님의 부활, 승천, 재림,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정합니다. 이들 속의 어떤 집단들은 예수님을 단순한 인격자, 성인, 마리아의 아들 정도로만 여깁니다. 이들은 세상과 동화되어 세상을 흉내내고 세상과 타협하여 세상과 짝하려고 합니다. 곧 음주, 흡연, 세속 노래, 세속 오락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추구하며, 조상 제사도 인정하고, 불신자와의 결혼도 인정합니다. 심지어 동성에까지 인정합니다.
이들은 타종교와의 대화라는 그럴 듯한 미명을 앞세우며 종교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세계 종교의 통일과 세계 종교의 단일화 운동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동일성이라는 주장은 교회와 타종교 곧 우상 종교들과 동일하다는 뜻과 같기 때문에 예수님의 교회를 우상 종교와 동일 선상에 두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실수나 오류 정도로 해석하여 죄의 심각성과 치명상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 구원, 천국, 지옥, 영생을 부정하고 구원이라면 정치, 사회, 경제, 계급적 구원을 주장합니다. 또 이들은 진화론을 인정하며, 겉으로는 유신론을 말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무신론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형주의와 물량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경건한 예배의 중요성을 버리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신 배우, 탤런트, 유행가 가수, 경건치 못한 복음가수, 정치인 등을 초청하여 바람잡이식 선동으로 교회 성장을 꾀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타종교 곧 우상종교 의식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의식의 일부로 사용하고 이를 권장합니다.
둘째, 율법주의적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현대판 구약식 교회 곧 현대판 유대교식 교회로서 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신약 성경을 중심에 두지 않고 율법이 중심이 되어 율법을 율법식으로 해석하여 오늘에 적용합니다. 이들은 안식일을 생명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심지어 유대인들처럼 토요일에 모여 예배 의식을 행하기도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신앙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주장하면서 구원받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만 구약 시대 때 적용되었던 음식 가리는 것을 큰 계율로 알고 철저히 지키며, 상대적으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의식주의 ,율법 준수를 통한 행의 구원을 주장하며 믿음을 통한 은혜구원을 부정합니다. 이들은 의식준수, 율법 준수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목사를 구약의 대제사장처럼 격상하며, 목사만이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으며, 강대상에는 목사만이 등단할 수 있고, 아무나 강대상으로 올라가면 저주받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있으며, 의식주의와 형식주의·위선주의가 팽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죄권까지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그렇게 실행하기도 합니다.
셋째, 신비주의적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 아닌 교회는 현대 교회에서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신비주의적 운동은 성경 진리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신비성>을 흉내내면서 그 실체를 위장하여 전염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형의 교회들보다 분별하기 어렵고, 그 정체를 알았다 할지라도 <신비주의>에 약한 인간의 심성은 그 사실을 거부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들어가는 매우 두려운 대상인 것입니다.
신비주의적 교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기도하거나 느낀 대로 자신의 마음이나 육신에 체험된 현상 그대로 해석하고 믿어버립니다. 이들은 신 규약 성경 시대에 있었던 일이 성경이 완성된 이후 곧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다고 확신하고, 그런 것들을 바라며 추구하려고 노력합니다. 또 이들은 주로 초자연적 현상을 추구하는데, 입신이나 환상·환청·꿈·방언·예언·신유·안찰·안수·투시·영서 등 직통 계시를 특히 강조합니다. 이들 집단에서는 점쟁이 식의 활동이 매우 강합니다. 뿐만 아니라 집단 최면, 자기 최면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성경의 객관적 진리보다 자신의 주관적 체험을 중시하여 감정에 의존한 열광적 분위기 속에서 신비 체험을 중시하고, 이것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습니다. 이들은 영혼과 마음의 축복보다는 육적 건강, 재물 축복, 사업 성공, 자녀 잘됨, 육신 출세, 무사고, 부귀 영화를 유별나게 강조하며 특히 부자되고 병고침 받는 것을 더욱 주장합니다. 또한 자신들의 집단에 와야만 이런 것을 모두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비성경적 축복관을 가지고 이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비주의적 교회 형태 집단에서는 금욕주의적 요소가 매우 진하여 독신주의 권장, 부부 분방 권장, 금식 기도, 연속 철야 기도 등을 극심하게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정상적이고 올바른 성경 공부가 없습니다. 이들은 외형적으로는 대단히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음이 텅텅 비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천국과 지옥을 갔다왔다고 주장하고, 천사와 귀신을 보았다고 하기도 하며, 천사를 만나 함께 대화도 하고 여행도 다녔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성경에 의해 훈련되고 다듬어진 신앙 양심이나 이성 곧 생각기능이나 지각을 사용하지 않고 즉흥적 감정이나 기분에 의한 생각이나 자신이 신비 체험을 통해 경험한 것을 성경의 검증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그대로 확신하고 그 체험에 따라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속한 집단을 최상의 집단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외 다른 바른 교회들을 오히려 핍박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비성경적 성령론을 신봉하여 은사 운동이나 성령 운동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오히려 악령 운동을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을 서슴치 않고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 구원이나 경건한 성도의 생활보다는 표적이나 이적 기사에 영혼의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에 맞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 대한 저주를 서슴치 않습니다. 이들은 일인 혹은 소수 그들 집단의 지도자들을 카리스마화 시키기도 합니다.
특히 이들의 성경 해석 방법은 주먹구구식입니다. 자신들의 주장이나 신조를 먼저 만들어 놓고 , 그것에 조금이라도 비슷한 성경 구절이 있으면 여러 정황을 보아 그렇게 적용해서는 안되는데도 강하게 강조하고 또 적용해서는 전후 좌우가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적용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성경을 매 구절마다 연결지어 전체적으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요행수를 많이 바라기도 합니다. 이들은 진정한 영혼의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이들은 열광적인 분위기에 의해 자신들이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상은 분위기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들은 성경을 인용해서 자신들에게 맞는 것들만 좋아합니다. 성경을 비정상적으로 해석 인용합니다. 이들 가운데는 비윤리적인 말들 즉 반말이나 욕같은 상스러운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은 직통 계시를 유도 주장합니다. 자신은 항상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고 합니다. 이들은 감정 흥분과 그 충동을 자극하기 위해 인위적인 수단을 가능한 대로 총동원합니다. 또 이들은 가정을 등한시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의 신앙 생활은 기독교식이라기 보다 이교도적인 요소가 더 진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기도하다가 기도 도중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고 그렇게 말합니다.
넷째, 복음 경전주의적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 교회"는 바로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인 교회요 온전한 교회요 바른 교회요 참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신구약 성경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이들은 신구약 성경 이외에는 다른 계시가 없음을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자신의 주관적 체험이 아닌, 성경에 의해서 해석하고 적용하며 이를 순종하려 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사수하고, 성경 연구와 성경에 의한 훈련을 통한 성경 중심주의 신앙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그 분의 대속의 죽으심, 부활, 승천하심 그리고 재림하실 것을 성경대로 믿고 준비합니다. 이들은 성령님의 인격과 성령님께서 성령의 검인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고 말씀 안에서 활동하심을 믿고, 말씀을 통한 성령님과의 교제를 신봉하고, 성령님의 성도 안에서의 내주를 믿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회개, 죄 사함, 영혼 구원을 중요하게 강조합니다. 이들은 육신의 잘 됨보다 영혼의 축복을 강조하고, 영혼의 축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들은 행위 구원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강조합니다. 또 술, 담배, 세속 노래, 세속 영화와 연극 등 세속적 오락을 거부합니다. 이들은 일체의 비성경적이고 교권주의적인 요소를 거부합니다. 이들은 성도의 경건한 생활 즉 검소한 생활, 정직한 생활, 성결한 생활, 책임 있는 생활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가정을 중시하고 가정에서의 청지기 생활에 충성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복음 안에서의 전도와 선교를 지상 목표로 삼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근로 정신과 노동의 신성함을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치 불간섭을 중요한 행동 지침 중의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이들은 고난에 대해 인내를 강조하며, 박해에 대한 무력적 항거를 거부합니다. 이들은 믿음 생활 속에서 덕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진정한 성도간의 교제를 강조하며, 복음 안에서의 사랑을 주장합니다. 이들에게는 권면과 징계, 용서가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국교화와 교회의 계급화를 반대합니다. 이들은 종교 단일 운동을 절대적으로 거부합니다. 이들은 복음 안에서 온 성도의 지체됨과 제자직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교회의 질적인 면을 중시하지 결코 양적인 면을 치중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의 예배를 중시하고,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복음적인 일체의 신비주의, 세속주의, 율법주의를 배격합니다.
2009-05-13 15:10:50 | 관리자
아라바의 동쪽 세일 산 근처에 있는 원추형의 산. 이것은 비정상적으로 잘려나간 원추형의 산으로 여기에는 아주 거친 세 개의 봉우리가 있다(민20:22-29). 대제사장 아론은 이 산에 올라가서 죽었다(민33:38).
2009-05-12 16:30:04 | 관리자
출3:1; 17:6; 33:6; 신1:2, 6, 19; 왕상8:9; 19:8; 대하5:10; 시106:19; 말4:4 등에 나오는 산. 어떤 이들은 이곳이 시내 산의 낮은 부분 혹은 봉우리라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은 시내 산이 위치한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2009-05-12 16:29:38 | 관리자
성경에서는 여러 용례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먼저는 같은 부모에게서 난 아들을 뜻했고(마1:2; 눅6:14; 요7:3; 행1:15) 사촌이나 가까운 친족(창13:8; 14:16), 같은 줄기나 지역에서 난 사람(마5:47; 행3:22; 히7:5), 동료나 같은 연배의 사람(마5:23; 7:3), 사랑하는 사람(삼하1:26),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인들(행9:30; 11:29)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다. 마12:46-50; 13:55-56; 막3:31-35에는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과 함께 언급되는데 그들은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난 자녀들이었다.
2009-05-12 16:29:10 | 관리자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본 뜬 것.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고후4:4; 골1:15; 히1:3) 이는 곧 그분께서 본질이나 특성에서 하나님과 같음을 뜻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창1:27) 영적, 지적, 도덕적인 면에서 그리고 의와 거룩함에서 그분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음을 뜻한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이후에 아담의 후손들은 타락한 상태의 아담의 형상대로 태어났다(창5:3). 모든 사람은 죄 많은 아담의 형상을 받고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형상으로 빚어져야만 한다(고전15:47-49; 고후3:18).
욥4:16에 나오는 형상은 꿈꾸는 자에게 마치 실체처럼 보였다. 형상이라는 말은 종종 진짜 물체를 뜻하기도 하며(시73:20; 히10:1) 종종 거짓 신을 나타내기도 한다(단3:1-30). 하나님은 모든 종교적 경배에서 어떤 종류의 형상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다(출20:4-5; 신16:22; 행17:16; 롬1:23). 처음으로 기독교에 형상들이 들어온 것은 4세기 후반이며 그때에도 반대가 많았다. 현재 천주교회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형상을 많이 만들고 그것들에게 경배하면서 십계명의 두 번째 명령을 어기고 있다(출20:4-5; 32:4-5; 신4:15; 사40:18-31; 요4:23-24; 계22:8-9). ‘형상을 둔 방’(겔8:7-12)에는 이집트 신전의 벽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각종 우상숭배 그림이 벽에 그려져 있었다.
2009-05-12 16:28:46 | 관리자
고대의 형벌은 민족과 시대에 따라 또 범죄에 따라 크게 달랐다. 살인자를 사형시키는 것은 인류의 시작부터 영원토록 정착된 제도였으나 다만 가인의 경우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인해 사형이 면제 되었다(창4:14-15). 한편 홍수 이후에 사형 제도는 다시 확고히 세워졌고(창9:5-6) 광야에서도 확인되었으며(민35:9-34) 인류 사회 구석구석에서 널리 인정되었다.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사형 방법은 돌을 던져 죽이는 것이었으나(신13:9-10; 17:5; 요8:7)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목을 베는 방법(왕하10:6-8; 마14:8-12), 절벽의 바위에서 떨어뜨리는 방법(대하25:12; 눅4:29), 목을 매는 방법(수8:29; 에7:10), 불로 태우는 방법(단3:1-30), 몸을 찢어서 죽이는 방법(단2:5; 3:29; 히11:37), 바퀴가 달린 구조물에서 때려서 죽이는 방법(히11:35), 들짐승에게 내어주는 방법(단6:1-28; 고전15:32), 익사시키는 방법(마18:6), 십자가에서 죽이는 방법(요19:18) 등도 도입되었다. 가벼운 형벌에는 채찍질(레19:20; 고후11:24), 배상(출21:23-25; 신19:19), 투옥(대하16:10; 마4:12), 차꼬(행16:24), 유배(계1:9), 개인적인 고문(대하18:26; 사50:6; 마18:30; 히11:37) 등이 있다.
2009-05-12 16:28:16 | 관리자
피가 나오는 병(마9:20).
2009-05-12 16:27:44 | 관리자